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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승숙 다시배움 대표, “우울한 중년에게 취미는 감정 방패”
- 인생을 그림에 비유해보자. 전반기는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후반기는 물감으로 채색한다. 색을 칠할 때는 가끔 연필 선을 벗어나도 괜찮다. 선을 넘나들다 보면 때론 밑그림보다 더 아름다워지는 순간도 있으니까. 박승숙 다시배움 대표 또한 과거의 밑그림에 갇히지 않고 의도적 탈선(?)을 즐기는 인물이다. 그의 그림은 하나의 모자이크 조각이 되어 언젠가 동년배와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될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박승숙 대표가 지난해 1월 문을 연 ‘다시배움’은 중장년 세대를 위한 교육기관이다. 홈페이지에 소개된 프로그램 카테고리를 보면 미술, 극, 음악, 무용 등 예술 분야 교육이 이뤄짐을 알 수 있다. 1세대 미술치료사로 활약했던 박 대표의 이력 때문에 자연스러운 행보로 읽힐지 모르지만, 속사정을 들어보면 일종의 모험이다. 이 험난한 여정은 그가 돌연 퇴직을 자처하면서부터 시작됐다. “퇴직을 결심한 건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딸아이의 유학이 계기가 됐어요. 그동안 일 핑계로 엄마 노릇을 잘 못 했는데 그때라도 뒷바라지 좀 해보자 싶었죠. 일하는 내내 ‘시간 없어’, ‘바빠’라는 말을 달고 살았거든요. 그때부턴 돈이 아닌 시간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외엔 특별한 계획 없이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하던 일만 계속 하면 무슨 의미? 퇴직 후 박 대표는 시나리오를 쓰거나 랩을 배우는 등 그동안 전혀 경험하지 않은 분야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의욕을 갖고 이런저런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일상을 채워나갔지만, 그 끝엔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맴돌았다. “초반에는 젊은 세대와 함께하는 수업도 많이 나갔는데, 늘 ‘고참’, ‘왕언니’라는 수식어가 붙더라고요. 그런 상황이 몹시 불편했고, 어린 수강생들 눈치도 많이 봤어요. 때론 제 열정이 그들에게 위화감을 주기도 했죠. 존재 자체가 민폐라는 생각이 들고, 이제 변방으로 밀려난 나이가 됐구나 싶더군요. 그러다 결국 중장년 대상 기관들을 찾았는데, 역시나 제가 추구하는 바를 채울 순 없더라고요.” 평생직장을 강조하는 시대 흐름에 발맞춰 중장년 대상 기관들은 일자리 관련 프로그램을 확대하는 추세다. 박 대표도 경험 삼아 보람형 일자리에 참여해본 적이 있다. 취지나 내용은 훌륭했지만, 그에겐 여전히 마뜩잖게 느껴졌다. “몇몇 프로그램은 일종의 스펙 쌓기 식으로 흘러가더라고요. 참여자들도 과정을 음미하기보다 수료증 취득에 만족해하는 모습이었죠. 사실 일부 관리 기관은 성과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요. 제 결과물 역시 어딘가 중장년 관련 통계 수치에 머릿수로 더해졌겠죠. 물론 백세시대에 앞으로 50년은 더 일해야 한다는 걸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에요. 근데 한편으론 그게 좀 슬프더라고요. 그동안 돈벌이한다고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앞으로도 계속 일할 생각을 하라니 억울한 마음이 드는 거예요. 차라리 좀 덜 먹고 덜 쓰면서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다른 생각을 해보고 싶었어요. 어떤 반발심일 수 있지만, 가능한 한 먹고사는 문제와 동떨어진 일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렇게 퇴직 후 5년간의 방황 끝에 박 대표가 찾은 건 ‘예술’이었다. 흔히 ‘배고픈 예술가’라는 표현도 쓰이듯, 천부적인 재능이 없다면 당장 생계에 큰 도움을 얻기 힘든 분야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인생 후반전에 예술을 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크게 보면 전반전의 키워드 또한 예술이다. 달라진 점은 과거에는 예술을 매개로 ‘치료’를 했다면, 이제는 ‘교육’으로 풀어낸다는 것. 한 사람의 성장과 변화를 돕는다는 측면에서 볼 때 치료와 교육의 목표는 유사하다. 그렇다면 왜 박 대표는 전공인 치료가 아닌 교육을 택한 것일까? “치료는 제게 너무나 능숙하기 때문이에요. 잘하던 걸 계속 잘하는 건 후반생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어요. 전자동 전문성이랄까? 노력 없이도 줄줄 떠들 수 있고, 척하면 척 바로 해낼 수 있잖아요. 그럼 저는 계속 한쪽만 쓰는 사람이 되는 거고요. 그 노련함을 버려야 새로운 생각과 고민을 할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퇴직하고 이것저것 배우러 다닐 때도 일부러 초심자거나 무지한 분야만 골라서 간 거예요. 조금이라도 전문성이 발휘될 곳은 피했죠. 덕분에 더 많이 배우고 깨우칠 수 있었고, 그런 과정을 동년배들과 나누고 싶어졌어요. 그렇게 다시배움을 만들게 된 겁니다.” 역사상 가장 긴 중장년을 사는 세대 박 대표가 다시배움을 선보인 이유 중에는 부모의 영향도 있다. 그의 아버지는 단색화의 거장으로 잘 알려진 박서보 화백이다. 92세의 나이에도 꺼지지 않는 창작열을 불태우는 진정한 시대의 예술가다. 어머니 윤명숙 작가는 여든이 넘어 수필집을 펴내는 등 창작 활동으로 예술 뒷심을 발휘 중이다. 부모의 그런 의욕적인 삶의 태도는 박 대표에게 큰 영감을 줬다. “최근 어머니께서 ‘내 존재의 의미는 창작 하나밖에 없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노년기에 그런 결론을 내리셨다는 점에 깜짝 놀랐어요. 계속해서 글을 쓰려 하시고, 책을 붙들고 계시죠. 아버지께서도 지금 식사가 힘들 정도로 불편하신데도 여전히 붓을 놓지 않으세요. 두 분의모습을 보면 몸은 늙고 불편하지만 예술로 젊고 자유로워지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창작을 통해 여생을 일궈갈 중장년만의 공간도 필요하리라 여겼죠.” 중년 이후로는 부모와 함께 늙어가는 삶 속에서 더욱 배울 점이 많아졌다는 박 대표다. 한편으론 부모와 자식이 ‘나이 듦’이라는 공통점을 통해 만나는 이 상황이 반갑기도 하단다. 그는 이러한 세대 간 동행이 백세시대가 주는 축복 중 하나라고 말한다. “우리 부모 세대는 그 어느 때보다 긴 노년을 사는 분들이에요. 이미 중장년기는 과거 세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에서 지났는데 수명이 계속 늘어가는 상황이니까요. 비슷하게 저와 동년배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가장 긴 중장년기를 보내고 있죠. 지금 65세 이상은 노인 등 몇몇 기준이 있지만, 그 또한 점점 뒤로 늦춰지리라 봐요. 그렇게 우리의 중장년기는 더 길어질지도 몰라요.” 그는 어쩌면 지금보다 더 긴 중장년기와 노후를 보내게 될 후배 세대를 위해 더 혹독하게 현재를 깨우치고 알아가고자 한다. 그리고 그런 배움을 동년배들이 함께 해주길 바랐다. “저는 사회적인 사람이라서 이런 사안에 책임을 많이 느껴요. 퇴직 전까지는 그야말로 미친 듯이 일만 했는데, 다행히 그 덕에 노후 생계는 크게 고민하지 않을 정도가 됐어요. 대신 나 같은 사람이 그 외의 다른 고민을 해줘야죠. 근데 중장년들을 보면 그런 생각을 다 각개전투로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우왕좌왕하고 있고요.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생각을 모아야 한다고 봐요.” 박 대표는 중장년 교육기관을 꿈꾸며 ‘또래 만들기’에 주안점을 두기도 했다. 단순히 친목 도모를 위한 건 아니다. 그보다는 동료의식에 가깝다. 때문에 다시배움 프로그램의 과제는 개인보다는 협업 프로젝트 형태로 이뤄진다. “상황적으로 비슷한 고민을 하지만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아온 이들이 동료로 뭉치는 거죠. 저희는 ‘창작 집단’이라고 하는데, 함께 창작물을 만들다 보면 계속 대화하고 시선을 맞춰보는 작업을 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때론 자연스럽게 도전받는 기회가 생기고, 경청하고 수용하며 집단 안에서 자신을 객관화하고 돌아보는 기회도 생기죠. 사실 다시배움의 최종 목표는 공동체 형성인데요. 지금 같은 양극화 시대에 공동체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이웃? 종교? 새로운 사회를 꿈꾼다면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그러려면 남다른 사고를 해야 하는데, 늘 해오던 일 안에서는 같은 답밖에 안 나오죠. 그런 점에서 예술이라는 낯선 경험은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답을 줄 수 있다고 봐요. 어쩌면 그게 정답에 가까울지도 모르고요.” 우울은 원동력, 취미는 감정 방패 공동체에 대한 로망은 가득하지만, 기대감은 ‘0’에 가깝다고 진단하는 박 대표다. 자신감 결여보다는 현실적인 처지가 그러하다. 코로나19가 극성이던 시기에 다시배움을 열고, 어느덧 1년 차. 박 대표는 “생각만큼 잘 되지는 않고 있다. 실수도 많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며 솔직한 심경을 들려줬다. 어찌 보면 수순일지도 모른다. 가보지 않은 길은 시행착오가 필요한 법. 그는 자신의 ‘우울증’을 원동력으로 삼고 있다. “세상이 참 우울해요. 너무나 슬퍼요. 그러나 역설적으로 제겐 그 우울함이 힘이 되고 있어요. 이렇게 시행착오를 겪을지언정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면 그 우울함을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 같아요. 정확히는 우울을 벗어나기 위한 과정이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셈이죠. 그런 무력감을 갖는 분들이 적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면 좀 움직이셨으면 좋겠어요. 아시다시피 우리에겐 아주 긴 세월이 남았잖아요. 지금 주저앉아 있긴 너무 이릅니다. 더 크게, 더 멀리 바라보고 현재의 고민을 함께 해결해가면 좋겠어요.” 그는 동년배를 일컬어 ‘늙은이’가 아닌 ‘늙는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앞으로는 계속 늙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서글픔도 있지만, 잘 늙어가자는 응원도 담긴 듯했다. 아무렇게나가 아닌 제대로 나이 들고 싶다는 박 대표는 훈련하듯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노력한다. 심리치료로 오랜 시간 타인을 상담해온 그이지만 나이 들수록 제어가 잘 되지 않는 감정이 하나 있단다. 바로 ‘서운함’이다. “예전에는 감정의 종류도 굉장히 다양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의 카테고리로 뭉뚱그려져서 나타나더라고요. 나중엔 카테고리도 몇 개 안 남게 되는데, 그중 가장 큰 게 ‘서운함’이더군요. 거기엔 슬픔, 분노, 절망 등 웬만한 부정적인 감정이 다 들어가요. 중년 이후로 서운함은 커지고, 예전처럼 감정의 꼬리가 잘 잘라지지도 않더라고요. 정말이지 이러다 나중엔 모든 감정 중에 서운함만 남을 것 같아요.(웃음)” 그런 서운함을 온전히 사라지게 하기는 어렵다는 게 박 대표의 결론이다. 그렇다고 방치해두는 것은 아니다. 조금 뒤로 가려둘 뿐. 그럼 무엇으로 가리느냐. 그는 취미를 전진 배치하는 전략을 세웠다. “이런 감정은 개인 문제라기보다는 노화로 인한 뇌과학의 영역이라고 봐요. 즉 언젠가 누구나 겪는 보편적인 현상이죠. 차이는 대응에 있어요. 제 경우엔 그 서운함을 안고 가지만, 거기에 다른 무언가를 더해 완화하는 쪽이에요. 내가 몰두하고 즐겁고 기분 좋은 무언가를 찾아 계속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거죠. 그런 서운함을 이길 방법은 취미뿐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하는 예술도 그 일환이 될 수 있겠죠. 여전히 많은 분들이 취미나 예술이 돈이 되느냐고 반문하시는데요. 물론 직업으로는 어려울 수 있지만 진로는 된다고 봅니다. 돈을 벌고 안 벌고를 떠나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알아야만 노후의 밑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까요.”
- 2023-03-28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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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감 통해 중장년 건강ㆍ정서 도움 주는 반려식물
- 인간은 식물을 가까이하면 좋다. 심신 안정, 건강 증진, 공기 정화 등 이점은 다양하다. 그렇다면 식물의 입장은 어떨까? 내게 좋은 식물이면서, 나 또한 식물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면 반려식물과의 동행을 시작해도 좋겠다. 도움말 신상옥 이화여대 글로벌미래평생교육원 원예심리 지도교수 화분 하나 장만했다고 반려식물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냥 놓아둔 채로 물만 주는 행위는 무미건조하다. 어떻게 해야 반려식물로 거듭날 수 있을까? 신상옥 이화여대 글로벌미래평생교육원 원예심리 지도교수(한국원예치료사협회장)를 통해 알아보자. [씨앗 단계] 반려식물 고르기 반려식물이란 ‘인간과 짝이 되어 서로 교감을 나누며 살아가는 특정한 식물’(화훼학, 월드사이언스)을 뜻한다. 여기서 말하는 특정한 식물은 ‘특정 종’(種)보다는 키우는 이가 느끼는 ‘특별한 마음’이라고 볼 수 있다. 명칭 때문에 반려동물과 여러모로 비교되는데, 감정을 교류하며 일상을 함께한다는 맥락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야생 환경이나 동물원에 있는 동물을 반려동물이라 하지 않듯, 반려식물 또한 개인이 생활공간 내에서 책임감을 갖고 키워나가는 존재인 셈이다. 따라서 원예 활동은 기본이다. 다만 식용으로 하거나, 인테리어나 공기 정화 등 외적 효과만 목적으로 기르는 것은 반려식물로 보기 어렵다. 가장 중요한 건 식물과의 ‘교감’이다. 따라서 감정적 교류를 이루며 키워간다면 무엇이든 반려식물로 삼아볼 수 있다. [Tip] 반려식물과 교감하려면 성장 과정을 오래 관찰할수록 좋다. 단기간 키우는 식용작물이나 한해살이보다는 지속성을 지닌 종을 고르자. 최소 2~3년 이상 키우며 번식이 가능해 주변에도 나눈다면 금상첨화다. 테이블야자, 호야, 개운죽, 행운목 등이 추천할 만하다. [새싹 단계] 애착 심어두기 신상옥 교수는 반려식물이 지닌 의미를 언급하며 ‘애착식물’이라고도 표현했다. 애착이란 특별한 인연이나 사연 등을 통해 생겨나는 감정이다. 따라서 반려식물에는 남다른 의미가 담기면 좋다. 손주가 어버이날 선물로 사준 화분, 항암 치료를 마친 기념으로 산 나무, 사별 후 아내를 그리며 심은 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렇다고 집에 있는 모든 식물에 의미를 두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다. 너무 많은 화분을 두면 관리하기 버겁고, 자칫 반려식물이 스트레스로 다가와 역효과가 생기기 때문이다. 특히 가드닝 초보자라면 화분 하나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추후 관리가 잘 되고 자신감이 붙는다면 조금씩 늘려가도록 하자. 이미 집에 식물이 너무 많은 상태라면 난(蘭)류, 다육이류 등 특정 그룹 형태로 의미를 부여해도 괜찮다. [꽃봉오리 단계] 교감으로 꽃피우기 식물과의 교감은 사람, 동물처럼 상호작용이 즉각적이지 않아 자칫 어렵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반응이 느릴 뿐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음 몇 가지 방법을 실천해보자. 이름 불러주기 반려식물에게도 반려동물처럼 특별한 애칭을 붙여본다. 가령 “초록아(애칭 예시) 굿모닝” 하며 아침 인사를 하거나 물을 줄 때도 “초록아 많이 먹고 쑥쑥 크렴”이라며 대화를 시도해보자. 반려식물의 이름과 사연 등을 적은 작은 팻말을 꽂아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오감(五感) 일깨우기 반려식물은 오감을 모두 활용해 교감이 가능하다. 바람에 사부작거리는 이파리 소리(청각), 보드랍고 촉촉한 꽃잎(촉각), 빨갛고 탐스럽게 맺은 열매(시각), 은은하게 번지는 꽃향기(후각), 말린 잎과 꽃으로 만든 차 한 모금(미각). 모든 감각을 열고 반려식물을 대하다 보면 더욱 충만하고 깊은 교감을 이룰 것이다. 생장 리듬 맞춰가기 대부분 식물은 천천히 자라나기 때문에 인내심이 요구된다. 오늘 비료를 줬다고 내일 꽃을 피우지 않듯, 무언가를 했더라도 당장은 반응이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조급함보다는 느긋한 마음으로 식물의 생장을 지켜보고 응원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식물을 통해 얻는 심리적·정신적 효과 또한 천천히 스미듯 나타나니, 생장 리듬에 맞춰가려 노력해보자. 식물일지 작성하기 맨 처음 반려식물을 들인 뒤 기본적인 정보를 비롯해 이후 성장에 따른 일지를 기록하면 교감에 도움이 된다. 신 교수는 “식물은 성장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하루하루 변화를 기록하기보다는 특별한 이벤트가 있을 때 상황과 더불어 자신의 감정을 남기면 좋다”고 조언했다. 가령 ‘기다리던 꽃망울이 피어나니 내 마음도 활짝 피어난 듯하다’, ‘오늘 하루 종일 힘들었는데 새순 돋아난 걸 보니 기운이 솟아난다’는 식이다. 가능하다면 그림일기처럼 반려식물을 그려 넣거나 사진을 찍어 붙여도 좋다. ‘식멍’ 때리기 이런저런 방법들을 실천하기 어렵다면 식물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괜찮다. 최근 들어 ‘불멍’, ‘물멍’ 등 특정 현상이나 사물을 멍하게 바라보며 심리적 안정을 취하는 것이 유행이다.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이런 ‘멍때리기’가 때론 일상의 쉼표 역할을 한다. 반려식물 또한 그러한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신 교수는 “이제는 식멍의 시대”라며 “식물이 지닌 녹색은 편안함과 안정감을 준다. 가만히 들여다보는 과정에서도 스트레스와 피로 해소, 두뇌 활성화 등 ‘녹색 효과’를 경험할 수 있다. 오래 주시하면 식물의 미세한 성장과 변화도 발견하게 된다. 이때 느끼는 경이로움과 즐거움은 덤”이라고 말했다. [열매 단계]| 나의 삶 관조하기 씨앗이 발아해 새싹이 돋아나고 꽃과 열매를 맺지만, 병충해를 입으면 결국 죽음과 동시에 다시 씨앗으로 남는다. 이것이 식물의 생로병사(生老病死)다. 이러한 점에 착안해 자신의 인생과 내면을 들여다보고 인문학적 성찰을 해볼 수 있다. 내가 살면서 꽃을 피웠던 때는 언제인가, 어떤 결실을 맺었는가, 이 삶의 끝에 어떤 씨앗을 남길 수 있겠는가 등을 가만히 생각해보자. 때론 반려식물을 통해 삶의 지혜를 터득하기도 하고, 잔잔한 위로를 얻기도 한다. 다만 지나치게 감정을 이입하거나 의존하는 것은 경계하자. 신 교수는 “반려동물에 비해 반려식물의 죽음은 상실감이나 슬픔이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지만, 종종 이를 강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다. 식물의 생로병사를 이해하되 꽃이 떨어졌다고 우울해하거나, 나무가 죽었다고 삶의 희망을 잃는 등 심하게 감정을 투여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조언했다.
- 2023-03-07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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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값 안 오를 농지 찾아라” 귀촌 중년이 고민한 이유
- 전북 장수군의 깊고 외진 산골에 찻집 하나 있다. 산은 첩첩, 적막은 겹겹. 강원도 오지를 닮은 곳이다. 주인장 유성국(58, 긴물찻집 사장)은 부산에서 살았던 20년 전, 그러니까 30대 후반 나이에 이 산골로 귀농했다. 소소한 농사와 더불어 한세상 물처럼 그저 그렇게 흐르고 싶어서였다. 어쩌다 보니 지금으로부터 5년여 전엔 찻집을 차리게 됐지만, 그의 진정한 관심은 농사나 돈보다 마음에 여유를 집어넣을 수 있는 방법의 강구에 있다. 그가 가진 이상은 평범치 않다. 가급적 게으르게 사는 데에서 유토피아를 찾는 게 아닌가. 게으르게 살지 않고 어떻게 삶을 견딜 수 있겠어? 아마도 이게 유성국의 푯대다. 미리 말해둘 게 있다. 유성국의 부인 박혜정(50) 역시 동류라는 것. 이들은 불교 관련 사회봉사단체에서 만나 부부 연을 맺었다. 혼인 이후 오랫동안 절밥을 먹고 살기도 했다. 둘 사이엔 자식이 없어 홀가분하다. 따라서 부부간의 유대와 공감의 폭이 한결 넓다. 어떻게 하면 게으르게 살 수 있을까, 더 게으르게 살기 위해 어떤 창의력을 발동해야 할까,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는 게 주로 그 문제였다. 산골짝으로의 귀농은 하나의 대안으로 고안됐다. 귀농지 물색엔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지. “귀농할 곳의 조건 몇 가지를 전제하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자연이 살아 있는 곳, 식수원이 풍부한 곳, 축사나 농원이 전혀 없는 곳, 땅값이 오를 가능성이 제로인 곳 등을 염두에 두고서. 차후 너덧 가구가 어울려 생태농업을 할 수 있는 곳이면 더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다 좋은 전제 조건인데, 땅값 안 오를 곳을 찾은 이유는 뭘까? “도시를 벗어나 시골로 가고 싶었던 건 번다함을 피해 살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만약 귀농지에 개발 바람이 불어 관광지가 된다거나 하면 낭패일 수밖에. 별안간 땅값이 오르고 동네가 시끄러워지면 우리는 팔고 나가야 한다. 굳이 그런 소동에 휘말릴 일은 아니다. 고즈넉한 곳에서 풍파 없이 안정적으로 살고 싶었던 거다.” 여긴 상당히 깊고 은밀하고 푸근한 산골이다. 전제 조건들을 충족한 곳인가? “용케 잘 찾아낸 터다. 산 많은 장수군 안에서도 외진 곳이다. 과거엔 천주교도들이 피난해 살았던 마을이다. 우리가 들어왔을 땐 사람 하나 살지 않았다.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 몇 채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조용히 지낼 만한 환경이었지. 문제는 가진 게 없다는 거였다. 거의 빈손으로 들어왔으니까.” 몸을 눕힐 변변한 집이 없었고, 새로 지을 여건도 아니었다? “원래 있었던 폐가를 고쳐 쓸 수밖에 없었다. 형체만 남다시피 한 본채와 행랑채, 그리고 창고 하나가 있었는데 우리가 대충 수리해 입주했다.” 생계 문제 구상은 어떻게 했나? “애초 특별한 구상 없이 귀농했다. 빗나가기 십상인 이론적 구상보다 뭐든 현실에 부닥쳐 처리해나가는 게 내 스타일이다. 물론 큰 그림은 있었지. 농사로 자급자족하자는 거. 그게 쉬울까, 어려울까, 아내나 나나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둘 다 30대 시절이었으니까 뭘 하든 굶주릴 일은 없을 거라는 자신감 같은 게 있었던 셈이지.” 자급자족이 되던가? “그게 생각처럼 쉽진 않더라.(웃음) 농사 경험 없지, 농기계 없지, 외딴 곳이라 주변에 물어볼 농가도 없지, 멧돼지들이 털어가지, 4년여간 시행착오가 많았다. 오미자 농사도 지어봤고, 산에서 고사리를 뜯어 시장에 냈지만 돈 만들기가 어려웠다.” 야생차로 활로 찾아 유성국의 거처는 해발 540m 고지에 있다. 보이는 것의 절반은 산이요, 나머지 절반은 하늘이다. 그러니 순수한 자연의 도가니다. 가만히 서 있어도 사방에서 숲의 에테르가 다가와 가슴의 잡티를 몽글몽글 녹인다. 밤에 잠자리에 들 때면 창으로 달빛이 밀려들 것이다. 이렇게 참신한 곳에서 일락(逸樂)을 누린다면 그게 낙원이겠다. 그러나 문제는 밥이다. 인간이 풀만 뜯어먹고도 끄떡없는 초식동물이 아닌 건 얼마나 불운한가. 농사를 통한 자급자족으로 소박한 생활을 지속하고자 했던 유성국의 실험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방향 전환이 필요했다. 최소한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뭔가 방책을 찾아야 했는데, 그게 차 만들어 팔기였다. “우리가 절 생활을 꽤 했다. 날마다 녹차를 마시는 절에서 제다 방법을 배워둔 게 있었다. 그래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차로 상황을 개선하기로 했지. 산에 올라가 갖가지 잎을 채취해 야생차를 만들어 ‘한살림’에 납품했다.” 차로 활로를 찾았다? “비로소 먹고살 만했다. 전에 비하자면 여유로울 정도로.” 경제 문제 외에도 온갖 난제와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게 산중 생활이다. 애환이 많았겠지? “자급자족을 위해 나름 노력했지만 괴로울 건 없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살았다. 현실은 물론 미래에 대해서도 별 근심 걱정 없이 지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게으르게 살 수 있을까? 늘 연구한 게 그랬다.(웃음)” 너무 바쁘게 살면 무슨 재미? 그러나 나무늘보도 아니면서 늘 게으르면 그 역시 싱거워질 것 같다. 게을러서 좋은 건 뭐지? “게으르게 사는 것 자체가 좋은 거지, 뭐 있겠나? 게으르지 않게 살아도 좋은 거 아니고? “그야 그렇다. 세상은 부지런한 사람들로 꽉 차 있다. 그들은 나처럼 살기 어려울 테지만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겠나? 각자의 방식을 존중하면 그만이지 않을까?” 아마도 대부분 아내들은 게으른 남편을 견디기 힘들어할 거다. 방출하고 싶겠지.(웃음) 당신의 부인은 어떤가? “아내나 나나 게으름을, 한량 기를 타고났다. 차이가 있다면 내가 더 게으르다는 점이다. 아내는 일면 부지런한 천성도 있으니까. 하지만 아내 역시 게으름을 지향한다. 게으름의 가치를 공유하며 살아온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뭘 해도 제대로 되는 게 별로 없다.(웃음)” 가령 어떤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지? “우리가 고쳐 지은 집을 두고 남들은 운치 있다고 하지만 사실 부실공사에 불과하다. 게으르게 짓다 보니 그리됐다.” 뭐든 반드시 제대로 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너무 쥐어짜는 최선을 다하지 않고도 자족할 수 있다면 그 역시 제대로 된 셈이겠지. “그렇지. 그런데 알고 보면 사실 인생사에서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없다. 중도(中道)를 놓치지 않으려는 생각만 품고 살아도 가상하겠지.” 나는 오늘 심상치 않은 종족을 만났다. 부부가 공히 게으름을 옹호하고 구현하는 경우가 어디 흔하던가.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며 귀농한 사람이 드물진 않다. 그러나 다들 새벽부터 깨어나 지지구재재구 노래하는 참새처럼 바지런하다. 근면을 중심에 놓지 않고 귀농 생활을 지속하긴 불가능하다. 그런데 부지런히 농사를 짓다 보면 몸에 관절염이 방문한다. 마음자리엔 긴장과 불안이 서성인다. 손에 쥐면 쥘수록 허기가 커지듯이, 일을 하면 할수록 일이 많아지는 게 인생의 아이러니다. 부지런하거나 게으르거나, 한 생은 어차피 유한한 시간의 강물을 흘러가다 시든다. 인생의 즐거운 열매를 맛보는 데 어느 쪽이 더 유리한 걸까. 수해로 집이 떠내려가다 유성국의 게으름엔 딴 목적이 없다. 게으름 자체가 목적이다. 생긴 천성대로 살아 만족하기. 자신을 방목해 모든 억압의 횡포를 수포로 돌려놓기. 그가 보유한 생태 경관엔 안으로 맺힌 게 없을지도. 그 무엇에 허둥대거나 시달릴 일이 없을지도. 게으른 처신엔 의외로 리스크가 적다. 게으름의 대가에겐 급박한 일도 급박할 게 없다. 그러나 먹고 자는 집이 어느 순간 홀라당 날아간다면? 이땐 도리 없다. 부리나케 재건해야 한다. 유성국이 그랬다. 귀농 5년 차에 들이닥친 수해로 집이 떠내려가 다시 지어야만 했던 것. “창고만 간신히 남고 다 떠내려갔다. 창고에도 진흙이 1m 두께로 쌓였더라. 흙을 걷어낸 뒤 합판을 깔고 잠을 자며 집을 복구했다.” 귀농 뒤 만난 최대의 고난이었겠다. 괴롭지 않았나? “오히려 행복했다. 어차피 새로 지어야 할 집이었는데 게으른 우린 미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자연이 한 방 딱 쳐주자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게 아닌가. 변화에 대한 갈증도 있었는데 수해가 길을 열어줬다. 이렇게 우린 자연에 업혀 간다.” 외진 이 산중에 찻집을 차렸다. 장사가 될 가망성이 있다 보았나? “작정하고 차린 건 아니다. 원래 우리 집엔 친척이나 친구, 차를 즐기는 사람 등 놀러 오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쌀이나 고기를 사왔고, 우리는 차와 자연환경을 그들에게 제공했다. 일종의 물물교환이었는데, 형편이 어려웠던 한때 이게 큰 도움이 됐다. 그런데 사람들이 점점 많이 찾아와 서비스하기가 힘들어지더라. 그래 무인 찻집을 염두에 두고 창고를 다듬어 다실을 만들었다. 이게 본격적인 찻집의 출발점이었다.” 유성국 내외가 손수 짓거나 다듬은 작은 집과 더 작은 다실은 치레 없이 순박하다. 야트막한 지붕을 보면 산을 향해 꾸벅 절하는 것 같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속기가 씻긴다. 자연 속에 자연스레 들어앉아 누추한 게 없다. 이게 사람들의 구미에 맞았나? 찻집을 찾아오는 이들이 많다. “이곳의 자연경관은 그저 평범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찻집과 풍광을 즐기는 손님이 많다. 다녀간 이들이 SNS에 ‘리얼 시골에 있는 카페’라는 식의 리뷰를 쓰면서 시나브로 조금씩 알려지는 것 같다.” 사업을 키울 생각은 없나? “우린 우리가 사는 터가 지닌 기운에 순응하며 살았다. 찻집 역시 터와 자연이 정해준 방향이라 생각한다. 확장 욕구는 전혀 없다. 게으르게, 고즈넉하게, 한적하게 살아온 페이스를 지속하고 싶다.” 차갑고 팽팽한 게 생활이다. 냅다 뛰어라 채근하는 게 삶이다. 그러나 게으름을 축으로 살아도 이렇게 무탈하다. 느린 생각과 느린 마음과 느린 동작은 어쩌면 생활의 견인차? 유성국이 주는 귀농 Tip •귀농은 정서적 차원에서 보면 흙으로, 모태로 돌아가는 행위다. 얼마든지 권장할 만한 일이다. •농사로 돈을 벌려면 가급적 젊을 때 하라. 너무 나이 들어서는 어렵다. 뭐 하나 만만치 않은 게 농업이기 때문이다. •귀농지 물색을 위해 많은 곳을 답사하자. 현장을 돌아다니는 과정에서 자신의 한계와 가능성을 점검할 수 있어서다. •귀농의 트렌드가 바뀌고 있다. 농사만 길이 아니다. 도시의 직업에서 쌓은 경륜을 활용,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의 사업을 창출하자. •전 재산을 투입하는 귀농은 매우 위험하니, 이 점 유의하자. •굳이 집을 새로 지을 필요 없다. 헌 집을 고쳐 쓰는 게 더 유익하다.
- 2023-01-30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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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성된 힙함이 있다… 필름 위에 올린 ‘노인의 멋’
- 세상은 늙음을 가리켜 ‘지루하고 멋지지 않다’고 말한다. 탄성을 자아내는 멋진 패션은 오롯이 젊음의 몫인 양 분리한다. 영어 문화권에서는 유행에 뒤떨어진, 구식의 무언가를 칭할 때 ‘Old-fashioned’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다. 여기에 젊은 작가가 반기를 들었다. 김동현(30) 사진작가는 노인 ‘스트리트 패션’을 필름 사진에 담았다. 그의 사진을 접하면 감탄하게 될 것이다. ‘참 멋있다.’ 스트리트 패션(Street Fashion)이란 단어 뜻 그대로 길거리 사람들의 패션이다. 젊은 세대의 유행에서 시작되는 영역이라, 수많은 잡지를 장식한 스트리트 패션 사진에는 옷차림에 신경 쓴 청년들이 가득했다. 노인과 묶어 생각하는 경우는 없었다. 김동현 작가는 2019년 동묘에서 우연히 그럴 기회를 얻었다. 가볍게 카메라를 들고 나섰다가 멋진 할아버지를 찍게 된 것. 그는 젊은 멋쟁이 사진을 찍던 때와는 다른 종류의 떨림을 느꼈다고 했다. 그렇게 시니어의 스트리트 패션을 주구장창 찍는 전문 사진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국내에선 단발성 프로젝트를 제외하면 그가 최초다. ‘나만 찍을 수 있다’는 확신 작업 반경은 동묘에서 남대문 인근, 인사동까지다. 50대에서 80대 사이의 멋쟁이 어르신을 발견하면 슬금슬금 다가간다. 인사와 함께 명함을 건넨다. “저는 이런 사진을 찍는 사람인데, 선생님 사진을 멋지게 찍어드리고 싶습니다.”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려둔 사진 중 피사체로 점찍은 분이 좋아할 만한 사진을 골라 보여드린다. 운 좋게 허락이 떨어지면 신중히 촬영을 한다. 촬영 후에는 초상권 사용 허가와 출판에 대한 동의를 무조건 받는다. 혹 촬영한 다음이라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하면 사진은 폐기한다. 그의 연장은 필름 카메라다. 필름 위에 사진 36장을 다 찍고 현상과 인화 과정을 거쳐야만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지만 계속해서 필름 카메라를 사용할 생각이다. 필름 카메라 사진의 투박함이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인 멋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 같아서다. 인화한 사진은 선물하거나, 사진 파일을 카카오톡 메시지로 보낸다. 이 모든 과정이 사진 촬영의 과정이자 소통이라고 생각하기에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 덕분에 카카오톡 친구 목록에는 촬영 날짜와 ‘디올 어머님’, ‘힙스터 아버님’, ‘부족장 아버님’ 같은 별칭으로 기록된 멋쟁이 노인들이 빼곡하다. 가끔은 ‘오늘 옷을 멋지게 입었는데 촬영하러 나오지 않느냐’는 연락을 받기도 한다. “2021년에 유명 패션 잡지 ‘보그 코리아’에서 연락을 받고 작업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제 자신을 갈아 넣다시피 작업했어요. 걸어 다니는 그 잠깐 사이에 피사체를 놓칠까봐 자전거를 타고 다녔죠. 동묘앞역에서 시작해 남대문, 청계천, 신세계백화점 본점 앞 사거리를 매일같이 다녔어요. 마땅한 벌이가 없던 때라 개인적으로 많이 힘들었지만, ‘200번 거절당하면 10장은 건지겠지’라는 생각으로 매일 거리에 나갔어요. ‘이 일은 나만 할 수 있는 일이다’라고 속으로 되뇌면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죠.” 이렇다 할 경력이 없던 그가 시니어 스트리트 패션 전문 사진작가로 거듭나는 과정은 고난의 길 그 자체였다. 건설 현장에서 막일을 하고, 동대문 창고에서 짐을 날랐다. 그렇게 번 돈을 모두 촬영하는 데 썼다. 하지만 고생스러운 촬영을 거듭할수록 그에게는 확신이 생겼다. 이런 사진을 ‘나만큼 노력해서 찍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확신, 인스타그램 피드를 채워가는 결과물에 자신감이 붙었기 때문이다. 유명인의 사진 몇 장으로 동묘가 한순간 ‘힙’의 성지로 재탄생하는 것을 지켜보며 다시금 확신을 얻었다. 2018년 세계적인 디자이너 키코 코스타디노브가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가 인스타그램에 직접 찍은 동묘의 어르신들 사진 몇 장과 ‘세계에서 가장 멋진 거리’(best street in the world)라고 적어 올리자 언론이 해당 소식을 일제히 퍼 날랐다. 그렇게 동묘는 새로운 패션의 성지로, 노인의 패션이 ‘힙’한 것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동묘는 ‘고루한 노인들만 모여 있는 동네’이고, 그곳의 패션은 ‘멋지지 않은 것’이었어요. 그런데 낯선 거리를 흥미롭게 여겼던 유명한 외국인의 게시글 하나로 인식이 한순간에 뒤집혔죠.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생각했어요. 이 사진을 계속 찍다 보면 나도, 내 작업물도 언젠가 빛을 보겠구나.” 3년이 넘어가는 요즘도 운이 좋아야 하루에 서너 명의 어르신을 찍는다. 주말 내내 사진 한 장 못 건질 때도 있다. 스트리트 패션 사진의 특성상 처음 보는 일반인을 붙들고 사진 촬영을 해야 하기 때문에 허탕 치는 날이 많다. 하지만 김동현 작가는 굴하지 않고 서울의 멋쟁이 노인들을 찾아 주말마다 거리로 나선다. 젊음은 따라 할 수 없는 ‘멋’ 그가 피사체를 선정하는 기준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젊은 사람도 공감 가능한 스타일(왼쪽 사진)이거나 스타일에 신경 썼다는 것이 느껴질 때(중간 사진), 혹은 독특하고 뚜렷한 스타일이 있다면(오른쪽 사진) 섭외를 시도한다. 세 번째는 스타일만큼 성격이나 주관이 단단한 분들이 많다. 맷집과 시간을 무기로 내세우는, 수천 번 거절당해본 김 작가도 섭외하기 만만치 않다. 하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은 절대 시도하지 않을 천연색 정장, 과감한 단청 무늬 티셔츠 차림은 작가로서 가장 욕심나는 피사체다. 또 한 번 거절당할 각오를 하며 명함을 내밀 수밖에. 젊은 사람 눈에도 멋있어 보이고, 누가 봐도 신경 썼음이 느껴지는 옷차림도 마찬가지다. 거울 앞에서 고민했을 모습이 그려지면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어떤 양말을 신을지’, 혹은 ‘오늘 입은 옷에는 어떤 형태의 모자를 써야 좋을지’. 웬만한 20대보다 옷 잘 입는 어르신들을 수두룩하게 만난 그로서는 나이 듦으로 멋의 유무를 구분 짓는 사회가 잘못됐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그는 나이 듦에 관계없이 자신만의 태도를 유지하는 어른을 존경한다. 그래서인지 6000장이 넘는 사진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옷에 대한 태도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추한 건 아닐까. 나이가 들면 멋짐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 당당한 자세를 취한 노인들의 사진은 공연한 걱정을 지운다. 멋짐은 나이가 아니라 당당한 태도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제 사진 속 어르신들은 지금보다 힘든 시절에도 옷차림에 대한 고민을 거듭한 분들이에요. 지금보다 패션을 등한시하던 시대, 남들과 다르면 눈총을 받던 시대를 살면서도 다양한 시도를 해왔던 거죠. 그건 노인만이 가질 수 있는 멋이에요. 젊은 사람은 옷을 똑같이 따라 입는다 해도 따라갈 수 없죠. 옷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거의 반평생 패션에 진심인 분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어요.” 3년, 6000장의 멋, 그 이상을 위하여 그는 어릴 적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자신의 패션 세계를 개척해나갔던 친할머니 덕분이다. 김동현 작가의 친할머니는 ‘교통비를 아끼려 2km를 걸어 다니더라도 고급 모피 코트를 사서 입을 줄 아시는 분’이었다. 작은 돈은 아껴도 옷은 좋은 것을 입고 다녀야 한다고 이르던 멋진 할머니 덕분에 옷을 챙겨 입는 즐거움을 일찍이 깨달았다. 하지만 미디어는 노인을 지루하고 추한 존재로 그려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항 없이 그 이미지를 받아들였다. 김동현 작가가 자라면서 보고 겪은 것과 달랐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고, 반박하고 싶었다. “사회에서 가장 젊다고 여겨지는 영역인 패션 산업을 이끄는 건 나이 든 사람들이에요. 실제로 명품 브랜드의 수장, 디자이너들 대다수가 40대 이상의 중장년이죠.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명품 컬렉션을 발표하고 있어요. 우리는 젊은 사람이 입는 옷을 멋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옷은 나이 든 사람이 디자인한 결과물이에요. 그런데도 패션은 젊음의 것이라고 여기는 세상이 이상하지 않나요?” 그래서 누가 봐도 멋있다고 느낄 사진을 찍었다. ‘멋’(mut_jpg)이라는 직관적인 이름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짤막한 대화를 갈무리한 글과 함께 사진을 쌓았다. 전 세계 사람들이 우리나라 노인이 멋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그를 찾는 사람들, 사진의 좋아요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동조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걸 보면서 그는 뿌듯함을 느낀다. 지난해 5월 그는 첫 사진집 ‘멋’(MUT : the fasion of Seoul)을 냈다. 2019년부터 3년간 촬영한 약 6000장의 사진 중 400여 장을 추려서 책으로 출판했다. 사진집에는 한국어와 영어가 함께 쓰였다. 한국의 시니어 패션을 세계에 알리고자 하는 김동현 작가의 목표가 반영된 것. 책을 제작하기 위해 한 달간 크라우드 펀딩을 열었는데, 목표액인 200만 원을 훌쩍 넘긴 2225만 원이 모였다. 책을 내고 나서는 언론사의 인터뷰 요청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영국 ‘가디언’지가 그의 이야기와 사진을 취재해 갔고, 지난 11월에는 영국 TV 방송사 채널5의 다큐멘터리에 소개돼 우리나라의 시니어 패션을 직접 알리기도 했다. 그의 꿈은 현대 패션사(史)에 이름 석 자를 남기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그의 사진과 ‘멋 작가’를 알리기 위해 모든 인터뷰에 응했지만, 앞으로는 보다 더 작업에 집중하려 한다. 지난해에는 해외 출판 에이전시와 출판 계약을 맺었다. 올해 안에 ‘멋’ 사진집을 전 세계에 선보이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시니어 헤어스타일 아카이빙 북 제작을 위한 촬영도 동시에 진행 중이다. 그가 프레임에 담는 ‘동묘 스타일’에 세계가 반할 날이 머지않았다.
- 2023-01-26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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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인에 대한 그리움 기술로 채워… ‘너를 만났다’ PD가 밝힌 뒷이야기
- ‘너를 만났다’는 김종우 PD가 만든 국내 최초의 가상현실(VR) 휴먼 다큐멘터리다. 하늘나라로 떠난 사람을 기술로 구현해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과 가상현실 속에서 다시 만나게 하고, 세상에 삶과 죽음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 프로그램과 같은 제목의 신간 ‘너를 만났다’는 인간적인 시선과 과학기술의 접목을 통해 대중의 마음을 움직인 김 PD의 속사정을 담았다. 김종우 PD는 21년 차 골수 다큐멘터리 제작자다. MBC 간판 교양 프로그램 ‘불만제로’, ‘PD수첩’에 참여했으며, 2008년 고시원 화재 사건의 피해자 이야기 ‘아무도 묻지 않은 죽음’, 쌍용차 사태를 다룬 ‘타인의 정리해고’, 전 인류에게 닥친 위기를 암시한 ‘기후의 반란’ 등 단순한 흥미에 그치지 않고 사회를 바른 시각으로 해석하는 영상을 만들었다. 그의 대표작 ‘너를 만났다’는 누군가의 죽음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그리움에 관한 이야기다. 제작 기간은 1년 남짓. 제작진들은 남은 사진과 영상, 유가족의 기억을 조합해 고인의 모습을 구현하고, 좋아했던 물건들로 채운 가상공간을 조성한다. 체험자는 HMD(체험을 위해 머리에 장착하는 기기)를 쓰고 가상현실 속에서 마음에 담아뒀던 말들을 다시금 읊조린다. 너의 세상과 나의 세상, 경계를 넘다 희귀병으로 7세에 세상을 떠난 딸 강나연 양과 어머니 장지성 씨의 만남을 담은 시즌1은 2020년 방영 후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공감과 반응을 보냈다. 관련 영상은 유튜브에서 조회수 3300만 회를 넘기며 꾸준히 회자되고 있다. 아이의 뼛가루를 담은 목걸이를 항상 하고 다니고, 가족끼리 어딜 가든 사진을 들고 다니며 ‘너랑 같이 왔다’고 속삭이는 엄마. 김 PD는 비록 가상의 상황이었지만 장지성 씨가 한순간이라도 웃어서 좋았다고 말한다. “‘세상을 떠난 가족을 다시 만난다면?’이라는 어렴풋한 상상에서 출발했습니다. 누군가의 죽음 이후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지만, 회의를 거듭하며 틀을 잡았죠. 기획 초반에 내부에선 ‘HMD를 쓰면 표정이 보이지 않는데, 카메라에 사용자의 감정이 담기겠냐?’는 반응도 있었어요. 새롭게 시도하는 장르라 함정에 빠지진 않을까, 후져지진 않을까, 고인에게 결례가 되진 않을까 걱정이 많았습니다. 나연이와 엄마가 만나는 날이 가까워질수록 잠도 잘 못 잤던 것 같아요.” 실험적인 시도로 우려를 안고 시작한 다큐멘터리는 대한민국콘텐츠대상 방송영상산업발전유공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 아시아태평양방송연맹상 TV 다큐멘터리 부문 대상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방송 이후 김 PD는 직업인으로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말한다. “한 직장, 같은 부서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하고, 스스로를 비하하면서 시간을 보낼 때도 있었어요. 좋은 프로그램이란 뭘까, 고민하며 이리저리 흔들렸죠. 하지만 이 프로젝트를 해내면서 창작에 대한 자신감도 붙었습니다. 덕분에 제작 과정을 담은 책도 쓰고요. 노후 걱정을 조금은 덜었네요.” “과정은 험난했다. 어느 날은 될 것 같다가, 어느 날은 실망했다. 그래도 빈 땅에 아무도 꽂지 않은 깃발을 꽂았다고 생각한다. 공영방송의 PD로서 산업적 발전을 이루려 하기보다는 작은 디테일을 축적하며 사람의 이야기, 착한 이야기, 저널리즘을 추구하려 노력했다. 기술적인 것 이상의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 기술을 적용하려 하면 할수록 시간에 대해, 삶에 대해 생각했던 과정을 이 책에 담았다.” -‘너를 만났다’ 중에서 직장인 겸 창작자의 돌파구, 책 신간 ‘너를 만났다’에서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며 깊어진 그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방송국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 새로움과 익숙함의 경계를 콘텐츠로 풀어내는 방식, 오랜 직장인의 걱정거리 등 다양하다. 그는 여러 책을 읽으면서 흩어진 생각들을 조금씩 재정비했다고 한다. 아마 김 PD의 상상력을 ‘있음직한 일’로 만들어내는, 집요함을 키워내는 데 역할을 했을 테다. 마이클 크라이튼의 ‘쥬라기 공원’처럼 말이다. “제 인생에서 책을 빼놓고 설명하기란 어려워요. 소설은 항상 허겁지겁 먹고 싶은 음식과 같은 존재예요. 어릴 때부터 뭔가 하기 싫어지면 책을 읽었어요. 핸드폰이 없던 시절 지친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는 또 다른 세계였죠. 지금은 아무래도 넓은 분야를 이것저것 떠도는 방식의 독서를 하고 있어요. 뭔가 얻어걸리지 않을까,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까 하면서요. 항상 대박이 찾아와주길 바라는 태도가 부끄럽긴 하지만, 인터넷에서는 찾을 수 없는 책만의 목소리가 있어요. 재미는 물론이고, 정련된 의견에 내포된 진중함이 있죠. 앞으로도 ‘너를 만났다’처럼 사람들에게 흥미와 생각할 거리를 동시에 줄 수 있는 작품으로 소통하고 싶습니다.”
- 2023-01-17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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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들리는 창업 시장, 불황 딛고 살아남으려면?
- 창업은 퇴직 후 중장년이 재취업 다음으로 많이 고려하는 생계 수단이다. 중소벤처기업부가 2021년 발표한 ‘창업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신생기업 창업자 중 72%가 중장년(40대, 50대, 60대 이상)이다. 그러나 희망만 품고 창업의 세계에 뛰어드는 것은 무모하다. 퇴직금을 비롯해 노후자금을 창업에 투자한다면 실패할 경우 타격이 크기 때문에 준비 과정에서부터 신중을 기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라고 묻는 이들에게 창업 전 두드려야 할 ‘돌다리’를 소개한다. ‘소수 창업가의 특징’을 저술한 경영학자 히스리치와 브러시는 창업을 ‘재정적·심리적·사회적 위험을 감수하고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금전적인 보상과 개인적 만족, 독립심을 누리기 위한 창조의 과정’이라 정의 내렸다. 이들이 이야기하는 ‘시간과 노력’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중장년의 취업 및 진로 방향 설정을 돕고 있는 권미경 커리어컨설팅 대표에게 예비창업자로서 검토해야 할 요소와 세워야 할 전략에 관해 물었다. Q. 최근 중장년 창업의 가장 흔한 업종 형태는 무엇입니까? 중소벤처기업부의 통계자료를 보면 ‘생계형 창업’이 대부분입니다. 주목할 만한 점은 비자발적 창업이 25.7%라는 겁니다. 불가피하게 창업으로 인생 2막을 시작한 사람이 적지 않아요.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시작했을 가능성이 크죠. 실패할 경우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Q. 그렇다면 창업 전 어떤 준비를 먼저 해야 할까요? 원론적인 이야기일 수 있지만, 우선 ‘목적지’를 정해야겠죠. 흔히들 인생을 항해에 비유합니다. 사람들은 각자 바라는 최종 목적지를 정하고, 안정적으로 도착하고자 항로를 선택하죠. 이때 항로대로 가기 위해 세우는 계획을 ‘생애 설계’라 할 수 있습니다. Q. 생애 설계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우선 인생 그래프를 한번 그려보길 추천합니다. 인생에서 잊지 못할 사건을 작성하고, 그 시기가 언제인지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해당 사건이 인생에서 마이너스였는지 플러스였는지 점수로 표시하고 그래프를 그려보는 거예요. 그러면 나이별 과업이 한눈에 보여요. 앞으로 실천해야 할 일을 작성하는 게 마지막입니다. 삶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며 계획하는 방식이죠. Q. 자신의 흥미와 강점을 파악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의외로 본인의 흥미와 강점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워크넷에서 직업 선호도 검사나 창업 적성검사를 통해 창업 적성을 알아볼 수 있어요. K스타트업 홈페이지에서도 창업 역량 자가진단 키트를 제공합니다. 창업사업 통합정보관리시스템으로 접속해 역량을 점검하고 부족한 점을 진단해보세요. Q. 아이템을 선정할 때 고려해야 할 요소가 있다면요? 수익성과 안정성, 성장성 3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업종 시장 수요가 충분한지, 투자 대비 수익을 낼 수 있는지 살펴봐야 하죠. 전문가들은 일반적으로 투자 대비 월 3~4% 수익이 생길 경우 수익성이 높다고 말합니다. 총 투자 비용을 2~3년 사이에 회수할 수 있다면 좋겠죠. 안정성과 성장성을 확보하려면 ‘반짝 아이템’은 피하고, 철저한 트렌드 분석을 통해 사회적·도덕적 문제가 없는 방향으로 선정하시길 바랍니다. Q. 중장년 예비창업자가 주로 하는 고민은 무엇인가요? 산업연구원의 ‘시니어 기술창업 발전과 방향’ 보고서에 따르면 신중년의 창업 애로사항 첫 번째는 창업 자금 확보(42.3%), 2위는 판로 확보와 안정적 수익(25.2%), 3위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15.3%)으로 집계됐습니다. 사업 초기부터 정부의 지원정책을 활용해 자금지원만이 아닌 교육, 멘토링 등의 다양한 서비스를 받아보세요. Q. 쉬운 창업은 없겠습니다만, 어떤 마음가짐과 자세를 갖춰야 불황기에도 실패 확률을 줄일 수 있을까요? 규모가 크든 작든 전반에 걸쳐 세밀한 부분까지 창업자가 기획하고 운영해야 해요. 직원 관리, 자금 관리, 고객 관리에 대한 자신만의 원칙이 필요합니다. 인원을 고용해 이를 해결할 수도 있지만 초기에는 창업자가 모든 과정을 직접 확인하고 결정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창업 후 사업을 유지하려면 본인이 하는 일의 가치를 홍보하고 소득 창출을 적극적으로 시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싫든 좋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사업 관계망을 형성하는 것도 중요해요. Q. 계묘년을 맞아 새 마음 새 뜻으로 창업을 꿈꾸는 중장년에게 응원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중장년은 축적된 지식과 경험을 보유하고 있고, 젊은 세대보다 자본이 확보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유리한 점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과하게 확신을 갖고 시대적 흐름을 등한시하는 등 유연성이 떨어지는 결정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과신이 고집 형태로 표출된다면 결과는 장담할 수 없겠죠. 취미가 아닌 생존의 문제입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되, 적당한 자신감으로 꿈꾸던 목표에 도달하시기 바랍니다.
- 2023-01-16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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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니어 모델 열정에 밴쿠버 런웨이도 좁아”
- 세계 5대 패션위크 중 하나로 꼽히는 밴쿠버 패션위크. 지난 10월 ‘2023 S/S(Spring/Summer) 패션위크’가 성대하게 열린 가운데, 무대 위에 오른 한국인 시니어 모델 두 명이 이목을 사로잡았다. 시니어 모델이 입은 의상을 만들고 쇼를 기획한 사람은 젊은 디자이너 이성빈(29)이다. 신구 조화를 이룬 무대가 완성되기까지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남성 의류 브랜드 와이쏘씨리얼즈(Why socerealz!)를 운영하는 이성빈 디자이너는 지난 7월 시니어 모델 오디션 ‘올드 보이’(Old Boy) 모집 공고를 냈다. 올드 보이는 밴쿠버 패션위크 무대에 설 최후의 2인, TOP 2를 선발하는 오디션이다. ‘나이 많은’(Old)과 ‘소년’(Boy)이 합쳐진 오디션 이름처럼, 이 디자이너는 순수함을 지닌 시니어 모델을 원했다. 1차 오디션에서는 8명이 뽑혔다. 이들은 8월 29일부터 30일까지 1박 2일간 합숙하며 서바이벌 경쟁을 펼쳤다. 뜨거운 경쟁 속에 살아남은 최후의 2인은 김진환과 이충희다. 두 사람은 밴쿠버에서 시니어 모델로 정식 데뷔하며 꿈의 나래를 펼쳤다. “사실 최후의 2인 김진환 님, 이충희 님은 제가 처음 생각했던 우승자는 아니었어요. 시니어 모델로서의 헌신과 열정, 노력이 빛났기 때문에 뽑혔다고 생각합니다. 초반에 탈락할 줄 알았던 분들이 점점 성장하며 최후의 2인까지 되는 과정을 보면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모든 참가자분이 오디션에 진심으로 임해주시니까 저도 어느 순간 엄청나게 몰입한 거죠. 또 두 분이 밴쿠버에서 멋진 무대를 보여주셔서 감사했어요.” 시니어 모델 오디션 탄생기 “사실 저도 시니어 모델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있었어요. 아무래도 어르신들이니 제가 만드는 옷이 괜히 올드한 이미지를 얻게 되는 건 아닌가 싶었죠.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시니어 모델들 덕분에 더욱 많은 도전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자신의 무대에 젊고 멋있는 모델이 서길 바라는 마음은 어느 디자이너나 똑같을 터. 젊은 디자이너인 이성빈도 시니어 모델에 대한 편견이 조금은 있었다. 시니어 모델과 작업을 해본 뒤 그는 자신의 걱정이 기우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난해 12월, 이성빈 디자이너는 올 4월 밴쿠버 패션위크 무대를 준비하면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시니어 모델 전문 아카데미 ‘EMA’(엘리트 모델 에이전시)에서 패션쇼를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디자이너는 “밴쿠버 무대는 와이쏘씨리얼즈의 첫 번째 패션쇼로 매우 중요했다. 그 전에 경험을 쌓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EMA 패션쇼에 참가했다”고 설명했다. 이성빈 디자이너는 “시니어 모델들은 은퇴 후 제2의 직업을 가진 분들이지 않나. 순수하고 열정이 넘치셨다”면서 “시니어 모델들과 함께하면서 시야도 넓어졌고, 기대 이상의 효과를 봤다”고 소감을 밝혔다. 무엇보다 그는 ‘그냥 무엇이든 해도 되는구나’를 경험을 통해 배웠다. 정식 패션쇼를 앞두고 자신감이 충만해졌다. “쇼에 앞서 시니어 모델들의 사진을 보고 착장을 정했죠. 그런데 피팅할 때 뭔가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모델들께 입고 싶은 옷을 골라서 입으라고 했어요. 자신이 원하는 옷을 입으니 모델들의 포즈도 자연스러워지고 자신감도 넘치시더라고요. 시니어 모델들과 함께하면서 배운 게 많아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덕분에 밴쿠버에서 좀 더 창의적인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나 싶어요.” 이성빈 디자이너는 첫 번째 패션쇼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독특한 무대를 펼친 그는 ‘이런 패션쇼는 처음’이라는 해외 언론의 호평도 받았다. 출발선을 잘 끊었으니 본격적인 다음 무대를 제대로 보여줘야 했다. 이성빈 디자이너는 10월 밴쿠버 패션위크에 초청받아 다시 무대에 서게 됐다. 이때 EMA의 알렉스 강 대표가 밴쿠버 무대에 설 시니어 모델을 뽑는 선발대회를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득이 될까, 독이 될까.’ 이성빈 디자이너는 고민이 많았다. 최종적으로 득이라고 생각해 도전을 강행했다. 4월 패션위크 당시 현지 모델만 기용한 이성빈 디자이너는 소통의 한계를 느껴, 자신이 원하는 연기력과 에너지를 완벽하게 채우지 못했다. 한국인이면서 열정 넘치는 시니어 모델이라면 당시의 아쉬움을 풀어줄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성빈 디자이너는 이왕 할 거면 선발대회를 재밌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올드 보이’ 오디션을 생각해냈다. 그는 “‘선발대회’라고 하면 보수적이고 재미없는 느낌이 든다. ‘슈퍼스타K’를 즐겨 본 터라 서바이벌 오디션을 기획하게 됐다. 영상도 찍어서 유튜브에 순차적으로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영상에는 TOP 2가 되고자 고군분투하는 시니어 모델 참가자들과 함께 심사위원인 이성빈 디자이너와 알렉스 강 EMA 대표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겼다. 날카로움과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두 사람의 심사가 인상적이다. “키 크고 잘생긴 것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심사 기준은 얼마나 미션을 잘 이해하고 수행하느냐, 얼마나 담대하고 재밌게 연기를 펼치느냐가 중요했죠. 김진환 님, 이충희 님이 뽑히신 이유예요.” 이성빈 디자이너가 시니어 모델을 이번 패션쇼에 기용한 가장 큰 이유가 있다. 와이쏘씨리얼즈의 2023 S/S 콘셉트와 시니어 모델이 잘 맞았기 때문이다. 와이쏘씨리얼즈는 영화 ‘다크 나이트’ 속 조커의 명대사 ‘Why So Serious?’(왜 이렇게 심각해?)라는 물음에 위트 있게 대답하는 브랜드다. 재치 있고 독특한 옷을 통해 심각하고 완벽한 것에 대한 집착으로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고자 한다. “2023 S/S 콘셉트는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로마서 5장 3~5절)라는 성경 구절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우리는 고통을 인내하면서 성품이 생기고, 그 성품이 생겨서 희망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이에요. 시니어분들이 연단의 대명사잖아요. 시니어 모델이 무대에 선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죠.” 한계가 없는 인생과 패션 밴쿠버 패션쇼에서 시니어 모델 두 사람은 외국인 모델들이 지나간 뒤 마지막에 등장했다. 이충희는 조커를 연상케 하는 분장을 하고 범상치 않게 나타났다. 소리를 지르며 모델을 끌고 나와 공포감을 형성했다. 이어 등장한 김진환은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비둘기 분장을 한 것도 모자라 손에 비둘기 모형을 들고 있었다. “이충희 모델님은 고통을, 김진환 모델님은 희망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충희 님은 소리도 지르고 무서운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고요. 김진환 님의 의상은 희망을 상징하는 비둘기를 콘셉트로 잡은 거죠. 마지막에 두 사람이 줄다리기하는 것은 고통과 희망 중 누가 더 센가를 표현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희망이 이겼죠. 관객분들의 반응이 매우 뜨거웠습니다. 처음에는 무서워하다가 마지막에는 많이 웃으시더라고요. 김진환 님, 이충희 님이 아이디어도 많이 내주시고 적극적으로 임해주셔서 더욱 완성도 있는 무대가 나왔습니다.” 평범함을 거부하는 이성빈 디자이너. 그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옷 역시 독특하고 개성이 넘친다. 그의 컬렉션을 보면 천사와 악마, 조커 등에서 영감을 받은 옷이 많다. 2021 S/S 콘셉트는 ‘Fruits & Veggies’(과일과 야채)였는데, 이 디자이너는 상추·가지·키위 등을 활용한 컬렉션을 선보였다. 와이쏘씨리얼즈는 당시 ‘프로젝트 라스베이거스 국제 패션박람회’에 참가해 이목을 사로잡았다. 이성빈 디자이너는 자신이 만든 옷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고 한계가 없다. 스무 살까지만 해도 그는 부모님이 정해준 삶을 산 착실한 아들이었다. 그렇게 미국의 대학교에 진학했는데, 진짜 자신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를 계속 다닐 이유가 없었다. 이후 그는 군 복무를 마치고 2년간 해외를 돌아다녔다. 새장을 벗어난 새처럼 자유로웠고, 물 만난 물고기처럼 행복했다. 그때의 여행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다. “새로운 환경에서 나 자신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 여행의 좋은 점이라고 생각해요. ‘누구의 아들’, ‘어디 사는 누구’, ‘무슨 일을 하는 누구’가 아닌, 그냥 온전한 자신을 마주하게 되죠. 여행을 하면서 제가 옷을 정말 좋아한다는 것을 느꼈어요. 어느 나라를 가든 옷 쇼핑이 가장 즐거웠죠. 이제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해보자 생각해서 패션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긴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이성빈 디자이너는 패션 디자인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패션 디자인 학원과 한국패션봉제아카데미를 함께 다녔다. 열정 넘치는 학생이었던 그는 선생님들에게 개인 레슨도 따로 받으며 실력을 연마했다. 동시에 이성빈 디자이너는 이태원에서 유럽 디자이너 브랜드 직수입 편집숍을 운영했다. 디자이너로서 실력을 갖춘 후에는 편집숍에서 자체 브랜드를 론칭했다. 그 브랜드가 바로 와이쏘씨리얼즈다. 이성빈 디자이너는 옷에 자신이 투영된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에 개인적으로 고통스러운 일이 많았다. 이 고통 뒤에 좀 더 강해진 내가 있으리라 생각해서 고통과 희망이 주제가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 디자이너는 앞으로도 성경 구절에서 영감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옷을 통해 성경의 좋은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그의 목표다. 시니어 모델과의 작업 또한 지속하고 싶단다. 시니어에 대한 젊은 세대의 존경심을 느낄 수 있었다. “갓 서른 살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제가 시니어 모델들과 같이 일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큰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랜 세월 고통받으면서도 인내하고 지금까지 살아오신 시니어분들을 매우 존경합니다. 제가 상상하지 못할 강함을 갖고 계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 2022-12-13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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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로 시작한 귀촌, 처음엔 실로 지옥이었지만…
- 육군에서 30년간 복무한 뒤 중령으로 전역한 김준한(63)이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신 귀농한 데엔 그럴 만한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건강을 회복하자!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는 신념이 그의 푯대였던 것. 인간만큼 다양한 재능을 지닌 생명체가 드물다. 그러나 육신의 구슬픈 비명 앞에선? 비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자구책을 모색하기 마련이다. 김준한은 귀농을 치유 방편으로 삼았다. 농사에 쏟는 정당한 근로와 산골의 자연환경에 잠재한 갖가지 치료제로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보았다. 그가 내심 비상 사이렌을 켜고 찾아든 귀농지는 경북 예천군 감천면의 산골. 올해로 귀농 12년 차다. 김준한의 거처는 거듭 휘어지는 농로의 끝, 살짝 외진 산기슭에 있다. 머리카락 보일라 장독 뒤에 숨듯이, 야트막한 야산의 품에 폭신하게 안긴 터전이다. 다소 은밀하면서 매우 아늑하다. 이른바 명당이란다. 그는 지관을 대동하고 예천 일대를 돌아다니다가 이곳을 찾아냈다. 처음엔 경기도 양평 지역에서 터를 물색했다. 그러나 딱히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지. 그래 고향인 예천에서 정착지를 찾았으며, 용케도 이곳을 발견하고 환호작약했다. 그의 얘기는 이렇다. “좋은 터와 인연이 되다니.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그는 사람의 기운을 돋우는 땅이 따로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이곳에 살면서 건강을 완연하게 되살렸다. 다시 말해 그에게 풍수는 아리송한 신비주의가 아니다. 여하튼 대뜸 편안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다. 푸른 소나무 즐비한 야산이 두 팔을 벌려 집과 마당을 포옹하고 있으니 산이 보호자 역할을 하는 형국이다. 자연과 교류하며 은연중에 받을 수 있는 ‘인생 레슨’도 많을 환경이다. 이렇게 썩 이상적인 곳에서 김준한은 고독한 ‘나 홀로 귀농’의 막을 올렸다. 컨테이너 박스에서 숙식하며 고추, 감자, 옥수수, 고구마, 메밀 등을 심는 것으로 농사를 시작했다. 이후 자두 농사로 전환했다. 사전 준비는 충실했다. 전역 3년 전부터 귀농이라는 거사를 위해 차근차근 대비했다. 중도에 퇴장하는 불상사만큼은 경험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귀농을 하면 내 손으로 집을 짓고 싶었다. 그래서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주관하는 전통공예건축학교에 등록했다. 2년간 대목장 신응수 선생의 강의와 실습에 참여해 집짓기의 기본을 배웠다. 전역 직전에 ‘제대 군인을 위한 귀농 교육’도 받았다. 이곳에 내려와서는 예천군 농업기술센터에서 많은 걸 배웠다. 그 외에도 다종다양한 농업 교육을 받았다. 귀농 교육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초심자가 믿을 만한 매우 유력한 기회라 본다. 수년간 열성껏 교육을 받자 마인드 자체가 달라지더라.” 자신감이 붙던가? “자신감은 물론 성격마저 바뀌는 걸 경험했다.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쪽으로 변하는 나 자신을 바라보며 안도했다.” 흔히들 재배 작목 선정에 귀농 성패의 관건이 달려 있다고 본다. 자두를 주 작목으로 정한 이유가 있겠지? “처음엔 채소류를 소소하게 길렀으나 포기하고 자두 농사 하나에 집중했다. 집 앞의 밭 450평을 자두 과수원으로 꾸린 게 출발점이었다. 애초 블루베리 농사를 구상했었다. 그런데 예천군 농업기술센터에서 만류했다. 가격변동이 심해 안전하지 않은 작목이라는 얘기였지. 그러면서 권장한 게 자두였다. 이건 예천의 특산물 가운데 하나라서 유리한 요소가 많다는 설명에 이끌려 자두 농사에 뛰어들었다.” 귀농 이후 10여 년째 자두 농사만 하고 있다. 좋은 선택이었나? 아무리 작목 선정을 잘하더라도 이상하게 돌아갈 수 있는 게 농사인데. “주변을 보면 귀농에 실패하고 역귀농을 하는 이들이 드물지 않다. 그 원인 중에 가장 큰 건 영농 실패이며, 이는 주로 작목 선택의 오류에서 기인한다. 그런 점에서 난 매우 좋은 선택을 한 셈이다. 자두의 전망이 좋아 농장을 2300여 평으로 확대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혼자 능히 운영할 만한 이상적인 규모라 생각한다.” 소득은 어느 정도 올리나? “연매출 평균이 3500만 원 내지 4000만 원이다. 이 중 순소득은 70% 정도다. 물론 날씨에 따른 기복은 있다. 어느 해엔 너무 이르게 내린 서리 피해로 매출 제로를 경험하기도 했다. 자두나무 하나에 온전히 남아난 자두가 겨우 두어 개에 불과했다. 난 흙의 진리를, 땀 흘린 만큼 대가가 돌아올 거라는 진실을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하늘이 하는 일을 어떻게 방어할 수 있겠나? 그럼에도 자두 농사는 여느 작물에 비해 장점이 많아, 심지어 고행에 가깝다는 귀농 생활을 무난하게 이끌어왔다.” 스트레스 사라지자 건강도 좋아져 김준한의 귀농 이력은 어언 12년 차. 10년이 지나고서도 수렁에 빠진 듯 허우적거리는 귀농인들이 숱하지만 그의 자두 농사는 일찌감치 궤도에 올라섰다. 온갖 교육을 섭렵하면서 얻은 식견, 날이면 날마다 농장으로 달려가는 근면성, 그리고 자두나무의 비위를 맞출 줄 아는 머리와 감성으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는 셈이다. 대단한 매출은 아니지만 혼자 생활하기엔 섭섭할 게 없는 수입이라, 이쯤이면 자리가 잡힌 거라고 그는 자족한다. 무엇보다 귀농 목적을 이미 완수했다는 점이 그는 기쁘다. 농업 수익보다 건강 회복을 목표로 한 귀농이었는데 서서히 건강이 좋아지더라는 게 아닌가. 마음은 물론 몸이 아플 때 삶이 비로소 소중하게 다가온다. 따라서 아픔이, 고통이 지름길로 데려다준다는 소식이 고래(古來)로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쏟아진다. 불굴의 의지로 병든 몸을 추슬러 농사는 물론 건강까지 부양한 김준한의 행장은 고통을 차라리 견인차로 삼아 빛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삶의 묘미를 웅변한다. 그는 중증 당뇨병으로 고초를 겪었으나, 어라, 농사에 병약한 육신을 투입하자 바뀌었다. “오죽 암담했으면 아내의 격렬한 반대를 외면하고 달아나듯이 홀로 귀농을 했겠는가. 당수치가 600까지 올라가면서 시력이 나빠져 실명까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도수 높은 안경을 써야 했다. 그런데 서서히 당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오면서 안경을 벗었다. 당뇨병은 물론 전반적으로 문제가 많았던 건강 상태가 현저하게 좋아졌다.” 귀농의 무엇이 치유 효과를 가져왔다고 보나? “내 병은 군대 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스트레스 누적에서 온 것이었다. 지시가 주어지면 임무 기간 안에 종료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매우 컸다. 이건 고질적인 것이었으나, 정서적 안정을 누릴 수 있는 조용한 산골로 귀농하면서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됐다. 깨끗이 벗어났다. 과도한 노동이 필요하지 않은 소규모 농사라서 즐거운 기분으로 일했던 점도 몸을 정비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좋은 공기와 물, 산야에 흔한 약초와 나물들을 섭취한 것도 득이 된 것 같다.” 일취월장일까? 이젠 예천 관내에서 알아주는 농가로 부상했다지? “자두 농사에 관한 한 달인 소리를 들을 때가 됐다고 얘기하는 이들도 있다. 전국 각지에서 견학을 오는 농부들도 많다. 자두 품질과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재배 시설인 ‘Y자 다주지 방식’을 공부하러 오는 이들이다.” 더도 덜도 말고 지금처럼만 ‘Y자 다주지 방식’은 Y자 파이프 프레임에 자두 가지들을 가지런히 펼쳐 재배하는 기술로, 자두 생산량이 최대 5배에 달하는 등 이점이 많다. 그는 이미 안전한 수준에 올라선 탄력으로 머잖아 매출이 더욱 늘 거라 예측한다. 귀농 이후 드센 파도를 겪는 일 없이 행진해왔으며, 향후 탕탕 질주할 가능성이 열렸다고 상황을 읽는 것이다. 그러나 과욕을 경계한다. 돈 버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다. 스스로 분수를 가늠해 매사 소박하고 조화로운 삶을 꾸려가고 싶은 것이다. 그게 귀농의 목적 중 한 가지이기도 했다. 그리 살자고 집도 자그맣게 지었다. 흙과 나무로 지은 15평짜리 한옥이다. “자금 사정도 고려했지만 소탈하게 사는 게 좋다는 생각으로 간소하게 지었다. 내가 도연명을 좋아한다. 그의 ‘귀거래사’를 보면 소박한 생활 정경이 나오더라. 작은 초가를 짓고, 작은 텃밭을 만들고, 뜰엔 복숭아와 자두나무를 심어 자족하는 옛사람의 모습에서 감흥을 느꼈다. 감히 위인을 흉내 낼 수야 없지만, 나 역시 소소한 것에서 만족을 누리는 삶을 맛보고 싶었다.” 손수 집을 지었다지? 한옥 건축엔 까다로운 공정이 많은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게다가 건강도 좋지 않았는데. “미장이나 조적 등 난해한 부분은 기술자를 불러 썼다. 하지만 설계 초안을 비롯해 많은 부분을 직접 처리했다. 원목 껍질을 벗기고 대패질을 해 서까래 164개를 손수 만드는 식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업자에게 맡기면 두 달 안짝에 완공하겠지만 난 2년 반 만에 완료했다. 실로 고달팠다. 그런데 집을 완성하자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어떤 일이? “아내가 비로소 나의 귀농에 동의를 표했다. 애초 귀농의 ‘귀’자도 꺼내지 못하게 했던 사람인데 집 지은 걸 보고 생각이 바뀐 것이지. 내가 귀농한 후 이곳에 아예 오질 않았던 아내였으나, ‘이젠 주말마다 내려오겠다!’고 하더라고.(웃음) 비로소 어둡고 추운 터널을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그의 아내는 안양시에서 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한다. 남편의 도발적인 귀농에 오만정이 떨어졌었나? 빗장을 건 마음을 풀어놓기까지 긴 세월이 걸린 셈이다. 애당초 한결 매력적인 설득과 회유로 부인과 동행하는 귀농을 할 수는 없었을까? 인생의 가을에 부부가 유유상종하며 흘러가는 모습처럼 진실한 드라마가 드문데. “아내에게 고마움을 느낄 따름이다. 병을 안은 채 농사와 집짓기를 함께 했던 초기 2, 3년은 한마디로 지옥이었다. 내가 자청한 지옥이다. 그런데 아내가 건져준 게 아닌가. 머잖아 아내는 퇴직한다. 이후엔 이곳에 내려와 함께 살게 될 것이다.” 살 날보다 산 날이 더 많아진 나이다. 귀농 12년 세월을 낭비라 느낀 적은 없었나? “시간을 아껴 쓰며 살았다. 덕분에 건강을 되살렸고, 아내의 인정을 받았다. 여기서 무엇을 더 바라겠나? 이 정도에 만족한다. 더도 덜도 필요 없다는 거.” 더도 덜도 말고 딱 지금처럼만! 인생을 통째 긍정하는 짧은 언설이 바윗장처럼 묵직하다. 김준한이 주는 귀농 Tip •귀농으로 낭만적인 전원생활이 가능할 거라는 환상을 버리자. 이상향의 크기를 줄이라는 얘기다. •기술집약적이고 소득 수준이 높은 작물을 찾아내자. 그러자면 갖가지 귀농 교육을 충실히 받아 물정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귀농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초기 자본 투자에 무리하지 말자. 길게 보고 서서히 나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매스컴이 떠드는 귀농 성공 사례를 그대로 믿지 마라. •혼자 하는 과수 농사의 경우 2000평 규모가 적당하다. •농업 장비들은 가급적 임대해 사용하자. 비용을 절감할 수 있어서다. •잦은 음주는 금물이다. 무질서와 방황의 첩경일 수 있기 때문이다.
- 2022-12-09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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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 후 삶의 자신감 높이는 것 '자산과 건강'
- 은퇴자신감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자산과 건강이 꼽혔다. 노후소득 수단을 5개 이상 마련했거나 보험으로 건강 문제 대비가 되어있는 경우 은퇴 후 삶에 대한 자신감이 높았다.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가 ‘대한민국 4050 직장인의 은퇴자신감 서베이’를 실시한 결과 10점 만점 기준으로 은퇴 자신감 평균은 5.2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에 진행한 설문조사에는 공무원을 제외한 40·50세대 직장인 2000명이 참여했으며 2022년 8월 24일부터 9월 7일까지 실시했다.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는 보고서에서 “미국의 주요 연구기관 등에서는 은퇴자신감 조사를 퇴직연금이나 근로자 복지와 함께 중요하게 다루며 정기 조사를 시행하지만, 국내에서는 구체적인 분석 사례가 없어 조사를 시행했다”고 설문조사 동기를 밝혔다. 미국의 연구기관 EBRI(Employment Benefit Research Institute)는 ‘은퇴 자신감 서베이’(Retirement Confidence Survey)를 주기적으로 실시한다. 이번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스스로 매긴 은퇴자신감 점수 평균은 10점 만점 기준 5.2점으로 나타났다. 점수 분포에 따른 특성을 분석해보니 은퇴자신감이 높은 그룹은 평균 연령과 교육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특히 가계 순자산 및 근로소득 규모가 큰 차이가 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은퇴자신감이 낮은 그룹의 가계 순자산 규모는 평균 4억 3000만 원이었으며, 은퇴자신감이 높은 그룹은 2.2배 높은 평균 9억 4000만 원으로 나타났다. 재무적 요소에서는 가계순자산 규모에 비례해 은퇴자신감 수준도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가계근로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자신감 점수도 높았다. 퇴직연금 및 개인연금을 보유한 경우에도 대체로 높은 은퇴자신감 수준을 보였다. 응답자는 국민연금을 포함해 평균 4.5개의 노후소득 수단을 마련한 것으로 조사됐으며, 은퇴자신감 점수가 8~10점으로 상위인 응답자는 노후 소득 수단이 5개 이상인 것으로 집계됐다. 비재무적 요소에서는 건강이 은퇴자신감에 큰 영향을 미쳤다. 8점 이상일수록 건강 상태를 자신하는 비중이 높고 4점 이하로 낮을수록 건강 상태의 자신감이 낮았다. 가장 걱정되는 질병으로는 ‘치매 및 뇌혈관 질환’이 40.4%로 높았다. 이어 ‘심혈관 질환’(29.1%), ‘암’(26.7%) 순이었다. 건강이 악화할 경우 재정적 위험성이 높아지는데, 이는 보험으로 대비할 수 있으며 보험을 갖추었으면 은퇴자신감 점수가 평균 1.7점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들이 생각하는 은퇴자신감 저해 요인 1위는 건강 우려(37.3%)였으며, 다음이 자산 부족(21.8%), ‘노년의 외로움’(12.4%) 순이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원만한 가족관계’(15.9%)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높았다. 또한 ‘일자리 및 직업교육’(14.5%), ‘은퇴자 자산관리서비스’(11%)를 원했다. 은퇴자신감이 낮은 그룹은 자산을 가장 걱정했으며 일자리 및 직업교육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반면 은퇴자신감이 높은 그룹은 건강을 가장 걱정했으며 원만한 가족관계 개선이 중요하다고 답했다. 종합하면 가계순자산, 근로소득, 국민연금 예상수령액, 사적연금 등이 확보된 경우 은퇴자신감이 높았으며, 재정적 여건과 관계없이 건강에 대한 우려가 있다면 은퇴 자신감이 1점 이상 하락하는 현상을 보였다. 또한 가족관계가 원만하고 노후의 취미나 여가생활 기대치가 높을수록 은퇴자신감이 증가했다.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는 “은퇴자신감을 형성하는데 자산 등 재무 요소 준비가 기본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면서 “건강 유지 및 정서적 안정감은 은퇴자신감을 유지하거나 개선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은퇴전 경제활동 시기에 공적, 사적 연금 체계를 마련해야 하며, 은퇴 자산을 통해 다양한 소득 수단을 갖추어야 한다”면서 “은퇴 초기 활동적 시기에는 근로 활동을 지속해 근로소득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또한 “건강문제는 삶의 질 저하와 재무 위험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평소 건강관리와 보험 대비를 해두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 2022-11-28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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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촌 후 산골에 출판사? 그러나 잘 돌아간다!
- 매력과 환멸이 공존하는 도시에 마냥 정을 느끼며 살기는 어렵다. 오나가나 생기를 머금고 사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밥벌이의 피로를 면제받을 수 없으니 묵묵히 견디며 산다. 서울과 수도권에서 살며 경제활동을 했던 김완중(58, ‘내일을 여는 책’ 대표) 역시 그랬던가 보다. 언젠가는 도시를 뜰 생각을 했던 것. 그러다 쉰 살을 코앞에 두었던 2013년, 마침내 도시를 벗어났다. 인파와 소음이, 꿍꿍이와 풍문이 넘실거리는 서울과 결별하고 시골로 달려갔다. 유난히 싱싱한 산수를 막대하게 보유해 차라리 이방(異邦)인 전북 장수군의 외진 산골로 귀농했다. 김완중이 처음 손을 댄 작물은 오미자였다. 농사 물정을 잘 모르는 귀농인에게 그나마 용이한 작물은 지역 특산물이다. 오미자는 사과·한우와 함께 장수군의 특산물에 꼽힌다. 김완중은 도시에 살며 이른바 ‘도시농부’를 경험한 적이 있다. 텃밭 수준의 농사를 재미 삼아 체험하며 농업과 흙을 살짝 맛보았다. 이건 귀농의 싹눈이 튼 계기였다. 그러나 농사 경험이라고 내세우기엔 소소한 것에 불과했다. 즉 오미자 재배를 통해 농사와 본격적으로 맞닥뜨린 그에게 닥쳐온 애환의 수효가 한둘이 아니었을 거라는 얘기다. 매사 신입사원처럼 서툴러 진땀을 뺐을 게 아닌가. 하지만 요상하게도 거둔 성과가 만만치 않았다. “농업 자체가 워낙 힘들다. 농가들이 흔히 애를 먹는 게 판로다. 좋은 농산물을 생산해놓고도 유통 문제의 벽에 부닥쳐 기존 농가들조차 농사를 접는 경우가 있더라. 그러나 난 오미자 판매를 잘했다. 도시 쪽에 네트워크가 있어서였지. 내가 생산한 물량이 바닥나 다른 농가의 오미자를 사다 팔기도 했다.” 귀농을 할 적에 그는 그냥 쓱 내려왔다. 마치 등을 미는 바람에 떠밀린 듯이. 그 무슨 그럴싸한 구상을 미리 해두지 않았던 것. 농사를 머릿속에 넣고 이리저리 데굴데굴 굴리며 숙고하는 식의 방식은 아마도 성향에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시골에서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가만히 두고 보는 게 흥미를 배가하는 길이라 보았다. 어떤 상황이 발생하든 무가치한 일에 얽매이지 않고 좀은 자유롭게, 좀은 태평하게, 좀은 재미있게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그런데 군에서 임대해준 밭에 기른 오미자 판매가 뜻밖에도 잘된 게 아닌가. 본격적인 농부의 대열에 올라설 수 있는 자격증을 자신에게 수여해도 무방할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초보 귀농인으로서는 자못 웅장한 성과를 거둔 셈? 그러나 속사정은 영 달랐다. 오미자 농사를 지어 잘 팔았으나 막상 수입은 실로 보잘 게 없었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재배 면적이 겨우 800평에 불과했던 거다. 대규모 오미자 농가들도 수익 구조에 끙끙대는 판에 소농으로 무슨 재미를 볼 수 있으랴. 그의 농사는 소박한 미덕에 충만했으나 호구 대책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햐! 이러다 굶어 죽겠더라!(웃음) 농사에 들어가는 시간이 너무 많다는 점도 싫었다. 결국 오미자 농사를 접었다. 다 뽑아내고 손이 덜 가는 두릅과 엄나무를 심었다. 이 역시 농사다운 농사라 할 게 없다. 결국 5년 만에 농사를 포기한 셈이다. 농사로 먹고살려면 최소한 5000평 이상은 지어야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는데 내 실력으로는 가당치 않았다.” 나의 철학을 책에 담아내는 매력 시골 생활에 관한 사전 구상보다 시골에서 과연 어떤 흥미로운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관심을 가졌던 김완중에게 비로소 흥미로운 상황이 발생했다. 무엇으로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 이건 절박한 숙제라는 점에서, 상상력과 모색을 다한 궁리로 길을 찾아내야 한다는 점에서 일견 흥미로운 과목이라 할 수 있을 텐데, 그는 답을 찾았다. 1인 출판사를 차리기로 한 것. 전에 도시에서 신문사 편집기자와 출판사 직원으로 근무했던 경험을 살려 어디에도 없는 산중 독립출판사를 열기로 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할 줄 아는 건 출판 일뿐이더라. 인생 후반을 시골에서 보내려고 내려온 만큼 지속 가능한 일을 찾아야 했는데 그게 출판이었다. 쉽지 않겠지만 하나하나 맞춰가며 길게 보고 달려가자는 생각이었다. 그래 집 한쪽에 작은 흙집 사무실을 지어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적막한 산속에 차린 1인 출판사라니. 거북이를 끌고 산책하는 장면을 보는 것처럼 생소해 오히려 흥미롭다. “사업성만 따질 경우 시골에서 출판사를 하는 건 바보짓이나 다름없다. 좋게 말하면 용감한 짓이지만, 상식적으로 보면 무모하고 미친 짓이다. 그러나 가치 있는 삶의 한 방편이 출판이라는 점에 착안했다. 사업성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도시적 습성에서 벗어나 나만의 철학을 담은 좋은 책을 만든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출판업은 사양사업이지 않나? “인터넷 세상이 되면서 책을 절대적으로 읽지 않는 풍조가 만연했다. 이를테면 유튜브 왕국에서 누가 활자 매체를 보겠나. 하지만 책의 콘텐츠가 좋을 경우엔 활로를 찾을 수 있을 거라 봤다. 시장 흐름을 따라가지 않고 내 색깔을 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 자립하고자 했다.” 기획, 편집, 교정, 인쇄, 유통 등 모든 걸 혼자 처리하는 게 가능한가? “초심자라면 어려운 대목이겠지. 내겐 일련의 경력이 있어 헤쳐나갈 수 있었다. 도시에 살 때 회계사무실에서 근무했던 아내가 서류 정리 등의 일을 맡아줘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부부가 함께 원하는 곳에 살며,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만족스럽다.” 출판업자들의 머리를 지배하는 생각은 한 가지로 보인다. 어떻게 해서든 팔릴 수 있는 책을 내야 한다는 강박증에서 해방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다는 반증이겠고. “인간이 사는 곳 어디든, 어떤 일이든 피곤하지 않은 게 있던가. 그게 운명이다. 맞부딪혀 이겨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출판은 하나의 언론이다. 나를 표현하고, 내 철학을 표방하는 매우 매력적인 장르다. 그러니 괴로울 리가 없다. 자주 보람을 느낀다.” 어떤 분야의 책들을 출판했지? “인문사회 분야 책에 집중했으며, 아이들을 대상으로 삼은 동화책도 다수 출판했다. 혐오와 사회적 편견, 생명의 경외심에 관한 문제를 다룬 첫 동화책 ‘보신탕집 물결이의 비밀’에 지향점이 드러나 있다. 2019년에 낸 ‘가짜뉴스를 시작하겠습니다’ 역시 동화책이다. 아동들에게 가짜뉴스라는 게 과연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게 인간과 사회에 어떤 악영향을 주는지 보여주었다.” 어린이들에게 무거운 사회문제를 들려주는 이유가 있겠지? “그들은 내일의 주인공이며, 미래의 유권자이지 않은가. 그러나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정치, 환경, 인권, 노동, 평화 문제 등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출판을 통해 아이들이 생각을 키울 기회를 제공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참 잘사는 것 같지?” 요즘 출판계 현실을 보면 흉년도 이런 흉년이 없다. 쓰러지고 자빠지는 출판사들이 흔하다. 그나마 승산이 있는 게 동화책 출간이다. 선하고 아름답고 몽환적인 주제를 담은 동화책 시장은 그나마 숨을 쉰다. 그런데 속세와 동떨어진 산골에 출판사를 차린 김완중은 무겁고 딱딱하고 골치 아픈 사회문제를 동화책으로도 출판한다. 이게 장사가 될까? 그는 일종의 언론 행위로 책을 만들어 세상사에 가담한다. 횃대에 올라앉은 새벽 수탉처럼 한번 호기롭게 목청을 돋워 세상의 둔감과 일탈을 일깨우고 싶은 것이다. 이런 의도에 무슨 결함이 있을까마는 책이 팔리긴 할까? 팔린다. 얼핏 물심양면의 불황이 자심할 것 같지만 나름 탄력을 가지고 굴러간다. 출판계에 만연한 부진을 고려하면 결코 적은 부수가 아닌 2만 부쯤 팔린 책이 드물지 않았다고 하니 이미 서광이 들이친 형국이다. 어쩌면 나는 오늘 출판계 변방에 잠재한 천하장사를 만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뭔가 대단한 성과를 거둔 건 아니다. 하지만 자리는 잡혔다. 매년 10권 이상의 책을 꾸준히 출판하면서 작지만 소중한 결과를 거두었고 자신감도 얻었다.” 자극과 경쟁의 농도가 옅은 시골 환경에서 출판의 촉을 유지하기 어려운 면은 없던가? “모든 걸 혼자 움직이며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자칫 고립될 수 있는 여건이긴 하다. 소통할 수 있는 출판업자가 주변에 없다는 점이 가장 아쉽다. 그러나 장점이 많다. 무엇보다 시간의 여유가 있어 한나절을 멍때리며 지낼 수도 있는데, 이건 도시에선 누릴 수 없는 특혜가 아닐까 싶다. 마음에 여유를 부여하면 생각에도 한결 깊이가 생기는 것 같다. 따라서 서울에선 나올 수 없을 기획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한다. 서울을 벗어난 건 여러모로 내게 좋은 선택이었다.” 제한된 환경과 자원으로 원하는 퍼포먼스를 이끌어낸다는 게 어디 쉬운가. 김완중은 기획력으로 승부한다. 부인의 말에 따르면 그는 ‘기획력의 천재’다. 지역주민들과 교류는 잦은가? 주민과 유대관계를 맺지 않을 경우 고독을 벗 삼아야 하는 게 시골 생활인데. “농촌 사회에도 정치가 있고 조직이 있으며 이슈가 있다. 부당한 상황과 맞서 싸워야 할 일이 있을 때면 난 적극 나서는 편이다. 지역 사회단체와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공동 대응한다. 어디에 살든 작은 외침일망정 외칠 땐 외쳐야 하지 않겠는가. 산골에 산다고 그마저 외면한다면 슬프지. 물론 나만의 자유를 침해당할 정도의 처신은 자제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텃세로 궁지에 몰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외교력을 발휘하는 게 좋겠다. 나를 포장할 것 없다. 시골 생활은 시골 사람들이 박사라는 걸 인정하고 함께 묻어가면 된다.” 경제 문제에 걱정은 없나? “한때 불안했다. 가진 것 없이 내려와 빚만 잔뜩 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안감에서 신속하게 벗어났다. 왜냐고? 자비로운 아내가 돈 문제에 관한 한 일언반구 불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웃음) 여전히 근근이 살아가는 형편이지만, 부부 공히 굉장히 높은 만족도를 가지고 소복소복 살아간다. ‘우리, 참 잘사는 것 같지?’ 아내와 자주 하는 얘기가 그렇다.” 이제야 하는 얘기지만 그의 거처는 몹시 아름답다. 순수한 산릉과 녹색 언덕들이 장대한 성채를 이루고 집의 원경을 이루고 있어서다. 여기에 부부애까지 후끈하니 겹으로 절경이다. 김완중이 주는 귀농 Tip •귀농 후보지에서 미리 반년 내지 1년은 살아보고 최종 결정을 하자. 지역의 속사정을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장수군에서는 ‘1년 살아보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중년 이후의 귀농엔 여유자금 확보가 필수다. 최소 3년 정도는 수입이 없어도 생활할 수 있는 기본 자금을 준비하라. •집 장만이나 수리에 큰돈을 쓰지 마라. 만약 팔아야 할 경우 쉽지 않은 게 농촌 주택이다. •남들의 귀농 성공 사례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자. 전혀 만만치 않은 게 농사다. •무리한 초기 투자는 금물이다. •도시에서 쌓은 능력과 경륜을 활용해 농외소득을 개발하라. •원주민의 간섭을 텃세로만 보지 말자. 귀농인에 대한 진정한 관심 또는 걱정으로 하는 간섭일 수 있으니까.
- 2022-11-09 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