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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의 크리스마스 단팥죽 사건
- 필자가 중고생일 때 교회 오빠가 좋아 새벽기도 한 달 개근한 적도 있고 크리스마스 새벽 송을 부르러 다닌 경험도 있다.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다. 크리스마스 때 생긴 일을 말씀드리려 한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교회 다니시는 어르신들이 새벽 송을 당신 집 앞에서 불러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지금은 신림사거리가 번화하지만 그 시절만 해도 한적한 시골 마을의 읍내 번화가만도 못했다. 집들도 여기저기 떨어져 있고 가게도 일찍 문을 닫아 깜깜한 거리를 무리지어 다니면서 오들오들 떨면서도 기분 좋게 삼삼오오 새벽 송을 부르며 다닌 기억이 있다. 그러면 어느 댁에서는 뛰어나와 사탕봉지를 건네주시고, 어느 분은 센베이 과자를 몇 봉지씩에 담아서 주셨다. 당시에는 그런 먹거리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다들 좋아했다. 그중 한 할머니께서는 추우니까 마지막에 꼭 당신 집에 와서 단팥죽을 먹으라고 당부하셨는데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그 할머니 댁에서 일어났던 에피소드다. 몹시 추운 날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새벽 송을 마치고 발을 동동거리며 할머니 댁으로 몰려갔다. 다들 따뜻한 단팥죽을 먹을 기대 속에 기분이 좋아 보였다. 가파른 고갯길을 좀 올라가 드디어 할머니 댁에 도착했고 모두에게 한 공기씩의 먹음직스런 단팥죽이 앞에 놓였다. 그런데 한 숟갈을 떠 뜨거운 단팥죽을 입속으로 떠넣는 순간 우리 모두는 요즘 인터넷 용어로 헉~~!!이었다. 단맛도 아닌 정말 희한한 맛이었는데 뱉을 수도 없고 참 난감했다. 그 순간 할머니가 우리들 표정을 보더니 이렇게 한마디하시는 게 아닌가. “당원인 줄 알고 소다를 넣었나봐유. 워쩐대유~”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그야말로 멘붕 상태였다. 그때 젊은 청년이었던 선생님께서 우링게 무언의 눈빛을 보내셨다. “그냥 먹어라. 아무 소리 말고.”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눈치는 있었던 우리는 표시 안 내고 웃으면서 “잘 먹겠습니다~”를 외쳤다. 춥고 배고프던 시절에 있었던 ‘크리스마스 단팥죽 사건’이었다. 갑자기 추워진 어느 날 저녁 밖에서 사들고 온 단팥죽이지만 몸이 아픈 남편에게 고명 얹고 따끈하게 데워주던 날 그날의 추억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 2016-11-30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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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스 클럽, 칠드런스 하우스
- 아들이 뉴욕 변두리 지금의 집으로 이사한 지 10년 되었다. 이 동네는 단독주택 주거지로 중산층 마을이다. 1950년대에 조성되었으며 그 시절에는 두 블록만 건너가면 맑은 개울물이 졸졸졸 흐르는 시골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마을이었다. 지금 그 개울은 오버브룩이라는 이름으로 흔적만 남기고 있다 이웃들은 새집을 지어 입주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곳에서 아들딸 낳아 길러 독립시키고 이제는 나이 지긋한 시니어가 되어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동네는 마을 공동체의 속성이 있다. 아들이 이사하고 며칠 되지 않아 앞집에 사는 로즈라는 이름의 80대 유태인 할머니를 만났다. 혼자 사는 할머니는 우리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동네를 소개하면서 아들 옆집에는 잭이라는 아이리시 독거남이 산다고 알려줬다. 그 집 이름은 ‘보이스 클럽’이란다. 잭을 만나니 로즈의 집은 ‘칠드런스 하우스’라고 알려준다. 그 의미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로즈의 집은 6남매 자녀들이 근처에 살고 있어 자녀들은 물론 손자들, 증손자들까지 놀러와 늘 붐볐다. 때로는 이들이 한 달씩 로즈와 함께 살기도 한다. 그야말로 ‘자녀들의 집’이다. 잭은 70대 부인과 사별한 독신남으로 잭의 집은 늘 남자 친구들이 들이닥쳐 북적인다. 원래는 잭의 아버지 집이었는데 잭이 매입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 남자들이 모여 담소도 하고 스포츠 게임도 보고 포커 게임도 하는 모양이다. 늘 왁자지껄 소란스럽다. 이 집 이름 역시 ‘남성 클럽’이 딱 맞다. 필자 며느리는 그 마을로 이사 갈 때 두 번째 아이를 가진 상태로 만삭이었다. 아이를 출산하는 날, 마침 로즈의 생일파티가 있어 동네가 붐볐다. 그 인연으로 로즈는 손녀의 생일을 꼬박꼬박 챙긴다. 생일이 같다는 인연이 그렇게 반갑고 좋은 모양이다. 로즈는 마을에 활기를 가져다준 새 에너지가 경이로웠는지도 모른다. 잭은 아들이 정원일을 하거나 바깥 청소를 하면 “장인이 해줄 텐데, 장인 기다리지?” 하며 아들을 놀린다. 그럴 때마다 아들은 민망해한다. 작년에 바깥사돈은 은퇴를 했다. 은퇴 후 처음으로 딸 집에서 한 달간 머무르며 아이들을 도와주었다. 이때 필자 아들이 바빠서 미루기만 했던 집 페인트도 장인이 해줬단다. 아마도 잭에게는 그 풍경이 낯설고, 가정을 이룬 자녀 집 페인트를 해주는 별난 내리사랑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필자의 아들을 만나면 종종 그렇게 장난을 쳤다. 잭은 세 자매를 두었는데 모두가 교사다. 그런데 딸과 손자들의 방문은 거의 없었다. 70대인데도 햇살이 깜짝쇼를 하는 봄에는 무개차를 타고 달리는 멋도 부린다. 집과 정원관리도 깔끔하고 완벽하게 해낸다. 어느 구석 하나 홀아비 티가 전혀 나지 않는다. 아들 집은 오래된 집이라 고장도 잘 나고 부품 구하기도 힘들다. 있는 것을 다시 사용해야 하니 쉽지가 않다. 이럴 때마다 잭은 친절하게 도와주는데 필자 아들에게 닦아라, 돌려라, 빼라, 밀어 넣어라 하며 수리를 도와준다. 본인 손은 절대로 대지 않는다. 이런 잭의 태도를 보면 바깥사돈이 신체 멀쩡하고 건강한 자녀 집 페인트를 대신 칠해준 게 이상스럽기도 했겠다. 필자도 종종 아들 집에 가서 손자들을 돌봐준다. 이웃들은 틀림없이 필자 아들 집을 ‘부모의 집’이라 이름 붙였을 것이다.
- 2016-11-29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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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 라이프] 사랑나눔을 실천하는 스타들
- 글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knbae24@hanmail.net) “유흥업소에 안 간다. 2006년 이후로는 한 번도 안 갔다. 왜냐하면, 4만5000원씩 아이들을 후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돈이면 쓰레기더미 안에 있는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다. 파리가 눈에 알을 낳아도 쫓을 힘이 없는 아이들이다. 그 아이를 살리면 그 아이가 변해서 사회를 살린다. 내가 번 돈이 이렇게 소중한 일에 쓰인단 걸 목격했기 때문에 큰돈을 그렇게 쓸 수 없게 됐다.” 구호단체 컴패션 홍보대사에서부터 북한 어린이 돕기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부인 신애라와 함께 사랑나눔 실천을 하는 스타 차인표씨의 말이 큰 울림을 준다. 자살률 1위, 노인빈곤율 1위, 사회적 관계 최하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10월 발간한 보고서 이 적시한 한국의 상황이다. 취업난, 양극화 등으로 인해 가족 해체가 급속히 진행되고 부모에게 버려지는 아이들도 급증하고 있다. 어느 때보다 사랑나눔이 절실할 때다. 하지만 후원, 기부, 봉사 등 사랑나눔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연예인 스타들이 선행에 적극적으로 나서 많은 사람을 사랑나눔 실천에 참여시키는 아름다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연예인 스타들이 사랑나눔 기폭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1981년부터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의 후원회장을 맡아 불우한 어린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3년 전부터는 제로캠프라는 청소년들을 위한 비영리 단체의 이사장직을 맡아 문화 예술을 통한 비행 청소년의 교화에 나서는 등 다양한 사랑나눔 실천을 펼치고 있는 최불암씨와 백혈병 어린이, 위안부 할머니, 네팔과 중국 지진 피해자 등에게 거금을 쾌척하는 등 전방위적 선행을 펼치고 있는 송중기씨 등 많은 연예인 스타가 사랑나눔 실천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최근 들어 연예인 스타들의 사랑나눔의 양태가 진화하며 선행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있다. 그동안 불우이웃이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성금 기부나 자선단체의 홍보대사, 방송사의 자선 프로그램 출연 등이 스타 선행의 주류를 이뤘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김혜자·한지민·유재석의 재능기부, 김정은·이영애·문근영·한혜진·박해진의 국내외 빈민지역에 학교, 병원, 도서관, 우물 등 시설 기부, 최불암·정애리·고두심·김제동의 재단을 통한 불우 청소년 지원, 이효리·송혜교·송중기의 위안부 할머니 지원 등 스타들의 사랑나눔의 스펙트럼이 크게 확장됐다. 기부 형태도 불우이웃과 시설에 대한 후원, 청소년과 학교의 장학금 쾌척,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성금기탁 위주에서 벗어나 한지민·송혜교 등 스타들의 책 인세 기부, 이승기·박해진 등 쌀 화환 기부, 최강희의 골수 및 장기기증, 차인표-신애라·정혜영-션 부부의 제3세계 어린이 후원금 지원, 김장훈·하춘화의 행사와 캠프를 통한 기부 등 매우 다양해졌다. 일회성 이벤트에 그쳤던 연예인의 사랑나눔과 선행은 수십 년 동안 지속해서 전개해나가는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 김혜자·최불암·고두심·하춘화·안성기·정애리·차인표·김장훈·최수종·유재석·션·장나라 등은 10~40년에 이르는 장기적 선행을 펼치고 있다. 사랑나눔을 시스템화하거나 조직화하는 스타들도 많다. 공연 등 수입원이 생기는 이벤트 수입의 일부를 계속 기부하는 김장훈을 비롯해 적지 않은 스타들이 자신의 연예활동 수입의 일정 부분을 떼어 소년 소녀 가장이나 독거노인, 장애인들을 지속해서 돕는 것을 체계화했다. 김원희·김정은 등은 ‘따뜻한 사람들의 모임’을, 최수종·오윤아·김수로 등은 ‘좋은 사회를 위한 100인 이사회’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봉사활동과 기부사업을 펼치고 있다. 국내의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웃을 대상으로 주로 이뤄지던 스타들의 사랑나눔은 아프리카, 동남아 등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안성기·김혜자·정애리·박해진·이영애·송혜교·문근영 등 많은 스타가 세계 각국의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나누고 있다. 이민호·장동건·이승기·장근석처럼 스타와 팬클럽이 함께 자선활동이나 선행활동에 나서는 행태도 이제는 일상적 풍경이 됐다. 스타들은 왜 사랑나눔에 나서는 걸까. “조그마한 도움이 한 아이의 생명을 살리고 삶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도움을 받은 아이가 커서 사회와 이웃에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참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다.”오랫동안 청소년들에게 장학금 기부를 하고 장애인단체 홍보대사 등 다양한 방면에서 사랑나눔을 실천하는 고두심씨의 말이다. 40여 년 동안 불우 아동과 청소년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온 최불암씨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투자만큼 소중한 일이 없다. 더욱이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아이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면 아이가, 사회가, 국가가 긍정적으로 변한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국내에 있는 고아는 물론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프리카의 아이들까지 몸과 마음으로 포근히 감싸 안는 김혜자씨는 2019년까지 후원금을 미리 내고 이렇게 말했다. “광고를 찍거나 돈이 생기면 후원하는 아이들 것을 떼어놓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늘 불안하다. 내가 돈이 없어 안 주면 걔네들은 굶으니까. 나야 돈이 없으면 우리 아들이 밥이라도 먹여주겠지만, 그 아이들은 안 되지 않나. 당연한 일이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오랫동안 9억 원에 가까운 돈을 익명으로 기부하고 시골 지역에 청소년을 위한 공부방 등을 지원한 문근영씨는 “제가 기부 등을 하면서 더 행복하고 매우 기쁩니다. 이런저런 상황들, 사연들, 사정들이 있지만 기부할 때 ‘우리 같이 그래도 열심히 살아봐요’라는 그런 메시지 정도는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요”라고 기부 이유를 밝혔다. 루게릭병 환자 돕기에서부터 어린이 재활병원건립 후원까지 다양한 자선사업과 캠페인을 왕성하게 펼쳐 ‘선행천사’라는 별칭을 얻은 션. 그는 사랑나눔 실천 공개에 대해 “일부 사람들이 (사랑 나눔을) 조용히 할 수 있는데 왜 공개하냐고 말한다. 연예인이기에 많은 사람에게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일을 알려서 그걸 공유하면 더 빨리 이룰 수 있다. 겨울을 나는 데 필요한 연탄이 300만 장인데, 혼자서 기부할 수 없는 양이기 때문에 많은 분에게 알리면 300만 장의 기적을 쉽게 이룰 수 있다”고 설명했다.
- 2016-11-29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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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웰빙의 아름다운 완성은 '웰다잉'
- 영화 ‘죽여주는 여자’는 종로 일대에서 노인들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소위 ‘박카스 할머니’ 이야기 이다. 노인들 사이에서 ‘죽여주게 잘하는 여자’ 로 소문이 나있는 할머니가 진짜로 여러 가지 이유로 죽고 싶은 노인들을 진짜로 죽여주는 줄거리로 안락사 또는 존엄사에 대한 무거운 화두를 던지는 영화이다. 영화를 보기도 전에 이미 공개된 줄거리만 보고도 마음이 무거워지고 왠지 불편한 진실을 피하고 싶어 보고 싶지가 않았다. 그만큼 우리 시니어들에게는 마치 선전포고 하듯 우리 또는 우리 주변에 곧 닥칠지도 모를 문제이기에 더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다가온 영화였다. 주인공을 맡은 여배우도 연기하기 전에 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해야 한다는 마음에 많이 망설였다고 한다. 언론 인터뷰에서 여배우는 어렵게 영화를 찍기로 결정하고도 촬영 내내 곤혹스러웠고 영화 완성 후에도 우울감에 헤어나기 힘들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주연 배우의 마음처럼 필자도 보고 싶지 않은 마음과 마치 숙제처럼 봐야 한다는 의무감 사이에서 망설이다 결국 막 내릴 즈음 이 영화관을 찾았다. 그리고 그 배우처럼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고 보고 난 후에도 몹시 우울했다. 돈은 있지만 병들어 수족을 움직일 수 없는 노인, 가난하고 치매 초기 노인, 그리고 몸도 정신도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여유도 있지만 고독 사를 두려워하는 외로운 노인 이렇게 세 명의 노인을 하루하루 몸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절대빈곤의 여자가 차례로 죽여준다. 죽여주는 사람도 죽임을 당하는 사람도 다 우리나라 노인문제를 지나칠 정도로 사실적이고 덤덤하게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미래에 대해 아무런 희망도 없이 연명만 하고 있는 자신의 삶을 죽음보다 고통스러워하고 품위와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어 하는 노인들을 통해 안락사(존엄 사)에 대한 논의에 물꼬를 트고 싶어 하는 거 같았다. 그러나 영화가 지나치게 덤덤하게 존엄사로 직진하다 보니 주제전달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감안해서 봐도 심하게 말하면 살인(자살) 방조의 느낌이 강하게 들어 불쾌하기까지 하였다. 힘들고 어렵게 남아 있는 자신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는 현재 몸이 불편하거나 가난하고 외로운 노인이 삶을 모두 너무 굴욕스럽게 만든다는 잔인함이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아무리 노후준비를 완벽하게하고 건강관리를 잘한다 한들 절대 병들지 않고, 외롭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예견치 않은 병과 고독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 이런 우울한 영화를 피하기보다는 잘 죽는 법에 대하여 생각하고 현명에 맞을 준비를 하게 하는 ‘웰 다잉(well-dying)’에 대하여 생각할 기회를 가져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육체적, 정신적 건강의 통해 건강하고 삶을 유지하며 ‘웰빙(well-being)’ 못지않게 ‘웰 다잉(well-dying)’도 함께 연장선에서 생각을 해야 할 거 같다. 웰빙의 아름다운 완성은 웰다잉이기 때문이다.
- 2016-11-28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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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봉규의 心冶데이트] 강한 여자 김성경의 성적 판타지
- 대학생 아들을 둔 김성경(45), 자신감 하나는 국가대표급이다. 이것이 오늘의 대체 불가능한 방송인 김성경을 만든 원천이 되었고 그녀는 현재 아나운서가 아닌 방송인으로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한 남자가 리드해줄 때 성적 판타지가 충족될 것 같다는 그녀는 이제야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글 이봉규 시사평론가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김성경과는 TV조선의 이란 프로그램에서 3년 이상 같이 방송을 하다 보니 너무 친해져서 오누이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막말로 성경이가 홀딱 벗고 덤벼들어도 아무 감흥이 없을 것 같다. 남자 친구가 생기면 곧바로 나에게 보고할 정도다. 지금은 특별한 사이의 남자친구는 없고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보고 있는 중이란다. 에서 잡힌 강한 여자 캐릭터 때문에 손해가 막심하다고 투덜댄다. 어찌하다 보니 강하고 드센 여자가 되어버렸고, 남자들이 자기를 어려워해서 잘 달라붙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덩치가 큰데(173cm) 캐릭터까지 강하게 잡혀서 속상하다는 자기 진단이다. 실제로 그 이유로 인해 고민하다가 일시적으로 에서 하차했던 적도 있다(나중에 다시 복귀했지만). 본인은 강한 여자 캐릭터가 부담스럽겠지만 이봉규가 분석하기에는 김성경이 오히려 그 덕을 봤다. 그 덕에 아나운서가 아닌 방송인으로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고, 최근에는 영화 주인공까지 맡아 촬영에 들어갔다. 이 영화에서 김성경 역할은 드세고 강한 성격의 하숙집 주인으로, 최성국과 부부로 나온다. 만약 지금까지 김성경이 연약하고 고상한 여자처럼 억지로 꾸며왔으면 영화 주인공으로 캐스팅될 일도 없고(실제로 감독이 을 보고 김성경을 여자 주인공으로 점찍었다고 털어놨다), 방송인으로서 지금 같은 확고한 입지의 김성경은 없었을 것이다. 자기가 친언니인 김성령처럼 미스코리아(진) 출신의 엄청난 미인도 아니면서 복에 겨워 투덜댄다. 아마 남자들이 못나서 김성경을 잘 다루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봉규의 심야데이트’를 위해 인터뷰하는 날 김성경은 “내가 아무리 강한 척해도 그걸 좋게 귀엽게 봐주는 남자가 드물다”고 털어놓는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자기를 무섭게 여긴다는 것이다. 또박또박 자기주장을 펼치면 강하고 드센 여자로 보고 부담스러워 도망간다는 푸념이다. “남자들의 자격지심이냐?”라고 나에게 쏘아붙인다. 그녀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한량 이봉규도 김성경을 가끔 무섭게 느낄 때가 있으니까 얌전하고 젠틀한 남자들은 김성경 앞에 서면 주눅이 들어 도망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돈 많은 남자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다”고 김성경은 진단한다. 돈이 많으면 자격지심 같은 것은 없을 테고 뭔지 모르게 당당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강한 여자에게 오히려 매력을 느낄 수도 있겠다. 실제로 언니 두 명 다 돈 많은 남자들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간접적인 영향도 받았을 것이다. 둘째 언니인 톱스타 김성령의 남편은 부산에서 알아주는 준재벌급의 사업가이고, 첫째 언니의 남편은 대형 종합병원 부원장이라 돈 걱정 안 하면서 아주 잘살고 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형부 둘 다 언니들에게 꼼짝 못하고 산다고 하니 김성경은 “돈 많은 남자들이 자격지심 같은 것은 없고 오히려 마음이 여유로울 것 같다”는 판단을 할 수도 있겠다. ‘성적 판타지(sexual fantasy)’를 물으니 아이러니하게도 남자가 자기를 벽에 강하게 밀치고 키스 세례를 퍼붓기를 원한다고 하니 어쩌면 강한 여자의 콤플렉스일지도 모른다.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한 남자가 리드해주길 원하는 것일까? 고전 영화 에서 율 브린너가 데보라 카를 강하게 리드했듯 그런 판타지를 꿈꾼다고 말하는 김성경의 눈빛이 간절하다. 영화 에서 데보라 카는 정숙하고 우아한 영국 여인이다. 김성경도 데보라 카에 자신을 대입시키고 싶은 마음일까? 하여간 영화에서 데보라 카는 다소 거칠고 자기밖에 모르는 왕(율 브린너)과 사사건건 충돌하지만 그러는 사이 왕에게 묘한 애정을 느낀다. 참고로 이봉규가 보기에는 세 자매 중 첫째 언니가 영화의 여주인공 데보라 카와 가장 닮았다. 그리고 세 자매 중 첫째 언니가 가장 매력적으로 생겼다. 그다음이 성령이고 성경이 인물로는 제일 처진다. 물론 이봉규(나름 고수)의 판단이지만 김성경은 자기가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내가 미스코리아 대회에 안 나간 것은 언니가 진으로 뽑혔기 때문에 더 이상 할 것이 없어서”라고 큰소리친다. 자신감 하나는 국가대표급이다. 이것이 오늘의 대체 불가능한 방송인 김성경을 만든 원천일 것이다. 김성경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각별한 사랑으로 자신감 넘치게 살아왔다. 지금도 어머니는 성경이를 세 딸 중에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예쁜 언니들보다 자기 할 말 거침없이 다 해대면서 강한 여자로 방송하고 강연 다니는 막내딸이 자랑스럽다. 어머니는 종갓집의 둘째 며느리로서 내리 딸을 두 명 낳고 셋째는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고 시집에서도 은근 압박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마침 태몽도 좋아서 아들인 줄 확신했는데 또 딸이 태어나니까 아빠는 실망해서 담배만 뻐끔뻐끔 피우고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때 어머니는 “열 아들 부럽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했다. 어머니의 기도가 현실로 이루어졌으니 대견스러움을 넘어 자랑스러워할 만도 하다. 어머니는 성경이 태어나고 세 번 놀랐다고 한다. 당연히 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딸이 나와서 놀랐고, 진통도 없이 쑥 순산해서 놀랐고, 구정 날에 태어나서 놀랐다고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족들을 놀라게 했으니 강한 캐릭터를 가진 것도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강한 여자인 그녀의 인생이 늘 씩씩하고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이혼의 아픔도 겪었고 혼자 힘으로 아들 키우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에서도 밝혔듯이 이혼 이유가 남편의 외도 때문이었으니 그 아픔이 남다를 수 있다. 짓궂은 멤버들의 이혼에 관한 질문 공세에 김성경은 쿨하게 대답했다. “10여 년도 더 된 이야기다”라며 “처음에는 성격 차이였다”면서 “하지만 주변에서 ‘여자가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해줬고, 결국 확인했다”고 방송에서 털어놨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이상하게 크게 화가 나지 않았고 그냥 쿨하게 보내줬다”고 한다. 그녀는 한술 더 떠서 “내가 먹고살려고 이런 이야기까지 해야 하나 싶어 방송 중에 울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강한 여자인 그녀도 이혼의 아픔과 혼자 아들을 키워온 자신의 인생 스토리에 눈물이 저절로 나올 법하다. 다행히 아들이 잘 자라주었다. 지금 뉴욕대(NYU)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고 있다. 아들이 대학을 가니까 홀가분해진 느낌이라고 말한다. “예전에는 지성과 미모를 숨기고 살았는데 이제 아들도 잘 키웠으니까 스스로 자신이 자랑스럽다”고 금방 분위기가 뜬다. 이게 김성경의 캐릭터이고 그녀만의 독특한 매력 포인트다. 그녀가 자랑할 만도 한 것이 아들은 남의 나라 말로 그 어려운 공부를 하면서도 엄마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레코드 가게에서 알바하려고 인터뷰 신청을 해두었단다(지금쯤이면 일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미국 유학의 경험이 있지만 첫 학기 때는 학업 스케줄을 따라가기가 보통 어렵지 않다. 첫 학기부터 알바를 하려고 마음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효심이고 아들 또한 엄마를 닮아서 자신감이 넘친다고 봐야 한다. 아들은 그녀에게 “엄마 왜 결혼 안 해? 앞으로는 내 생각 말고 엄마 행복만 생각하고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해!”라고 입버릇처럼 주문을 한다니 대견스럽다. 그녀 생일에 아들에게 온 카톡을 읽으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 글을 쓰는 데 참고만 하겠다고 내 카톡으로 전달해달라고 부탁해서 겨우 받아냈다. 그녀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지면에 그대로 옮긴다. 나중에 분명 강한 여자 김성경에게 야단을 맞을 게 뻔하지만 절친 오빠인 이봉규만 보기 아까워서 소개한다. 엄마 생일축하해요! 너무나도 감사하고 지금까지 계속 나를 믿고 이해해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다 엄마 덕분이에요. 엄마 때문에 더 노력하고 더 열심히 하고… 저한테 그럴 수 있는 힘이랑 Motivation을 주셔서 너무나도 감사해요! 제가 힘들 때도 있고 엄마도 힘들 때도 있겠지만 둘 다 서로를 사랑하고 도와주는 우리 모자 사이, 전 이런 게 있는 게 너무나도 기쁘고 감사해요. 이런 엄마를 가질 수 있게 해주신 할머니 할아버지도 감사하고, 하늘에 계신 아빠도 너무 감사해요. 제가 지금 곁에 있지 못하는 게 너무나도 안타깝지만 저의 마음과 생각은 바로 거기에 있어요. 엄마가 저한테 힘을 주시는 것처럼 저도 엄마한테 힘이 됐으면 좋겠어요. 생일 축하해요, 사랑해요~~~ 대학교 1학년의 아직 어린 나이인데 참 대견스럽다. 그 아들의 바람대로 앞으로 강한 여자 김성경을 벽에 화끈하게 밀치고 키스 세례를 퍼부을 멋진 남자가 나타나길 고대해본다. 그때는 이 오라비가 그놈의 발바닥을 사정없이 다디미 방망이로 후려칠 것 같다. 그녀 아들의 바람대로 앞으로 강한 여자 김성경을 벽에 화끈하게 밀치고 키스 세례를 퍼부을 멋진 남자가 나타나길 고대해본다. 그때는 이 오라비가 그놈의 발바닥을 사정없이 다디미 방망이로 후려칠 것 같다.
- 2016-11-24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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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철훈의 사진 이야기] 안개 속에서
- 지난 6월호에서 손주의 잉태 소식을 ‘생명은 기계가 아닙니다’라는 제목으로 전해드렸습니다. 이제 그 아기를 만나보고 몽골로 돌아왔습니다. 드디어 세상에 태어난 아기를 만나러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따로 따로 버스를 타고 비행기를 갈아타며 다시 빨리 달린다는 열차와 자동차로 이름도 생소한 독일 에어랑엔(Erlangen)의 헤르초게나우라흐(Herzogenaurach)에 밤늦게 도착했습니다. 제 아내, 즉 아기의 할머니는 나보다 먼저 출발했고 할아버지인 나는 한 달 후에 닿은 것입니다. 세 살과 네 살인 아기 오빠는 아직 동생이 생소합니다. 언제라도 뛰어가 안길 수 있었던 엄마의 품안엔 아직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아기가 있습니다. 자기들과 항상 놀아주던 엄마와 아빠가 새 아기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생소하면서도 한편으론 이해가 될 듯도 합니다. 자기들과 비교할 수도 없는 너무나 어리고 여린 생명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예 경쟁을 포기하고 자기들끼리 눈치껏 알아서 노는 데 익숙해지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도 어른들이 보기에 착하게만 굴 수 없는 나이라서 어른들이 챙겨줘야 할 일들은 끊이지 않고 터집니다. 두 녀석의 활기찬 에너지는 언제나 생기가 넘쳐 어른 한두 명이 감당하기가 벅차다는 것은 현장에 도착하기 전 이미 아내의 카톡을 통해 내 머리에 입력되었습니다. 밤늦게 도착해 자고 나서 현장에 투입되니, 역시 내 주된 일이 그 두 녀석과 노는 것입니다. 내가 도착하기 전 아내는 어떻게 혼자서 이 일들을 감당하고 있었는지 존경스럽습니다. 나 혼자서도 만만치 않은 개구쟁이 두 녀석을 돌보는 일을 아내는 짬짬이 하는 곁다리 일로 담당했다니! 몸을 추스르고 있는 며느리가 행여 나중에라도 뒤탈이 있을까봐 아내는 모든 빨래와 집안 정리와 청소, 거기에 세끼의 식사를 정성을 다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단독주택이라 지하층부터 3층 다락방까지 오르내리기를 쉬지 않습니다. 두 녀석 유치원엘 자동차로 데려다주고 데려옵니다. 장을 봅니다. 그 와중에 아이들과 친분이 있는 가족들을 초대해 칭찬받을 대접도 하였습니다. 한국 아줌마의 놀라운 힘을 곁에서 직접 보니 정말 여러 번 혀를 내둘러야 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다 드디어 늦게 일어나도 되는 토요일 새벽입니다. 다 쉬고 있는 새벽입니다. 깊이 자고 있는 저를 깨워 보여줄 게 있다며 아내가 조용히 문을 열고 골목골목을 돌아 데려간 곳은 새벽안개가 피어나고 있는 벌판이었습니다. 삶의 현장을 떠나 갑자기 다른 세상에 온 것입니다. 공간적으로의 이동뿐 아니라 시간의 공백도 느껴졌습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읽은 헤르만 헤세의 시가 정확히 떠올랐습니다. ‘Im Nebel(안개 속에서)’였습니다. 전혀 내 머릿속에는 이미 없을 거라고 당연히 치부하고 있었던 독일어 수업시간이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되었습니다. 정말 기적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며 꿈에도 생각 못했던 독일의 안개 속에 오십 년의 시간적 공백을 느끼며 바라보았습니다. Im Nebel Seltsam, im Nebel zu wandern! Einsam ist jeder Busch und Stein, Kein Baum sieht den andern, Jeder ist allein. Voll von Freunden war mir die Welt, Als noch mein Leben licht war; Nun, da der Nebel fallt, Ist keiner mehr sichtbar. Wahrlich, keiner ist weise, Der nicht das Dunkel kennt, Das unentrinnbar und leise Von allem ihn trennt. Seltsam, im Nebel zu wandern! Leben ist Einsamsein. Kein Mensch kennt den andern, Jeder ist allein. 안개 속을 헤매면 이상하여라! 숲과 돌은 저마다 외로움에 잠기고 나무도 서로 보지 못한다. 모두가 다 혼자다. 내 삶이 아직 밝던 시절엔 세상은 친구들로 가득했건만 이제 안개 내려 아무도 보이지 않는구나. 어쩔 수 없이 조용히 모든 것에서 사람을 떼어놓는 그 어둠을 조금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참으로 현명하다 할 수 없다. 안개 속을 헤매면 이상하여라. 인생이란 고독한 것. 사람들은 서로 모르고 산다. 모두가 다 혼자다. 그렇게 그 시를 조금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우리의 나이를 헤아려보며 아내의 손을 조금 더 느껴보았습니다. 조금 더 넓게 보기 위해 구릉에도 올라가 보았습니다. 풀에 맺힌 안개 이슬로 신발과 바지 섶이 젖었습니다. 마을로 되돌아와 아들 집에 이를 때 안개 속에 뿌옇게 떠오르는 해를 보며 조금 더 굽어진 나의 등을 실감하였습니다. 아직 오십 년의 시간을 되돌리고 있는 중이었나봅니다. 아내의 한마디에 정신이 확 깨었습니다. 뭐해? 셀라 트림시키지 않고. 셀라: 지금 독일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둘째 아들의 셋째 아이 이름입니다. 성경 시편에 나오는 ‘멈춰서 들으라, 내용을 묵상하라’는 뜻의 후렴구, 추임새. 셀라! 제 입에 넣고 굴릴수록 너무나 마음에 드는 이름입니다. 셀라. 개인적인 생각을 안개로 전하면서, 우리 대한민국이 자꾸 보고 싶어집니다. 이럴 때 이런 기회에 사랑하는 나의 대한민국에 전하고 싶은 믿음이 제게 하나 자라고 있습니다. 외국에서 겪을 수 있었던 우리의 놀라운 힘입니다. 전 한국전쟁의 비참한 문제들 가운데 자랐습니다. 철이 들면서 4·19를 보았고, 돈벌이를 위해 중동과 해외를 다녀야 했습니다. 6·29선언을 거쳐 IMF를 맞을 때, 세계는 우리 대한민국을 비웃으며 놀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놀림이 놀람으로 바뀌는 사건을 현장에서 겪었습니다. 이번에 당면한 놀림거리로도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세상을 놀라게 할 것을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여기 몽골에서는 고려가 몽골의 속국이었다는 징기스칸제국의 지도를 자주 만나는 곳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더 큰 사랑과 진정으로 몽골이 잘되도록 도와주고 있음을 서로 간에 알고 있습니다. 역사를 배우며 우리는 세상의 비웃음에 처했을 때마다 언제나 그들의 놀림을 딛고 일어나 그들을 놀라게 해왔던 자랑스러운 민족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국가적 부끄러움을 만났지만 이 안개가 걷히면 우리 대한민국의 저력으로 오히려 세계가 놀라게 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소용돌이치는 우리의 힘이 드디어 응집되고 있습니다. 고요히 흐르던 물이 지금 바로 깊고 좁은 계곡을 만났습니다. 급변할수록 우린 서로 끌어안는 힘! 대동단결, 두레의 에너지가 분출되는 한민족이기 때문입니다. >> 함철훈(咸喆勳) 사진가·몽골국제대학교 교수 1995년 민사협 초청 ‘손1’ 전시를 시작으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 2012년 이탈리아 밀란시와 총영사관 주최로 전을 FORMA에서 개최. 2006년 인터액션대회(NGO의 유엔총회)서 사진으로 대상 수상. 저서로 , 등이 있다.
- 2016-11-23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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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답하라 , 65세
- 나이 65세가 되면 전철ㆍ공원 무료에 국민연금 수급자가 된다. 방학을 맞는 학생처럼 가슴이 부풀었다. 고생은 끝나고 안락한 행복이 시작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하지만 앞으로 30년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스스로 물었다. 새로운 세상을 배우고 있는가? 대답이 쉽지 않는 대목이다. 세월이 번개처럼 흘러 2016년 한해를 마무리하고 있다. 고령자가 된지 어느덧 몇 년이 됐다. “건강하고, 경제문제가 해결되면 행복하다”고 모두가 입을 모은다. 친구가 있고 자원봉사활동을 하면 더욱 좋다. 빛의 속도로 변하는 세상사에 정신 차리기 어렵다. 머리 싸매고 배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몇 해 전까지 없던 나이제한이 보편화 되었다. 고령자는 수강이 제한되고, 수입창출 알바기회도 엄격히 통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젊은이 위주의 취업과 창업만이 성행하고 있다. 시니어들이 주축으로 하는 재능기부 자원봉사단체가 많다. SNS를 비롯하여 노래 부르기ㆍ그림그리기ㆍ스포츠댄스 등 배울 곳은 많다. 시대변화에 따라서 배움을 멈출 수 없다. 책을 읽고 새로운 것을 익혀야 한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행동이 나태해지기 쉽다. 이를 방지하려면 일과표를 작성하고 꾸준히 실행하여야 한다. 올 겨울은 다른 때보다 추위와 찬비, 미세먼지가 많아 마음을 더욱 움츠리게 한다. 휴일 이른 아침, 몇 번이나 창밖을 살피고 나서야 친구들과 산행하려고 집을 나섰다. 창문을 내다보면서 비가 올지 걱정하지말자. 비가 오면 우산 들고, 눈이 오면 방한복 하나 더 입고 아침부터 집을 나서자. 망설이면 하루를 헛되게 보내고 만다. 은퇴 전보다 더 엄격한 일정관리를 하여야 한다. 정기적인 모임이 운동을 쉬지 않고 하는데 도움을 준다. 운동을 지속하려면 재미가 있어야 한다. 같은 운동을 하면서 즐겁게 지낼 수 있는 동호인과 사귀면 운동하는 재미가 난다. 30년 넘도록 산행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것도 친구들과 정기적인 동호인 모임 덕택이라고 생각한다. 시니어 소비지출 항목 중에서 건강관리비가 상당함을 누구나 경험하고 있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체력 단련비 등은 필요하지만 병원비, 약값은 건강을 미리 챙겼다면 절약할 수 있는 부분이다. 건강이 행복의 시작이면서 소비절약의 중요한 요소이다. 건강한 생활을 하는 방법으로 운동ㆍ공부ㆍ자원봉사 등이 있다. 손주와 친하게 지내도록 노력한다. 주말에 가까이 사는 쌍둥이 손주와 세종에서 올라 온 외손자 등 세 녀석이 한 달여 만에 ‘합숙’을 열었다. 초등학교와 유치원 다니면서 자기들의 세상이 열렸다. 깔깔 웃어대고 놀이에 몰두하면서 할아버지ㆍ할머니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세 녀석을 옆에 뉘이고 잠자리가 불편할 새라 한밤을 지켜도 즐겁기만 하다. 손주는 인생의 제일 큰 행복이며 세대를 따뜻하게 이어줄 것이다. 어릴 적 할아버님, 할머님께 사랑 받았던 기억이 뚜렷하다. 손주들에게 그만큼 잘할 수 있나 종종 스스로 묻는다. 자식을 기르면서 한 세대를 다시 살았고, 손주를 돌보면서 또 한 세대를 다시 산다. 절묘한 자연의 순환이다. 건강을 지키면서 행복하게 사는 길은 손주와 친하게 지내는데 있다.
- 2016-11-22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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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공감] 영화 <할머니의 먼 집> 관객과의 대화
- 어느 날 갑자기 화순(전라남도)에서 사는 어머니가 자살을 시도했다. 아흔 넘은 노모의 충격적인 행위는 다큐멘터리 영화 의 모티브가 됐다. 이승을 떠나고 싶은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는 딸, 아직은 할머니와 헤어질 때가 아니라는 손녀를 중심으로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세대 간의 입장 차이를 조명한 . 관객과의 대화 현장을 찾아 영화에 담긴 이야기들을 들어봤다. 장소 한국영상자료원 일시 2016년 9월 27일 감독 이소현 진행 맹수진(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맹수진(이하 진행) 감동적인 영화였습니다. 슬픔보다는 감동이 전해지는 영화인데 현재 할머니의 건강상태는 어떠신가요? 이소현(이하 감독) 올해 아흔여섯 살이십니다. 건강은 영화에서보다 더 안 좋으시고요. 죽는다는 말은 여전히 계속하고 계셔요. 진행 따님이 영화 찍는다고 할 때 뭐라 하셨나요? 장춘옥(이하 어머니) 맨날 와서 찍는데 도대체 뭘 찍느냐고 물어봤어요. 어느 날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서 봤는데 내가 악역 중에 악역이더라고요(웃음). 뭘 이런 것을 찍느냐고 했어요. 그래서 이것저것 좀 빼달라고 딸아이한테 부탁했는데 잘 안 됐어요. 진행 이 영화의 검열관이셨군요? 어머니 죽고 싶은 엄마 마음을 이해하니까요. 물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를 원하는 건 불효막심이죠. 그런데 지금도 어머니가 어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진행 감독님은 어머니와 다른 의견이신 거죠? 감독 제가 이 영화에서 표현하고 싶었던 부분도 그 지점이에요. 할머니는 자신이 빨리 돌아가시기를 원하고, 엄마도 할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고 계셔요. 저는 할머니가 오래오래 살아계셨으면 하고요. 현상학적으로는 다르게 표현됐지만 너무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나오는 각자의 마음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 또한 어머니를 설득했다고 생각해요. 진행 그래도 어머니는 못마땅한 부분이 있으실 거 같은데요. 나름 편집자 역할을 하신 거 같은데 어떤 부분을 뺐고 또 어떤 부분을 영화에서 살렸나요? 어머니 우선 어머니가 자살 시도를 했다는 내용을 뺐으면 했는데 빼지 않았더라고요.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면 좋겠다고 제가 말하는 내용이요. 그런데 영화를 다 보니 빼면 안 될 거 같더라고요. 관객 질문 할머니께서 자살을 결심한 이유는 뭔가요? 감독 영화 초반 제가 할머니께 물어봤을 때 “성가신께”라고 대답했어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어요. 같이 생활하면서 느낀 건데 할머니는 삶의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할머니에게는 살아 있는 친구가 얼마 남지 않으셨고, 할아버지도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본인 손으로 손자·손녀 13명을 다 키우셨어요. 이젠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끼신 것 같아요. 오늘 아니면 내일이라는 죽음의 거리가 손녀인 저와는 아주 다른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부분에 있어서 이런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능동적인 선택을 하신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머니 제 생각은 큰아들인 저희 오빠가 위암 수술을 해서 엄마 음식을 먹을 수 없었어요. 그런데 어머니 낙이 큰아들 밥해주는 것이었어요. 아들이 당신이 해준 밥을 먹는 것이 보람이었고 살아가는 이유였죠. 당신 음식을 못 먹고 병원 음식이나 주로 죽을 먹었는데 아마 거기서도 재미를 전혀 못 느끼셨던 거 같아요. 할머니가 어서 빨리 돌아가셨으면 한다 했을 때 어머니의 진짜 심정이 궁금합니다. 어머니 우선 저희 집을 보면, 위암인데 술밖에 줄 수 없었던 오빠가 영화를 찍던 도중에 먼저 갔잖아요. 둘째 오빠도 지금 건강이 좋지 않고요. 어머니는 지금 요양원에 혼자 외롭게 계셔요. 저는 적어도 어머니가 자식들 더 가기 전에 가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감독님은 할머님이 어떻게 돌아가셨으면 하나요? 감독 저는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할머니를 만나러 가요. 마음 같아서는 제가 곁에 있을 때 돌아가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서울에 있을 때 일이 생기는 건 상상하기도 싫어요. 영화를 보면서 어머니의 마음이 이해가 됐습니다. 사랑해서 그랬다고 생각해요. 혹시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나의 이기심은 아닐까요? 감독 제가 너무 이기적이라서 그런지 아직은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한테 묻고 싶은데요, 사람이 죽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다시는 그 사람을 못 본다는 슬픔 때문인데 그것을 어떻게 이겨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어머니 내가 보고 싶은 것보다도 우리 어머니가 지금 사는 것이 너무 괴로우니까요. 인과응보의 원리에 의하면 여태까지 좋은 일을 하고 사셨기 때문에 다음 생에는 아주 좋게 태어날 것이라는 기대, 그리고 그렇게 믿으면서 어머니를 보고 싶겠지만 그런 것에 연연해하고 싶지는 않아요. 좋은 곳으로 가셔서 다시 좋은 삶으로 태어나길 바라요. 감독 할머니께서 자살 시도를 하시고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어요. 나중에 돌아가시고 나서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없으니 할머니와 함께 있는 이 시간을 더 늦기 전에 기록해두자, 어쩌면 저를 위한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아요. 나중에 취업준비 한다고 나갔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얼마나 후회될까, 그래서 계시는 동안 많이 보고 시간 할애하면서 제 이기심 채우고 있습니다. 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있다면요? 감독 문학도인 제 친구가 지어줬습니다. 물리적으로 할머니가 사는 곳이 제가 사는 서울과 많이 멀기도 하죠. 또 이 영화는 삶이라는 공간의 집에서 죽음이라는 공간인 또 다른 집, 즉 무덤으로 가는 여정의 한순간을 기록하는 영화가 될 것 같다고 해서 지어진 제목입니다.
- 2016-11-14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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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연극 연출가 김정숙, 연극은 결국 사랑이다!
- 연극 연출가 김정숙(金貞淑·56)에 대해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들었다. “그녀를 존경해”, “멋있어”, “사랑해”. ‘김정숙’이란 이름이 거론되면 하나같이 천사를 만난 경험담(?)을 쏟아내곤 했다. 한 번쯤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기회가 없었다. 새뮤얼 베케트의 연극 에서 끝까지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씨처럼. 만나보자. 예전 같으면 대한늬우스에 나올 만한 국위선양(?)도 하고 돌아왔다. 그럼 한번 소리 소문 좀 내볼까? 김정숙 연출가는 ‘극단 모시는 사람들’(이하 모들)의 대표로 28년째 장기집권(?) 중이다. 스물두 살에 극단 에저또에서 연극을 시작해 스물아홉에 극단 모들을 창단했다. “운명이죠. 고등학교 때 연극을 보고 나서 ‘저 무대에서 평생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극단에 들어간 첫날, 연습실 바닥을 붙잡고 ‘아! 이제 도착했다. 여기서 절대로 떠나지 않겠어’라고 서원처럼 의식을 치르듯 속으로 말했죠. 제자리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 후 단 한 번의 한눈도 팔지 않고 오로지 연극만을 바라보고 살았다. 연극을 뺀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그녀는 24시간이 늘 아깝고 모자라다. 그런데도 인터뷰 날 자정 전에 책상에서 일어난 일을 제일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칭찬하며 뿌듯해한다. “제가 몸 생각하지 않고 연극 생각만 하니까요. 어쩌다 12시가 넘어버리면 4시까지 잠을 못 자더라고요. 그런 날은 다음 날 스케줄에 무리가 있으니까 될 수 있으면 진짜 그러지 말자 해요.” 그녀의 또 다른 이름 ‘극단 모시는 사람들’ 김정숙 연출가의 분신과도 같은 극단 모들은 창단 이후 대중성과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관객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연극을 굳이 몰라도 아이부터 어른까지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다. , , , 등이 모들의 대표작. 특히 은 토종 창작 뮤지컬 중 최고라는 호평을 들으며 각종 시상식을 휩쓸었다. 뮤지컬로 성공적인 삶의 반열에 오른 것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마음이 불편했다. “브로드웨이 식의 뮤지컬을 꿈꾼 건 아니었어요. 나는 음악의 비중이 크고 내용에 영향을 주는 소리극을 하고 싶었어요. 당시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나타나서 편리하게 이용했던 것뿐이죠. 그런데 마치 우리가 브로드웨이를 지향해서 가야 할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내가 원했던 소리극의 형태가 아니어서 음악에 대한 마음이 많이 닫혔어요.” 그래서인지 최근 들어 모들의 창작 뮤지컬을 보기 어렵다. 화려함 대신 소박한 사람 이야기, 고전 속 주변 인물들에 주목하는 연극이 주류를 이룬다. 행복한 연극을 아는 예쁜 사람 모들은 지난 2003년부터 과천시민회관 상주 공연단체로 입주해 있다. 시민극장을 열어 시민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고 있고, 모들의 대표 연극인 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 프로그램 ‘신나는예술여행’에 선정돼 전국 8개 교도소를 돌며 공연하고 있다. “저는 대학로나 대극장 공연에 연연해하지 않아요. 그보다는 시골학교나 교도소에 가서 평생 연극을 본 적 없는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 행복해요. 얼마나 기쁜지 제 마음에서 사랑의 샘이 퐁퐁퐁 솟는 거 같아요. 진짜로요(웃음). 내가 가지고 있는 레퍼토리, 내 보물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 최근 2~3년 동안 노력을 많이 했어요. 예를 들어 ‘우리 고향 초등학교에 연극 보여주기’ 이런 걸 하고 싶어 해요. 공연하는 데 300만원이 들면 출신 동창회에 도움을 청하고, 3만원씩 100명이 내주시면 고향 초등학교 어린아이들에게 공연을 보여줄 수 있다고요. 화려하게 신문에 오르내리는 그런 일 말고 진짜 일을 하고 싶어요.” 에든버러를 넘어 케냐까지 한국 연극을 알리다 지난 8월, 김정숙 연출가는 모들 단원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이하 에든버러 프린지)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세계 공연예술 축제의 백미인 에든버러축제는 공연 예술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어 하는 꿈의 무대. 축제기간이 되면 전 세계에서 7000여 단체, 3만여 명의 공연자와 관객이 몰려와 도시를 가득 메운다. 에든버러 방문은 이번이 다섯 번째. 좋은 공연이건 나쁜 공연이건 집중해서 볼 수 있는 기회라 김정숙 연출가는 에든버러 프린지를 사랑한다. “2008년에 처음 에든버러 프린지에 이라는 작품을 가지고 갔어요. 당시 단원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연극을 해왔는데 뭐했지? 내가 명예를 얻었나, 물질을 얻었나? 나는 연극 안에서 얼마나 행복하지? 하는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세계 연극 속에서 우리를 한번 비춰보자. 놓아보자’라는 심정으로 그곳을 가게 됐어요. 처음인데도 사람들이 너무 많이 좋아해줬어요. 매진에 객석 점유율 80%를 넘었고요.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였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순식간에 입소문을 타더니 사람들이 티켓 박스 앞에 줄을 섰습니다. 그때 ‘아!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구나’ 하는 확인을 서로 하게 됐죠.” 올해 모들은 어린이극 과 그리고 위안부 이야기를 다룬 를 가지고 에든버러를 다시 찾았다. 이번 에든버러 프린지 공연은 김정숙 연출가의 치밀한(?) 계산으로 진행됐다. “케냐에서 이 초청을 받았어요. 그래서 예술경영지원센터에 항공권을 지원받을 수 있는지 문의했더니 두 곳은 가야 받을 수 있다더군요. 그래서 에든버러 프린지와 케냐 공연을 엮은 거죠. 그런데 공연만 가지고 가는 게 아까웠어요. 케냐는 처음이지만 에든버러는 벌써 세 번째였거든요. 그래서 후배가 연출한 과 를 에든버러에서 공연해보자 했습니다. 4월까지 필요한 서류를 내야 했는데 그때 는 정말 시놉시스와 사진 한 장밖에 없었어요.” 에든버러축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만들어진 축제다. 전쟁이 끝나서 이런 페스티벌도 생겼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상처, 바로 위안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사진 한 장과 시놉시스밖에 없었지만 에든버러 프린지 극장측은 흔쾌히 모들에게 공연장 문을 열어주었다. “이전 축제에 참가했을 때 작품으로도 인정을 받았지만 저희가 거리쇼라든지 홍보 면에서 기여를 많이 했어요. 극장에 우리가 바로 그 팀인데 를 공연할 수 있는 무대를 줄 수 있냐고 물었죠. 바로 OK 하더군요. 그 한마디로 정말 에든버러에 가게 됐어요.” 딱 시놉시스 한 장이었다. 공연에 관한 정보가 적어 일반인 대상의 홍보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의 관객이 를 찾아왔다. “가 위안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있잖아요. 하와이와 뉴질랜드에서 이 공연을 보러 오신 분이 계시더라고요. 80 노구를 이끌고 2차 세계대전을 실제 겪으신 분들이 오신 거예요. 하와이에서 오신 분은 이곳에서 볼 첫 작품으로 를 선택했다고 했어요. 4월에 공연 예매를 미리 해놨다면서 수첩까지 꺼내 보여줬어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김정숙 연출가는 다섯 번의 에든버러 페스티벌 참가 중 가슴 아픈 우리의 역사인 위안부 할머니 이야기를 무대에 올린 것이 소중했다고 말한다. 모들 단원과 김정숙 연출가는 낮에는 , 저녁에는 를 무대에 올리고, 밤에는 다른 팀의 공연을 보러 열심히 뛰어다녔다. 케냐에서 기립박수 받은 에든버러에서의 한 달 일정을 마치고 케냐 나이로비로 떠났다. NGO의 천국 케냐에는 NGO 활동가와 선교사 자녀들이 다니는 70년 된 국제 학교 로슬린 아카데미(Rosslyn Academy)가 있다. 이곳에서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700여 명의 학생이 관객이었는데 이런 공연을 자주 접하는 아이들이 아니었어요. 물론 영어로 공연을 했지만 ‘어떻게 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지?’라고 느낄 정도로 완벽한 시점에 쿵, 짝을 맞추는 겁니다. 공연을 완벽하게 만들어준 최고의 관객을 케냐에서 만났어요.” 게다가 학생들의 자율적인 행동이 몹시 감동스러웠다. “교정 한 곳에서 쿠키를 팔고 있었어요. 먼 나라에서 공연 팀이 왔는데 도움을 주고 싶다면서요. 그런 기획을 어린이들이 했다는 말이죠.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전 세계 아이들이 모여 편견 없이 대화를 할 수 있는 학교였어요. 에든버러에서는 뛰어다니고 정신없었다면 케냐에서는 큰 위로를 받고 돌아왔습니다.” 관록이 묻어나는 시니어 배우들 모시겠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김정숙 연출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공연(11.25~26 과천시민회관 소공연장)을 준비 중이고 교정시설 공연도 다녀야 한다. 과천 시민과 함께하는 연극 준비에도 여념이 없다. 시민극장에 시니어 층이 많다는 얘기에 시니어의 연극 참여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시민극장에 60대 이상의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아요. 배우 중에 저와 어렸을 때 같이 연극하던 선배가 오셨어요. 연극을 하다가 도중에 그만두신 분인데 은퇴하고 나서야 돌아오신 거죠. 오디션 때 너무 멋있었어요. 인생이라는 공부를 열심히 하셔서 이제 진짜 배우가 될 거 같아요. 시니어들은 인생을 다 겪으신 분들이라 어떤 이야기든 무대에서 제대로 표현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들이 무대로 돌아온다면 100% 환영하고 지원할 겁니다. 잘하실 수 있도록 적극 도와드릴 거예요. 내년에 무대에 올릴 작품에는 등장인물과 같은 나이의 배우들을 참여시킬 계획입니다.” 시간이 흘러 연극 일을 안 하게 되면 무엇을 할 건지 물어봤다. 돌아온 답변이 누룽지를 눌러 파는 누룽지 할머니가 되고 싶단다. 누룽지 한 컵에 1000원, 한 평짜리 가게를 얻어서 누룽지를 팔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마냥 철없고(?) 청순한 소녀 같다. 미래의 모습을 이야기하는데 마치 연극 한 편을 보는 느낌이다. 들을수록 맛있고 찰지다. 영락없는 이야기꾼. 아직은 우리 연극을 위해 할 일이 많아 보인다. 마지막으로 연극이 뭐냐고 물었다. 거침없이 사랑이라고 말했다. “딱 하나인 거 같아요. 어쨌든 작업 안에서 마지막 선택은 항상 사랑이었어요. 일을 하다 보면 나한테 어떤 이득이 될까를 고민하잖아요. 가끔은 흔들리기도 하지만 결국은 사랑을 선택했어요. 연극을 향한 사랑. ‘세상에 어떤 것도 사랑을 이기는 것은 없다’는 사실, 제가 늘 생각하는 것입니다.” 에든버러축제(Edinburgh Festival)란? 에든버러축제는 1947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시작된 공연 축제다. 전쟁으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의 정신을 치유하려고 만들어진 이 축제는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축제(Edinburgh International Festival)와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Edinburgh fringe Festival)로 나뉜다. 인터내셔널의 경우 100여 개의 공연을 전 세계에서 엄선하기 때문에 초청되는 것 자체가 영광. 프린지는 1947년 채택되지 못한 공연 팀이 축제가 열리는 주변에서 공연한 것이 지금의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로 정착됐다. 올해 ‘극단 모시는 사람들’을 비롯해 한국의 14개 공연 팀이 참여했다. 2011년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축제에 극단 목화의 가 최초로 초청됐으며 ‘헤럴드 에인절스’ 상을 수상했다. 김정숙 극단 모시는 사람들 대표 1982년 극단 에저또 입단 1984년 연출 데뷔 1989년 5월 극단 모시는 사람들 창단 주요 수상경력 -뮤지컬 스포츠조선 뮤지컬 희곡부문 대상, 1996 서울연극제 현대소나타상, 1996 백상예술상 대상, 작품상, 희곡상. 1996 희곡작가협회 올해의 작가상 수상, 2003 -연극 희곡협회 올해의 희곡작가상, 2003 대한민국 국회대상 올해의 연극상, 2011 대한민국 클린콘텐츠 국민운동본부 선정 클린콘텐츠상, 2015
- 2016-11-11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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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의 산책] 역사와 자연, 생명이 살아 숨 쉬는 도심 속 산책
- ‘걷기’는 격한 운동이 부담스러운 중·장년에게 알맞은 운동 방법 중 하나다. 걷기를 생활화하는 이들을 보면 지하철이나 버스 두세 정거장 정도 거리를 걸으며 건강을 챙긴다. 대중교통 노선을 따라가면 대개 평지를 걷게 되지만, ‘서리풀공원’ 산책로를 이용하면 맑은 공기를 쐬며 서초구의 중심을 가로지를 수 있다. 서초동(瑞草洞)은 과거 서리풀(벼)이 무성했다 하여 붙여진 동명(洞名)이다. ‘서리풀공원’은 2호선 방배역에서 서울고속터미널(강남)까지 서초구 중심을 가로지르는 산지형 공원으로 걷기에 부담 없고 볼거리가 많아 남녀노소에게 두루 권할 만하다. 방배역 4번 출구로 나와 청권사 돌담길을 따라 돌면 입구를 찾을 수 있다. 이곳에서 시작해 청권사쉼터, 서리풀다리, 몽마르뜨공원, 누에다리를 거치면 1시간 30분 내외로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한다(약 3km 거리). 시간이 넉넉하다면 꽃과 나무를 구경하거나 할머니·할아버지 쉼터, 맨발로 걷는 길(황톳길) 등에서 잠시 쉬어가는 것도 좋겠다. 1. 청권사(淸權祠, 효령대군 이보 묘역) 조선 제3대 태종의 둘째 아들이며 제4대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과 그의 부인인 예성부부인 해주 정씨의 위패를 모신 사당과 묘소가 있다. 입구(외삼문)로 들어서면 마당 왼편의 작은 연못이 눈에 띈다. 조금 더 걸어가면 1902년에 제작한 효령대군의 신도비를 찾을 수 있다. 입구 오른편으로 난 작은 언덕길을 올라가다가 묘소를 기점으로 한 바퀴 돌면 짧게나마 산책을 즐길 수 있다. (평일 10~16시 무료 개방) 2. 서리풀공원·서리풀다리 서리풀공원 내의 서리풀다리는 도로로 단절된 산책로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북쪽으로는 한강을, 남쪽으로는 우면산을 이어주는 짧은 다리다. 서리풀다리를 기점으로 방배역 방향으로는 공기가 맑은 서리풀공원 산책로를 즐길 수 있고, 고속터미널 방향으로는 몽마르뜨공원과 누에다리를 만날 수 있다. 경사가 높지 않은 산길을 걸을 수 있다는 점이 이곳만의 특징이다. 길이 넓고, 쉴 수 있는 의자와 쉼터가 곳곳에 있어 어린 손주와 함께 걷기에도 무리 없다. 3. 몽마르뜨공원 프랑스인이 많이 거주하는 서래마을 진입로를 ‘몽마르뜨길’이라 부르는데, 그 인근에 자리 잡게 되면서 ‘몽마르뜨공원’이 됐다. 원래는 아카시아나무가 우거진 야산이었는데, 지난 2000년 지역 배수지 공사를 시행하면서 주민들을 위한 휴식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넓은 잔디밭을 둘러보다 보면 자유롭게 풀을 뜯고 있는 토끼를 발견할 수 있다. 귀여운 토끼를 보기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찾아오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4. 누에다리 누에다리는 낮보다는 해가 진 이후에 찾아갈 것을 권한다. 다리에서 바라보는 야경이 꽤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몽마르뜨공원에서 나와 누에다리 왼쪽을 바라보면 조명으로 반짝이는 남산서울타워가 보인다. 같은 위치에서 왼쪽으로는 국립중앙도서관이, 오른쪽으로는 서울성모병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다리 아래 도로로 시선을 옮기면 자동차 전조등이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는 광경을 볼 수 있다.
- 2016-11-03 14: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