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변란과 함께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 4ㆍ19가 발발했다. 그 때 누나가 내 손을 잡고 데모대를 따라갔다. 갑자기 내가 있던 데모대를 향해 종로경찰서 쪽에서 총탄이 날아왔다. 자전거 위에서 구경을 하던 내 옆의 어른이 쓰러졌고 그 때 처음으로 사람의 피가 매우 끈적거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넘어진 자전거 바퀴에 발이 끼어 울부짖는 나에게 누나는 길모퉁이에 숨어 자신에게 기어오라는 손짓만 해댔다. 다음 해 오월의 새벽, 얼룩덜룩한 옷을 입은 군인(해병)들이 기관총을 설치한 지프차를 타고 서울역 방향에서 필동 방면으로 와, 남산 밑의 헌병대 쪽으로 기관총을 난사하는 모습을 2층 방에서 놀란 눈으로 지켜보았다. 내 인생에 가장 놀랐던 순간은 군대 생활 중에 발생했다. 결혼하고 딸을 가진 후 늦게 입대해 휴가 중이었는데, 훈련경보가 아닌 공습경보가 발령되었다. “이것은 실제 상황이다. 휴가 중인 군인은 즉시 귀대하라”는 방송이 계속 반복되었다. 순간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지나갔다. 바로 중국민항기가 국경을 넘어 왔을 때였다. 그리고 같은 해, 이웅평 대위가 미그-19기를 몰고 귀순했을 때 또 한 번 공습경보를 들어야 했다. 그것을 전후하여 10ㆍ26, 12ㆍ12, 5ㆍ18, 6월 항쟁 등 정치적 변란들이 이어졌고 1998년 IMF사태, 2008년 금융위기 등의 경제적 변란들도 겪게 되었다. 최근에는 사스, 메르스 같은 바이러스들까지.. 그러니 외국에는 한반도의 안보, 정치, 경제위기까지, 늘 부정적 뉴스들이 전달되었다.
그러다가 이번 코로나19에 대한 한국의 대응을 보고 그들이 놀란 것 중 하나는 사재기가 없다는 보도였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일본·이탈리아·스페인·일본 등의 휴지와 생수가 사재기로 인해 품절되었으나 한국은 생필품의 품절률이 0%대에 머물렀고, 그것은 탄탄한 물류망과 성숙한 온라인 시장 체계 덕분이라고 분석되었다. 하지만 표면에 수치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 간의 상기와 같은 수많은 변란으로 단련된 국민성도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오랜 세월동안 공비들은 내려오고 미사일이 날아다니고 핵실험을 해대는 속에서 경계경보, 공습경보로 이어지는 민방공훈련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0월 위기설, 0월 전쟁설들을 끼고 살았다. 그 수많은 변란과 위기 속에서, 과연 우리들이 사재기를 한 번도 안 해 봤겠는가? 예전 필자의 어머니는 위기설이 닥칠 때마다 제일 먼저 모든 항아리에 물을 받아 놓으셨다. 필자도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우고 양초와 라면을 사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사재기를 해 봐도 잠깐 버티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세상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결과, 우리는 사재기에 목을 매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사회가 사스와 메르스를 겪어내면서 면역이 생겼듯이 이미 사재기에도 면역이 생겼다고나 할까.
사진에서와 같이 지금 프랑스에서는 식료품을 중심으로 사재기가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성숙한 시민의식과 선진화 된 유통 체계로 한국은 사재기가 없다는 보도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프랑스 사람들에게, 파리에 사는 딸은 상기의 내 얘기들을 하지 않았단다. 한국의 높은 위상을 지키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만, 직접 보거나 겪지 않은 그간의 힘든 세월들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에 대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오늘(20일) 초등학교 저학년이 온라인 개학을 한다. 이로써 3차에 걸친 온라인 개학이 모두 마무리돼 전국 540만 명의 학생이 원격수업에 참여한다.
20일 개학하는 초등학교 1~3학년은 모두 146만여 명으로 앞서 온라인 개학을 한 초·중·고등학생까지 모두 540만 명이 온라인으로 등교를 한다. 이 중 초등학교 1~2학년은 스마트 기기를 통한 수업이 어려워 EBS TV 방송과 학습꾸러미를 통해 원격 수업을 진행한다.
출결 처리는 담임교사가 학부모들과 개설한 온라인 학급방 등을 통해 확인한다. 아직 입학식을 하지 못한 초등학교 1학년의 경우 학교별로 온라인 입학식을 진행할 예정이다.
전국 초·중·고등학생이 모두 온라인 개학을 했지만 불안정한 원격수업에 대한 우려는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원격수업 플랫폼인 e학습터와 EBS 온라인 클래스 모두 로그인이 지연되거나 학습 동영상을 볼 때 끊기는 문제가 반복되고 있어서다.
교육당국은 온라인개학을 시작한 이후 이날이 최대 접속자가 몰릴 것으로 보고, 서버 증설과 안정화 작업을 병행했다. 또한 단방향 동영상 학습의 경우는 최대한 접속을 분산하는 쪽으로 유도할 방침이다.
한편 교육부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연장된 상태에서 신중하게 등교수업과 원격수업의 병행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등교 개학은 코로나19와 관련된 전반적인 상황을 지켜존 후 순차적으로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2017년, 갑작스런 사위의 발령으로 인해, 손자들은 어학 준비를 못 한 채 파리의 국제학교에 입학했다. 영어, 불어, 모국어 사이에서 방황하는 손자들은 매일 아침 등교를 거부하였다. 낯선 이국생활의 시작은 딸 자신에게도 매우 버거웠다. 급기야 나에게 SOS가 날아왔고 딸바보인 나는 이틀 만에 프랑스에 도착했다.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손자들의 등하교 챙기기였다. 군소리 안하고 침대에서 바로 일어나 등교 시 1유로씩, 하교 시 나를 쳐다보지 않고 앞장서서 제대로 집을 찾으면 1유로씩을 지급했다. 그리고 각종 생활수칙을 잘 지키면 즉시 현금 포상을 하였고, 특히 그 돈들은 절대 딸 내외가 손을 못 대게 하였다. 이렇게 등하교 및 이국생활 문제들은 해결되었고 애들은 점차 학교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1년이 지나자 손자들의 학교생활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먼저 식당에서부터였다. 프랑스에서는 급식시간에 모든 학생들에게 잼이 지급된다. 그런데 그 용기는 햄버거 가게의 토마토케첩처럼 손톱으로 찢어야만 한다. 그런데 외국 아이들은 그것에 매우 서투르다. 하지만 우리 손자들은 옷에 흘리지 않게 귀퉁이를 잡아 찢는, 그 섬세한 작업을 아무렇지도 않게 쉽사리 해 냈다. 그래서 점심시간마다 전 세계에서 온 학생들에게 잼 봉지 찢기 봉사를 하며, 손자들의 위상은 높아졌다. 그 후 체육시간에 신발 끈을 제대로 못 매 쩔쩔매는 영국 애들, 교복 넥타이를 못 매는 독일 애들, 연필을 칼로 못 깎는 미국 애들까지 도와주면서, 타고난 손재주를 과시하며 인기몰이를 시작했다. 모두 한민족 유전자 덕분이었다.
프랑스 주최인 2019년 5월의 칸 영화제에서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의 명성은 상한가를 쳤다. 딸네가 살고 있는 파리 근교의 자그마한 동네(Chatou) 영화관에서도 ‘기생충’이 상영되었다. 딸 부부는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자막 없이 보는 한국 영화가 반가웠기도 했지만, 영화 종료 후 동네사람들이 딸네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축하를 받으며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으로 어깨에 힘이 팍 들어갔다.
2020년, 우울한 시작이었다. 중국에서 발생한 코로나19가 한반도를 급습했다. 그러자 프랑스 사람들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했다. 교장선생님은 직접 딸에게 전화를 해 겨울방학 중 한국에 다녀왔는지를 물었다. 길거리에서의 동양인들은 기피 대상이었고, 2월인 작은 손자의 생일파티는 당연히 취소되었다. 그들에게 우리 한국인은 검정색 마스크를 쓴 채 파리 중심가에서 쇼핑하는 중국인 관광객들과 다르지 않았다. 특히 유력 신문인 ‘르몽드’에 코로나19 확산의 주역인 신천지교회 이만희 총회장이 땅에 엎드려 절하는 사진이 실리면서, 그동안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급락하였다. 프랑스 사람들은 IT산업 강국인 한국과 이상한 종교가 판치는 한국 사이에서 우왕좌왕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원래 신체가 건장하고 생활수준도 높아 코로나19쯤은 걸려봤자 감기처럼 금방 낫는다고 자부했다. 자신들의 문화와 어긋나는 마스크 착용은 당연히 무시되었다. 그들에게 코로나19는 먼 극동의 비위생적인 국가들 얘기였다. 그런데….
프랑스에서의 코로나19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 급기야는 마크롱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코로나19에 대한 논의를 하였고 그로 인해 G20 정상회담이 개최된 것에 대한 보도가 나오면서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다시 롤러코스트를 탔다. 이제는 한국 방역모델이라는 말이 일반명사화 될 정도로 자주 등장하고, 한국을 걱정하던 이들이 한국을 부러워하는 분위기로 급변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가 앞으로 또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파리에서 3명의 자녀와 함께 4년째 거주하고 있는 딸과 사위는 이렇게 고국의 위상 변화에 얹어져 어지러운 롤러코스트를 타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인생은 살 만하다. 끝도 보이지 않는 암흑 같은 터널을 지나면 결국 밝은 빛을 만나기도 한다. 때론 눈, 비 내리는 처절한 시련을 겪기도 하고 말이다. 명암의 시대를 지나 다시 한 번 뜻깊은 삶에 도전하는 박연재(朴連在·69) 변호사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1999년에 탈옥수 신창원 검거사건을 특종보도한 후 KBS 서울 본사로 가서 홍보실 차장으로 2년간 근무했어요. 그때 일간지와 잡지사 기자도 많이 만났습니다.”
아침 일찍 서울에서 광주까지 온 기자를 반갑게 맞이한 박연재 변호사는 방송사 시절 이야기로 친근하게 대화를 시작했다. 기자 출신인 그는 기자를 상대로 하는 홍보팀뿐만 아니라 KBS 광주방송총국 심의위원으로 정년을 마칠 때까지 방송사에 젊음을 바쳐 일해왔다.
정년과 함께 사법연수생 되다
방송사에서 정년퇴임이 임박했을 무렵, 박 변호사는 법무부로부터 사법시험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2007년 9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과거 국가 권력에 맞서 시위에 나섰다가 억울하게 사법시험 면접에서 탈락한 사람들에게 사업연수원 입소 기회를 부여하라고 정부에 권고했다. 박 변호사도 그중 한 명이었다. 1970년 전남대학교 법대에 수석으로 입학했던 박 변호사는 유신시대, ‘독재타도’를 외치다 무기정학생이 됐다. 그래도 꿈은 법조인이 되는 것이었기에 사법시험을 봤다. 그러나 1981년과 82년 1, 2차까지 합격했지만 최종 면접의 관문은 넘어설 수 없었다.
“1981년에 사법시험 면접에서 떨어진 뒤 방송기자 시험을 보고 KBS에 들어갔어요. 미련이 남아서 다시 사법시험을 봤는데 또 붙었어요. 그런데 그때 누가 저에게 포기하는 게 좋을 거라고 말해주더라고요.”
기자로서 종횡무진 일했다. 은퇴 인생을 앞두고 평생 소망이었던 꿈을 육십이 다 되어 이뤄낸 박연재 변호사. 사법시험에 합격한 지 근 30년 만인 2010년, 까마득히 어린 미래 법조인들과 사업연수원에서 함께 생활했다.
“내 앞뒤 좌우가 1987년생으로 나랑 26~7년 차이가 났어요. 아들보다 더 어렸어요.(웃음).”
연수원의 어린 동기생을 대하는 것도 어려운데 사법연수원에 들어가 보니 고등학교 2년 후배인 김이수 전 헌법재판관이 연수원장이었다. 김 연수원장은 박연재 변호사를 ‘선배님’이라고 부르면서 밥을 사기도 했다. 그가 그렇게 사업연수원에 들어간 지는 올해로 10년, 변호사 사무실을 연 지 8년이 됐다.
열혈 변호사 박연재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가족이 있는 서울이 아닌 광주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대학과 방송사 생활까지 그곳에서 했기에 생활 터전이나 다름없었다. 사무실을 열고 2년 정도는 사무장을 고용했는데 점점 기자로서의 버릇이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직접 써야 하는 버릇이 남아 있어서 혼자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직접 보지 않으면 불안했어요. 어떤 로펌을 보면 변호사가 아니고 사무장이 소장을 쓰던데 나는 그게 참 신기해요.”
변호사를 만나러 왔으면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고 가지 왜 사람들이 사무장과 상담하고 가는지 납득하기 힘들다고 했다.
광주지방법원 앞에 마련된 박연재 변호사의 사무실에는 ‘마을 변호사’라고 쓰인 벽보가 붙어 있다. 마을 변호사로서 어떤 사건을 가지고 법원에 출입하는지 궁금했다.
“의뢰인 중에 영수증도 없이 돈 빌려줘 놓고 그거 받아 달라고 하는 분도 있어요. 민사에서 영수증이 없는데 어떻게 돈을 받아줘요. 참 답답하지만 해결하기 어렵죠. 그래도 변호사 초기 국선 변호사로서 음주운전으로 걸렸던 피고인의 음주 측정 수치를 분석해 무죄를 선고받게 한 적도 있습니다.”
황당한 일도 겪었다. 승소하고도 돈을 떼였다는 것.
“수임료를 지불하지 않고 변호사협회에다 강요에 의해 계약서를 썼다면서 투서한 사람이 있었어요. ‘설명은 변호사가 한 것 같은데 고지를 안 들었다’, ‘바빠서 도장 찍으라고 해서 찍었다’ 등등 내용도 다양해요. 강제집행하려고 주소지를 쳐봤더니 논두렁인 적도 있고요.”
최근에는 중국 단동 출신 동포가 박 변호사를 찾았다. 그는 1심과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대법원에서 사기죄로 구속됐다.
“제가 대법원에 상고이유서를 썼는데 다행히 피고인 측에서 제 상고이유서를 읽고 대단히 감동했다더라고요. 판결이 파기되기는 어려울 수 있겠지만 억울한 부분도 있더라고요.”
다양한 사건을 맡아 변론해왔지만 그가 중점적으로 다뤄온 사건은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사건이다.
“6·25전쟁 때 양민학살이 많았어요. 무고한 학살이었다는 것이 국가배상 청구를 통해 입증되고 승소하면 국가가 배상해줬습니다. 2010년까지 한시법으로 끝났습니다. 대상자들 가운데 영암에서 시신을 찾지 못하고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도 진실규명 불능이라고 했는데 대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아냈습니다. 국가 배상도 중요하지만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먼저이지요.”
지금도 가끔 이와 관련한 문의가 오지만 한시적으로 끝난 일이기에 안타깝기만 하다.
세상 요지경 속을 들여다보다
그는 기자와 변호사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고 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건 비슷하지만 변호사가 더한 세상을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부부나 부자간의 갈등, 재산상속 문제는 가족 간 갈등이 얼마나 심한지를 보여줍니다. 기자로 30년을 살면서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이 있더군요.”
법정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사건과 마주하는 순간은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사건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 않는 의뢰인에게 파고드는 질문을 했다가 싫은 소리도 들었다.
“왜 심문하듯 따져 묻느냐는 사람도 있었어요. 불리한 상황도 변호사인 제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숨길 것은 숨기고 유리한 것은 공격하죠.”
소외된 이들을 위한 삶을 살다
시니어가 되어 제2인생으로 맞이한 변호사 생활. 그에게 삶의 활력소는 단연코 ‘일하는 삶’이다. 퇴직 이후에 흐트러지고 불규칙한 생활을 하게 되면 건강도 해치고 삶의 질도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란다.
“일이 없으면 생활의 윤기가 떨어지죠. 봉사건 뭐건 사회활동을 해야 해요. 물론 용돈을 벌면 좋겠지만, 수입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그는 휴일에도 사무실에 나와 판례를 보고 소장 등을 챙긴다.
“그전에는 골프도 치고 무등산, 월출산도 가고 그랬어요. 방송기자로 지낼 때는 낮술을 좀 했는데 지금은 전혀 안 해요. 외부 활동이 많은 변호사를 이해할 수 없어요. 최선을 다하려면 눈코 뜰 새도 없거든요.”
박 변호사는 이 시대를 사는 시니어로서 독자들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우리 세대가 너무 비판적으로만 현실을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분노할 줄도 알아야 하지만 나이 들어갈수록 감정을 유연하게 표출했으면 합니다.”
이 사회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후세에게 개선할 역할도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시니어의 경륜과 진중함을 잘 활용해야 참 시니어 아닐까요? 이건 내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 ‘울산 큰애기’,
‘대머리 총각’ 등의 노래들로 국민가수의 삶을 살았던 김상희. 그녀는 1961년 고려대학교 법학과 학생 신분으로 가수 데뷔를 해 장안의 화제가 됐었다. 여성이 법학과 엘리트라는 점도 특별했지만, 그런 사람이 소위 ‘딴따라’ 가수를 한다는 게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과감한 선택은 성공이라는 보답으로 돌아왔다. 다양한 히트곡을 발표하며 1960~197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로 살았던 그녀에게는 50여 년을 함께한 사랑하는 남편, 그리고 지난 시대의 역사가 있다. 삶의 지혜 가득한 그녀의 얘기를 들어봤다.
김상희와의 인터뷰를 시작했을 때 특유의 보이시한 저음이 매력적으로 들려왔다. 밝고 힘 있는 목소리 톤에서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녀는 1943년생, 올해 행운의 숫자 7을 두 개나 갖는 나이가 됐다.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를 만나자마자 그토록 젊음을 유지해주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 우리 남편이죠. 남편은 우리 집 원동력이고 아주 좋은 친구예요.”
김상희의 남편은 유훈근 씨. KBS PD 출신인 그는 1968년 그녀와 결혼해 어언 52년간을 함께해왔다. 이혼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졸혼이 유행처럼 얘기되고 있는 요즘, 이 부부의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은 단단해 보였다.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기에 가능했을 터다.
행복의 근원은 남편의 배려심
“대학 4년 동안 그야말로 남자 대학 같은 곳에서 공부했어요. 당시엔 여학생들이 별로 없었거든요. 또 밖에 나와서 만나는 방송계, 언론계 사람들도 다 남자들이었고요. 말하자면 남자들 세계에서 생활한 셈인데, 남편이 혹시 기분이 안 좋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한 번도 그런 내색은 안 하고 편하게 대해줬죠. 친정 부모님은 내가 가수생활 하는 걸 정말로 싫어하셨어요. 시댁에서도 그랬죠. 그러나 양가 어르신들께 용감하게 입장을 말씀드리고 결혼을 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 곁을 지켜주고 있는 남편이에요.”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남편은 등대이자 나무 그늘이었다고 표현했다. 전혀 불평도 안 하고 감싸주고 보살펴주니 그녀로선 당연히 남편을 인생의 동반자처럼 항상 이해해주는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부부는 서로에게 마음을 다 주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가장 현명한 것 같아요. 특히 상대의 자존심은 꼭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픈 부분은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하고요. 예를 들어 남편은 잔소리, 특히 한 말 또 하는 걸 아주 싫어해요. 부부생활은 철저한 일상인데, 상대의 잘못은 잘 보이고 내 허물은 잘 안 보이기 마련이죠. 그래서 잔소리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그녀는 남편과의 관계를 ‘눈만 보고도 웃을 수 있는 사이’라고 말한다. 밤에 자다가 문득 눈이 떠질 때가 있는데, 그때 옆에 있는 남편을 보면 너무 든든하다는 생각이 든단다. 그저 고맙기만 하다고.
“요즘 남편이 ‘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옛날에 돈 버는 일을 좀 더 많이 하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할 때가 있어요. 그러면 내가 ‘돈 벌었잖아, 우리 살렸잖아. 그런데 왜 자꾸 그래’ 하고 말해주곤 해요.”
정치와 연을 끊은 사연
남편의 후회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부부의 돈독한 관계와 달리, 부부를 둘러싼 외부 환경은 거칠기 그지없었다.
“시댁은 정치하는 집안이었어요. 시아버지가 5선 국회의원이고, 시숙부도 4선 국회의원이었죠. 종갓집 맏며느리로 할일도 많았고 마음고생도 엄청 했어요. 주변에는 늘 우리 집안을 사찰하는 사람이 있었고요. 무슨 움직임이 없나 이런 거 말이죠.”
어느 날 PD였던 남편에게 김대중 당시 신민당 총재가 함께 일하자고 찾아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그 요청이 무려 세 번이나 반복되자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에게도 정치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친정어머니는 결혼을 허락할 때 남편한데 정치를 안 하겠다는 언약을 받았어요. 그래서 남편이 고민할 때 나도 생각이 많았죠. 그러나 ‘나도 친정에서 그렇게 반대하는 결혼을 했는데 저 사람은 오죽할까’ 싶었어요. 그래서 하고 싶으면 하라고 했죠.”
남편은 결국 김대중 당시 신민당 총재 공보비서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무렵은 서슬 퍼런 1980년대 독재정권 시절이었다. 야당 의원 공보비서가 된 남편과 그런 남편을 둔 가수를 정권에서 곱게 볼 리 없었다. 남편은 어쩔 수 없이 해외로 정치적 망명을 떠나야 했고 그 시간 동안 김상희는 방송 출연과 공연 금지를 당해야 했다. 그때 그녀는 시간이 좀 여유가 있어서 햄버거 장사도 해본 적 있다.
“그런데 가게를 운영하다 보니 내가 계산을 잘 못하는 데다 원가와 이익 구분도 못 하겠더라고요. 장사를 하면 안 될 사람이었어요. 나중에 귀국한 남편이 그 사실을 알고는 마음 아파했죠. 그렇게 먹고살 게 없었느냐고. 사실 그렇게 부족한 처지는 아니었지만, 나는 시댁에 가서 돈 얘기를 일절 안 했거든요.”
그러나 남편의 정치 도전은 끝이 좋지 못했다. 마침내 사면을 받고 귀국한 그는 전주시 갑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했다. 남편에게 전주 갑은 아버지의 지역구였기에 의미가 컸고, 모두들 그가 당연히 국회의원 후보가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당에서 공천 명단을 발표했을 때 남편은 떨어지고 변호사 출신 인사가 후보가 됐다. 남편은 분노했다. 그래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그 결과는 낙선이었다. 이 일로 환멸을 느낀 남편은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10월 26일, 뒤통수가 얼얼했던 날
어쩌면 그런 ‘팔자’였을까. 김상희에게도 정치계와 관련된 비화들이 있었다. 최근 개봉한 영화 ‘남산의 부장들’로 다시 주목받고 있는 10·26 사건과 그녀가 인연이 있다는 건 뜻밖이었다. 그녀는 유신정권 시절, 대통령 앞에서도 당당히 할 말을 했던 에피소드들을 들려줬다.
“어느 날 밤 청와대에서 공연을 하라고 부른 적이 있어요. 나이트클럽과 계약이 되어 있었던 터라 못한다고 했죠. 그랬더니 문화공보부 장관이 몇 시 스테이지냐고 묻더라고요. 9시, 11시라고 했더니 그럼 그 전에 보내주면 되지 않느냐고 해서 갔죠. 그런데 노래를 끝내고 나왔을 때 아무도 없는 거예요. 청와대 입구까지 혼자 어떻게 걸어 나와요. 그래서 냅다 소리를 질렀죠. 장관 이름을 부르면서.”
청와대 한복판에서 소리를 지르다니 대단한 ‘깡’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부르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그 소리를 듣고 나타난 사람은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박 대통령은 그녀를 장난삼아 ‘깡패’라고 부르곤 했다는데, 그녀의 대찬 기질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어이, 깡패. 왜 그러는 거야’ 하고 묻더군요. 그래서 ‘공연 때문에 나이트클럽에 가야 하는데 내보내준다고 해놓곤 연락이 없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박 대통령이 비서들에게 ‘여기 봐!’ 하더니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할 거 아냐’ 하고 혼을 내더라고요. 그래서 쏜살같이 공연하러 갈 수 있었죠.”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서로를 편안하게 생각하는 관계였기에 박 대통령의 사망 소식은 그녀에게 큰 충격을 줬다.
“10월 26일 저녁에 청와대 연회 공연이 있었어요. 공연을 끝내고 저는 돌아왔고요. 그런데 그 후 안가에서 사건이 났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머리가 띵하더군요. 바로 전에 만났는데….”
다양한 장르 섭렵한 멀티 플레이어
전직 대통령들과의 에피소드는 그쯤에서 끝이 났고, 이제 그녀의 음악세계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요즘 김상희는 대중가요보다는 클래식이나 품격 있는 공연에 더 어울리는 느낌이다. 양재무 음악감독이 이끄는 남성합창단 이마에스트리와 함께하는 공연도 그렇다. 이마에스트리로선 창단 이후 최초로 대중가요 가수와 협연하는 공연이기도 하다. 그런데 60년 가수생활 동안 그녀는 가요만 부른 게 아니었다.
“이탈리아 가곡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해서 부른 게 있고 동요도 불렀어요. 일본에선 재즈 앨범도 만들고 뮤지컬 넘버를 발췌한 앨범도 냈어요. 내가 생각해도 정체성이 뭔지 모르겠어.(웃음) 뮤지컬도 하고 영화도 찍고 할 거 다 했거든요. 이번에는 클래식과 함께하는데 이질감이 없어요.”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즐기는 사람’, 뭐든지 잘 흡수하는 ‘한지 같은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스스로 분석하기에 문제가 좀 있다고 했다. 게으르다는 것이다.
“처음엔 잘해요.(웃음) 그런데 내 몫만 하는 타입이죠. 요즘은 젊었을 때보다 노래의 깊이가 달라졌다는 걸 느껴요. 해석하는 방법이 달라졌으니까요.”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강직함
김상희는 지금도 밥공기에 밥풀 한 알 남기는 일 없이 먹는다.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배운 ‘밥상머리 교육’ 때문이다. 사실 그녀의 친정은 상인 집안이었다.
“친정아버지가 무역을 했어요. 굉장한 재력가셨죠. 외화도 수입하고 극장도 운영하셨는데, 돈을 흥청망청 쓰는 걸 아주 싫어하셨어요. 어쩌다 떨어진 밥풀을 보면 우리더러 다 먹으라고 할 정도였어요. 아버지 명을 어기기 힘들었죠. 그때부터 남김없이 밥을 끝까지 먹어치우는 버릇이 생겼어요.”
친정어머니도 강직한 사람이었다. 자식들이 실수를 하면 누구 하나의 책임이 아닌 연대 책임을 지도록 가르쳤다. 그래서 나중에는 형제들끼리 실수가 없도록 서로 단속하고 관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김상희에게서 느껴지는 꼿꼿함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짐작하게 해주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도 부모님 속을 썩인 것이란다.
달이 뜨면 어머니에게 미안하다고 말해
김상희의 본명은 최순강이다. 가수가 되기 위해 집안을 속여야 했기에 가명을 썼다.
“나는 좋아하는 걸 하게 되면 밀어붙이는 타입이에요. 그런데 엄마에겐 대못을 박았구나, 깨달은 적이 있어요.”
김상희의 둘째 아들도 그녀가 졸업한 고려대학교 법대에 입학했다. 그런 아들을 사랑스러운 자식이자 자랑스러운 후배로 여겼다. 법대에 들어간 만큼 사법고시는 언젠가는 도달해야 할 목표였다. 아들은 여유만만하게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시험을 치르고 발표가 났는데 낙방이었다. 얼굴이 새까매진 아들은 “전 고시할 팔자가 아닌 거 같습니다. 오늘 부로 접겠습니다”라고 선언했다.
“그 말을 듣고 하늘이 노랬죠. 친정어머니도 내가 가수한다며 법 공부 안 했을 때 남산을 세 번을 돌면서 울었다고 했어요. ‘아, 우리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알게 됐죠. 아들에게는 ‘괜찮아. 네가 좋아하는 거 하면서 행복을 찾아’라고 말하고 돌아서는데 눈물이 핑 돌았어요. 요즘도 둥그렇게 보름달이 뜨면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요.”
나이 들어도 소통이 되면 외롭지 않아
사단법인 한국연예인한마음회 이사장이자 가요계의 원로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그녀에게 사람들과 잘 지내는 비결을 물어봤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소통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누구와도 소통이 되면 외롭지 않아요. 어떻게든 귀를 열어 듣고, 얘기할 때는 나잇값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죠. 사실 나잇값하는 게 제일 힘들어요. 서로가 열린 마음을 가져야 가능한 일이죠. 그래서 요즘은 일단 듣고, 의견을 물으면 맨 마지막에 해요. 너무 나서지 않고요. 특히 ‘내 나이가 얼만데’, ‘나 때는 말이야’ 이런 말은 절대 안 하려고 합니다.”
그녀가 살면서 가장 잘한 일로 양가에서 결사반대했는데 결혼한 것을 꼽았다. 그리고 그렇게 결혼했어도 가족이 화목하다는 것도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녀가 지키는 삶의 법칙은 절대 남에게 험한 얘기를 안 하는 것이란다. 화가 나도, 상대에게 상처 주는 말은 평생 해본 적이 없다. 그렇게 해서 얻은 좋은 기운이 그녀의 삶을 굳게 지켜준 것인지도 모른다.
“가수로, 엄마로, 아내로, 나로서 잘 살다 간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내가 죽었을 때 슬퍼할 사람들이 있다면 잘 산 거겠죠? 난 웃으면서 죽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정말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도 하고요.”
바람에 휩쓸리지 않고 쉽게 꺾이지 않는 코스모스 같은 그녀의 노래가 깊은 내면 속으로 울려 퍼졌다.
풍금으로 전해지는 선율은 환상적이었다. 화음의 오묘함에 매료된 소년은 깊고 깊은 예술의 체계 속으로 빠져들었다. 음악을 한 차원 높은 예술의 경지에 올려놓는 숨은 예술가, 이종열(李鍾烈·82) 대한민국 피아노 조율 명장 1호를 만났다.
예술의전당 음악당 무대 뒤로 들어갔다. 크고 작은 무대 장비들 사이에 대한민국 피아노 조율 명장 1호 문패가 달린 방 하나, 이종열 조율사가 10년 넘게 사용하고 있는 개인 공간이다.
“1995년 1월부터 예술의전당으로 출근했습니다. 원래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오페라단, 발레단 등 예술 단체들이 상주해 있었어요. 조율사 공간은 없었지요. 우면산 중턱에 건물 새로 짓고 다들 그쪽으로 이전하고 나니 방이 생겨 하나 얻었습니다.”
올해로 피아노 조율만 64년. 수천 명의 연주자를 만났다. 2003년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이 내한했을 때, 연주가 끝나고 이종열에게 경의를 표하며 청중의 박수를 이끌었던 일화는 두고두고 회자된다. 헝가리의 안드라스 시프, 이탈리아의 미켈레 캄파넬라 등 까다롭기로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에게 인정받은 조율사.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이종열의 손을 거치면 음에서 빛이 난다”며 그의 실력에 찬사를 보냈다.
“별거 아닌 거 같겠지만 저는 국위선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도 이런 조율사가 있구나 하고 말이죠.”
세종문화회관에서 15년. 그리고 예술의전당에서 25년. 그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장 1호 조율사다. 2007년 피아노 조율사로서는 처음으로 명장 1호가 된 이종열 조율사는 오랜 시간 음악 안에서 살아왔다. “평생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하니 행복할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지 않아요. 어떤 직업이든 다 스트레스가 있어요. 집에서 레코드판을 들을 때가 가장 편안합니다. 음악을 들을 때 뭔가 잘못될까봐 조마조마할 필요가 없잖아요.(웃음) 제 직업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유명한 연주자와 악수하고 이야기할 수 있어 좋겠다’고 해요. 그런데 연주자마다 추구하는 소리와 음색이 다르죠. 어떤 연주자는 ‘피아노 소리를 브라이트(밝게)하게 해주세요’ 또 누구는 ‘이쪽 소리가 너무 쨍쨍거려요. 줄이면 안 될까요?’ 합니다. ‘건반을 눌렀을 때 건반이 저항하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해주세요’라고 주문하는 사람도 있어요.(웃음) 어제는 조율이 너무 좋았다는 얘기를 듣고 다음 날에는 형편없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 게 제 일입니다.”
우리 가락을 통해 음을 알다
이종열 조율사는 전주 출신으로 전주 이 씨 종가에서 태어났다. 행동거지와 언어, 옷매무새에 제약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런 집안 분위기에서 공구를 다루고 피아노와 가까이 사는 자신이 신기하다고 했다.
“양반은 뛰면 안 된다고 해서 조용조용 걸어 다녔습니다. 제사도 크게 지내는 집안이었고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시조창을 참 잘 부르셨어요. 할아버지가 선창하면 동네 분들도 따라서 노래 부르곤 했죠.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어른들이 기분 좋으니까 풍악을 한 거예요. 왔다 갔다 하면서 들었는데 다 외워지더라고요. 음악적 재능이 있었던 거죠.”
학예회 때 친구들은 독창을 하거나 무용을 했는데 이종열 조율사는 무대에 올라 양반다리를 하고 시조창을 했다. 돈 벌어 제일 먼저 산 것도 클래식 음악이 아닌 시조창 레코드라고 말했다. 우리 가락에 귀가 열리더니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음악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피아노 독주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리면 교복을 입고 찾아다니기도 했다.
“풍금소리는 너무 좋은데 학교 비품이라 만질 수 없었어요. 여유 있는 집 자식들이 기타를 사서 배울 때 저는 달밤에 반딧불이가 돌아다니는 곳에서 하모니카를 불었어요. 할아버지가 단소를 자주 부셨는데 ‘궁상각치우’ 5음계였어요. 저는 ‘도레미파솔라시도’ 서양 음계가 필요해서 대나무를 뚫고 구멍 크기를 조절해가면서 직접 만들어 썼습니다.”
먼 훗날 생각해보니까 그 자체가 관악기 조율이었다. 불어보고 소리가 잘 나면 악기 하나를 완성해갔다.
조율을 만나다
풍금을 원 없이 치게 된 계기가 있었다. 기독교 신자였던 사촌이 끊임없이 전도를 하자 그는 못 이기는 척 교회로 향했다. 교회에 가야 했던 명분은 바로 풍금. 페달을 밟으면서 풍금을 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교회 집사라는 분이 풍금으로 반주를 하는데 멜로디에 옥타브를 첨가하는 정도였어요. ‘아, 저걸 내가 배워?’, ‘그럼 열심히 교회에 다니자’ 했어요. 오르간 교본을 사서 혼자 공부했습니다. 이해가 안 되면 ‘음악 통론’을 펼쳤죠.”
오르간 교본을 떼고 난 뒤에는 580개가 넘는 찬송가 전곡을 쳤다. 그런데 풍금을 치는 게 너무 좋아지자 궁금증이 일기 시작했다. 단소와 하모니카를 불 때는 몰랐는데 똑같은 장조의 3음계라도 건반에 따라 다른 소리가 났다. 집에 있는 공구를 교회로 가지고 가 풍금을 뜯어보고야 말았다. 풍금은 놋쇠 철판을 깎아서 조율하는데 점점 어려워지고 소리는 제 소리에서 점점 멀어졌다. 스스로 해보고 싶었는데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풍금이 일본 제품이니까 어딘가 문원이 있을 것 같았어요. 서점에서 책을 찾아보니 ‘피아노 구조, 조율, 수리’라는 책이 일본에 있었어요. 장남으로서 농사 일구고 동생들 보살피기를 원했던 아버지는 제가 이런 책을 보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렵게 사정해서 용돈을 받아 책을 주문했어요.”
해방 후 일본과의 국교가 닫혀 있던 시절. 책이 한국으로 오는 데 두세 달이 걸렸다. 문제는 일본어였다. 해방이 되던 해 소학교에 입학했던 그는 일본 학교들이 문을 닫으면서 한국식 교육을 받게 된 것. 해방 후 처음 발간된 ‘일본어 첫걸음’이라는 책을 사서 교본이 오기 전 열심히 독학하며 글자를 익혔다.
“기다리던 책이 왔을 때는 어느 정도 일본어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빨리 보고 싶어서 샛길로 접어들어 논두렁에 앉아 책을 폈습니다. 다른 건 모르겠고 피아노 구조 도면을 살펴봤습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조율을 시작한 거죠.”
풍금 조율을 시작하면서 피아노와 쳄발로와 파이프오르간 등의 악기를 독학으로 공부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피아노를 조율해도 쳄발로 등 다른 건반악기까지 다루는 사람은 드물다.
조율의 인생을 정리하다
작년 말 이종열 조율사는 60여 년 조율사로 살아온 삶을 정리하면서 ‘조율의 시간’(민음사)을 펴냈다. 백전노장의 이야기는 담백했고 진솔했다. 베스트셀러가 됐고, 사람들은 조율사 인생에 주목했다. 재미있는 것 하나. 책을 읽다 보니 마치 판소리의 아니리가 연상되는 박자감이 느껴졌다. 그와 인터뷰를 해보니 확실히 알았다. 어려서부터 시조창을 하는 할아버지의 소리를 들으며 자라왔으니 자연스레 리듬이 말하는 습관으로 밴 것. 박자처럼 글 속에도 묻어 있었다.
이종열 조율사는 말초신경을 보호하기 위해 술과 담배를 멀리한다고 했다. 술은 모임에서 맥주 반 잔 정도, 담배는 피운 적 없다. 귀가 나빠지면 높고 낮은 음을 구별할 수 없다.
“조율 자체는 기계를 보고 해도 되지만 조율의 최고 생명은 ‘보이싱’입니다. 음색을 고르게 음량 크기를 같게, 밸런스를 제대로 맞춰야 하거든요.”
아무리 조율이 잘되어 있어도 보이싱이 안 좋으면 피아노를 못 치겠다며 일어나는 연주자도 있다고. 그는 앞서 직업에 대한 스트레스를 토로하기도 했지만 인생 끝까지 조율에 매진할 생각이다.
“지금도 할 게 많아 보입니다. 학문은 끝이 없잖아요. 죽기 전날에도 궁금한 것들이 있을 것 같아요. 늘 새로운 것들이 들리고 보입니다.(웃음)”
그는 한 차원 높은 피아노 조율을 위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고 후학 양성에도 열심이다. 한국피아노조율사협회에서 발간한 기술 서적 중 보이싱 파트는 이종열 조율사가 집필했다. 제자들과 함께하는 ‘튜닝아트가’라는 모임도 꾸준한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튜닝아트, ‘조율은 예술이다’라는 뜻입니다. 돌아가면서 조율에 관해 토론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가면 서로 조언도 해줍니다. 지금 예술의전당에 새 공연장을 짓고 있는데 훌륭한 후배가 대기 중입니다. 이제 서서히 제자들에게 자리를 내줘야죠. 100년, 200년 할 수 없잖아요.”
그는 피아니스트 뒤에 선 조율사로서의 자부심을 조심스럽게 말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관객은 조율하는 사람에게 아무 관심이 없어요. 무대에 오르는 사람들에게만 박수치고 소리 지르잖아요? 그런데 연주자들은 공연장에 오면 저한테 매달립니다. 조율사의 손에 멋진 공연이, 연주가 달려 있으니까요.”
젊은 시절, 중후함을 무기로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던 배우 한지일(韓支壹·73). 그가 세월 풍파를 뚫고 나와 대중 앞에 섰다. 1세대 모델로서, 영화 중흥기 인기 배우로서 재도약을 꿈꾸는 파란만장했던 이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뭘 입을까 고민했는데 이 옷이 눈에 띄었어요. 있는지도 몰랐어요. 40년 만에 입어봐요. 잘 맞나요?”
오랜만에 꺼내 입은 명품 양복 재킷의 깃을 번갈아 매만지며 싱글벙글 웃었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굴곡진 삶을 살아와서일까. 이 옷이 없어진 줄로만 알았다. 한국에 돌아와 웨이터, 벨보이, 발렛파킹 요원, 그리고 봉사하는 사람으로 매스컴을 탔으나 작년에는 좀 더 다양한 행보를 보였다. 단편영화 ‘미희’에 출연했고, 시니어 모델로서 재도약을 꿈꾸며 모델 관련 행사에 여러 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제57회 영화의 날’에는 한국 영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봉사상을 받기도 했다.
마음 아픈 이들에게 희망을 말하다
전에 없던 콧수염이 썩 잘 어울렸다. 그런데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턱수염이 있었는데 잡지에 좀 지저분하게 나올 것 같아 면도해버렸어요. 사실 수염을 기르게 된 이유는 우울증 때문이었어요.”
수개월 전 그는 우울증을 앓았다고 했다. 뭔가 집중하고 싶은 마음에 수염을 길렀다. 그는 현명한 방법을 택했다.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증상을 알렸고 세상과 소통하며 기운을 얻었다.
“도무지 못 걷겠더라고요. 말도 잘 안 나왔고요. 요즘엔 찾아주는 곳이 많아 스케줄이 좀 바쁩니다. 10년 훨씬 넘게 활동하지 않았는데도 팬들이 알아봐주시니 두려웠어요. 우울증은 괜찮다가도 언제든 또 올 수 있는 마음의 병입니다.”
그의 황금빛 명함에는 ‘자살방지 전도사’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죽은 정다빈(1980~2007) 때문에 자살방지 전도사가 됐습니다. 다빈이의 유작이 된 드라마에 제가 카메오로 등장했어요. 드라마 끝내고 2년 뒤 미국에서 살 때 그 아이의 자살 소식을 들었어요. 참 명랑한 친구였어요. 그 작품이 잘 안 됐는데 그래서 우울증을 앓게 된 것 아닌가 싶어요. 작년에 세상을 떠난 설리와 구하라도 참 안타깝습니다. 구하라는 한국 소속사가 없었다더군요. 친구도 죽고, 무엇보다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었을 텐데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가 SNS에 간곡한 마음으로 자신의 우울증을 알린 이유였다. 살기 위해서였다. 그는 우울증이 있는 친구나 가족이 있다면 더 관심을 갖고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젊은 연예인 둘이 가고 나니 ‘비타민엔젤’이라는 걸그룹 기획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자살방지 전도사로서, 배우로서 좋은 이야기를 해달라고요. 두려웠어요. 열여섯, 열일곱 청춘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다행히 집중해서 잘 들어주더군요. 나도 젊었을 때 요즘 아이돌이 겪는 힘든 시간들이 있었지만 피나는 노력을 하며 살아왔다고 말했어요. 좌절하지 말고 다 잘될 거라고 믿고 살라며 응원해줬습니다.”
한지일도 젊은 시절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적이 있다. 뒤에 다시 이야기를 하겠지만 어두웠던 시대 상황으로 인해 배우 활동을 못했던 때가 있었다.
배우의 꿈, 아무도 몰랐다
‘파란만장’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삶. ‘본의 아니게’, ‘의도치 않게’ 그렇게 살았다. 20대로 접어드는 순간 한지일 인생에 회오리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 집에 찾아온 한 유명 배우가 한지일에게 꿈의 씨앗을 던졌다.
“제가 영화배우가 된 건 윤일봉 선배님 영향이 큽니다. 고2 때 그분이 홍콩에서 활동하다가 한국에 돌아왔는데 저희 집에서 한 1년 사셨습니다. 촬영장에서 ‘아저씨, 아저씨!’ 하며 따라다녔어요.”
배우가 되겠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그는 경희대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갔다. 그런데 입학 후 CF모델을 하더니 패션쇼 무대에 올랐고, 틈날 때마다 영화배우 오디션도 보러 다녔다. 1970년 우진필름의 신인배우 공개모집에 뽑혀 첫 영화를 찍나 했는데 영화가 배우 캐스팅 단계에서 무산돼버렸다.
“영화가 엎어지고 얼마 안 있어 우연히 신상옥 감독한테 발탁이 됐습니다. 명동 유네스코 건물에 있었던 ‘신필름’은 당시 최고 영화사였어요. 그때 다른 신인 배우들과 함께 안양예술고등학교에 가서 연기수업을 받았어요. 신상옥 감독이 학교 설립자이시고 부인인 배우 최은희 씨가 교장으로 있을 때였죠. 모델활동만 하던 저에게 배우 수업은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의 첫 스크린 데뷔작은 이유석 감독의 ‘천동’(1970)이다.
“한소령이란 이름으로 활동할 때였는데 주인공이었던 최정민의 오빠이자 암행어사로 나왔습니다. ‘천동’을 찍고 난 다음에는 영화 촬영차 홍콩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신상옥 감독이 당대 최고 스타였던 홍콩 배우 리칭과 ‘반혼녀’(1973)라는 공포영화를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갈 수가 없었어요.”
블랙리스트 전성시대
한지일이 과거 정부로부터 정치 탄압을 받은 일은 여러 매체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이유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둘째 아들 김홍업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과의 친분 때문이었다. 대학교 시절 김홍업과 절친했던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 집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군부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시절이잖아요. 자택 건너편 주유소에서 사진을 다 찍은 거죠. ‘천동’에 출연했을 때는 조연에, 이름도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보안부에서 몰랐던 거예요. 그러다 제가 점점 유명해지기 시작하니까 압박을 하더라고요.”
몇 년 전 문화계 블랙리스트 때문에 나라가 한참 시끄러웠을 때, 거론됐던 연예인들이 나와서 ‘자신이 블랙리스트 1호’라는 얘기를 했다. 그는 헛헛한 웃음이 나왔다.
“1972년에 제작된 영화 ‘바람아 구름아’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았을 때도 힘들었어요. 큰 영화사는 저에게 작품을 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시 ‘보따리 장사’로 불리던 프로듀서들의 저예산 작품에 출연했습니다.”
한지일이 자살을 생각했던 시기였다.
“영화에 출연하고 싶은데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절망적이었어요. 열심히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죠. 물론 저뿐만이 아니라 동교동 사람들은 다 억압받았어요. 저는 순수하게 딴따라가 좋았던 사람입니다. 철없이 정치인들과 어울린 사람은 저밖에 없었을 겁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된 후 특별히 김홍업 이사장을 따로 만나는 일을 만들지 않았다.
“청와대 들어가시고 3개월 후에 삼청동 사직터널 인근에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김대중과 홍업이를 팔고 다니느냐고 묻더군요. ‘아버님’이라는 호칭을 쓰자 ‘대통령 각하’라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불러왔는데 참…. 그래도 (김)홍일이 형과 이희호 여사 장례식장에 3일 동안 가 있었습니다.”
현재 김홍업 이사장과 어떻게 지내느냐고 묻자 말을 아꼈다. 지금은 때가 아닌 듯하다고 했다. 억압과 탄압, 실망, 이 모든 역경을 뛰어넘어 현재를 살아가는 몇 안 되는 스타가 바로 한지일이다.
젖소부인 얘기 빠지면 재미없다
한지일 하면 떠오르는 게 있다. 바로 에로 영화다. 1980년대 말부터 ‘젖소부인 바람났네’를 제작해 한국 영화산업이 바닥을 치던 시절 큰돈을 벌어들였다. 진도희, 정세희 등을 발굴했고 B급 패러디물을 본격적으로 알리는 신호탄도 쐈다.
“우리나라에서 한국 영화가 설 자리가 없을 때였어요. 지금은 한국 영화 많이들 보는데, 당시에는 홍콩 누아르와 할리우드 영화가 인기였죠. 예술 영화를 찍는 감독은 영화 제작을 포기하다시피 했습니다. 영화 제작 초창기에 ‘엄마 울지마’라는 영화를 16mm 카메라로 찍었는데 반응은 그닥 좋지 않았어요. 개그맨 이원승을 등장시켜 ‘로보트 태권V’도 제작했지만 안 풀렸죠. ‘룸’, ‘추억의 이름으로’ 등도 다 깨졌어요. 배짱부리다가 결국 에로 영화를 제작하게 됐어요.(웃음)”
버티는 심정으로 작품을 만들다가 결국 에로 영화에서 길을 찾았다.
“‘매춘이의 첫사랑’이 히트를 쳤고, ‘젖소부인 바람났네!”가 대박이 난 거죠. 두 달, 석 달에 한 번씩 영화를 제작해 13편까지 나왔어요. 요즘 젊은이들도 제목 정도는 알잖아요. ‘정사수표’, ‘욕탕 속의 여자들’, 그리고 대히트를 친 영화가 ‘마가씨’예요. 일본에서 인기가 있었는데 7편까지 나왔어요.”
출시되자마자 곧장 비디오 시장으로 흘러들어가는 16mm 저예산 B급 영화를 만들면서도 그는 연출력이 좋은 감독들을 영입했다.
“김성수, 박용준, 김인수 감독 등이 메가폰을 잡았습니다. 에로 영화라 해도 내용이 탄탄하니까 잘 팔렸어요. 특히 김성수 감독은 조명을 써서 야하게 찍었어요. 조명이 야해.(웃음) 애마부인도 만든 분인데 작품을 제작할 때마다 정말 공을 많이 들입니다. 젖소부인 시리즈로 찍고 싶은 아이템은 있지만 아직은 얘기를 못합니다. ‘젖소부인 바람났네’ 타이들은 저밖에 못 써요. 언젠가는 만들어볼까 합니다.”
하늘을 찌르던 그의 기세도 IMF 금융위기 앞에서 결국 무너졌다. 무리하게 건물을 짓는 바람에 열심히 벌어놓은 돈을 하루아침에 날리고 말았다. 이후 베트남으로 갔다가 미국에 정착해 은둔자 같은 생활을 14년 동안이나 했다. 지금 아무것도 없는 신세라고 말하는 배우 한지일은 가방에 ‘한정환’이라는 본명이 기록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늘 챙겨 다닌다. 길 가다가 일하고 싶은 곳이 보이면 배우이고 뭐고 들이밀고 본다고 했다.
“제 롤 모델이 삼미그룹 부회장이었던 故 서상록 씨입니다. 롯데호텔에서 웨이터 일을 했던 분인데 저도 감명 받고 한국에 들어와 웨이터를 했죠. 요즘은 식당에서 일해보고 싶더라고요. 무엇보다 경제활동을 해야 저도 떳떳하게 사람을 만날 수 있잖아요.”
곡절 많은 인생이었다. 배우를 꿈꾸던 20대 초반에 명동 한복판에 맥줏집을 열어 큰돈도 벌어봤고, 1년 만에 망해도 봤다. 과일 파는 리어카에 포장마차도 끌었다. 은막의 스타, 잘나가는 모델로도 살았다. IMF 금융위기 이후 외국으로 갔다가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제 제3의 인생을 잘 살아보고 싶어요. 영화배우와 제작자로 지냈고, 미국에서는 두 번째 인생을 살았죠. 훗날에 한지일이 죽었다? 그러면 좋은 영화 찍었고, 봉사도 많이 했고, 열심히 살았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사람이 죽어서 이름만 남기면 됐지 뭘 알릴 거예요.(웃음)”
그와의 대화는 끝이 날 줄 몰랐다. 매번 다양한 현장을 찾아다니고 발견하고 뭐든 푹 빠져 사는 신청년 한지일. 올해는 또 어떤 일에 도전하고 행복을 얻을지 궁금해진다.
줄광대 김대균(중요무형문화재 58호 줄타기 예능보유자·53). 그가 줄타기를 배운 건 9세 때였다. 거의 평생을 줄 위에서 살아온 인생이다. 줄에 취하고 미쳐, 줄 위에서 울고 웃고, 뛰고 솟고, 날치고 판치고, 그렇게 살아온 외길 인생. 한 우물을 팠으니 이룬 바가 자명하다. 해서, 그는 굳이 낮추거나 은근히 감출 것 없이 내세운다. “내가 줄타기 수장이오!” 자신의 눈으로나 세상의 잣대로나, 줄타기에 관한 한 비길 자가 다시없다는 자부심의 표명이다. 무릇, 예로부터 재인(才人)이란, 제 안에서 들솟는 기와 신명에 추동된 흥겨운 도취로 세상의 파도를 넘어서는 존재였다.
타고난 재능이 일러주는 대로 찾아간 길이 아니다. 취미 삼아 올라탔다가 끝내 들입다 내닫은 길도 아니다. 거미처럼 허공을 희롱하는 찬연한 기예에 홀려 입문한 길도 아니다. 어쩌다 보니 우연하게 접어든 길이 평생 업이 됐다. 우연한 시발이었으나 우연만으로 다 설명될 수는 없다. ‘우연’이 바뀌어 필연이 됐으니, ‘필연’을 불러들인 임자는 오직 김대균 자신이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아도 저절로 흘러가는 인생은 있을 수 없는 법. 그는 필연과 사필귀정의 공리를 염두에 두고서 줄 하나에 삶의 전부를 걸어왔다는 게 아닌가. 들어볼까? 일찍이 아홉 살 그 어린 나이에 줄을 만난 내력부터.
“부친께서 용인 한국민속촌에서 일을 하셨다. 민속촌 전시가옥이라는 곳에서 일가가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민속촌에서 줄타기 공연을 하던 김영철 선생(작고, 줄타기 초대 인간문화재)께서 내 손을 잡아끌더니 줄 위에 올려놓는 게 아닌가. 그렇게 우연히 접어든 줄타기 도제수업이 평생의 공부이자 직업으로 이어질 줄 어찌 알았겠는가.”
“김영철 선생은 왜 하필 당신에게 줄타기를 가르쳤을까?”
“그걸 잘 모르겠으나 진정 모를 일은 아닌 것이, 내겐 황소처럼 우직하게 뚜벅뚜벅 가는 근성 하나는 있다. 날마다 놀이판이 펼쳐지는 민속촌에서 그냥 뛰어놀던 철부지였을 뿐이지만 선생께선 뭔가 자질을 봤을지도 모르지.”
“쓸 만한 후계자로 점찍었다는?” “후계자라는 의식조차 없이 가르치시는 대로 반항 없이 받아들이며 훈련에 임했다. 열네 살 때의 어느 날, 짓뭉개진 내 엉덩이를 바라보며 스승께서 말했다. ‘야야, 내가 60년간 줄을 탔지만 너처럼 고지식한 놈은 처음 봤다!’(웃음) 줄 위에서 연습을 하다 보면 여기저기 까지고 터진다. 동아줄에 쓸리고 깨지고, 피 터진 볼기짝에 팬티가 들러붙어 피범벅 오방난전(‘나한전’의 방언)이 되더라고.”
“능란해지면 매혹되게 마련이다. 혹독한 수련을 통해 기량이 늘며 서서히 줄타기에 빠져들었나? 이게 내 길이구나, 그런 필연을 느낀 건 언제였지?”
“매력을 느끼긴 어려웠다. 스승의 가난, 외로움, 서러움, 그런 걸 가까이서 지켜봤으니까. 그런데 첫 공연을 해 내가 출연료라는 걸 받는 일이 생겼다. 아하, 이걸 하면 살림에보탬이 되겠구나, 그런 기대가 생기더라고. 우리 집안이 너무 가난해 아버지가 빚을 지며 살았지. 그걸 중3 때 출연료를 모아 갚아드렸다. 밥벌이 수단으로만 줄타기를 생각한 건 아니었다. 가물거리는 전승 민예의 맥을 이어가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이 스무 살 지나서부터 찾아왔다.”
용렬한 잔꾀 한번 부리는 일 없이 스승을 섬기어 묵묵히 따랐던 것 같다. 그렇기에 일취월장이 있었겠지. 줄은 통상 3m 허공에 걸린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수가 있다지만, 줄에서 허투루 실족하는 줄광대는 줄광대도 아니다. 약식 줄타기인 ‘도막줄’이 아니라 완판 공연을 할 경우엔 무릎 꿇고 걸어가기· 거미줄 내리기·뒤로 훌치기·앉아서 돌기·콩 심기·쌍홍잽이·난간치기 등 40가지의 난해한 기예를 줄줄이 펼쳐야만 한다. 하수에겐 작두날처럼 긴장이 될 외줄. 그러나 고수는 줄 위에서라야 신명이 뻗친다. 동으로 서로 풀을 눕히거나 일으키거나, 자유자재하게 휘몰아치는 바람처럼 줄을 가지고 논다. 혹은 치닫고 내닫고, 혹은 설치고 까불고, 혹은 떴다가 내려앉는다. 오두방정과 너스레로 표출되는 재담의 해학으로 관중을 사정없이 휘어잡아야 한다. 고도의 집중력, 호흡의 리듬, 막대한 힘과 균형감각, 그리고 샘솟는 기지와 언어적 순발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줄이 내 생명줄이다”
김대균의 기량에 물이 오르기 시작한 건 20대 중반부터. 그즈음 고향과도 같았던 민속촌과 결별한 건 자유롭고도 본격적인 줄판을 벌이기 위해서였다. 그래 전국 곳곳의 문화 행사나 축제 현장을 돌며 온몸으로 터져 나오는 기량을 과시했다. 덩달아 기능도, 연행 구성 솜씨도 날로농익어 가는 곳마다 대중의 갈채가 쏟아졌더란다. 서른네 살 땐 마침내 줄타기 2대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았다. 당시 언론들은 최연소 인간문화재 김대균에 관한 보도를 했다. 그는 한 걸음 더 내딛었다. 특유의 뚝심을 발동,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들어갔던 것.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연희과에 입학, F학점을 수시로 받으면서도 공부에 열을 내 무사히 졸업했다. 안주하지 않는 정신이비치는 행장이다. 그제야 비로소줄 아래 세상을 쿵덕거리는 마음으로 또렷이 내려다봤던 모양이다. 가슴으로 차오르는 자부심과 희열에 행복했다는 게 아닌가.
“스승이 자주 홀대 당했듯이, 줄타기에 대한 인지도와 관심도가 낮아 섭섭한 대접을 받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전통 연희에 관한 사회적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인간문화재를 대하는 눈빛들이 달라졌다.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변신한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된 것이지. 그러자 새삼 절박한 사명감이 느껴지더라고.”
“줄광대의 울분과 욕망을 다룬 영화 ‘왕의 남자’를 계기로 줄타기에 대한 인식이 별안간 높아졌다지?”
“탄탄한 시나리오, 빼어난 영상미학으로 재인들의 정신세계를 잘 녹여낸 영화였다. 이 영화의 히트와 함께 줄타기 공연 환경이 좋아진 건 사실이다. 전국 각처에서 펼쳐지는 축제들도 비슷한 작용을 했다. 줄타기만큼 민속축제에 적격인 장르가 어디 있겠는가?”
“줄에 오를 땐 어떤 생각을 할까?” “이 줄이 내 생명줄이다, 라는 생각을 매번 한다. 처자를 먹여 살릴 방편이라는 의미만은 아니다. 죽을힘을 다해 완성도 높은 공연을 해야 한다는 다짐에 사로잡히는 것이지. 그래서 무수히 거듭해온 공연이지만 늘 긴장돼 스트레스가 쌓인다. 공연이 없을 땐 하루 한 갑 정도 담배를 피우는데 줄 타는 날엔 세 갑씩 피운다.”
이미 피부처럼 몸에 붙은 기예를 실컷 즐기면 그만일 것 같지만, 줄타기란 원천적으로 아슬아슬한 곡예라 방심은 금기다. 긴장을 면제받을 길이 없다. 연희란 또한 홀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작업과 달라서, 행위자의 노출증과 관찰자의 관음증이 맞부딪쳐 교감과 만족을 야기하는 장르가 아니던가. 긴장감이 자글거릴 수밖에 없다. 매번 청심환을 먹고 무대에 오르는 가수처럼 말이다. 한 발 삐끗해 낙상이라도 한다면 스스로를 모독한 죄의식에 겨워 남몰래 슬플 게다.
“관객은 가급적 많은 게 좋겠지? 북새통을 이룬 다중의 호응과 박수소리에 힘입어 신바람이 날 테니까.” “예전 어릴 적 공연에선 박수는커녕 얼음판 같은 분위기에 질리기도 했다. 내가 이 짓을 왜 하나? 회의가 밀려올 정도로. 그러나 그건 다 지나간 일이다. 관객의 공감을 자아내는 일에 귀신처럼 능한 게 줄광대다. 관객 수에 흔들릴 게 없다는 거. 그런데, 오늘 공연이 잘될지 말지는 현장에 도착 즉시 정확하게 가늠되더군. 공연장의 환경, 바람의 동향에 따라 공연의 질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더 결정적인 건 지역 정서에 따라 반응이 크게 다르다는 점이다. 유난히 점잖은 사람들만 사는 지역에선 썰렁한 반응이 돌아오더라고.” “나무토막 같은 사람마저 요절복통하게 만드는 게 줄광대의 의무 아닌가?”
“재담이 관건이다. 줄 아래서 양념을 치는 어릿광대와 주고받는 재담에 폭소가 터지는 것이지. 작고한 발탈의 명인 이동안 선생을 아는가? 남사당패 출신의 위대한 재인이었던 그는 줄타기에도 능했다. 난 선생을 쫓아다니며 판줄 재담과 타령을 배웠다. 그러나 재담에 빼어나기는 쉽지 않다. 부단히 아이디어를 찾으며 노력해왔지만 여전히 만족할 수 없다.”
“평소 애용하는 짤막한 재담 한 토막을 소개한다면? 가급적 웃기는 걸로.”
“흠. 일테면 다음처럼 사설을 늘어놓는다. ‘어떤 사람이 그럽디다. 줄 하나 잘 타면 출세한다고. 그래서 아홉 살 때 줄에 올라 한평생 줄을 타고 있지만 별 볼일 없더라고! 매번 엉덩이나 깨지고 줄광대라고 손가락질이나 당하고 말여. 그래도 딱 하나 좋은 건 있더라고! 여러분들이줄 아래서 저를 올려다본다는 것말여! 얼쑤! 자 그럼, 넋두리 그만하고, 잘하면 살판이요, 잘못하면 죽을 판이로구나, 어디 한번 살판이나 놀아볼까?’ 이런 식으로 너스레를 떠는 것이다.”
“결례되는 얘기지만, 그 정도의 재담으로 폭소 유발이 가능한가? 아마도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구사하는 재담이 진국일 것 같다.”
“다분히 형식화된 게 전통 연희다. 과거의 틀을 보존해야 하는 당위에서 초래된 박제화 경향이 있다. 이를 현대화할 필요가 있다. 그건 내가가장 진력하는 부분이지.”
줄광대 나이 서른이면 환갑
저 옛날의 광대들은 비록 천대받고 살았으나, 그 반동으로 숙성한 꿈과 갈망과 해학은 옹골찼다. 들려오는 얘기에 이런 게 있다. ‘백정은 썩은 기둥에서 나오는 노래기이고, 광대는 똥에서 나온 파리다. 노래기는 사람 눈에 띄면 밟혀 죽지만, 파리는 임금님 용안에도 앉을 수 있다.’ 광대의 숙명과 지향을 꿰뚫은 황금 언설이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광대들의 기량과 배포와 정신의 대륙붕을 어지러이 급변하는 현대에서 어떻게 다시 만날 것인가. 김대균의 고민도 이 대목에 있는 것 같다.그는 해외 공연을 수십 차례 해왔다. 그때마다 느끼는 게 전통문화의 무한한 잠재력에 관한 자각이라지. 서양인들이 오히려 더 줄타기에 열광하더라는 것이다.
“즉각 즉각 반응이 오더라고. 그들이 워낙 공연문화에 익숙해서이기도 하겠지만, 듣도 보도 못했던 한국의 줄타기에 서린 섬세한 예술성에 감동하는 것 같았다. 재담 없이도 통했다. 몸짓 언어만으로도 다 이해하는 분위기였으니.”
“가사, 발탈과 더불어 줄타기 종목이 ‘긴급보호무형문화재’로 지정돼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맥이 끊길 가능성은 없을까.”
“줄을 배우려는 사람이 점점 줄어든다. 나에겐 현재 겨우 다섯 명의 전수자가 있을 뿐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수자 등 10여 명이 있었으나 이탈했다.”
“왜지?”
“훈련이 너무 빡세거니와 긴 세월을 수련해야 수준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미는 있다고들 하면서도, 갈 길이 너무 멀고 험하다는 걸 알아 재주 용한 아이들까지 빠져나가더라. 원래 소년 명창이 대명창으로 성장하기 힘든 법이다. 심지어 내 아들놈도 전수 장학생으로 줄을 배우다 달아나 미국에서 회계학을 공부한다. 아들 인생 간섭할 생각은 없지만, 회계학이 뭐시여? 맘에 안 든다.(웃음)”
“이상하다. 당신의 몸이 비대해지고 있다. 불면 날아갈 듯 가벼워야 줄을 탈 수 있지 않나?”
“발목 골절로 근 1년 놀았더니 부풀었다. 사실 난 늙었을지도 모른다. 줄광대의 기량은 젊어 무르익는다. 이바닥에선 줄광대 나이 삼십 줄에접어들면 환갑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난 살을 빼고 다시 줄에 올라야만 한다. 불쏘시개가 돼야 하지 않겠는가. 전수관 건립을 위한 일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과욕이야 위험하지. 평생 줄 위에서 중심을 잡으며 배운 거 하나는 ‘가운데 중(中)’ 의 지혜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의 시골집 마당으로 걸어 나오자 휘영청, 밝은 달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 혼마저앗아갈 듯 황홀한 저 달빛. 마당 연습장에 설치된 동아줄이 하얗게 반짝거린다. “보름달 아래의 줄타기는 어떤가?” 그리 건네자 돌아오는 답이 허무하다. “아이고, 이젠 늙은 것을.”
주민을 위한 작은 복지관 커뮤니티 센터
지난 12월 23(월) 오후 7시부터 서울시 송파구 위례 신도시 안의 도심형 요양원인 KB 골든라이프케어 위례 빌리지 커뮤니티 센터(주민 사랑방)에서 지역주민을 위한 특강이 있었다.
올해 9월에 개관한 커뮤니티 센터는 1층에 위치한 넓고 채광이 좋은 공간으로 지역사회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개관 후 주민들을 위한 첫 번째 강좌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초, 중, 고생 학부모들이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에 포커스를 맞추고 초빙 강의를 준비했다. 초빙 강사는 강남대학교 입학 사정관으로 활동 중인 박주용 강사였다.
맞벌이 젊은 부부들이 많이 사는 지역 특성상 주민들의 자녀교육에 관한 관심과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다. 강좌 시간이 가까워져 오자 주민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란?
우리는 지금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급변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정보혁명 시대, 제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부른다. 이러한 환경에서 우리 아이들의 바람직한 교육은 과연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지 아이들은 물론 학부모의 고민이 깊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월스트리트 증권가에서 트레이더들의 대량 해고 사건이 있었다. 평균 연봉이 4억~5억을 호가하는 트레이더들이 하는 영역을 ‘캔쇼’라는 인공지능에 맡겨놓으니 인간 600명이 한 달 걸리는 일을 켄쇼는 혼자서 3시간 20분 만에 끝내버렸다. ‘켄쇼’는 인간보다 더 계산을 빠르게 처리하는 한편 그만큼 비용도 절감되는 효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인간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바둑에서 알파고, 한돌 같은 인공지능이 나타나 한순간에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향후, 전문적인 분야로까지 인공지능이 확대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즉 의사보다 인공지능 로봇이 더욱 정확하게 병을 찾아내고 치료 방법까지 제시할 수 있는 시대가 나타날 수도 있다.
학교 교육의 진짜 문제는 상대평가 서열화이다
우리 교육의 현실은 시험점수를 잘 받고 수능을 잘 보기 위해서 학생들이 무한경쟁에 노출되어 있다. 학교에서는 수업을 통해 모든 문제에는 답이 정해져 있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인생에 있어서 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즉,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중요시해야 한다. 부모가 이 문제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세상에 답이 정해진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학교에서는 답이 정해져 있다고 배우지만 현실에서는 답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고 가르쳐 줘야 한다.
그리고 진짜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그러면 진짜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까? 독서다. 인간의 내면적 가치를 위해서 다양한 독서를 통해서 ‘희망’을 찾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내면적 가치를 위한 공부는 독서이다
독서가 왜 좋은가? 독서를 통해서 깊은 사고와 문제의 연결방식을 알아갈 수가 있다.
첫째, 독서는 두뇌의 전 영역을 자극해서 깊은 사고를 할 수 있다. 워싱턴 대학의 연구에 의하면 ‘독서는 뇌의 17개 영역을 활성화’ 시킨다고 한다.
둘째, 간접경험을 통해 다양한 관점
➀ 뇌의 측두엽은 언어의 습득 및 1차 감각을 감지한다. 즉 뇌의 신경세포는 실제
일어나지 않아도 일어난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➁ 소설을 읽고 마치 주인공의 마음을 느끼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공감할 수 있다.
➂ 단순히 공감을 넘어, 다른 사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셋째, 언어발달과 사고의 틀이 형성된다.
➀ 독해력 향상 : 글자가 아닌 글을 읽는 능력을 키워주고 의미 있는 언어를 습득
함으로써 그만큼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진다.
상호 질문 및 토론시간
위례신도시 내에서 자그마한 도서관 관장을 하고 있으며 고2 자녀를 둔 학부모인 김경이씨는 “위례신도시는 아이들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히 갖추어지지 않은 신도시임에도 젊은 맞벌이 부부들이 많이 살고 있어 자녀교육에 대한 고민이 깊다”고 하였다. 아이가 좋아하는 바둑을 허락하면서 많이 고민했다고 말했다.
직장에서 IT 관련 업무를 하고 있다는 초등학교 3, 5학년 자녀를 둔 직장인 김동희 씨는 IT 기술의 가장 핫한 분야는 딥 러닝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아이들이 어떤 쪽으로 공부를 해야 보다, 좋은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6학년 딸이 책을 너무 안 봐서 걱정이라는 김경아씨 부부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독서를 권유했지만 별 효과가 없어 그 방법이 궁금했다고 질문했다.
박주용 강사는 답변을 통해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책인 ‘해리포터’를 같이 읽으면서 중간중간 궁금증을 유발할 만한 대목에서 멈추면서 호기심을 유발하는 방법”도 좋은 방법의 하나라고 제시했다.
저녁 7시에 시작한 강의와 토론은 9시까지 분위기가 후끈할 정도로 가열되어 토론이 이어졌다. 이구동성으로 모두가 유익한 강의였다고 말하면서 앞으로도 유익한 강좌가 주민 사랑방에서 이어지기를 희망했다.
‘논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가. 빈둥빈둥하는 것도 노는 것이지만 바쁘게 노는 건 방향이 있고 의미가 있는 놀이일 것이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는 말처럼 인간은 먹고살기 위한 일 외에는 놀면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놀이에서 예술 활동이나 스포츠 활동이 생겼다는 사실을 보면 논다는 게 단순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혼자서 놀아도 그 방식은 각자 다를 수밖에 없다. 내 경우 직장이 없어 노는 게 맞지만 그렇다고 할 일이 없는 건 아니다. 아내를 도와 집안일을 하는 거야 누구나 할 테고 그런 일을 빼고 나면 취미생활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는 삶의 영역을 노는 것으로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이제 본격적으로 나의 ‘집에서 혼자 놀기’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얼마 전 ‘힘들지만 즐거운 여름나기’라는 제목으로 전원생활의 빛과 어둠을 비교해 글을 썼다. 즐거운 것 중 하나로 매실주 담그는 얘기를 했는데 늦가을인 요즘, 애주가로서 그때 담근 매실주를 조금씩 마셔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열심히 골프를 치러 다녔다면 이런 맛을 즐기는 호사를 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 친구가 은퇴 후 10년이 된 나이인데도 테니스를 열심히 치러 다닌다 해서 좀 부러웠다. 나는 젊은 시절 치다 이마를 다친 후 손에서 놨다. 하지만 코트 위의 검투사처럼 사각 틀 속에서 온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 테니스의 매력은 여전히 잊지 않고 있다. 친구는 체력은 문제없는데 같이 칠 파트너를 찾기가 점점 어려워진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서글픈 현상이지만 어찌할 것인가. 골프나 테니스에 대한 나의 희미한 갈망은 텔레비전 중계로 풀곤 한다.
재미 들린 작은 농사
스포츠도 에너지를 소모하는 운동이지만 꽃과 나무들을 돌보는 데도 에너지를 많이 쓴다. 꽃나무들은 사올 때처럼 예쁘게 가만 있지 않는다. 보기 흉하게 자라지 않도록 가꿔줘야 한다. 그냥 놔두면 야생의 숲처럼 돼버린다. 하루 작정하고 나가 일하면 겉옷 속옷 할 것 없이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린다. 일을 끝내고 샤워 후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면 그 즐거움이 스포츠 활동과 진배없다. 무언가를 생산했다는 보람까지 느끼면 쾌감이 더 오래간다.
꽃나무뿐만 아니라 40~50그루 규모의 블루베리 농사도 짓고 있다. 열매를 1년 내내 생으로 또는 가공해서 먹을 수 있어 좋다. 블루베리는 면역력 향상은 물론 건강에 좋은 식품으로 소문이 나 있는데 눈을 좋게 해주는 효능도 크다. 실제로 연전에 돋보기를 맞춰 뭘 읽을 때마다 써보니 영 거추장스러워서 아예 빼닫이에 넣어놓고 있었는데 블루베리 농사를 짓고부터는 지금까지 돋보기 찾을 일이 없다. 한번은 쓰고 다니는 근시 안경이 맞지 않아 안경점엘 갔는데 시력이 더 좋아졌다고 한다. 믿기 어려운 현상 아닌가.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다.
7년 전 블루베리 2년생, 그 어린것을 심어놓고 밤낮으로 물 주며 돌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키가 2m를 넘는다. 커갈수록 일은 더 많다. 잡초 뽑고 오래된 가지 베어내고 더 이상 크지 않도록 긴 가지는 잘라주고, 누운 가지는 지지목을 대주기도 한다. 품종별로 익는 시기가 달라 열매 따기는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다. 또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집어서 따야 한다. 수확 시기가 되면 우리 부부의 블루베리 열매 따기 걱정이 시작된다. 내가 “좀 덜 따고 놔두면 어때? 떨어져서 개미가 먹으면 안 될 일이 있나?”하며 늑장을 부리면, 아내는 “1년 내내 먹을 블루베리잼은 어떻게 만들죠? 그렇게 좋아하는 작은애한테는 뭘 보내주죠?” 한다. 블루베리 농사는 벌써 9년째에 접어들었다. 돈 생기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가족들과 나누고 지인들에게도 한 번씩 맛보게 하려면 고생스러워도 해야 한다. 사는 게 그런 것 아닌가. 작은 농사를 지어도 이렇게 배우는 게 많다.
스포츠와 농사를 비교한다는 건 좀 웃기는 일이다. 그렇지만 여럿이 하는 스포츠에 비해 농사는 혼자서도 할 수 있고 집중을 하다 보면 나름대로 지혜도 는다.
명품 매실주 담그기
매실주 담그는 재미에도 푹 빠졌다. 애주가로서 담금 매실주를 조금씩 마시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일본 사람들은 매실로 주로 우메보시를 만들어 먹는데, 우리처럼 청매를 쓰는 게 아니라 다 익은 황매를 이용한다. 익은 열매는 나무 밑에 보자기를 낮게 매달아놓고 가지를 털면 잘 떨어진다. 우리 부부는 그런 준비까지 할 여유가 없어서 그냥 긴 대나무 장대로 털어낸 뒤 주워서 모으는 방식으로 수확을 한다. 그렇게 두어 시간 몰입해 작업을 하고 나면 만족감이 든다. 큰 플라스틱 용기에 쌓이는 굵고 누런 매실이 얼마나 듬직해보이던지. 수확 후에는 세척하고 말리는 데 하루를 다 써야 한다. 다음 날에는 큰 유리 용기에 담금용 소주를 붓고 매실주를 담근다. 매실을 저울에 재서 일정량을 쏟아 넣고 거기에 맞춰 소주를 부으면 된다. 자그마치 큰 용기 두개, 작은 용기 한 개. 세 용기에 채워놓고 나면 뿌듯하다. 이런 상태로 5년은 숙성해야 마실 만한 명품 매실주가 된다. 좋다. 5년을 기다려보자 하면서 작업을 마쳤다. 흐뭇한 마음으로.
독서와 음악 감상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지내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항간의 말은 맞다. 알면서도 못하는 건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말 또한 맞다. 학교 다닐 때 취미를 기록해 써낼 때가 있었는데 특별한 재능이 있는 아이들은 쉽게 피아노, 바이올린, 축구, 노래하기 등을 써넣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독서, 음악 감상 같은 걸 취미라고 기록했다. 커가면서도 마찬가지였다. 특별한 취미가 없으면 그때마다 독서 아니면 음악 감상이 등장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독서를 취미로 할 만큼 책을 즐겨 읽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고 음악을 즐기는 사람도 흔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까지 음악을 좋아하는 걸 큰 다행으로 여긴다.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노래방을 찾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우리 생활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부분은 실로 엄청나다. 전국노래자랑, 복면가왕, 히든싱어, 나는 가수다,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 케이팝스타, 위대한 탄생, 미스트롯, 미트터트롯 등 텔레비전 프로그램만 봐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노래와 음악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요즘 프로그램만 꼽아봐서 그 정도이지 노래와 함께하는 것들을 다 열거하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민족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클래식 듣기를 좋아해 지금도 집에 들어오면 일단 오디오나 텔레비전 음악 채널을 틀어놓는다. 이 글을 쓰면서도 음악을 듣고 있다. 고교 시절, 서울에 올라와 지내는데 어느 날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바이올린 선율을 듣게 됐고 푹 빠져버렸다. 그렇게 ‘대단한 경험’을 하고 나서부터 나는 클래식 음악만 들려오면 귀를 기울이곤 했다. 좋은 오디오와 LP 음반을 많이 가지고 있는 친구가 있어 종종 그 집에 가서 감상을 하거나 빌려와 들어보기도 하면서 음악 감상 취미를 길러왔다.
매혹적인 나만의 ‘소리’에 취하다
20여 년 전 비엔나에서 근무할 때 덴마크 산 뱅앤올룹슨(Bang&Olufsen, B&O)을 제법 비싸게 사서 듣고 다녔다. 그 후 여기저기 옮겨 다닐 때도 늘 잊지 않고 챙겼다. 지금도 제주 집에 놓고 수시로 음악을 듣는다. 나는 한 번씩 서울에 가면 교보문고에 들러 음악 시디를 아낌없이 사온다. 아내는 이 기기에 ‘남편 장난감 1호’라고 이름을 지어줬다. 생일 때 선물로 받은 노트북, 소니 카메라는 2호쯤 될 것이다. 어쨌든 이 음향기기는 딱 한 번 고장이 나서 회로를 교체하는 등 수리를 한 적 있지만 아직까지 처음의 성능을 잃지 않고 있다. 무얼 더 바랄까.
내가 듣는 음악, 우리가 듣는 음악은 정말 다양하다. 나는 클래식은 말할 것도 없고 각국의 대중음악을 다 좋아한다. 샹송, 팝송, 칸초네, 칸시온, 컨트리, 탱고, 파두 등등. 라디오 방송 중 클래식 다음으로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KBS클래식FM의 ‘세상의 모든 음악’이다. 세상의 모든 음악 속에는 세상의 모든 삶이 녹아들어 있다. 감상하다 보면 그 사람들과 교류하는 느낌이다. 적어도 그런 감성으로 모든 음악을 듣고 즐기고 이해한다. 스페인 음악을 듣다 보면 ‘코라존(Corazon)’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는데, 번역하면 Heart, 즉 마음, 사랑, 애인이다. 노래를 듣다가 이 가사가 나오면 시공을 초월해 사랑에 빠진 남녀가 상상된다.
클래식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니니 이렇다 저렇다 하기는 좀 그렇지만 고전음악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삶의 기본을 생각하게 해주는 느낌이 든다. 대중음악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의 감정을 고양된 형태로 표현해주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그 많은 천재 작곡가들이 온 정열을 바쳐 만든 음악을, 최고의 기예를 뽐내는 천재 연주가들이 빚어내니, 그 소리는 바꿔 말하면 천상의 소리에 지상의 양식이요 품격인 것이다. 그러니 음악에 빠졌다는 건 엄청난 경험이자 행복이라 할 수 있다.
하우스 콘서트를 열다
아마추어일 뿐인 음악 애호가로서 크게 한 번 객기(客氣)를 부린 일이 있다. 부모님을 통해 알게 된 재영 바이올리니스트 줄리아 황이 한국에 요양차 한두 달 머무르는 기회에 남산 언저리에 있는 우리 집에서 하우스 콘서트를 연 것이다. 런던에서 연주활동을 하는 그는 7세 때 영국으로 건너가 바이올린을 배웠고 9세 때 신동으로 등장한 젊은 음악가다. 고교 시절에는 공부를 너무 잘해 케임브리지대학교와 왕립음악원에서 입학 허가를 받고 전자를 선택했다. 1688년에 제작된 과르네리우스의 악기로 연주하는데 그 소리가 형용할 수 없이 좋았다. 그는 나흐트무지크(Nachtmusik)란 이름으로 그날 여섯 곡을 선사했다. 좁은 집이었지만 여남은 명이 참가해 나름 성황을 이뤘다. 처음 해본 하우스 콘서트치고 성공이었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제주와 서울에서 작은 음악회를 열어보고 싶다. 음악 애호가가 많을수록 세상이 평화로워진다고 생각한다면 지나치게 순진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클래식 음악의 본질이 그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주 가는 이태원에 루체(LUCE)라는 시니어 아마추어 성악가 모임이 있어 이따금 그들의 연주를 듣는다. 모두 행복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음악의 힘이다.
글 쓰면서 혼자 놀기
집에서 혼자 놀기 중 내 시간을 가장 많이 쓰는 건 글쓰기다. 이젠 취미가 됐다 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니다. 글을 써서 어디 기고를 하면 원고료도 나오니 돈 써가며 하는 취미가 아니라 시간도 잘 보내면서 돈도 생기는 취미다. 글 써서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은 일이라서 어떨 때는 지겹다고 한다. 나는 다르다. 한 인터넷 사이트에 정기 필진으로 참가하고 있는데 한 달에 한두 번꼴로 글을 쓴다. 주제와 형식이 자유롭다. 단, 원고료는 없어 일종의 재능 봉사라 할 수 있겠다.
글이라는 건 아무 때나 써지지 않는다. 글 한 편 쓰기 위해 평소에 늘 글감을 생각하면서 지낸다. 이게 또한 재미다. 이번 행사에 참여하면 어떤 글이 나올까, 그 공연은 어떤 글감이 될까, 저 활동을 하면 어떤 글로 이어질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내니 심심치 않다. 글을 발표하면 주변 친구들과 지인, 동창, 각종 단체에도 보내는데 갖가지 독후감을 보고 듣는 재미도 있다.
글쓰기를 통해 나는 자유를 느낀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쓰지는 않는다. 잘 쓰고 싶은 욕심에 나름의 원칙을 갖고 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은 두 가지 기준을 충족한다. 첫째, 읽는 사람이 재미를 느껴야 한다. 둘째, 많은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나는 일로서든 취미로서든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쓰겠지만 이 두 가지 기준에 충실할 생각이다. 그러다 보면 한순간 한순간이 좋은 글을 만들기 위한 생각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도 잘 놀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