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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단카이 세대의 취미
- 이태문 일본 통신원 gounsege@gmail.com 정년퇴직 이후의 삶, 제2의 인생을 어떻게 하면 알차게 즐길 수 있을까? 아마도 누구나 한번쯤 고민하며 그 실마리를 찾으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릴 것이다. 하지만 나이 들어 새로운 취미를 만드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의욕과 체력이 따라주는 젊은 시절부터 ‘취미의 씨’를 뿌려두는 게 중요하다. 취미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사람들에게 그 비결을 물으면 “젊었을 때 했던 취미생활을 다시 시작했다”고 대답하는 분들이 꽤 된다. 그러나 새로운 취미에 도전하는 걸 방해하는 건 의욕도 체력도 아니고 ‘오래 계속하는 것’이라는 선입견일지도 모르겠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기회이자 타이밍’이니 남은 삶에 지금까지 맛본 적 없는 ‘재미’와 ‘보람’을 선물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자기 삶의 ‘애호가’일 것이다. 일본 시니어들의 취미 일본에서는 고령자가 계속할 수 있는 취미로 주식, 등산, 워킹, 낚시, 독서, 자수, 골프, 볼링, 시쓰기, 체스, 데생, 원예, 역사, 장기, 분재, 서예, 유화, 과자만들기, 수묵화, 시계수집, 게이트볼, 꽃꽂이 등을 꼽는다. 크게 몸을 움직이는 취미, 머리를 쓰는 취미, 손동작이 필요한 취미 등으로 나눌 수 있겠다. 이러한 취미는 운동 부족을 해소해주고, 치매 예방에도 좋다. 또한 같은 취미를 즐기는 사람들과의 교류도 넓혀주고 쓸쓸한 노후의 고독도 피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60대 남녀의 인기 취미 순위 350개 이상의 취미를 소개하는 일본의 ‘취미찾기닷컴’이 조사한 인기 순위를 잠깐 살펴보자. 먼저 60대 남성은 혼자 하는 여행, 사이클링, 오토바이, 재택근무, 사진, 전자공작(PIC), 절과 신사 순례, 주식, 워킹 순으로 조사됐다. 60대 여성의 경우는 혼자 하는 여행, 재택근무, 온천 순례, 절과 신사 순례, 워킹, 자수, 양궁, 등산, 심리학 순으로 인기가 있었다. 참고로 50대 남성의 취미로 사격, 50대 여성의 취미로 소설쓰기, 기타, 퍼즐 맞추기 등이 눈에 띄었다. 내 꿈을 찾아라~ 인생은 60부터 일본의 주쿄(中京) TV는 매주 일요일 아침 5시 45분부터 을 방송하고 있다. ‘아라칸’은 Around Kanreki의 줄임말로 칸레키는 우리말로 환갑을 의미한다. 이 프로그램은 환갑 전후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꿈에 도전해 제2의 인생을 즐길 수 있는 힌트를 제안하고 있다. 이 방송에서 소개된 이색 취미 몇 가지를 소개해보겠다. 2015년 12월 6일 방송에서는 빙상 위의 컬링(curling)이 아닌 날씨와 관계없이 체육관에서 즐길 수 있는 ‘커롤링(curolling)’이 소개됐다. 20여 년 전 나고야에서 시작된 이래 경기 인구 40만 명을 자랑하는 인기 스포츠로 체력보다는 두뇌게임이라는 점에서 ‘마루 위의 체스’라고도 불린다. 2016년 1월 10일에는 미술 취미로 ‘어탁(魚拓)’이 소개됐다. 낚시를 좋아하지 않아도 누구든 즐길 수 있는 ‘어탁’은 기존의 수묵(水墨) 중심이 아니라 색채와 구도 등을 바꿔가며 다양한 느낌을 줄 수 있다. 꼭 물고기가 아니어도 되며 모든 사물의 본을 떠서 작품으로 만드는 ‘탁화(拓畵)’라는 장르가 새롭게 소개됐다. 그다음 주인 1월 17일에는 카우보이 복장으로 차려입고 컨트리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컨트리 댄스가, 3월 13일에는 1960~1970년대에 붐이 일어나 일렉트릭 기타에 빠졌던 세대들이 밴드를 결성해 제2의 청춘을 만끽하는 모습이, 4월 17일에는 실제 동물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력적인 리얼 양털 퀼트 아트가, 8월 7일에는 다양한 무늬가 특징인 넥타이를 재활용해 가방과 인형 등을 만드는 리폼이 소개됐다. 이 밖에 9월 4일에는 경이로운 종이접기의 세계, 9월 11일에는 걸리버 여행기를 방불케 하는 미니어처의 세계, 10월 9일에는 종이를 오려내 그림을 만드는 ‘키리에(切り絵)’, 10월 23일에는 실제로 사람을 태우고 증기를 뿜으며 달리는 철도 모형 등이 소개됐다. 2017년에 들어와서는 우쿨렐레와 돌하우스(미니어처 장난감 집), 천사의 소리 핸드벨 음악, 볼펜 그림의 세계 등이 전파를 탔다. 이색(異色) 취미보다는 다양한 취미 인구가 많아지고 평균수명이 계속 늘어나면서 취미도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과거 이색적이라는 이유로 주목을 끌던 취미들은 최근 덕후(마니아, 광)들이 등장하며 주류와 당당하게 어깨를 겨루고 있다. 그만큼 취미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 셈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하는 것 역시 새로운 취미에 도전해 개척하는 자세일 것이다. 전문가들은 고령자들에게 무리하게 몸을 움직이기보다는 치매 예방 차원에서 손가락과 뇌를 자주 사용할 수 있는 주산, 바둑, 장기, 손글씨, 그림, 색칠하기, 민요, 노래방, 꽃꽂이 등을 권한다. 간단한 요리를 만들게 하거나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시키는 것도 좋다. 몸 푸는 기분으로 이런 취미는 어떨까? 사단법인 일본 화살불기 레크레이션협회는 폐활량에 자신이 없는 사람은 물론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취미로 화살불기를 권한다. 실제로 전국의 화살불기 교실에는 60~70대 회원들이 많은데 90세가 넘은 고령자도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수집이 취미인 사람들은 모으는 것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수집한 물건을 이용하는 방향으로 취미활동을 확대해보는 것도 좋겠다. 예를 들어 도자기 수집을 하는 사람이 도예 교실을 다니며 직접 만들어보거나,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 바리스타 자격증에 도전해 실력을 인정받는 것은 어떨까? 또 인물과 동물, 자연 풍경 등 사진 찍기를 즐기는 사람은 독거노인의 영정사진을 찍어주는 등 자신의 취미와 능력을 사회에 환원하는 재능기부 나눔을 실천해보는 것도 좋다. 이처럼 좀 더 관심을 갖고 주변을 살펴보면, 의외로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취미들이 많다. 먼저 발품을 팔아 정보를 찾아보고 자신에게 ‘안성맞춤’인 취미를 선택해보자. 슬슬 발동을 걸어보자 지난 2014년 5월에 구성된 댄스 그룹 ‘TGK48’은 일본 기후 현 다지미 시의 고령자들이 만든 그룹이다. 그룹명은 일본의 인기 여성 아이돌 그룹 AKB48의 이름에서 힌트를 얻어 ‘다지미, 겐키(건강), 고레샤(고령자)’의 머리글자를 따서 지었다. ‘노래하고 춤추고 먹고 마시고’를 기치로 내걸고 2016년 8월 60대 42명, 70대 21명, 80대 1명 등 총 64명(남성은 5명)으로 구성된 ‘TGK48’은 힙합도 소화하는 본격 댄스 그룹으로 공공시설을 빌려 일주일에 한 번씩 두 시간가량 연습을 하며 구슬땀을 흘린다. 최근 춤을 잘 춘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크고 작은 행사와 스포츠 대회에 출연,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뽐내고 있다. 강사 레슨비 등 연간 100만엔가량의 운영비는 다지미 시로부터 지원받고 있다. 고령자의 의료비와 개호비 등의 삭감과 관련해 길게 내다본 다지미 시의 획기적인 투자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2016년 3월 16일자 마이니치 신문에 따르면, ‘TGK48’ 멤버 35명의 체력을 측정한 결과 전 항목에 걸쳐 동세대의 일반인들을 훨씬 뛰어넘는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깜빡이는 빛을 보고 도약하는 데 걸리는 ‘전신 반응속도’는 무려 0.3초대로 20대 수준으로 나타났다. 5초간 빠르게 스텝을 밟는 ‘서서 스텝핑’의 평균 횟수도 60대 멤버가 40.1회, 70대 멤버가 37.7회를 기록해 젊은이 못지않은 결과를 보여줬다. 이들의 체력을 측정한 기후대학교 교육학부의 가스가 히카루 교수는 “힙합은 빠른 템포의 음악에 몸의 움직임을 맞추는 춤으로 신경에 좋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 2017-04-17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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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도장 견문기
- 시니어블로거협회 창립 행사에 댄스 공연이 잡혔다. 원래는 필자가 가르친 수강생들이 모두 무대에 오르는 것이 취지인데 수강생들이 바빠 연말 강습에 몇 번 차질이 생기다 보니 모두 참여하기는 어려웠다. 무엇보다 남녀 성비가 안 맞아 무대에 오르기는 무리였다. 그렇다고 그동안 가르친 자이브를 어떤 맺음도 없이 끝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필자라도 무대에 오르기로 한 것이다. 파트너는 수강생 중에 가장 열의가 있는 사람을 택했다. 배운지는 3개월밖에 안 되었으나 공연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둘이 나가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연습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공연 시간 2분 30초에 맞춰 몇 가지 휘겨를 더 가르쳤다. 총 열댓 가지 휘겨로 안무를 짜고 순서라도 익힐 겸 연습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인근 콜라텍에라도 가서 연습해보자고 했다. 필자가 댄스스포츠를 오래 했다고 하면 당연히 콜라텍에 여러 번 갔을 것으로 아는 모양이다. 그러나 콜라텍은 주로 사교댄스를 추는 곳이라 춤추러 일부러 간 적은 없다. 댄스스포츠는 바닥이 마루로 되어 있고 농구장 바닥처럼 약간의 마찰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콜라텍은 바닥이 미끄럽다. 음악이 다르니 댄스스포츠 춤을 출 수 없고 장소를 많아 차지하니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 그래서 댄스스포츠 춤은 댄스스포츠 파티에서만 췄었다. 처음 간 곳은 종로3가 국일관 콜라텍이었다. 국일관 건물 9층에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갔다.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마치 줄서서 라인댄스를 추듯이 사교춤인 잔발춤을 추고 있었다. 블루스와 지터벅을 번갈아 틀어주는데 지터벅 음악이 나오면 모두 잔발춤을 추고 있었다. 잔발춤은 제자리에서 조금씩 움직이며 추는 춤이다. 우리는 공간을 넓게 쓰는 자이브를 추니까 시선이 곱지 않았다. 대부분 70대 정도로 보였다. 희한하게도 남녀 비율이 맞았다. 입장료 1천원에 그렇게 놀고 즐기면 되는 것이다. 30분을 못 버티고 나왔다. 파트너의 얼굴이 실망에 찬 듯 보였다. 난생 처음 콜라텍이라는데 갔는데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던 모양이다. 그래서 답십리로 갔다. 답십리에서 장한평까지는 우리나라 댄스의 고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댄스 학원, 무도장, 댄스복 매장 등이 밀집해 있는 동네이다. 오페라라는 무도장에 갔다. 한창 동호회 파티 중이었다. 들어갈 수는 있었으나 정식 파티이므로 일단 복장을 갖춰 입지 않아 입장을 포기했다. 다음으로 88무도장으로 갔다. 사교춤 중심의 무도장인데 역시 너무 사람이 많아 입장을 포기했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이다. 마지막으로 가 본 곳이 제니아 무도장이다. 답십리역 4번 출구에서 장한편역 방향으로 3백미터 가면 도시철도 공사가 있고 그 맞은 편 무학성 캬바레 지하에 있다. 춤추는 사람들이 40대~50대 나이로 비교적 나이가 젊은 편이고 복장도 갖춰 입었다. 음악도 자이브 위주에 차차차, 룸바, 왈츠, 탱고를 췄다. 춤 동작이 커도 뭐라고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30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파트너는 이만하면 다시 찾을 만 하다고 본 모양이다. 필자에게 댄스를 배우는 사람들이 단체로 오자고 제의했다. 낮 12시부터 밤 10시까지인데 평일은 무료입장이란다. 주말은 3천원을 받는다 했다. 연습을 위해서라면 평일 낮에 다시 찾을만한 곳이었다.
- 2017-01-24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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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나가는 사람에게는 이유가 있다 PART1]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임을 깨닫는 사람이 최선의 인생을 산다
- 내가 처음 미국을 방문한 것은 1961년이었다. 그 당시 미국의 교수들을 비롯한 지성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말 중의 하나는 ‘인생은 60부터’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나이가 되면 인생은 끝나는 때라고 흔히 말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지금은 인생의 전성기가 60부터라는 관념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즐기기 위해 산다는 목표를 세운다면, 인생은 40부터라는 생각이 일반적일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값있고 보람 있게 살기 원한다면 60부터라는 판단이 적절할 것 같다. 그리고 즐기기 위해 사는 사람보다는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 사회적 의미도 창출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60은 100세 시대를 바라볼 때 늦은 나이가 아니라고 여겨진다. 60이 되면 인간적 성장과 성숙의 완숙기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믿을 수 있고 대인관계나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자신을 갖추는 연령이라고 생각한다. 공자의 자기평가와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그리고 60부터 75세쯤까지는 노력만 한다면 누구나 정신 및 인간적으로 성장이 가능하다. 지식과 사상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성 전반에 걸친 생산적이며 창의적인 노력과 사회 기여가 가능하다고 본다. 가능한 것만이 아니다. 100세 시대 인간은 누구나 그렇게 살아야 한다. 내가 76세 때의 일이다. 한 후배 교수가 회갑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내 친구가 “그 친구 철도 안 들었는데 회갑부터 된다”라며 웃었다. 자기도 그랬었다는 뜻이다. 비슷한 때였다. 내 나이를 물은 90대 초반의 선배 교수가 “좋은 나이로구먼…” 하며 부러워하던 얘기를 지금도 기억에 떠올리곤 한다. 60에서 75세쯤까지가 인생의 황금기였다는 사고는 누구나 잠재적으로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75세쯤까지 성장할 수 있다면 그 성장의 위상을 언제까지 연장할 수 있는가이다. 노력하는 사람은 85 내지 87세까지는 연장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의 성장을 포기하는 편이다. 40대라고 해도 공부와 일을 포기한 사람은 녹슨 기계와 같아서 사회적 기여를 못한다. 그러나 70대가 되어서도 사회적 관심을 갖고 노력하는 사람은 젊고 활기찬 생애를 이어갈 수 있다. 언제까지 연장될 수 있는가. 내 주변 친구들은 85세까지는 사회가 요청할 수 있을 정도로 봉사하며 도움을 주고 있었다. 가깝고 존경스러운 친구들 중 김수환 추기경, 김태길 교수, 안병욱 선생 모두가 그랬다. 90 가까이까지 일하기도 했다. 그런 점들을 감안해본다면 100세 시대의 후반기는 50대부터 시작하게 되고 50대가 되면 내가 80대가 되었을 때는 어떤 인생을 살게 되며 동료들과 사회는 나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를 스스로 묻고 대답을 얻어가는 삶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확실해야 한다. 나 자신이 교육계에 몸담고 있을 때를 회고하면서 스스로 후회스러운 반성을 해보는 때가 있다. 대학생활을 시작하는 20대 젊은이들에게, ‘내가 50쯤 되었을 때는 어떤 모습으로 인생을 살고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을 반드시 찾아 지녀야 한다고 권고하지 못한 잘못이다. 20대에 문제의식을 갖고 50세를 맞이하는 사람은 대부분 보람과 성공의 기반을 갖출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문제의식을 갖지 못한 젊은이들은 인생의 낭비가 너무 심하다. 인생의 전반기를 굳건히 다지지 못한 사람은 후반기에 가서도 그 빈자리를 메우기 힘들어지는 법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50대에는 80대 후반기까지의 장래를 계획하고 바르게 정진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갖고 살아야 한다. 인생관의 가장 큰 과제는 삶의 목적을 설정하는 일이다. 가치관의 핵심이 되는 것은 ‘어떻게 사는가?’에 대한 해답을 지니고 사는 것이다. 그런 생각들을 정리하게 되면 80대가 채워질 때까지는 마음 놓고 자신 있게 인생의 마라톤에 뛰어들어도 좋다는 결론이 된다. 나는 80대가 되면서 이제는 쉬고 싶고 쉬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져보았다. 그 휴식의 1년은 일하고 공부하는 1년보다도 더 지치고 무의미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시작해서 지금까지 17, 18년 동안 공부하고 일하는 것을 계속해보고 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거나 객관적 평가를 원해서가 아니다. 나 자신의 삶의 의미와 풍요로움을 상실하고 싶지 않아서다. 그런데 누군가가 90 고개를 넘긴 후에는 어떠했느냐고 물으면 객관적인 권고를 할 자신이 없다. 할 수 있는 대답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는 개인적 소감을 피력할 수 있으면 다행일 것 같다. 내 주변의 90대 사람들을 많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90대가 되면 자신의 신체적 건강을 뜻하는 대로 지탱할 수가 없다. 자연히 누군가에게 의존하게 된다. 부부 중의 한쪽은 떠나간다. 자녀들에게 의탁하는 것도 옛날과는 다르다. 여성들은 90대가 되어도 모성애의 대가라고 할까, 갈 곳이 있으나 남성들은 홀로 남는 것이 보통이다. 그 나이가 되면 친구들도 떠나간다. 그때 찾아드는 남성적 고독과 인간적 외로움을 극복하는 것조차 힘들어진다. 지금 나에게 하는 가장 적절한 문안인사가 있다면 “사시는 것이 많이 힘드시지요?”라는 말이다. 90대 후반은 더욱 그렇다. 그러한 부담을 극복할 수 있어야 90대에도 보람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지금 누군가가 나에게 “그래도 아직 행복하세요?”라고 물으면 나는 숨기지 않고 “행복합니다”라고 대답하곤 한다. 내가 지니고 있는 짐은 무겁지만, 그래도 일할 수 있고, 주변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나누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버거운 짐이지만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고생이라면 그 이상의 행복은 없겠기 때문이다.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임을 깨닫는 사람이 최선의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 김형석(金亨錫) 연세대 명예교수 1920년생. 안병욱 교수(숭실대), 김태길 교수(서울대)와 함께 한국의 1세대 철학자로,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영원한 현역’이다. 현재도 활발한 저술 및 강연을 통해 우리 사회에 큰 울림과 귀감이 되는 삶을 살고 있는 석학이다. 특히 100세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인으로서 사랑과 행복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바탕으로 동시대인들에게 깊은 성찰과 깨달음,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 2017-01-23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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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투어] 서서히 걷힌 안개 속에서 드러난 리기 산의 비경
- 스위스 중부의 호수 도시, 루체른. 로이스 강에는 14세기의 목조다리 카펠 교가 긴 세월 그 자리를 지키고 있고, 강변 주변으로는 아름다운 가옥들이 줄지어 있다. 밤이 되면 호수 물길 따라 흔들리는 야경이 더 멋지다. 스위스에서도 아름다운 도시로 소문난 곳. 1897년 여름, 이곳을 찾은 마크 트웨인은 “휴식과 안정을 취하기에 가장 매력적인 곳”이라고 격찬했다. 글·사진 이신화(의 저자, www.sinhwada.com) 루체른 호수의 또 다른 이름은 ‘월광소나타’ 루체른(Luzern, 해발 437m)은 취리히와 인터라켄의 중간쯤에 있다. 알프스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루체른의 아름다움은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리하르트 바그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음악가는 물론 빅토르 위고, 괴테, 실러, 바이런 등 문학가들도 즐겨 찾았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이 월광소나타로 불리게 된 배경에도 루체른이 있다. 베를린 태생의 시인이자 저널리스트, 음악평론가인 루트비히 렐스타프(1799~1860)가 베토벤의 제1악장에 대해 “달빛이 비치는 루체른 호수 물결에 흔들리는 작은 배” 같다고 평했기 때문이다. 루체른이 외부에 알려진 시기는 8세기, 수도원이 세워지면서부터다. 도시 명은 켈트어와 로망스어가 혼합된 로체리나(Lozzerina, 늪의 거주지)에서 유래했다. 13세기에는 장크트 고트하르트 고개(2108m)가 개통되면서 알프스 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자리 잡았고, 1332년에 합스부르크로부터 독립했다. 루체른에서 가장 먼저 반기는 곳은 로이스 강을 길게 잇는 목조다리 카펠(Chape, 204m) 교다. 1333년에 축조된 카펠 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목조다리. 지붕이 있는 다리의 천장에는 축조 당시 새겨진 그림과 글씨가 이어진다. 다리 중간의 팔각형 석조물 바서투름(물의 탑)은 등대 겸 방위 탑이었다. 카펠 교 위쪽으로는 1408년에 세워진 슈프로이어 교(Spreuerbrucke)가 있다. 바그너가 결혼한 마테우스 교회와 빈사의 사자상 로이스 강과 루체른 호수를 가르는 다리를 건너면 구시가지(Altstadt) 골목이다. 곡물 시장, 와인 시장, 뮐렌 시장 등이 있는 그곳에 마테우스(matthaus) 교회가 있다.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와 코지마(1837~1930)가 결혼식(1870)을 한 곳이다. 리스트의 딸이었던 코지마는 당시 독일의 피아노 연주자 겸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의 부인이었다. 바그너와 24세나 나이 차이가 났던 그녀는 남편과 이혼하기 전에 이미 바그너의 아이를 낳았다. 어쨌든 둘은 평생을 같이했다. 또 빙하공원으로 가면 ‘빈사의 사자상’(Lo ¨wendenkmal)이 있다. 작은 연못 위 바위 절벽 속에 들어앉아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자상이다. 이 사자상에는 스위스의 슬픈 역사가 깃들어 있다. 좁은 국토의 스위스는 농경지가 적은 산악지대인데다 지하자원도 없는 가난한 나라였다. 젊은이들은 5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외국 부대 용병으로 참가해 돈을 벌어야 했다. 1792년, 프랑스 대혁명 때 루이 16세를 지키던 786명의 스위스 용병들이 있었다. 다른 국가들의 용병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스위스 용병들은 끝까지 남아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이 죽어간 이유는 단 하나. 후세들에게 용병자리를 물려주기 위함이었다. 선대의 처절한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자상은 1820년, 덴마크의 조각가 토르 발센이 시작해 1821년 독일 출신인 카스아호른에 의해 완성되었다. 사자의 발아래에는 부르봉 왕가의 문장인 흰 백합의 방패와 스위스를 상징하는 방패가 조각되어 있다. 마크 트웨인은 “세계에서 가장 슬프고도 감동적인 바위”라고 묘사했다. 또 두 개의 뾰족한 첨탑이 눈길을 끄는 호프 교회(Hofkirche)가 있다. 735년, 이 도시에 처음 세워진 수도원이다. 17세기에 화재로 소실된 후 1645년에 후기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1525년, 고딕 양식으로 세워진 두 개의 첨탑은 화재 때 피해를 입지 않아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교회 안에는 1640년에 4950개의 파이프로 만든 파이프 오르간이 있고 건물 주변으로는 예술적으로 뛰어난 묘석들이 남아 오랜 역사를 보여준다. 루체른 호수 따라 찾아가는 리기 산 루체른에는 멋진 리기(Rigi, 1797m) 산과 필라투스(Pilatus, 2132m) 산이 있다. 특히 ‘산들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리기 산은 스위스 최대의 관광 휴양지. 루체른에서 유람선을 타고 비츠나우(Vitznau)까지 1시간 정도 가면 된다. 유람선 여행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스위스 풍치를 보여준다. 호반을 정원 삼은 300~400m의 언덕 위에 터전을 잡은, 아름다운 스위스 가옥들과 전원 풍경은 감탄사를 연발하게 만든다. 작은 도시, 비츠나우에 도착하면 산악열차 리기 쿨름(Rigi Kulm)이 눈앞에 있다. 리기 쿨름은 1871년 5월 21일에 개통한 유럽 최초의 산악열차. 리기 산 중턱 마을인 리기 칼트바트(Rigi Kaltbad, 1453m)를 거쳐 30분 정도 가면 정상에 이른다. 그곳에는 1861년, 스위스 최초로 산정에 세워진 호텔이 허허벌판에 우뚝 서 있다. 여러 갈래의 산책로(30km)를 따라 여름에는 하이킹을 즐기고 겨울에는 스키나 썰매를 탄다. 무엇보다 이곳에 오르는 이유는 멋진 풍치를 보기 위함이다. 미텔란트(Mittelland) 지방의 13개 호수와 켜켜이 이어지는 산들이 파도를 친다. 마치 ‘천국이 여기다’라고 생각하게 한다. 하산은 리기 칼트바트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베기스(Weggis)로 10여 분 내려오면 된다. 435m 고지에 위치한 휴양도시 베기스는 여행객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마력이 있다. Travel Tip! 현지 교통:루체른 선착장에서 비츠나우까지 매시간 유람선이 운행된다. 스위스 패스(www.swisstravelsystem.com)가 있으면 무료. 시내는 걸어 다니면 된다. 맛집과 숙박:호수 주변이나 구시가지에 레스토랑이 많다. 강변 옆의 라트하우스 양조장(Rathaus Brauerei)은 하우스 비어를 생산하는 곳으로 블론드 비어가 대표적이다. 또 뮐렌 광장에는 대형 쿱(coop) 마켓이 있다. 숙박은 루체른 시내를 이용하면 된다. 리기 산 중턱에 있는 리기 칼트바트 호텔(www.hotelrigikaltbad.ch)에서는 온천욕이 가능하다. 여행 포인트:필라투스 산을 가려면 알프나하슈타트(Alpnachstad) 역에서 등산 철도를 이용해 필라투스 역(2070m)까지 오르면 된다. 눈 덮인 필라투스 산 풍치가 매우 빼어나다. 문의 루체른 홈페이지:luzern.ch 유람선:lakelucerne.ch 스위스정부관광청:myswitzerland.com/ko
- 2016-12-06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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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중년@] 발레 교습소 “당신의 근육에게 말을 걸어봐요”
- 따뜻한 햇살이 드리워진 마룻바닥 위. 밝은 색 레오타드를 입은 선이 곱고 등선이 아름다운 여성들이 발레 바(bar)에 손을 살포시 얹고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한다. ‘쁠리에’, ‘앙오’, ‘아띠뜌드’, ‘아라베스끄’, ‘샤쎄’. 간질이는 듯한 발레 용어가 주문처럼 흐르면, 숨을 내쉬고 동작하는 이들의 이마와 등 위로 굵은 땀방울이 쏟아져 내린다. 발레교습소. 올망졸망 귀여운 아이들이 떠오른다면 더 이상의 상상은 잠시 접어두라.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꽃중년, 그녀는 수행하듯 선율에 답하고 거울 속에 비친 자신과 독대한다. 언젠가 지나쳤던 발레 교습소 앞에서 시니어 발레리나들이 보라색 샤 스커트를 입고 찍은 사진을 봤다. ‘아! 이 연세에도 발레를 하는구나!’ 생각해보면 예나 지금이나 발레를 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너무나 많은 피트니스클럽과 에어로빅 학원이 집 가까이에서 손을 뻗치고 있어서다. 발레를 하는 꽃중년 혹은 시니어 어디 없을까? 일반인을 대상으로 발레 강습하는 곳으로 입소문난 를 찾았다. 이곳 일반인 학원생들은 20대, 30대는 물론이고 40대부터 60대까지 나잇대도 다양하다. 취재를 위해 찾았던 날도 중년 이상으로 보이는 회원이 눈에 많이 띄었다. 이유는 뭘까? 모든 세대가 보다 대중적으로 발레를 받아들였으면 하는 나선영 원장의 철학 때문이다. 발레를 통해 근육을 조심스럽게 다스리고 비틀어진 골격을 정리하면 몸의 균형을 바로 잡을 수 있다. 발레를 한 뒤 몸이 좋아졌다고 말하는 회원들도 상당수다. 어깨 결림이 좋아졌다던가, 혈색이 좋아졌다, 본인도 모르게 투박하던 움직임이 여성적으로 변했다고 하는 말한다고. 나 원장은 발레를 통해 자세에 대한 칭찬을 듣고 자신감 넘치는 중년 여성들을 보면 뿌듯하다고 말했다. 발레, 몸 안팎을 다스리다 사실 이번 취재를 계기로 발레 학원 수강생이 됐다. 20대 초반 전공 공부에 도움이 될까 싶어 발레를 배운 경험이 있기에 취재 내내 몸이 간질였다. 오랜만에 온 몸을 바로 세우고 기억을 더듬고 리듬에 맞춰 발레 동작을 따라했다. 들이마시고 내 쉬는 숨소리에 집중하는 시간. 티베트 승려 밍규르 린포체(Mingyur Rinpoche)가 말하는 어디서든 할 수 있는 명상을 발레를 통해 하는 셈이다. 잔잔하고 통통 튀는 피아노 소리와 내 몸에 집중하다보면 몸 속 깊은 곳에서 짜디 짠 땀이 솟구친다. 수행하듯 모든 세포에 관심을 주면 관심 받은 만큼의 땀이 흐르고 내면에 안정이 온다. 굳었던 근육이 조금씩 부드럽게 움직이고 힘이 붙는 것이 느껴지는 중. 발레는 여성적이면서도 강인하고, 아름답게 몸 안팎을 돌보게 해주는 괜찮은 무용이자 운동이다. 혹 이글을 보고 살짝이라도 마음이 동하는 꽃중년이 있으시다면 아래 미니 인터뷰를 주목해 보시라. ◆미니 인터뷰◆ “생활에 활력이 됩니다” 전금화(56)씨 어렸을 때부터 발레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용기가 없었어요. 어느 날 성산동 쪽을 지나는데 일반인에게도 발레를 가르치는 학원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무조건 찾아갔어요. 12년이 됐어요. 발레를 통해 처음 운동이라는 것을 하게 된 거예요. 철도공사에서 일하다 보니 야간 근무가 많았죠. 몸은 피곤하고 졸렸지만 발레를 하면 활력이 생기더라고요. 담 결림도 좋아졌어요. 아픈 데 없이 건강하고요. 주위 사람들한테 발레를 많이 권하지만 용기가 없는지 못 오시더라고요. 일단 저질러야죠. 발레는 몸을 예쁘게 만들어주면서 건강도 되찾아준답니다. “춤을 통해 몸매관리 해요” 이의경(42)씨 발레는 1년 했어요. 발레를 하게 된 이유는 평소 춤에 관심이 있었고 춤을 통해 몸매관리를 하고 싶었어요. 발레가 이렇게 땀도 많이 나고 어려운지 몰랐어요. 기본기가 없으면 안 되는 춤이니까요. 그런데 이곳은 발레를 대중화의 개념으로 가르치시기 때문에 쉬운 거 같고, 건강도 챙기게 됐어요. 보통 직장생활 오래 하면 자세가 많이 나빠지잖아요. 출산으로 골반도 틀어지고, 꾸부정하게 앉아 일하는 사람은 거북목이 되기도 하고요. 그런데 발레는 먼저 척추를 꼿꼿이 세우고 해야 하잖아요. 필요에 의한 동작이 몸을 만들어주는 것이죠. 발레는 여자한테 정말 좋은 것 같아요. “꾸준한 발레로 디스크 이겨내요” 김인영(가명·63)씨 허리 디스크가 있었는데 목까지 많이 흔들리더라고요. 어느 날 TV를 보는데 90세 남자 분이 발레를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나도 할 수 있겠구나. 그때가 쉰아홉 살이었어요. 고민을 많이 하다 일단 한번 해보자 해서 시작했어요. 음악이 있는 운동을 하고 싶었거든요. 그게 발레였어요. 인터넷에서 발레를 하면 초기 디스크가 치유된다는 내용을 봤어요. 정말 많이 아팠어요. 불안할 정도였는데 이제 많이 좋아졌어요. 발레한 지는 만 4년 됐어요. 발레를 시작하고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스트레칭을 할 때 속 땀이 무지 많이 나오더라고요. 노폐물이 땀으로 나오는 것이 느껴져요. 내 몸에 맞게 적응이 되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서 하는 운동이라 여유도 생기고 마음도 편해집니다. 그런 면에서 발레가 오랜 세월 살아오신 분들에게 공감이 되고 여러 가지로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11월호에 실린 꽃중년@ 원장 인터뷰 가운데, 관절치료 관련 내용은 의학적 소견이 아닌 발레 수강생의 반응을 인용한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오해가 없길 바랍니다.」
- 2016-11-03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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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뉴욕은]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 김영순 화이트웨이브 무용단 단장 겸 예술감독
- 뉴욕 브루클린에서는 지난 9월 29일부터 4일간 큰 춤판이 벌어졌다. 8개국 70개 댄스팀이 참가한 덤보댄스축제다. 이 춤판은 맨해튼 다리 밑, 버려진 공장지대였던 덤보(DUMBO, Down Under the Manhattan Bridge Overpass) 지역을 문화의 중심지로 변신시킨 일등공신이다. 뉴욕타임스는 이 축제를 뉴욕 5대 무용축제로 선정했고, PBS 방송은 올해 뉴욕의 5대 행사로 꼽았다. 이 춤판을 벌여온 주인공은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로 불리는 김영순 화이트웨이브 무용단 단장(예술감독 겸임). 뉴요커의 자랑인 덤보댄스축제는 김 단장의 집념과 열정 그리고 고난과 눈물의 결정체다. 김영순 단장이 미국으로 건너온 것은 1977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한 후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 댄스스쿨로 유학을 온 것이 미국생활의 출발점이었다. 세계 현대무용계의 신데렐라를 꿈꾸며 시작한 유학생활은 고난 그 자체였다. 굳게 마음먹고 준비한 유학이었지만 턱없이 부족한 돈이 문제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선일여자중고등학교에서 무용교사로 재직하면서 월급의 70%를 저축해 모은 유학 자금을 장춘동 국립극장 소극장(현 달오름극장)에서 공연을 하면서 다 써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국내 사상 최연소 단독 현대무용 공연이었고 ‘잔잔한 호수 위로 퍼덕이며 뛰어오르는 은빛 찬란한 물고기’라는 평가도 받았지만 당초 계획에 없었던 공연이었다. 김 단장은 40년 전 그 공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기다리던 입학허가를 받고 미국 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했는데 거부를 당했어요. 대학 시절 민주화운동을 했기 때문인지, 젊은 여성이 미국에 눌러 살까 우려한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앞이 캄캄했어요. 그때 멋진 공연을 해서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지면 비자를 받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조언을 듣고 공연을 하게 됐어요.” 아니나 다를까 공연을 마치자마자 바로 비자가 나왔다. 그런데 체재비는 고사하고 항공료조차 부족했다. 철도공무원인 아버지 김철주씨의 5남 4녀 중 셋째인 김 단장은 형편이 어려운 부모님께 차마 손을 벌릴 수 없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입양아 두 명을 미국까지 데려다주면 항공료를 지원해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8개월과 11개월 된 두 아이를 양팔에 안고 22시간 넘게 비행을 했다. 침례교회가 운영하는 양로원의 자그마한 방 한 칸을 댄스스쿨에서 알선해줬지만 아침식사를 포함해 주당 25달러인 숙식비와 학비를 감당하기가 벅찼다. 하루 12시간 이상 무용 연습을 하면서도 베이글 하나로 견딜 때가 많았다. 때로는 밤늦게 돌아오다 너무 힘들어 남의 집 계단에 앉아 달을 보고 엉엉 울기도 했다. 김 단장은 그때의 심경을 토로했다. “아버지는 그 당시 대부분의 부모님들처럼 딸이 시집가서 아들·딸 낳고 현모양처로 살기를 원하셨지 유학 가는 것을 바라시지 않았어요. 딱 1년만 공부하고 오겠다고 통사정을 해서 허락을 받았어요. 그리고 춤꾼이 되고 싶었으나 집안 어른의 반대로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한 어머니의 기대까지 짊어지고 있었어요. 김포공항을 떠날 때 외할머니께서는 부적을 한 장 주시면서 엄마의 꿈을 대신해서 이루어달라고 당부하셨어요. 그래서 아무리 어려워도 포기를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를 극심한 생활고에서 구해준 것은 루돌프 누레예보 장학금이었다. 뼈를 깎는 노력 끝에 30 대 1의 경쟁을 뚫고 장학생 오디션을 통과한 그는 뉴욕서 열리는 공연이라면 단역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출연했다. 얼굴을 알릴 수 있었고 얼마 안 되는 출연료였지만 생활에 큰 보탬이 되었다. 1980년, 경쟁률 300 대 1의 오디션을 통과해 뉴욕 10대 명문 무용단인 제니퍼 뮬러 현대무용단 전속 단원으로 발탁되면서 그는 프로페셔널 댄서로 우뚝 서게 됐다. 미국은 물론 유럽, 중남미, 캐나다 등 세계 곳곳으로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검정머리 휘날리며 춤추는 동양의 신비한 무녀’라는 찬사를 받았다. 1년에 9개월간 해외 공연을 하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뉴욕에 머무는 3개월은 트론댄스시어터(Throne Dance Theater) 같은 소규모 무용단에서도 활약을 했다. 겹치기 출연을 해야 할 정도로 이미 명성이 높았다. 당시 한 유명 평론가는 “무대에서 춤추고 있는 많은 댄서들 가운데 눈을 뗄 수 없는 댄서”라고 극찬했다. 1988년, 드디어 그는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한다. 하얀 파도가 세계로 용솟음친다는 의미의 ‘화이트웨이브(White Wave) 김영순 무용단’이다. 하얀 파도는 백의민족을 상징한다. 경쟁이 치열한 뉴욕에서의 무용단 창단은 실력과 명성과 인간관계를 모두 갖추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 단장은 그 해 88서울올림픽 현대무용 페스티벌에 초청받아 국내 팬들에게 현대무용의 진수를 선보이기도 했다. 홍콩에서 단독공연을 할 때는 홍콩스탠더드 신문이 ‘춤추기 위해 태어났다(Born To Do It)’는 제목으로 그의 삶과 춤을 전면에 소개했다. 신문 제목처럼 그는 타고난 춤꾼이었다. 6세 때 인근 무용학교에서 들려오는 장구소리에 이끌려 춤을 배우기 시작했고, 7세 때는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사냥꾼’ 이야기를 춤으로 표현해 호남예술제에서 1등을 차지했다. 무용단 운영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 , 등 60여 가지의 레퍼토리를 선보였을 때 월스트리트저널이 ‘댄스의 영역을 뛰어넘은 새로운 예술세계 창조’라고 논평하는 등 주요 언론들의 호평이 이어졌지만 무용단 운영은 점점 어려워졌다. 소호(SOHO)에 있던 스튜디오를 임대료가 저렴한 이스트 할렘으로 옮겼으나 70평 남짓한 스튜디오 임대료를 제때 내지 못해 이불을 덮어쓰고 울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2000년에는 맨해튼 스튜디오가 상가로 바뀌면서 새 터전을 찾아나서야 했다. 소호에서 밀려난 가난한 예술인들이 몰려든 덤보 지역은 앞이 캄캄했던 그에게 축복의 땅이었다. 기업인 존 라이언(John Ryan)씨가 든든한 후원자로 나타나면서 25만 달러를 지원받아 이스트 강변에 100석짜리 무용 전용극장을 마련할 수 있었다. 덤보댄스축제와의 인연도 이때 시작됐다. 미술·패션쇼·음악·필름스크린·댄스 등 5개 예술 분야로 나눠 열리는 덤보아트축제의 이사진과 댄스 부문 기획을 담당했던 친구의 권유로 2001년 제1회 덤보댄스축제의 총감독을 맡아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사실 덤보아트축제는 ‘예술이 있으면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면 사업이 번창한다’는 부동산개발업체의 경영전략에서 출범한 축제다. 덤보 지역이 번창하자 다른 분야의 축제는 사라지고 댄스축제만 남아 뉴요커의 발길을 끌고 있다. 김 단장은 신예 안무가들이 기량을 마음껏 펼치면서 뉴욕으로 진출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겠다는 신념으로 댄스축제를 지켰다. 그는 여세를 몰아 2004년부터 쿨뉴욕(Cool New York) 댄스축제를, 2006년부터는 웨이브라이징시리즈(Wave Rising Series) 무용축제를 잇따라 개최했다. 뉴욕타임스는 2008년 “다운타운 현대무용계는 김영순 단장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하나도 하기 힘든 페스티벌을 세 개나 하고 있다”며 대서특필했다. 이때부터 그는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축제를 통해 총 2600여 무용단과 1만3500명의 안무가들은 7만여 관객 앞에서 기량을 발휘했다. 창무회 & 김매자, 김윤정 프로젝트댄스, 장유경 무용단, 길섭무용단, 박신애, 정석순, 김정환과 박봄, 박정윤, 최성옥 메타댄스 프로젝트 등 수많은 안무가들이 그들이었다. 그는 현재 뉴욕시가 매년 수여하는 댄스·연기대상(Bessie Award)과 예술지원기금 무용 부문 심사위원을 맡고 있다. 그의 무용단은 3년 연속 뉴욕시 지원 대상 문화예술단체로 선정되는 등 공로와 능력을 널리 인정받고 있다. 마티 마코위츠(Marty Markowitz) 브루클린 구청장은 수년째 덤보댄스축제가 개막되는 날을 ‘화이트웨이브 김영순 무용단의 날’로 공표하고 있다. 그의 공로는 곤경에 처했을 때 더 빛이 났다. 2012년 허리케인 샌디로 인해 이스트 강이 범람해 극장이 침수 피해를 입자 온라인 성금이 답지했다. 루도 셰퍼(Ludo Scheffer) 드렉셀대학 교수는 상속 재산 중 상당액을 기부했다. 김 단장은 수많은 무대에 올라 많은 박수를 받았지만 2014년 한국계 안무가로는 처음으로 브루클린 음악아카데미(Brooklyn Academy of Music, BAM) 무대에서 새 작품 을 성공리에 공연한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뉴욕에는 링컨센터 등 굴지의 공연장이 즐비하지만 공연 대상 선정이 가장 까다로운 BAM이 화이트웨이브무용단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링컨센터의 뉴욕공공도서관은 그의 공연을 촬영해 DVD로 영구 보관하고 있다. 그가 오랫동안 간직해온 꿈은 세상 사람들이 전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을 선보이는 것이다. 그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는 멈출 수 없다. 자신의 무용단을 통해 끊임없이 새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국제댄스페스티벌을 잇따라 열어 다양한 작품을 소개하는 것은 걸작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화이트웨이브 김영순 무용단은 요즘 인류 화합을 주제로 한 이라는 대형 작품을 새로 무대에 올리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이 작품의 일부는 이번 덤보댄스축제에서 선보였다. 작품이 완성되면 내년쯤 한국 팬들에게도 소개할 계획이다.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당장 시급한 것은 전용 공연장이다. 덤보 지역도 이제는 예술인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임대료가 뛰어 브루클린 내 다른 지역을 열심히 물색하고 있다. 김 단장은 새 공연장을 임대할 경제적 여력은 없지만 절실하면 이루어진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다. 이제까지 그런 믿음으로 험난한 무용인의 길을 성공적으로 걸어왔고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라는 독보적 위치에 걸맞은 활약을 오늘도 펼쳐나가고 있다.
- 2016-10-31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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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가온길’에 가면
- '가온'은 '가운데'를 뜻하는 우리말인데, 새문안로 3길이 한글 이야기의 중심거리이기 때문에, 이 길을 ‘한글 가온길’이라고 이름 붙였다. 한글 가온 길에 가면, 한글학회와 주시경선생의 집터, 그리고 주시경선생과 헐버트선생의 부조가 새겨진 조형물이 설치되어있다. 또, 이야기꾼 전기수 할아버지와 각종 한글 조형물,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있다. 그리고, 이런 한글 가온길을 해설하는 한글학자 김슬옹 박사가 있다. ◇ 한글학회 한글학회는 주시경선생이 운영하던 국어강습소의 졸업생과 동지들하고 뜻을 같이하여,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고, 대중에게 한글이 바르게 보급되는 것을 목적으로, 1908년에 ‘국문연구회’를 설립한 것인데 그 후, 1911년에는 ‘조선 언문회’로, 1921년에는 ‘조선어 연구회’로, 1931년에는 ‘조선어학회’로 그 이름이 바뀌어 오다가 1949년에 오늘날의 ‘한글학회’가 된 것이다. 그런데, 한글학회가 지금의 새문안로 3길에 자리 잡기까지에는 사연이 있다. 1908년, 창립한 한글학회는 여기저기로 10여 차례 전전하며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많은 자료와 서적 등을 가지고 이사를 다니느라 고생 하는 것을 보다 못한, 초대 법무장관이었던 이인선생이 평생에 걸쳐 마련한 돈과 집을 기증하였고, 이를 계기로 모금운동을 벌여 1977년에야 비로소 지금의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3길에 한글회관을 마련하여, 한글학회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 주시경선생과 그의 집터 한글 가온길에는 주시경선생의 집터가 있는데, 선생의 살림살이가 항상 궁핍해서, 조그만 집은 5남매와 책들로 비좁아, 발 들여 놓을 공간도 없을 정도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한 독지가가 집을 마련해 주었고, 이후 주시경선생의 집은 ‘한글발전연구소’ 역할을 하게 되었다. 평생, 한글 연구에 몸 바쳐 오던 선생은 1914년, 39세의 젊은 나이에 이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곳은 지금은 '용비어천가'란 이름의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도렴2동 녹지공원 ‘주시경 마당’에는 한글 발전에 초석이 된 주시경선생과 헐버트선생의 동상, 그리고 부조가 조형물로 설치되어있다. ◇ 헐버트선생 헐버트선생은 2013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도 선정된 미국인으로, 한글이 가장 과학적이고 훌륭한 글자라고 주장하며 세계에 한글을 알리는 데 공헌한 인물이다. 선생은 우리나라 한글로 된 라는 책을 만들었다. '조선 글자가 중국 글자에 비해 크게 요긴하건만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업신여기니 어찌 안타깝지 아니하리오.' 하면서 한국인보다 더 한글을 사랑했던 사람이다. 양화진 절두산에 있는 그의 묘지 비석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나는 웨스트민스턴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길 원하노라.’ ◇ 김슬옹 박사 한글 가온길과 떼어서 생각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한글학자 김슬옹 박사다. 그는 젊은 시절에 철도공무원의 꿈을 안고 철도 대학교에 다니던 사람이다. 어느 날, 외솔 최현배선생의 영향을 받아 그분의 뜻을 이어 받고자 철도공무원의 꿈을 접고. 최현배선생이 강의를 맡고 있던 연세대 국문과에 입학 하였다. 그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한글 사랑과 바른 한글사용의 보급에 힘쓰고 있으며, 현재 ‘한글학회 연구위원’으로도 일하고 있다. 그가 대학시절, 당시에 널리 사용하던 ‘서클’이란 모임이름을 ‘동아리’라는 이름으로 바꾸는 일과, 음식점에서 사용하는 ‘메뉴판’이라는 이름도 ‘차림표’라는 이름으로 바꾸는데 앞장서서, 지금은 그런 한글이 널리 사용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김슬옹’이란 그의 이름은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 아니다. 그는 ‘슬’기롭고 ‘옹’골찬 마음으로 한글을 사랑하는 옹달샘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김슬옹’으로 개명하였다. 김슬옹박사의 한글사랑이 온 국민에게 널리 퍼져서, 국민 모두가 한글을 사랑하는 ‘김슬옹박사’와 같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 2016-08-25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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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의 피서
- 올 여름은 유난히 더운 것 같다. 장마는 사라지고 연일 태양이 작열한다. 열대야로 잠을 재대로 잘 수 없는 밤이 이어지고 있다. 지구 온난화가 이런 변화를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올림픽 중계를 보면서 뒤척일 수 있어 그런대로 길고 더운 여름밤을 버텨낼 수 있다. 낮에는 숨이 턱턱 막히지만 집에서는 에어컨을 틀지 않는다. 거실 구석에 하나 서 있고 안방 벽에 하나 걸려있지만 몇 년 째 가동한 적이 없다. 전기세가 문제가 아니라 여름엔 땀을 흘려야 된다는 논리로 가동을 못하게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의 원성이 자자하지만 워낙 필자의 고집이 강경하므로 다들 선풍기로 버티고 있다. 이제 입추도 지났으니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고 하니 모두 어이없어 한다. 어제 부모님 댁에 들어서는데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저층 연립주택에 사시는데 앞뒤 동 간격이 좁고 저층이라 집안에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다. 선풍기가 몇 대 돌아가긴 했지만 엄청 더웠다. 팔순을 훌쩍 넘기신 두 분이 더위로 고생하시는 것이 걱정스럽다고 했더니 전혀 문제없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아침 드시고 나서 근처 중랑천 변 그늘로 가신다고 했다. 그곳에서 동네 할머니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로 오전시간을 보내신 후 오후에는 복지관에 가서 시원한 에어컨 밑에서 저녁까지 지내시다가 들어오신다고 했다.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특별한 피서를 하고 계셨다. 그것은 ‘무료 전철피서’ 아주 긴 노선을 택해서 하루 종일 시원한 전철 여행을 하고 계셨다. 우선 아버지 혼자 하는 여행은 다음과 같다. 간단한 도시락을 준비한다. 중랑역에서 전철을 타고 왕십리 역에서 신분당선으로 갈아탄다. 한 시간 이상 걸려서 수원에 도착하면 인천 행으로 갈아타고 소래포구에서 내린다. 소래포구 시장 구경을 하고 인근 다리 밑 그늘에서 쉬고 도시락을 드신다. 다리 밑에는 의자를 많이 설치 해 두어서 편하고 노인들이 많이 모인다고 하셨다. 어머니와 같이 가실 때는 전철 1호선을 타고 온양까지 가신다고 했다. 온양 온천에는 전국에서 모여 든 노인들이 점령했다고 한다. 온천 후 점심 드시고 시장 구경도 하시고 느긋하게 전철타고 서울에 도착하면 저녁. 하루 여행으로는 제격이고 가고 오는 동안 시원한 전철에서 피서할 수 있다고 하신다. 아버지는 가끔 복지관 친구 두 분과 전철여행을 하신다고 했다. 일산에 사시는 분이 계셔서 일단 종로3가에서 모인다. 오전 열시쯤 만나서 서울 역으로 이동한다. 서울 역에서 공항철도로 갈아타고 인천 계양까지 가서 인천 지하철 1호선으로 갈아탄다. 원인재 역에서 오이도행 열차를 갈아타고 가다가 소래포구에서 내린다. 시장에서 우럭 두 마리를 구입해서 식당에 가져가면 매운탕을 끓여준다. 막걸리 한 병 놓고 식사하신 후 시장 구경하고 노선을 거꾸로 타고 집으로 돌아오신다. 1인당 회비는 이만 원인데 몇 천원이 남는다고 한다. 전철피서의 하이라이트는 춘천 행 열차를 타는 것. 춘천 역에 내리면 인근에 닭갈비집에 가서 점심식사를 하신다. 식사 후에는 닭갈비집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승합차를 타고 박사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유명한 박사동네, 소양강 처녀동상, 소양호를 두루 구경한다. 구경 후에는 춘천 역까지 친절하게 데려다 준다는데 이 모든 서비스가 공짜란다. 단, 일행이 여섯 명 이상이라야 받을 수 있는 서비스라고 한다. 그래서 춘천에 가실 때는 여러 명이 모여서 간다고 하셨다. 65세 이상에게 제공되는 전철 무료서비스는 여러 가지 면에서 노인들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교통비 부담 없이 시원한 피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노인들의 정신과 육체건강에 상당히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 2016-08-08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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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콕여행4] 끝끝내 찾아간 BACC
- 한 번 시도했다가 못 한 일은 별것 아니더라도 꼭 다시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런 하찮은 욕구가 문명 발전에 기여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또다시 ‘방콕예술문화센터(BACC : Bangkok Art & Culture Center)’를 찾았다. 어제의 답사 덕분에 고가철도 BTS를 타고 내셔널 스타디움 역으로 태국인처럼 거침없이 갔다. BTS를 타면 마치 놀이동산에 모노레일을 타는 기분이 들어 공연히 신났다. 다시 찾은 BACC는 못 들어갔다가 들어가니 감지덕지하는 마음에 더 꼼꼼하게 보았다. 커다란 둥근 건물은 내부가 나선형으로 9층까지 돌고 돌아 거대한 톱니바퀴를 연상시켰다. 9층에서 내려다보면 층층이 다니는 사람들이 다 보이고 1층에선 천정이 9층까지 뚫려 가슴까지 시원했다. 방문객들은 마치 한 공간에 있는 듯했다. 태국식 탱화, 비디오 아트, 초상화 그리는 곳 등과 작가들의 작업실 겸 가게 등 여러 곳을 둘러본 후 7층에 다다랐다. 입장료가 무료인 그곳에 난데없이 책상과 지키는 여자가 보였다. 눈치껏 살펴보니 ‘여권이 있으면 무료’라고 쓰여 있었다. 아뿔싸! 여권은 잃어버리면 한국에 못 돌아갈까 봐 숙소에 고이 모셔놓고 왔는데. 연일 ‘또 낭패네!’ 하고 돌아서는데 자세히 보니 소지품 맡기는 것이 무료라는 뜻이다. 거기부터는 가방을 못 들고 들어간다는 얘기다. 그럼 태국인들은 대체 가방을 어디 두고 들어가나 봤더니 그 옆에 로커가 있었다. 로커 대여료는 고작 330원이었다. 별거 아닌 것에 손해 보지 않으려다 더 큰 것을 놓칠 뻔했네. 그야말로 소탐대실이다. 그곳에는 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이것은 ‘White Elephant Art Award’라는 태국에서 꽤 권위 있는 상을 받은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 지금도 마음에 남는 작품 중 하나는 이다. 원숭이의 모성애를 하도 따뜻하게 그려 관람자들은 태국 말과 글씨를 모르는 사람도 모두 공감할 정도다. 열대지방이라 그런지 원숭이나 악어, 코끼리 등 동물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았다. 또 특이한 것은 왕을 모델로 그린 작품도 여러 점 있었다. 그 중 은 동그란 방글이 얼굴 모양 스탬프를 수없이 찍어 명암을 주며 그린 왕의 옆모습이다. 태국 국민 중 많은 사람이 왕을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올해로 만 70년째 재임해 세계 최장기 집권 국가 원수인 푸마폰 아둔야뎃(라마 9세) 국왕이 이렇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이유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국민의 편에서 서서 민주주의를 확립했기 때문이다. 그는 태국 곳곳을 다니며 국민의 소리를 들었고 그들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왕실 재산도 아낌없이 썼다. 태국 지폐에 모셔진 라마 9세는 그야말로 태국 국민의 정신적 지주다. 크리스마스도 휴일이 아닌 태국에서 국왕의 생일인 12월 5일이 아버지날이고 휴일이라니 이것만으로도 라마 9세는 살아있는 신의 경지로 추앙받는 셈이다. 참고로 영화 ‘왕과 나’는 그의 증조할아버지인 라마 4세의 일대기다. 마지막으로 이 전시회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은 다. 러브레터를 받았을 때의 홍조 띤 기쁜 얼굴을 수많은 정사각형 러브레터를 펴고 접고 유사한 색상의 편지로 섞어가며 만든 것이다. 태국어를 안다면 그 내용도 읽을 수 있어 더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글자를 모르는 답답함에 빠졌다. 저 작가는 이토록 많은 러브레터를 붙이며 어떤 마음이었을까? 설렜을까? 어쩌면 대상을 기대하며 러브레터를 기다리듯 조마조마했겠다. 다른 전시관에는 전위예술인지 엽기적인 작품과 색다른 시도를 한 작품도 많았다. 미술 문외한이 신세대의 감성과 현대 미술을 어찌 다 이해하겠는가. 그래도 작품 하나하나를 대하며 작가와 교감하는 것은 감상의 짜릿한 기쁨이다. 그 나라의 문화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면 예술작품을 접하는 것이 지름길이라는 생각을 하며 BACC를 나섰다. 과연 외국인들은 우리나라 문화 예술을 접하며 어떤 느낌일까? 이제야 비로소 우리 관광산업의 문제가 객관적으로 이해되었다.
- 2016-08-08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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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하루하루 배움에 빠졌던 인생
- 노력하는 블로거까페 매니저 http://cafe.naver.com/ilsama 성경애(평화사랑) 온오프라인 연계마케팅전문가 네이버 블로그 http://blog.naver.com/mefun 네이버 파워 있는 블로거 까페운영자 http://cafe.naver.com/ilsama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kyungae.sung 카카오스토리 https://story.kakao.com/#mefun 인스타그램 http://instagram.com/kyungaesung/# 트위터 http://twtkr.com/forgotid 폴라 http://www.pholar.co/my/22148/profile 블로그와 카페 운영과 각종 SNS 활동에 집중하는 평화사랑 성경애의 ‘‘미니 자서전’’을 적어본다. 교사였던 아버지가 건강 때문에 일찍 퇴직하면서 시작한 사업에 실패한 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자 일찍 철이 들어 동네 아이들 과외선생을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하게 됐고 대학 시절까지 모두 자신의 힘으로 학비를다 해결한 의지의 한국인이 필자다. 처음에 블로그 만들 때 블로그 이름이 ‘평화사랑 전 과목 블로그’’였다. 초중등학생 전 과목 과외 선생 노릇을 했던 것을 기억해 그렇게 지었다. 그 와중에도 노래는 좋아하여 숭의여고 시절 합창단 활동을 하였다. 아침에 다른 사람보다 한 시간 일찍 가고 점심은 미리 알아서 먹고 점심시간 시작 5분안에 음악실로 모여서 연습했던 갓이 여고 시절 기억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서울 세종문화회관을 다시 짓기 전 시민회관에서 공연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합창이란 이런 것이라고 보여준 공연이다.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이 그때는 얼마나 귀한 시간, 아름다운 시절인 것을 몰랐다는 것이 안타깝다. 졸업 후 학자금 모아서 숭의여전 보육과와 경기대행정학과를 나오고 나니 이미 나이가 들어서 결혼하게 되었다. 필자는 사실 서울예대를 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성삼문 집안에 딴따라가 웬 말이냐고 반대하여 포기했다. 난 연예인 끼가 있다. 그때 우기고 갈 것을 하는 맘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도 아마추어 영화 전문가분들과 모이고 있고, 워낙 활동적인 성격이라 동네 통장 10년을 하고 아파트부녀회장도 지내는 등 주변을 돌아보는 봉사활동 열심히 하고 있다. 결혼 후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자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기업체 주부모니터를 하게 되었다. 기업체는 기혼 여성직원이 있지만 그들에게서 쉽게 알아낼 수 없는 의견도 있어 일반 전업주부를 대상으로 물건에 대한 의견을 모니터링 하는 데 여기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미니 자서전을 쓰면서 확인해 보니 기업체에서 발대식하고 위촉장을 받은 것만 33개 정도 되었다. 임기가 1년에서 짧아도 참여한 세월이 있어 위촉장이 꽤 쌓인 것이다. 거기에다 활동우수상, 수상표창장까지 상당히 많아서 거실 가득히 깔아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하는 맘이 든다. 필자는 열성적으로 살아왔다.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조금이라도 생기는 달에는 뭔가 무료교육을 받는 것 좋아하고 비용이 들어가도 발전적인 항목이 있으면 배우기를 즐긴다. 네이버 밴드와 네이버 카페, 각종 카톡방 활동과 오프라인 모임까지 이웃이나 다양한 직업군을 가진 분들과 소통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1 년 이상 네이버 자회사 시니어 기업인 에버영코리아라는 곳에서 밤 근무한 경험도 있다. 밤에 근무하던 어느 날 칸칸이 처진 내 모니터와 키보드와 마우스밖에 없는 그곳에서 필자는 빅뱅의 ‘루저’를 들으면서 눈물이 쭈르륵 흘렀다. 루저의 뜻은 loser와 user의 합성어. 무엇을 할지 모르고 갈팡질팡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 즉, 어찌할 바를 모르는 초보자 내지는 부족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다. ‘루저’의 가사는 이렇다. ‘LOSER 외톨이/센 척하는 겁쟁이/못된 양아치/거울 속에 넌/JUST A LOSER/외톨이 상처뿐인 머저리/더러운 쓰레기/거울 속에 난 I’M A/솔직히 세상과 난/어울린 적 없어/홀로였던 내겐/사랑 따윈 벌써/잊혀진 지 오래/저 시간 속에/더 이상은 못 듣겠어/희망찬 사랑 노래/너나 나나/그저 길들여진 대로/각본 속에 놀아나는/슬픈 삐에로/난 멀리 와버렸어/I’M COMING HOME/이제 다시 돌아갈래/어릴 적 제자리로/언제부턴가 난/하늘보다 땅을/더 바라보게 돼/숨쉬기조차 힘겨워/손을 뻗지만/그 누구도/날 잡아 주질 않네 I’M A//LOSER 외톨이/센 척하는 겁쟁이/못된 양아치/거울 속에 넌/JUST A LOSER/외톨이 상처뿐인 머저리/더러운 쓰레기/거울 속에 난 I’M A/반복되는/여자들과의 내 실수/하룻밤을 사랑하고/해 뜨면 싫증/책임지지 못할/나의 이기적인 기쁨/하나 땜에 모든 것이/망가져 버린 지금/멈출 줄 모르던/나의 위험한 질주//이젠 아무런 감흥도/재미도 없는 기분/나 벼랑 끝에/혼자 있네/I’M GOING HOME/나 다시 돌아갈래/예전의 제자리로/언제부턴가 난/사람들의 시선을/두려워만 해/우는 것조차 지겨워/웃어보지만/그 아무도 날/알아주질 않네 /I’M A/LOSER 외톨이/센 척하는 겁쟁이/못된 양아치/거울 속에 넌/JUST A LOSER/외톨이 상처뿐인 머저리/더러운 쓰레기/거울 속에 난/저 하늘을/원망하지 난/가끔 내려놓고 싶어져/WANT TO SAY GOOD BYE/이 길의 끝에/방황이 끝나면/부디 후회 없는 채로/두 눈 감을 수 있길/LOSER 외톨이/센 척하는 겁쟁이/못된 양아치/거울 속에 넌/JUST A LOSER/외톨이 상처뿐인 머저리/더러운 쓰레기/거울 속에 난 I’M A/LOSER/I’M A LOSER/I’M A LOSER/I’M A LOSER 다시 젊은 시절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사실 없다. 그러나 다시 돌아간다면 공부할 집안 형편이 아니어서 대충 포기한 공부를 열심히 해보고 싶다. 그래서 지금도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지 모른다. 요즘은 동영상 프로그램을 인터넷에 접목하기 위해 배우러 다니고 있다. 노력하는 자세로 인생을 살는 필자는 자신도 궁금하고 기대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지칠 때도 있다. 그러나 우울하게 다운되면 한도 없는 게 인생이다. 키도 작고 몸무게는 표준보다 많이 나가 여러 면에서 부족한 사람인데 루저가 안되려고 노력하다 여기까지 왔다. 자식이 낳아달라고 말한 적이 없다. 어떤 제츠추어로도 표한 적이 없는데 필자 부부 맘대로 낳았기에 그 아이들에게 힘이 못될망정 짐은 되기 싫다. 그래서 열심히 산다. 이유는 그거 하나로 충분하다. 남은 인생의 가장 젊은 오늘을 더 열성적으로 살아가려고 다시 마음을 다져 잡는다. 그러니 다가올 인생이 궁금하고 기대된다. 플랜트커피에서 커핑수업 M.I커피: 라떼아트 2급바리스타: J클래스학원 1급바리스타: 훈스랩아카데미 커피지도사2급+홈카페마스타 (브루잉마스타2급) : CBS문화센터 커피지도사1급 : 서울바리스타학원 강사/커피지도사 워크숍 수료 그외 루소랩이나 어라운지, 커피미업 김동완씨에 수업받은 경력이 있고 계속 커피를 배우는 중이다. 언제가 장점을 따서 커피아카데미카페를 만들고 싶다. 한국커피협회 1,2급 커피지도사/바리스타1,2급 취득 유럽 바리스타 SCAE(Speciality Coffee Association of Europe)자격증 SCAE Foundation /SCAEIntermediate/SCAE Professional 아이로봇 룸바 서포터즈(로봇청소기), CJ홈쇼핑심미안(생활팀 2회, 디지털팀1회, 뷰티팀 1회) : 참고로 한 번 활동하기도 매우 어려운 전설의 모니터 활동 중앙일보 리포터 3번 연임 후 명예리포터 활동, 중앙일보 명예통신원 회장 AVING코리아 객원기자, 구로소식지 기자 , 구로구인터넷방송 명예기자 uasis웹진기고, 아줌마닷컴 1기 기자단장 및 기사제공이나 아이디어 제공 다양한 기업 및 관공서의 패널, 서포터즈, 모니터, 주부모니터와 리포터:한국전력 패널, 국민보건보험공단, 서울시 모니터, 서울시 블로거, 도시철도공사 등 대한민국영화대상 일반심사위원, 유어스테이지 시니어 파트너즈 시니어 리더 4기 은퇴 후 생산적인 인터넷활용 강사: 블로그와 SNS 네이버 자회사 에버영코리아 업무 경험, 2014 2015년 서울 카페쇼 홍보대사 LG 서포터즈, 삼성 카메라 WB5000 체험단, 삼성하우젠 제로에어컨 체험단 프레소 스마트로스터기 체험단, 가찌야클래식 커피머신 체험단,어라운지서포터즈 세일즈커피 서포터즈, 마일커피로스터스 온라인 서포터즈, 웰크론 온리빙 마케팅팀서 활동 이투데이 브라보마이라이프 동년기자단 홈앤톤즈(삼화페인트 프리미엄급 페인트) 마케팅팀 프레소 서포터즈1기와 국민건강보험공단 모니터
- 2016-07-15 16: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