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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무법인 원, 美 회계법인 LEK 파트너스와 업무협약 체결
- 한국의 법무법인 원과 미국의 회계법인 LEK 파트너스는 국제 상속 및 자산 관리 서비스를 강화하기 위해 7월 23일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법무법인 원은 지난 4월 원스톱 자산관리 프로그램 헤리티지 원(Heritage One)을 런칭했다. 헤리티지 원은 상속 설계, 세무 진단, 후견, 유언집행 등을 포함한 종합적인 법률 및 세무 컨설팅 프로그램이다. 최근에는 해외에 거주하는 가족이 있거나, 해외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고객, 해외에 거주하면서 국내 재산을 관리해야 하는 고객 등으로부터 복잡한 국제 상속 문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법무법인 원은 종합적인 국제 상속 및 자산 관리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미국의 전문 회계법인 LEK 파트너스와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역량 강화에 나섰다. LEK 파트너스는 애틀란타, LA와 샌디에이고, 뉴욕, 텍사스 오스틴, 테네시주 내쉬빌 등 한국기업들이 다수 진출한 미국 주요 거점에 오피스를 두고, 감사, 경영 및 세무 컨설팅 등을 포함한 종합 회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번 업무협약을 통해 양사는 ▲통합적 자산 관리 서비스, ▲국제 상속 및 증여 플래닝, ▲국제 유언 설계, ▲국제 신탁 설계, ▲부동산 투자 및 자산 관리, ▲국제 가업승계 컨설팅 등을 포함한 국제적인 자산 관리 솔루션을 제공할 예정이다. 법무법인 원은 지난 4월 LEK 파트너스와 함께 미국 LA와 샌디에고에서 한인 교민 대상 세미나를 개최한바 있다. 이 행사 이후 한인 교민들로부터 상담 요청이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등 고객들로부터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에 힘입어 법무법인 원과 LEK 파트너스는 올 10월에도 미국 애틀란타에서 공동 세미나를 개최할 예정이다. 법무법인 원 이유정 대표변호사는 “이번 업무협약은 한∙미 간의 크로스보더 자산관리 업무를 위한 협업 시스템 구축뿐만 아니라,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미국 시장에서 역량 있고 혁신적인 LEK 파트너스와 글로벌 네트워크를 확장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라며 “법무법인 원은 고객에게 합리적인 비용으로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다양한 전문가 집단과 협업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법무법인 원은 2012년 삼성가 상속 사건, 2016년 롯데 그룹 총괄회장 후견 사건 등을 비롯하여 세간의 관심이 쏠렸던 굵직한 상속, 후견 사건들을 담당하면서 업무 경험을 쌓아왔다. 헤리티지 원’ 프로그램은 상속 증여를 위한 법률, 세무 컨설팅은 물론 유언, 후견, 공익법인 설립까지 원스톱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만든 프로그램이다.
- 2024-07-23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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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쓸모’에서 밀려난 50대 여성의 이야기…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 북인북은 브라보 독자들께 영감이 될 만한 도서를 매달 한 권씩 선별해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해당 작가가 추천하는 책들도 함께 즐겨보세요. 하여간 그렇대. 우리 나이가 한참 늙느라 바쁜 나이래. 여기저기 삐거덕거리면서 고장 나는 데 생기고, 마음은 공허하고. 살아 뭣하나, 싶은 나이라는 건데. 그게 당연한 마음이라니까 너무 난감해하지 마. -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149p ‘피하고 싶은, 그러나 엄존하는 세계 속으로 우리를 이끄는 소설가’(제9회 김현문학패 심사평) 김이설의 신작 소설이 출간됐다. 2006년 등단 이후 18년간 꾸준히 ‘나쁜 피’, ‘환영’, ‘선화’,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등의 작품을 통해 여성과 가족에 대해 질문해온 그가 이번에는 50대를 앞둔 난주, 미경, 정은, 세 친구의 강릉 여행을 통해 ‘그럼에도 살아가는 것’을 이야기한다. 난주, 미경, 정은은 1975년생 동갑내기 친구다. 오랜 친구지만 각자 사느라,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최선을 다하다 보니 자주 만나지 못했다. 사는 거리가 먼 만큼 마음도 멀어진 무렵이었다. 매번 여행 한번 가자는 말만 할 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올해 강릉에 가자고 한 건 난주였다. 늘 그렇듯 말뿐일 게 뻔했다. 혼자 노모를 모시는 미경은 하루 시간 빼는 것도 쉽지 않다. 모두 속으로는 올해도 여행은 어려울 거라 생각하는데, 불쑥 미경이 “가자!”고 호응한다. 강릉 여행을 떠나기로 한 당일, 세 친구는 서울역에서 만난다. 강릉 여행은 스물넷 이후 25년 만이고, 셋이 다 함께 모인 건 난주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7년 만이었다. 낯선 것도 잠시, “왜 이렇게 부었어? 살찐 거야, 아픈 거야?”, “넌 왜 이렇게 늙었니?”라며 서로 장난스럽게 안부를 주고받는다. X세대, 신세대, 수능 0세대. 한때 이들을 가리키던 말이다. 싱그럽고 통통 튀고 정의할 수 없는 젊음 그 자체로 예쁜 시절이 있었다. 이들은 이제 요실금과 고혈압, 탈모 등 다양한 신체 변화를 겪고 있다. 세 명은 소위 말하는 ‘인스타 감성’의 펜션을 잡고, 여행 내내 잔뜩 먹고 마신다. 강릉에서 유명하다는 순두부, 장칼국수를 먹거나 허난설헌의 생가도 가고, 커피도 여섯 잔씩 시켜 나눠 마시고, 질리도록 술을 마신다. 이렇게 셋이 모이는 날이 또 없을 거라는 듯 최선을 다해 즐긴다. 그간 다른 삶을 살아왔기에 부딪치는 구석도 많다. 기혼인 난주, 정은과 미혼인 미경은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에 한계가 있고, 투잡을 뛰며 생활고에 시달리는 정은과 상대적으로 부유한 삶을 사는 전업주부인 난주는 자주 투덕거린다. 싸움을 푸는 방식은 간단하다. 마시고, 웃고, 푼다. 술 한잔에 이야기를 털어놓고 나누다 보면 당장 해결되는 것이 없더라도 괜찮다. 이들의 여행 또한 술 한잔과 같다. 앞으로 똑같은 삶이 반복돼도 버틸 수 있는 잠시의 안도, 찰나의 틈이 바로 여행인 것이다. 그렇게 각자의 사정을 견디며 나이 듦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김이설 작가의 사이 “50대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 생각보다 없어요. 각자의 세계와 인생이 있을 텐데 그저 엄마, 아줌마, 며느리, 딸이라는 단어 속에 숨어버린 이들의 목소리를 담고 싶다고 느꼈습니다. 표지 속 거위처럼 시끄럽고 우악스러운 이미지가 있지만, 들여다보면 그렇지만은 않거든요.”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는 2023년 6월 초, 김이설 작가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 하나에서부터 시작됐다. 무료 소설 연재를 구독할 독자를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가을까지 경장편소설을 마감하려면 스스로를 강제해 진도를 내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다는 이유였다. 신청자들의 메일 주소로 매주 1회씩, 원고지 30매 분량을 전송하는 ‘소설가의 생초고 메일링’, ‘스불재’(스스로 불러온 재앙)였다. 쉽지는 않았지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원동력이었단다. “재앙이 매주 제법 많은 양의 원고를 써야 하는 저에게 해당하는 말인지, 정리 안 된 소설을 읽게 될 메일링을 신청한 분들인지 모호했지만 일단 썼어요. 어떤 노래를 들으며 무슨 마음으로 작업했는지도 함께요. 응원과 애정이 담긴 답장은 물론, 바다 사진을 꾸준히 보내기도 하셨어요. 두 번의 펑크를 내면서도 ‘무리하지 마라, 그저 기다리겠다’는 말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덕분에 3개월 동안 한 편을 완성할 수 있었어요.” 강릉으로 떠난 중년 여성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의 주인공 난주와 정은, 미경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공감 가는 구석을 가진 인물들로 구성했다. 노안이 찾아왔지만 ‘안 보면 안 봤지, 돋보기라니’라며 마지막 자존심을 부리거나, 자녀들이 독립할 시기에 빈둥지증후군을 겪고, 요실금이 의심되는 상황에도 병원 가는 것을 미루는 등 낯선 몸, 낯선 자신을 만나며 혼란을 겪는다. “50대가 되면 몸 여기저기가 하나씩 고장 나지만 마음은 여전히 설익은 상태인 것 같아요. 젊지도, 늙지도 않은 애매한 때랄까. 아직 힘은 있는데, 40대보다는 ‘쓸모’라는 영역에서 다소 밀려났다고도 느껴요. 우울하고 주눅이 들죠. 하지만 다들 각자만의 큰 세계가 있었을 거예요. 그걸 풀어내고 싶어도 세상이 귀 기울여주지 않는 겁니다. 학창 시절 친구들을 만나 반가운 마음에 그걸 한꺼번에 터뜨리려니 목소리가 커지는 게 아닐까요. 난주와 정은이, 미경이 같은 ‘아줌마’들은 쓸쓸함을 견뎌내고 나이 듦을 받아들이는 중인 거예요.” “세상에 안 힘든 이십대가 어딨니? 이십대는 그냥 이십대인 것만으로 힘든 거야.” 미경은 끝을 내지 못했던 학생운동과 이뤄질 수 없었던 성희 언니와의 관계를, 정은은 일도 연애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자신이 세상의 패자가 된 기분에 빠졌던 나날을, 난주는 두 아이를 키우느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 채 아줌마로 전락해버렸던 시절을 떠올렸다. 셋은 제각기 고개를 끄덕였다. -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197p 삐거덕거리는 몸과 마음을 안고 세 친구는 강릉으로 떠난다. 김 작가는 강릉이라는 지명 자체가 동년배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킬 만하다는 생각에 배경지로 선정했다고 한다. 1970년대 대학가에 MT 문화가 퍼지면서 강원도는 그 시절 학생들에게 낭만의 장소가 됐기 때문이다. “강릉은 세 친구의 젊은 시절이 켜켜이 쌓인 상징적인 곳입니다. 저 역시 처음으로 부모님을 속이고 첫사랑과 여행한 곳이에요. 소설의 원제도 ‘강릉에 가자’였어요.” 등장인물들은 맛있다고 정평이 나 있는 카페를 찾거나, 관광지를 들르려 애쓰지 않는다. 안목해변 주변을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고, 순간마다 하고 싶은 것을 한다. 그 와중에도 빠지지 않는 건 술이다. 과거 서로에게 느꼈던 감정과 오해, 깊어진 상처를 가감 없이 드러내며 다투지만, 담백한 건배와 함께 목구멍으로 털어 넘긴다. “여행 왔다는 것 자체가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잖아요. 술에 잔뜩 취해 해방감을 느끼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어요. 이들이 인연을 이어온 25년이 짧은 시간이 아닌 데다 처한 환경이 너무도 다르니 적당히 술 한잔으로 흘려보내는 게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방법이겠죠. 그래야 아프고 잊고 싶던 기억 위로 이번 여행이 씌워질 테고, 또 살아가니까요.” 앞으로 안도할 우리 김이설 작가는 이번 소설을 통해 삶에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때가 되면 자신도 모르게 달라져 있는 인생을 알아차리게 된다’(110p)는 강릉의 커피 명장 박이추 선생의 말을 빌렸다. 자녀와 부모를 동시에 부양하면서 사회적인 위치까지 공고히 해야 한다는 압박에 고단하더라도, 살다 보면 지나고 보면 결국 모든 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든단다. “흔히들 특정 시절이 가장 찬란했다 말하지만 지나고 나니까 그렇게 느끼는 거거든요. 실수했던 순간이 자꾸 생각나고 숨고 싶어져도 어느 날부터는 되레 아름답게 여겨져요. 한동안 번아웃이 심하게 와서 글을 전혀 못 읽고 못 쓰던 때가 있었어요. 지금은 극복했지만요. 작가에게 그건 죽음과 같은 건데요, 등단하고 10년 동안 육아와 원고 작업을 병행했더니 지쳤던 것 같아요. 과거와 지금을 비교하면 날카롭고 거칠던 문체가 둥글둥글하고 편해졌어요.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안도하고 감사하면서 계속 쓰다 보면 모르는 새 영글지 않을까요. 여러분의 쓸쓸함도 곧 잦아들기를 바라요.”
- 2024-07-22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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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선화 연정’ 가수 현철, 지병으로 별세… 향년 82세
- ‘봉선화 연정’, ‘사랑은 나비인가봐’ 등의 히트곡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트로트 가수 현철이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2세. 16일 가요계에 따르면, 현철은 지난 15일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 송파구에 있는서울아산병원에 차려질 예정이다. 현철은 수년 전 경추 디스크 수술을 받은 뒤 신경 손상으로 건강이 악화해 요양생활을 이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그는 2018년 건강상의 이유로 가수 활동을 중단했으며, 2020년 KBS 2TV ‘불후의 명곡’에 하춘화와 함께 레전드 가수로 출연한 것이 방송에서의 마지막 모습이다. 방송인 송해와 가수 현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못했다. 현철은 지난해 말 자신의 이름을 단 가요제에도 출연하지 못하고, 다른 출연진에게 손편지로 마음을 전했다. 그는 편지를 통해 “자식 같은 후배들이 ‘현철 가요제’에서 한바탕 놀아준다니 가슴이 벅차다. 함께하지 못해 너무 안타깝고 서운한 마음”이라며 “잊혀가는 현철이라는 이름을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 정말 행복하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1942년생인 현철은 1969년 ‘무정한 그대’로 데뷔했다. 그러나 당시 나훈아·남진 등과 달리 이름을 알리지 못하고 오랜 무명시절을 보내야 했다. 이후 1980년대에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사랑은 나비인가봐’ 등의 히트곡을 내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1988년 ‘봉선화 연정’으로 큰 인기를 끌었으며, 1989년 KBS ‘가요대상’을 수상했다. 이어 이듬해인 1990년에도 ‘싫다 싫어’로 2년 연속 대상을 받으며 전성기를 누렸다.
- 2024-07-16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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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구감소지역으로 여행 가요…연예인들이 나선 까닭
- 한국방송연기자협회(이사장 최수종)는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인촌, 이하 문체부)와 함께 인구감소지역의 숨은 명소를 관광 콘텐츠로 제작·홍보하는 ‘숨핫’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한국방송연기자협회는 최근 이와 같이 밝히며 “‘숨핫’은 국민들에게 친숙한 연기자들이 인구감소지역의 관광 자원을 직접 체험하며 소개함으로써 소멸이 우려되는 지역에 관한 관심을 촉구하고, 나아가 해당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배우들이 직접 나선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 올해 소개되는 숨핫은 충청남도 부여, 강원도 고성, 경상북도 봉화, 전라남도 강진 등 4개 지역이다. 부여는 홍은희·김용희·박주희(MBC 27기 공채 탤런트), 고성은 보이그룹 위아이(WEi) 멤버인 김요한·김동한, 봉화는 배우 이효정·이유진 부자, 강진은 배우 이장우·선한국 등이 출연한다. 최범호 한국방송연기자협회 사무총장은 “정부에서 89개 시군구를 인구감소지역으로 지정해 발표한 바 있다. 이번 숨핫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앞서 지역 선정위원회를 꾸렸고, 전문가분들이 지역을 선정했다”라고 설명했다. 영상 콘텐츠는 가족, 친구, 선후배가 함께하는 여행 콘셉트로 구성된다. ‘부여’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탈것(주행 열기구, 수륙양용버스 등), 사진 맛집 ‘고성’ 바다를 배경으로 즐기는 해양스포츠와 밀리터리 서바이벌 게임, ‘봉화’의 백두대간 자연 속에 녹아든 정자와 한여름의 산타마을, ‘강진’의 푸소농가 체험과 월출산을 바라보며 즐기는 차 오마카세 등 지역별 특색을 보여줄 예정이다. 최수종 이사장은 “연기자들도 대한민국의 구성원으로서 인구감소로 인한 지역소멸 위기가 우려된다”라며 “지역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안을 찾던 중, 연기자들의 재능을 이용해 지역관광을 활성화해보자는 아이디어로 ‘숨핫’이 시작됐다. 배우들의 참여가 선한 영향력으로 인구감소지역에 활력을 불어넣고 나아가 살맛 나는 대한민국을 위한 관광 콘텐츠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며, 지역을 살리는 따뜻한 숨결이 되도록 미력하나마 힘을 쏟을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최범호 사무총장은 “최수종 이사장님과 함께 좋은 뜻에 동참하겠다는 생각에 많은 연예인분들이 참여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이다”라면서 “지역소멸문제는 우리 모두가 고민해봐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숨핫 프로젝트를 통해 지역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유동 인구가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전했다. 콘텐츠는 7월부터 부여·고성·봉화·강진 순으로 유튜브 채널 ‘숨핫’ 및 문체부 SNS 등을 통해 발표할 예정이다. 현재 유튜브 채널에는 최수종 이사장과 최범호 사무총장 및 부여와 고성 출연 배우들의 홍보 영상이 게재되어 있다.
- 2024-07-15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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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뉴스] 이어령 부부가 사랑한 책
- 1 괴테와의 대화 요한 페터 에커만 / 민음사 “에커만이 괴테와 10년간 약 1000번 만나며 인생, 예술, 학문, 사랑에 대해 나눈 대화를 정리한 책입니다. 괴테의 며느리 오틸리에가 ‘시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고 말할 정도로 묘사가 돋보입니다. 괴테는 항상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본 최초의 세계인이었어요. 이어령 선생이 괴테를 참 좋아했죠.” 2 몸의 일기 다니엘 페나크 / 문학과지성사 “나무에 묶인 열세 살짜리 소년이 몸에 기어오르는 두 마리 개미와 그 옆에 있는 벌집을 보는 순간, 개미떼의 습격을 상상하다 공포에 질려 오줌을 싸며 울부짖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이 선생이 재미있다고 해서 읽어보았어요. 우리의 ‘길동무이자 존재 장치로서의 몸’에 대해 최대한 꼼꼼하게 쓴 일기체 소설이에요.” 3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 신달자 / 민음사 “‘전쟁과 평화가 있는 부엌’은 고통스럽지만 원숙한 노년의 삶에 관한 비유예요. 육신이 정신을 앞지르는 나이에 이른 그는 다양한 것들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묵은지처럼 깊은 맛을 냅니다. 신달자의 시에는 소용돌이치는 바람과 고요히 침잠하는 늪이 공존하죠. 앓는 몸을 미워하기보다 ‘내가 나를 어루만지는’ 푸근함도 존재합니다.” 4 이해인의 햇빛 일기 이해인 / 열림원 “수도자의 삶과 시인으로서의 사색이 조화를 이루며 사랑을 전하는 이해인 수녀의 시집이에요. 오랜만에 낸 작품이죠. 1, 2부는 투병 중 써낸 시로 엮었다고 합니다. 그의 세계에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가는 다소곳한 외길이 보입니다. 한눈팔지 않고 가는 자의 고독과 희열과 감사의 변주곡이 서려 있는 오래된 성당 같아요.” 강인숙 문학평론가 겸 국문학자. 1958년 대학 동기 동창인 이어령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건국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평론가로 활동한 그는 퇴임 후 이어령·강인숙의 이름에서 한 자씩 가져와 영인문학관을 설립했다. 지은 책으로는 《만남》, 《글로 지은 집》, 《함께 웃고, 배우고, 사랑하고》, 《편지로 읽는 슬픔과 기쁨》 등이 있다. 에디터 조형애 취재 문혜진 디자인 이은숙
- 2024-07-10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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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상흔과 평화 느끼는 하루, 관광명소로 거듭난 김포
- 그토록 노래하던 벚꽃도, 진달래도 바람에 날려갔다. 푸릇푸릇하게 숲을 이루기 시작한 초여름을 걷는다. 그 길을 따라 높은 산 전망대 망원경을 통해 애타는 그리움을 보았다. 산과 강과 철책이 어우러진 이 땅의 아름다운 길 위엔 평화를 염원하는 발걸음이 이어진다. 분단의 현장을 고스란히 밟으며 가슴 시린 역사를 살피는 유월의 사뭇 다른 마음을 기억하려 한다. 자연 그대로의 애기봉평화생태공원 구불구불 비탈진 산길을 거쳐 당도한 애기봉평화생태공원은 최북단인데도 말 그대로 평화롭다. 한반도 유일의 남북 공동이용수역에 위치한 평화와 화합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남북 접경지역의 154m 쑥갓머리산이라 불리던 애기봉은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한 건축물과 자연생태가 잘 어우러진다. 얼핏 갓난아기를 떠올릴 수 있는 애기봉이라는 이름은 평안감사와 기녀 애기의 애틋한 설화에서 온 말이다. 피난길에 오랑캐에게 붙잡혀간 감사를 그리워하던 애기가 ‘님이 잘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며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는 애기의 한이 마치 실향민의 한과 같다 하여 이곳에 애기봉(愛妓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한다. 전망대에 오르기 전 먼저 평화생태전시관을 둘러보자. 전시관을 둘러싼 생태 조성과 조각 전시는 작품마다 평화가 가진 다양한 의미를 보여준다. 실내 전시 공간의 조강 생태 디오라마와 조형물들 역시 볼 만하다. 상주하는 해설사의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으로 사전 지식을 얻고 오른다면 강 건너 북녘을 바라보는 마음이 한결 다르다. 평화, 생태, 미래를 주제로 한 3개의 평화생태전시관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전망도 시원하다. 물길 저편의 남쪽과 북쪽의 경계가 모호하다. 38선을 중심으로 한 DMZ는 분단 70년이 지나면서 정확한 구분이 없어졌다고 한다. 창밖으로 흐르는 조강과 전시관 바닥 및 벽에 그려진 위치도를 가리키며 전하는 해설이 생생하다. 한강 하류 끝의 물줄기와 김포와 강화, 북쪽의 개풍군이 뒤엉킨 모습을 눈앞에서 본다. 전시 미디어아트와 VR 체험을 통해 개성으로 떠나는 가상현실도 이곳에서는 유난히 실감 난다. 평화생태공원의 두 번째 건물인 전망대에 오르기 위해 흔들다리를 건넌다. 산골짜기에 길게 이어져서 고개를 돌리면 온통 울창한 숲이다. 흔들다리 끄트머리쯤부터 지그재그형 탐방로가 완만하게 이어진다. 빙글빙글 돌아 걸으면서 초여름의 풍성한 푸르름을 만끽할 수 있다. 1953년 휴전 이후 아무도 오갈 수 없는 고립 지역이 자연스럽게 생태의 보고가 되었으니 천혜의 생태공원인 셈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북한은 그저 건넛마을이다. 미세먼지로 시야가 흐린 날이었는데도 고배율 망원경을 통해 북녘땅이 선명히 보인다. 수도권에서 북한의 최전방을 볼 수 있다니. 1.4km 거리에 그들이 살고 있었다. 빌라 같은 공동주택이 새것 같은 느낌으로 마을을 이룬 북한 땅이 거기 있다. 주민들의 사는 모습이 마냥 친근하다. 돛배를 젓거나 수영을 해서라도 단숨에 건널 수 있는 코앞인데도 구경꾼처럼 바라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물길을 가운데 두고 김포와 강화도, 파주시가 개풍군을 마주한 채로 사는 중이다. 남북의 가운데로 흐르는 조강은 임진강, 한강과 만나 서해로 흐른다. 그 물줄기를 조강이라고 하는데 큰 강, 할아버지 강이라는 뜻이 담겼다. 물길 사이로 마주 보는 북쪽 건넛마을과 우리의 분단 현실을 청정의 생태공원에서 평화롭게 둘러볼 수 있으니 최고의 안보 여행지가 아닌가 싶다.(방문 시 신분증 지참과 인터넷 예약 필수) 숲속 문화예술 여행, 김포 국제조각공원을 걷다 애기봉평화생태공원을 내려오면서 들를 수 있는 김포 국제조각공원은 문수산 숲속이 작품 전시장이다. 통일을 테마로 만들어진 세계 유일의 자연 속 전시장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 3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산속에 풍덩 빠져 자연 지형에 어울리게 전시된 예술작품 한 점씩 찾아보는 숲속 문화예술 여행을 한다. 미로 같은 숲길을 걸으면서 전시 작품을 관람할 수 있어서 산책과 힐링을 동시에 맛본다. 솔향기 번지는 군하숲길 주변 둘레길을 걸으며 여유롭게 작품들을 둘러본다면 온전히 한나절을 보낼 수 있다. 전시는 연중무휴다. 덕포진의 손돌목 산책길과 짭조름한 대명포구 사적 제292호 덕포진은 강화해협을 마주하는 김포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시대 서해에서 강화만을 거쳐 한양으로 진입하는 길목의 바닷길로 군사적 요충지였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미국과 프랑스 함대와 맞서 싸웠던 격전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여기서 발굴 출토된 포와 포탄, 조선시대 상평통보와 주춧돌 등은 오르기 전 덕포진 전시관에서 볼 수 있다. 현재 덕포진은 3개의 포대와 그 끄트머리에서 파수청터가 발굴되었다. 이어서 강화해협이 건너다보이는 마지막 지점에 손돌묘가 보인다. 강화해협 중에서 가장 폭이 좁고 물살이 거센 지형을 이용한 천혜의 요새 손돌목이다. 바다가 보이는 수려한 풍광 사이로 수백 년 역사를 돌아보게 된다. 당시 포격전이 펼쳐졌던 포대 중 첫 번째 포대가 가장 길고 언덕의 곡선이 아름답기까지 하다. 방풍림 소나무 아래에서는 수백 년 역사를 더듬듯 바다를 내다보며 걷다가 쉬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덕포진은 평화둘레길 1코스와 염하강 철책길 순환 코스로 연결된다. 이윽고 포대를 지나고 손돌묘에 이르면 눈앞에 멋진 풍광이 펼쳐진다. 손돌은 고려시대 몽골군의 침입으로 왕이 강화도로 피난 갈 때 물길을 안내하던 중 세찬 물살에 겁이 난 왕의 오해로 죽임을 당한 뱃사공이다. 죽기 전 손돌은 바가지를 물에 띄우며 ‘이 바가지를 따라가면 무사히 건널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전하고 죽었다. 바다를 무사히 건넌 임금은 자신의 성급한 오해로 죽은 손돌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성대히 장사를 치러주었다고 한다. 후에 손돌이 죽은 음력 10월 20일쯤이면 찬바람이 거세게 불어 사람들은 손돌바람이라 했고, 이 무렵 추위를 손돌추위라고 불렀다. 지금은 손돌의 배가 지나던 물길에 고깃배가 유유히 흘러간다. 바다 건너편으로 강화의 광성보와 용두돈대가 보인다. 손돌묘 옆으로는 덕포진 둘레길을 만난다. 평화누리길 1코스를 알리는 대명포구의 조형물을 지나 시작되는 염하강 철책길 순환 코스가 손돌묘까지 와서 부래도, 덕포마을, 덕포진, 대명항 코스의 6.5km를 걸으면 두 시간 정도 걸린다. 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 철책길과 절반 이상 겹치는 순환길을 따라 쉬엄쉬엄 걸으면 철책 너머 보이는 김포 들녘과 바다 풍광에 가슴이 탁 트인다. 우리의 역사가 담긴 문화유산이 휴식을 주고 둘레길 코스가 되어 사람들이 오간다. 더불어 마음 가득 평화를 염원하게 된다. 오래된 숲의 위로, 장릉 벚꽃과 진달래꽃의 반영이 예쁘던 김포 장릉 연못에 이제 오래된 나무들이 연둣빛으로 비친다. 김포 장릉은 조선 제16대 인조의 부모인 추존 원종과 부인 인헌왕후 구 씨의 능이다. 이곳은 특이하게도 입장 시간이 오전 7시부터여서 이른 아침부터 관람이 가능하다. 역사 속 장소지만 일상에서 찾아가 차분히 힐링을 얻는 공간으로도 더할 나위 없다. 봄이면 목련과 벚꽃이 눈부시다. 초록으로 울창한 여름을 지나 가을엔 오래된 숲의 위로가 마음을 토닥인다. 긴 세월을 담은 수목들 사이를 아무리 걸어도 지루하지 않다. 단청 없이 소박한 재실 앞의 연지는 묘역과 함께 이루어진 긴 세월을 담고 있다. 새롭게 단장된 장릉 역사문화관에서는 정조 임금이 직접 지은 시도 감상할 수 있어서 뜻깊다. 복잡하고 소란한 세상을 뒤로하고 하루쯤 깊이 잠겨보아도 좋은 곳. 무해한 시간이다.
- 2024-06-28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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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매 환자도 요리하고, 서빙… 따뜻한 日 카페 ‘후쿠로우’
- 황사가 유달리 심해 연분홍 벚꽃이 뿌옇게 흩날리는 봄날, 도쿄에서 특급열차를 타고 세 시간을 달려 후쿠시마현 이와키시 메이지단치(福島県いわき市 明治寸地)를 찾아갔다. 치매 환자들이 일하는 곳이 있다고 해서다. 조용한 주택가에 단독주택을 개조해 앙증맞게 자리 잡은 카페였다. 인지증(認知症, 치매)은 일본에서도 ‘2025년 문제’라고 불릴 정도로 심각한 사회적 과제다. 일본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치매 환자 수는 2012년 기준 426만 명에서 2025년에는 약 750만 명에 도달, 65세 이상 인구 5명 중 1명이 해당될 것으로 예상된다. 후생노동성은 환자의 의사를 존중해 가능한 한 살고 있던 익숙한 지역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목표로 각종 시책을 발표하고 있다. 소중한 기억을 조금씩 잃어가고, 단순 계산을 할 수 없게 되고, 일상을 보낼 수 없게 된다. 망상을 하거나 배회하거나 폭언을 반복하는 등 인격조차 바뀌어버린다. 이윽고 가족의 얼굴도 잊어버리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며, 의식이 몽롱한 채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다. 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치매에 대한 이미지로,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가능하면 평생 치매와 무관하게 인생이 끝날 때까지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키며 당당한 삶을 보내고 싶은 건 인류 공통의 소원일 것이다. 그런 치매 환자들이 일하는 카페 후쿠로우(福老) 입구에는 가슴 뭉클한 글귀가 적혀 있다. 여기에서 일하는 직원은 주간보호센터에 다니는 노령자(치매 환자)입니다. 처음 만나는 손님에게 “당신, 만난 적이 있어요!”라고 한다든가 같은 내용으로 질문을 되풀이하는 경우도 있을지 모르지만 따뜻하게 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식사하기 위해 들르는 풍경이 노령자에게는 ‘보람’이자 ‘기쁨’입니다. 치매 환자가 일하는 카페, 후쿠로우 카페에 도착하자 앞치마를 두른 카페 대표 하세가와 마사에(長谷川正江, 57) 씨가 환하게 웃으며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아이 셋을 둔 하세가와 씨는 31세부터 방문요양보호사로 일하다가 11년 전부터 BLG이와키(いわき)라는 데이서비스(우리나라 주간보호센터에 해당)를 운영하고 있다. 센터에는 현재 15명의 멤버가 있다고 한다. 데이서비스를 운영하던 하세가와 씨가 치매 환자들이 일할 수 있는 카페를 창업하기로 결심한 건 3년 전이다. “계기가 된 건 친정아버지예요. 정년퇴직하고 나서 복지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며 요양원에서 운전을 하셨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건강하셨죠. 그런데 갑자기 요양원이 문을 닫는 바람에 실직하셨는데, 일이 없어지니까 치매에 걸리셨어요. 그때는 사회적으로도 이 병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기 때문에, 제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어요. 아이 셋을 키우느라 바쁘기도 했고요. 배회를 거듭하시던 아버지는 결국 돌아가셨고, ‘뭔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었을 텐데’라는 고민과 후회가 많았어요.” 많은 고령자들이 정년 후 본인의 역할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쓸모없는 사람 취급을 받고, 살아가는 보람을 느끼지 못하게 되면 인지 능력이 급격히 떨어진다. “제가 데이서비스를 만들긴 했지만, 이곳에서는 환자들이 가만히 앉아 있고 직원들이 모든 수발을 들어주기 때문에 환자 본인은 점점 하고 싶은 일도 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치매 환자들에게 마지막까지 역할을 부여해 증세를 완화하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던 하세가와 씨는 2층짜리 단독주택을 빌려 후쿠로우 카페를 열게 됐다. 다카하시 부부와 M 씨 “남편 미야히코 씨를 집에서 부인 히사코 씨가 혼자 돌보다가 힘에 부치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과의 대화가 거의 없었던 남편의 치매 증세가 점점 심해졌다고 해요. 그런데 우리 카페에서 부부가 함께 일하면서 표정이 많이 밝아졌어요. 특히 미야히코 씨는 앞치마를 입으면 과거 회사원이었던 때가 떠오르는지 긴장감을 가지더라고요.” 다카하시 부부를 보며 하세가와 씨가 말했다. 후쿠로우를 방문한 날 다카하시 미야히코(高橋宮彦, 85) 씨는 새로 작성한 메뉴판에 오자가 없는지 열심히 확인하고 있었다. 개호도 3등급(보행기나 휠체어를 이용하며, 식사나 양치질 등 일상생활에서 전반적인 개호를 필요로 함)이지만, 과거 회사에서 오래 영업을 한 덕분인지 아직까지 교정을 잘 볼 수 있다고 한다. 부인인 다카하시 히사코(高橋久子, 83) 씨는 주방에서 젊은 직원들과 닭튀김을 만들고 있었다. 부인은 치매 전조 단계인 ‘경도인지장애’가 있다. 함께 일하는 젊은 직원은 히사코 씨가 한 가지 일을 끝내면 다음 동작을 일러준다고 한다. 경도인지장애는 한 가지 행동을 하면 다음 동작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는데, 직원들이 미리 반복해 알려주면 자연스럽게 다음 행동으로 이어진다. 부인에게 다가가 힘들지 않은지 묻자 “괜찮아요, 재미있어요. 허리가 굽어서 오래 서서 일하면 조금 아파요”라며 소녀 같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부부는 고독했던 일상을 벗어나 젊은 직원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경도인지장애에서 치매로 넘어가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카페에서 일하며 가장 획기적인 변화를 보인 사람은 M 씨(67)다. 동그란 플라스틱 통에 젓가락으로 반찬을 담는 데 집중하느라 손에서 눈길을 떼지 않으면서도, 젊은 시절 어떤 일을 했는지 묻자 “목재소에서 오랫동안 근무했어요”라며 또박또박 답했다. M 씨는 정년인 65세쯤 치매가 찾아왔고, 이후 혼자 살며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가까운 곳에 사는 동생이 스스로 식사를 해결하지 못하는 형을 위해 매일 편의점에서 주먹밥이나 도시락을 사서 배달해주고 있다. 어느 날 도시락을 사온 동생에게 M 씨가 부엌칼을 들이밀며 “왜 매일 찾아와? 이놈, 내 재산을 탐내는 거지?”라며 화를 내 무척 놀란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랬던 M 씨가 후쿠로우 카페에서 일하면서 많이 온순해졌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 들렀는데, 카페가 마음에 들었는지 지금은 일주일에 네 번이나 나와 일한다. 최고의 보상은 마음 회복 후쿠로우 카페는 하세가와 씨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운영된다. 카페에는 주문표가 준비되어 있다. 손님이 주문 내용을 직접 작성하면 치매 환자가 받아 직원에게 넘겨주는 방식이다. 또한 손님이 너무 많이 오는 날은 ‘매진’ 간판을 내걸고 더 이상 손님을 받지 않는다. 카페를 방문한 날 후쿠로우의 방식으로 커피와 한국식 김밥을 주문했다. 히사코 씨가 예쁜 잔에 담은 커피와 김밥을 정성스럽게 내어줬다. 후쿠로우 카페의 도시락은 보기에도 예쁘고 맛도 좋다. 무엇보다 정성이 가득 들어간 게 느껴진다. 카페를 이용한 젊은 사람들이 SNS에 리뷰를 올리면서 멀리 있는 다른 현에서까지 손님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치매 환자가 손님을 맞이하며 90도로 인사하고, 손님이 탄 차가 사라질 때까지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하세가와 씨도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카페 경영은 적자다. 하루에 팔리는 도시락은 많으면 50개, 적으면 5개 정도다. 하루 매출은 2만~3만 엔 정도지만 이마저도 들쭉날쭉 일정하지 않다. 하세가와 씨가 운영하는 데이서비스에서 나오는 약간의 이익으로 카페의 적자를 메우며 겨우 운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하세가와 씨는 너무 매출이 많으면 곤란하다고 말했다. 손님이 많아 지나치게 바쁘면 치매 환자도 직원도 지치기 때문이다. 하세가와 씨가 신경 쓰는 또 한 가지 부분은 카페에서 일하는 직원과 치매 환자의 영양 있는 식사다. 혼자 사는 고령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영양 밸런스를 맞춘 건강한 밥상일 것이다. “저희는 오전에 일하고 오후 1시부터 한 시간 동안 점심을 먹어요. 남은 재료로 만들어 먹는데, 너무 맛있어서 직원이나 치매 환자들이 ‘점심 먹고 싶어 출근한다’고 농담할 정도예요. 특히 M 씨는 스스로 식사를 챙길 수 없는 상황이어서 이곳에 오시면 영양 보충을 충분히 하도록 당부드리고 있어요.” 후쿠로우 카페에서 일하는 치매 환자들은 먹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이들의 하루 보수는 400엔(약 4000원). 일주일 동안 모은 보수로 주중에 맛있는 점심을 사먹는 것에 큰 즐거움을 느낀다고 한다. 오전 근무가 끝나면 오후에는 카페를 닫고 하세가와 씨와 직원들은 치매 환자들과 외출한다. 당일 가고 싶은 곳을 물어보기도 하고, 가까운 바다를 구경하거나 공원에 가거나 함께 쇼핑하며 시간을 보낸다. 후쿠로우 카페에서 행복하게 일하는 다카하시 부부와 M 씨를 보며 정년을 맞이하기 전에 한 일이 무엇이든 치매에 걸리면 기억을 잃어가는 모습은 누구나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내가 치매에 걸렸을 때 나라는 존재를 받아들여주고 일이나 역할을 주는 곳이 있다면 행복하지 않을까? 치매의 속도가 느리게 간다면, 늙어도 쓸쓸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봄날이었다.
- 2024-06-26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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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년을 위한 조언, “글쓰기에 중요한 단 한 가지”
- 나는 ‘글쓰기’에 관해 말하고 글을 쓴다. 이 일을 통해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고 싶다. 어떻게 해야 잘 쓸 수 있는지 알려주기는 어렵다. 나도 잘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자신감을 키움으로써 글을 써왔다. 나처럼 타고난 기질이나 환경이 아닌 순수한 노력으로 자신감을 키운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감을 키워 글을 쓰는 방법에 관해서는 말할 수 있다. 글쓰기는 자전거 타기와 같다. 자전거 타는 법을 말과 글로 가르칠 수 없지 않은가.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해서 썼다’, ‘이렇게 하면 써지는데 왜 못 쓴다고 하는가’ 일깨우는 데 있다. 그리하여 ‘나도 쓸 수 있겠네’라는 반응을 얻어내기 위함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빅터 프랭클은 “두려움은 두려워하는 것을 현실로 만든다”고 했다. 글을 쓰는 일은 뇌의 입장에서 두려운 일이다. 그런 일에 자신감조차 없으면 안 쓰게 되고 안 쓰면 못 쓰게 된다. 그리고 못 쓰면 더 두렵다. 글을 쓰려면 자신감이 필요하다. 글 위에서 호령해야 한다. ‘네 이놈’ 하면서 글을 한 손에 쥐고, ‘남들 다 쓰는데 나라고 못 쓸라고’ 하는 마음으로 주도해야 한다. 글쓰기에 자신 없는 이유 글쓰기에 자신이 없는 이유는 두 가지다. 그 하나는 자신보다 나은 글을 쓰려 하기 때문이다. 본시 글이란 쓴 사람 자신보다 낫다. 그래서 자신보다 나은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에 시달린다. 자신만큼 써도 된다면 두려워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자신보다 나은 글을 쓰지 못해 본색이 탄로 날까 두려운 것이다. 자신감을 갖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남이 쓴 글 때문이다. 남이 쓴 글은 잘 쓴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글은 숱한 퇴고 과정을 거쳐 나온 글이다. 우리는 이런 글을 보고 자신의 수준과 비교하면서 자신 없어 한다. 그 글도 초고는 엉망이었을 텐데 말이다. 더욱이 우리는 학창 시절 내내 국어 교과서에서 범접하기 어려운 글만 봐오지 않았던가. 나는 글쓰기에 자신 없어 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주문한다. △그냥 쓰지 말고 말해보고 쓰세요.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한 번에 다 쓰려고 하지 말고 나눠서 여러 번에 걸쳐 쓰세요. 일필휘지는 나도 못 해요. △정답을 쓰려고 하지 말고 오답을 쓰지 마세요. 잘 쓰려고 하지 말고 잘못 쓰는 걸 줄이세요. 정답은 누구도 몰라요. 하지만 어떻게 쓰면 안 되는지는 알잖아요. △모르는 것 말고 잘 아는 걸 쓰세요. 굳이 남의 구장에 가서 어웨이 게임 하지 말고 홈그라운드에서 경기하세요. △써야 하는 것 말고 쓰고 싶은 걸 쓰세요. 평소에 쓰고 싶은 걸 써놨다가 써먹으면 되잖아요. △정리해서 쓰지 말고 쓰면서 정리하세요. 쓰기 시작하면 생각도 나고 쓰다 보면 정리가 되잖아요. 다 쓰고 나서 정리해도 되고요. △특별한 것 말고 평범한 걸 쓰세요. 특출 난 것 말고 나만의 특별한 것, 정상(頂上)이 아닌 정상(正常)을 추구하세요. △길게 쓰기 어려우면 짧게 여러 개를 써서 연결하세요. 문단의 개수를 늘리면 긴 글도 써지잖아요. △창조하지 말고 모방하세요. 맨땅에 헤딩하면 머리만 아파요. 다른 사람이 써놓은 글을 많이 읽고 참조하세요. 다른 사람의 글 속에 내가 쓸 수 있는 길이 반드시 있어요. △장문 말고 단문으로 쓰세요. 문장을 길게 쓰긴 어렵잖아요. △화려하게 말고 담백하게 쓰세요. 수식어를 넣고 수사법을 구사하면서 쓰려면 힘들잖아요. 담담하게 쓰세요. △첫 문장부터 쓰려고 하지 말고 생각나는 것으로 아무 데서나 시작하세요. 첫 문장을 못 쓰면 글을 한 줄도 못 쓰게 되잖아요. 쓸 수 있는 것부터 써서 다 쓰고 난 후 그 안에서 첫 문장을 찾으세요. △분량을 딱 맞춰 쓰려 하지 말고 많이 써서 줄이세요. 인터넷의 도움을 받으면 분량 늘리는 건 어렵지 않잖아요. 요약하는 것도 많이 해보셨고요. △잘 쓰려 하지말고 대충 쓴 후 잘 고치세요. 방송도 생방송은 어려워요. 녹화방송하듯 일단 써놓고 편집하세요. △혼자 쓰지 말고 함께 쓰세요. 쓰기 전에 주변 사람에게 물어 아이디어도 얻고 의견도 받아 수정하세요. 사실 글쓰기를 자신 없어 할 이유가 없다. 외국어로 써야 하는가, 아니면 한글을 모르는가. 또는 논술 시험 보듯 아무 자료도 찾아볼 수 없거나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태인가. 혹은 컴퓨터로 고칠 수 없이 원고지에 일필휘지해야 하는 상황인가. 잘못 쓰면 신변이 위태로워지거나, 천하의 명문을 써야 하는가. 이런 상황만 아니면 글 앞에 쫄 필요가 없다. 직장 생활하며 글을 써야 할 때 나는 늘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 글쓰기에 최대한의 시간을 확보하고, 찾아볼 수 있는 자료는 다 찾아보며, 더 이상 고칠 게 없을 때까지 고친다는 생각으로 썼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감은 떨어졌다. 자신감이 떨어지면 잘하는 일만 하려고 하고, 새로운 일은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하며, 남의 도움도 기피한다. 남에게 내 실력을 들킬까 봐 걱정되고, 남이 도와줘서 해냈다는 말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공부하고 노력해서 내 수준과 실력을 높이거나, ‘이게 내 수준인데 어쩔 거야’ 하면서 나답게 써야 하는데, 나는 둘 다 못하고 어정쩡하게 직장 생활을 했다. 쓸 힘을 얻을 방법 직장을 나와서는 그런 상태로 글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감을 북돋기 위해 이런 노력을 한다. 첫째, 일단 쓰고, 자주 쓴다. 글은 막상 쓰기 시작하면 그 전보다 몇 배는 자신 있어진다. 뿐만 아니라 쓸거리도 생기고 쓰고 싶은 마음도 든다. 자주 쓰지 않으면서 자신감을 키울 길은 없다. 자주 쓰면 익숙해지고, 익숙하면 자신감이 붙는다. 반복이 자신감을 키운다. 반복하다 보면 미세한 차이만큼 점차 나아지고, 거기서 자신감이 샘솟는다. 둘째, 남들의 평가에 대한 기대 수준을 낮춘다. 평가에 연연하지 않을 순 없다. 연연하되 기대치를 낮추자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나이 먹어가며 몸도 쇠약하고 집중력과 기억력도 떨어지는데, 여전히 젊었을 때 기대치로 평가받고자 하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에게서 좋은 평가를 끌어내는 건 내 뜻대로 되지 않지만, 스스로 기대 수준을 낮추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기대 수준을 낮추면 좀 더 쉽게 그 수준에 도달할 수 있고, 그만큼 자신감도 생긴다. 가능하다면 남들의 평가에 둔감해질 필요가 있다. 사실 남들은 내게 그다지 관심 없다. 어떤 평가는 깊은 생각 없이 무심코 던지는 경우도 있고, 평가를 했다가도 곧 잊어버린다. 그러므로 남들의 평가가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을 갖는 게 좋다. 근본적으로 남들의 평가에 의존해 나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면 남들의 평가에 우쭐하거나 의기소침하지 않을 수 있다. 셋째, 모든 걸 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나는 지금까지 과분한 대접을 받았다. 내가 가진 실력, 내가 들인 노력 이상으로 평가받으며 살아왔다. 그것에 만족하고 감사한다. 이제는 힘을 빼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자. 이렇게 마음먹으니 두려울 일도, 자신 없어 할 일도 없다. 넷째, 단점을 보완하지 않고 장점을 살리고자 한다. 학교 다닐 적부터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모르는 걸 알아야 성장한다고 배웠다. 이제부턴 잘하는 걸 더 잘하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내 장점을 키우자고 생각하면 자신 없을 이유가 없다. 다섯째, 하나에 집중한다. 재능 있는 사람은 여러 개를 섭렵해도 두루 잘할 수 있지만, 나는 그럴 자신이 없다. 대신 하나에만 힘을 모은다. 글의 주제와 장르도 자신 있는 것에 집중한다. 이를 통해 나만의 콘텐츠를 만들고 나다운 스타일을 구축한다. 여섯째, 완벽주의에서 벗어난다. 가진 역량에 비해 완벽주의를 추구하면 필요 이상으로 노력하게 되고, 일의 진척도 느리다.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할 뿐 아니라, 완벽하게 하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한다. 방법은 완벽 대신 완료를 추구하는 것이다. 조금 허술하더라도 끝내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임한다. 일곱째,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남과 비교하면 자기비하나 시기, 질투에 빠지거나 허황된 꿈을 꾸면서 자신감이 훼손된다. 남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의 과거와 비교해본다. 나의 과거와 비교해보면 현재는 과거보다 훨씬 낫다. 그러면 됐다. 여덟째, 성공을 경험하고 칭찬을 듣는다. 글쓰기의 성공 경험은 끝까지 쓰는 것이다. 잘 쓰든 못 쓰든 끝까지 쓰고 나면 뿌듯함과 함께 자신감이 차오른다. 끝까지 가보는 경험이 중요하다. 직접 성공 경험을 못 하더라도 칭찬을 자주 들으면 자신감이 생긴다. 칭찬을 자주 들으려면 칭찬해주는 사람을 곁에 둬야 한다. 나는 아내가 그 역할을 해준다. 아홉째, 슬럼프에서 벗어나는 체험을 축적해야 한다. 글을 쓰다 보면 반드시 벽에 부닥친다. 이때 굴복하면 자신감을 잃을 수밖에 없다. 길을 잃었을 때는 멈춰서 원인과 이유를 찾아보거나, 오던 길을 되돌아 초심을 되살려야 한다. 리셋해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특히 위기를 당했을 때 그것이 주는 의미는 무엇이고,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만들 순 없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위기가 끝났을 때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위기가 더 큰 위험을 초래하지 않도록 깊이 생각한다. 위기 국면이 끝난 후에는 위기에서 교훈을 얻어 같은 위기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한다. 열째, 말로 자기암시를 한다. 스스로 자신감을 북돋우기 위해 되뇌는 말들이 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어딘가에 답이 있다. 아직 못 찾았을 뿐이다. △한 번에 풀리는 일은 없다. 여러 번 해서 안 되는 일은 없다. △시작이 어렵지 뒤로 갈수록 쉬워진다. △언제 끝날까 싶은 일도 반드시 끝이 온다. △모두에게 잘 보일 필요 없다. △최선이 아닌 차선도 괜찮다. △언제든 그만두면 된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힘든 일은 지나간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은 오지 않았다. 누가 알겠는가. 나이 먹어 최고의 작품을 쓸 수 있을지. △누구나 죽는다. 죽음을 생각하면 두려울 게 없다. △나는 나를 믿는다. 자신을 믿는 사람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자신 안에 쓸거리가 있고, 그것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자신 안에서 쓸거리를 잘 길어 올린다. 그렇게 길어 올린 내용을 이 눈치 저 눈치 안 보고 쓴다. 나아가 세상에 그렇게 잘난 사람도 별로 없다고 믿는다. 자기 얘기는 자기가 가장 잘 쓸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여유가 있다. 가진 것을 다 보여주려고 조바심 내지 않는다. 가진 것의 일부만 보여줘도 된다고 생각한다. 힘줄 때 주고 뺄 때 빼면서 강약 조절도 잘한다. 끝으로 잘 버틴다. 처음에는 어렵지만 한줄 한줄 써나가다 보면 써지는 순간이 올 거라고 믿는다. 기본적으로 괴로움을 견디는 역치가 높다. 그래서 칭얼대거나 죽는 소리 하지 않는다.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하나를 꼽으라면 자신감이다. 하지만 자신감이 있어야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글을 쓰면 생기는 게 자신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자신감은 일상을 사는 힘이 된다. 나는 글을 쓰면 힘이 난다.
- 2024-06-19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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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행서 평생 지낸 에쓰코 씨의 새출발… 일본 은퇴자의 노후 도전기
- 금융업계에서 42년 일하고 65세에 은퇴한 뒤 일본어 학교 교사로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한 나가시마 에쓰코(永嶋悦子, 71세)씨는 진정한 행복을 느끼고 있다. 나가시마 씨는 일주일에 네 번 유학생을 대상으로 일본어를 가르친다. 결혼 후 출산을 망설일 정도로 일이 너무 좋았던 나가시마 씨의 이야기를 듣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42년간 금융업계 누빈 커리어우먼 나가시마 씨는 1975년 산와은행(三和銀行, 현 미쓰비시도쿄UFJ은행)에 입사했다. 산와은행에서 17년간 일하면서 긴자지점 지점장대리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이후에는 계열 회사인 에스에이서비스(エスエサービス, 현 미쓰비시UFJ웰스어드바이저스 주식회사)로 자리를 옮겨 6년 동안 재무설계사로 일했다. 그러다 또 한 번의 전근을 경험하게 된다. 같은 금융업계라고 볼 수 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연구소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산와종합연구소(三和総合研究所, 현 미쓰비시UFJ리서치&컨설팅)에서 19년 근무하고, 2017년 42년간 몸담았던 금융계를 퇴직했다. 나가시마 씨에게 과거 금융업계에서 일했을 때 가장 재미있었던 순간을 묻자 연구소에서의 일화를 꼽았다. “산와종합연구소에서 일했을 때가 가장 재미있었어요. 기업의 경영 상담도 하고, 관공서에서 수탁받은 조사 업무도 했죠. 가끔 금융 세미나 강사로 초청되기도 했어요. 무엇보다 리포트 작성하는 일이 적성에 맞았던 것 같아요.” 45세, 출산을 선택하다 나가시마 씨의 이력을 보면 선구적인 여성으로 정년퇴직까지 걸어온 커리어우먼이다. 그런 그녀에게도 힘든 순간이 있었다. 과거에는 금융기관 합병이 많았다. 이 과정에서 다른 회사에 소속되어 있던 사람들이 상사와 부하로 만나 다른 기업 문화와 성향 차이로 갈등을 겪기도 했단다. 또 같은 수준의 보고서를 내도 여자라는 이유로 질책받는 상황도 있었다. 그녀가 대학 졸업 후 은행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남녀고용기회균등법(1986년 시행)이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출산 후에도 커리어를 지속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러다 나가시마 씨는 44세에 아이를 갖기로 결심했고, 45세에 첫 출산을 경험했다. 그럼에도 일이 너무 좋았던 그녀는 출산할 때까지 직장을 쉬지 않았다. 여성으로서 커리어를 이어가기 쉽지 않은 시절이었지만, 아버지와 사별 후 혼자 지내던 어머니가 나가시마 씨의 육아를 도왔기에 일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크나큰 시련이 닥쳤다. 1986~1991년은 일본의 버블 경제 시기였다. 당시 부동산과 주식 시장의 투자 과잉으로 주택과 주식 가격이 나날이 높아졌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나가시마 씨는 그동안 저축했던 돈으로 아파트를 구입하고 대출을 받아 주식에 투자했는데, 이후 거품이 가라앉으면서 큰 손해를 보았다.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도 1억 엔 이상의 대출이 남아 있었어요. 살아갈 의욕이 나지 않았고, 나쁜 생각을 하기도 했죠. 경제 파산이 얼마나 큰일인지 경험했어요. 하지만 남편이 ‘그 돈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옆에서 설득했죠. 이후 7년 동안 월급과 보너스를 모두 은행 대출 갚는 데 썼어요. 두 번의 전직으로 받은 퇴직금도 고스란히 대출 상환에 썼죠. 이후로는 두 번 다시 투자에 손을 대지 않았어요.” 다시 시작한 커리어, 일본어 교사 금융업계에서 42년 일한 그녀는 어떻게 일본어 학교 교사로 커리어를 전환하게 된 걸까. 나가시마 씨는 연구소에서 퇴직 직전 정부 수탁조사 업무를 하다가 ‘일본어 학교 교사’라는 직업이 있다는 걸 알게 됐고, 흥미를 느껴 퇴직 후 바로 자격 시험에 도전했다고 한다. 일본어 교사 자격증은 문화청에서 추천하는 420시간의 강좌를 수강하면 취득할 수 있다. 2022년 11월 기준 전국 일본어 교사는 4만 1755명에 이른다. 독립행정법인 일본학생지원기구에 따르면 외국인 유학생이 일본어를 공부하는 일본어 학교는 약 600개가 있으며, 학생 수는 약 6만 명에 이른다. 나가시마 씨는 퇴직 후 6개월 정도 일본어 학교에 다니며 일본어 교육 강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후 800명 정도의 외국인 유학생이 다니는 도쿄 기타구의 JCLI 일본어 학교에 취직했다. 나가시마 씨는 대학교나 대학원 진학을 희망하는 유학생반을 담당하고 있다. 비상근 강사로 일주일에 네 번 근문한다. 주 2회는 오전 11시 50분부터 오후 5시까지 일본어 지도를 하고 주 2회는 대학원 진학 희망자를 대상으로 오전 8시 30분부터 12시 30분까지 개별 수업을 진행한다. 연구계획서 작성법, 면접 연습, 소논문 지도를 담당한다. 이후 오후 2시까지는 추가 개별 지도를 한다. “제가 담당하는 반은 진학이 목표여서 대부분 중국에서 온 유학생이 많아요. 초급반에는 네팔, 인도네시아,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유학생이 많고요.” 과거에는 한국 유학생도 많았는데, 최근에는 중국, 베트남, 네팔 유학생이 많다고 한다. “요즘 일본으로 유학 오는 중국 학생들을 보면 얼마나 상냥하고 착한지 몰라요. 중산층 자녀들이 일본으로 유학 오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요. 중국이 한 자녀 정책을 할 때 태어난 아이들이라 부모와 조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서 그런 것 같아요.” 나가시마 씨를 만나러 JCLI 일본어 학교를 방문한 날, 학교 측에서 대학원 진학을 원하는 유학생들에게 특강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아 필자도 교단에 섰다. 나가시마 씨의 말처럼 중국 유학생들의 순수하고 해맑은 눈빛이 보였다. 특강 후 많은 질문을 받았는데, 장래에 대한 목표가 뚜렷하고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려는 열정이 엿보이는 시간이었다. 퇴직 후 얻은 보람 나가시마 씨에게 퇴직 후 일본어 교사 커리어를 선택해 어떤 점이 좋았는지 물었다. “제가 열심히 지도한 학생이 좋은 대학이나 대학원에 진학한 후 저를 찾아와 ‘정말 고마웠습니다’라고 인사할 때 이 일을 하길 잘했다고 느껴요. 금융기관에서 40년 이상 일했지만 누군가에게 이렇게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난 감사 인사를 받아본 적이 없어요. 지금까지 제가 일한 경험, 인생 경험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미래가 유망한 젊은 유학생들이 원하는 목표를 이루도록 돕고, 그동안 가르쳐주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는다면 교사로서 무척 뿌듯한 일일 것이다.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학생들과 연구 테마를 같이 고민하고 방향성을 탐색하는 작업은 최고로 즐거워요. 학생의 연구 테마를 보며 새로운 지식이나 관점을 얻게 되는 순간도 아주 설레고 신나죠. 그렇게 힘을 합쳐 대학원에 합격하고 뛸 듯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벅차오를 때가 많아요.” 학생들과 교류하며 보람을 느낀다는 점에서 나가시마 씨에게 교사는 무척 매력적인 직업이다. 또 하나의 장점은 긴 휴가가 있다는 점이다. “3개월의 수업 기간이 끝나면 일주일의 쉬는 시간이 있어요. 그 시간에는 국내나 해외로 가고 싶었던 여행을 떠나요. 저에게는 너무 큰 즐거움이에요.” 노년에 잡은 행복의 파랑새 “지난달 은행 직원들 모임이 있었어요. 30여 명이 모였는데 여자는 저 혼자뿐이에요. 다들 70대가 됐으니 지금 뭐하는지 물었더니 절반 정도는 회사의 사외이사나 감사 일을 하고 있대요. 어떤 기업에 감사 관련한 일이 생기면 과거 금융기관에서 알고 지낸 동료나 선후배에게 소개한다더군요. 일종의 네트워크인데, 여자인 저에게는 그런 정보가 들어오지 않아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나가시마 씨가 말했다. “저는 금융과 전혀 관계 없는 일을 시작했지만, 오히려 재미있어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저는 정년까지 했던 업무와 전혀 관련 없는 일을 하는 게 훨씬 즐거워요. 이 일은 취미를 살리는 일과 같아요. 한 달 평균 10만~15만 엔 전후로 큰 수입은 아니지만, 연금 외에 충분한 용돈 벌이도 돼요. 일본어 학교에 다니면서 사회와 연결돼 있다는 감각도 얻을 수 있고, 전철 타고 회사를 다니는 것도 건강에 좋다고 생각해요.” 나가시마 씨처럼 42년 동안 현역으로 근무하며 어느 정도 저축도 해두었고 퇴직금도 있으면서 연금도 매달 받는 경우라면, 무리하게 일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편이 노후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가시마 씨는 특히 여성 시니어에게 일본어 교사를 추천했다. “여성에게는 일본어 교사가 최고의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정년 후에 큰 무리 없이 일할 수 있어서 좋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도 많지 않고요.” 현재의 직업에 만족하고 있는 나가시마 씨에게 앞으로의 꿈이 있는지 물었다. “일본 국내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이제는 세계의 도시를 찾아 다니면서 혼자 한 달 살기를 해보고 싶어요.” 자립한 여성이라면 대다수가 원하는 꿈이 아닐까 싶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냐고 묻자 “지금! 지금이에요!”라며 주저 없이 말하는 나가시마 씨. 활짝 웃던 그녀의 목소리가 취재를 마친 뒤에도 메아리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젊은 시절 일본의 버블 경제라는 파도에 휩쓸려 암흑과 절망의 시기를 지나온 그녀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노년기에 이르러 젊은 유학생들의 꿈을 함께 실현하는 교사라는 행복의 파랑새를 잡았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멋진 삶이 아닐까!
- 2024-05-31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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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 김지영, “이제 복길이를 사랑하게 되었죠”
- 어쩌면 누군가는 ‘복길이’ 이미지에 가둬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그 이미지를 벗기 위해 김지영은 부단히 노력했다. 어느덧 데뷔 30년 차 배우가 됐는데, 이제는 자신을 대표하는 이미지를 감사하게 받아들인다. 또한 연기학과 교수로서 후배들을 이끌고 있으며, 삶을 관망하는 여유도 생겼다. 유명인과 일반 대중의 관계는 ‘인기’로 증명되는 터. 그는 “인기란 야속한 것 같다. 뜨겁기도 하고 차갑기도 하다”면서 양면성을 언급했다. 현재는 큰 인기를 바라지 않는다. 아들한테 인기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 희귀병을 앓아 부모님 속을 썩였다고 생각하는 딸이기에 자식을 향한 애정이 더욱 특별하다. ‘전원일기’와 가족의 탄생 MBC ‘전원일기’와 복길이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복길이 이미지 때문에 다른 역할을 못 맡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오디션도 많이 보고, 사이코패스 악역, 유흥업계 인물 등 갖은 역할에 도전해봤던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는 복길이로 인해 지금의 제가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죠. 나이 들고 보니 배우로서 떠오르는 이미지가 하나라도 있으면 성공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매우 고마운 작품이죠. 그리고 좋은 선배님들과 호흡하면서 연기에 대해 많이 배웠어요. ‘전원일기’는 결국 저의 학교였다고 생각해요. SBS ‘토마토’에서 악역 연기를 펼쳐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그때가 전성기였을까요? MBC에서 ‘그대 그리고 나’(1997년)로 신인상을 수상한 후라 자신감이 올라와 있었죠. 악역 제안이 들어왔을 때 고정된 이미지를 탈피할 수 있겠단 생각에 출연했고, 촬영도 재밌게 했죠. 광고도 그때 제일 많이 찍었어요. 그렇다고 그때를 전성기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매번 진심을 다해 연기해서 작품 할 때가 늘 전성기라고 느껴요. 남성진 씨와는 동료에서 남편이 된 케이스인데, 관계의 변화에 어떻게 적응하셨나요? ‘전원일기’를 8년간 촬영하면서 정말 친한 오빠 동생 사이로 지냈죠. 이후 남편의 고백으로 사귀었는데 연애 기간은 불과 6개월이었어요. 그중 5개월은 제가 중국에서 촬영했죠. 연애다운 연애를 한 적이 없는데 바로 결혼하려니 조금 무섭고 도망가고 싶더라고요. 우정과 사랑을 구분 못 한 것이 아닌가 싶었죠. 그런데 세월이 지날수록 결혼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 사람, 내 가족이 된다는 게 이런 거구나 느끼면서 사이가 깊어졌고, 고마워하고 있어요. 부부간 소통은 어떻게 하세요? 저희 부부는 성격이 극과 극이라서 지금도 종종 싸워요. 남편이 화가 많고, 버럭하는 스타일이에요. 불 같은 성격이죠. 그래서 말다툼으로 번지는데, 다행히도 저희 둘 다 금세 잊어 버리곤 해요. 어느 순간부터는 의견 차가 커도 남편한테 ‘고쳐줬으면 좋겠어’, ‘맞춰줘’ 등의 요구를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남편의 말에는 짜증이 섞여 있지만, 내용은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어요. 그래서 서로 이성적으로 대화가 될 때 의견을 나누고 조율하려고 해요. 특히 아이 문제로 대화할 때는 아이의 생각을 가장 먼저 수렴하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결정을 내리죠. 얘기를 나눠보니 아드님에 대한 사랑이 크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아이가 자랑스러워하고 존경할 수 있는 엄마가 되는 게 제 꿈인 것 같아요. ‘그렇게 살면 네 삶이 너무 없지 않아?’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그게 제 삶이라고 생각해요. 일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아이 옆에 많이 있어 주려고 노력했어요. 평소에는 편지나 메모를 남겨서 마음을 표현했고, 촬영이 없는 날에는 즉흥적으로 여행을 가기도 했죠. 그런데 아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같이 있는 시간이 줄었어요. 나중에 성인이 되고 여자 친구가 생기면 나와 놀아줄 시간이 있을까 싶어요.(웃음) 과거 방송에서 보니 아드님도 배우가 되고 싶어 하던데요. 3대 배우 가족에 대한 생각이 궁금합니다. 어렸을 때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하더니,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아요. 부모님, 조부모님한테 먹칠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더라고요. 그 부담감은 당연한 것 같아요. 저도 시부모님이 배우이다 보니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는데, 남편은 평생 그 부담을 안고 살았죠. 우리 아이는 그 부담이 배로 커진 거잖아요.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연기가 정말 하고 싶으면 해라. 너의 색깔을 찾으면 된다’고 조언해주고 있습니다. 시어머니인 배우 김용림 씨와의 고부 관계가 특히 주목받는데요. 굉장히 순탄한 고부 관계라고 생각해요. 같은 분야에 있으니까 잘 이해해주세요. 제가 종갓집 며느리인데 촬영 때문에 제사를 못 지낼 때도 있고, 촬영이 늦어져 새벽 5시에 집에 들어갈 때도 있잖아요. 그럴 때 어머니께서 이해를 넘어 ‘얼마나 힘드니’라고 위로해주시죠. 그런데 여느 관계와 마찬가지로 서로에게 서운한 마음이 생길 때도 있어요. 어머니께서 섭섭했던 부분을 말씀하시면, 저도 속상한 점을 얘기하기도 하죠. 어느덧 어머니와 함께한 세월이 20년 이나 되다 보니, 목소리만 들어도 기분이 어떠신지 알겠더라고요. 전화 목소리에 서운함이 묻어 있는 것 같으면, 바로 달려갑니다.(웃음) 삶과 인연을 소중하게 부모님에게는 어떤 딸이었나요? 어릴 때부터 희귀병으로 몸이 약했으니까 늘 집안의 걱정거리였다고 생각해요. 제가 아이를 낳아 키워보니 부모님의 사랑을 더 느낄 수 있었어요. 배우를 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께서 반대를 많이 하셨어요. 몸도 안 좋은 애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하셨겠죠. 그런 마음을 아니까 창피하지 않은 자식이 되고 싶어서 더욱 열심히 노력했던 것 같아요. 사실 어느 순간, 너무 우리 애만 챙기느라 부모님에게 신경을 못 썼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후회가 남지 않게 부모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보내려고 합니다. 희귀병 투병으로 삶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겠어요. 등에 혈관이 엉겨 붙는 혈종이 있었는데, 태어날 때부터 그랬어요. 가족들이 저를 살려보겠다고 별걸 다 해봤는데,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죠. ‘성인이 되기 전에 사망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유서를 써놓기도 했어요. 말로 전하지 못한 얘기들을 남겨놓기도 했죠. 그러다가 고등학생 때 수술 후 완치돼 지금까지 살 수 있었습니다. 다시 주어진 삶이 감사하고 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어찌 보면 배우 활동이 체력이 강해진 기반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이제 50대가 되었는데, 중년 배우의 삶은 어떤가요? 20대 때는 작품을 한 번에 2~3개씩 하면서 바쁘게 보냈어요. 결혼 후인 30대, 40대 때 삶도 안정되고, 연기를 진심으로 생각하게 됐죠. 5년 전쯤부터 선배로서 안주하고 싶지 않고, 변화와 발전이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 출연하려고 했죠. 선배님 또는 감독님이 부르면 예술 영화도 카메오 출연도 마다하지 않았어요.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제예술대학교 연기예술과 학과장을 맡은 지도 7년이 됐네요. 저는 선생님이라기보다 선배라고 생각해요. 먼저 연기한 사람으로서 습득한 기술을 알려주려고 하죠. 오히려 제가 열정을 수혈받고 있어요. 사실 연기 활동을 하면서, 아이도 돌보면서, 학교 일도 하는 게 체력적으로 힘들기는 하더라고요. 그런데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학생들과의 연계성이라고 생각해요. 함께 성장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김지영에게 ‘관계’란 무엇일까요? 저는 소심하기도 하고, 관계에 예민한 편이에요. 지인들에게 마음 표현도 잘 못 했는데, 이제 용기 내서 먼저 다가가려고 해요. 모든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죠. 그런데 중요한 건 관계의 주체가 자신이 되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좋은 관계도 성립되고, 많은 상처를 받지 않을 테니까요. 또 너무 애쓰지 않아야 재밌는 인생이 되지 않을까요? Bravo Question 나에게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은? 감사한 마음 아닐까요. 저부터 시작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제가 그 마음을 간과하느냐, 신경 쓰고 있냐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한데, 그 마음을 품고 지금까지 왔다고 생각해요. 제가 그렇게 힘이 큰 사람도 아니고, 능력이 출중한 스타일도 아니에요. 그런 마음이 하나하나 쌓여서 저 자신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되고, 제가 하고 싶은 일도 하나하나 이루어온 거죠.
- 2024-05-02 08: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