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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뉴스] 62세 여성의 몸 변천사
-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브라보 마이 라이프(@bravomylifemag)님의 공유 게시물 60대도 이렇게 변할 수 있습니다. 지나 라페르토사(@ginalapertosa)는 근육질 몸매를 자랑하는데요. 얼마 전까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영상으로 그녀의 변천사를 확인해 보세요. • 그녀 나이 62세. 재미로 시작한 운동이 지금은 삶과 같다고 • 하고 있는 운동은 크로스핏. 크로스핏은 역도와 아령, 맨손체조 등 여러 종류의 운동을 빠른 시간 내 고강도로 행하는 스포츠 • 최근 크로스핏 대회(2024 Crossfit Games) 출전 자격까지 획득! 에디터 조형애 출처 ginalapertosa 디자인 이은숙
- 2024-09-09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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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0개 넘는 낡은 라디오가 울리는 추억 하모니
-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에는 ‘모던춘지’라는 이름의 건물이 있다. 불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것이 무엇일까 싶어 문을 활짝 열어보니 라디오 1000여 대가 얼굴을 드러낸다. 나이도 국적도 달라 보이는 라디오가 질서정연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감탄을 자아낸다. 건물의 규모는 작지만 라디오 박물관이라 해도 손색없는데, 이곳 주인 김형호 기자는 “그냥 라디오가 좋아서 모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전시나 수익의 목적이 아니라 취미 수집의 결과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덕후의 힘은 실로 대단하다. “이 붐박스는 마돈나가 ‘Hung-Up’이라는 노래의 뮤직비디오와 라이브 공연에서 갖고 나온 모델이에요. 겉모습만 봐도 화려하죠. 라디오를 통해 자신의 캐릭터와 성향을 보여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또 이건 VE301이라는 굉장히 오래된 라디오입니다. 히틀러는 이 라디오를 국민에게 보급해 연설을 내보내는 등 선동하는 용도로 사용했죠. 당시의 분위기를 느껴보고자 히틀러의 마지막 연설이 담긴 LP판도 공수해와 놓았답니다. 어느 날 여길 방문한 독일 분이 보고는 깜짝 놀라시더라고요.” 김형호 기자는 모던춘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라디오에 대해 설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는 ‘가장 오래된 라디오가 가장 비싸냐’는 식의 질문을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다고 꼽았다. 그의 답은 “단순히 오래되었다고 비싼 게 아니다. 당시 어떤 가치를 구현했느냐가 중요하다”였다. 보통은 라디오의 외형이나 금액 등을 궁금해하지만, 그는 라디오 뒤에 숨은 스토리에 주목한다. 라디오가 가진 역사, 가치, 그리고 라디오 주인과 그의 사연. 그 모든 것을 따뜻한 마음으로 품고 있다. 라디오를 수집한 지 약 15년. 김형호 기자도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라디오 스토리를 갖고 있다. 어부인 아버지는 매일 아침 라디오 방송으로 날씨를 확인했고, 어린 소년은 늦은 밤 아버지의 손때 묻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방송을 들었다. 파도 소리와 함께 어우러지는 라디오의 음색은 소년의 감수성을 키우기에 충분했다. 이후 서울에서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소년은 TV에 나오는 지역 방송국 기자가 됐다. 그러나 늘 마음속 한편에는 라디오가 자리한 터. 그리하여 라디오를 하나둘 모으기 시작한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라디오 안식처, 모던춘지 당시에는 몰랐지만, 돌이켜보면 필연인 순간들이 있다. 김형호 기자는 결혼할 때 아내로부터 TV 대신 티볼리 라디오를 혼수품으로 받았다. 라디오를 애지중지하며 매일 방송을 청취했던 그는 어느 날 1970년대 독일에서 나온 라디오 소리를 듣게 됐단다. 티볼리 라디오보다 30년 정도 일찍 만들어진 것인데, 놀랍게도 소리의 차이는 엄청났다고. 김 기자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여기에 그의 지적 호기심이 더해지면서 라디오 수집과 연구가 시작된 것이다. 날이 갈수록 김형호 기자의 집에 쌓이는 라디오도 늘어났다. 문제는 보관이었다. 다행히 2017년 삼척에서 강릉으로 이사 가면서 라디오 보관 공간이 생겼다. 단독주택인데 지하실이 있었기 때문. 그러나 이번에는 습기가 문제였다. 라디오가 상할까 봐 걱정하던 가운데, 김 기자는 대형 사고를 터뜨리고 말았다. 라디오 전문 사이트에서 한꺼번에 내놓은 라디오 100대를 집에 데려온 것. 더 이상 라디오를 지하실에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즈음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는 모던춘지가 지어진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어머니를 보내드리면서, 죽음이라는 게 마음의 준비 없이 갑자기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물건의 의미도 생각하게 됐죠. 장례 후 자식들이 어머니 집 정리를 했는데, 어머니가 쓰시던 물건들의 가치를 모르니 버릴 수밖에 없어 너무 죄송스럽더라고요. 그러면서 내가 라디오에 대한 가치를 정립해놓지 않으면 이 물건들이 쓰레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 공간을 지었어요.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위로받고 싶기도 했죠. 모던춘지의 ‘춘지’는 어머님 성함이에요. 여기 있으면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나죠.” 2019년 모던춘지를 지을 당시 건축 비용이 예상보다 많이 들었다. 그는 삼척 신혼집 아파트를 팔고 보험도 해지해 1억 원이 넘는 돈을 마련했다. 라디오 수집에 이어 창고 만들기까지, 취미활동으로 큰돈을 소비한 김형호 기자는 아내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는 “평일에는 직장에 다니고, 주말에는 여기에서 노는 게 좋다. 이런 놀이터 같은 공간을 갖는 것이 어른의 로망 중 하나인데, 아내가 이해해줘서 가능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호주에 사는 친형과 라디오 수집을 같이 시작했어요. 사실 호주에는 여기보다 더 많은 라디오가 있답니다. 4년 전쯤 형과 라디오 수집을 위해 호주 곳곳을 돌아다녔는데,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 라디오의 의미, 사연 등을 인터뷰한 것을 영상으로 남겨놓았어요. 그걸 편집해 만든 다큐멘터리 상영회를 2월 13일 세계 라디오의 날에 여기에서 가졌죠. 라디오에 대해 생각하고 얘기를 나눈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곳에서 종종 토론회, 전시회를 진행했으면 좋겠어요. 궁극적으로는 더 넓은 공간으로 옮겨가서 라디오를 기반으로 하는 복합 문화 공간을 형성하고 싶다는 꿈도 갖고 있습니다.” 라디오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유리관 내부를 진공으로 만들어 전극을 넣은 진공관 라디오다. 두 번째는 1954년 미국에서 발명한 트랜지스터 라디오다. 반도체 부품이 쓰이면서 파손 위험이 줄어들었고, 오늘날 휴대용 라디오도 탄생했다. 그렇다면 라디오 역사계에 있어 혁명적인 일은 무엇이었을까. 김형호 기자는 붐박스(Boombox) 탄생이라고 꼽았다. 붐박스는 트랜지스터에 속하며, 손잡이가 달린 것이 특징이다. 힙합과 브레이크댄스의 영향으로 1980~1990년대에 전성기를 보냈다. “저는 붐박스를 문화가 접목된 물건이라고 생각해요. 흑인들이 랩 배틀을 할 때 비트 음악이 필요하잖아요. 그때 휴대 가능한 붐박스가 큰 역할을 했죠.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대 후반에 청춘들한테 인기를 끌었어요. 그래서 붐박스는 중년들에게 향수의 물건인데,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죠. 저는 붐박스만 100개 넘게 모았어요. 전 세계적으로 붐박스에 대한 관심이 높은데, 국내에서는 이렇게 모은 사람이 없어요. 붐박스를 계속 수집하고 연구해서 어떤 프로젝트를 해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오래된 라디오 생존법 김형호 기자는 드라마나 영화 등을 볼 때, 시대나 상황에 맞지 않는 라디오가 소품으로 나와 안타까운 경우가 많다고 한다. 예를 들어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주인공이 2000년대에 나온 노트북을 사용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얼마나 어색한가. 그러나 컴퓨터와 달리 라디오는 변천사를 잘 아는 사람이 없기에, 소품이 잘못 쓰여도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김 기자는 “라디오 전문가로서 자문 역할을 하고 싶다. 지금도 가끔 비공식적으로 소품 자문 요청을 받는다. 작품의 배경, 인물의 환경 등을 분석해 답을 찾는다. 작은 디테일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법이다”라고 말했다. “라디오가 오래된 물건 같지만 사실 역사가 100년이 채 안 된 물건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1980년대 이전의 라디오 스토리를 잘 모르죠. 저도 수집하면서 진공관 라디오를 처음 접했으니까요. 라디오 연구와 자문을 통해 시대별로 만들어진 라디오가 다르다는 점과, 그 안에서 읽어야 하는 코드는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라디오의 가치를 찾아주고 싶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런 일도 있었어요. 제가 아는 사람 집에 오래된 라디오가 있었는데, 저는 보자마자 그 라디오의 가치를 알아봤어요. 그게 지금 영월 라디오스타 박물관에 전시돼 있어요. 박물관 전시 주제와 맞는 라디오라고 생각해, 제가 중간에서 가치에 대해 보증을 섰죠. 자신이 갖고 있던 물건이 어느 날 박물관에 전시되다니, 얼마나 놀랍고 뿌듯한 일인가요.” 현재는 ‘옛 물건’, ‘서민형 물건’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과거에는 라디오가 고급 물건으로 대접받았다. 1970년대만 해도 라디오 한 대 가격은 100만 원, 현재 가치로 보면 1000만 원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TV가 보편화되면서 라디오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수요가 줄어들자 제조사에서도 예전만큼 좋은 부품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에 따라 라디오는 저품질화되고, 대중의 인식 또한 저하되고 말았다. 김형호 기자가 가장 아쉬워하는 지점이다. “오늘날 라디오에 손이 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소리가 좋지 않기 때문이에요. 부품의 차이가 크죠. 쉽게 얘기하면 과거에는 스피커를 쇠와 자석으로 만들었어요. 그런데 오늘날에는 비싸다는 이유로 자석을 쓰지 않아요. 그래서 과거 라디오와 같은 단단한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겁니다. 저는 소리가 좋아지면 사람들이 라디오를 들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을 궁리하고 있죠.” 김형호 기자는 라디오 수리도 직접 한다. 회사의 필요에 따라 무선설비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했는데, 그 덕에 기초 지식을 갖게 됐다. 그리고 수백 대의 라디오를 직접 고쳐보며 방법을 터득했다. 그는 오래된 라디오의 전원이 켜지게 하고, 주파수를 맞춰 라디오 방송이 스피커에서 나오게 한다. 블루투스 스피커 장치 연결로 휴대폰 음악 듣기도 가능하다. 세상의 변화는 때로 아주 사소한 움직임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좋은 소리를 좇아 라디오를 모으고, 수명 다한 라디오를 살려내기까지 하는 김형호 기자. 그 낭만의 나비효과가 어디까지 뻗어갈지 궁금증이 증폭된다. “라디오가 사람들에게 친숙한 존재로 다가갔으면 좋겠어요. 현재 사람들은 라디오를 방송으로만 인식하고 있는데, 물건으로서 다가가면 또 다르게 평가할 수 있다고 보거든요. 제가 만든 것처럼 오래된 라디오를 블루투스 스피커로 활용할 수도 있죠. 오래된 라디오의 소리는 노래 부르는 사람이, 방송 진행자가 가까이 있는 듯한 느낌을 안겨줍니다. 일반 전자기기로 노래를 듣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죠. 오래됐다고 무조건 낡은 물건이 아닙니다. 숨을 불어넣어 주면 물건의 가치는 재탄생할 수 있습니다.”
- 2024-06-12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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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강 따라 흐른 선연한 역사, 진주성과 촉석루, 진주검무
- 경남 진주시는 예로부터 인재 배출이 잦았던 고장이다. ‘영남 인물의 절반이 진주에서 나왔다’는 얘기까지 있을 정도다. 특히 충신이 많았다. 고려조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구국의 화신이라 일컬을 만한 이들의 비범한 행장이 이 고장에 잇따랐다. 그래 ‘충절의 고장’이다. 오늘날 충의(忠義)의 얼로 빛나는 진주의 각별한 역사성을 웅변하는 명소를 꼽자면? 단연 진주성이 아이콘이다. 임진왜란 때의 전사(戰史)와 의용의 서사를 고이 간직한 진주성을 둘러보지 않고 진주를 얘기한다는 건 어불성설일 수 있다. 진주성은 진주시내 강변에 있다. 성의 남벽 아래로 남강이 굽이쳐 수려한 풍광을 빚어낸다. 강물과 벼랑이 지닌 전략적 가치에 착안해 성을 구축했다. 본래 내성과 외성으로 짜인 이중구조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내성보다 규모가 컸던 외성은 스러지고 내성만 남았다. 성곽의 길이는 1790m, 높이는 5~8m에 달한다. 삼국시대 때 토성(土城)으로 축조됐던 진주성이 석성(石城)으로 거듭난 건 고려 말 우왕 때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몇 차례 고쳐 지었다. 따라서 축성의 변천사와 기법을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 유적으로 평가된다. 공북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선다. 널찍하고 훤칠한 성내 공간 곳곳마다 잘 단장돼 생경한 기분을 자아낸다. 천년 고성이되 마치 신축한 것처럼 매우 미끈한 게 아닌가. 근래의 복원작업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걸 알 만하다. 한때는 고즈넉한 폐허와 잔해 사이에 간신히 존재했겠지만 고칠 것 고치고, 다듬을 것 다듬고, 보탤 것 보태어 회생했다. 복원사업 이전의 성내엔 민가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고 한다. 그걸 다 철거해야 했다. 그러니 대대적인 복원사업이 필연이었겠다. 작업자들은 진주성의 본연과 본질에 부합하는 복원을 완수하기 위해 실력을 쏟아부었을 것이다. 성내의 지형은 리듬이 있다. 평지와 경사지, 야트막한 언덕과 구릉지, 그리고 구불구불 이어지며 거대한 타원을 그리는 성곽이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었다. 너른 잔디밭과 다양한 수목들이 초록을 뿜어 소풍과 산책을 즐길 만한 공원으로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진주성은 어디까지나 역사의 곳집이다. 일쑤 전쟁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친 곳이다. 수성(守城)과 승전을 꾀하기 위한 갖가지 구조물이 즐비한 곳이다. 전투 지휘소로 쓰인 서장대와 북장대, 포를 쏘았던 포루, 전공을 새긴 사적비와 순절의 넋을 기리는 사당 등이 있다.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까지 성내에 있어 답사객들의 호감을 산다. 진주성은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진주성대첩이 벌어진 곳으로 역사에 불멸의 이름을 새겼다. 당시 장수는 진주목사였던 김시민 장군. 1592년 10월 김시민은 전라도와 이어지는 전략 요충이었던 진주를 삼키기 위해 쳐들어온 2만여 명의 왜군을 물리쳤다. 김시민이 거느린 병력은 관군과 의병을 합쳐 3800여 명에 불과했다지. 중과부적 상황이었지만 통쾌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건 김시민의 명민한 지략이 작동해서였다. 이를테면 그는 성 밖에 주둔한 의병들에게 왜군을 교란할 수 있는 교묘한 작전을 전개하게 했다. 성내의 부녀자들에게 남자 옷을 입혀 군사가 많아 보이게 했다. 야간엔 악공들의 피리 소리로 왜군의 심리를 교란시켰다. 지략뿐인가, 김시민은 개혁적 성향의 무장이라서 휘하를 다루는 방법에서도 관행을 타파했으니 매사 솔선수범으로 군대의 사기를 북돋웠다. 신식 병기 동원에도 신경을 썼다. 이래저래 승전은 애당초 떼어놓은 당상 같은 것이었을지도. 하지만 김시민은 전투 막판에 왜군의 총탄을 맞고 순절했다. 그때 나이 38세였다. 그가 숨을 거두자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었고, 성내 백성들의 곡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던가. 비단 김시민을 애도하는 호곡뿐이었으랴. 대첩이 끝난 자리에선 죽은 자들을 끌어안은 산 자들의 오열이 터져 나왔으리라. ‘조선왕조실록’은 당시의 참혹한 정경을 적치여산(積置如山), 즉 ‘시체가 쌓인 모습이 산과 같다’고 기록했다. 서애 류성룡은 ‘징비록’을 통해 ‘사방 30리 안에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해 가까이 가기 어려웠다’고 했다. 진주성은 일종의 성지(聖地)다.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선인들의 역사가 선연한 게 아닌가. 전쟁에 따르게 마련인 지옥의 묵시록을 술회하는 성이라는 점에서는 반전(反戰) 메타포가 응축된 곳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여하튼 전쟁이란 야만의 얼굴을 하고 있다. 수시로 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의 슬픈 숙명이지만. 다산 정약용이 극찬한 ‘진주검무’ 진주성 남쪽 기슭, 성곽에 인접한 곳엔 촉석루(矗石樓)가 있다. 크고 당당하고 수려한 누각이다. 한때 국보로 지정됐으나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지정을 해제했다. 지금의 모습은 1960년의 보수작업을 통해 얻었다. 진주성 아래로 굽이치는 남강과, 저 멀리 산야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진주성 최고의 전망대다. 조선 선비들이 풍류와 사색을 즐겼던 영남 제일의 정자다. 전투 지휘소이기도 했다. 따라서 촉석루 역시 전쟁이라는 부조리극이 낳은 상처의 전시장이기도 하다. 촉석루 아래 강변에선 진주성대첩 즈음 한 여인이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 자결, 영원히 남을 충절의 화신이 됐다. 바로 논개다. 진주 관기(官妓)였던 그의 재능은 미색으로 향기를 뿜는 데에만 그치지 않았음인가. 시대를 읽는 냉철한 눈까지 겸비했나? 그는 기꺼이 한 몸 바쳐 한 시대의 참화에 빛을 흩뿌렸다. 촉석루 아래 강변엔 논개가 왜장과 함께 투신한 바위 ‘의암’(義庵)이 있다. 다산 정약용은 어느 날 촉석루에 유람을 왔다가 ‘일개 작은 여인이 왜적의 우두머리를 섬멸하다니 이 얼마나 통쾌한가?’로 시작되는 ‘진주의기사기’(晋州義妓祠記)를 썼다. 논개의 거룩한 행장을 기리는 글이다. 다산이 진주에 와서 탄복한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진주에 전승돼 오늘날까지 맥이 이어지고 있는 ‘진주검무’를 보고 찬탄했던 것. 검무는 여성 무용수들이 무사 복장을 하고 칼을 휘저으며 추는 춤이다. 촉석루에 앉아 이 춤을 감상한 다산은 참을 수 없는 흥에 겨웠나? 그는 ‘무검편증미인’(舞劍篇贈美人, 검무를 추는 미인에게 드림)이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 검무를 추는 여인의 매력적인 자태와 춤사위의 삼엄한 격정을 생생하게 묘사한 명편이다. 무불통지(無不通知)의 석학이었던 다산은 음악과 춤에도 조예가 깊었다. 음악과 악기를 연구해 ‘악서고존’(樂書孤存)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이런 다산이 진주검무를 시로 써서 극찬했다. 진주검무는 1967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초대 예능보유자는 ‘진주권번 출신의 마지막 예인’ 고(故) 김수악이다. 김수악이 소리를 하고 춤을 추면 목석도 들썩였단다. 춤으로 도가 튼 달인이었다. 진주검무의 맥은 오늘날 예능보유자 유영희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그는 70대에 접어들었지만 예인다운 열정은 여전히 뜨겁다. 춤사위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고. 김길수 진주문화원장 “일제강점기 때 기생 단체도 독립운동에 나섰다” 진주의 자연지리 가운데 빼어나기론 단연 남강이다. 시내를 가로지르며 굽이치는 남강의 폭은 넓고 물살은 유유해 아름답다. 예로부터 진주 사람들이 기대어 살아온 생명의 젖줄이다. 진주의 보배에 해당하는 진주성이 남강가에 있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진주의 역사와 문화는 남강과 함께 흘러왔다. 그렇다면 진주의 문화답사 1번지는? 김길수 문화원장은 진주성과 진주성 안에 있는 촉석루를 꼽는다. “진주성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실로 많다. 그러나 진주성을 찬찬하게 답사하는 이는 드물어 아쉽다. 대체로 촉석루와 논개 유적인 의암만 훑어보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진주성을 한 바퀴 도는 온전한 답사 방식을 채택하면 좋겠다. 성 안에 있는 국립진주박물관 관람과 남강변에 조성된 성 밖 산책로를 통해서도 역사의 숨결을 음미할 수 있다.” ‘의기 논개’ 역시 진주의 대표 캐릭터다. 논개의 행장이 지역 정서에 미친 영향엔 어떤 게 있을까? “일개 기녀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건 세계 역사상으로도 논개가 유일무이하다. 나라를 위하는 일엔 신분의 귀천이 따로 없다는 걸 실천한 인물이 논개이자 논개 정신이다. 따라서 지역 정서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3.1만세 운동 때 진주에선 기생 독립운동 단체가 조직돼 국권 회복에 앞장섰다.” ‘진주검무’는 물론 가무악(歌舞樂)의 대가였던 고 김수악 선생의 예술은 현재 어떤 식으로 전수되고 있는지? “김수악 선생이 양성한 제자들이 뒤를 잇고 있다. 진주에서 교방예술의 맥이 면면히 이어지는 셈이다. 우리 문화원은 선생의 제자들을 문화학교 강사로 영입해 강의를 맡기고 있다. 향후 ‘김수악 기념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전통 민속이 흔히 현대의 풍속에 밀려 퇴색하고 있다. 반면 진주에선 ‘진주 소싸움’의 명맥이 이어져 흥미롭다. “농업이 번성했던 과거부터 진주 사람들은 농한기에 소싸움을 즐겼다. 일설엔 진주가 신라와 백제의 경계지역이라 신라와 백제 편으로 나눠 소싸움을 벌였다는 얘기도 있다. 한편 소싸움 무대로 적격인 남강 백사장이 있어 명맥 유지가 가능했던 측면도 있다.” 주요 문화원 사업을 소개해달라. “외람된 얘기지만 진주문화원은 전국 문화원 중 으뜸이라 자부한다. 지역 문화에 대한 시민들의 식견과 애착을 토대로 인화단결을 꾀해온 결과라고 본다. 중점 사업은 진주의 ‘의로운 정신’을 선양하기 위한 콘텐츠 개발이다. 지속적으로 순절 의병들을 발굴, 연구해왔다.” 타지의 문화원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해 사업을 추진한다지? 이는 매우 인상적이다. “순절 의병들을 찾아내고 조명하기 위해 의병 활동이 많았던 전라도의 여러 문화원들과 손잡고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어떻게든 의병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울러 우리 문화원은 전국 각지의 문화원과 자매결연을 맺어 문화예술 교류사업을 하고 있다. 이건 앞으로 더 확대해나갈 방침이다.”
- 2023-10-13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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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권에서 먼저 만나는 가을, 호수공원 옆 도서관 품은 광교
- 사방 천지로 빛이 뿌려진 날들이다. 멈출 수 없는 일상은 늘 촘촘하다. 이럴 때 가뿐히 가볼 수 있는 거리에 있어 잘 찾아왔다고 스스로 흐뭇해지는 길 위에 서본다. 굳이 계획을 세우느라 애쓰지 않아도 된다. 대중교통에 몸을 싣고 가볍게 나서거나, 편안히 자동차 핸들을 돌려서 잠깐만 달리면 닿는다. 낯선 듯 낯설지 않은 곳, 기분 좋게 훌쩍 길을 나설 수 있는 곳, 광교다. 수원은 당연히 익숙한 도시인데 같은 지역권의 광교는 느낌이 조금 다르다. 낯설지는 않은데 옆 도시에 비해 어쩐지 새것 느낌이다. 신상품이라는 뜻의 신조어, 이른바 신상 또는 ‘새삥’ 같달까. 수원이 18세기 조선의 신도시라면 수원시 영통구에 속하는 광교는 21세기에 조성된 또 다른 신도시다. 광교가 특별한 것은 도시의 녹지율이 41.7%에 달하는 자연친화적 도시라는 것도 한 가지 이유다. 그 안에 엄청난 넓이의 호수가 포함되어 있어 그야말로 쾌적한 주거 환경 속에 살아가는 걸 부러워할 만하다. 인구밀도도 국내 신도시 중에서 최저다. 광교라 하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호수공원이 도심을 따라 연결돼 시민들의 자연스러운 산책 코스가 되고 있다. 도서관, 호수, 수목원, 박물관, 미술관, 감성 맛집까지 일상과 이어진다. 그들이 가꾸어나가는 도시의 건물과 건물을 잇는 정감 어린 골목길도 아름다운 것은 라이프스타일의 초점을 문화 기능에 맞추어서인 듯하다. 독서 캠핑을 아시나요, 알싸한 숲속 도서관 책뜰 요즘 각기 다른 레저 활동의 이름으로 호캉스나 차박, 차크닉 등의 다양한 신조어들이 만들어졌다. 이제는 독서 캠핑 또는 북캉스라는 말도 생겨났다. 가을이면 책을 읽는 계절이라고 끊임없이 말한다. 조용히 집에서 책을 읽어도 좋겠지만, 호수를 둘러싼 고요한 숲속 공간에서 책과 함께하는 시간은 어떨까. 광교푸른숲도서관에 가면 정말 이런 곳이 있다. 광교푸른숲도서관은 광교호수공원이라는 멋진 경관을 배경으로 자연 속에서 힐링을 주제로 한 도서관이다. 푸른숲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산비탈의 기울어진 숲 경사를 그대로 살렸다. 숲 사이에 입체감 있게 설계된 열린 공간 형태의 도서관은 외부와 내부 모두 예쁘다. 푸른숲도서관만으로도 충분한데, ‘푸른숲 책뜰’이라는 독서 캠핑장 콘셉트의 독서 힐링 공간이 특별하다. 도서관 옆의 경사진 숲길을 따라 걸어 오르는 길은 비밀스러운 정원에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다. 가끔 사람들이 나지막이 말하는 ‘나만 알고 싶은 곳’이다. 그 언덕 나무들 사이에 오두막을 연상시키는 다섯 개 동의 독립적인 공간 ‘책뜰’이 앉혀졌다. 백리향, 산수국, 바람꽃, 물봉선, 금강초롱(장애인 우선 예약). 각 캐빈마다 붙여져 있는 이름은 광교호수공원 산책길에서 만날 수 있는 계절 꽃인데 시민들의 제안으로 지어졌다. 내부에 드니 초록 이끼로 덮인 굵다란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마치 신비한 트리하우스 느낌이다. 책뜰 주변을 알싸한 숲 내음과 푸른 기운이 감싼다. 오래된 나무들 사이로 작은 새가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게 보인다. 3~4평 정도 공간에 편안한 의자 몇 개와 작은 테이블, 그 위엔 책 받침대 하나, 옆쪽으로 안내 자료와 책이 꽂힌 서가가 전부다. 창문을 열면 아담한 전용 테라스도 있다. 문을 닫으면 소음이 완전히 차단된다. 빈백 체어에 깊숙이 앉아 멍하니 밖을 내다보고 있으니 평온함이 온몸에 퍼진다. 이런 호사라니. 비로소 크게 숨을 쉬고 느리게 책장을 넘기며 여유로운 시간을 즐긴다. 사계절 언제나 책을 읽든 숲멍을 하든 오롯하게 사치스러운 쉼의 시간을 누릴 수 있다. 3시간의 이용 시간 동안 자신만의 내밀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볼 수 있다. 친구나 연인, 아이를 동반한 가족이 독서와 힐링의 시간을 나누기도 한다. 소풍 나온 만족감과 함께 충분한 사색과 쉼을 주는 3시간이다. 여기에 책 한 권이면 충분하다. 책이 있는 정원 문화, 영흥수목원 빽빽한 빌딩과 아파트의 도심 속에 숲과 연결된 수목원이 자리 잡고 있다. 새롭게 숲속 산책로가 구현되었다. ‘더 살아 있는 정원을 시민의 일상 속으로’라는 의미를 갖고 정원 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조성되어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기에 안성맞춤이다. 분수가 솟아오르는 온실 앞의 이국적인 풍경을 지나 아열대 식물을 주제로 꾸며진 온실에는 망고 열매가 매달려 있다. 무엇보다 마음을 끄는 것은 수목원 입구의 책마루였다. 이 지역의 식물이나 정원 도구 전시실 등을 돌아보고 나면 계단 형식으로 만들어진 마루에 그냥 앉아 책을 읽는다. 숲과 책의 어울림이 아름다운 공간이다. 광교 도심을 한눈에, 프라이부르크 전망대 광교푸른숲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몇 걸음 숲으로 나가 산책길에 들어서면 도서관 뒤편으로 우뚝 선 탑이 보인다. 프라이부르크 전망대(Freiburg Observatory). 세계적인 환경 도시 독일 프라이부르크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전망대와 같은 형태라고 한다. 환경 도시를 지향하는 수원시와 프라이부르크시가 자매결연을 맺어 의미를 더하는 전망대다. 건물 10층 정도인 33m 높이의 전망대에 오르면 광교 도심을 360도 조망할 수 있다. 각 층마다 카페, 전시관, 쉼터, 전망대가 이어진다. 남쪽으로 탁 트인 전망으로 내려다보이는 원천호수와 빌딩들의 스카이라인이 압도적이다. 전망대 밑에는 ‘풀빛누리 광교 생태환경체험교육관’이 있어서 환경을 살피는 나들이 장소로 제격이다. 호수공원 주변 산책길에서는 자작나무 쉼터와 하늘정원, 수초섬 등 계절별로 변화하는 호수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운치 있는 자연 생태 속으로, 신대호수 광교호수공원 중앙에 조성된 공원 산책로는 원천호수와 신대호수로 연결되어 있다. 프라이부르크 전망대에서 북쪽으로 내려다보였던 신대호수 쪽으로 걸어가면 금방 이어진다. 도심 속 호수공원을 잇는 순환 보행로를 걷는 것만으로도 자연을 누린다. 신대호수 쪽 수변 보행 데크에 들어서 둑방길 방향으로 쭉 걸어가면 연꽃이 피어나고 뿔논병아리가 노니는 곳이 나타난다. 이처럼 습지식물과 야생 조류들이 살아 있는 생태계를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안개 낀 이른 새벽의 몽환적 풍경과 해 질 무렵의 노을 풍경이 더없이 멋진 신대호수는 모든 시민의 생활 속 휴식 공간이다. 광교박물관, 아트스페이스 광교 실내에서 즐겨볼 만한 곳으로는 광교박물관이 있다. 광교의 역사와 도시 변천사를 알려주고 다양한 체험도 준비되어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다. 2층에는 대한체육회장을 역임했던 소강 민관식 님의 이야기와 올림픽을 비롯해 한국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이 가득하다. 유명 선수들의 기증품도 많이 볼 수 있다. 또한 문화예술 공간 아트스페이스 광교는 지역의 풍부한 문화예술을 공유하는 공간으로, 갤러리아 광교 옆 수원컨벤션센터 지하 1층에 위치한다. 광교중앙역에서도 가까워 접근성이 좋다. 전시 특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대부분 무료 관람이다. 광교푸른숲도서관 책뜰 이용 방법 대상 수원시도서관 관외대출회원(정회원) 이용 인원 최대 4명 운영시간 1회 09:30~12:30 2회 14:00~17:00 / 3시간 예약 신청 수원시도서관 홈페이지(www.suwonlib.go.kr) ‘푸른숲 책뜰’ 예약 기간 매월 1일 10시부터 선착순 이용료 1만 원
- 2023-09-15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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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여관 하나가 불러들인 매우 긍정적인 파장
- ‘지역 문화유산 순례기’는 한국문화원연합회의 후원으로 제작됩니다. 다양한 지역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는 지역N문화는 한국문화원연합회와 지역문화원이 함께 발굴한 다양한 지역 이야기를 서비스하는 지역문화포털입니다. 기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지역N문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보성 사람이 잘라 말한다. “보성군이야말로 남도 여행 1번지이지!” 볼 것도 즐길 것도 먹을 것도 기억에 남을 것도 숱하다는 얘기다. 자세한 내용이야 캐묻지 않아도 알겠다. 주마간산식으로나마 예전에 보성 땅을 훑고 다닌 적이 있었는데, 풍경도 풍물도 역사도 문화도 개성이 있어 오래가는 여운을 남겨준 게 아닌가. 하오의 해변에 앉아 멍 때리며 바라본 바다에 일렁이던 붉은 윤슬을 잊을 수 없다. 찰나의 잔물결에 불과한 삶의 눈부신 슬픔을 환기시켜 죽비처럼 가슴을 쳤으니. 해서 내겐 그날의 윤슬이 보성 최고의 명장면으로 새겨졌지만, 여행자의 눈과 감성을 일깨우는 이 고장의 명소는 손가락으로 일일이 꼽기가 부족할 지경으로 즐비하다. 오늘은 건축문화유산을 답사할 참이다. 보성여관을 찾아간다. 벌교읍 다운타운 중심지에 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5년에 한국인 강활암(姜活岩)이 지은 일본식 목조건물이다. 그 시절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대형 여관이었다. 건물 7채에 방이 13개나 됐다. 요즘으로 치면 5성급 호텔? 이렇게 화려한 여관이 어떤 연유로 남도 끝자락 포구 벌교에 들어서게 됐을까? 당시 벌교는 상업과 교통의 요충이었다. 전남의 4대 도시에 들었다고 하니 기세를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벌교의 번성은 일본인들의 거주와 왕래가 잦은 데에서 비롯됐다. 그들은 육상교통과 해상교통의 접점인 벌교의 지리적 이점을 영리하게 간파했다. 전남 내륙의 곡창에서 긁어모은 양곡을 벌교항을 통해 일본으로 운송했다. 즉 식민지 수탈기지의 한 전형이었다. 하루 20여 차례 화물선이 드나들 정도였으니 가혹한 정황이 훤히 비친다. 여하튼 벌교는 인파가 북적이는 도시였다. ‘본정통’이라 부른 신시가지가 형성됐다. 보성여관이 들어선 시대적 배경이 완연하다. 소설 ‘태백산맥’의 남도여관 그곳 보성여관은 건축적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인정받아 2004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이후 2012년 복원작업을 통해 옛 모습을 되찾았다. 일본식 건물의 특징인가? 전체적으로 개방적인 느낌을 준다. 건물 전면을 가득 채운 유리문들과, 2층에 줄느런한 창문들이 외부의 햇빛과 거리 풍경을 안으로 끌어들인다. 덕분에 오밀조밀해서 갑갑해 보일 수 있는 내부 구조에 생기가 돋는다. 주로 직선과 사각의 연쇄로 이어진 공간이라는 점도 우리의 전통 건축과 다른 걸 알 만하다. 가늘고 날렵하게 깎아 세운 사각기둥, 널빤지로 마무리한 벽면과 천장, 다다미방, 중정에 조성한 작은 정원…. 곳곳에서 일본식 작풍이 느껴진다. 독특하기론 원래의 용도대로 지금도 여전히 여관과 찻집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공연장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이기도 하다. 단순히 관람만 할 수 있는 여느 근대 건축유산과 달리 보성여관은 실제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보성여관은 조정래의 밀리언셀러 대하소설 ‘태백산맥’에 ‘남도여관’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조정래는 성장기 한때를 벌교에서 살았다. 벌교의 변천사와 벌교 사람의 희로애락에 밝다. 그래 ‘태백산맥’에 벌교의 지형지물과 풍속과 인물을 끌어들여 리얼하게 묘사하곤 했는데, 보성여관은 그중 한 곳이다. 거장의 소설에 출연한 보성여관의 운세는 별안간 환하게 열려 드라마틱한 상승을 하기에 이르렀다. ‘글 감옥에 갇혀 살면서도 황홀하다’는 조정래의 치열한 문학정신까지 더듬어보게 하는 명소로 부상했으니까. 보성여관만이 아니다. 벌교읍이 통째 ‘태백산맥’의 아우라에 힘입어 활기를 띠게 됐다. 답사객들이 밀려들면서였다. 조정래의 문학 장정과 작품세계를 알아볼 수 있는 ‘태백산맥문학관’이 건립되고, 덩달아 ‘태백산맥 문학기행 코스’도 마련되면서 문예적 공기마저 감도는 곳으로 변했다. 소설 한 편이, 잘 보존된 근대 건축물이, 고즈넉했던 지방 소읍을 생동감 넘치는 문화지구로 바꿔놓은 셈이다. 참 아름다운 숲속의 정자, 열화정 이제 조선 고택을 만나기 위해 강골마을로 접어든다.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에 있다. 강골마을은 원래 바닷가 마을이었다. 마을 뒤편으로는 야트막한 산들이 펼쳐지고, 자연이 연주하는 원초적 선율에 다름 아닌 파도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리던 곳이었다. 그러다 간척사업으로 바다가 저 멀리로 밀려났다. 하지만 강골마을은 여전히 수려하다. 풍수지리상 길지라고 한다. 그러니 눈 밝은 옛사람들의 정주가 필연이었겠지. 이곳엔 ‘이진래 고택’과 ‘이정래 고택’이 있다. ‘이준회 고택’도 있다. 보성 지역 사대부 가문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구현한 셋 모두 국가지정문화재다. 마을 뒷산 초록 풀숲엔 살포시 감춰진 듯 조붓한 길이 하나 있다. 섬려한 발길을 기다리는 오솔길인가? 바닥에 희고 미끈한 박석들이 깔려 있다. 이윽고 길 끝에서 열화정(悅話亭)이 모습을 드러낸다. 숲속에 묻혀 사는 은자처럼 평온한 정자다. 아름다워 첫눈에 매혹될 수밖에 없는 작은 집이다. 협착한 산골짝에 걸맞은 크기라서 조화롭다. 조선 후기 문신 이진만이 지은 정자로 앞면 4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자연석을 쌓아 올린 기단 위에 사뿐히 올라앉은 정자다. 덤벙 주춧돌 위에 세운 둥근기둥, 누마루와 쪽마루와 툇마루, 기능성을 고려해 배치한 방들, 방과 아궁이를 연결하는 작은 쪽문 등 고수의 배합 솜씨가 능란하다. 숲은 초록 일색이다. 여름으로 가는 나무들이 토하는 저 초록빛 아우성이라니. 실바람 한 뭉텅이에도 서슴없이 설레어 몸을 흔드는 꽃들, 잎사귀들. 식물들의 희열과 자유를 이해할 만하다. 열화정 주인은 이 청산에 묻혀 나무처럼 살고 싶었나? 속세의 탐욕과 광기를 밀어내며? 세상과 절연하고 싶은 심정일 때 의지할 곳은 자연이다. 김현진 보성문화원 원장 ‘막걸리 페스티벌’로 한국을 쩡쩡 울려보겠다! 보성은 예로부터 산·바다·호수를 일컫는 3경(三景)과 의향·예향·다향을 뜻하는 3보향(三寶鄕)의 고장이라 불렸다. 김현진 보성문화원 원장에게 보성의 문화에 관해 이모저모 얘기를 청해 들었다. “먼저 바로잡고 싶은 것이 있다. ‘벌교에 가서 주먹 자랑하지 마라’는 말에 관해서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말인데, 보성 땅 벌교가 마치 주먹으로 위세를 떨치는 이들이 많은 고장인 양 엉뚱한 오해를 초래했다. 팩트는 그게 아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순사가 벌교장에서 아낙을 희롱하는 것을 보고 안규홍 의병장이 일본 순사를 한주먹으로 때려눕힌 사건에서 유래한 말이니까.” 보성은 항일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펼친 고장이다. 보성군은 의병장 안규홍의 동상과 ‘황금주먹’ 조형물을 만들어 설치했다. 사실관계를 외부에 알려야 할 필요를 느껴서인 것 같다. 흔히 가치 있는 근대 건축유산들이 속절없이 사라지거나 망가졌다. 반면 보성여관은 원형 훼손 없이 잘 보존됐다. 그 배경이 있다면? “보성 사람들은 일찍부터 보성여관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인식하고 소중하게 여겼다. 심지어 개발 바람이 거셌던 새마을운동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2008년 문화재청이 매입해 관리에 나섬으로써 안전한 보존 조건을 확보하게 되었다.” 지자체마다 문화원의 역할도 그만큼 커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문화원의 존재감을 실감하지 못한다. 왜 그렇다고 보나? “아쉬운 대목이다. 문화원은 역사와 전통을 지닌 단체지만 혁신에 소홀하다. 침체를 털어내고 이미지를 제고해야 하는데 잘 구현되지 않고 있다. 문화원은 지역의 문화를 담는 그릇이다. 그렇다면 콘텐츠 개발을 통해 그릇을 채워야 하는데 여전히 구습에 안주하는 경향이 있다.” 7년째 보성문화원 원장직을 맡고 있다. 그간 거둔 성과를 소개한다면? “새로운 문화 콘텐츠를 개발하고 프로그램을 새롭게 디자인하고자 노력했다. 내심 전국 최고의 문화원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뛰었다. 그러자 성과가 나오더라. 다양한 문화 테마를 설정, 내실 있는 운영을 하자 주민들이 뜨거운 호응을 보내줬다. 보성문화원은 이미 주민들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 셈이다. 보성문화원을 통해 문화를 일상적으로 향유하는 주민들이 늘어났다. 청년층의 동참도 적극적이다.” 보성군은 ‘서편제보성소리축제’로 2022년부터 2년 연속 ‘대한민국축제콘텐츠대상’을 받았다. 김 원장은 내년에 흥미로운 축제 하나를 개최할 계획이다. 전국의 모든 막걸리와 국악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막걸리 페스티벌’을 열어 ‘한국을 쩡쩡 울려보겠다’는 것.
- 2023-06-09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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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와 옛집 체험어때요?”… 서울 시민 생활 변천사 한눈에
-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70여 년간 서울은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며 빠르게 도시화했다. 끊임없이 서울로 사람들이 몰려들자 서울은 주택 부족에 시달렸다. 주택난 해결을 위해, 또 더 쾌적한 주거 환경 조성을 위해 도시의 모습과 집은 바뀌어 갔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서울 시민들의 생활 모습 역시 달라져 갔다. 서울역사박물관(관장 김용석)은 해방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서울에 지어졌던 다양한 집의 형태, 서울시민의 생활 변화를 들여다보는 전시 ‘서울살이와 집’을 마련했다. 오는 11월 4일(금)부터 내년 4월 2일(일)까지 서울생활사박물관 4층 기획전시실에서 개최된다. 이번 전시는 2021년 서울생활사조사연구 ‘서울시민의 주생활’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기획됐다. 1부 ‘서울, 서울사람, 서울집’, 2부 ‘서울사람들은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살아왔을까’, 3부 ‘서울사람들이 살고 싶은 집’ 등의 주제로 구성됐다. 1부 ‘서울, 서울사람, 서울집’에서는 서울 시역의 확장, 서울로 집중되는 인구로 복잡해진 서울의 모습과 부족해진 집을 짓기 위한 다양한 정책들, 생활의 변화를 야기한 제도와 가구 및 가전의 등장을 연표와 정보 그림(인포그래픽)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2부 ‘서울사람들은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살아왔을까’에서는 서울의 다양한 집들 중 대표적인 도시형 한옥, 재건주택, 2층 슬라브양옥, 아파트라는 4종류의 집을 소개했다. 각 집의 안과 밖의 모습, 그 안에서 살아가는 서울시민의 삶을 영화와 미술작품, 실제 크기로 재현된 연출 공간으로 체험할 수 있게 구성했다. 2부에서 활용한 영화는 박종호 감독의 ‘골목 안 풍경’(1962)로, 성북동의 어느 도시형 한옥과 그 안에서 이뤄지는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안암동 재건주택의 모습은 당시의 평면도를 바탕으로 실제 크기로 재현‧연출한 공간을 체험케 한다. 한형모 감독의 ‘돼지꿈’(1961)이라는 영화를 통해 비슷한 후생주택 생활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이후 1970년대에 많이 지어졌던 2층 슬라브양옥을 소개하는 곳에서는 안민정 작가의 ‘우리 집 세부도’(2015)라는 작품을 통해 그 시절 셋방살이의 모습을 느껴볼 수 있다. 또한 전시는 1970년대 중후반에 준공된 13평의 잠실시영아파트가 실제 크기로 구현돼 당시 공간을 재현 및 연출했다. 당시 잠실시영아파트에 살았던 서울시민의 이야기를 인터뷰 영상과 사진으로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3부 ‘서울사람들이 살고 싶은 집’에서는 기본적인 삶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집을 원하던 사람들이 점차 집 자체의 재화적 가치에 집중하게 된 모습들을 광고 키워드의 변화로 살펴본다. 또한 코로나19 이후, 집 안에서 일어나는 생활상의 변화가 우리가 살고 싶어하는 집의 모습까지 바꾸고 있다는 점을 설문조사의 결과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김용석 서울역사박물관장은 “1950년대 말 그리고 1970년대 말의 어느 평범한 서울사람의 집이 재현된 공간에서, 그때 그 시절 방의 크기와 집 안의 모습을 통해 당시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라며 “가족들과 함께 조부모, 부모가 살았던 옛 집을 회상하며 시간 여행을 다녀오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관람 시간은 평일 및 주말 모두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다. 공휴일을 제외한 월요일은 휴관이다. 자세한 정보는 서울생활사박물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 2022-11-02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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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화하는 수원, 매교동 역사 통해 한눈에
- TV나 유튜브를 통해 ‘1970년대 서울’과 같이 대한민국의 옛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 영상을 보면 ‘그땐 그랬지’,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가 있었구나’라며 감회에 젖는다. 현재 수원시에서는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알 수 있는 ‘매교동’ 전시가 열리고 있다. 매교동은 수원의 중앙에 있는 마을로 대한민국의 변천사를 겪은 곳이다. 수원시에서 관광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행궁동. 그 인근에 ‘수원 구 부국원’(富國園)이라는 곳이 있다. 붉은 벽돌의 외관은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건물임을 짐작케 한다. 100년 넘은 이 건물은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부국원이란 일제강점기에 일본 사람들이 만든 종자회사를 말한다. 수원 구 부국원은 해방 이후 관공서, 병원, 인쇄소 등으로 운영되다가, 현재는 역사를 배울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이곳에서 ‘매교동’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구 부국원 1, 2층에는 매교동의 사진과 영상 자료가 가득하다.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비교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건물, 도로,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옷차림 등의 변화를 알 수 있다. 매교동은 수원의 번화가로 꼽히는 수원역과 인계동 사이에 있다. 수원의 중앙에 위치하며 수원천을 끼고 있어 과거에는 활기 넘치던 곳이었다. 그러나 산업의 발전과 다른 곳들이 개발되면서 올드타운이 됐다. 노후 다세대·다가구주택뿐만 아니라 철물점, 공구상, 인력사무소 등이 많은 곳이었다. 현재 매교동은 재개발로 또다시 변화를 앞두고 있다. 오는 7월부터 1만여 가구가 입주해 아파트촌으로 탈바꿈할 예정이다. 이러한 때 시기적절하게 전시가 열리니 묘한 기분이 든다. 매교동만큼 수원에서 변화가 많았던 곳이 있을까. 매교동은 대한민국의 변천사를 고스란히 겪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시를 보면 수원시를 넘어 우리나라의 발전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매교동은 조선시대 정조대왕이 화성 신도시를 건설한 후 형성되기 시작했다. 옛 국도 1호(현재 정조로)와 수원천이 가로질러 마을이 동쪽과 서쪽으로 분리됐지만, 오래전부터 매교동 주민들은 수원천을 매개로 하나의 생활권을 이루며 살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수려선 철도가 마을을 통과하면서 주거지가 작게 형성됐고, 1960년대 들어 도시 규모가 커지면서 시가지로 변모했다. 1971년에는 매교시장이 들어섰고, 1973년에는 수려선 철도가 철거됐다. 1977년 수원천 제방이 축조되면서 매교동은 한결 안전한 마을로 거듭났다. 1980년대에는 마을 곳곳에 주택과 편의시설이 들어섰고, 산업화와 함께 ‘공구상가’가 번영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동수원 지역이 개발되면서 매교동은 다소 정체됐고 낙후된 주택단지라는 인식이 강해졌다. 그러나 앞서 얘기한 대로 2000년대 들어 도시 재생과 재개발 사업이 이뤄지면서 매교동은 활기를 되찾았다. 과거처럼 다시 중심지가 될 수도 있다. 전시는 △1973년, 옛 1번 국도를 따라서(매교동을 관통하는 옛 국도 1호의 모습이 담긴 영상) △매교동 사람들(과거 매교동 주민들의 추억이 담긴 사진) △매교동의 변천 과정(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매교동의 역사를 기록한 사진) △매교동 풍경(매교동 옛 사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 전시는 수원시의 16번째 마을지 ‘매교동’ 발간 기념으로 개최됐다. 수원시 도서관·박물관 등에서 볼 수 있다. 전시는 6월 30일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매주 월요일·법정 공휴일은 휴관하며, 화~일요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6시(입장 마감 오후 5시 30분)까지 관람 가능하다.
- 2022-04-08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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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노멀의 백년가약⑥ 허니문 변천사
- 허니문 트렌드가 레트로를 맞이했다. 해외여행이 어려워지면서 국내로 발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혼주인 시니어들은 젊은 시절 울릉도와 제주도, 지리산 등 내륙과 섬을 가리지 않고 국내로 신혼여행을 많이 떠났다. 추억에 잠길 수 있는 국내 허니문의 변천사를 돌아보고, 자녀에게 추천할 수 있는 이색 허니문과 여행지를 소개한다. 20세기 초반까지 혼인은 개인의 결합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지 발전을 위한 공동의 행사였다. 당시 신혼부부를 ‘가문’이란 공동체로부터 일시적으로 분리하는 신혼여행은 상당히 낯선 개념이었다. 일부 상류층이나 개화한 지식인들이 하는 낯선 선택으로 받아들였다. 기록에 따르면 1920년에 결혼식을 올린 신여성 화가 나혜석이 신혼여행 도중 자신의 첫사랑 무덤 앞에 가서 비석을 함께 세워주었다고 전해진다. 본격적인 신혼여행은 1960년대부터 시작됐다. 1960~70년대에는 결혼식을 마친 후 승용차를 타고 주변 관광지를 둘러보거나 호텔에서 1박을 하는 신혼여행 형태가 등장했다. 이 무렵부터 서울의 남산은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에 사진을 찍는 대표적 명소였다. 당시 인기 있던 신혼여행은 아산 온양, 대전 유성 등의 온천에서 휴양을 즐기거나 지리산 같은 산에 머물다 오는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제주도 신혼여행의 항공료와 호텔 숙박비는 일반적인 신혼부부가 감당하기 어려운 고가였다. 1980~90년대는 신혼여행의 르네상스였다. 1983년 제주공항이 지금의 모습을 갖췄고, 당시 신혼부부를 대상으로 제주도 왕복 항공료 및 호텔 가격 인하 등 혜택이 많아서 신혼여행으로 제주도를 많이 갔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가 시작되면서 1990년대부터 해외로 신혼여행을 많이 갔다. 초기에는 우리나라와 근접한 대표적 휴양지인 태국, 필리핀, 괌, 사이판 등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이 인기 지역이었다. IMF 이후 환율이 급등하면서 한동안은 국내로 신혼여행을 많이 갔다. 이후 경기가 좋아지면서 다시 해외로 많이 나갔다. 박부진 명지대학교 아동학과 명예교수는 “신혼여행 문화는 각 시대의 결혼관과 남녀에 대한 인식 등 관념적 차원의 조건과 삶의 물리적 환경을 형성하는 사회경제적 조건 등이 반영된다”라고 말했다. 국내 관광지로 회귀…이색 허니문 등장 코로나19 이후 국내 여행지가 허니문 장소로 떠오르고 있다. 울릉도와 제주도 등 전국의 관광 명소가 신혼여행지 후보로 부상했다. 특히 제주도 신혼여행이 많았다. 호텔신라에 따르면 제주신라호텔의 경우 지난해 6월 스위트 허니문 패키지 예약 건은 같은 해 3월 판매량의 5배에 달했다. 이 중 3박 이상의 투숙객이 전체의 45%를 차지했다. 호텔신라 관계자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해외여행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예비 신혼부부들이 제주도로 본격적인 허니문을 떠나며 3박 이상의 장기 숙박 고객이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허니문과 웨딩을 함께 하는 곳도 생겨났다. 올해 3월 파라다이스시티는 ‘트립 투 웨딩’(Trip to Wedding) 프로모션을 선보였다. 파라다이스시티는 웨딩 스냅 장소와 예식 당일 숙박이 가능한 객실을 함께 제공했다. 지난 3월 예약 고객 선착순 일곱 커플을 대상으로 2박 3일간 이용 가능한 130만 원 상당의 ‘마이 스위트 허니문’ 패키지를 선보였다. 결혼식을 마친 커플은 디럭스 스위트 객실에서 최상의 휴식을 누리며 호텔 셰프가 준비한 스페셜 메뉴와 필리조 앤 필스(Philizot&Fils) 샴페인 파라다이스 에디션을 ‘인 룸 다이닝’ 서비스로 즐기는 패키지였다. 이색 허니문도 등장했다. 대표적인 예가 캠핑카 허니문이다. 야놀자의 자료에 따르면 올해 1, 2월 기준 야놀자의 글램핑 및 카라반 거래액은 지난해 동기와 비교해 300% 신장세를 보였다. 캠핑카가 워낙 고가라서 구매보다는 대여가 낫다. 실제로 캠핑카 공유업체 ‘캠핑쉐어’는 허니문 캠핑카를 선보였다. 대여료는 4박 5일간 120만 원이며, 집 앞으로 차를 보내준다. 추가 요금을 내면 웨딩카 장식을 해준다. 다른 도시에서 반납해도 된다. 코로나 시대의 이색 허니문으로 무착륙 관광 비행도 괜찮다. 최근 아시아나항공은 새로운 형태의 ‘A380 무착륙 관광 비행’을 선보였다. 해외로 떠난다는 여행 느낌을 살리기 위해 각국 관광청과 협력해 스페인, 호주 등 국제 여행 콘셉트를 살린 관광 비행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국제선 운항인 만큼 탑승객은 여권을 지참해야 하며, 아시아나항공 기내 면세점을 비롯해 인천공항 면세점과 시내 면세점 이용이 가능하다. 아시나아항공 관계자는 “땅을 밟을 수는 없지만 잠깐의 비행을 통해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기를 바라며 만든 프로젝트다”라고 설명했다. 허니문 추천 국내 여행지 거제도 ▶ 드넓은 남해를 끼고 잘 정비된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그리스 산토리니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지도 모른다. 학동에서 와현 해안도로까지 이어지는 17.3km 구간은 수려한 경관으로 유명하다. 외도 보타니아는 이국적인 모습을 한 해상식물공원으로 둘만의 인생 사진을 남기기에 좋다. 삼척 ▶ 바닷가 언덕에 자리한 ‘나릿골’ 마을은 낡고 허름한 옛날 건물에 알록달록한 색을 입히고, 전망대, 미술관 등을 마련해 작은 테마파크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서핑을 좋아하는 신혼부부라면 서프키키해변을 추천한다. 맑은 바닷물은 물론이고 샤워장, 강습 프로그램 등이 잘 갖춰져 있어 서핑족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여수 ▶ 가볍게 산책하며 야경을 감상하는 것은 놓치지 말아야 할 경험이다. 이순신광장부터 종포해양공원, 하멜등대까지 이어진 코스는 반짝반짝 빛나는 도시와 바다가 연출하는 낭만적인 야경을 선사한다. 낮에는 돌산공원과 돌산대교에서 해상 케이블카를 타고 여수의 아름다운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 2021-07-2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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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 길 가다 만난 나무처럼, 맑은 고을 청주(淸州)
- 숨 고르기가 필요할 때다. 막연하게 이 시절이 지나가기만 기다리고 있기에는 투명한 햇빛이 너무 눈부시다. 팍팍한 일상에 느낌이 있는 시간이 언제였나. 마음을 채우고 자신을 살펴주는 일을 잠깐 잊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 지도 중심부에 자리 잡은 교육의 도시 청주, 수도권은 물론이고 전국 어디서든 교통과 지리적 접근성이 좋아 하루쯤 후딱 달려가 볼 수 있는 예쁘고 단아한 도시, 무심한 듯 알찬 쉼과 여유로움이 가능하다. 도시지만 시끌벅적하지 않아서 좋다. 한가한 한낮이라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귀하게 시간을 누려야 하지 않을까. 국립현대미술관은 서울, 과천, 덕수궁, 청주 이렇게 네 곳에 있다. 한때 연초제조창이었던 넓은 부지를 2018년 12월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으로 오픈했다. 예전의 담배공장이 그 모습을 뒤로하고 이렇게나 멋진 미술관으로 탈바꿈하다니 놀라울 수밖에. 국내 최초의 수장형 미술관이다. 총 5개 층으로 구성된 전시관을 보려면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주말엔 현장에서 수시 입장도 가능하지만 인원 제한이 있다. 그렇지만 여기선 기다리는 시간도 즐거움이다. 모던한 미술관 앞의 넓은 잔디광장을 거닐거나, 벤치에 앉아 바람과 햇살의 평온함을 누리는 것도 이곳에서는 특별하다. 잔디밭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에게 미술관은 재미있는 곳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미술관 옆으로 이어진 건물에 핫한 초대형 베이커리 카페가 있어서 잔디광장을 내다보며 느긋하게 맛있는 시간도 가질 수 있다. 소통하는 수장고,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미술관은 5층 기획전시실, 4층 특별 수장고(미술은행 소장품), 3층 개방 수장고 및 라키비움, 보존처리실, 2층 보이는 수장고 및 관람객 쉼터, 1층 로비 및 수장고, 프로젝트 영상, 아트존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미술관의 소장품을 보관하는 비밀스러운 공간인 수장고, 그곳에 관람객이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도록 공개하여 ‘개방’과 ‘소통’을 위한 ‘열린’ 미술관을 지향한다. 덕분에 백남준, 이중섭, 배병우, 김세중, 니키 드 생팔 등 뛰어난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엄청난 예술 작품들의 위용에 압도되어 처음에는 마구 흥분된다. 미술관을 충분히 둘러보고 나면 상상력을 자극받고 알 수 없는 위로와 풍성함으로 뿌듯해진다. 평일 한낮에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도심에 이렇듯 품격 있는 미술관을 품고 있는 청주 시민들이 부러워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입장료가 무려 무료다.) 미술관 바로 옆으로 나가면 1960~70년대 한국 산업화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는 옛 청주 연초제조창의 담뱃잎 보관 창고였던 7개 동이 시민 문화예술 공간으로 재탄생한 동부창고다. 그 시절 청주와 인근에 사는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졌던 청주의 대표적 산업체였다. 이제는 보존 가치가 높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시민들에게 열려 있는 문화 공간이다. 그 뒤편의 미로처럼 경사진 골목으로 올라가면 드라마 촬영지로 SNS에서 유명세를 치렀던 청주의 마지막 달동네 벽화마을 수암골이다. 그들과 함께한 역사, 무심천과 상당산성 청주를 감싸고 있는 상당산성으로 가는 길에 도심을 동서로 구분하는 예쁜 물길 무심천에서 문득 브레이크를 밟는다. ‘마음을 비운다’는 뜻의 무심천은 봄이면 벚꽃이 눈부시고, 시민들의 산책로이자 휴식처이기도 하다. 언젠가 이곳 출신인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속에서 청주 무심천을 건너는 풍경이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있다. 청주를 품고 있는 상당산성 앞에 서면 길게 이어지는 성벽과 함께 계절의 푸르름에 가슴이 뻥 뚫린다. 백제 시대 방어 시설로 처음 축성되어 조선 시대에 개축된 상당산성은 면적 12.6ha, 둘레 4,400m, 높이 4.7m, 사적 제212호다. 산성마다 나름의 역사나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이 길은 과거 영호남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이었다고 한다. 역시 드라마 ‘태왕사신기’가 자연스러웠던 풍경이다. 그 견고한 성벽길을 걸어보자. 완만한 4km 순환형 둘레길이어서 아이를 데리고 천천히 걸어도 좋고, 가벼운 트레킹 코스로도 더할 나위 없다. 이 길을 걸으며 만날 수 있는 다양한 풍경이 청주를 알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분명 도심 속의 산길인데도 확실히 도심을 벗어났다는 기분이 든다. 걷기에 따라 1~2시간 정도 길이다. 지난 4월엔 이달의 추천길로 선정되었다. 자연 속으로, 운보의 집 이제 나들이하듯 가까운 근교로 잠깐 나가본다. 청주 시내에서 자동차로 20분 정도 거리에 ‘운보의 집’이 있다. 동양화가 운보 김기창 화백은 어릴 적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로 청각을 상실했지만 타고난 재능과 노력으로 화가로서의 역량을 나타냈다. 특히 아내 박래현 화가와의 러브스토리는 전설적이다. 운보의 집이 위치한 청원구 내수읍은 김기창 화백 어머님의 고향이다. 마음의 고향 같은 이곳에 정착하여 노후를 보냈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작품 활동에 전념했던 곳이다. 전통 한옥으로 안채와 행랑채, 비단잉어가 노니는 연못에 정자와 돌담이 운치 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미국 대사관 건물이었던 곳이기도 하다. 아내 우향 박래현 화가의 작품이 함께 전시된 산 아래 운보미술관은 규모가 제법 크다. 미술관을 둘러싼 야외 정원의 조각 작품이나 수석은 자연 속에서 품격을 더한다. 멋스러운 문화예술 공간이다. 부부인 듯 점잖은 커플이 뒷짐 지고 작품에 몰두하는 모습을 본다. 두 분의 뒷모습이 여유롭고 아름답다. 그들을 앞지르기 조심스러워 그림 앞에서 한참씩 걸음을 멈추곤 했다. 비로소 주변을 바라보고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예술가의 작품에서 따뜻한 위로를 선물받는 기분이다. 100년 전의 옛 청주역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는 청주에 청주역이 있었다. 청주시청 부근의 옛 청주역이 ‘옛 청주역사공원’으로 복원된 것이다. 도심 속의 일반적인 공원이 아닌 철도공원이다. 기차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설렘이 생긴다. 교육도시 청주답게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기차역으로 달려오는 풍경이 와락 연상된다. 아담한 역사(驛舍)가 자그마한 옛날 국민학교를 연상케 한다. 민트 색감의 창틀이 옛 느낌을 더한다. 주변 풍경마저 옛 건물들로 즐비하다. 문이 닫힌 시간에 들렀기에 청주의 역사와 과거의 모습이 전시된 내부는 보지 못했지만 옛 청주역의 바깥 풍경만으로도 시간여행을 한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역 광장에 서니 추억의 흑백 필름이 휙휙 지나간다. 어쩐지 가슴 뭉클하는 순간이다. 고품격의 전시, 청주고인쇄박물관 문화도시 청주다. 예향(藝鄕)이라 할 만큼 문화자원이 풍부하고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많다. 또한 20년 넘도록 비엔날레를 개최하고 있다. 숲으로 둘러싸인 고인쇄박물관을 빠뜨릴 수 없다. 1377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을 간행한 고장이다. 독일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78년이나 앞섰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기억해야 할 긍지다. 청주고인쇄박물관, 흥덕사지, 금속활자 전수교육관을 순서대로 돌아보면 된다. 본관의 1, 2, 3관과 쉼터, 홍보영상실. 귀중한 소장 자료가 전시되어 있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위대한 역사의 순간을 느껴볼 수 있다. 금속활자부터 목활자까지 변천사와 ‘직지심체요절’이 지니는 깊은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고려 공민왕 시절에 세워진 직지의 요람인 흥덕사, 인쇄 문화의 이해를 높이는 금속활자 전수교육관이 함께 있어서 차례대로 둘러보며 직지의 위상을 비로소 깨닫는 시간은 소중하다. (2001년 9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아직도 둘러볼 곳이 많은 청주다. 미호천변의 성곽 정북동 토성은 요즘 일몰 때 멋진 실루엣을 찍기 위해 사진가들이 찾아든다. 템플스테이와 석가모니 진신사리로 유명한 사찰 용화사, 역대 대통령들의 여름 휴가지이자 대청호반의 산책로 청남대, 로하스 해피로드 대청호 오백리길, 세종대왕이 한글 창제 마무리와 안질 치료를 위해 머물렀다는 초정행궁(椒井行宮), 청주 역사의 산증인 성안길, 청주만의 맛집 삼겹살거리, 사람 냄새 물씬한 전통시장 육거리시장, 점점 핫해지는 감성 가득한 운리단길… 곳곳이 감성 넘치는 핫 스폿이다. 잠깐 두리번거리면 보물찾기처럼 다가갈 곳이 나타났다. 시종일관 흥미롭고 은근히 끌렸다. 마음도 말랑해지고 행복지수도 높아진다. 기댈 곳 없어 혼자 우두커니 서성일 때 어쩌다 하루쯤 떠났다가 결핍을 채우고 흐뭇하게 돌아올 수 있다. 이곳 청주 출신 도종환 시인이 그의 시 ‘동행’에서 말했듯 ‘먼 길 가다 만난 나무처럼 / 지친 몸 기대게 해줄 푸른 그늘 있다면’ 그럴 때 떠올려보는 곳, 맑은 고을 청주.
- 2021-07-10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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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노멀의 백년가약, 브라보 마이 라이프 7월호 발간
- MZ세대와 뉴노멀의 등장, 코로나 팬데믹으로 결혼문화도 크게 바뀌고 있다. 애지중지 키운 딸과 아들이 결혼 이야기를 꺼내면 시니어들은 걱정부터 앞선다. 결혼 준비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부터 자녀가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지까지…. 요즘 젊은이들은 자립심이 강해 스스로 준비한다고 하지만 현실은 부모의 경제적 지원에 의존하는 이들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부모가 자녀의 결혼을 모른 척하고 싶어도 모른 척할 수 없는 셈이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7월호는 커버스토리에서 코로나19로 소규모‧고급화하고 있는 ‘2021 웨딩 트렌드’와 자녀를 품에서 떠나보는 과정에서 빠질 수 없어 알아두면 좋을 ‘혼주 에티켓’을 소개한다. 또 자녀 결혼에 필요한 예물과 혼수, 신혼집 마련에 필요한 꿀팁에 허니문 변천사도 알려 준다. 평생 화두 ‘동반성장’ 의지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상생 염원을 담은 오톨도톨한 점자혼용 명함을 제시하는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을 표지와 기사로 만날 수 있다. 정 이사장이 들려주는 참 좋은 시절, 그때는 그랬지 추억 속 이야기에 빠져보면 어떨까. 한줌의 늦깎이 역사 소설가 오세영 씨는 데뷔작 '베니스의 개성상인'에서 '자산어보'로 돌아왔다. 역사란 퍼즐의 이음새를 자신만의 결로 다듬어 모나지 않은 그림으로 완성할 때 보람을 느낀다는 그를 만나 북인북 코너를 구성했다. ‘경북 최대의 농지 면적과 적극적인 귀농귀촌 정책을 완비한 상주시’를 가보고 싶은 귀농귀촌 우수 지자체로 소개한다. 오래전부터 쌀, 누에, 곶감의 도시로 유명한 상주시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 농업 도시로서 확고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 농업 혁신 도시로 전환을 꾀하고 있는 상주시의 귀농귀촌 여건과 정책 지원 현황을 파악할 수 있다. 구해줘 부동산에서는 ‘아파트 말고 꼬마빌딩으로 노후준비’를 이야기한다. 대출 규제와 고강도 중과세, 집값 상승으로 부동산 시장의 흐름이 바뀌고 있다. 아파트 말고 빌딩을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빌딩 선호 추세가 만들어지고 있다. 최근 빌딩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는 꼬마빌딩이 궁금한 독자를 위한 알찬 내용이 담겨 있다. 슬기로운 보험생활에서는 기존 가입 보험의 숨은 기능을 활용할 수 있는 ‘보험 리모델링’을 소개한다. 보험 리모델링은 보험 가입 구조나 기능 개선을 통해 위험관리의 가치를 올리는 행위다. 시니어들을 보험 리모델링에 따라 노후 의료비를 대비가 달라질 수 있다. 1985년 강변가요제에 발표돼 선풍적 인기를 끈 노래가 있다. 임석범과 김복희가 마음과 마음이라는 듀엣으로 부른 ‘그대 먼 곳에’가 주인공이다. 36년이 지난 지금도 아내와 함께 마음과 마음을 이끌며, 음악과 라이브 카페, 유튜브까지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는 임석범을 만났다. 이 외에도 브라보 마이 라이프 7월호는 꿈에서라도 함께 살아보고 싶었던 첫사랑 이야기를 담은 브라보 마이 러브, 명나라 고관 대작의 집에서 벌어지는 운우지락이 그려진 중국 춘화 이야기를 담은 재미있는 性인문학, 고급 취미에서 재태크로 변신하고 있는 아트테크를 소개한 생활 속 법률 상식, 차려 먹지 않아도 알아서 찾아오는 장수 밥상을 알려주는 이달의 구독, 먼 길 가다 만난 나무처럼 맑은 청주(淸州)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느린 여행, 닭과 전복을 활용한 이색 보양 레시피를 담은 엄마가 엄마에게 같이 시니어들이 재밌고 알차게 즐길 수 있는 내용을 가득 실었다. 시니어 전문 매거진 ‘브라보 마이 라이프’ 7월호는 전국 서점과 인터넷에서 구매할 수 있다.
- 2021-06-30 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