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의 노포 열풍은 박찬일(58) 셰프의 솜씨 덕을 톡톡히 봤다. 오랜 식당 나이 든 주인의 변치 않는 손놀림을 세상에 퍼 올린 지난 10년 사이, 노포는 낡은 식당에서 맛과 문화의 정수로 변모했다. 이제 노포의 매력을 깨달은 사람들은 그가 짓는 글을 안내서 삼는다. 오래된 것은 훌륭하고, 훌륭하기에 오래됐다고 믿는 음식 기행문에는 사람 냄새가 짙다.
박찬일 셰프는 글 쓰는 요리사다. 글의 중심부에는 오래된 것에 대한 애정이 자리한다. 10년이라는 긴 시간을 노포를 취재하고 기록하는 일에 썼다.
박찬일의 화법은 담백하되 긴 여운을 남긴다. 해장국 한 그릇이면 역사에 참여할 수 있다고 추켜세운다.(‘해장국은 역사의 음식이다. 우리는 청진옥 해장국 한 그릇을 먹으면서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더 이상 어떤 평이 필요한가.’ -책 ‘내가 백년식당에서 배운 것들’ 중) 서서갈비에 대해선 드럼통이 K-고깃집 테이블이 된 과거와 ‘커뮤니티 테이블’이라는 최신 개념의 원형이라는 현재를 한데 묶는다.(‘최대 여섯 팀이 이 드럼통을 놓고 화덕에 고기를 구웠다. (중략) 고기가 섞이기도 하고, 먼저 익으면 다른 손님들에게 고기를 밀어주기도 했다. (중략) 그야말로 요즘 유행한다는 ‘커뮤니티 테이블’의 진정한 원형인 셈이다.’ -책 ‘내가 백년식당에서 배운 것들’ 중)
노포(老鋪)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없다. 원래 잘 쓰지 않는 단어였고, 선구자나 다름없는 그 역시 같은 한자 언어권인 일본에서 넘어온 단어가 아닐까 추측하는 정도다. 다만 그가 노포를 바라보는 시선은 한결같다. 오래됐기에 훌륭한 가게다. 뒤집어도 참이다. 훌륭하기에 오래될 수 있었을 것이므로. 또한 존경받아야 할 곳이다. 노포의 ‘노’에는 ‘오래되다’는 뜻도 있지만 ‘존경한다’는 뜻도 있으니까.
오래돼서 훌륭한, 훌륭해서 오래간
당연하게도 노포의 매력은 음식이다. 음식이 맛있어야 식당이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식당은 내부가 세련됐어도 맛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마련이다. 반면 오랜 식당에는 정서와 추억이 벽면을 가득 채운 낙서처럼 남아 있다. 게다가 팝스타 마돈나가 스테이크를 썰던 레스토랑,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술 한잔하던 카페라면? 그런 식당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애당초 그의 취재는 중년의 흥미로부터 시작됐다. ‘부모님과 함께 갔던 식당 중 아직 남아 있는 곳을 글로 정리해보자.’ 부원면옥이나 하동관이 그랬다. 오래된 식당이 문 닫기 전에 글로 남겨야겠다는 결심이 굳어졌고, 취재는 10년 넘도록 이어졌다. 거절당해도 몇 번이고 찾아가 인터뷰를 청하고, 지인을 총동원하곤 했다. 책 ‘백년식당’, ‘노포의 장사법’, ‘내가 백년식당에서 배운 것들’ 등은 이렇듯 어렵사리 세상에 등장했다.
그는 노포 예찬론자지만 노포가 곧 선(善)이라 말하지 않는다. 주인이 지나치게 이윤을 추구해서는 안 되며, 겸손해야 하고, 식당이 깨끗해야 한다. 취재를 위해 찾았다가 그냥 나온 적도 많다. 노포 찾아 삼만 리, 전국을 누비다 보니 공통점이 추려졌다.
“책에 적어둔 그대로예요. 일단 음식이 맛있죠. 주인은 자신이 파는 음식을 매일 먹어요. 주인이 직접 일하는 거죠. 직원은 사장 못지않게 오래 일합니다. 노포는 단골손님의 경력도 오래됐어요. 그 덕분에 처음 방문한 손님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암호 같은 주문법이 있습니다. 또 단순한 원칙을 오래도록 지켜오고, 거래처를 잘 바꾸지 않는 것도 공통점이죠. 하나 더, 정확한 개업 햇수를 잘 모릅니다. 식당 일을 천하고 힘든 것으로 생각했고, 노포에 대한 인식도 부족했으니까요.”
평양냉면 식당 우래옥의 김지억 전(前) 전무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처음 일할 때 아는 이라도 오면 숨었어. 여관, 술집, 밥집 하는 이, 어디 사람 취급했나.” 2000년대 이후 미식을 즐기는 문화가 일상이 되고, 주방장은 ‘셰프님’이라 불리며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지만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식당은 불안정한 일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의 좌우 충돌, 전쟁과 민주혁명, 산업화 등의 굴곡을 거친 이들은 장사처럼 불안정한 일을 자식에게 맡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일은 고돼도 벌이는 좋았기 때문에, 대학 나와 펜대 굴리는 직업을 갖도록 자식을 뒷바라지했다. 마침 부는 재개발 바람 타고 가게를 허물어버리기도 했다. 이어나갈 의지가 있었음에도 가업을 잃은 안타까운 사연은 제하더라도, 그렇게 없어진 노포가 많았다. 그 때문에 ‘백년식당’이 보통명사처럼 쓰이지만 실제로 100년 된 식당은 없다. 그나마 1950년 전에 지어진, ‘반백년식당’은 전국에 10곳이 채 안 된다.
오래된 것의 가치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은 얼마 전 일이다. 재건축을 위해 30년도 안 된 아파트를 때려 부수고, 보유한 땅이나 건물이 역사적 보존 가치를 인정받으면 싫어한다. 소유자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다. 이런 실정을 고려할 때, 30년가량이면 노포라 부를 만하다.
기꺼이 음식을 기록하는 일
다행인 점은, 느리지만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2010년대를 휩쓴 레트로 열풍을 타고 노포는 ‘힙’하고 멋진 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다. 정부나 지역사회에서도 이를 보존하기 위한 제도적 뒷받침을 모색했다. 노포가 돈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발 빠르게 움직인 ‘사업가’들도 왕왕 있다. 오래된 가게를 사들여 상호와 내부를 그대로 둔 채로 영업하거나, ‘옥’이나 ‘집’으로 끝나는 세 글자 가게명을 달고 내부를 그럴듯한 노포처럼 꾸며 프랜차이즈화하는 경우가 해당된다. 주인의 친부 이름과 생년을 따와 ‘찬일집, since 1965’라고 적힌 간판을 내거는 경우는 귀여운 수준이다.
박찬일 셰프는 이 모든 관심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하는 마음이 든다고 했다. 노포에 대한 관심이 한 철 유행처럼 지나가 버릴까 걱정되기 때문. 가짜 노포가 등장하면서 지나치게 상업화되고, 그러다 전통적인 원칙을 고수하며 양심적으로 운영하던 노포가 초심을 잃어버리면 어떡하나 걱정된다고. 실제로 그의 기준에 들었으나 제하게 된 식당이 몇몇 있다. 노포를 아끼고, 노포가 더 많은 사회를 꿈꾸는 그로서는 지나친 상업화가 걱정될 수밖에 없다.
당분간은 계획이 없지만 취재를 멈추진 않을 것이다. 오랜 이야기를 듣고 잘 다듬어 세상에 내는 작업 말이다. 노포에서 내어주는 곰탕 한 그릇, 이를 가져다주는 여든 먹은 종업원이 곧 역사이자 문화재다. 예술 분야의 장인은 문화재로 지정해 기술이 대물림되게끔 하는데 유독 음식에서는 그런 인식이 덜했다. 박찬일이 보는 노포는 하나하나가 박물관이고 문화재라, 세대교체가 되기 전에 기록해야겠다는 다급함이 있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진정으로 아끼는 마음이 고된 작업을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언젠가는 없어진 노포를 취재하고 싶어요. 망해서 가게를 접은 식당의 주인, 그곳에서 일했던 직원들을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거죠. 식당이 남아 있는 곳은 사람이 죽어도 공간이 남아 있으니 덜해요. 하지만 가게조차 없는 곳들은 사람이 죽고 나면 세상에서 영영 사라져버리죠.”
노포를 취재하다 보면 안타까운 일이 이뿐이겠는가. 폭력적이었던 종로 피맛골 재개발 과정, 결국 원래 자리에서 쫓겨나고 만 을지OB베어가 그렇다. 그는 한 건물주가 ‘우리도 화장실 좀 가자’고 써서 붙인 쪽지를 기억한다. 개발을 찬성하는 쪽의 입장을 이해한다. 스스로 ‘낭만적인 사람’이라 자조하지만서도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싹 갈아엎는 재개발 대신 불편한 점을 보완하고 보존했더라면 더 큰 경제적 이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유수의 오랜 도시들은 차도 못 다니는 좁고 울퉁불퉁한 골목 경관을 보러 오는 관광객들로 많은 돈을 벌고 있다. 우리나라만 해도 요즘 관광 오는 외국인들, 노포에서 국밥 먹으면서 엄청나게 좋아하더라는 설명을 그가 덧붙였다.
노인을 위한 나라, 시민의 자부심이 되다
오랜 식당은 무엇보다 시민의 정서적 공공 자산일 수밖에 없다. 똑같은 노포라도, 식당에는 이발소나 기름가게보다 내밀한 구석이 있다. 그의 말마따나 ‘음식과 술이라는 촉촉하고 진한 매개체로 정서를 주고받으며 오래 머무르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 보기에 불편한 것도, 삶의 흔적이 쌓였음을 알고 나면 소중해진다. 서울 연남동 서서갈비에서는 처음 찾은 20대 손님도, 몇십 년 단골손님도 ‘불편하게’ 서서 고기를 굽는다. 누구도 이를 지적하지 않는다. 멋있다고 생각할 뿐.
40년, 50년 넘도록 오래 일한 직원은 그 의미를 더한다. 박찬일 셰프는 노포가 곧 ‘노인을 위한 나라’라고 말한다. 노인이 찾아가기에 노포가 있고, 노포가 있기에 노인도 있다고 생각해서다. 추억이 깃든 식당에서 식사하고, 공간을 온전히 즐기는 모습은 언제 봐도 멋있단다.
“외국 영화를 보면 50년 된 단골이 늘 앉던 자리에 앉죠. 그러면 머리가 하얗게 센 종업원은 묻지도 않고 알아서 메뉴를 내와요. 무얼 먹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는 거죠. 멋있지 않나요?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식당이 곧 노포예요. 사장과 손님이 함께 늙어간 거죠. 이런 곳은 직원도 오래 일해요. 힘은 떨어져도 기술이 좋아서 노련하죠. 단골손님 각각의 사연을 다 기억하다 보니 이야기도 곧잘 받아주고요. 단골 매출이 좋을 수밖에 없어요.”
노포는 초고령화 사회를 앞둔 요즘, 모범적인 노인 노동 사례이자 연구 대상이다. 그가 찾은 노포들은 일할 능력이 되면 ‘갈 데까지 가보는’ 종신 고용을 고수한다. 직원이 평생을 일하며 원칙을 고수한 덕분에 가게는 한결같은 맛으로 손님을 잃지 않는다. 청진옥, 우래옥, 조선옥 같은 곳이 일찍이 해왔던 방식이다. 노동자를 임금 지급 대상과 효율로만 보는 기존의 경제 논리를 뒤집는 격이다. 여기에 박찬일 셰프는 노인이 정서적으로도 무언가를 얻게 된다고 설명한다.
“최근에 우래옥의 김지억 전 전무님과 냉면을 먹었어요. 거기 직원이 오랜만에 뵙게 돼서 좋다고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선물을 주더군요. 여든 훌쩍 넘은 단골손님이 ‘전무님이 여길 다 나오셨냐’며 반가워서 손을 덥석 잡는 일도 있었죠. 나도 나이 들어 저런 뭉클함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박찬일 셰프는 조선옥의 김진영 사장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그분이 저한테 그러더군요. ‘박 씨 아저씨(박중규 조선옥 주방장)가 그냥 계속해서 일을 나왔으면 해요. 그분이 영영 안 나온다고 생각하니까, 그게 너무 싫어.’” 박중규 옹은 올해로 여든넷, 입사 65년 차 주방장이다. 김 사장이 국민학교 시절부터 봐왔던 ‘아저씨’는 단순한 직원이 아니다. 이런 장면을 마주할 때면 박 셰프 말마따나 ‘마음속 울대와 현이 찌르르 울려’ 감동한다. 효율만을 따져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비효율의 끝, 노포가 노포로 남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인생을 바꿔야지!” 새벽 2시, 야근 후 돌아와 죽어도 농부가 되겠다는 남편의 아우성에 아내는 결단을 내렸다. 그렇게 어제까지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던 남편은 청바지를 입고 밭으로 향했다. 땅에 심은 건 포도나무였지만, 부부는 꿈을 심었노라 말한다. 그들의 꿈은 이뤄질 수 있을까? 남편은 뭐든 이뤄진다 하고, 아내는 뭐든 이뤄지지 않아도 괜찮다 한다.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들의 꿈은 자연히, 그리고 자연이 이뤄가리라는 것이다.
테루아(Terroir)는 프랑스어로 ‘땅’을 의미한다. 와인이 만들어진 땅을 가리킬 때 흔히 사용한다. 충주의 와이너리 ‘작은 알자스 레돔 테루아’(이하 작은 알자스)는 소설가 아내 신이현(57)과 농부 남편 도미니크 레몽 에으케(53)의 꿈을 심은 땅이다. 이곳에서 그들은 직접 과일을 농사지어 ‘내추럴 와인’을 만든다. 작은 알자스에 도착했을 때, 부부는 ‘웰컴 드링크’처럼 내추럴 와인을 내왔다. 풋사과 시드르였다. ‘폭’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리더니, ‘꼬르르르’ 미세한 탄산이 잔을 타고 미끄러졌다. 그 맛은 어떤가 하니, 마치 와인계의 평양냉면이라고 할까? 깔끔하면서도 은은하게 산뜻함이 감돌았다. 단순히 ‘맛있다’라고 표현하기엔 부족했다. 걸맞은 단어를 고르던 차, 아내 신이현이 제대로 설명에 나섰다.
“내추럴 와인은 유기농 과일을 수확해 착즙한 뒤 필터링이나 살균 등을 거치지 않고 만든 와인입니다. 흔히 ‘맛있다’고 표현되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려 인위적인 첨가물을 넣지 않고 자연이 준 그대로 발효해서 만든 거예요. 즉 그 과일이 자란 땅이나 한 해의 기후 등에 대한 솔직한 설명과 같죠. 가령 비옥하지 못한 땅에서 나온 와인은 심플한 맛이 나기도 하는데, 그 역시 나름의 개성으로 보는 거예요. 고로 세상에 맛없는 내추럴 와인은 없습니다. 과일이 자라던 땅과 나무, 바람과 햇볕을 느끼고 즐기면 그뿐이죠.”
열매가 좋아하는 날을 기다리며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술, 내추럴 와인을 한잔 마시는 것은 한 움큼의 땅을 먹는 것과 같다고 했다. 와인 맛이 다른 것은 땅이 다르기 때문이고, 땅이 다른 것은 땅마다 스며 있는 농부의 땀방울이 다름일 테다. 더군다나 오롯이 자연의 흐름에 맡기는 내추럴 와인의 경우엔 가히 그 땅에 농부의 철학이 담겼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미니크는 어떤 농부라 말할 수 있을까? 그는 “땅을 키우는 농부”라 일컬었다.
“농부는 나무만 키우는 게 아니라 땅도 함께 키워야 해요. 일반적으로 포도밭을 한다고 하면 포도가 주렁주렁 많이 열리고, 그것을 수확해 큰돈을 얻는 게 목적이겠죠.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다릅니다. 나무와 땅이 있다면, 우린 땅이 더 중요하다고 봐요. 지금 당장 열매가 많이 열리는 것보다 땅을 살리는 기쁨이 더 크거든요. 그렇다 보니 농사짓는 방법도 다른 거죠.”
땅을 키우는 차별화된 농법으로 도미니크는 ‘생명역동농법’을 택했다. 생명역동농법이란 한마디로 우주의 기운으로 농사를 짓는 것이다. 식물에 영향을 주는 별자리의 움직임을 기록한 달력을 농사에 적극 반영한다. 꽃식물이나 잎식물, 열매식물 등 각기 다른 식물은 저마다 좋은 기운이 있는 날엔 활짝 생명을 펼치지만, 그렇지 않은 날엔 조용히 웅크리고 움직이지 않는단다. 이러한 원리에 따라 도미니크는 씨를 뿌리거나 나무를 옮길 때 항상 별자리 달력을 펼쳐놓고 식물에게 좋은 날을 찾는다. 와인 역시 같은 방법으로 만든다. 가령 포도를 따거나 착즙할 때는 열매에게 좋은 날을 골라 작업한다. 씨를 뿌려 열매를 수확하고 내추럴 와인이 탄생하기까지, 모든 과정에 인간은 ‘돕는 자’의 역할을 할 뿐 그밖의 모든 것은 자연의 힘에 맡긴다. 그 이름처럼 ‘내추럴’(Natural)하게 말이다. 애당초 땅에 그러한 철학을 심을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들의 삶에도 그러한 양식이 깃들었기에 가능했다. 혹자는 이런 부부를 보고 마치 물 따라 바람 따라 유유자적 산다고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이에 아내 신이현은 “그저 가만히 내버려둔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살아지는 건 아니다”라고 이야기한다.
“가령 농사에서 ‘자연스러운’ 것은 수확을 위해 인간의 손이 가장 덜 가게 하는 거죠. 그런데 그게 가능하려면 실제로는 초반에 아주 많은 손길이 필요해요. 농부의 상당한 노력을 투여해야만 결국 자연스럽게 식물이 자라고 열매 맺는 시간이 찾아오죠. 물론 몸은 고단하고 힘들어요. 그런데도 자연에 맞춰 산다는 게 엄청난 철학이 있어서는 아닌 것 같아요. 그보다는 우리는 그냥 그게 좋더라고요. 자연에 해가 되지 않는 일이 나에게도 즐거움이 되고, 그것을 목표로 삼으니 소소하지만 매 순간 성공하는 듯한 기분도 들고요.”
농업의 꽃 술, 농부의 손으로부터
부부는 매 순간 성공이라 말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정신승리라 하겠다. 물론 그들에게는 그 말이 진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타자로서 일련의 과정을 듣노라면 매 순간 결코 녹록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그 위대한(?) 서막은 그들이 프랑스에서 한국에 오고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익히 알듯 포도농사와 와인 양조라면 프랑스의 여건이 더 나았을 테다. 농사에 관해선 고집스런 도미니크지만, 한국행을 택한 데에는 아내의 의견이 컸다. 사실 도미니크는 농사만 지을 수 있다면 어느 땅이라도 좋다고 했지만 말이다.
“남편이 농부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프랑스 남쪽으로 밭을 보러 다녔어요. 피레네산맥 근처 포도밭이 끝없이 펼쳐진 곳이었는데, 비싸지도 않고 환경도 괜찮았죠. 그런데 제게는 너무나 낯설었어요. 남프랑스 시골 마을에서 포도 따는 외로운 동양 할머니로 늙어갈 걸 상상하니 그건 싫더라고요. 마침 한국에 포도 와인은 많지만 사과로 만든 시드르는 없길래, 도미니크에게 한국은 어떠냐고 권했죠. 그렇게 파리의 아파트를 팔고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단순히 남편은 농사를 짓고 싶고, 아내는 한국에 살고 싶어 무작정 삶의 터전을 바꿨다. 한국의 땅값이 얼마인지, 양조장을 짓는 데 얼마가 들지, 생활비는 어떻게 벌지 등등 구체적인 계획도 대책도 없었다. 원대한 꿈만 가득했다.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 망해도 좋다. 적어도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했다는 말은 할 수 있겠지”라며 마음을 다독였다. 그렇게 중고차 한 대를 구입해 새 터를 잡기 위해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농업기술센터에 찾아가 자신들의 처지를 털어놓기도 했고, 공공기관에 도움도 요청했지만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사과연구소도 가보고 포도작목반에도 갔다.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특히 과일을 직접 농사지어 와인을 만들겠다고 하자 반응은 더욱 냉랭했다. 근처에서 과일을 구입해 양조하는 것이 돈과 수고가 덜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의 훈수가 더해질수록 도미니크의 철학은 되레 견고해졌다.
“농업의 꽃은 술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좋은 술은 농부의 손에서 시작됩니다. 때문에 와이너리에서 농사를 짓는 것은 기본이라고 봐요. 농부가 뙤약볕 아래 허리를 구부려 일하는 것은 배를 채우기 위함, 즉 생존을 위한 것이죠. 그러나 농업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술은 휴식과 즐거움을 위한 액체니까요. 우리가 먹는 쌀, 밀 같은 농산물은 생존을 위한 것이지만, 그 농산물로 만든 술은 온전히 즐거움을 위한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술을 만드는 일 속에서 가장 인간다운 가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애처롭고도 숭고한 농부의 삶
아쉽지만 첫해 사과 농사는 망했다. 안타깝지만 두 번째 농사도 망했다. 그 후로도 장마, 가뭄, 병충해 등 고난은 계속됐다. 자연의 힘에 맞서기 위해 다른 농부들은 관수를 대고, 비닐을 깔고, 농약을 치기도 했지만, 내추럴 와인을 고집하는 도미니크에겐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자연의 섭리대로 땅을 일궈온 것처럼, 야속할지언정 편법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쓰라린 경험은 고스란히 초보 농부에게 귀한 밑거름이 됐다.
“점점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 같아요. 흉년이든 풍년이든 자연이 주는 것을 우리가 너무 슬퍼할 필요도 없고, 또 너무 기뻐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아요.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건데, 그럴수록 나무가 깊게 뿌리 내릴 수 있는 좋은 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땅이 좋고 뿌리가 깊이 나면 나무들도 어려운 환경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거든요. 당장은 좀 힘들더라도 먼 훗날을 위해 그 토대를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온종일 땅과 씨름하는 도미니크를 보고 있노라면 아내는 뭉클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애처로운 마음마저 든다. 남편이야 꿈을 이루느라 그렇다 하지만, 소설가 신이현의 꿈이 ‘농부의 아내’는 아니었을 터. 그러나 한국 생활이 서툰 남편의 뒷바라지는 고스란히 아내의 몫이 됐다. 생명역동농법을 위해 소똥이며 꿀벌이며 안 구해본 것이 없고, 갖가지 서류 준비며 비즈니스며 고객 응대며 자신도 처음 해보는 일들을 해내느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옳고 가치 있는 일임을 알기에 그녀는 오늘도 기꺼이 꿈의 조력자가 된다.
“도미니크가 만약 다른 일을 한다면 이렇게까지 열심히 돕지는 않았을 거예요. 이 사람이 하는 일이 굉장히 뜻깊다는 걸 느꼈고, 때론 그 모습이 감동적이기도 해요. 남편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옆에서 보면 ‘아, 저 사람이 하는 일이 굉장히 숭고하다’는 생각이 들죠. 물론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집안에서는 인정을 못 받는 것처럼 저도 바가지를 긁곤 해요. 그러고 나면 또 미안하고, 힘들어도 도와주게 되고. 사실 이 나이에 제게 새로운 꿈이랄 건 없지만, 차차 땅과 일이 안정되면 양조장을 떠나 조용한 곳에 가서 판타지 소설이나 써볼까 상상해봅니다.(웃음)”
포도밭에서 피어나는 예술
부부가 그리는 ‘작은 알자스’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물었다. 이에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고 했다. 그저 하루하루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만큼 주어진 일을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하자는 마음가짐 정도?
“시골에 산다고 하면 ‘힘들게 어떻게 사느냐’며 촌이 가진 소외감을 떠올리는 이도 있고, 전원주택 짓고 제2의 인생을 여유롭게 사는 모습을 그리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식으로 시골이 주는 어떤 정형화된 이미지가 있는데, 우리 생각은 달라요. 가령 문화, 예술 이런 걸 왜 도시에서, 갤러리에서만 해야 한다고 여기는지 모르겠어요. 최근 양조장에서 ‘농부 요리사 예술가’라는 작은 축제를 열었는데 반응이 나쁘지 않았거든요. 예술가를 비롯해 마을분들도 오시고 함께 기타 치며 노래도 불렀는데 활기가 넘쳤죠. 그렇게 밭은 수확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얼마든지 예술을 위한 창작의 장으로도 쓰임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그렇게 자연을 향유할 때 땅도 더 즐겁지 않을까요?”
작은 알자스의 첫 와인이 출시된 지 이제 5년 차. 아직 농부로서도 사업가로서도 가야 할 길이 멀지만 부부는 서두르지 않는다. 와인 사업이 대박 나서 돈방석에 앉는 것이 목표가 아니기에 그렇다. 그저 현재처럼 원하는 방식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가면 그뿐, 수익은 나중 몫이다. 그런데도 주변 이들은 흔히 “대박 나시라! 성공하시라”는 말로 그들을 재촉한다. 이에 그들은 말한다.
“그런 응원은 사실 별 의미 없습니다. 이미 원하는 인생을 사는걸요. 어쩌면 남들 눈에는 불안해 보일지라도 지금이 나쁘지 않거든요. 그러니 제발 그런 걱정은 넣어두셨으면 해요.(웃음) 적어도 우리는 지금 후회 없이 꿈꾸고 있다 말할 수 있으니까요.”
소비자 물가가 계속해서 오르는 가운데 주요 외식비도 올랐다. 특히 유서 깊은 서민음식으로 시니어들도 즐기는 냉면은 만 원을 호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8일 한국소비자원 가격정보종합포털 ‘참가격’에 따르면 6월 서울 기준으로 대표 외식품목 8개 가운데 7개 품목 평균 가격이 지난 1월보다 올랐다.
가격 상승률이 가장 높은 품목은 냉면이었다. 올해 1월 평균 9000원이던 냉면 가격은 6월 9500원으로 5.6% 상승했다.
특히 평양냉면 가격은 지난 몇 년간 큰 폭으로 올랐다. 서울 시내 유명 평양냉면집 가격대는 1만1000~1만7000원대에 형성돼 있다.
냉면값이 오른 이유는 주재료인 메밀 가격이 올랐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30일 기준 수입 메밀 도매가격은 kg당 평균 4400원이다. 1년 전 가격인 2897원과 비교하면 51.9%나 뛴 가격이다. 관련 통계를 집계한 2004년 이후 최고치다. 지난해 유례없는 장마 여파로 생산량이 급감해서다.
냉면에 이어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한 품목은 김밥이다. 김밥은 2731원으로 2654원이었던 지난 1월보다 2.9% 올랐다. 이 외에는 비빔밥, 칼국수, 김치찌개 백반, 자장면, 삼겹살 순으로 상승률이 높았다. 각각 상승률은 2.6%, 2.1%, 1.1%, 0.7%, 0.6%였다.
비빔밥은 9000원으로 8769원이었던 1월보다 200원 이상 올랐다. 칼국수는 7308원에서 약 150원 올라 7462원을 기록했다. 김치찌개 백반은 지난 1월 6769원에서 6846원이 됐다. 자장면은 1월 5346원에서 5385원이 됐다. 삼겹살은 200g 기준으로 1만6581원에서 103원 오른 1만6584원을 기록했다.
유일하게 가격이 내려간 품목은 삼계탕이다. 삼계탕 가격은 2.7% 떨어져 1만4462원에서 1만4077원이 됐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7월 외식 서비스 가격은 6월과 비교해 0.3%, 지난해 같은 달과 비교해서는 2.5% 상승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5월 2.6%로 9년 1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한 뒤 6월 2.4%로 낮아졌다가 7월에 다시 2.6%로 높아졌다.
한의학적인 측면에서 바라본 냉면은 어떤 음식일까? 체질에 맞는 냉면을 즐긴다면 더욱 건강한 여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물냉면의 대표주자 ‘평양냉면’과 비빔냉면의 대명사 ‘함흥냉면’ 중 내 몸에 맞는 냉면은 어느 쪽인지 자생한방병원 강만호 원장의 도움말로 알아보자.
평양냉면은 고기 육수와 동치미를 섞은 국물에 편육, 오이 등을 고명으로 얹어 먹는다. 특유의 심심하면서도 담백한 맛으로 미식가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면 재료로 메밀을 쓰기 때문에 면발이 부드러워 아이들이나 턱관절이 약한 어르신들이 즐기기도 좋다.
평양냉면의 주 재료인 메밀은 성질이 서늘해 여름철 체내에 불필요하게 쌓인 열기를 내리는 데 도움을 준다. 노폐물 배출에 뛰어나 변비와 같은 소화불량에도 좋다. 실제로 메밀에는 단백질 분해 효소가 함유돼 있어 소화흡수와 숙취해소에도 효과적이다. 아미노산과 섬유소가 풍부하고 칼슘, 칼륨, 인, 철분, 나트륨 등 무기질 함량도 높다.
평양냉면 육수에 들어가는 동치미 국물도 성질이 차가운 채소인 무를 절여 만드는 만큼 평소 몸에 열이 많아 여름나기가 힘든 이들에게 알맞다. 시원한 육수를 마시며 체온을 낮추고 부족한 수분을 보충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반면 함흥냉면은 어떨까? 평양냉면이 차가운 성질을 가지고 있다면 반대로 함흥냉면은 그 성질이 따뜻하다. 함흥냉면은 감자 혹은 고구마 전분으로 만든 쫄깃한 면에 매콤새콤한 양념장과 명태, 가자미 등 생선회 고명을 올려 비벼먹는다.
함흥냉면의 맛을 내는 양념장의 기본은 고추장과 고춧가루다. 고추는 맵고 성질이 따뜻해 몸 속 찬 기운을 몰아내고 피로회복을 돕는 대표적인 식재료다. 고추에는 사과의 40배, 귤의 2배가 넘는 비타민C가 들어 있어 신진대사 및 항산화 작용을 촉진한다. 이외에 양념장에 첨가되는 마늘, 생강, 양파 등도 많은 열을 품고 있어 원기를 더해준다.
명태, 가자미 등 회 고명도 양기를 보충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한의학적으로 명태는 따뜻한 성질을 갖고 있으며 가자미는 기력을 북돋는 것으로 유명하다. 여름철 몸살로 인한 체력저하나 과도한 냉방기기 사용으로 인한 냉방병 완화에도 알맞다.
결론적으로 몸에 열이 많아 더위를 쉽게 타는 이들은 서늘한 기운의 평양냉면을, 평소 추위를 많이 타 손발이 차거나 여름철 지나친 양기 소모로 기력이 떨어진 경우라면 함흥냉면을 선택하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내 몸에 맞는 음식이라도 과할 경우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만큼 섭취량을 조절하는 것이 현명하다. 메밀면을 과다 섭취하면 오히려 소화를 방해해 어지러움, 두통, 설사 등을 유발할 수 있으며, 다량의 고추도 식도, 위, 장 등에 자극을 가해 점막을 손상시킬 염려가 있다.
자생한방병원 강만호 원장은 “냉면은 뜨겁게 가열해 먹는 음식이 아니기 때문에 위생적인 환경에서 조리되지 않은 경우 각종 세균에 오염되기 쉽다”며 “냉면을 통해 효과적으로 더위를 이겨내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체질과 함께 위생도 신경을 써주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북쪽의 음식’이라고 말한다. 실향민들이 그리워하는 음식이다. 한국전쟁 무렵 월남한 이들은, 당연히 고향 음식을 그리워한다. 돌아갈 수 없는 고향,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다. 서울 장충동, 오장동 냉면, 전국적으로 퍼진 족발, 북한식 큼직한 왕만두가 바로 그것이다.
젊은 층들도 북한 음식에 열광한다. 부모님의 고향이 북한도 아니다. 가본 적도 없다. 한국전쟁 무렵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다.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북한 음식’을 찾는다. 이른바 젊은 층의 핫플레이스인 서울 홍대 지역에도 ‘북한 음식 전문점’이 성행이다. 실향민들의 음식과는 또 다르다. 최근 한국으로 온 새터민들이 차린 음식점들이다. 평양냉면, 함흥냉면, 왕만두, 어복쟁반, 가리탕, 가자미식해 등 종류도 다양하다.
왜 젊은 층들도 북한 음식에 열광할까? ‘북한 음식’은 어떤 음식인가? 만두, 냉면을 중심으로 북한 음식을 알아본다.
평양냉면과 국수
왜 평양의 음식이 발달했을까? “북에는 평양이 있고, 남에는 진주가 있다”는 말이 있다. 북에서는 평양이 가장 번창한 도시이고, 남에서는 진주가 가장 큰 도시라는 뜻이다. 도성인 한양을 제외하면 북에서는 평양이 으뜸, 남에서는 진주가 으뜸이었다. 평양냉면이 있듯이, 진주에도 냉면이 있었다. 진주냉면이다. 냉면이 상업적으로 팔렸음은 큰 도시였고, 관청이 있었고, 시장이 있었다는 의미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으면 시장이 서고, 시장이 서면 밥집도 많이 생긴다. 두 도시 모두 큰 도시였고, 높은 벼슬아치가 있었고, 시장도 있었고, 왕래하며 식사를 하는 이도 많았다.
북한은 중국과 맞닿아 있다. 중국 쪽 관문은 국경 도시 의주다. 대중국 통로였다. 중국과 조선을 드나드는 중국 혹은 조선의 사신들은 ‘북경-의주-평양-개성(해주)-한양’을 잇는 도로를 따라다녔다. 한양과 중국 북경을 잇는 길은 멀었다. 최소 3개월이 걸리는 긴 노정이다. 사신단은 늘 주방장[廚子, 주자]를 동행했다. 음식점이 흔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수백 명의 사신단 식사는 주자 몇 명이 감당했다.
주자들은 중국에 가서 새로운 음식들을 만난다. 귀국할 때는 의주-평양을 잇는 길을 따라온다. 북에서는 가장 큰 도시였다. 평양에서 사신들은 제법 오랜 기간 머물며 피로를 풀고 휴식을 취했다. 평양의 관리들은 중국과 조선의 사신단 맞이가 주요 업무였다.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이다. 제사 모시고 손님을 맞이하려면 늘 음식이 필요하다. 평양은 문물의 선진국이었던 중국의 음식을 받아들이는 큰 도시였다.
국수와 만두, 돼지고기 등은 중국이 앞섰던 음식들이다. 이런 음식들은 중국-의주-평양을 거쳐 한반도의 중심지인 한양으로 들어왔다.
냉면은 차가운 국수다. 국수는 중국이 발달했다. 한반도에는 밀가루가 귀했다. 중국은 밀가루가 흔했다. 우리의 주식이 쌀인 반면, 중국 북쪽은 밀가루가 주식이다. 앞선 국수 음식이 한반도로 들어온다. 국수를 가장 먼저, 널리 받아들인 곳은 평양이다. 평양에서 국수의 일종인 냉면이 발달한 이유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한반도에 ‘경부철도’를 건설한다. 경부철도는 의주와 부산을 잇는 철도다. 북, 만주, 중국, 한반도의 물자를 빼앗다시피 하여 일본으로 가져갔다.
1920~30년대에 평양의 최고 생산물 중 하나는 냉면이다. 건면 냉면 공장이 있었고 이미 평양냉면은 유명했다. 일본은 중국에서 대량 생산되는 각종 곡물과 한반도의 곡물을 이용해 냉면을 만들고, 이를 ‘수출’이라는 이름으로 부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가져갔다.
1930년대에는 냉면집을 중심으로 ‘동맹파업’도 일어났다. 1938년 12월 1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평양의 냉면집 파업’ 이야기가 실려 있다. “‘평양면업노동조합(平壤麵業勞動組合)’의 피고용인 240명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했다”는 내용이다. 요구 조건은 역시 임금 인상이다. 11월 18일, 이들이 현행 임금 90전을 1원으로 올려달라고 요구한다. 주인들은 12월 1일 자로 올려주겠다고 약속했으나 날짜를 12월 10일로 연기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결행한 것이다. 결국, 민간의 마찰에 경찰이 개입한다.
평양에서만 냉면이 유명했던 것은 아니다. 일제강점기, 경성(서울)에도 냉면집이 많았다. 파업도 있었다. ‘평양냉면 파업 사건’ 이전인 1931년 6월 1일 자 신문기사다. 제목은 ‘평안냉면옥 배달부맹파(平安冷麪屋 配達夫盟罷)’다. 평안옥이라는 냉면집 배달부들이 동맹파업을 했다는 뜻이다. 내용은 비교적 간단하다. ‘평안옥’은 경성의 중심지인 서린동 89번지에 있는 냉면 전문점이다. 이곳에는 종업원 10명이 있었다. 모두 배달부다. 일급은 1원. 문제는 기사가 실리기 전인 5월 29일, 주인이 일방적으로 임금을 90전으로 낮췄다. 다음 날엔 직원 3명을 해고했다. 배달부들은 일하지 않겠다고 동맹파업으로 맞선다. 경성 한가운데인 서린동의 냉면집 이름이 ‘평안옥’이다. 결국 평양냉면이다.
‘평양냉면’은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전국적으로 유행한다. 경성을 비롯해 각 지방에도 냉면이 있었지만, 전국적으로 평양냉면이 널리 퍼진다.
긴 세월 동안 중국-평양-서울을 잇는 길을 따라 음식은 전해졌다. 중국 국수 문화가 평양에 전해지고, 평양의 냉면이 서울을 비롯해 전국으로 퍼졌다.
만두와 상화
만두는 냉면보다 더 복잡하게, 여러 차례 한반도로 건너온다. 처음은 고려시대 말기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만두는 몽골 침략 때 한반도로 처음 건너온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시대 초기 기록에는 만두가 없으나, 우리가 널리 알고 있는 ‘쌍화점’의 쌍화(雙花), 상화(霜花)는 만두다(쌍화점이 만두 전문점이 아니라 액세서리 파는 곳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고려시대 말기에는 궁중에서 만두를 훔쳐먹었다가 사형당한 도둑 이야기도 전해진다. 고려·조선시대를 지나면서 만두는 만두 혹은 상화라는 이름으로 여러 차례 나타난다. 조선시대 말기, 임오군란과 청일전쟁을 겪으면서 많은 중국 군인, 민간인, 상인들이 한반도로 건너온다. 이때 짜장면, 짬뽕과 더불어 만두를 한반도에 전한다. 지금도 인천 차이나타운, 금강 유역의 군산, 익산 등에는 화상노포가 많다. 이들은 여전히 ‘청요리’와 더불어 짜장면, 만두 등을 내놓고 있다.
조선의 가장 큰 교역 상대국은 중국이다. 외교적으로도 사대의 나라였다. 조선은 1년에 최소한 4차례 중국에 사신을 파견했다. 수백 명의 인원이 중국과 조선을 오갔다. 중국 측 사신도 빈번히 한반도를 오갔다. 사람을 따라 음식도 전해진다.
우리는 중국에는 없는 만두전골, 만둣국도 만들었다. 만두가 한식이 된 것이다. 평양, 의주는 중국으로부터 만두를 받아들여 한반도 전역으로 퍼뜨렸다. 서울에서도 만둣국을, 남쪽에서도 교자를 흔하게 먹는다. 조선시대 말기, 일제강점기에 한반도로 들어온 화상들도 만두를 전했다. 북쪽의 큰 만두, 왕만두는 한반도로 들어온 중국 만두와 비교적 닮았다. 남쪽으로 넘어오면서 만두는 작아진다. 개성만두도 있고 서울식 만두도 있다. 한반도는 음식의 용광로다. 모든 음식을 받아들인 다음 변형, 변화, 발전시킨다. 중국 음식, 북한 음식은 서울로 오면서 또 달라진다.
오늘날 서울의 북한 음식도 마찬가지다. 여러 차례 중국에서 받아들인 다음, 한반도 식으로 바꾼 것이 다시 서울로 전해진다. 실향민들이 전하고, 새터민들이 또 전한다. 북한 음식이라고 부르지만, 시대별로 음식은 달라진다. 자신들이 떠났던 순간의 ‘북한’ 음식이다. 실향민들의 북한 음식과 새터민들의 북한 음식이 다른 이유다.
만두와 냉면은 우리 것이지만 우리의 전통음식은 아니다. 외국에서 들여온 다음, 변형·발전시켜 우리 음식으로 만든 것이다. 중국, 북한 지역 사이에도 여러 차례 교류가 있었다. 이런 교류로 만두, 냉면은 발전해 한식이 된다. 북한 음식도 마찬가지. 한국전쟁과 그 이후 여러 차례 한국으로 건너온다. 한국에 온 음식들은 조금씩 변화, 발전하다 어느 순간에는 서울식, 한국식, 한식이 될 것이다.
젊은 세대들이 북한 음식에 대해 열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새로운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다. 존재하는 나라, 뉴스 등에서 자주 보는 나라, 그러나 갈 수는 없는 미지의 나라에 대한 호기심이다. 유럽과 미국, 일본 음식에 대한 호기심보다 더 강하다. 쉽게 갈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67년 전통 ‘사리원면옥’
지역마다 평양냉면 노포들이 있지만, 대전에서 ‘평양냉면’ 하면 첫손가락으로 꼽히는 곳이 바로 ‘사리원면옥’이다. 1952년, 황해도 사리원 태생인 故김봉득 일가가 6·25전쟁 직후 대전에 내려와 자리를 잡으며 이북식 냉면을 팔기 시작한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사리원면옥은 평양냉면으로는 물론이고, 대전광역시 일반음식점 허가 제1호 식당으로도 그 명성이 자자하다. 현재는 창업주의 손자인 김형준(64), 손자며느리 송명희(64) 내외가 가게를 지키고 있다. 또 부부의 두 아들인 김기남(39)·김기석(37) 씨도 4대째 가업을 물려받기 위해 부지런히 일을 손에 익혀가는 중이다.
주인장 송명희 씨는 “아무래도 냉면은 분식이라 쉽게 배가 꺼져 든든하게 곁들일 수 있는 불고기를 고안하게 된 것”이라며 “동절기엔 냉면이 덜 나가 갈비탕을 내놓기 시작했는데, 손님들 반응이 아주 좋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운을 떼자 큰아들 기남 씨도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음식 설명을 거들었다.
“냉면이 주력 메뉴이지만, 불고기도 신선한 과일과 야채로 양념을 만드는 등 신경을 많이 씁니다. 갈비탕은 겨울 메뉴 타깃으로 내놨는데 고기 양이 많다고 입소문이 나서 이제는 사시사철 사랑받는 메뉴가 됐죠. 다른 평양냉면집과 차별화된 건 아무래도 ‘소고기김치비빔’이 아닐까 해요. 대개 가게에서 직접 사태나 양지로 육수를 뽑는 냉면집은 사용하고 남은 고기를 활용한 메뉴를 내놓곤 하거든요. 이곳에서 손수 만들었다는 일종의 증거인 셈이죠. 저희는 그 의미로 소고기김치비빔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기남 씨는 사리원면옥의 장수비결로 ‘추억’을 꼽았다. 그가 기억하는 가게의 세월보다 오랜 단골들의 흔적이 더 깊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리원면옥 식구들이 대를 물려 가게를 지키는 이유와도 같다.
“대전 외 지역에서 오는 손님들이 절반은 되더라고요. 단순히 맛집 탐방하러 온다기보다는, 원래 이쪽에 살다 결혼이나 직장 때문에 터를 옮겼던 분들이 옛날 생각 하면서 찾아오곤 하죠. 10년 전쯤에 건물이 너무 낡아 새로 지은 게 지금 모습인데, 예전 분위기가 그립다고 아쉬워하는 단골들도 계셔요. 그러다가도 냉면 한번 드시고는 ‘맛은 그대로네’ 하며 흡족해하십니다.(웃음) 현재의 맛을 잘 유지해, 앞으로의 100년을 맞이하는 게 저희의 바람입니다.”
대전1호선 중앙로역 3번 출구 도보 5분
주소 대전시 중구 중교로 62
영업시간 11:00~22:00
대표메뉴 평양냉면, 갈비탕, 불고기
※본 기획 취재는 (사)한국잡지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56년 전통 ‘미성당’
‘납작만두’는 동인동찜갈비, 무침회, 복어불고기 등과 함께 이른바 ‘대구10味’로 불린다. 대개 맛있는 만두라고 하면 얇은 피에 두툼하게 꽉 찬 소를 생각하지만, 납작만두는 그 반대라고 보면 된다. 그 이름처럼 납작하게 생긴 것은 물론이고, 속은 적고 피가 대부분이다. 무슨 맛으로 먹나 싶겠지만, 평양냉면의 매력처럼 삼삼하니 보들보들한 식감이 자꾸 입맛을 당긴다.
납작만두를 파는 가게는 전국 곳곳에 있지만, ‘미성당’이 그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6·25전쟁 이후 먹을거리가 부족했던 시절 미성당의 창업주였던 故 임창규 씨가 당면, 부추, 밀가루 등 최소한의 재료로 납작만두를 고안한 것이다. 보통 만두라면 빚은 뒤 쪄내 바로 먹지만, 납작만두는 한 번 초벌로 삶은 뒤 물에 한 시간 정도 담갔다 센 불로 구워낸다. 먹고살기 어려운 시절이었기에, 만두를 조금이라도 더 크게 불려먹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덕분에 푸짐해 보이는 것은 물론 납작만두 특유의 부드러운 식감까지 덤으로 얻게 됐다. 지금은 세상이 좋아졌다지만, 아버지의 대를 이은 2대 주인장 임수종(56) 씨는 여전히 50여 년 전 방법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만드는 방법, 재료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어요. 별것 안 들어가고 대충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늘 일정한 맛과 모양을 내는 건 쉽지 않습니다. 매일 아침 평일에는 하루 1만5000~2만 개, 주말에는 하루 3만 개 정도 그날 쓸 만두를 빚는데, 함께 일하는 직원들도 모두 20년 이상 된 베테랑이라 문제없습니다. 믿을 수 있는 직원들과 정직한 맛을 유지한 게 장수 비결이 아닐까 생각해요.”
직원들이 오래 일했다는 건 주인장의 인심도 한몫했으리라. 임 씨는 “상부상조하는 것”이라며 오히려 고마운 점이 많다고 이야기했다. 오랜 역사만큼, 희로애락을 함께 나눴을 미성당 식구들. 그러나 올해 그들은 50여 년간의 추억을 고이 간직한 가게를 떠나야만 했다. 원래 미성당이 있던 남산 4-5지구가 아파트 재건축사업을 시작해 이전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쉬운 마음이 크지만, 더 오래가기 위한 또 다른 출발로 여기고 있단다. 그 새로운 시작엔 임 씨의 아들이 든든한 지원군으로 나섰다.
“아들도 대를 있겠다고 결심하고 열심히 일을 배우고 있어요. 지금 가게가 너무 쾌적해서(웃음) 옛날 분위기가 덜 나긴 하는데, 맛을 그대로 유지하면 차차 다시 역사가 쌓이겠죠. 아들의 손맛도 무르익어 갈 테고요. 아버지께서는 제게 늘 ‘불맛’이 중요하다 강조하셨어요. 그게 우리 집의 노하우와도 같은데, 아들도 그 불맛을 잘 지켜나가길 바랍니다.”
대구3호선 남산역 2번 출구 도보 4분
주소 대구시 중구 명덕로 93
영업시간 10:30~21:00 (명절 휴무)
대표메뉴 납작만두, 쫄면, 우동 등
※본 기획 취재는 (사)한국잡지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73년 전통 ‘경인면옥’
평안도 출신인 1대 주인장 함용복 씨는 냉면집을 운영하던 맏형에게 평양냉면 요리를 전수받아 지금의 경인면옥을 차렸다. 가업을 이어받아 아들 함원봉 씨가 2대 주인장을 맡았고, 다시 대를 이어 손주인 함종욱(50) 씨가 3대 주인장이 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따져보면 함종욱 씨보다 경인면옥이 훨씬 먼저 세상에 나온 셈이다.
“원래 이 자리는 ‘경인식당’이라는 국밥집이었어요. 할아버지께서 냉면집을 하려고 인수하셨죠. 국밥 먹으러 드나드는 손님들이 적지 않아서 기존 메뉴를 유지하되 냉면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운영을 시작했어요. 아버지 대에도 당시의 메뉴가 꽤 남아 있었는데, 제가 가게를 맡으면서부터는 조금씩 줄여나갔습니다. 냉면 맛에 더 집중하기 위해서였죠.”
3대에 걸치는 동안 메뉴는 점차 줄었지만 식재료의 수준은 더 높아졌다. 소금은 3년 이상 숙성한 천일염을 사용하고, 냉면 고명과 육수에 쓰이는 고기는 1등급 이상(1, 1+, 1++) 한우만을 취급한다. 이전에 비하면 재료값이 2~3배 정도 더 들지만, 그렇다고 가격이 올라간 것은 아니다. 또 재료의 품질은 달라졌지만 조리 방식 역시 70여 년 전과 변함없다. 경인면옥은 터와 맛을 그대로 지키고 있지만 평양냉면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그사이 많이 변화했다. 물론 더 긍정적인 쪽으로 말이다.
“아버지가 운영하실 때만 해도 함흥냉면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평양냉면 특유의 슴슴한 맛을 낯설어하고 육수가 이상하다며 항의하는 손님들도 있었으니까요. 근래 와서야 TV 프로그램의 영향으로 평양냉면이 미식가들의 음식으로 대접받으면서 인기를 끌게 됐죠. 이제는 처음 드시는 분들도 ‘이런 매력이구나’ 하면서 음미하셔요.”
평양냉면 특유의 깔끔함 때문에 예민한 고객들의 미각은 작은 차이에도 반응한다. 늘 똑같이 만든다고 하지만 항상 일정한 맛을 내기는 쉽지 않다고. 경인면옥 식구들은 매일 점심에 냉면을 먹으며 그날그날의 간을 점검한다.
“냉면 맛이 소소하게는 날씨에 따라서도 달라지고, 어떨 때는 제 컨디션에 영향을 받기도 해요. 그래도 기본에서 벗어나지 않고 최대한 70년 전과 같은 맛을 내려고 노력하죠. 수십 년이 지나도 한결같은 정직한 냉면을 내놓는 게 오랜 바람이자 목표입니다.”
지하철 1호선 동인천역 연결 신포지하도 상가 23번 출구 1분 거리
주소 인천시 중구 신포로46번길 38
영업시간 11:00~21:00(화요일은 15:00까지)
브레이크타임 15:00~16:30, 주말·공휴일 16:00~17:00
대표메뉴 평양물냉면, 평양비빔냉면, 녹두지지미 등
※본 기획 취재는 (사)한국잡지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냉면이 뜨겁다. 2018년 봄,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평양냉면을 대접하면서 열기가 폭발했다. 그날, 서울의 냉면집들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다. 북한 ‘옥류관’ 냉면 때문에 평양냉면 붐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 이전부터 평양냉면은 음식, 맛집을 넘어서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되고 있었다. ‘평양냉면의 슴슴한 맛’이라는 표현이 여러 미디어와 개인 블로그, 유튜브 등에 떠돌아다녔다. ‘평양의 옥류관 냉면’은 불타는 장작더미에 기름을 얹은 격이었다.
냉면은 ‘오리무중’이다. 정체를 알기 힘들다. 의견도 분분하다. 정의를 내리기 힘들다. ‘면스플레인’이라는 표현이 있다. ‘면(麵)’+‘익스플레인(explain)’이다. 면, 냉면, 평양냉면에 대해 아는 체하며, 맛집 순위를 매기고, 남을 가르치려 드는 것을 이른 표현이다. ‘맨스플레인(man′s +explain)’에서 시작된 조어다.
이 글도 ‘면스플레인’의 일종이다. 냉면에 관해서 설명한다. ‘면스플레인’인지 냉면에 대한 올바른 지적질인지는 읽는 분들이 판단하시길.
국수, 냉면은 귀한 음식이었다
냉면도 ‘차가운 면’ 국수다. 냉면의 주재료는 메밀이다. 메밀은 ‘메[山]’+‘밀[小麥]’이라고 여긴다. 모가 났다고 해서 모난 밀, 모밀, 메밀이라는 설도 있다. 보리는 대맥, 밀은 소맥, 메밀은 교맥(蕎麥) 혹은 목맥(木麥)이다. 교맥, 메밀을 흔히 구황작물(救荒作物)이라 부른다. 구황작물은 곡식이 부족할 때 대체 작물로 사용한다는 뜻이다. 메밀은 구황작물이라기보다 상용작물(常用作物)이었다. 초여름 무렵 비가 부족해도 메밀을 대파했다. 다행히 메밀은 짧은 생육기간, 60~90일이면 수확할 수 있었다. 지질이 좋지 않아 농사를 짓기 힘든 땅에는 처음부터 메밀을 심었다. “곡식이 부족하니 메밀을 먹어라”가 아니다. 애당초 벼농사, 곡물 농사 짓기 힘든 땅에는 메밀을 심었다. 메밀은 주요 상용작물이었다.
메밀이 좋아서 메밀로 국수를 만든 것도 아니다. ‘메밀국수+동치미’의 조합은 좋아서, 먹고 싶어서 선택한 조합이 아니다. 비교적 편하고 쉬워서 등 떠밀려서 선택한 조합이다.
깊은 밤, 배가 출출하다. 입 다실 게 있으면 좋겠다. 메밀국수를 내린다. 한민족은 탕반(湯飯) 음식을 즐긴다. 국물 없는 밥상은 목이 멘다. 국물을 만들기 힘든 시간, 동치미 한 사발이면 국수를 말아 먹을 수 있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다. 안동에는 지금도 ‘국수 제사’가 남아 있다. 강원도 출신들 중 결혼식 때 막국수를 먹었다는 이가 많다. 경조사에만 사용했던 귀한 음식, 국수. 국수의 대중화 역사는 길지 않다. 냉면과 막국수는 크게 다르지 않다. 냉면과 국수, 막국수는 모두 국수다.
메밀 함량 묻지 마라
조선시대에는 메밀 함량이 어느 정도였을까? 추정컨대, 50%를 넘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제분기술이 낮아 디딜방아, 절구질, 물레방아를 이용해 제분했다. 절구질한 후, 고운 천 혹은 체 등으로 메밀가루를 내린다. 고운 가루는 아래로 떨어지고 깨진 껍질, 나머지 거친 입자는 그대로 남는다. 찌꺼기와 거친 입자를 다시 빻는다. 같은 방식으로 고운 가루를 내린다. 이 힘든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고운 메밀가루를 모은다.
가루 입자가 고우면 국수 만들기 좋다. 거친 입자는 국수 만들기 힘들다. 만들어도 면발이 고르지 않고 잘 끊어진다. 메밀국수 만들기가 쉽지 않은 이유다.
불행히도 메밀은 점도가 약하다. 국수 만들기가 간단치 않다. 점도가 약한 거친 입자. 기껏 국수를 만들어도 툭툭 끊어진다. 방법은 전분(澱粉)을 넣어 반죽하는 것이다. 전분은 녹말가루다. 전분을 넣으면 점도가 높아진다. 그나마 낫다.
막국수 노포에서는 대부분 ‘여름철에는 메밀 40%, 겨울에는 메밀 60%’를 고집한다. 나머지는 밀가루 혹은 전분이다. 전분이 많으면 국수는 반들반들 윤기가 난다. 냉면이나 막국수 모두 같다.
국수의 검은 점은 메밀껍질이다. 요즘은 메밀껍질이나 보리 태운 가루 혹은 색소로 검은 색깔을 낸다. 메밀껍질이 남아 있던 예전의 거친 냉면, 막국수처럼 보이려는 것이다.
메밀 함량이 몇 퍼센트이면 가장 좋은 냉면 혹은 막국수일까? 우문(愚問)이다. 시쳇말로 ‘개취(개인의 취향)’다. 어느 정도의 메밀 함량이 맛있는지를 묻는 것은 어리석다. 각자 개성에 맞춰서 고를 일이다. 메밀 함량이 낮고 높은 것은 ‘다르다’고 표현해야 한다. 어느 쪽이 틀린 것은 아니다. 이게 맛있고 저게 맛없다는 표현은 틀렸다.
1980년대 이전에는 대부분 사람의 힘으로 냉면, 막국수를 내렸다. 조선시대 말기, 대한제국 시기를 화가로 살았던 기산(箕山) 김준근(생몰년 미상)은 ‘국수 누르는 모양’이라는 풍속화를 남겼다. 사내가 벽의 높은 곳에 발을 딛고 온몸으로 국수를 내리고 있다. 유압식 제면기가 나오기 전에는 “국수 뽑는 사람치고 앞니 성한 사람 없다”는 말이 있었다. 국수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저녁에 국수나 한 그릇”도 쉽지 않았다.
예전에는 메밀 함량을 따지기 힘들었다. 귀한 음식, 국수, 냉면, 막국수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맛봤던 음식이었고 주방, 부엌에서 일하는 하인들이 있는 집에서나 먹었던 음식이다. 해방 후, 깊은 산골에서 잔치 때 나왔던 음식이 대중화했다. 메밀 함량을 따질 일이 없었다. 함량? 중요치 않았다. 그저 ‘국수를 내릴 수 있을 정도’면 됐다. 지금도 마찬가지. 자신이 원하는 면을 고르면 될 일이다.
계곡 장유의 ‘자장냉면’
언제부터 냉면, 막국수를 먹었을까? 막국수도 냉면과 다르지 않다. ‘막국수’라는 이름은 1960년대 이후 생겼다. 강원도의 메밀국수를 상업화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막국수와 달리 냉면은 뚜렷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 계곡(谿谷) 장유(1587~1638년)의 ‘계곡집(谿谷集)’에 나오는 냉면 기록이 가장 오래되었다. 이른바 ‘자장냉면(紫漿冷麪)’이다. 계곡은 이 시에서 “자줏빛 육수가 노을처럼 영롱하고, 옥가루가 마치 눈꽃처럼 내렸다”고 표현했다. 제목이 이미 ‘냉면’이다. 냉면에 대해 처음 언급한 문장으로 친다. 계곡이 ‘처음’ 냉면을 먹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기록으로는’ 처음이라는 뜻이다. 이전에도 냉면은 있었다.
계곡이 먹었던 냉면의 정체는 불확실하다. 자줏빛 육수가 무엇인지, 눈꽃처럼 내린 옥가루가 무엇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계곡은 광해군, 인조 시대에 높은 벼슬을 지낸 유학자다. 딸이 효종비 인선왕후다. 계곡은 우의정까지 지냈다. 지체 높은 집안이었으니 냉면을 먹었을 것이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고, 냉면은 반가의 음식이었다.
2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18세기 후반, 냉면이 다시 문헌에 등장한다.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년)이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에서 냉면을 언급한다. 시의 제목은 ‘서흥도호부사 임성운에게 장난삼아 지어준 시’다. 이 시에 ‘납조냉면숭저벽(拉條冷麪菘菹碧)’이라는 문구가 또렷이 나온다. “가지런히 당겨 만든 냉면이며, 배추김치는 푸르다.” 냉면과 배추김치[菘菹, 숭저]가 등장한다. 냉면 육수는 배추김치 국물이다. 이 시의 계절은 한겨울이다. 이불을 겹겹이 덮고 냉면과 노루고기 등으로 손님을 접대한다. 다산은 벼슬살이를 할 때 이 시를 남겼다. 냉면을 먹었던 곳은 황해도 서흥도호부로 대도시였다. ‘임성운’ 집안도 쟁쟁하다. 큰 도시의 행정관리 책임자, 권력자와 같이 냉면을 먹었다.
18세기를 넘기면서 냉면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먹는 이들도 다양하다. 서민들도 먹었다. 조선시대 말기의 문신 이유원(1814~1888년)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순조 즉위 초기 궁궐에서 냉면을 테이크아웃했다는 내용이 있다. 깊은 밤 달구경을 나왔던 순조가 냉면을 구해오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이 내용에는 돼지고기도 등장한다. 냉면과 돼지고기를 같이 먹었다.
순조의 냉면은 궁궐 밖 가게에서 구해온 것이다. 19세기 초반, 한양 도성에는 늦은 밤 냉면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냉면은 히트 메뉴였다
영재(泠齋) 유득공(1748~1807년)의 ‘서경잡절(西京雜絶)’에 나오는 냉면도 길거리 가게에서 파는 냉면이다. 영재는 음력 4월의 평양 거리 풍경을 그리면서 “냉면과 찐 돼지고기 값이 오르기 시작한다(冷麪蒸豚價始騰)”고 표현했다. 음력 4월이면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고 냉면 값이 오른다. 냉면은 길거리 주막 등에서 잘 팔리는 히트 상품이었다.
조선시대 후기 문신 이인행(1758~ 1833년)도 냉면에 대해 기록했다. 이인행은 순조 2년(1802년)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를 떠난다. 유배 과정을 기록한 ‘서천록(西遷錄)’에 동치미(?) 냉면이 등장한다.
“6월 초 이틀. 냉면을 즐기는 것이 이 지방(위원)의 풍습이다. 교맥으로 (국수를) 만든 후, 김치[沈葅, 침저] 국물로 (맛을) 조절한다. 눈, 얼음이 흩날리는 깊은 겨울에 쭉 마시면 시원하다”고 표현했다.
이미 냉면은 민간의 풍습이 되었다.
냉면은 전국적으로 널리 퍼진 음식이었다. ‘평양냉면’은 조선시대 말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대규모 상업화에 성공한다. 오늘날의 평양냉면이다.
계곡 장유(한양 혹은 경기도 안산/자줏빛 육수), 다산 정약용(황해도 서흥도호부/김칫국물), 순조의 냉면(한양/돼지고기), 영재 유득공(평양/돼지고기), 이인행(평안도 위원/김칫국물)의 냉면은 장소와 내용물이 모두 다르다. 메밀 함량을 짐작할 수도 없다. 1930년대 소설가 이무영이 남긴 기록에는 “경남 의령에서 한밤중에 냉면을 배달시켜 먹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장소는 머나먼 경남이다. 메밀 함량은커녕 어떤 색깔의 냉면인지도 불확실하다. 의령에서 한밤중에 냉면을 배달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냉면, 막국수, 평양냉면 요리는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불확실하다. 메밀 함량도 달라지고 있다. 어떤 것이 ‘전통, 정통 냉면, 평양냉면’인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함부로 ‘면스플레인’ 할 일이 아니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흔치 않은 시사회 초대를 받았다. 작가주의 소형영화지만 칸이 사랑하는 다르덴 형제의 새 영화라 시작부터 가슴이 설렜다. 다르덴 형제는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후보에 7번이나 오르고 2번의 수상을 거머쥔 그야말로 칸의 황제라 할만하다. 어느 해인가 다르덴 형제가 작품을 출품하지 않은 해에 수상한 감독은 그들이 출품하지 않은 것에 깊은 감사를 표한 적도 있을 정도이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대부분 사회 문제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집요할 만큼 물고 늘어진다. 그러다 보니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심심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달고 짠 외식에 시달린 미각이 평양냉면의 달관한 무미함에 위로받듯 할리우드의 속 빈 깡통 같은 소란스러움에서 벗어나 모처럼 영화의 세계에 진지하게 몰두한 시간이었다.
영화는 ‘다르덴 형제가 주목하는 가해자는 어떤 형상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집요하게 쫓는다. 그 역할을 주인공 제니(아델 하에넬 분)가 오롯이 감당한다. 그녀는 의사다. 그녀에게 잘못이 있다면, 진료시간이 끝난 이후 병원 문을 두드린 소녀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는 것, 그것뿐이다. 게다가 그녀의 죽음이 진료를 받지 못한 때문만도 아니다.
제니도 평범한 의사로 격무에 시달리는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애쓰며 좀 더 나은 종합병원에로의 탈출을 꿈꾸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사건은 해프닝 정도로 생각하며 지나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제니는 죄의식을 느끼며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녀가 알고 싶은 것은 사건의 진상이 아니라 소녀의 이름이다. 단지 소녀의 가족에게 그녀의 죽음을 알리기 위함이다. 바로 이 대목에 다르덴 형제의 시선이 숨어있다.
이 영화를 보다 보면 칸이 사랑하는 또 다른 남자 홍상수가 떠오른다. 그도 다르덴 형제 못지않게 수십 년간 인간의 문제를 끈질기게 추적해온 작가다. 그러나 홍상수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 숨어있는 추한 진실에 천착해 왔다면 다르덴 형제는 사회문제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제니의 죄책감 속에는 유럽이 처한 가슴 아픈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
죽은 소녀는 불법체류자로서 사회보장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험한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였다. 이는 유럽 사회가 외면하고 싶지만,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날 수 없는 문제이다. 감독은 이 부분을 들춰내며 우리들의 각성을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자극적인 장면이나 극적인 장치를 만들지 않으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그 마지노선이 바로 ‘이름 찾기’인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주변 인물들은 이름을 찾기 위해 다니는 그녀가 이해되지 않는다. 사실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 입장에서도 그녀의 죄책감은 과도해 보인다. 어쩌면 감독이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작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을 만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바로 이러한 우리의 감성이 얼마나 죄의식에 무뎌져 있는지를 생생하게 일깨운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이기적인가. 어느새 우리는 타인의 문제에 무감각하게 되어버렸다. 사회적 정의는 누군가가 지켜야 하는 것이고 나와는 무관한 듯 살아가고 있다. 문명화된 선진국들도 예외가 아니다. 트럼프의 등장은 이런 현상을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현실이 워낙 극적이라 오히려 다르덴의 심심함이 우리를 각성하게 하는지 모른다.
티저 포스터에 환자의 등을 응시하는 제니의 눈이 클로즈업되어 있다. 마지막에 제니의 눈은 환자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다르덴의 메시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극장을 나설 때 김춘수의 절창이 떠올랐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