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는 못 할 말이 없다”

입력 2026-01-30 06:00

[손주에게 한마디] 말에는 무게가 있다

(생성형 AI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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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말은 언어의 여러 속성 가운데 ‘창조성’을 가장 간명하게 드러낸 표현이다. 인간은 제한된 음운과 단어만으로도 무한하게 문장을 만들어낸다. 말은 생각을 옮기고 감정을 드러내며, 사실과 허구를 함께 실어 나른다. 그래서 말은 편리한 도구이면서 동시에 위험한 도구다. 이 말을 처음 실감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다. 특별활동 배정에서 우연히 웅변반에 들어갔다. 선택의 결과라기보다 남은 자리를 채운 일이었다. 마지못해 시작했지만 수업은 흥미로웠다. 두어 시간 수업을 했을 때쯤 교내 웅변대회가 열렸다. 모두 참여한 대회에서 ‘불조심’을 주제로 우등상을 받았다. 곧이어 열린 군 교육청 주최 웅변대회에 학교 대표로 나갔다. 즉석에서 받은 주제는 ‘산림녹화’였다.

황폐해진 산을 복구하기 위해 나무를 심는 군내 사방사업을 아버지가 추진하던 때였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산에 올라 나무를 심으며 산림녹화의 중요성을 몸으로 배웠다는 이야기로 웅변했다. 넘어지고 흙투성이가 되면서도 일했다는 대목에서는 감정을 실었다. 결과는 최우수상이었다. 놀랐고 기뻤다. 상을 들고 집에 돌아오자, 크게 기뻐한 아버지가 다시 해보라고 했다. 낮에 했던 그대로 웅변을 마치자, 아버지의 표정이 굳었다. 이어 단호하게 “그 상, 반납해라”라고 했다. 내가 한 말이 사실이 아니어서다. 나는 사방사업 현장 근처에도 가본 일이 없었다. 말은 그럴듯했으나 진실이 아니었다.

그날 아버지는 담배를 연신 피우며 혼잣말처럼 “땀은 몸 밖으로 나가면 다시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은 귀에 오래도록 남았다. 아버지는 웅변반을 그만두라고도 했다. 다음 날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교육청에 가서 반납 안 받는다는 상을 두고 나왔다. 전례 없는 일이어서 교육청도 난감해했다고 한다. 학교와 교육청을 찾아다니며 아버지가 사정을 설명하고 뒷수습을 한 일은 훗날에야 들었다.

세월이 흐른 뒤에도 아버지는 그 일을 늘 같은 말로 회상했다. “말로는 못 할 말이 없다.” 이어서 이렇게 덧붙였다. “언어는 개인이 혼자 만들어 쓰는 것이 아니다. 사회 구성원 전체가 공유하는 규칙과 체계가 있다. 따라서 언어는 사회적 합의와 관습을 통해 유지된다”며 ‘사회성’을 강조했다. 말씀이 길어졌다. “실천이 따르지 않는 말은 공허하다. 거짓은 진실을 이기지 못한다. 진실만큼 힘 있는 웅변은 없다. 평생을 살면서 진실만 말해도 다 말하지 못하고 산다.” 아버지는 또 이런 말씀도 자주 했다. “사람은 살아가며 듣는 시간이 말하는 시간보다 길다. 듣는 것이 45%, 말하는 것이 30%다. 귀는 둘이고 입은 하나다. 말은 줄이고, 듣는 데 힘써라.”

언제나 그랬듯이 아버지가 말끝에 고사성어를 여러 개 인용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고사성어가 ‘호령여한(號令如汗)’이다. 한번 내린 명령은 땀처럼 되돌릴 수 없다는 뜻이다. 땀이 다시 몸속으로 들어갈 수 없듯이, 임금의 조칙(詔勅)은 한번 발해진 이상 취소할 수 없다는 뜻인 ‘윤언여한(綸言如汗)’과 같은 말이다. 주역(周易) 환괘(渙卦)에 나온다. 원문은 이렇다. “‘환괘는 큰 명령을 땀처럼 내린다’ 했으니, 이는 명령이 땀과 같다는 말이다. 땀은 한번 나오면 다시 거두어들일 수 없다(涣汗其大號 言號令如汗 汗出而不反者也 환한기대호 언호령여한 한출이불반자야).” 땀이 몸에서 나가면 돌아오지 않듯, 말과 명령도 마찬가지라는 경계다. 말은 내뱉는 순간 책임이 따른다. 아버지에게서 저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거짓말했을 때도, 보고했을 때도,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도 그 말은 반복됐다. 잔소리였지만 효과는 분명했다. 무슨 일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한 번 더 생각하게 했다.

나이 들수록 그 말의 무게가 새삼스럽다. 아버지는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다. 소리와 의미가 결합된 기호 체계다. 따라서 말은 단순한 울음소리와 다르다”라고 말의 ‘기호성’을 중시하며 “의미를 담지 못한 말은 말이 아니라 소리일 뿐이다”라고 가르쳤다. 손주들이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그 말씀이 더욱 와닿는다. 손주들이 무슨 말을 해도 귀엽기만 하다. 앞뒤 없는 소리도 웃음이 된다. 그러나 언젠가는 하고 싶은 말을 가리지 않고 쏟아낼 나이가 올 것이다. 그때 무엇을 기준으로 말하게 할 것인가. 그 경계를 가르치는 일이 쉽지 않다. 경계는 지식이 아니라 태도에서 생긴다. 말재주보다 먼저 길러야 할 것은 진실을 존중하는 마음이다. 사실 앞에서 멈출 줄 아는 태도다. 듣는 법을 아는 인내다.

손주에게 꼭 물려주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말은 언제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말에는 되돌릴 수 없는 무게가 따른다. 진실이 없는 말은 오래가지 못하고, 진실을 담은 말은 굳이 크지 않아도 오래 남는다.” 그리고 반드시 일러주어야 할 교훈은 “말은 한번 내뱉으면 주워 담을 수 없으니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말로는 못 할 말이 없다’고 한 말은 허락이 아니라 경계(警戒)다. 말의 힘을 알수록 말 앞에서 더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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