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시끄러운 것을 참지 못한다. 음식점이나 술집, 당구장에서 옆자리가 시끄러우면 집중이 안 되고 화가 난다. 그냥 못 들은 척하라는데 그게 안 된다. 일반적으로 남자들은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못 한다고 한다. 대화를 하는데 옆자리가 시끄러우면 말해야 할 것을 까먹기도 하고 대화 상대자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없어 화가 나는 것이다. 못 들은 체하려 해도 큰 소리가 나는 쪽으로 귀가 열린다. 그러니 대화가 중단될 수밖에 없다. 손님이라면 누구나 다 같이 돈 내고 그 공간을 이용할 권리가 있는데 소음 유발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막걸리나 소주 같은 싼 술과 싼 안주를 파는 술집은 대부분 시끄럽다. 손님 중에는 점잖고 조용한 사람들도 있지만 교양 없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시끄러운 손님들 몇 테이블이 있으면 순식간에 분위기가 도떼기시장처럼 된다. 이런 곳에서 술을 마시다 보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스트레스가 더 쌓인다. 같이 소리를 지르다 보면 싸움이 나기도 한다. 한창 젊을 때는 싸움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다 보니 필자가 피해야지 하게 된다. 그래서 술집을 들어갈 때 시끄러우면 아예 발길을 돌려 다른 곳으로 간다. 당장 시끄럽지 않아도 테이블에 빈 소주병이 잔뜩 올라가 있으면 주의 대상이다. 단체 손님들도 역시 주의 대상이다. 단체 손님들은 말소리도 시끄럽지만 박수까지 치면서 난리를 칠 때도 있다. 이런 술집에 들어갔다가 그냥 나올 때는 주인에게 시끄러워서 못 앉겠다는 이유를 말해준다. 우리나라 술집 주인들은 주변 손님들 생각하지 않고 떠드는 사람들을 자제시키지 않는다. 손님이 떨어져 나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 같은 손님을 보면서도 뭔가 느껴야 한다.
늦은 시간의 당구장도 그렇다. 술을 1차 마시고 온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한 당구대에 여러 명이 같이 당구를 치는 경우, 승부욕이 더해져 한 큐마다 괴성이 터져 나온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태도는 전혀 없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미성년자들에게도 개방된 당구장이 건전하게 발전할 수 없다. 청소년들이 어른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뭘 배우겠는가.
전철 안에서 큰 소리로 통화하는 것도 우리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용인되어 있는 편이다. 공공장소에서는 통화를 자제하라는 포스터를 아무리 붙여놔도 소용없는 것이다. 큰 소리로 통화하는 사람에게는 대놓고 눈치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오래 통화하는 사람에게는 조언하기가 참 그렇다. 귀에 거슬리는 건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아예 전철 안에서를 못 하도록 조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맨 끝 칸에서만 통화를 허용하든지 해서 불편함을 줘야 한다. 그렇게 하면 불편함 때문이라도 전철 내 통화를 포기할 것이다.
우리나라 음식점들은 소음에 대한 배려가 전혀 안 되어 있다. 대부분의 서민 음식점들은 인테리어에만 신경을 쓴다. 벽면도 천정도 소음 흡수가 전혀 안 되니 소리가 그대로 반사되어 돌아온다. 천정을 좀 높이면 소음이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어느 정도 흡수된다. 벽면이나 유리창도 반듯하게만 할 것이 아니라 소음을 어느 정도 흡수하는 자재를 쓰거나 입체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물론 비용이 더 들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소음 공해’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봐야 할 때다.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더더욱 고민해봐야 할 사항이다. 어느 대체의학자가 쓴 책을 보니 이렇게 시끄러운 사람은 심장에 문제가 생겨 일찍 죽을 확률이 높다고 한다.
송파 구청장 배 당구대회에 출전하기로 했다. 동네 당구장 5명 대표인 것이다. 5명이 출전해야 팀 등록이 가능하단다. 3 쿠션 1명, 4구 250점 1명, 200점 2명, 300점 1명이 경합 종목이다.
원래 필자의 당구 실력은 200이다. 당구 좀 쳤다하면 누구나 200 선에 머문다. 150점대가 가장 많고 그 중 승률이 좋은 사람이 올려서 200점을 놓게 된다. 그런데 우리 동네 당구장은 200이 4명이나 된다. 다른 부문은 적임자가 있는데 300점을 치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처음부터 필자는 실력이 뒤진다며 다른 사람들을 추천했다. 그러나 리그전을 해야 공평하다며 굳이 리그전을 펼쳤다. 그랬더니 승률이 200점 세 명이 동률로 나온 것이다.
그래서 2명은 200점 부문에 출전하고 필자는 300점 부문에 출전하기로 했다. 실력은 200점인데 300점 부문에 출전하게 되니 참가에 의의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5명이 되어야 출전 팀 등록을 할 수 있다니 들러리를 서는 셈이다.
일단 300점을 놓고 동네 당구장 이 사람 저 사람과 경기를 해봤다. 200점은 주산 알 20개만 치면 되는데 300점은 30알을 놓고 쳐야 하므로 당연히 부담이 된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실력에 맞게 놓고 치므로 100전 100패가 당연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실제로 쳐 보니 이기는 경우도 있고 지는 경우가 물론 많았다. 원래 200점을 놓고 칠 때도 잘 될 때가 있고 안 될 때가 있었다. 파울을 범하면 벌점으로 몇 개 씩 더 치다 보면 주산 알이 25개 정도가 되는 경우는 좀 있었다. 그러나 30개는 무리였다.
자주 300점을 놓고 치다 보니 필자의 장단점이 나왔다. 필자는 당구에서 승부욕이 약하다. 그래서 정성들여 치지 않고 대충 치는 것이다. 남들은 파울을 겁내서 파울 가능성이 있으면 피해서 치는데 필자는 파울 가능성이 있어도 일단 치고 보는 성격이다. 고쳐야할 부분이다. 힘 조절도 능숙하지 않다. 당구공이 멀리 흩어지지 않으려면 정성스럽게 살살 쳐야 한다. 그런데 필요 이상으로 세게 치니까 공이 흩어진다.
필자는 3 쿠션을 연습하다 보니 4구만 치는 사람에 비해 난구에 강한 편이다. 그래서 남들보다 치는 방법을 더 아는 것이다.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이 있을 때 선택의 폭이 넓은 것이다. 당연히 3 쿠션에서 오래 걸리지 않는다. 30알을 다 치고 나면 3 쿠션으로 마감해야 하는데 상대방은 마지막 3 쿠션에서 오래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주산 알을 상대방이 먼저 털어내도 3 쿠션에서 수비를 잘하면 따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몇 번 이겨봤다.
필자의 당구 실력은 200점인데 300점을 놓고 치면 지는 것은 당연하고, 이기면 상대방이 곤혹스러워 한다. 그러므로 부담이 없다. 대회에 나가서도 승산은 없지만, 운 좋을 때는 필자도 한 큐에 10점 정도는 쳐대므로 그런 경우는 남은 주산 알 수가 원래 내 실력이므로 할 만하다.
200점대에는 원래 250 점대를 치는 사람들이 낮춰서 출전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므로 경합이 치열하다. 그러나 300점 대에서는 400점이나 500점을 치는 사람이 낮춰서 출전할 수는 있지만, 400점이나 500점을 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므로 오히려 부담 없이 경기를 치를 수 있을지 모른다.
옥시모론(oxymoron)은 수사학 용어로 ‘모순(당착)’을 뜻한다. 뜻이 대립되는 어구를 나열함으로써 새로운 뜻이나 효과를 노리는 수사법이다. 예를 들면 ’an open secret‘은 ’공공연한 비밀‘로 번역된다. ‘청순하면서 섹시하다는 말’도 그렇다. 일반적으로는 이해하지만, 청순과 섹시는 관계가 먼데 섹시하기도 하다니 어쩌라는 말인가.
유치환의 ‘깃발’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도 그렇다. 아우성은 시끌벅적해야 하는데 소리가 없단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도 겉으로는 웃고 있는데 속으로는 눈물이 난다는 의미다. ‘군중 속의 고독’도 그렇다. 군종 속에 있는데 고독하다니 말이 안 된다. 그러나 고독한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나 고독을 느낀다. 반대로 혼자 있어도 전혀 고독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다.
‘똑똑한 바보’도 겉과 내용이 다른 경우를 말한다. 겉보기에는 하는 일마다 잘되고 나무랄 데 없이 잘났고 똑똑해 보이는데 결과적으로 나쁜 결과가 왔다면 바보인 것이다. 조선시대에 젊은 날을 술과 여자에만 탐닉하던 인물들 중 나중에 왕이 되거나 큰 권력을 잡은 경우가 종종 있다. 일부러 바보 또는 난봉꾼 행세를 했던 것이지 숨은 뜻은 달랐던 것이다. 그래서 ‘옥시모론’을 ‘표층적 역설’이라고 풀이하는 모양이다.
세상의 모든 이치는 겉과 속이 다를 수 있다. 부자라고 해서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니다. 권력이 있다고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니다. 간혹 자살하는 재벌, 권력의 상층부에서 끝없이 추락하는 사람들을 보면 차라리 꼭대기보다 원래부터 낮은 데 있는 것이 더 나은 경우도 많다.
극과 극은 통한다. 아포가토(Affogato)가 그렇다. 하얀 아이스크림 위에 에스프레소를 부어서 먹는 커피 메뉴다. 흰색과 검정색이 잘 어울리는 것이다. 커피의 쓴맛과 아이스크림의 달콤한 맛을 함께 향유하는 즐거움이 있다.
세상 사는 요령은 옥시모론을 잘 활용하는 것이다. 필자가 싱글이라 외로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필자는 싱글이어서 외로울 틈이 없다.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지인들이 쉴 새 없이 연락을 해오기 때문이다. 스케줄이 없는 날은 더 바쁘다. 새로 나온 노래도 배워야 하고, TV에서 하는 영화나 스포츠 중계도 봐야 한다. 책도 읽어야 하고 당구 방송도 봐야 한다. 개인적으로 누가 돌봐줄 사람이 없으므로 빨래도 해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한다. 그야말로 과로사를 걱정해야 하는 백수인 셈이다. 이런 삶도 옥시모론이다.
곁에서 밥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잘 못 먹을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여기저기 맛집을 찾아다니며 더 잘 먹는다. 배우자가 있으면 아침에 남은 김치찌개를 다 먹어치울 때까지 내 놓을 것이다. 그러나 싱글은 메뉴를 겹치지 않는다.
‘외롭다’고 생각하면 정말 외로워진다. ‘차라리 혼자 쉬고 싶다’라는 생각을 가질 때면 ‘외롭다’는 사치처럼 들린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반대편을 보면 된다. 옥시모론을 활용하는 것이다.
60세가 넘으면 부끄러움도 모르고 뻔뻔해질 줄 알았다. 70세가 넘으면 대통령도 욕하고 무서울 게 없을 거라고 얘기한 사람도 많다. 얼굴이 두꺼워지고 감정도 무디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창피한 것도 모르고 두려움도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노인의 헛발질은 세상이 너그러이 봐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60대 중반에 들어섰는데도 변한 게 하나도 없다.
노래교실에서 수업 중인데 옆 테이블에서 한 아줌마가 내게 녹차를 한 잔 건넸다. 강사가 보더니 “무슨 일이죠?” 하며 눈총을 줬다.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은연중에 서로 갖고 있던 호감을 남들에게 들켜버린 것이다.
노래교실에서 필자에게 독창을 시킬 때도 여전히 긴장한다. 음정이나 고음 처리 때문이 아니라 목소리에 대한 자신감 결여 또는 남들 앞에서 노래 부른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합창을 할 때도 혹시 내 목소리가 튀지 않을까 조심한다.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할 때도 떨린다.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니 긴장이 되는 것이다. 순발력이 좋지도 않은 편이다. 다행히 강의할 때는 괜찮다. 조명도 어둡고 PPT 자료를 보고 하기 때문이다.
당구를 칠 때도 아직 흥분된다. 단순한 오락이지만 내심 승부욕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에게 내 기술을 멋지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작용한다. 그래서 술 한잔 하고 나서 당구를 치면 더 잘된다. 승부욕이 좀 가라앉기 때문이다.
물론 나이가 들어서 무디어진 것들도 있다. TV에서 야한 장면의 영화를 봐도 그저 그렇다. 이전처럼 본능이 자동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섹스 장면이 나온다 해도 너무 오래 지속되면 상업성으로 보여 오히려 채널을 다른 데로 돌려버린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감동적인 장면이나 슬픈 장면이 나오면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갱년기 현상이라고 하지만, 집에서는 혼자이고 영화관에서는 주변이 어두우니 별로 창피한 생각은 안 든다. 눈물이 스트레스 해소에 좋다니 오히려 즐기는 편이다.
리비도가 떨어지면서 얼굴이 좀 두꺼워지긴 했다. 그전에는 예쁜 여자랑 마주 보고 얘기할 때면 얼굴이 빨개지기도 했는데 그런 점은 많이 둔화되었다. 호르몬 작용이기도 하겠지만, 경험상 그녀와 개인적으로 연결될 막연한 가능성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은 감성이 살아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래도 세상 눈치는 보며 살아야지 나이 들었다고 봐줄 것이라는 생각은 안 하는 모양이다. 나이 70이 되어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본다. 그렇게 살다 간다. 인생은 그리 길지 않은 것 같다.
요즘 당구를 배우는 중.장년층이 많아졌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비용을 적게 들이고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가 첫 번째 이유다. 당구대 하나를 쓰는데 1시간에 1만 원 정도면 된다. 네 사람이 경기를 할 경우 1인당 분담금은 2,500원꼴이기에 당구를 2시간 하고 막걸리 한두 잔을 곁들인 저녁을 먹어도 2만 원 안쪽을 부담하면 된다. 둘째는 당구 게임 자체가 머리를 써야 하고 생각보다 운동이 꽤 된다. 셋째는 혼자서도 연습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두 사람 또는 그 이상의 다른 사람과 함께 할 수도 있는 스포츠여서 시니어들에 환영을 받고 있다. 다음 약속과의 시간이 많이 남아 있을 때 무료하지 않게 자투리 시간을 당구장에서 연습하며 보낼 수도 있다.
필자도 그런 이유로 근래에 당구를 신경 써서 배우기 시작했다. 직장을 그만둔 동창 한 사람이 당구장을 운영하면서부터 그곳에서 모임을 하면서 시작하게 되었다. 필자는 그때까지 당구봉을 잡아본 경험이 없었다. 옆에서 구경하다 보니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어울리기 위하여 게임을 하면서 배우기 시작했다. 배운다고는 하나 전문 지도자를 통한 것이 아니고 함께 당구를 치는 동창들이 한두 마디 해주는 교습이었다. 어떤 경우는 당구공을 치려고 자세를 취하면 옆에 다가와 자신이 직접 채를 잡아 방법을 시범을 보여주기도 한다. 다시 비슷한 위치에 공이 배치되어도 잘 맞추지 못한다. 그 이유는 당구의 기본 원리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순간의 지도이기에 그렇다. 수구와 제1 목적구가 맞고 분리되는 각도 등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그렇게 된다. 똑같은 상황이 왔을 때엔 지도 받았던 기억을 살려 그대로 공을 치게 된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분위기나 몸의 상태, 당구봉의 밀고 치는 힘의 강도 등에 가르치는 친구의 당구 수준이 차이가 나기에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밖에 없다.
사람은 누구나 가르치는 것을 좋아한다. 골프 연습장에 가보면 잘 알 수 있다. 배운지 얼마 되지 않는 골퍼도 새로 배우러 온 초보자에게 한 마디 해주기를 좋아한다. 당구장에서도 비일비재한 경우다. 체계적으로 당구를 배운 경우는 많지 않고 당구장에서 몸으로 익힌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이론적 배경에서 출발하지 않고 이렇게 치면 된다 한다. 그렇기에 설득력이 없게 된다. 또한, 초보자에게 한 마디 교습하는 당사자는 교습방법을 배우지 않아 늘 자기 기준에서 알려주기 때문에 초보자는 이해가 잘 안 되게 된다. 그 점을 간과하고 있어서 시키는 대로 한 경우에도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 경우가 빈번하다.
경험으로 보았을 때 경기 중에는 교습을 하지 않음이 좋다. 진정 알려주고 싶으면 게임이 끝난 후나 별도의 시간을 내어 개별 교습을 함이 바람직하다. 그뿐만 아니라 이 사람 저 사람이 한마디씩 하게 되면 피교습자는 오히려 더 헷갈리게 된다. 각자 내용이 조금씩 차이가 나기에 마련이다. 어느 당구 지도자가 당구를 배우려면 한 사람에게 꾸준히 배우라고 한 말에 동감이다. 필자의 경우는 텔레비전 당구 방송을 시청하고 당구 서적을 읽는 등 나름으로 열심히 독학한다. 당구장에서는 다른 사람이 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다. 게임을 할 때 친구들이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않고 지켜 보고 있으면 그동안 스스로 익힌 방법으로 괜찮은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동반자들이 참지 못하고 이렇게 쳐라, 저렇게 쳐라 하면 그 순간부터 흐름이 깨어져 공을 잘 맞히지 못한다. 자기제어가 되지 않는 점이 더 큰 문제지만, 진정한 가르침은 상대를 깊이 이해하는 측면에서 출발해야 한다.
친구에게 당구를 가르치려면 눈높이에 맞게 할 필요가 있다. “시작이 반이다”란 말이 있다. 골프나 당구를 비롯한 모든 운동도 그 시작을 제대로 하여야 성장할 수 있다. 그렇기에 섣부른 교습은 오히려 당사자에게 걸림돌이 됨을 기억해두자. “충고”는 돈을 받지 않으면 하지 말라고 조언해준 어느 상담사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는다.
동네 당구장에서 정기적으로 동네 사람들과 당구를 친다. 초보자도 있고 대부분 100~150수준으로 배우는 사람들이다. 나는 200이라 고점자 측에 든다. 물론 250도 있으나 200부터 고점자로 불러주는 경향이 있다.
나는 매너에서는 어디가나 흠 잡히는 일이 없는데 다른 사람을 통해서 매너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까칠하기로 소문 난 노인인데 오히려 듣는 사람이 화를 냈다는 것이다. 내가 싫으면 같이 안 치거나 안 나오면 되는데 굳이 찍어서 잘못을 지적하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내 잘못이란 쵸크를 너무 많이 칠해서 쵸크 분가루가 날린다는 것이다. 물론 눈에 보이지도 않고 날릴 정도는 아니지만 기분 상 그렇게 보았다는 것이다. 당구 큐는 칠 때마다 쵸크 칠을 해야 한다. 그런데 자기는 1만원에 3000원 정도 하는 분 가루 안 날리는 쵸크를 사용하는데 200이나 치는 사람이 싸구려 당구장 쵸크를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개인 큐 얘기도 나왔다. 당구장 큐를 사용하다 보니 손질이 잘 안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중간에 휜 큐도 있어서 큐 미스가 자주 나면 부득이 큐를 바꾼다. 200이나 치는 사람이 개인 큐도 없이 당구를 친다는 것이다. 개인 큐는 종류에 따라 가격은 천차만별이겠으나 대체로 무난한 것이 15만 원 정도 하는 모양이다. 프로들은 개인 큐도 종류별로 여러 개를 가지고 있고 마니아들도 요즘은 개인큐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나느 아직 개인큐를 꼭 가져야겠다는 생각은 없다. 못난 목수가 연장 탓을 한다고 아무 당구장에서나 준비된 큐를 사용해서 치면 되는 것이지 개인 큐를 항상 가지고 다닐 수는 없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마음에 안 드는 이유는 필자가 당구를 너무 세게 친다는 것이다. 물론 살살 칠 때도 있고 세게 칠 때도 있다. 고점들은 4구 대신 3 쿠션을 치기 때문에 대회전 같은 겨우는 세게 친다. 그래야 수구가 한 바퀴 돌아 적구까지 가기 때문이다. 공끼리 중간에 부딪히는 키스를 빼기 위해 두껍게 치다 보면 수구의 힘이 줄어들기 때문에 세게 치는 경우도 많다. 늘 살살 치는 사람과 치다가 내가 세게 치니까 정신이 없다는 얘기였다.
한번은 당구를 다 치고 당구장 문을 나서는데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이 노인네가 필자를 부르는 소리였다. 당구를 다 쳤으면 공과 쵸크를 제자리에 갖다 두는 것이 매너인데 순간적으로 일반 당구장처럼 다 치고 그냥 나온 것이다. 물론 내가 잘못했다. 나라면 모르고 갔을 수도 있으니 대신 챙겨주었을 것이다. 공을 박스에 담아 카운터에 갖다 주는 일이므로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일단 잠시 깜빡했다며 실수를 인정하고 공을 담았다.
결정적인 이유는 이 노인네가 120 정도를 치는데 매번 나와 경기를 하면 압도적으로 진다는 사실이다. 져서 기분 좋은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종목이나 고점자가 이기는 확률이 높다. 경험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영향을 거의 안 받는다. 당구에서는 승패는 병가지상사라서 져도 그만이다. 그런데 이 노인네는 나랑 경기할 때 여러 가지가 마음에 안 들기 때문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뜻하지 않게 적이 생긴 셈이다.
고향에 둥지를 틀고 주말부부로 생활한 지도 어느덧 6개월로 접어든다. 아직도 마음은 반반이다. 사실 고향이라고는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만 달랑 보낸 시간은 불과 14년이지만 나머지의 대부분을 서울에서 보냈으니 어찌보면 내고향은 서울이라고 해도 잘못된 것은 없으련만 아직도 고향은 영종도라는 고정관념은 지워지지 않는다. 아마도 영원히 고향은 영종도일지도 모르겠다. 조상대대로 터잡아 살아왔고 나 또한 이곳에 탯줄을 묻었으니 이곳이 고향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몇십년을 살아온 서울은 자연스럽게 타향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고향에서 홀로서기를 하는데는 나름 인내심이 필요했다. 달랑 거실 딸린 방하나 얻어서 숙식을 하고 회사에 출,퇴근을 하다보니 평소 겪어보지 못했던 불편한 일상의 많은 것들 앞에서 당황해 하기도 했다. 밥짓고 국이나 찌개 끓이고, 물론 기본 밑반찬은 서울에 있는 아내가 챙겨주지만 나머지 모든 것을 나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그나마 고교시절에 자취생활을 했던 경험을 되살려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열심히 살다보니 이제는 나름 살림의 지혜도 새록새록 늘어가고 있다.
외로운 고향생활(?) 중에서도 그나마 위안을 삼는 것은 어린 시절 소꿉친구들이다. 초등학교 졸업이후 각자의 처한 삶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던 친구들이 은퇴시기를 맞이하여 고향에서 다시 뭉쳤으니 그 반가움이야 오죽하랴. 육십 중반을 넘어가고 있는 나이에 소꿉친구들은 고향에서 의기투합했다.
매주 토요일이면 당연스레 아지트가 되어버린 당구장으로 모인다. 다섯명의 소꿉친구들이 모여 신나게 당구를 치고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반주도 겯들인다. 아느새 어린 시절로 돌아간 친구들은 잊혀져 가던 어린시절의 별명을 불러가며 걸죽한 입담을 자랑한다. 참으로 정겹다. 늦은 저녁을 먹고는 우르르 몰려가는 곳이 바로 나의 보금자리 원룸이다. 그곳에서 다시 바둑을 둔다. 고만고만한 실력에 서로 훈수 두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면서 으름장을 놓지만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입이 근질근질하여 훈수를 안하고는 못배긴다.
그렇게 밤 11시가 넘은 시간까지 왁자지껄 떠들면서 놀다보니 이제는 재미가 붙어 다음 약속까지 챙기고서야 헤어진다. 오늘은 주말도 아닌데 호출이 왔다. 퇴근하는 즉시 당구장으로 오란다. 퇴근시간이 은근히 기다려지는 이유다. 꽃피는 봄이 오면 주말에 모여서 이곳 저곳 고향 근처의 섬탐방을 계획하고 있다. 여름에는 텐트하나 싣고 무인도에라도 가서 낙시줄을 드리우다가 운수 사납게 걸려나온 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여 소주 한 잔으로 우정을 다져볼 생각이다.
붉게 물들어가는 석양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수평선 아래로 꼴까닥 넘어가며 마지막으로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처럼 가라앉는 일몰을 바라보면서 기울어져 가는 소꿉친구들의 삶을 관조해 보는 시간도 가져볼 요량이다.
어둠이 장막을 치면 모닥불을 피워놓고 하룻밤 야영을 하면서 조개도 줍고 낙지도 잡아 영양보충도 하면서 뒤늦은 우정을 활짝 피워볼 생각이다. 생각만 해도 설레이는 소꿉친구들, 이래저래 소꿉친구들과의 우정이 깊어가는 삶을 구상하고 있다.
어떤 해결해야 할 사안이 생겼으나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 않아 전전긍긍할 때가 많다.
사람은 누구나 문제가 생기면 풀기 위하여 매달리게 마련이다. 붙들고 늘어질수록 더 답답해지기만 했던 경험을 한둘은 가지고 있지 싶다.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의 하나로 고스톱 화투를 많이 치던 시절이 있었다. 이때 자주 쓰던 말이 있다. 화투패를 들고 오랫동안 생각을 한 후 패를 내려놓으면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와 상대방의 패를 이롭게 했다. 이때 비유로 들던 말이 있다. 바로 “장고 끝에 악수 둔다”가 그것이다. 잘하기 위하여 한참을 궁리한 끝에 내려진 행동의 결과는 오히려 상대방에게 유리한 국면을 만들어주었다.
골프 게임에서도 비슷한 국면을 경험했지 싶다. 어드레스를 오래 할 경우 샷은 대체로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았다. 우연의 결과였을까? 아니면 일리 있는 일이었을까? 오랜 생각 끝에 나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오래 생각하면 더 나은 결과나 아이디어를 찾아야 함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신선한 해답을 찾기 위하여 골몰한다. 그 답을 쉽사리 찾은 경우도 있었겠지만,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았다. 좋은 해결점을 찾지 못하여 오히려 전전긍긍하지 않았던가? 오히려 미궁 속으로 빠져들기도 했을 터이다. 오히려 자유분방했던 다른 사람이 쉽게 해결방안을 제안하여 놀란 적이 있지 않았나?
그렇게 되는 근본적 이유가 있다. 사람의 뇌는 긴장이 풀리면 오히려 “알파(a)”라는 느린 뇌파를 발생하는데, 이 알파는 창조적 뇌 활동을 촉진한다고 한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상태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나 영감이 떠오른다고 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얘기에서도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연구실에 있을 때보다 샤워할 때 아이디어가 더 샘 솟는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아르키메데스도 목욕 중에 유레카, 즉 번득이는 지혜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우리도 종종 그런 경험을 가졌다. 산책하는 중에 또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린 체험도 있다. 그 이유가 바로 뇌 활동 상태에서 찾을 수 있다. 긴장을 풀어야 한다. 그러므로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하게 되면 오히려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아르키메데스의 경험처럼 목욕 중에 아이디어를 발견한 것도 따뜻한 목욕물로 몸을 이완시킨 결과에서 얻어진 아이디어라고 볼 수 있다. 화투판에서 오랜 생각으로 뇌를 긴장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더 나쁜 수를 두었음이다.
뇌 과학자들은 이렇게 논술하고 있다. “뇌는 쉬게 할수록 판단력이 좋아지나 지나치게 심사숙고 하면 오히려 판단력을 그르칠 수 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유사한 경험들을 많이 했다. 수능시험에서도 그랬다. 판단이 확연하지 않았던 문제에 다다랐을 때 순식간에 스치는 판단으로 한 시험문제의 답을 다시 생각하고 생각하여 고치면 십중팔구는 틀렸던 경험이 있다. 때로는 육감으로 판단하는 것이 유리한 결정을 내릴 수도 있음이다. 경험이 많은 사람보다 전혀 경험이 없는 사람의 생각이 더 창조적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타성에 젖어 고정관념에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출퇴근 시간이나 사무실의 구조 등이 자유분방한 구글 직원들의 근무태도가 창조적 아이디어를 끌어내는 데 한몫을 하고 있음이 웅변해주고 있다.
생각이 떠오르지 않거나 주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 너무 매달리기보다는 산책이나 목욕, 이발처럼 전혀 다른 생각이나 행동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쓰던 글이 풀리지 않을 때, 그 자리에서 끙끙대지 말고 박차고 일어나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그냥 길을 걸어도 보자. 아니면 당구장에서 큐로 당구공을 겨냥해보자. 노래방에서 소리도 질러보자. 아이디어가 번개같이 다가오리라.
이번 겨울에는 감기 때문에 약간 고생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감기 한번 안 걸린 강체질이었는데 이번에는 좀 무리한 탓이다. 밤을 꼬박 새며 당구치고 술을 마시고 나니 몸에 무리가 온 모양이다. 그것도 작년에 3번이나 그랬다. 필자보다 너댓 살 또는 띠동갑들하고 같이 어울리자니 그런 무리가 따랐던 것 같다. 술도 많이 마시면 몸이 힘들어 한다. 당구도 승부욕이란 게 있어 전력투구를 다 하다 보면 지친다. 초저녁에 만나 우선 저녁식사 겸 막걸리로 시작한다. 올 사람이 다 오면 술도 깰 겸 당구치러 간다. 여기서 이긴 사람은 게임비를 내고 진 사람은 2차 술값을 낸다. 2차 술자리에서 다시 당구 얘기가 나오면서 승부욕을 자극하면 다시 2차로 당구 치러 간다. 이미 많이 취했기 때문에 당구도 잘 안 되고 게임 당 시간만 오래 간다. 이미 대중교통 막차가 끊긴다. 일단 출출하니 잔치국수라도 먹자며 다시 술집에 간다. 그리고 다시 당구장에 가서 몇 게임 더 하고 나면 어정쩡한 시간이 된다. 몇 판 더 치면 전철이 다닐 시간이니 더 치자며 승부욕을 불사르는 사람이 나오게 마련이다. 그렇게 아침에 당구가 끝나면 다시 출출하니 해장국집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헤어지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보통은 집에 가자마자 잠을 보충한다. 그러나 이미 창밖은 밝아서 잠이 잘 오지 않는다. 너무 피곤하면 오히려 잠이 잘 오지 않는 것이다. 뒹굴거리다가 오후에 다른 약속이 있어 또 집을 나선다. 잠을 못 자서 허공을 딛는 느낌이다. 다시 뒤풀이로 이어지고 집에 오면 이틀이 무척 길게 느껴진다.
그렇게 무리를 했으니 몸에 이상이 생긴다. 필자는 원래 기관지가 약하다. 편도선이 비대해서 말을 많이 하거나 하면 목이 아플 때가 종종 있다. 이번에는 기침이 심했다. 낮 시간은 그런대로 넘길 수 있는데 밤에 계속 기침이 나오면 잠자는데도 지장이 많다. 스케줄도 없었지만, 기침 때문에 술을 며칠 걸렀다. 그러나 기침은 멎지 않고 계속 되었다.
결정을 해야 했다. 약 먹기를 싫어하는데 감기약을 사 먹어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감기약이라고 해야 2천원짜리 화이투벤 한 갑이면 통한다. 지인 중에 이비인후과 의사가 있어 물어 보니 약국에서 파는 약은 효과가 약하니 병원에 와 보라는 것이었다. 약국 약도 먹기 싫은데 병원까지 가서 약을 탄다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날 저녁에 모임이 있었다. 식사와 술을 겸하는 자리인데 술은 마시고 싶지 않으면 감기 핑계로 술은 안 마셔도 되었다. 그런데 술이 오히려 약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국 약은 먹으면 입안이 마르고 얼굴도 초췌해지는 느낌이다. 소변도 노랗고 내 자신이 병자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래서 약은 되도록 안 먹으려 하는 것이다. 막걸리를 마시게 되면 일단 감기약 투약은 미뤄야 한다. 일단 막걸리를 마셔보기로 했다. 맛있고 기분 좋고 약국 약과 비교하여 좋은 점이 너무나 많다.
그렇게 아침에 일어나니 목감기가 호전되어 있었다. 침 넘김이 부드럽고 기침도 멈췄다. 내겐 막걸리가 감기약보다 좋은 효과였다. 다시 이비인후과 의사 친구에게 이 얘기를 하니까 사람에 따라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감기는 원래 약 먹으면 보름 후에 낫고 안 먹으면 15일 후에 낫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막걸리 때문이라기보다 나을 때가 되어 나은 것이라는 것이다.
새해 새 각오이다. 새해까지 갈 필요도 없이 지금부터도 당장 유효한 각오이다. 막차를 타고 귀가했더라면 문제없었을 텐데 밤새 놀다보니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
주로 어울리는 대상들이 많게는 10년부터 적게는 이삼년 연하의 남자들이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 주말에 번개모임을 한다. 모이면 술 마시고 당구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술 마시고 당구치기를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전철 첫 차가 다닐 시간이 된다. 그전에 당구가 끝나면 일부러 전철 첫차 시간까지 시간을 끈다. 정작 전철이 다니기 시작하면 해장국으로 아침 식사까지 하고 헤어진다. 귀가해서 잠을 보충하려 해보지만, 동이 터서 창밖은 환하고 사람들 소리가 들려 제대로 잠을 청하기도 어렵다.
올해 벌 써 세 번이나 밤을 새우며 그런 짓(?)을 했다. 처음에는 연하의 친구들과 전혀 기울지 않게 버텨낸 체력에 자부심을 가졌다. 적어도 체력적으로 밀리지는 않는다는 자신도 있었다.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몇 시간 후 3시간 걷기 운동모임에도 바로 나갔을 정도였다.
당구라는 공동의 놀이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내 또래 시니어들은 당구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젊었을 때는 당구를 쳤더라도 너무 오래 안 치다 보니 흥미를 잃은 사람이 많다. 당구라는 것이 어울려 치다보면 묘한 승부욕이라는 것이 생긴다. 승패는 병가지상사라 하지만 일단 이기면 기분 좋고 지면 서운하다. 승패에 따라 게임비, 술값 등을 부담해야 하므로 이기려고 애쓴다. 한번 이겼으면 매번 이기면 미안하므로 그 다음 판은 져주자는 것은 아니지만 져도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느슨하게 친다. 진 사람은 이기고 싶어 하고 이긴 사람은 피할 수 없으므로 응해준다. 그러므로 밤을 새우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밤샘을 하고 나서 감기가 제대로 걸렸다. 20년만인지 하여튼 아주 오래간만에 감기라는 것을 제대로 앓게 된 것이다. 계속된 연말 모임에 지쳐있었고 그날은 이른 오후부터 만나서 술판을 벌였으므로 술도 꽤 취했다. 술을 깨자며 시작한 당구가 연전연패였다. 아침에 귀가하는데 택시나 전철을 탔으면 덜 했을 텐데 전철역이 멀어 버스를 갈아타며 오다 보니 길거리에서 떨어야 했다. 그리고 감기가 왔다. 일주일을 꼬박 앓았다.
10년 전 쯤 동호회 활동을 할 때도 끝나면 늘 뒤풀이를 했다. 일차에서 끝나고 헤어지면 좋은 마음으로 갔을 텐데 2차로 이어진 술자리에서 문제들이 생기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술이 취한 이유도 있고 몇 사람으로 압축되다 보면 깊은 수준의 대화가 오간다. 단출한 자리라서 좋을 때도 있지만, 돌이켜 보면 사고는 야밤에 일어났던 것이다. 술자리에서 다툼이 일어나고 택시 기다리다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등의 사고이다.
어느 자연주의 생활을 주장하는 사람의 책을 읽어보니 ‘날이 어두워지면 외출을 삼가하라’고 했다. 마귀가 활동하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술꾼들은 술시가 되어야 그때부터 술 맛이 난다고 한다. 대낮에 술을 마실 수는 없으니 어두워져야 술을 마시게 되는 것이다. 술꾼들이 술의 매력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당히 마셔야 한다. ‘적당히’의 기준이 전철 막차 시간인 것이다. 새해 행동 지침이다.
이번 감기가 좋은 경고였다. 더 이상 밤을 새울 체력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아쉽더라도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밤에는 자야하고 낮에는 깨서 활동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다. 밤낮의 리듬에 맞춰 살아야 한다. 그래야 오래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