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외래교수로 활동해온 이용덕(64) 씨가 도슨트에 관심을 두게 된 건 화가인 지인 덕분이었다. 스마트폰 대화방을 통해 지인에게 매일 아침 조선의 미술사에 대해 듣게 된 것. 그렇게 2년여를 들으니, 제법 지식이 쌓였고 미술에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저 나름대로도 한·중·일 미술사 책을 사서 읽으며 관심을 키워갔죠. 또, 아내가 공예를 전공해서 해외에 나가면 꼭 그 지역 미술관을 함께 들르곤 했거든요. 이래저래 자연스럽게 미술에 대한 영향도 받고 지식도 차올랐죠. 그러던 중에 서울시어르신취업지원센터에서
김한승(金漢承·52) 국민대학교 교수는 저서 ‘나는 아무개지만 그렇다고 아무나는 아니다’의 여는 글에서 인간을 ‘평범하게 비범한’ 존재라 일컬었다. 이는 ‘평범하지만 비범하다’거나 ‘평범하고도 비범하다’는 말이 아니다. 풀어 설명하자면 개개인은 저마다 비범하지만, 한편으론 모두가 그러하기에 인간의 비범함은 곧 평범하다는 얘기다. 따라서 우리는 누군가를 차별해서도, 차별받아서도 안 되는 존재라는 것. 그는 이러한 철학적 사유를 확장하기 위한 토대로 ‘인류 원리’라는 다소 낯선 주제를 끌어왔다. 김한승 교수의 책을 읽은 이들의 감상평에
퇴직하고 나서도 유유자적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이 드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당당하게 늙어야 한다. 누군가의 아버지, 할아버지로 내가 없는 제2인생이 싫어서 큰마음 먹고 평생 생각하지 못한 길을 택했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출신 이발사 조상현(68) 씨. 지금 생각해도 이 길을 택하길 참 잘했다. 어찌 이보다 더 좋을 수 있겠는가. 마산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너와나 이용원’. 대부분의 이발소가 7시에서 8시 사이에 문을 연다는데 이곳은 오전 10시에 연다. 게다가 월, 수, 금은 오전 봉사 일정이 있기 때문에 1
나무를 좋아해 나무와 더불어 한평생을 살았다. 늘 나무를 심었다. 애지중지 가꾸고 돌보고 어루만졌다. 몸뿐인가. 마음까지 나무에게 바쳤다. 그 결과 들판 가운데에 있던 황무지가 장엄한 숲으로 변했다. 거대한 정원이 태어났다. 들어보셨는가. 나주시 금천면에 있는 죽설헌(竹雪軒)이다. 사건의 주인공은 한국화가 박태후(64). 사건? 그렇다, 가히 ‘사건’이라 할 만하다. 개성적인, 너무도 개성적인 초대형 개인정원을 만든 게 아닌가. 정원 면적은 자그마치 14만㎡(약 1만2000평). 대략 축구장 6개를 합친 크기의 정원이다. ‘이 사
한복을 입고 표지 촬영을 진행하는 연기자 정혜선을 보면서 새삼 한복이 무척 어울리는 배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시청률 60%를 넘긴 전설적인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 딸을 구박하는 독한 어머니 모습으로 기억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그 이전이나 이후로나 국민 어머니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많은 드라마에서 어머니 역을 맡아 열연했던 그녀는 곧 팔순을 바라보는 1942년생이다.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생기가 넘치는 자태를 보니 어쩌면 긴 세월 빚어낸 어머니 상이 우리에게 영원처럼 고정된 게 아닐까 싶었다. 정혜선은 1961
중학교 도덕 선생 출신에 생활지도부장으로 명예퇴직했다는 ‘루비밴드’ 리더이자 드러머 박혜홍 씨. 교사 시절 학생들과 함께 밴드를 만들어 합주했던 경험이 밴드 탄생에 크게 도움이 됐다. “젊을 때는 제가 교사로서 굉장히 인기가 많았어요. 유머감각도 많았고요. 그런데 아이들은 역시 젊은 선생님을 좋아하더군요. 나이 들고 도덕 선생이다 보니 잔소리가 늘고 그래서 학생들과 점점 멀어졌습니다. 크리스마스카드도 조금씩 줄더라고요.” 다시 한번 인기를 되찾아볼까(?) 싶어서 학교 주위를 둘러보니 밴드활동하는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고 했다. “그
평범한 세일즈맨의 일생이었다. 그저 그 누구보다 안정적이고 무난한 삶을 원하는 이 시대의 가장.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 또 하루를 지내다 보니 어느덧 베이비붐 세대라는 꼬리표와 함께 인생 후반전에 대한 적잖은 고민을 시작해야 했다. 지금까지 숨죽이고 조용히 살았으면 됐다 싶어 너른 멍석 위에 윷가락 시원하게 던지듯 직장 밖으로, 세상 밖으로 나와버렸다. 전반전 인생이 무채색이었다면 후반전은 돌고 도는 윷판 속에 수만 가지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다는 윷놀이연구소의 조광휘(趙光彙·56) 소장을 만났다. 용산구 효창원로 백범김구기념관에서
몇 년 사이 부쩍 가까워진 나라가 있다면 곧장 베트남을 떠올리게 된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이자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 팀을 아시아 최고 팀으로 환골탈퇴시킨 박항서 감독의 활약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박 감독의 베트남 입성 훨씬 이전부터 ‘브랜드 코리아’를 알리며 실질적인 협력과 양국 간 우호 증진에 힘써온 이들이 있었다. 바로 한국 정부 파견 봉사단 월드프렌즈코리아에서 운영하는 ‘월드프렌즈 NIPA자문단’이다. 무역투자 부문 NIPA자문단원으로서 지난 3년간 베트남에서 동분서주했던 정동식 씨를 만났다. 그는
그의 달항아리를 보고 있으면 묻혀 있던 기억들이 클로즈업된다. 빙렬을 따라온 과거의 시간들은 오늘의 사연과 물들며 포개진다. 누군가의 서사를 복원해내듯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선들은 우리 삶의 무늬를 빼어 닮았다. 최영욱(崔永旭·55) 작가가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우연히 만난 달항아리도 그랬다. 부정형의 자태는 과묵하고 겸손했지만 할 말은 다 했다. 지쳐 있던 그에게 한마디 건네는 것 같았다. 위로받듯 주저앉아 한참을 바라봤다. 집에 돌아와서도 당당한 그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그는 마치 수행하듯 달항아리
“고2 때 친구들과 남산에 올라갔어요. 서울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여고 동창생들로 보이는 어르신들이 ‘학생, 사진 좀 찍어줄래?’ 하며 카메라를 내밀더라고요. 먹고살기도 힘든 시절이라서 언감생심 만져보지도 못한 카메라였어요. 친구들끼리 서로 미루다가 그분들이 일러준 대로 셔터를 눌렀죠. ‘찰칵’ 하는 소리가 기막히더라고요.” 까까머리 소년은 그날 손끝으로 느꼈던 셔터 음의 짜릿함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그리고 그 소년은 칠순을 넘긴 지금까지도 카메라와 함께 살고 있다. 사진을 배우고 싶어 하는 학생들까지 가르치느라 하루도 쉴
월드프렌즈코리아에서 보내는 해외 파견 인력 중에서도 가장 전문성을 요하는 집단이 바로 월드프렌즈 NIPA자문단인 듯싶다. 50대 이상, 10년 이상 한 분야에서 잔뼈가 제대로 굵은 검증된 전문가를 찾기 때문이다. NIPA자문단에 지원하는 사람들에게 안타까운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전체 직위가 공고되더라도 그 자리에 딱 들어맞지 않는다면 탈락할 수 있다. 외국생활을 해야 하니 신체검사 또한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두 번이나 거쳐 NIPA자문단원 활동을 완벽하게 소화한 사람이 있다. 바로 우간다와 아제르바이잔에서 NI
충북 제천의 한 마을 산자락. 작은 집 짓기 마무리 작업을 위해 모인 한겨레작은집건축학교 수강생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18㎡(5.5평) 규모의 목조 주택을 8일 만에 완성했다니 믿기지 않는다. 들여다보니 침실, 욕실, 주방은 물론 작은 거실까지 갖춰져 있다. 일명 자크르 하우스를 통해 미니멀 라이프의 철학을 배우고 실천하는 현장이다.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닌데 벌써 300여 명이나 이 학교를 다녀갔다고 한다. ‘3대에 걸쳐 사는 집’이라는 말이 있다. 조부모가 산 집의 빚을 손자 세대에 가서야 비로소 갚는다는 의미다. ‘사는(li
2013년 이근후(李根厚·85) 이화여대 의과대 명예교수가 펴낸 책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는 40만 부가 넘는 판매고를 올리며 스테디셀러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당시 책의 서두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이 “컴퓨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했던 이 교수. 그러나 최근 저서 ‘어차피 살 거라면, 백 살까지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에서는 시력이 나빠져 컴퓨터를 할 수 없다고 털어놨다. 상실감이 적지 않았지만 그는 늘 그렇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즐거움을 찾아냈다. 이근후 교수는 오래전부터 삶의 어려움이 닥칠 때마
1996년부터 현재까지 성동복지관 주방에서 노인과 장애인을 대상으로 봉사활동을 해온 김혜숙(66) 씨. 음식 솜씨 좋고 마음씨 따뜻한 그녀는 최근 ‘사찰음식 전문가’로 제2인생을 살고 있다. 평범한 주부였던 김 씨가 사찰음식에 눈을 뜬 것은 남편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됐다. “2004년에 남편이 급성심근경색 진단을 받았어요. 남편의 건강을 위해 음식에 더 신경을 쓰기 시작했죠. 그러다 봉사를 다니던 성당의 수녀님이 자격증을 따보라고 제안하셨어요. 음식에는 자신감이 있던 터라 도전해보기로 마음먹었죠.” 도서관과 학원을 오가며 1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