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연말연시에 할 일도 많고 바빠지겠지만, 크리스마스 생각을 하면 어린 시절의 추억에 가슴이 촉촉해지고 그리운 마음이 차오른다. 필자는 딸만 셋인 집의 맏딸이다. 아버지는 딸 셋을 큰 사랑으로 키워주셨다. 그런데 집안의 장남으로 딸만 두었다는 게 좀 문제가 되기도 했나보다. 당시만 해도 남아 선호사상이 만연했을 때라 엄마는 아들을 낳지 못한 설움을 톡톡히 받으셨다고 한다. 작은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을 아버지에게 양자로 주겠다는 제의까지 할 정도로 엄마에게 아들 없는 압박이 심했는데 아버지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시고
사람은 언제 행복함을 느낄까? 행복은 아는 것보다 느끼는 것이 우선인 것 같다. 필자가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처음 경험한 것은 결혼하고 약 8년이 지났을 무렵이다. 아내가 성당에서 영세를 받고 다음 해인 1989년 필자가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영세를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영세는 절대자인 신으로부터 과거의 모든 죄에 대해 사함을 받는 것이다. 필자는 이날 큰 은총을 받았다. 살면서 수없이 많은 죄를 짓고 허물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고 하니 어찌 행복하지 않았겠는가. 더욱이 아내와 함께 종교를 갖게 되어 같은 신앙생
현재 시니어들은 국가와 가정을 위해 몸을 혹사하고, 마음 돌볼 시간조차 없이 열심히 살아온 세대다. 그래서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지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회복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상식을 제대로 갖고 있지 못하다. 이제 내가 누구인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야 할 때다. 이번 호에서는 명상의 대가 안동환 코치를 만나봤다. ‘마음공부’를 통해 나를 알고 내 마음을 간수하는 법을 터득하면 좋겠다. ‘몸을 느끼
대학 2학년 때인 12월 24일 오후 5시 무렵, 소공동 미도파 백화점 옆에 있는 맥스웰인가 그 비슷한 이름의 커피숍에서 남녀 학생 10명 정도가 자리를 함께했다. 같은 과 남자친구 대여섯 명이 오래전부터 각자의 재주와 인맥을 총동원해 다른 대학 여학생들과의 미팅을 주선해 크리스마스이브를 함께 지내기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필자도 주변 인맥을 총동원해 알아봤으나 단순한 미팅이 아니라 밤새 함께 지내는 조건이다 보니 아무리 점잖게 행동하겠다고 다짐을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먼 친척 여동생의 협조 하에 필요한 비용은 남학생이 전부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과 같이 행복한척하면 행복해진다. 행복이란 다분히 주관적 이여서 사람마다 행복의 느낌은 다 다르다. ‘날씬한 몸매에 독신에다 돈 많은 것이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그보다는 높은 자부심과 사교적 생활, 그리고 자제력이 내적 행복의 티켓이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행복하냐?’의 물음에 대해 심리학자들이 내린 결론 이라고 한다. 호프 대학의 심리학자 마이어스씨는 앞으로 행복해질 것으로 점칠 수 있는 네 가지 특성을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이 특성들은 자부심, 자제력, 낙천주의, 그리고 사교적 성
사람은 세상에 태어날 때 엄마 배속에서 탯줄을 달고 나온다. 탯줄은 아기의 생명줄이자 엄마와 이어지는 인연 줄이다. 부모와의 인연 줄에 따라 인생의 운명이 달라진다. 귀하디귀한 왕족으로 태어나면 호의호식하지만 무지렁이 줄을 잡고 태어나면 살아가기에 고달프다. 돈은 살아가는 밥줄인데 재벌그룹의 자식들은 몇 천억의 유산을 받지만 서민의 자식은 적자라는 붉은 줄 위에서 춤을 춰야 산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핀다거나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은 돈줄을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이다. 외국에 원정출산도 미리 좋은 줄을 잡아주려는 힘 있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기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고 정신없이 살았다. 격동의 시기 경쟁사회에서 주어진 틀에 맞춰 살다 보니 자기 인생을 살지 못했다. 정답과 정해진 틀이 있다 생각하며 살았다. 주위 시선을 의식하고 세속적 성공에 집착해 살다 보니 행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남의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기로 했다. 물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을 우선으로 살핀다. 너무 편하고 자유롭다. ◇하고 싶은 일 바로 실행하기 남을 우선으로 배려하다 보니 자신의 일은 미룰 때가
찬바람 부는 겨울이면 뜨끈뜨끈한 국물이 떠오른다. 특히 모임이 잦은 연말에는 함께 즐기기 좋은 샤브샤브가 제격이다. 고기와 함께 채소와 버섯 등을 풍부하게 먹을 수 있어 부담 없이 즐긴다는 것도 매력. 여기에 우리 몸에 좋은 산약초까지 곁들인다면 어떨까? 산약초 샤브샤브 맛집 ‘솔내음’을 소개한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서대산 기운을 가득 담은 자연 한 상 충청남도 최고봉인 서대산(西臺山) 아래 자리 잡은 ‘솔내음’ 입구에는 그 이름처럼 커다란 소나무가 우
어느 날 남자 시니어들의 모임이 있었다. 입고 나온 옷이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들 잔잔한 격자무늬의 옷을 입고 있었다. 필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웃었다. 그렇다. 남자 시니어들의 패션은 잔잔한 격자무늬가 많다. 거기다 침침한 무채색이다. 어딘지 고상하고 품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유행도 타지 않는다. 그러나 그 패션이 “나는 시니어라오~” 하는 것 같아 쓴웃음이 나왔다. 눈에 띄게 무늬가 있는 옷은 소화해낼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무지단색의 옷은 너무 단조로워 보인다. 시니어들의 패션은 독자적으로 튀기보다는 다른 사
바디 랭귀지(body language)는 어느 문화권에서나 사용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바디 랭귀지를 같은 의미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이민 초기 일상의 아주 작은 것들에게조차 적응하는 과정에 있을 때다. 알고 있었던 정보와 현실의 차이는 엄청났다. 남들이 모두 해냈다고 필자에게도 쉬운 길이 될 수는 없다. 마치 여자들의 해산의 고통처럼 고통의 몫은 저마다 다르다. 생존하려고 선택한 세탁업을 위해 필요한 기능을 익히느라 언어는 어떻게 극복했는지 기억할 수도 없다. 한국인 특유의 빠른 눈치와 주위 상황을 종합해 발생할 수
남을 위해 사는 것은 쉽다. 오히려 나를 위해 사는 게 더 힘들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나를 위해 살지 않으면 더 힘들어진다. 그래서 이제라도 시작할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美베이비부머들의 ‘나를 사랑하는 길’을 들여다봤다. 정리 남진우 뉴욕주재기자 ◇ 작가, 캐런 마이잔 밀러 : 정원 가꾸기는 나의 천직 20년 전 나는 25분 단위로 수당이 책정되던 직업을 포기했다. 그때 40세였으나 완전 기진맥진했다. 동료들이 왜 그리 급하게 현실에서 벗어나려 하냐고 물었을 때 나는 모험적인 인생 2막
반려동물등록제가 시행된 지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반려동물의 복지는 개선되지 않고 있다. 지난해의 경우 5227마리의 유기동물이 발생했다. 연간 4000마리 넘는 반려동물이 거리에서 버려지거나 주인을 잃고 있다. 반려동물을 사랑하는 당신에게 꼭 필요한 반려동물등록제에 대해서 알아본다. 자료제공 웹진 동물등록제 2014년 1월 1일부터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은 전국 시·군·구청에 반드시 동물등록을 해야 한다. 단, 동물등록 업무를 대행하는 사람을 지정할 수 없는 읍
벌써 30여 년 전의 일이다. 필자는 딸 둘을 키웠는데 3년 터울이었다. 누구나 그러하듯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영혼으로 자라게 하고 싶었다. 크리스마스엔 가족뿐만 아니라 친척끼리도 서로 선물을 나누며 감사와 사랑을 확인하곤 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랐을 때 인디언 핑크 스웨이드 천을 잘라서 손바느질로 고리가 달린 버선을 두 개 만들었다. 버선엔 각자의 이름을 흰 실로 수놓고 테두리 마감 스테치도 한 땀 한 땀 공을 들였다.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기 한 달 전쯤부터 이층 침대에 걸어두었다. 아이들이 서로 다투거나 양보나 배려가
새벽 닭 우는 소리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희미한 여명(黎明)이 창문을 통해 침실로 스며들면서 아침이 밝아오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늘 새벽 닭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는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도회지로 나가 50여 년 세월을 살다 보니 그 소리를 잊고 산 지 꽤나 오래되었다. 필자는 도회지의 어둠을 회색빛 어둠이라고 표현한다. 가로등 불빛, 집 안 곳곳의 스위치에서 꺼지지 않는 빛, 그리고 창문으로 스며드는 박명(薄明). 이 도시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완벽한 어둠’을 빼앗겼다. 가끔은 완벽한 어둠이 그리워진다. 창문
IMF 금융위기의 여파로 졸지에 실업자가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가 이혼 얘기를 꺼냈다. 20년 직장생활에서 밀려난 것 하나만으로도 충격이 큰데 너무하다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벗는 김에 다 벗어버리자 생각했다. 아내의 이혼 요구에 응했다. 그리고 완전히 혼자가 됐다. 아내가 이혼 때 들이민 재산 분할 제안서를 보니 나는 빈손이었다. 단칸 전세 얻을 돈 정도밖에 없었다. 아내의 내역서는 그럴싸했다. 혼자 벌었어도 안살림을 한 사람의 공로가 절반이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맞벌이를 했으니 당연히 아내 몫으로 절반을 줘야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