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씨는 직장동료다. 토목기술자로 해외공사 현장에서 크게 활약한 베테랑 엔지니어다. 당시 해외근로자의 급여는 국내근무자의 거의 두 배를 받았으니 겉으로만 봐서는 제법 돈도 모았을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술자리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실토하는 말에 의하면 벌어온 돈을 아내가 거의 다 날렸다고 한다, 아내도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고 열사의 사막에서 고생하며 벌어오는 돈을 한 푼이라도 더 늘려 보겠다는 심정으로 돈놀이를 시작했다. 결국 친정집 친척 누구에게 후한 이자를 받는 조건으로 빌려준 것이 화근이었다. k는 귀국하면서 어느 정도 목
한때는 취업전선에서 먹고사는 문제에 부딪치고 가족들마저 내 마음을 몰라줄 때 성당의 신부님을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신부님은 완전고용으로 취업의 어려움이나 회사에서 짤리는 고통 없이 신도들에게 복음만 전달하면 되는지 알았다. 늘 깨끗한 복장에 신도들로부터 존경받기만 하는 모습이 세파에 시달리는 보통우리의 삶과는 다른 모습이 부러웠다. 하지만 신부님들도 저마다 어려움이 있는 모양이다. 예전에 지학순 주교께서 교황을 알현하면 무슨 말을 할까 하고 미리부터 준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글 중에는 용돈도 좀 있었으면 좋겠다는 내용도 들
“대리님! 제가 잘 살펴보지 않은 점은 죄송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하다 보니 빠뜨리는 것도 생기네요. 이번 일을 거울삼아 따로 놓지 말고 묶어놔야겠어요.” 어느 날 필자는 큰 목소리로 사무실이 떠나가라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생체리듬이 순탄치 못한 갱년기 때문일까. 아니면 여러 가지 일을 하다 보니 뇌 용량이 부족해져서일까. 대리님의 농담 어린 “짜증나~” “짜증나~”라는 혼잣말이 영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우아한 목소리로 점잖게 설명 좀 하려 했건만 필자도 모르게 어느새 커져버린 목소리가 이미 저만큼 날아가 있었다
요즘 커피를 너무 자주 마신다. 저녁에 술좌석에 참석하고 나면 아침에 속도 안 좋고 머리가 몽롱하다. 그럴 때 커피 한잔을 마시면 비로소 정신이 좀 드는 것 같다. 믹스 커피는 달달한 설탕 덕분에 속이 진정되는 효과가 있는 듯하다. 조금 격을 높여 편의점 커피를 마시는데 너무 맛이 써서 시럽을 많이 넣는다. 그리고 글을 쓸 때도 연신 커피를 마셔댄다. 하루에 대여섯 잔은 마시는 것 같다. 한가로운 시간에 여유를 즐기며 커피 한잔 하는 모습이 그럴싸하게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는 탓도 있다. 그런데 최근 읽은 책들을 보면, 커피가
TV를 보던 중 새 정부의 '부자증세 시동'이라는 뉴스가 눈에 들어왔다. 말 많던 부자증세가 우리나라에서도 입법이 되려는가 보다. 쉽게 말해서 서민들보다 부자들이 세금을 더 많이 내게 하겠다는 것이다. 필자는 부자증세라는 것에 손톱만큼도 해당 사항이 없으니 솔직히 큰 관심은 없다. 가난한 사람보다 부자에게 세금을 더 걷는 것이니 반대할 이유도 없을 듯하다. 얼마 전 라는 세금징수 드라마가 큰 인기 속에 방영되었다. 드라마지만 얼마나 나쁜 부자들이 밀린 세금을 안 내고 버티는지 정말 흉보면서 흥미진진하게 시청했다. 세
아침 이슬에 들녘이 싱그럽다. 연둣빛 칡 잎이 진초록으로 서서히 바뀌는 여름의 길목이다. 바람도 잔잔하다. 지난밤 볏논에서 요란스레 울던 개구리 소리, 바람결에 실려오는 산 아랫마을의 개 짖는 소리 장단 맞추고 별들과 하현달 친구 되어 놀던 달팽이 한 쌍 새벽녘에 사랑이 무르익었나보다. 이슬에 촉촉하게 젖은 칡 잎 자락에 꼭 껴안고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하룻길을 떠날 태양도 부끄러움에 동산 너머에서 살며시 빛줄기로 시샘을 한다. 이른 잠에 깨어난 뻐꾸기 저 멀리 산자락 어둠 걷힌 나뭇가지에서 짝을 찾아 구슬피 울어 운다. 간혹 주
지금은 고등학교에서 제2외국어로 중국어나 일본어를 배우지만 1970년대에 고등학교를 다닌 세대는 프랑스어나 독일어를 배웠다. 독일어와 프랑스어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프랑스어를 배웠다. 연음과 비음이 특징이면서 어려웠다. 그동안 안 쓰다 보니 간단한 인사말만 제외하고는 다 잊었다. 당시에 ‘기다리는 것이 인생이다 (L’attendre, c’est la vie)’라는 프랑스 속담이 인상적이었다. 인생의 정의가 다양한데 하필 기다리는 것이라고 했을까 궁금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다시 들여다보니 이 속담이 어
꾸미는 것보다는 자연스러운 걸 좋아하는 편이다. TV 드라마도 너무 만든 이야기가 들어 있어나 판타지물보다는 일상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즉 작가 김수현식 드라마를 좋아한다. 글도 단순하고 꾸밈없는 글을 좋아한다. 흔히들 기가 막힌 경치를 보면 한 장의 그림엽서 같다고들 하는데, 필자는 이런 표현도 별로다. 엽서 한 장으로 어찌 광대한 풍경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냥 ‘말로 표현 할 수 없다’ 정도가 좋다. 사람도 자연스런 사람을 좋아하는데 예를 들면 조영남씨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 반대로 남편은 그런 나를 보고 미친 ×만
“아이고 다 늙어 무슨 주책이야. 당신 아니라도 헌혈할 사람 많으니 그만 걱정 붙들어 매두시오.” 필자가 헌혈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는 이제 그만하라고 말린다. 나이 들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헌혈하러 다닌다며 바가지를 긁는다. 그 말도 일리는 있다. 필자는 전혈비중이 낮아서 헌혈을 못하고 돌아선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헌혈을 말려도 말을 듣지 않으니 아내가 헌혈의 집에 직접 전화를 해서 노인네 피를 어디 쓰겠다고 그렇게 뽑아가느냐고 항의를 한 적도 있다. 헌혈은 건강의 상징이다. 헌혈할 때 주삿바늘 들어가는 따끔
필자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는 입학시험을 치르던 1960년대 중반이었다. 시골이긴 했어도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를 때는 지역 내 4개 초등학교가 모여 경쟁을 했다. 필자는 운 좋게도 전체 차석(次席)으로 입학시험 결과통지서를 받았다. 그러나 그러한 기쁨은 잠시, 8남매 중 끝에서 두 번째인 필자가 입학시험을 치르던 해에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빚쟁이들이 몰려와 집은 물론이고 그 많던 전답을 팔아 빚잔치를 하고 말았다. 당연히 중학교 입학금을 낼 형편이 안 되어 등록을 못하고 말았다. 차석이어서 수업료 절반을 면제받았는데도 나머지 330
“교재를 망가트려 죄송합니다.” 월요일 수업에 들어간 나는 제자들에게 45도로 고개를 숙여 정중히 사과했다. 평소에 “학생들에게 교사는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교재다”라고 강조해왔다. 옷차림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완벽해야 직성이 풀렸던 필자인데 이 노릇을 어쩌랴? 교재인 얼굴을 심각하게 손상시켰으니 교사로서 참으로 체통이 안 서는 상황이었다. 필자는 덧붙여서 말했다. “다 나을 때까지 내 얼굴 정면으로 쳐다보는 애는 배신자다.” “교장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며칠 쉬시지 왜 벌써 나왔어요.” 걱정할 것 같아 인사차 교장실에
첫정이 담뿍 든 손녀는 이제 여섯 살이 되었다. 손녀가 세 살 때의 일이니 벌써 3년 전 이야기다. 그날은 며느리와 함께 아기를 위한 강의를 들으러 가는 길이었다. 며느리는 아기 짐이 많아 손녀는 필자가 안고 있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같이 탄 부부가 수군거리더니 여자가 필자에게 물었다. “아기 엄마지요?” 내심 기분이 좋았지만 아닌 척하고 며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기 엄마는 여기 있네요, 저는 할머니랍니다.” 부부는 놀랍다는 듯 어쩌면 그렇게 젊어 보이느냐고 했다. “뭘요~” 했지만 필자의 입꼬리는 점점 올라갔을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역사적 인물을 영화로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니 쉽다. 대중의 머릿속에 각인된 이미지대로 연출하는 것이니 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사실이 아니다. 인간의 삶이 그럴 리가 없다. 예컨대 ‘성웅’ 이순신을 그리면서 어찌 여성 관계를 이야기한단 말인가! 그러나 에는 그와 여성과의 관계도 소상하다. 그래서 어렵다. 이준익의 역사물은 살아 있는 인간들이 등장한다. 살아 있다면 의당 그래야 할 행동을 한다. 그런 연출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는 그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눙치며 해낸다.
소 쟁기로 갈아엎을 수도 없는 경사진 자투리 땅. 아부지의 호미 날이 구석구석 파헤쳐 엎었다. 허기를 채워줄 양식거리는 아니지만 들기름 뽑아낼 들깨 포기 모종을 심기 위해서였다. 줄 맞출 것도 없이 대충 사방 두 치 간격, 한 뼘 넘게 웃자란 들깨 모종을 길게 뉘어가며 흙 속에 묻었다. 대엿새쯤 지나 하얀 뿌리 자리 잡고 진녹색 초액 빨아올리면 시들해 늘어져 있던 이파리가 서서히 펴지면서 일어선다. 한 달이 지나면 밭이 거의 가려질 정도로 마디도 키워 올리고 잎도 제법 너풀너풀거린다. 한여름 장맛비 맞고 개구리 소리, 매미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