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가 하나하나 살아나는 발레

입력 2025-11-03 06:00

[배움으로 얻다] 태안 백화노인복지관 이색 프로그램

▲바(Barre)를 잡고 몸을 세우는 동작을 지도하는 양한나 강사.(박진주 프리랜서)
▲바(Barre)를 잡고 몸을 세우는 동작을 지도하는 양한나 강사.(박진주 프리랜서)

거울 앞에 선 시니어들의 표정이 환하다. “입꼬리 올리고, 발끝도 세워요!”

강사의 구령에 맞춰 몸을 들어 올리는 순간, 무겁던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태안 백화노인복지관의 ‘시니어 발레’ 교실은 흔한 배움터가 아니다. 나이 앞에 망설이지 않고 도전하며 여전히 아름답게 살아가는 이들이 비상하는 무대다.


▲양팔을 둥글게 올리는 ‘앙호(En haut)’ 자세.(박진주 프리랜서)
▲양팔을 둥글게 올리는 ‘앙호(En haut)’ 자세.(박진주 프리랜서)

나이 거스르는 ‘상승의 예술’

충청남도 태안군 백화노인복지관은 종합 복지 전문기관으로, 만 60세 이상 지역 주민을 위한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한글 문해와 영어·일본어 등 어학 영역부터 서예·실버 민요·트로트 교실·캘리 공예·오카리나 등의 취미·여가 영역, 라인댄스·건강체조·탁구 등 건강 증진 프로그램까지, 자체 강좌와 외부 지원사업을 합쳐 연간 50여 종의 강좌를 개설한다. 그중에서도 웃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 바로 ‘시니어 발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예술 교육 지원사업 ‘예술누림’으로 운영하는 이 수업은 영국 왕립무용교육기관(RAD)의 시니어 맞춤형 발레 프로그램 ‘실버 스완(Silver Swan)’을 기반으로 한다.

지도자 양한나 강사는 뉴질랜드 ‘시니어 스완(Senior Swans)’과 영국 RAD ‘실버 스완’ 인증을 모두 받은 전문가다. 이 프로그램은 발레 경험이 없는 성인도 안전하게 기본 동작과 음악적 표현을 익히도록 설계됐으며, 시니어의 균형·유연성·자세 교정에 중점을 두고 즐거움과 공동체성을 강조한다.

발레는 음악에 맞춰 정교한 기술과 우아한 표정, 부드러운 움직임을 선보이는 예술 장르다. 훈련을 통해 유연성과 균형감을 기르고, 자세를 교정하며, 심폐지구력을 향상한다. 감정과 표현 측면에서는 자신감과 집중력을 키우고, 서정적인 음악을 통해 긴장을 완화하는 효과도 있다.

학계에서도 시니어 발레의 긍정적 효과가 입증됐다. ‘액티브 시니어의 발레 수업 참여 경험과 성공적 노화에 관한 현상학적 연구(2023)’에서는 발레 참여가 시니어의 자기 존재감 회복과 사회적 관계 확장, 나아가 성공적 노화(Successful Aging)를 돕는다고 밝혔다.

“시니어 발레는 동작보다 표정이 중요해요. 미소가 몸의 중심을 잡게 하거든요.”

양한나 강사의 말처럼 회원들은 동작만큼이나 표정에도 집중한다. 처음엔 균형을 잃지 않고 몸을 세우는 것조차 어려웠지만, 이제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나는 발레리나야”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몸을 세우며 마음도 곧아지는 순간이다. 늘 허리를 숙이고 다녔다던 우정애(69) 씨는 “자세가 바르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며 미소로 화답한다.


▲수업 후 단체 사진을 남기는 시니어 발레단. (박진주 프리랜서)
▲수업 후 단체 사진을 남기는 시니어 발레단. (박진주 프리랜서)

발레가 선물한 이유 있는 자신감

“매일 발레학원 창문에 붙어서 구경했어요. 그러다 원장님이 ‘어머니를 모셔오라’ 하시더라고요. 하지만 형제가 넷이나 되는 형편에 발레는 꿈도 못 꿨죠.”

김선해(61) 씨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품어온 발레리나의 꿈을, 이제야 복지관에서 이루고 있다.

시니어 발레 참가자들은 대부분 60~70대 여성으로, 귀촌이나 은퇴 이후 새로운 배움을 찾던 이들이다. 태안 백화노인복지관 이유빈 복지사는 이렇게 전한다.

“복지관 이용객 중에는 귀촌 인구가 많아요. 낯선 곳에서 수업을 통해 관계가 생기고, 삶의 활력이 돌아오는 걸 보면 정말 보람이 큽니다. 회원들이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되찾고 하루를 더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배움의 가치가 느껴집니다.”

50대 초반에 허리 디스크 파열로 일을 쉬어야 할 정도로 크게 고생했던 김광신(76) 씨는 “발레를 시작하고 나서 몸이 풀리고 지금은 훨씬 건강해졌다. 이 나이에 발레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며, 귀촌 이후 만난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했다.

귀농 8년 차에 접어든 홍용숙(68) 씨는 마늘을 심을 때도 자세를 신경 쓴단다. “발레리나는 남과 뭐라도 달라야 하지 않겠냐”는 그는 “웃는 법을 잊고 살았는데, 발레가 그걸 되찾아줬다”고 한다. “나이 든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어 무대에 서는 기쁨을 아느냐”며 “쇠퇴하는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되살아나는 느낌”이라고.

또 다른 수강생 김주연(65) 씨는 뇌경색 이후 우울한 시간을 보냈다. 본디 무대 체질이라 한국무용을 통해 해외 공연 무대에도 섰던 그지만, 59세에 찾아온 병마가 그를 집에 매어둔 것이다. “글쓰기를 놓지 않고 작가로 살았지만, 나를 끌어올린 해피 바이러스는 발레”라고 강조했다. 요즘은 “10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으로 드럼에도 도전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발레를 통해 신체의 유연성뿐 아니라 심리적 활력까지 회복한다. 회원들은 수업 전 손수 기른 농산물을 나누고, 수업 후에는 복지관 식당에서 함께 식사한다.

양한나 강사는 “회원들이 지난해 11월 ‘충남지역 노인복지관 어르신대축제’라는 큰 무대에 함께 올랐다. 무대에서 긴장하긴 했지만, 진지하면서도 환한 미소가 뭉클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회원들도 공연 이후 더 가까워졌다”고 전했다.

연분홍 클래식 발레복에 토슈즈를 신고 거울 앞에 선 이들의 눈빛이 반짝인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올라가는 발끝과 환한 미소는 이들이 삶을 대하는 자세와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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