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지만, 장기요양 체계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유엔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위원회(ESCAP)가 2025년 12월 발표한 정책 보고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장기요양을 위한 보건의료체계 강화: 정책 분석(Strengthening Health Systems for Long-Term Care in Asia and the Pacific: A Policy Analysis)’는 고령사회에서 장기요양(Long-Term Care)이 더 이상 가족의 책임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 됐다고 지적한다. 보고서는 한국·일본·중국의 제도 경험을 참고 사례로 들며, 장기요양을 보건의료체계의 핵심 축으로 재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고령화는 빠른데, 돌봄은 준비되지 않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기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는 전 세계 60세 이상 인구의 약 61%가 살고 있다. 2050년에는 이 지역 고령 인구가 13억 명에 이를 전망이다. 특히 80세 이상 초고령층은 1990년 대비 10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수명 연장과 건강수명 사이의 격차다. 대부분 국가에서 기대수명은 늘었지만, 질병이나 장애 없이 생활할 수 있는 기간은 그만큼 늘지 않았다. 그 결과 많은 노인이 노년기의 상당 기간을 만성질환·장애·치매와 함께 살아가며, 일시적 치료가 아닌 장기적인 돌봄을 필요로 하게 됐다.
‘가족 돌봄’에 기대온 구조의 한계
아시아 지역의 장기요양은 오랫동안 가족, 특히 여성 가족 구성원에게 의존해 왔다. 그러나 출산율 감소, 여성의 경제활동 증가, 도시화와 이주로 가족 구조가 바뀌면서 전통적인 돌봄 모델은 빠르게 약화되고 있다.
보고서는 이를 ‘케어 빈곤(care poverty)’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돌봄이 필요한 노인이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구조적 상황으로, 낙상 위험 증가, 노인 학대와 방임, 불필요한 병원 입원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분석한다.
장기요양, 복지가 아니라 보건의 핵심 인프라
ESCAP는 장기요양을 단순한 복지 서비스가 아니라, 보건의료체계의 필수 구성 요소로 규정한다. 적절한 장기요양 체계가 갖춰질 경우 △불필요한 입원과 의료비 지출을 줄이고 △가족 돌봄 부담을 완화하며 △특히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를 높이고 △노인의 존엄과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제도가 부재하면 돌봄 비용이 개인과 가족에게 전가되고, 의료체계 전체의 부담이 커진다고 지적한다.
보고서는 아시아 국가 중 참고 사례로 한국과 일본을 함께 언급한다. 한국은 2008년 도입한 장기요양보험 제도를 통해, 고령자의 돌봄을 가족의 사적 책임에서 사회적 책임으로 전환한 국가로 소개한다.
한국의 장기요양보험은 고령이나 노인성 질환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운 사람을 대상으로, 재가 서비스와 시설 서비스를 공적 제도로 지원하는 구조다. 보고서는 한국 사례를 ‘의료체계와 분리된 독립적 장기요양 제도를 마련한 국가’로 분류하며,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국가들이 참고할 수 있는 제도적 경험이라고 평가한다. 다만 제도의 존재 자체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며, 서비스 질 관리와 재정 지속성은 각국이 공통으로 안고 있는 과제라고 덧붙였다.
장기요양은 ‘비용’이 아니라 ‘사회 안전장치’
보고서는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이 장기요양을 강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향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첫째, 장기요양을 명확히 규정한 국가 차원의 정책과 전략 수립.
둘째, 보건·복지·주거를 아우르는 통합 거버넌스 구축.
셋째, 개인 부담에 의존하지 않는 지속 가능한 재원 구조 마련.
넷째, 전문 돌봄 인력 양성과 가족 돌봄 제공자에 대한 제도적 지원.
다섯째, 재가·지역사회 중심의 돌봄 체계 확대와 데이터 기반 정책 설계.
ESCAP는 장기요양을 고령사회의 선택지가 아닌 필수 조건으로 규정한다. 노인이 돌봄을 받지 못해 병원에 머무는 사회, 가족이 돌봄 부담으로 경제활동을 포기해야 하는 사회는 결국 더 큰 비용을 치르게 된다는 것이다. 즉 장기요양을 ‘미래 사회의 안정성을 위한 투자’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하며, 고령화 속도가 빠른 아시아 국가일수록 제도 구축을 늦출수록 사회적 비용은 더 커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