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천수답 물꼬를 터 물레방아 놀이를 하다가 농사를 망칠 뻔하였다. 그러나 할아버님은 필자를 한 번도 나무라지 않으셨다. 성년이 되어서도 큰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손주를 키우면서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80년 만이라는 5월의 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물놀이장은 여름철 같다. 마땅한 장난감이 없던 어릴 적에는 집 앞 논에서 물놀이하고, 밭에서는 수박·참외·오이를 따먹으면서 놀았다. 배가 고프면 냅다 집으로 달려가곤 하였다.
평상에 앉으신 할아버님은 새참을 막 드시는 때가 많았다. “어서 오너라. 너는 먹을 복이 참 많구나!” 허허 웃으시면서 먼저 손자의 입안을 가득 채워주곤 하셨다. 거의 매일이 평온하게 지나갔다.
어느 날 이웃마을로 놀러가서 물레방아를 처음 보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물을 차고 도는 모습에 넋을 잃고 말았다. 집에 온 후로도 멋있는 그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생감에 구멍을 뚫어 막대기를 꽂고 조개껍질을 붙여 장난감 물레방아를 만들었다.
다락 논 물꼬를 터서 물레방아 돌리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관개시설이나 양수기가 없었던 그 시절의 천수답에는 비가 오면 논두렁을 높이 쌓아 모가 완전히 잠기도록 물을 가득 채웠다.
“누가 물을 빼갔느냐?“ 순찰 도시던 할아버님의 불호령이 들렸다. ”누군가 크게 혼나는 모양이구나!“ 나름 해석은 자유였으나 문제가 나에게 있다는 사실은 조금 후에야 깨달았다. 다락 논 한 배미의 물이 다 빠지고 없었다.
“너로구나!” 한 마디 하시고 모른 척 지나가셨다. 엄청 잘못하였음을 직감하고 할아버님 뒤를 조용히 따랐다. 뭔가 꾸지람을 들어야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후로 한 번도 말씀이 없으셨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가까이 사는 아들·딸 가족과 식사하는 때가 종종 있다. 초등학생 쌍둥이 손녀·손자와 바로 아래 외손자의 떠드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입이 귀에 붙는다. 아이들이 잘 먹는 음식은 손대지 않고 잘 먹지 않는 것은 내가 재고 처리한다. 자식에게도 하지 않았던 버릇이다.
이 대목에서 할아버님의 내리사랑을 어렴풋이 알기 시작하였다. 제 부모 이야기는 잘 듣는데 할아버지 말은 도통 농담으로 치부해버린다는 사실도 알았다. 할아버지와 손주는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는 사이인가!
잘 부푼 팝콘 같은 탐스러운 벚꽃, 어릴 적 병아리 떼 종종종, 하는 노래가 생각나는 샛노란 개나리, 화전에 쓰이던 고운 분홍빛 진달래, 그 자태가 너무나도 우아한 자목련 백목련, 어느 향수 못지않은 향기로운 라일락, 거기에 쌀밥처럼 풍성해 보여 붙여진 이팝, 조팝나무 등 우리 곁에 가까이 있던 봄을 알리는 전령 꽃들이 서서히 자취를 감출 즈음 우리는 계절의 여왕 장미를 만난다.
‘of all flowers me thinks a rose is best’ 모든 꽃들 중 최고는 장미라고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가 말했듯이 장미는 보는 이를 행복하게 해 주는 매력이 있다. 아름다운 장미가 전쟁에 얽힌 일도 있는데 15세기 영국의 왕위계승권을 두고 붉은 장미를 문장으로 한 랭커스터 가와 하얀 장미의 요크 가와의 전쟁이다. 그래서 이름도 장미전쟁, 이름만은 낭만적이다. 그들은 두 가문의 결혼을 통해 화해하고 튜더왕조를 세웠다. 이를 기념하여 화합의 상징으로 튜더 장미 문양이 만들어지고 오늘날 영국의 국화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장미는 사랑을 고백하는 연인들의 꽃이기도 하다. 그게 한 송이든 한 다발이든 상관없다. 무릎을 꿇은 남자가 장미 꽃다발을 여자에게 건네는 장면은 언제라도 가슴이 설레고 미소를 짓게 해 준다. 장미는 덩굴장미와 나무장미로 크게 나누어지며 수많은 품종이 있고 모양도 다르다. 화려한 모양에 날카로운 가시가 있으니 예쁘다고 함부로 만지면 안 되듯이 아름다운 여자일수록 감춰진 가시가 있다고 장미에 비유하기도 한다.
예전 필자가 대학생일 때 5월이 되면 각 학교에서 메이퀸 뽑는 축제가 있었다. 필자는 마음이 곱지 않았던지 공부 잘하고 얼굴 예쁜 학생을 뽑아 여왕으로 추대한다는 그 행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같은 여학생인데 한 명을 가장 높은 단상에 앉게 하고 시녀로 불리는 학생들이 그 옆으로 들러리를 선다는 게 싫었다.솔직히 말한다면 아마 내가 메이퀸이 될 수 없어서 난 심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이대 메이퀸은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유명한 축제였는데 내가 이대생이 아니었던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 첫 번째 이유기도 하다.
다른 여대에서도 비슷한 축제가 열려 메이퀸을 뽑았다. 그런데 청파언덕의 우리 학교는 너무나도 낭만적이고 멋진 메이퀸 축제가 있었다. 5월이 되면 다른 학교처럼 예쁜 여대생을 뽑는 게 아니라 본관 교정 앞 화단에 여러 품종의 장미를 심어 번호를 붙이고 가장 아름답게 핀 장미꽃에 학생들이 투표해서 5월의 메이퀸을 선정하는 방식이었다. 장미의 품종은 잘 모르지만, 당시 나는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을 가진 활짝 웃고 있는 장미에 한 표를 주었던 기억이 난다. 친구들과 교정을 거닐며 화단에 핀 장미꽃을 감상하던 추억이 나를 아스라이 먼 동화의 나라로 이끌어 주는 것만 같다. 그때가 그리워 가슴이 먹먹하다.
새빨간 예쁜 넝쿨장미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도 있다. 필자는 중학교까지 전차로 통학하던 전차 세대이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동대문 넘어 창신동에 있었다. 우리 집은 돈암동이어서 돈암동에서 전차를 타고 혜화동 로터리를 지나 동대문 광장시장 앞에서 내려 동대문으로 가는 전차로 갈아타고 학교에 갔다. 혜화동 로터리에는 아치 모양으로 철제 터널이 있었고 이맘때쯤이면 그 위를 온통 새빨갛고 예쁜 넝쿨장미가 뒤덮였다. 댕댕댕~소리를 내며 달리는 전차에 앉아 꽃 터널을 지나는 기분이 어땠을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전차가 없어졌다. 신나고 즐겁던 전차통학도 따라서 사라져 버렸다. 지금도 혜화동을 지날 땐 꼭 그 자리를 바라보며 새빨갛고 예쁜 넝쿨장미를 추억한다. 장미의 계절에 잊고 있던 좋은 추억을 꺼내보니 그 시절 그때가 너무나 그리워 마음이 서늘하다.
필자는 유엔이 정한 65세 노인의 나이에 해당되고 건설현장에서 땀을 흘리며 일을 하니 노인노동자임에 틀림없다. 좌우를 둘러보아도 필자처럼 60이 넘은 늙은 노동자는 보기가 어렵다. 필자는 운(?) 좋게 아직 일을 하지만 건설현장에서는 나이든 사람을 전염병환자처럼 기피한다. 주된 이유는 나이 들면 행동이 둔하고 고집이 세어 부려먹기 어렵다는 선입견이다. 이런 선입견이 여러 곳에서 작용한다. 예를 들면 현장에서 일을 하다가 다치기도 한다. 본인의 부주의든 남에게 피해를 입었든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사고는 일어난다. 사고가 나면 난 것이고 부상자는 치료하고 사고 원인을 파악하여 재발 방지대책을 세우고 이미 일어난 사고에 대해서는 규정대로 잘잘못을 따져서 조치를 하면 상황은 끝나야 한다. 그런데 다친 사람이 만약 55세가 넘은 사람이라면 왜 이런 사람을 채용했느냐고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튄다. 나이 들었기 때문에 사고가 난 것으로 단정해버리고 그를 고용한 사람은 덤터기를 쓸 각오를 해야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건설현장에서 나이든 노동자는 늘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조심조심 꼬투리 잡히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머리도 염색하고 복장도 단정히 하고 가급적 나이를 잘 모르도록 모자를 푹 눌러쓴다. 출근은 빠르게 퇴근은 늦게 한다. 일은 솔선수범하고 늘 잔잔한 미소를 잃지 않아야 한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못해요‘라는 'No’가 아니라 ‘내가 하지요.’라는 ‘Yes’라는 말이 본능적으로 나와야 한다. 늙은 노동자들은 젊은이들과 같은 일을 하며 겉으로는 당당한 채 하지만 속으로는 주눅이 들고 마음은 움츠려 있다. 나이든 사람의 고용을 멈칫하게 하는 암초는 곳곳에 있다. 나이라는 잣대로 정년을 만들어 한창 일할 능력 있는 사람을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내보내는 것도 좀 생각해볼 문제다.
현장은 작업조건 외에도 춥고 덥고 비 오고 눈 오는 날씨와도 싸워야 한다. 봄은 일하기 좋은 계절이지만 봄이 짧아졌다고 한다. 5월의 중순이지만 한낮의 봄볕은 여름처럼 뜨거운 적외선과 얼굴이 검게 타는 자외선을 뿜어낸다. 특히 건설현장은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 많다보니 근로자들은 땀을 많이 흘립니다. 더우면 더 심하다. 요즘은 중국 황사 바람 탓으로 황사 마스크까지 까지 쓰고 보면 숨이 턱턱 막힌다. 현장에는 에어컨도 없고 선풍기도 없다. 잠깐의 휴식시간의 배려를 위해 만들어진 천막그늘 막에 시원한 냉수가 제공되는 곳이 유일한 오아시스다.
사람은 살아있으면 젊으나 늙으나 먹어야하고 잠을 자야 합니다. 더우면 인체는 적절한 온도를 맞추기 위해 땀을 흘립니다. 나이 들었다 해서 땀을 흘리지 않는 예외는 없다. 몸에서 흘러나온 땀 속의 소금물이 작업복을 적시면서 구름 꽃을 그려낸다. 아이들이 오줌 싼 요에서 오줌지도가 그려지는 것과 같은 형상이다. 겨드랑이 밑이나 등판에 특히 땀이 많이 배어난다. 땀의 양에 따라 얼룩의 명암이 달라지고 한반도 지도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구름 모양이 되기도 한다. 가끔은 커다란 목련꽃 모양도 만들어 진다. 내가 만든 구름 꽃은 나는 보지 못하지만 남들은 다 봅니다. 앞사람 등에서 각양각색의 구름 꽃을 꽃으로 보면 웃을 수 있지만 꽃으로 보지 못하고 삶의 현장으로 보면 눈물이 난다.
땀이 나서 마르고 또 땀이 나서 마르다보면 머리비듬처럼 하얀 소금가루가 만들어져 떨어진다. 비비고 털어서 입에 넣어보면 찝찔한 소금 맛이 느껴진다. 땀의 소금은 조금전만해도 내가먹은 음식의 일부다. 내 몸의 여러 장기들을 돌고 돌아 할 일을 다 하고 마지막으로 내 체온을 조절해주는 것으로 운명을 다한 고마운 나의 분신이다.
땀이 만든 구름 꽃은 건강의 꽃이다. 건강하지 않으면 노동에 종사할 수 없고 노동자가 노동을 하지 않으면 우선 밥이 없어지고 몸이 건강할 수가 없다. 햇볕에 검게 변한 얼굴도 구리 빛 팔다리에 파동 치는 근육은 남자다움의 과시이자 건강의 상징이라고 추켜세우지만 노동현장에서 건강한 몸은 일하는 연장이며 든든한 삶의 보루다.
땀 냄새가 베어나는 구름 꽃은 행복의 꽃이다. 노동을 통해 받는 돈은 가장 고귀하고 깨끗한 돈이다. 원가에 덧붙여서 이익을 본 돈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쳐서 번 가장 원초적인 몸 팔아 번 돈이다. 어미 새가 입으로 먹이를 물어와 새끼들을 먹여 살리는 것처럼 노동으로 번 돈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고 행복한 가정의 저녁이 있는 삶을 만든다. 나아가 자식에게 미래의 희망을 잉태하게 하는 씨앗 값이 바로 땀으로 만든 구름 꽃값이다.
구름 꽃은 생산의 꽃이다. 오늘 구름 꽃이 그려지고 저녁에 빨래로 지워지고 다음날 다시 그려지고 또 지워지면서 시간이 흘러간다. 이런 시간들이 모이고 모여서 맨땅에서 건물이 만들어진다. 건물은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이 또 다른 생산을 위해 사용된다. 구름 꽃은 경제를 살리고 순환 시키는 피 같은 꽃이다. 혹 퇴근길의 땀 냄새나는 노동자를 만나더러도 피하지 말고 이들이 산업역군임을 알아줘야 한다. 오늘도 구름 꽃을 만들고 피우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간다.
친구들과 오르는 경기 동두천 마차산은 온통 연두색 파스텔화다. 정상에서 태풍급 폭우를 맞으면서도 누구 하나 힘들어하지 않았다. 나무 향기 가득하고 쏟아지는 빗줄기가 미세먼지까지 말끔히 씻어낸 쾌적한 ‘전원’이기 때문이다.
시니어는 은퇴 후 편리한 도시를 떠나 전원생활을 꿈꾸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전원에서 살다가 짧게는 수 개월, 길게는 몇 년 사이에 도회지로 되돌아온 이웃을 종종 보았다. “어릴 적 추억 속의 전원과 현실의 그것은 전혀 다르고 고독감, 교통 여건과 편의·의료 시설 부족이 큰 문제”라고 역 귀향 사연을 말했다.
장래를 생각해 전원에 투자했다가 큰 손해를 보고 철수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시니어는 이러한 함정에 빠져들지 않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도시에서 전원처럼 쾌적하게 생활할 방법을 찾자.
첫째,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는 ‘소유’보다 편리한 ‘이용’이 대안이다. 사실 시니어가 부동산에 장기 투자할 이유가 별로 없다. 투자비용, 관리비, 제세 공과금 등 ‘소유비용’이면, 마음에 드는 전원을 찾아 즐기거나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는 여유도 생긴다.
서해안 명승지에 전세 들어, 바다낚시와 조개잡이로 얼굴을 검게 그을리면서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는 친구가 있다. 2년 계약이 끝나면 다음에는 깊은 산골로 갈 예정이라고 자랑했다. 일부 명승지에서는 월 단위 임대사업도 최근에 유행하고 있다. 동호인끼리 한 주일씩 교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둘째, 멀리 다니기 어려우면 도시에서 전원생활을 즐기자. 관악에서 정들어 산 지 어언 30여 년이 넘었다. 이웃과 인사를 나누고 사는 고향처럼 느껴지는 아담한 ‘전원마을‘ 이다. 집 앞과 뒤, 옆으로 초·중·고등학교가 연이어 있다. 아이들은 전학 한 번 안 하고 학교를 마쳤다.
울창한 숲 덕분에 여름철에는 에어컨이 필요 없을 정도로 시원하다. 계곡 물놀이장은 어른·아이들 천국이 된다. 서울·관악산 둘레길이 잘 꾸며져 누구나 산책하기도 좋다. 아침마다 경쾌한 음악소리에 맞춰 체육공원에서 열심히 운동할 수도 있다.
이보다 더 쾌적한 전원이 어디에 있겠는가? 매주 배낭 메고 친구들과 찾는 북한·도봉·청계산은 우리 차지다. 전원생활! 바로 내 앞에 있다.
그날도 광화문 시내로 가기 위해 성북동 뒷길을 통해 삼청터널을 향하고 있었다.
이 길은 솔직히 초보운전자나 초행길인 사람에게는 좀 힘들 수 있는 코스이다. 경사가 급한 언덕길이 구불구불 이어지고 오르내리는 길도 많으며 급커브 길도 심심치 않게 만난다. 그렇지만 이 길을 수십 년째 다니고 있는 나에겐 참으로 편리하고 쾌적하게 달릴 수 있는 친숙한 길이다. 이 길의 장점은 신호등이 없어 논스톱으로 운전할 수 있고 매우 익숙해서 빠른 속도도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속도를 낼 수 없어서 보니 앞쪽의 차 두 대가 길이 훤하게 뚫렸는데도 완전히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다. 앞에 앞의 차에는 초보 운전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눈앞에 훤히 보이는 길인데 좀 심하게 조심스러운 운전을 하고 있었다.
내 입에서 “어휴, 저런 초보운전”이란 말이 나왔다. 추월하면 되겠지만 좁은 골목길이고 구불거리는 오르막 내리막이 계속돼 맘대로 되지 않았다. 차도 흐름을 타야 하는데 너무 느리니 속이 부글부글 끌었다. 그 꼴로 성북동 뒷길에서부터 삼청터널 지나 경복궁까지 내려왔다.
그런데 그 순간 필자 머리를 때리는 생각 하나. 제 속도 오든, 느림보 속도로 오든 내려오는 시간은 5분도 차이가 나지 않는 거 아닌가? 별 차이도 안 나는 걸 초보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고 화냈던 걸 생각하니 참으로 필자 자신이 부끄러웠다.
필자도 초보 시절이 분명 있었고 운전하면서 실수했던 일도 여러 번 있었다.
필자는 운전면허를 차도 없던 1978년에 따 놓았다. 장롱면허로 잠자던 면허증은 결혼 후 남편의 중후한 까만색 승용차를 만나면서 빛을 발했다.
운전 연습을 시켜주면서 부부싸움이 가장 많이 난다는 이야기가 있다. 맘씨 좋은 남편도 연수시켜주며 화를 냈다. 너무나 운전하고 싶었던 필자는 그런 걸 감수했으나 결국 남편 아닌 전문가에게 개인레슨을 받았다.
한번은 동네 골목에서 큰길로 통하는 도로로 나가는데 차들이 많아 잔뜩 긴장하며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조심조심 느리게 가고 있었는데 조수석의 남편이 “앞으로 빼!”라고 소리쳤다. 웬일인가 싶어 보니 오른쪽 유리창 너머로 어떤 아저씨가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남편이 앞으로 빼라니 그 말대로 앞쪽으로 전진했다. 그런데 이번엔 멈추라고 소리친다. 차를 멈추고 밖으로 나간 남편이 한 아저씨를 부축하고 있었는데 술이 거나하게 취한 아저씨가 마을버스를 기다리며 한쪽 발을 쭉 내밀고 서 있었다고 한다. 내가 그 아저씨의 발등을 지그시 밟고 있었던 것이다. 거북이 운전으로 천천히 가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큰 일 날 뻔 했다.
아니 근데 그 아저씨는 왜 발을 그렇게 뻗고 있다가 남의 차바퀴에 깔렸을까? 나도 내려 보니 아저씨 슬리퍼 발등 위로 바퀴 자국이 찍혔다. 차바퀴에 깔렸으니 뼈라도 부서졌으면 어쩌나 걱정스러웠는데 맘씨 좋게 생긴 아저씨는 무슨 운전을 그따위로 하냐는 말씀만 하고는 웃으시며 괜찮다고 하셨다.
병원에 가보자고 해도 괜찮다고 해서 약국에서 파스와 연고를 사드리고 연락처를 드렸다. 추후에 이상이 생기면 연락하라고 당부하고 돌아오는 내내 어찌나 남편의 눈치를 보았던지 지금 생각하니 우습기만 하다.
그런저런 사고가 몇 번 생기자 필자는 안전운전을 제일 우선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초보 시절에 그런 사고도 겪었으면서 그날 앞을 좀 가로막았다고 투덜댔으니 정말 올챙이 적 생각 못 했다. 항상 과거를 돌아보고 남을 이해하는 넓은 마음을 갖자고 다짐했다.
법으로 정년을 보장한 60세까지 근무한 뒤 박수받고 정년퇴직해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앞으로 10여 년은 너끈히 더 현업에 종사할 수 있다고 다들 생각한다. 그냥 해보는 큰소리가 아니고 건강관리를 원만히 한 사람은 실제도 그렇다. 정부나 지자체에서도 다 알고 있는 진실이다. 그래서 막대한 국가 예산을 들여서 인생이모작에 대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액티브 시니어가 되라고 권장하고 있다.
국가나 지자체에서 집안에만 있지 말고 밖에 나가서 활동하라는 말을 안 해도 ‘100세 시대’에 60세에 퇴직하고 남은 사십 년을 ‘구둘 장군’으로 지내기는 누구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도둑질 말고는 무슨 일이든 찾아보려고 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갖다 부치지 않아도 집안 식구들 등쌀에 집안에만 있기는 어렵다.
퇴직자가 왜 계속 일을 하려고 하는가? 우선은 먹고 사는 경제력이다. 퇴직금 1억 원을 은행에 넣어봤자 월 20만 원을 손에 쥐기가 힘든 데 세금은 15.4%나 뗀다. 허드렛일로 월 100만 원을 번다면 은행에 6억~7억 원을 예금한 것과 맞먹는다. 퇴직했다고 해서 안 먹고 안 입고 살 수가 없다. 퇴직해서 근로수입은 없어져도 소비지출은 그만둘 수가 없다.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거나 극소수의 재테크에 성공한 재력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자연히 퇴직하는 순간부터 돈 걱정하는 것이 일반 서민의 자화상이다. 부모님도 살아계시고 자녀들 결혼마저 늦어져 함께 살고 있다면 퇴직했다 해서 보따리 싸 시골로 내려가기도 어렵다. 자연히 이런저런 돈 벌 궁리를 하느라 불면의 밤은 깊어간다.
집안에서도 가장이 놀고 있으면 분위기가 저기압이다. 공원 벤치에서 만난 김철수(가명ㆍ67) 씨는 “갈 곳이 없어도 이렇게 집을 나와야 아내도 숨을 좀 쉰다”고 한다. 매일 출근하던 남편이 어느 날부터 거실에 턱 버티고 있으면 아내가 얼마나 답답해할 것이냐는 말이다. ‘아빠 내일부터 출근한다.’ 라는 말이 어떤 꽃 노래보다 하고 싶은 말이고 가족들은 듣고 싶은 속삭임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반 토막의 급여를 주는 일자리도 마다치 않고 노인들이 줄을 선다,
문제는 적은 돈을 버는 일자리에 퇴직자들이 인생이모작으로 재취업에 성공했다고 해서 모든 국민이 박수 보내고 축하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퇴직했으면 그만 집에서 쉬시지 새로운 일자리 찾기에 혈안이 돼 반 토막의 급여도 고맙다고 감지덕지 일하는 노인의 모습을 사시의 눈으로 째려보는 젊은이들도 있다. 자식의 일자리를 뺏는 비윤리적 아버지로 매도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고령자 취업을 반대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로 젊은이들이 해야 할 일자리를 시니어들이 뺏어간다는 시각이다.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는데 누가 차지하는가에 대한 갈등구조다. 두 번째로 동남아, 중국 등 출신 외국근로자 때문에 몇 년간 인건비가 제자리걸음 하는 상황에서 시니어까지 저임금 경쟁에 가세해 인건비 인상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시니어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도 젊은이들의 눈칫밥 먹는 신세로 전락해 길게 다니지 못한다. 뭔가 100세 시대에 걸맞은 정부 정책이 있어야 한다. 우선 노동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고 방치하지 말고 노년의 경험이 필요한 특화한 일자리를 특화해야 한다. 요일별 근무제나 바쁜 시간대의 파트타임 등 가변성 있는 노인 일자리가 필요하다. 어린이 놀이터의 안전점검, 불량식품 단속요원도 좋다. 공원이나 우범지대의 순찰이나 청소도 노인의 특화된 일자리로 손질해서 만들어야 한다. 9시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는 고정된 근무 개념을 깨뜨려야 노인의 일자리가 많아진다.
나는 종종 과거의 시간에서부터 생각의 시작을 한다. 현재도 흐르고 그래서 과거의 시간이 되겠지만 현재의 흐름을 타는 일은 더디기만 하다.
겨울 아침이면 놋 세숫대야가 안방까지 들어왔다. 엄마 품에 안겨서 세수하던 느낌과 기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놋대야가 움직일 때마다 나던 긴 울림이 들린다. 따뜻한 물을 대야에 부으면 흐릿한 김이 오르고 은은한 아이보리 비누냄새와 비릿한 엄마의 풍만한 젖가슴 냄새와 보송보송한 수건에서 나는 신선한 우유 같은 냄새가 엉켜있었다.
엄마는 한 손으로 목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고 비누질을 하며 눈을 꼬옥 감으라고 했다. 비누질을 할 때 보다 비누를 씻어낼 때 늘 따가웠다. 엄마의 손이 흥~ 코까지 풀게 하고서야 세수는 끝이 났다.
눈에 비누가 들어가서 따가운 날이면 부러 큰소리로 울었다. 그럼 엄마는 미안해하기도 하고 야단도 치셨다.
나는 엄마의 젖을 만지며 자곤 했는데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아무도 엄마를 차지하지 못했다. 가끔 아침에 일어나서 보면 늘 내가 아버지와 엄마의 가운데였는데 엄마와 나의 위치가 바뀌어 있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나는 심한 배신감에 아빠에게 화를 내곤 했다.
부엌에서는 장작 타는 냄새와 콩깍지가 타면서 내는 탁탁 소리가 났다. 가마솥 여닫는 소리, 구수하게 익어가는 밥 냄새, 물 항아리에 나무뚜껑 올리는 소리, 동그란 상에 사기그릇 놓는 소리는 부산스럽지만 맛있는 따스한 냄새였다.
안방에 붙은 부엌 위 벽장의 나무문은 가끔 어긋나게 열리기도 해서이기도 하지만 엄마의 영역이어서 함부로 열지 못했다. 그러다가 엄마가 열 때는 향긋한 냄새가 났다. 곶감, 약과, 강정이 나오고 가끔은 미제 초콜릿 바를 받기도 했다. 그럴 때는 미제 냄새도 섞여서 났다.
저무는 봄날의 온갖 소리와 냄새들이 부드럽고 서늘한 바람에 실려 열려 있는 문으로 들어오는 초저녁, 생동감에 넘치던 그 시절 부드러운 물결에, 모든 것을 잊고 나를 내맡길 수만 있다면 ‘행복한 순간’, 그 시간으로 지금도 돌아간다.
아이보리 비누 냄새와 엄마의 냄새, 놋대야의 울림이 같은 묶음으로 어른거린다.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 어깨 펴고 걸어라. ”
“ 차 조심하거라. ”
나는 아직도 엄마가 필요하다.
2016.2.21.
지난 달 중순 어느날에 한때 잘 알고 지내던 25년 대학후배 녀석이 참으로 오래간만에 전화를 하였다. 반가워하며 서로 수인사를 나누었는데 그 후배가 "선배님 저 이번에 결혼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속으로 이녀석 최근들어 바뻐서인지 연락이 뜸하다가 결혼연락하기 위해 주소 물어볼려 하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대짜고짜로 선배님 "저희 결혼식 주례를 부탁드립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물론 내 나이 63세가 되어 주례 설 나이도 되었건만 전혀 뜻밖이라 속으로는 쾌나 당황이되고 염려가 되었으며 이미 현직에서 물러나 전문위원이나 비상임 감사으로 일하고 있는 나로서는 약간 부담도되고 또한 주례서기에는 직함이 좀 약한 것이 아닌 가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래간만에 아끼는 후배가 부탁하는데 거절할 수도 없고 그러마하고 대답은 하였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고민이 생겼다.
주례라 함은 새롭게 인생을 출발하는 신랑과 신부에게 축하를 전하고 두새람의 새로운 인생에 보탬이 될 금과옥조 같은 내용으로 주례사를 해주어야 하는데 과연 내가 그런 자격이 있을까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뒤늦게 결혼하는 후배의 간절한 청탁을 기꺼이 받아 들일 수 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사실 젊었을 때는 첫아들을 낳아서인지 친구들의 결혼식사회는 거의 도맡인 해보았지만 더더군다나 결혼식 주례는 처음이어 상당히 부담이 간 것도 사실이었다.해서 주례를 많이 본 교수인 친구에게 어찌할까 조언도 부탁하고 인터넷도 참고하였다. 주례는 대개 날씨이야기 등 인사말,신랑신부의 소개,결혼의 의미,덕담표현,맺음말 이런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나의 36년 결혼생활 영위함에 있어 대학선배이자 인생 및 결혼선배로서 신랑과 신부에게 솔직하고 진솔한 나의 경험과 체험을 전달해주면 되지 앓겠는가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었다.
살아가면서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세가지 정도로 압축한다면 무엇을
이야기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결혼식때처럼 늘 초심과 배우자에 대한 배려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 역시 36년전을 되돌아보면 그당시에는 배우자에게 하늘에 있는 별이라도 따다줄 것처럼 그녀를 위한 어떤 일도 하겠다 했는데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과연 그것을 얼마나 지켰을까 하는 의문이 드네요.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항상 아쉽게 느끼는 것이 다름 아닌 남에 대한 배려인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요즈음처럼 식구가 핵가족화되면서 집에서 옹야옹야 하면서 마마보이로 키워졌거나 집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던 외동딸 들, 참으로 그들은 많은면에서 자기중심적으로 키워졌으며 학교교육 역시 자아중심적 점수중심적으로 자랐기에 남에 대한 배려는 많이 익숙치 못한 것이 사실이 아닌 가 생각이 들어 결혼하기전의 초심처럼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경과 신뢰를 통해서 가정생활을 영위하게 된다면 부부는 서로 닮아가게 되고 늘 좋은 가정을 유지하여 지켜갔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존그레이의 책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처럼 남자와 여자는 본래 육체적인 면 뿐만 아니라 서로 생각하는 방식이나 언어,행동 등에서 많은 점이 서로 다릅니다. 우리 남녀가 서로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할 수 있다면 상대방을 잘 이해하고 상대방을 자기 틀에 맞출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즉 화성남자와 금성여자처럼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상대방을 억지로 변화시킬려고 노력하거나 맞상대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다만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더불어 잘 지내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또한 결혼이란 권리를 얻는 과정이 아니라 책임과 의무를 이행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배우자를 만난 것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의사결정의 결과입니다. 이에따라 서로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 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결혼식은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장차 부모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지키겠다고 약속하는 동시에 의지를 표명하는 의식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양가 부모님을 통해 이 세상에 태어나고,평생을 해로 할 수 있는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결혼자체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성경 말씀에도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주어진 여건에 늘 감사하며 만족하는 마음자세가 행복의 첩경입니다. 즉 행복은 멀리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두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만든 청첩의 글처럼 지극히 작고 사소한 모습 하나하나 아끼고 사랑하며 소중하게 애정을 키워나가며 언제나 작은 것에도 서로에게 감사히 기쁜 마음으로 생활한다면, 그속에 늘 행복은 찾아오는 것임을 잊지 마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끝으로 마음속으로 오늘 새신랑과 신부의 행운을 위해 조용히 기원합니다.
4월 12일에 열린 의 동년(同年)기자단 발단식에서 저는 환영사를 겸해 몇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동년이라는 이름을 짓게 된 경위와 의미를 바탕으로, 모임이나 단체의 소속원들이 중시하고 지향해야 할 것을 함께 생각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날의 말과 지금 이 글은 ‘한가지 同에 대한 몇 가지 생각’입니다.
‘한 가지’는 띄어서 쓰면 여러 가지 중 하나라는 뜻이 되며 ‘한가지’라고 붙여 쓰면 형태와 성질 동작 따위가 같은 것, 즉 同이 됩니다. 사람은 모이면 한가지가 돼야 하지만, 저마다 한 가지로서의 구실과 역할을 하고 서로 잘 어울려야 그 한가지가 오래가고 튼튼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가지를 의미하는 말은 참 많습니다. 동거 동기 동도(同道) 동문 동반 동복(同腹) 동사(同事) 동우 동인 동지 동창 동학, 이런 것들을 먼저 들 수 있습니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을 동연(同緣)이라 하고, 함께 붓글씨를 배우거나 공부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동연(同硯)이라고 부릅니다.
나이가 같은 사람은 동갑입니다. 동령(同齡) 동치(同齒) 동년(同年)입니다. 이 중 동년에는 동갑이라는 의미 외에 같은 때 과거에 급제해 함께 방이 붙은 동방(同榜)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의 공모에 응해 시니어 기자가 된 분들을 동년기자라고 부르는 것은 선발 절차와 방식은 예전과 다를지언정 과거를 통과한 것에 버금가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각 분야의 전문가요, 삶과 일에 관한 이야기가 풍부한 분들이니 동년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런 분들이 나이를 잊고 벗하는 망년지교(忘年之交)의 동갑이 되어 활동해주기를 바라는 게 ‘동년기자단’의 작명 취지입니다.
이렇게 좋은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은 이른바 동기상구(同氣相求) 동성상응(同聲相應), 마음이 맞아 서로 찾고 친하게 모이고,의견을 같이해 서로 잘 통하는 사이로 발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 급제한 동년은 모두 우수한 인재입니다. 길이 사귀어야 할 벗이면서 한편으로는 발전과 성취를 다투는 경쟁상대일 수 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동기생끼리의 경쟁이 선후배간 경쟁보다 더 치열합니다.
성삼문과 신숙주는 동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조가 단종을 몰아낸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 이후 성삼문은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역사에 기록됐고, 신숙주는 세조의 편에 서서 새로운 왕업을 도왔습니다. 둘 다 세종 임금이 사랑하던 인재요 한글 창제에 힘을 보탠 집현전 학사였지만 삶의 행로는 판이했습니다. 동년이기 때문에 그 차이가 더 두드러져 보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대비와 대립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사람은 저마다 다르므로 다른 것 속에서 같은 것을 찾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사람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동공이곡(同工異曲), 같은 악공끼리도 곡조가 다르고, 재주가 같아도 문체에 따라 글의 빛깔과 결이 달라집니다. 동교이곡(同巧異曲)이나 동교이체(同巧異體)처럼 재주는 한가지인데 창작물은 다르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따로 또 같이’를 이야기하지만 실상 더 중요한 것은 ‘같이 또 따로’입니다. 같은 것 같지만 다른 것이 세상을 다채롭게 하고 서로 잘 어울리게 하는 조화의 요소가 됩니다. 논어의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는 말을 음미해봅니다. 군자는 남들과 잘 어울리되 같지 않지만 소인은 남들과 같은데도 어울리지 못합니다. 군자는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중심과 정체성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어느 학자는 ‘엇비슷하다’는 우리말에 화이부동의 철학이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어긋났는데 비슷하다거나 닮았지만 닮지 않았다는 뜻이니 이런 말을 만들고 쓰는 한국인들이야말로 다원주의를 받아들이는 관용이나 포용 공존의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만든 말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때, 새로운 외국 문물을 받아들일 때, 상대와의 협상에 진전이 없을 때 흔히 쓰는 구동존이(求同存異)에도 ‘엇비슷’이 들어 있습니다. 차이점을 인정하거나 뒤로 미루고, 같은 점부터 먼저 확인하고 추구하는 자세입니다.
천하편에 나오는 대동소이(大同小異)는 흔히 그게 그거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실은 ‘크게 보면 서로 같으나 작게 보면 각각 다르다’는 뜻입니다. 크게 보면 같다가도 작게 보면 다르니[大同而與小同異] 이것을 小同異라 하고, 만물은 모두 같기도 하지만 다르기도 하니[萬物畢同畢異] 이것을 大同異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대동은 기르고 키우고 소이는 가꾸고 지켜야 합니다. 소이가 모이면 또는 소이가 모여야만 대동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천하가 번영하고 화평을 이루는 인류의 이상 ‘대동사회’입니다.
조선의 선비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시에 여러 색깔의 국화를 찬탄한 작품이 있습니다. “서리를 이기는 한가지 꽃인데/세상에선 너무 나누어 품평하지/색깔로만 같다 말다 그러지 말고/우리 집 둘러싼 여러 색 국화를 보소.”[好是凌霜一樣花 世間常苦品題過 休將形色分同異 且看交開繞我家]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이렇게 차이를 인정하는 관용과 배려를 통해 조화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을 잘 알아야 하며 학문과 견식이 넓고 높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나 문장이 뛰어난 사람을 대방가(大方家)라고 합니다.
추수(秋水)편에는 끝없는 바다를 처음 보고 놀란 황하의 신 하백(河伯)이 북해의 신 해약(海若)에게 “이제 선생의 끝없음을 보게 되니 내가 선생의 문 앞에 오지 않았더라면 길이 대방가의 웃음거리가 될 뻔했습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능력이 부족하거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탄식한다는, 이른바 망양지탄(望洋之歎)입니다.
를 발행하는 이투데이의 주소는 대방동입니다. 대방(大方)은 큰 네모, 곧 대지를 말합니다.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고 믿어왔습니다. 노자 도덕경 41장에는 “큰 네모는 귀퉁이가 없고 큰 그릇은 더디게 이루어지며 큰 음은 소리가 희미하고 큰 형상, 곧 도는 형체가 없다”[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발족한 기자단을 대방동년(大方同年)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동갑인 사람들의 한가지 마음과, 화이부동의 자세와, 대방가를 지향하는 노력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런 마음과 자세는 동년기자단을 비롯한 특정 단체나 모임에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든 두루 중시하고 추구해야 할 보편타당한 덕목이라고 믿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읽는 잡지에 굳이 이 글을 써서 싣는 이유입니다.
여전히 청춘의 시간을 통과하는 이화여고 정동길을 안혜초(安惠初·75세) 시인과 걸었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그 나이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젊음을 보여줬다. 민족지도자인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1891~1965)의 손녀이기도 한 그녀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후 1967년 의 추천으로 등단했으니 작가로서의 경력도 내년이면 50주년이 되는 원로시인이다. 그러나 그러한 나이와 경력에 안주하지 않고 여전히 꾸준한 시 활동과 더불어 소설, 콩트, 동화 등 다양한 작품 활동을 준비하고 있는 안 시인의 젊음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일까?
우리 사랑 지금은
잠들어 가도
조금씩 알게 모르게
잠들어 가도
그대와 나
어느 한쪽이라도
깨어 있으면
오뉴월의 싱그러운 햇바람으로
깨어 있으면
우리 사랑 이대로
스러지지 않아요
그대 사랑 나 먼저
하품을 하면
내 사랑이 자꾸
자꾸 흔들어 주고
내 사랑이 그대 먼저
눈을 비비면
그대 사랑 자꾸
자꾸 흔들어줘서
- 중
안혜초 시인의 시 은 2006년 봄, 시비(詩碑)로 만들어져 전남 화순군 남면 운산리 평화문화휴양 시비공원에 세워졌다. 또한 2004년 가을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중국어역시집의 제목으로 선정, 타이틀 포엠이 되기도 했다. 1941년에 태어난 안 시인의 나이를 잊게 만드는 풋풋함이 담겨 있는 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한 감수성은 저 시를 쓴 지 10년이 넘은 지금도 여전한 듯해 보였다.
시는 기도, 일기, 편지, 세상에 내보내는 뜨거운 메시지
안 시인이 기억하는 자신이 처음 쓴 글은 중학교 2학년 때다. 에서 내는 문예지에 투고했던 산문이었는데 제목은 였다. 그 글이 입선된 것을 계기로 문예란에 계속적으로 글을 투고했다. 이화여고 재학 중 교지 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글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는 사람이 된 것이다.
안 시인 스스로 말하길 자신에게 시란 ‘기도, 일기, 편지, 세상에 내보내는 뜨거운 메시지’이다. 그녀는 어떤 길을 갔더라도 시만큼은 계속 썼을 거라고 말하는 투철한 시인이기도 하다.
“무얼 바라서가 아니라 시를 쓰지 않곤 못 배겼을 겁니다. 오죽하면 내가 ‘시는 내게 있어 평생 결혼만큼은 하고 싶지 않은 숙적 같은 연인’이라고 시로도 썼을까요?(웃음) 평범한 시민인 나는 사회로부터 소외되지 않는 시인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제 시는 관념적이지 않고 쉽죠. 조금이라도 살아가는 데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시를 쓰고자 앓고 또 앓았습니다. 시는 삶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그 시는 쓰는 시인이 아프면 시도 아프고 시인이 비틀어지면 시도 비틀어집니다. 그리고 원래는 언론인으로 크게 성공하고 싶었는데 건강 문제도 좀 생기고 결혼 생활과 병행도 힘들고 해서 집에서도 쓸 수 있는 문학 쪽으로 기울어졌지요.”
윤동주 시인과 안혜초 시인
안 시인은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시집 와 영화 의 흥행으로 다시 주목받게 된 윤동주 시인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바로 2001년 제17회 윤동주문학상의 수상자이기 때문이다.
바보야, 이 바보야
차 한 잔
사과 한쪽에도 맘에 걸리고
잎새에 이는 잔바람에도
잠 못 이루는 …
- 중
“자작시에서도 말한 적이 있지만 윤동주 시인하고 나하고는 기질적으로 비슷한 데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동안 50년 가까이 시를 써 오면서 꽤 여러 번 문학상을 받았는데 윤동주문학상은 그중 가장 먼저 내세우고 싶은 상이기도 합니다. 이 상이 내게 더의미가 있는 것은 한국문인협회 사상 처음으로 수상자를 한국문인협회 이사진 및 문협지회장 투표로 결정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동안은 심사위원에 의해 결정했는데 당일 회의석상에서 ‘수상자 선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열띤 토론 끝에 투표로 하자고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난 그 당시 임원이 아니어서 나중에야 알았지만.”
안 시인은 자신의 시집들 중 가장 아끼는 시집은 따로 없고, 시집마다 각별히 아끼는 시들이 있다고 밝혔다.
“이제 시선집을 내게 되면 시선집이 되겠지요. 지난 2012년 9월 세계한글작가대회(국제펜한국본부 주최) 한영대역 자선 소시집을 만들어냈는데, 현재로선 그게 가장 아끼는 시집이에요. 시집 제목은 이구요.”
그녀가 시를 쓰면서 미처 기대하지 않았던 보너스 같은 일들이 있다. 와 등 두 편은 시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 , , 등 여러 편은 작곡되어 노래로 발표되기도 했다. 그녀는 시가 노래가 될 수 있다는 건 굉장히 보람 있고 행복한 일이라고 재차 말했다.
오랜 경륜에서 다져진 삶의 철학과 포스
관념적인 시가 아닌 생활 속에서 살아 있는 시를 쓰고 싶었고 주로 우리 누구나의 보편적인 진실을 추구했다는 안 시인은 그렇게 살아있는 것에 대한 몰두를 통해 자신의 생명력을 지켜왔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피할 수 없는, 나이듦에 대한 깨달음이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늘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 들이 쌓여 있어서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민센터에서 ‘지하철 어르신 우대용 교통카드’를 신청하라는 공문이 날아들었을 때, 어느 날 갑자기 ‘원로시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 정말 이제부턴 내가 노인세대로 분류되는구나’ 하여 내심 당혹스러웠습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최근 유엔에서 재정립한 평생 연령 기준을 보면요 0~17세 미성년자, 18~65세 청년, 66~79세 중년, 80~99세 노년,100세이후 장수노인이라네요. 하하.” 활달하게 웃어젖히는 안 시인의 몸짓과 말투에서 오랜 경륜으로 다져진 삶의 철학, 아우라가 느껴진다. ‘20세의 청춘에도 노년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80세 노년에도 청춘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는 새뮈얼 울만의 저 유명한 말과 함께.
인간으로선 ‘부끄러움’, 여자로선 ‘수줍음’을 잃고 싶지 않아
나이가 들면서도 잃고 싶지 않은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거기에 그녀가 유지하고 있는 젊음의 비밀이 있는 게 아닐까?
“인간으로선 ‘부끄러움’이고 여자로선 ‘수줍음’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수줍음’은 ‘약한 것’과 다릅니다. 요즘 강하고 유능하게 보이고 싶어 ‘수줍음’을 벗어 던져 버린 듯한 여자들이 많아져 가는 게 안타깝습니다. 요즘 여자들은 ‘예쁘다’보다 ‘섹시하다’는 말을 듣기 원하는데, 수줍음이야말로 여자를 가장 여자답다고 느끼게 합니다. 개인적으로 난 남자도 약간 수줍어하는 남자가 매력이 있어요(웃음).”
그러고보니 활달한 듯 보이면서도 언뜻언뜻 수줍어하는 기색이 만년 소녀와도 같다.
안 시인이 요즘 들어 가장 쓰고 싶은 글 중의 하나가 ‘여자는 여자로 강하라’라는 주제다.
“강하게 보이기 위해 남자처럼 구는 여자들은 한심하잖아요? 보이시한 여자가 일면 매력 있긴 하지만, 그건 남자 흉내하곤 다르지요. 여자로 태어나 여자만이 할 수 있는 걸 하는 것, 무엇보다 어머니가 된다는 건 숭고한 거예요. 자녀를 낳아 한 사람의 몫을 훌륭하게 해 낼 수 있도록 양육함은 개인과 나라와 인류를 위한 실로 위대한 공헌이 아닐 수 없죠.”
할아버지 민세 안재홍이라는 거대한 산
최근 가장 행복한 일로 지난해 가을 첫 손자를 본 게 가장 큰 경사이고 기쁨이라고 꼽는다.
“너무 늦게 본 손주라서요. 기도를 정말 열심히 했어요. (손주를 본 지금이)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맘 편한거 같아.”
안 시인은 독립유공자인 민세 안재홍의 손녀이기도 하다. 민세(民世)는 ‘민족과 세계’라는 뜻이다. 안재홍은 일제 강점기 조선일보 주필, 사장 등 언론인으로 종횡무진 활약, 일제에 의해 9번이나 투옥되었으며 사학자로서의 업적도 크게 남겼다. 해방 이후엔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국민당 당수 등 중도우파 성향의 정치인으로 활약, 초대 대통령 선거에선 이승만·김구에 이어 3위를 하였고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한국전쟁 때 불행히도 납북되었다.
“혜초(惠初)는 첫 은혜, 첫 손녀라는 뜻으로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그분은 아랫사람에게도 존칭을 쓰셨고, 모진 고문에도 신음조차 크게 내지 않아 심문하던 왜경들도 경탄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성실하고 검소해 미 군정시절 한국인 행정수반인 민정장관 시절에도 도시락을 꼭 지참하셨고, 고매한 품성의 민족지도자였습니다. 할아버지께 물질적 혜택을 받은 적은 없지만 나라를 구하시는 데 평생을 헌신한 분의 손녀라는 자긍심과 함께 그 분께 누를 끼칠까봐 조심 조심하며 살아왔어요.”
등단 50주년, 이젠 나를 위해 살아야 할 시점
안 시인에게는 지금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개인적인 역사를 정리하는 일이다.
“내년 1월이면 문단 등단 50주년이에요. 시집 7권을 정리해서 시선집을 꼭 내려구요, 그리고 더 늦기 전에 신앙 간증집도 내야겠구요. 또한 한불대역 시집, 한일대역 시집도 준비 중입니다. 지난 20년 가까이 할아버지 민세 안재홍 선집에 이어 전집을 내느라고 내 것은 자꾸 보류해왔는데 이제 더 이상 미룰 수가 없게 됐어요. 수필집, 칼럼집도 내야 할 것들도 있고 단편소설, 콩트, 동화 들도 써서 발표할 것들이 각각 여러 편씩 쌓여 있는데….”
안 시인에게는 평생을 살면서 꼭 지키면서 살아온 것이 있다.
“40세 전후에 몇 차례 걸쳐 성령은사체험을 경험한 이후로 지금까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말을 하루도 잊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넋두리를 하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다’는 그녀의 말은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안 시인의 의지를 잘 드러내고 있었다. 그 의지 또한 안 시인의 나이를 믿기지 않게 만드는 젊음의 원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선 특유의 에너지가 느껴지곤 한다. 세상의 잣대에 흔들리지 않고 신념을 따라 걸어온 길은 고스란히 그녀의 자부심이 됐다. 그녀의 시가 투명한 건 삶에 대한 특유의 낙관 때문일 것이다. 정갈하고 깔끔하게 바라보는 안 시인의 예쁜 감정을 담아왔다. 봄이 오는 덕수궁 길목에서 안 시인과의 짧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 벌써부터 그녀와의 두 번째 만남이 기다려진다.
△ 안혜초 시인
이화여고·이화여대 졸업. 세계여기자 작가협회 한국지부 부회장 역임. 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평화위원회 위원장. 한국현대시인협회 부회장, 현 지도위원. 한국문인협회 대외 협력위원. 한국여성문인회 이사. 이화여대 동창문인회 회장, 현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