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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수에도 퀄리티가 있다, 장수학자 박상철 교수 “하자, 주자, 배우자”
- 장수는 누릴 수 있으면 축복이고 누릴 수 없으면 재앙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장수하라는 말이 달갑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은 나빠지고 삶의 질은 하락한다고 생각하기에, 차라리 병들기 전에 깔끔하게 죽는 게 좋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사람들도 있다. 국내 장수학계의 전문가인 박상철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뉴바이올로지 전공 석좌교수는 그런 생각이 틀렸다고 지적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백세를 만나봤을 그가 밝히는 얘기는 충격적인 사고의 전환을 요구했다. 고령화시대 백세청풍(百世淸風)의 기운으로 장수하는 사람들의 패러다임을 박 교수의 시각으로 들여다봤다. 박상철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뉴바이올로지 전공 석좌교수는 2000년에서 2009년 사이에 국내 최초로 백세인구를 조사한 결과를 발표해 장수에 대한 인식을 획기적으로 바꾼 인물이다. 그가 백세인구를 조사하게 된 이유는 매우 현실적이고 당연한 인식으로부터 시작됐다. “사람이 늙으면 신체기능이 점점 떨어지는데 아주 늙었을 때는 어떤 모습일까, 그때가 되어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독립적으로 사는 게 가능할까? 저는 그것이 가장 큰 의문이었습니다.” ‘100세 정도 되면 생활이 형편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박 교수는 막상 조사를 하면서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만나자마자 힘자랑하던 백세인 “전남 곡성에서 만난 홍순갑 어르신은 당시 102세였는데 만나자마자 힘자랑을 했습니다. 마당에서 팔굽혀펴기 100개를 하고 계시더군요. 구례 산동면에 사는 101세 임종철 어르신은 뵈러 갔는데 지게를 메고 오시더군요. 그리고 손자가 100세 어르신을 모시는 게 아니라, 100세인이 쉰 살 손자를 데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더 기가 막힌 분은 쇼지 사부라 박사입니다. 102세 때, 저녁에 식사를 하다가 이 양반이 갑자기 한국말로 ‘한국에서 왔습니까?’ 하고 묻더군요. ‘예’라고 대답하니 ‘그럼 우리 한국어로 이야기합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65세 정년에 딱 퇴직하여 ‘한글을 배워야 한다’ 싶어 한글을 배웠고 80세에는 중국어를 배웠습니다, 100세 때 러시아어를 배웠고 104세 때 브라질에서 이분을 초청했는데 그때부터 포루투칼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90대가 인터넷을 하는 마을 박 교수가 조사를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만난 국내 장수인들은 대략 250여 명에 이른다. 백세인들의 사례를 보니 나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새로운 깨달음이자 분명한 성공 좌표들이었다. 나이가 들어도 젊었을 때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새로운 공동체마저 만들고 있었다. “도쿠시마에 가미가쓰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농업학교를 막 졸업한 젊은 사람이 농협의 직원으로 들어갑니다. 가서 보니 마을 주민이 2000명인데 65세 이상이 1000명이 넘었던 겁니다. 50% 이상의 인구가 노인인 초고령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인들은 자주 티격태격 싸웠고 일을 하지 않으면서 손쉽게 얻으려고만 했습니다.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아 ‘우리 일을 합시다’라고 말하며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도쿠시마 산속 마을에 있는 재료들로 일본 요리 장식용 패키지를 만들자’는 게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동네 어른들이 단번에 그런 일을 하겠다고 했을 리가 없다. 겨우 3명이 시작했는데 이게 팔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물건이 팔리자 할머니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주문을 뺏어가려고 했던 거죠. 젊은 사람이 70~80세 사람들의 싸움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사람이 꾀를 냈죠. ‘주문은 인터넷으로 받아가시오’라고. 그러자 처음에는 어르신들이 무슨 인터넷이냐며 난리를 쳤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딱 버텼고, 2년이 지나니 70~90대 마을 주민들이 컴퓨터를 하게 됐어요. 세계 최고령 인터넷 마을이 돼버린 거죠. 그렇게 해서 마을이 발전한 지 30년 이상이 됐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흉내를 내려고 해도 게임이 되지 않습니다.” ‘고령화 사회가 되면 돈이 많이 든다.’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며 걱정하고 있다. 박 교수는 반대로 생각한다. 저비용 장수사회를 만들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장수인이 건강하게 일하며 생산 인력으로 생활할 수 있으면 되는 일이다. 앞서 소개된 고령화 마을의 기업화가 그 좋은 모델이란다. 그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슈퍼 노인의 시대가 오고 있다 “‘나이가 들어도 잘 살 수 있는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당당할 수 있는가?’ 있습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면 생기는 많은 문제점들만을 생각했었는데 위에서 소개한 분들을 보면 안 그렇습니다. 그러니 패러다임을 바꿀 때가 온 거예요. ‘패러다임 시프트(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두리로서의 이론적인 틀이나 체계)’가 일어나야 합니다.” 박 교수는 ‘지금 놀라운 시대가 오고 있다’고 강조했다. ‘슈퍼 노인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일본이나 유럽에는 100세인의 육상대회가 생겼습니다. 영국의 파우자 싱은 102세의 나이에 마라톤 풀코스를 8시간에 걸쳐 완주했습니다. 그는 단축 마라톤인 10km를 1시간 30분 만에 완주하기도 했습니다. 나가오카 미에코라는 100세 할머니는 수영 마라톤 1500m를 완주했습니다. 미국 돌푸드 사의 데이비드 머독 회장은 94세 때, 캘리포니아의 자기 목장에서 아침마다 한 시간씩 말을 타고 다녔습니다. 지금은 99세인데 아직 회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100세 장수가 보편화되고 있는 현실은 여러 통계 지표로도 증명되고 있다. 제대로 장수하며 일하는 사람들 빠른 속도로 인간의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있다. 평균 수명이란 것은 어디까지 갈 것이냐. 실제 사람들이 많이 죽는 나이인 최빈사망연령은 0세부터 100세까지 중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사망하는 연령의 개념으로 평균수명보다 더 길다. 최빈사망연령은 1950년부터 계속 늘어나고 있다. 우리나라 평균수명은 82세, 최빈사망연령은 90세가 넘었다. 이제 고령사회에서는 실제 사람들이 제일 많이 죽는 나이가 중요하다. “최빈사망연령 표준편차를 보면 옛날에는 10년 정도였는데 지금은 6년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들 나이의 표준편차가 작아진다는 것은 죽는 사람들 나이의 차이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장수의 보편화’가 이뤄지고 있는 겁니다. 옛날에는 특별한 사람들이 장수했는데 지금은 ‘somebody’가 아닌 ‘everybody’입니다.” 100세가 넘는 인구는 일본이 6만 명이지만 우리나라는 3000여 명이다. 미국은 7만 명, 중국은 5만 명 정도다. 단순히 나이를 먹는 게 아니라 건강한 노인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지표다. “옛날에는 70이라는 나이는 죽어야 할 나이였죠, 지금 70이란 나이는 일을 못해서 안달 난 나이입니다, 저도 70입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죠. 건강한 노인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는 건강한 노인에게 ‘dependent Life(의존적인 삶)’를 가지게 하지 말고 ‘Independent(독립된)’할 수 있게끔 제도적인 문제를 바꾸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제대로 장수시켜버리자.’ 그러면 병원비가 안 듭니다. ‘장수인은 일을 시켜버리자.’ 그러면 복지비용도 안 듭니다. 이게 제 주장입니다.” 무조건 부지런하라 박 교수는 사람이 아무리 늙어도 변하지 않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그 사람의 목소리입니다. 20대 때 헤어진 애인이라도 딱 들으면 ‘아, 그녀’라고 생각이 납니다. 그다음에 변하지 않는 것은 ‘성격’, 즉 마음 씀씀이입니다.” 박 교수가 제시한 사례들 덕분에 백세가 되어도 인생은 젊을 때와 다를 바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은 잘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구체적인 방법을 들어봐야 할 때다. 건강하게 장수하기 위한 기본적인 방법론을 묻자, 박 교수는 다산 정약용의 이야기를 꺼냈다. “다산 선생이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때 만난 사람이 황상(黃裳, 1788~1870)이란 사람입니다. 이분이 글을 잘 쓰셨는데, 라는 문집에 다산 선생과의 일화가 나옵니다. 다산 선생이 이분에게 ‘공부하라’고 말해서, ‘내가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 수 있습니까?’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산 선생이 한 말씀이 세 글자였습니다. ‘부지런해라, 부지런해라, 부지런해라.’ 사실 장수라는 것도 이 3근계(勤戒)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장수도 그냥 이뤄지지 않습니다. 건강장수라는 것은 다 부지런해야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많은 장수인들에 대해 연구할 때, 무엇을 먹느냐, 어떻게 생활하느냐가 주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 세계 공통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장수는 성실한 사람, 부지런한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백세라도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꿔라 부지런하라는 것은 무언가를 실행하라는 말과도 같다. 박 교수는 그 실행 부분을 간단하게 세 가지로 나눠서 설명했다. “‘무엇이든 해버려라.’ 나이가 들었다고 핑계대지 마라. 못할 이유가 뭐 있냐. 그리고 나이가 들면 ‘받으려고 하지 마라, 줘라.’ 마지막으로 나이가 들면 ‘배워야 한다.’ 배워야 줄 것도 생기고 할 것도 생긴다.” ‘하자, 주자, 배우자. Do it, Give it, Prepare it. 行之 與之 習之.’ 그가 던지는 장수시대의 실천강령이다. 백세인들에게서 ‘움직이고(動), 적응하고(應), 머리를 쓰며(判), 느끼고(感), 절제(適)’라는 공통점이 발견됐다고 한다. 그는 “장수를 위해서는 유전자, 성격, 환경 등의 자연적 요인도 중요하지만 운동, 영양, 관계, 배움, 참여 등의 생활습관이 특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중 ‘관계’가 가장 중요한 비결인 것 같다며 여기에는 부지런함이 포함된다고 했다. 결국 나이가 들수록 의존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스스로 독립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존재가 되는 게 중요하다. “백세인들 중 고혈압, 관절염, 위장병이 있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당뇨는 거의 없어요. 당뇨는 생활습관 질환인데, 결국 장수와 생활습관도 연관이 있다는 거죠.” “98세에 시집을 내서 100만 권이 팔렸다는 시바타 도요 할머니가 쓰신 시 중 ‘비밀’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99살이라도 사랑도 하는 거야, 꿈도 꿔, 구름도 타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100세가 돼도 연애하면 안 되겠습니까? 김형석 교수가 올해 한국 나이로 98세이신데, ‘뭐가 가장 하고 싶으냐?’ 물었더니 ‘연애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박상철 (朴相哲) 교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생화학 전공으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고 1980년부터 2011년까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생화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과학기술부 우수 연구센터인 노화세포사멸연구센터와 서울대학교 노화고령사회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가천의대, 이길여 암·당뇨연구원장을 거쳐 현재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노화고령사회연구소 고문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 등이 있다.
- 2017-06-05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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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식으로 소소한 삶을 다룬 영화 <심야식당2>
- 자정부터 아침 7까지 영업하는 심야식당. 메뉴는 돼지고기 된장국 정식 하나뿐이지만 주인장 ‘마스터’는 손님이 원한다면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 낸다. 2015년 많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 새로운 메뉴와 스토리로 2년 만에 돌아왔다. 1일 오후 서울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에서 영화 언론시사회가 일본 중년배우 코바야시 카오루와 후와 만사쿠가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는 도시 중심가의 바쁜 하루가 저물어가는 동안 뒷골목에서 피어나는 맛있는 음식 냄새와 따뜻한 위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3개의 에피소드가 이어진다. 하루의 스트레스를 불고기 정식으로 날려버리는 직장인 ‘노리코’, 엄마와의 갈등을 피해 볶음우동으로 허기를 달래는 ‘세이타’, 연락이 되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는 동안 돼지고기 된장국 정식으로 위로를 얻는 ‘유키코’ 할머니 등 에피소드마다 다른 사연을 지닌 손님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심야식당의 음식으로 하루의 고단함을 풀고 털어낸다. 심야식당의 주인장 ‘마스터’ 역의 코바야시 카오루는 “일본, 한국, 중국까지 많은 관객이 을 봐주시는데, 일본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던 상황이라 기쁘다”라며 “이번 작품에서는 덜렁거리고 실수도 하는 마스터의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도록 연기했다”고 작품에 대한 애정을 나타냈다. 단골손님 역으로 9년간 과 함께해 온 후와 만사쿠는 “음식이 사람과 사람을 맺어주는 영화”라며 “영화 속 음식은 소박하지만 어딘가 그리운 맛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는 8일 개봉한다.
- 2017-06-02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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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분세락(轉糞世樂)
-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의 사자성어는 “전분세락(轉糞世樂)”이다. 생로병사로 이어지는 인생살이가 어려움이 많아도 살만한 구석이 많음을 강조한 말이다.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최고령 생존자였던 헤르츠 좀머 할머니는 110세로 생애를 마쳤다. 숨을 거두기 전에 “살면서 많은 전쟁을 겪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지만, 삶은 배울 것과 즐길 것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선물”이라는 말을 남겼다. 유대인 학살의 현장을 지켜보며 처절한 아픔을 겪었어도 인생은 아름다운 선물이라고 여겼다. 전분세락을 웅변한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사람이 사는 동네는 살아가는 모습과 생각이 비슷하다. 날이 갈수록 세상은 각박해지고 혼란스러운 점이 없는 바는 아니어도 세상은 살만한 구석이 있음을 발견한다. 가만히 살펴보면 좋은 사람과 기쁨이 가득하다. 이름 모를 풀 한 포기에도, 보일 듯 말 듯 한 귀퉁이에서 피는 한 송이 꽃에도 자연의 아름다움이 담겨있고 생명력이 꿈틀댄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설렘은 곧 삶의 기쁨이고 미래의 희망으로 행복의 원천이다. 삶의 기쁨은 여러 곳에서 온다.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오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생겨나는 기쁨일 수도 한다. 갓난아기의 해맑은 미소에서 엄마가 그냥 행복해지듯이 말이다. 아침 일찍 고운 햇살을 반기며 이슬 머금고 피어나는 꽃송이를 바라보는 데서도 그러하다. 아침 산책길에 만나는 철 따라 피는 꽃도 기쁨을 준다.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생강나무 꽃이 있고 애기똥풀꽃도 그렇다. 대부분 사람이 그러하듯 갓 피는 꽃과 파릇한 새싹을 보고 기쁨을 느낀다. 필자가 사는 동네는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주변이 논밭이다. 모내기가 한창인 요즘 물이 가득 채워진 논에 반영된 불그스레한 일출이 장관이다. 나무 사이로 고개를 쭉 들이미는 한 줄기 햇살에 빛나는 연둣빛 잎새도 정겹고 신비스럽다. 날마다 같은 길을 걸어도 나무와 꽃, 풀 포기, 동녘에 뜨는 아침 태양이 다르게 다가온다. 시간과 날씨에 따라 자연의 모습이 달라지기에 늘 새롭게 느껴진다. 주변에 만나는 소소한 자연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어서다. 늘 아름답다는 생각이 가슴에 가득해서다. 일체유심(一切唯心造)이다. 세상은 마음먹기에 달렸음이다. 세상은 아름답게 보면 한없이 아름다워진다. 아름다운 세상을 모두 즐기기엔 인생이 짧게만 느껴진다. 일분일초가 아깝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간다. 전분세락이란 말의 의미를 깨달아 간다. 세월이 익어감이 아닐까? 어떻게 살아야 전분세락의 세상을 더 즐겁고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까? 더러는 너무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 듯하며 살았는지 모른다. ‘나쁜 포도주를 마시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라는 서양인들의 노후 삶의 철학을 배우고 싶다.
- 2017-06-02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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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아니면 언제
- "멀리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제 못 와?" “네, 늘 건강하시길 기도할게요. 방구 어르신은 술 즐기실 만큼만 드시구요. 쌕쌕이 어르신 우리 경로당 위해 공원청소 건강 위해서라도 계속해주시구요. 녱녱이 할머니 우는 소리 그만하시고 그동안 맛있는 점심 고마웠어요. 욕쟁이 할머니 언제 다시 와도 그 욕 들려주셔야 해요. 타짜 할머니 고스톱 바닥 쓸어가기 기술 재미있었어요.” "우린 어떡해~" 한사코 섭섭해하시는 투박한 손을 뿌리치고 나오는 필자 마음 역시 무너진다. 화요일: 구룡마을 물품 배분 목요일: 경로당 두 곳 배분 토요일: 배식 및 배급 일주일에 세 번 봉사 다니던 곳에 작별인사차 다니며 같은 말씀 들어 큰 보람을 느꼈다. 나이 들어 어딘가 불편한 일이 생겼을 때 필자도 당당하게 케어받으려면 힘 있을 때 타임뱅크라 생각하고 열심히 모시자 몇 년 기를 쓰고 다녔는데 마음의 적금이 와르르 깨지는 기분이다. 새로운 곳에 정착하며 이제 힘이 딸리니 또 다른 분야에서 머리로 하는 봉사를 하자는 마음으로 지역사회를 위해 재능기부를 생각했다. 현재 숙명여대에서 1인당 수강료 80만원인 ‘리스타트 카운슬러’ 과정을 지역사회에서 무료로 가르치기로 마음먹었다. 5월 17일 관리사무소 회의실, 취지를 설명하니 관리사무소 소장님이 동 대표회의에 상정시켜 모든 대표위원들의 열렬한 동의를 받았고 강의장 문제까지 상정하니 관리사무소 회의실이 비어 있는 낮 시간을 사용하라고 해서 강의장까지 일사천리로 원만하게 해결됐다. 문제는 수강생 모집이었다. 각 동 엘리베이터와 입구에 모집 광고지를 붙였으나 전화 한 통 없는 날이 계속되었다. 아니 이럴 수가. 이 좋은 고급 강의를 그것도 무료로 한다는데 연락이 없다니. 동 대표 사모님들만 오셔도 차고 넘치는데 동 대표님들은 댁에 가셔 한 말씀도 안 하셨단 말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누군지 아는 분들이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생각을 달리해 적극적 홍보에 나섰다 그리고 “하늘은 땀을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는 케케묵은 말이 진실이란 걸 알았다. 이 과정은 다모작 시대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므로 이번 한 번으로 끝내지 않고 내년에 2기를 모집하고 해해연년 계속 이어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또한 보람을 찾는 일 아니겠는가.
- 2017-05-30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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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만한 몸매의 모델을 꿈꿔본다
- 싫증을 잘 내는 사람들이 유행을 만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참 변화무쌍하다. 요사이 스키니와 통바지가 다시 유행이다. 필자가 대학 1, 2학년 때 꽉 끼는 바지와 통바지가 유행했었다. 외출할 때면 가끔 듣는 소리가 있었다. 스키니를 입으면 “그 바지는 입고 꿰맸니?”라는 말을 들었고, 통바지를 입으면 “동네 다 쓸고 다니겠다”라는 말을 들었다. 일정한 주기로 유행은 되풀이된다. 이에 따라 화장법도 진화해가고 있다. 미의 관점이 바뀌는 것이다. 겉에 걸치는 옷뿐만 아니라 몸매의 기준도 바뀌었다. 필자가 어렸을 때는 통통하고 배가 나온 사람은 사장 또는 부유한 사람의 표본이었다. 욕심 많은 사람이나 지배 계층을 의미하기도 했다. 반면 마른 사람들은 가난하거나 핍박받는 사람들로 무능하게 표현됐다. 그러나 요음은 뚱뚱한 사람은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처럼 보이고, 마른 사람은 체육관에 나갈 정도로 여유가 있어서 체중관리를 잘하는 부유한 사람으로 비쳐진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을 보면 옷을 걸치지 않은 나체가 많다. 황금비율에 의해서 인체의 아름다움을 조형미 있게 표현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국립 러시아박물관에서 본 조각들은 마치 살아 움직일 것처럼 꿈틀거렸다. 근육이 볼륨감 있게 표현되어 곧 긴 숨을 토해낼 것만 같았다. 신들이 나체인 까닭은 신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담과 이브도 에덴동산에서는 나체였으나 죄를 지은 후부터 옷을 입기 시작했다. 조각이나 서양화에서 보이는 여인들의 몸은 풍만하고 오동통하다. 마른 몸보다는 풍만한 여자가 더 육감적이다. 클레오파트라나 양귀비가 말랐을까? 그랬다면 역사책이 다르게 쓰였을 것이다. 처녀의 아름다움이 당찬 날렵함과 날씬함이라면 중년의 아름다움은 풍만하고 원숙한 건강미에 있다. 여자를 바라보는 미의 기준은 젊을 때와 중년 이후가 달라져야 한다. 건강을 해칠 정도의 비만도 깡마름도 아닌 건강미가 최고다. 그런데도 깡마른 연예인들을 보며 자신의 몸이 뚱뚱하다고 착각하거나 남의 시선 때문에 소중한 자신의 몸을 해치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필자도 새해를 맞으며 세운 계획에 체중 5킬로 감량이 들어 있었다. 남의 시선을 의식했다기보다는 자존감 회복과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었다. 먹은 것 이상으로 움직이면 체중이 빠질 것으로 생각하지만, 체중계는 1~2킬로를 왔다 갔다 할 뿐 도무지 내려가질 않았다. 빠지지 않는 체중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칼로리를 계산하며 음식을 선택하고 아침마다 걸어도 변화가 없다. 나이가 들면 체중이 안 빠진다는 말이 실감 난다. 운동이야 계속하겠지만, 마음은 다르게 갖기로 한다. ‘중년이 되면 건강미에 중점을 두고 당당하게 풍만함을 유지하는 것이 좋겠다.’ 언젠가 서양화 모델처럼 오동통하고 풍만한 몸매가 미인으로 평가받는 시대가 다시 올지도 모른다. 누가 아는가? 필자가 혹시 풍만함과 원숙함으로 아름답게 나이 든 할머니 모델이라도 될지.
- 2017-05-30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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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을 순례로 바라보는 눈
- 한낮에도 그저 적요한 읍내 도로변에 찻집이 있다. ‘카페, 버스정류장’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버스정류장’이란 떠나거나 돌아오는 장소. 잠시 머물러 낯선 곳으로 데려다줄 버스를 기다리거나, 마침내 귀환하는 정인을 포옹으로 맞이하는 곳. 일테면, 인생이라는 나그네길 막간에 배치된 대합실이다. 우리는 모두 세월의 잔등에 업히어 속절없이 갈피없이 흔들리며 먼 길을 가는 나그네가 아니던가. 저마다 여정을 손에 쥔 순례자이며 여행자! 상호에 서린 서정을 음미하며 찻집으로 들어선다. ‘카페, 버스정류장’ 주인 박계해(57)씨는 5년여 전까진 문경시 가은읍의 산골에서 귀농자로 살았다. 그보다 더 오래전엔 중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교직생활은 신바람 났었더란다. 그럼에도 교사직을 버리고 귀농을 한 건 그 어떤 틀에 사로잡혀 살기를 악어의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는 일처럼 싫어하는 성향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남편이 어느 날 귀농을 선창하고 나선 데 있었다. 그녀는 고분고분 따랐으며, 남편보다 더 빠르게 시골생활에 적응했다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에 그렇게 시작된 시골 살림은 이후 10여 년간 계속됐으나 다시 행선지를 바꾸었다. 인생이라는 여행 혹은 순례에 무슨 고정된 목적지가 있을 것인가. 박계해씨는 우연히 상주시 함창읍의 거리를 걷다가 오래된 일본식 2층 고가에 필이 꽂혀 단박에 임대를 하고 찻집을 차렸다. 교사에서 농촌생활자로, 다시 소읍의 찻집 운영자로. 다채로운 편력을 하며 중년기 15년여의 세월을 흘러온 셈이다. 섭렵이 쏠쏠했으니 드라마도 푸짐하렷다. 행복과 불행이, 만족과 불안이, 빛과 그늘이 순리처럼 그녀의 시간을 곡예하며 통과했을 게다. 그렇다면 마땅히 자리에 모시어 경청하는 게 사리에 맞는 일. 운치도 정취도 남실거리는 찻집에 마주앉아 한 여자의 삶에 서성거리는 나름의 광량(光量)이라는 걸 느껴볼 수 있는 기회란 행운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귀농 10년의 얘기부터 들어볼까? 순식간에 학교에 사표를 내고 후다닥 귀농한 대목으로부터 얘기가 시작되었다. “남편의 제안을 따라 귀농 교육을 받으며 곧바로 제 마음도 시골로 향했어요. 제 고향이 하동 악양의 시골인데요, 허물어져가는 돌담집에 대한 애호 같은, 농촌의 자연과 풍경에 매료되는 성향 덕분이었죠. 드디어 지인의 소개로 가은의 시골을 둘러보게 되었는데, 모든 게 맘에 들었어요. 빈집 하나를 사서 적당히 고쳐 시골 살림을 시작했어요. 도시 출신인 남편과 달리 저는 풀이나 피도 잘 뽑고, 매사 빠르게 적응했어요. 시골생활의 많은 점들이 좋았어요.” “귀농의 초기 정착에 갖가지 애환을 겪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선생의 시골생활은 좀 달랐군요. 일테면, 어떤 점들이 만족스러웠죠?” “무엇보다 도시에서와는 달리 자연이 주는 감흥들이 참 좋았어요. 하늘, 땅, 나무, 풀, 모든 자연 생태가 주는 힘이라는 것, 그게 좋았어요. 재래식 화장실을 쓰며 도시에서 좌변기를 쓸 때 느꼈던 죄의식을 갖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만족스러웠어요. 이웃분들과의 소통은 늘 즐거웠어요. 제가 말이죠, 마을 부녀회장을 맡기도 했어요. 상(喪) 당한 집에서 이웃들과 둘러앉아 전을 지진 기억도 많아요. 학교생활의 경험을 살려 할머니들을 모신 학급을 운영하기도 했어요.” 귀농 경험, 책으로 펴내다 “처음 3년간은 아무런 불편 없이 살았어요. 교직 근속 20년을 채우기 직전에 사표를 써 연금 대상자가 되진 못했지만 퇴직 때 받은 돈이 있었기에 미리 걱정하거나 연연해하질 않았어요. 그런데 3년이 지나자 돈이 바닥나고 말았어요(웃음). 저나 남편이나 돈 문제엔 워낙 태평한 사람들이었어요. 저축이라는 걸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았거든요.” “돈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는 게 귀촌귀농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물질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이 세속에선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르죠.” “저희 집 가훈을 들어보실래요? ‘내비도!’ 바로 그거였어요. 남편이나 저나 그냥 사는 스타일이었어요. 귀농해서 살며 생전 처음으로 돈의 위력을 실감했어요. 어느 정도 돈 문제에 덜미를 잡혔던 거죠. 마치 벌을 받는 것처럼(웃음).” ‘내비도!’ 내버려둬라, 저절로 흘러가련다. 렛 잇 비(let it be)! 근사한 푯대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삶이란 낭만적 지향이건 급진적 가치이건, 물적 토대에 의해서만 실현 가능하다는 소식이 난무하지만, 그게 반드시 그러기만 하랴. 귀농이나 귀촌이란 소유를 헐겁게 하는 실천일 수도 있다. 소유하지 않음이 아니라 가급적 소유의 부피와 무게를 줄이는 지혜를 발휘할 절호의 찬스일 수도 있겠지. 박계해씨의 사고와 삶은 자유로운 지평을 향했던 것으로 보이며, 귀농의 나날들은 한동안 유쾌했던 것 같다. 그러나 통장 잔고가 바닥을 치면서 당장 활로를 찾아야 했다.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라서 일을 만들어 덤벼들었어요. 가은읍내에 점포를 얻어 옷을 팔았어요. 전에 천연염색과 바느질 공부를 해둔 게 있었는데, 그게 도움이 됐어요. 손수 염색한 옷가지들이 제법 팔려나갔으니까.” “시골 옷가게 매상이라는 게 소소했을 테고, 남모르게 진땀 흘린 시절들이었겠어요.” “당시 아들과 딸, 두 녀석이 학생이었는데 교육비 부담이 컸어요.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 나갈까, 늘 고심이 많았어요. 그러나 자존심이 상하거나 위축되진 않았어요. 이왕이면 일을 즐겁게 해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가게에 딸린 안방을 동네 사랑방처럼 활용해 아줌마들과 교류를 했어요. 제가 교직에 있을 때 교사 극단을 만들어 활동한 경험이 있는데요, 가은 시골의 초등학교 학부형들과 작당을 해 연극 캠프를 열기도 했습니다.” 고심이 많은 생활이었지만 여흥을 누리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았던 셈이다. 취향과 재능을 죽이는 난감한 상황에서도 여하튼 들고 일어서는 게 낙관의 힘이렷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처럼 즐거운 게 다시 있을까. 무슨 일이건 억지로는 하기 싫은 반면, 하고 싶은 일은 기어이 해내면서 살고 싶었어요. 그런데 사실 생활에 보탬이 되고자 벌인 일이기도 했어요. 연극 강사로 나서 수입을 얻었으니까. 주부강좌에 나가 천연염색을 강의하기도 했어요.” “가은 시골에서의 귀농 경험을 담은 책, 를 출간했더군요.” “촌에 살며 농사를 좀 했지만 사실 일머리가 서툴렀고 커다란 애착도 없었어요. 자연이 드러내는 사계의 민감한 변화를 만끽하는 일, 야산에 올라 산나물을 뜯는 일, 어른들과 어울리는 일은 참 좋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다 채워지지 않는 어떤 허기 같은 게 있었어요. 나, 이렇게 살다가 마는 거야? 아니지, 이건 아니지 하는 생각으로 귀농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제가 버지니아 울프를 좋아하는데, 그가 말했어요. ‘기록하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과 마찬가지다’라고. 그 말에 자극을 받아 마을 얘기,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 좌충우돌한 경험담 등을 글로 썼던 겁니다. 책 출간 뒤엔 글쓰기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어요.” “비록 물적 애환이 자심했다지만 동분서주, 야무지게 자신을 건사한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말이죠, 귀농으로 맞닥뜨린 시련 중에 부부간 갈등이 깊어지는 경우가 드물지 않더군요. 선생의 그 열렬한 날들 중에 부군과의 관계는 어땠나요?” “흠. 저희 부부는 이혼을 했어요. 제가 먼저 이혼을 원했고, 마침내 남편이 동의해줬어요. 저는 그를 존경하고 좋아하고 사랑했어요. 그러나 더 이상 발전이 없는 한계를 깨달았어요. 소통에 문제가 생겼어요. 각자의 길을 가는 게 옳다는 판단을 했죠.” 언젠가는 섬에서 살고 싶어 이혼을 금기시하는 묘한 모럴도 있지만, 결혼이 자연스럽듯이 이혼 역시 당연한 귀결로 찾아드는 수가 있다. 이혼이 상처가 되지는 않았다고, 차라리 좋은 경험이었다고, 박계해씨는 담담하게 토로하고 있다. 그녀는 이혼 절차를 완료하고 남편과 함께 법원을 나서던 날의 기억을 다음처럼 글로 썼다. ‘그는 내 어깨를 툭 치며 독립을 축하해! 라고 말했다. 그 순간 나는 이 대단한 남자와 결혼했던 것이 뿌듯해서 그에게 몸을 찰싹 붙이고 팔짱을 끼었다.’ 박계해씨의 찻집 ‘카페, 버스정류장’은 귀농 이후 그녀의 삶을 새로운 쪽으로 데려다주었다. 인생엔 터닝 포인트라는 게 있는 법. 찻집 운영과 더불어 그녀의 나날은 바닷장어처럼 생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원로 시인 강은교 선생이 이 찻집을 다녀간 뒤 ‘카페 버스정류장’이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하기도 했지만, 어지간히 지역의 명소로 부상해 일부러 찾아드는 이가 드물지 않다. 토속적 미감과 모던한 감각이 잘 버무려져 낭만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적막한 소읍의 찻집에선 차만 파는 게 아니다. 예술인들을 위한 전시장으로, 노래 공연장으로, 시낭송 공간으로 쓰이기도 하니까. “귀농 이후 그 어느 시절보다도 편합니다. 일단은 규칙적인 소득이 발생하기에 안도할 수 있고, 다양한 개성의 사람들과 만나 삶을 얘기할 수 있다는 게 참 좋아요. 아이들도 잘 자라 아들놈은 부산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고, 딸은 만화가로 일하고 있어요. 두 번째 책 을 펴낸 일도 즐거운 추억이 되었어요.” “귀농으로 촉발된 인생의 색다른 여정이 어떤 안착에 이른 거예요?” “꽤 안심을 느끼지만 이 찻집은 앞으로 5년 정도만 더 할 작정입니다. 경제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이곳을 지역 예술인들에게 내놓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저는 다시 어디론가 떠난다거나 환경을 바꿔야겠죠. 음, 요즘엔 시나리오를 쓸 궁리를 하고 있어요. 독립영화가 아닌 상업영화용 시나리오를요. ‘나의 경제’라는 제목의 책도 한 권 쓸 예정이에요.” “가령, 무인도에 혼자 살아야 할 경우 꼭 가져가고 싶은 한 권의 책이 있다면?” “이상의 예요. 어, 그런데 제가 최종적으로 가서 살고 싶은 곳이 섬인데요?(웃음)” “섬에서의 삶을 꿈꾸세요? 고독을 견딜 수 있겠어요?(웃음)” “가급적 환경을 새롭게 바꿔 자신의 삶이 점점 나아지는 걸 느끼고 싶어요. 경험 세계를 넓혀 내적으로 성숙하는 기쁨을 맛보며 살고 싶다는 거!” 길은 다양하며, 모든 길마다 나그네의 경전이다. 삶의 문제를 여행으로 혹은 순례로 치환할 수만 있다면 귀농이건 섬이건 가슴 설레는 행로이지 않겠는가. 잠정적인 고난이야 해 뜨기 직전의 어둠이나 추위에 불과할 테고. 길은 다양하며, 모든 길마다 나그네의 경전이다. 삶의 문제를 여행으로 혹은 순례로 치환할 수만 있다면 귀농이건 섬이건 가슴 설레는 행로이지 않겠는가. 잠정적인 고난이야 해 뜨기 직전의 어둠이나 추위에 불과할 테고. 박원식 소설가 -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 2017-05-22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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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식문화 수준을 높이려면
- 여의도에서 마라톤 대회가 끝나고 체력을 보충하겠다며 고기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강 건너 유명한 고기집을 필자가 안내하겠다고 했다. 그 동네가 재개발이 되는 바람에 어디로 옮겼는지 몰라 일단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그런데 택시 운전사도 모른다고 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과연 그 집의 위치를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장사가 잘돼 번듯한 건물을 짓고 간판도 크게 달아놓았다. 그런데 좀 일찍 가기는 했지만, 손님이 우리 밖에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었는데도 데이트 족 한 팀이 더 왔을 뿐 손님이 안 오는 것이었다. 다른 한 팀은 종업원과 언쟁이 벌어졌다. “서비스업을 하는 음식점의 종업원이 손님을 이기려 한다”는 것이었다. 필자도 주문하면서 몇 마디 건넸을 때 담당 종업원의 반응이 시큰둥했다. 마치 ‘잡소리하지 말고 고기나 먹고 빨리 가라’는 투였다. 음식 값이 비쌌지만 맛도 별로 없었다. 그러니 손님들의 발길이 줄어든 것이다. 문전성시를 이뤘던 이 음식점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아마 옛날 맛을 잃고 가격도 많이 올랐으며 이런 불친절한 종업원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음식점은 주인이나 종업원의 태도에 따라 손님들이 금방 알아챈다. 불친절한 음식점은 당연히 손님들이 기피한다. 동네에도 비슷한 업종의 두 집이 바로 붙어서 영업을 한다. 한집은 손님이 넘치는데 그 옆집은 파리만 날린다. 늘 가던 집에 자리가 없을 경우 옆집이라도 가자고 했더니 일행 중 여러 명이 그 집은 가지 말라며 말렸다. 우리가 가던 음식점에 손님이 넘쳐 밖에 상차림을 했는데 그 음식점 주인이 투덜대더라는 것이다. 만약 웃는 인상으로 대했다면 늘 가던 집에 자리가 없으면 자연스럽게 그 음식점도 이용했을 것이다. 음식점 주인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싼 메뉴를 주문했을 때의 반응이 달라지는 것이다. 생선회집에 갔는데 비싼 생선회는 주문 안하고 간단한 멍게 해삼을 주문하면 안색이 달라지는 것이다. 들어갔을 때는 반색을 하더니 싼 메뉴를 시키자 돌변하며 주방에 대고 실망스러운 표시를 한다. 그러면 그 음식점은 안 가게 된다. 욕쟁이 할머니 음식점이 전국 여기저기에서 화두에 오른 적이 있다. 겉으로 말은 거칠지만, 속뜻은 그렇지 않기에 감수하고 드나들었던 것이다. 가격에 비해 푸짐하고 맛도 좋았기에 거친 말을 들어도 웃고 넘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시니어들은 더 이상 그런 음식점에는 가지 않는다. 요즘이라면 갔다가는 싸움이라도 날 것이다. 손님 중에는 갑질하는 진상들도 있다. 종업원들에게 반말을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상식적으로는 나이가 많고 적고 간에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반말을 하면 안 된다. 옛 성현의 일화중에 그 집에 갔을 때 하인이 문을 열어주기에 존댓말을 했더니 그 집 주인이 하인인데 굳이 존댓말을 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당신에게는 하인이지만, 내게는 내 하인이 아니고 초면이니 존댓말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시니어들은 음식점이나 카페 주인, 종업원들이 아들이나 딸처럼 보이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초면인데도 반말을 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아들딸 뻘이니 말을 낮춰서 되지?”하면 싫더라도 “안 된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싫은지 좋은지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외식을 자주 하게 되면서 음식점이나 손님이나 서로 접할 기회가 늘어난다. 서로 기분 좋게 대하면 서로 좋은 것이다. 그러나 한쪽이 기분을 상하게 하면 다른 한 쪽은 상처를 입는다. 외식문화의 수준은 서로 존중하고 고마워하는데서 올라간다.
- 2017-05-20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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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피티 아트(graffiti art )
- TV뉴스를 보던 중 그래피티(graffiti)에 관한 기사가 나왔다. 어떤 호주인이 우리 지하철에 들어가 전동차에 낙서를 하고는 사라졌다는 소식이다. 그래피티는 건물 벽이나 교각에 스프레이 페인트를 뿌려서 그리는 그림과 낙서를 말한다. 우리 동네 산책길의 다리 밑 한쪽 벽면에도 알록달록 예쁜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필자는 몰랐는데 손녀와의 산책길에서 아기가 그 벽면의 그림을 보더니 “할머니 원더 볼즈에요!” 라고 해서 그 그림이 어린이용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이라는 걸 알았다. 그림이 있기 전보다 화사해진 다리 밑은 보기에 좋아서 이런 벽화라면 많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들의 미대 시절, 같은 과 친구들과 함께 회사 담장에 그림을 그려주는 아르바이트를 했다며 보여준 사진이 그래피티의 한 종류였을 것이다. 필자 눈에도 수준 높아 보이고 멋져서 그래피티를 예술의 한 장르라 생각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래피티는 함부로 하면 안 되는 일이라고 한다. 밋밋한 담장에 예쁜 그림을 그리면 보기에도 좋을 것 같은데 아무 곳에나 그려놓으면 일종의 범죄라는 말이다. 그래피티를 하는 사람들은 번개처럼 스프레이로 그림이나 메시지를 쓰고는 재빨리 도망을 간다고 한다. 담장이나 평범한 벽면이 아닌 공공장소인 지하철이나 기차역 건물 벽에 낙서해 놓으니 범죄율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과거 뉴욕 지하철은 탈 게 못됐다고 한다. 강력 범죄가 발생하는 대표적인 우범지대로 역무원들이 부스 밖으로 나갈 엄두를 못 낼 정도였다는데 1980년대 뉴욕시 교통국장이 지하철을 가득 채운 낙서에 주목하고 계속 청소를 했더니 지하철 범죄가 75%나 줄었다고 한다. 아마 낙서가 그렇게 아름답거나 깨끗한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피티는 60년대 뉴욕 빈민가에서 시작해 세계로 퍼져나갔고 갱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표시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는데 그 후로 차츰 사회, 정치적 비판메시지를 담기 시작했다. 낙서 예술가도 생겼다. 스물여덟 살에 타계한 뉴욕 바스키야의 작품은 경매에서 164억 원이나 호가했다니 그냥 낙서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피티는 원래 그리는 장면을 들키면 안 되는 작업이어서 그 세계에서는 무엇을 그리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어디에 낙서를 하는지도 중요하고 접근하기 힘든 곳일수록 가치를 높게 쳐준다고 하니 재미있다. 낙서꾼들이 가장 선호하는 곳은 지하철이라는데 한밤중에 몰래 숨어 들어가 객차 전체를 통째 낙서로 채운다는 영화도 나왔단다. 외국에서만 일어나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서울에서도 그래피티로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몇 년 전부터 습격 받은 지하철이 17군데나 되었고 전담 수사관까지 생겼다고 하니 좀 걱정이다. 언젠가는 지하철역 세 군데에 그래피티 습격이 있었는데 이들은 힙합 모자와 후드 티셔츠 차림의 백인 4인조였다고 한다. 쇠톱과 절단기로 환풍구를 잘라내고 차고지에 들어가 낙서를 하고는 경찰이 손쓰기도 전에 유유히 호주로 돌아갔다는데 아마 우리나라 지하철이 깨끗하다는 소문이 나서 원정낙서까지 왔을 거라는 분석이 나왔다니 좋아해야 할 일인지 어떨지 모르겠다. 어떤 낙서를 하고 갔는지는 보도되지 않았으나 전담 수사관까지 동원되었다면 좋은 내용은 아니었나 보다. 그런데 그래피티가 우리 눈에 멋지고 예쁘게 보인다면 굳이 막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다. 낙서한 내용이 반사회적이거나 공포를 조장한다면 당연히 막아야 하겠지만 우리 동네 산책길의 벽화처럼 즐겁게 바라볼 수 있다면 괜찮을 것 같다. 언젠가 지하철을 타려고 기다리던 중 들어오는 객차에 예쁜 그림이 그려있어 보기에 즐거웠던 생각이 난다. 그렇게 그래피티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나 아름다운 그림으로 승화시킨다면 범죄라 하지 않고 예술의 한 장르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동네 곳곳에 나쁜 그래피티가 아닌, 보면서 즐길 수 있는 벽 그림이 많아지면 좋겠다.
- 2017-05-19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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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 엄마 3인방의 연기와 삶
- 글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 김혜자(76), 나문희(76), 고두심(66).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다양한 성격과 문양의 한국적 어머니를 연기해 ‘국민 엄마’라는 타이틀을 얻은 명배우라는 점이다. 그리고 45~56년 동안 시청자와 관객을 만나온 ‘우리 시대 최고의 연기파 여배우’라는 것도 이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최고의 연기력을 인증하는 연기대상 수상자라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그래서 대중과 전문가는 이들에게 ‘연기의 신’, ‘연기 9단’, ‘연기 거장’, ‘연기의 달인’이라는 수식어를 거침없이 부여하고, 후배 연기자들은 이들을 닮고 싶은 롤모델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김혜자, 나문희, 고두심은 ‘최고의 배우’라는 상징적 신화에 머물지 않고 여전히 드라마와 영화, 연극을 통해 대중과 왕성하게 만나는 현재진행형의 최고 연기자다. 이들에게 연기는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삶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일까. 프랑스 사회학자 에드가 모랭은 저서 에서 “신인은 몸을, 스타는 영혼을 보여준다”고 했다. 영혼을 보여주는 스타가 바로 김혜자다. 그녀의 연기에 혼이 담겨 있기에 그렇다. 드라마 의 일상성이 짙게 배어 있는 어머니에서부터 영화 에서의 강렬한 엄마에 이르기까지 일상성과 강렬함이 깃든 다양한 캐릭터를 오가며 시청자에게 영혼이 깃든 연기를 보여준 배우가 김혜자다. 이 때문에 작가 김정수는 김혜자를 가리켜 “연기 9단의 입신 경지”라고 표현했고 봉준호 감독은 “김혜자 연기는 접신 수준”이라는 찬사를 했다. 1962년 KBS 1기 탤런트로 연기생활을 시작한 김혜자는 드라마 , , , 영화 , , 연극 등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 연극을 통해 대중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선사했다. 천부적인 재능과 끼 그리고 후천적인 성실함과 노력으로 입신의 경지에 이르는 연기력을 보이는 스타로 우뚝 선 김혜자는 “연기는 직업이 아니라 삶이며 모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녀의 삶도 연기만큼 아름답고 치열하다. 스타로서의 명성과 영향력을 기부와 봉사 등 소외된 사회적 약자를 위해 활용하며 의미 있는 삶을 일구고 있기 때문이다. “제가 한 것은 없어요. 힘든 사람들의 손을 잡으면서 내 삶이 더 행복해지고 더 많은 것을 배웠으니 제가 은혜를 받은 것이지요.” 연기자로 살면서 엄마 노릇을 제대로 못해 자녀들에게 늘 미안하지만, 자녀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항상 기도한다는 김혜자는 작품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긍정적인 희망과 밝은 꿈을 선사하는 아름다운 어머니다. “누가 배우 나문희를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저는 세상에서 가장 욕심 많은 배우라고 말할 겁니다. 그리고 또 누가 인간 나문희를 말하라면 이렇게 말할 겁니다. 화면에 단 한 컷도 거짓이었던 적이 없었던 인간이라고요.” 에서부터 까지 수많은 드라마에서 나문희와 함께 작업한 드라마 작가 노희경의 말이다. 그렇다. 화면의 단 한 컷도 거짓이었던 적이 없고 드라마와 영화, 연극 속에서 진정으로 소생하는 배우가 바로 나문희다. 그래서 ‘70대의 나이에도 영화와 드라마에 주연으로 나서는 유일한 연기자’, ‘영화감독과 드라마 PD, 작가들이 가장 캐스팅하고 싶은 배우’, ‘믿고 감동하는 배우’라는 수식어가 나문희에게 헌사된다. 라디오가 인기 매체였던 1961년 MBC 성우 공채 1기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한 나문희는 드라마와 영화, 연극으로 활동무대를 넓히면서 대중과 만나왔다. 나문희가 우리 시대 최고의 연기력을 가진 배우로 부상한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주어진 배역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온 힘을 다해 개연성과 진정성을 부여하는 연기자의 자세다. 노역, 비중이 작은 캐릭터 등 온갖 배역을 맡으면서 다양한 연기의 문양을 체득해 최고의 연기자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작은 배역은 있어도 작은 배우는 없다’는 말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연기자가 바로 나문희다. 화장실에 가는 순간에도 대본을 놓지 않는 엄청난 노력과 연습도 오늘의 나문희를 만든 또 다른 힘이다. 영화 에서 나문희와 함께 작업한 후배 연기자 설경구는 “나문희 선생님의 대본이 너덜너덜한 것을 보고 얼마나 연습하고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었지요. 후배들에게 연기자로서의 방향을 제시하는 최고의 선배 연기자입니다”라고 말한다. 나문희는 “연기는 내가 하는 전부이자 전부를 거는 분야입니다. 전부를 거는 것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시청자와 관객은 돌아서지요. 그래서 대본을 받는 순간에서 녹화를 끝낼 때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어요. 저는 연기가 너무 좋아요. 그리고 연기가 이전보다 좋아졌다는 말을 듣기 위해 노력해요. 저에게는 지금도 연기 늘었다는 말이 가장 큰 찬사예요”라고 말하며 웃는다. “엄마(나문희)의 삶은 가족들에게 헌신적이고 생활은 담백해요. 연기밖에 모르는 분이지요.” 연극과 뮤지컬 공연장에서 가끔 만나는 나문희 딸들의 말 속에서 나문희의 삶의 문양을 엿볼 수 있다. 연기대상은 평생 한 번 받기도 힘든 상이다. 최고의 연기력과 인기, 드라마 시청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수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1972년 MBC 공채 탤런트로 연기를 시작한 고두심은 45년 연기생활 동안 KBS 연기대상 세 번(1989년 , 2004년 , 2015년 ), MBC 연기대상 두 번(1990년 , 2004년 ), SBS 연기대상 한 번(2000년 ) 등 총 여섯 번이라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연기대상 수상기록을 세웠다. “처녀 때도 늘 아줌마, 할머니 역을 해 근사한 멜로드라마 주인공 한번 하지 못했다”는 고두심은 탤런트가 된 후 한동안 가정부, 술집 종업원 등 단역에 머물거나 그나마 배역도 없이 녹화장 주변을 서성거리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무역회사 근무와 탤런트 생활을 병행해야만 했던 신인 시절을 지나 다양한 작품과 캐릭터를 맡으면서 연기력의 스펙트럼을 꾸준히 확장하며 최고의 연기자로 부상했다. 로 고두심에게 연기대상을 안겨준 장수봉 PD는 “고두심은 천부적인 연기자다. 고두심이 연기하면 캐릭터가 진정한 생명력을 얻는다”고 찬사를 보냈다. 고두심은 드라마 촬영장에선 놀라울 정도로 캐릭터에 몰입하는 집중력을 보인다. 그리고 촬영장 밖에서는 드라마 캐릭터에 관련한 인물을 지속해서 연구한다. “작품이 주어지면 항상 그 인물의 형상을 그린다. 양치질하다가도 거울을 보면서도 캐릭터를 생각한다.” 이처럼 철저한 고두심이기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배역에도 자신을 맞출 수 있고, 모든 행동을 믿을 만하고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우로 꼽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고두심은 인생의 두 가지를 아름답게 피워낸 보기 드문 사람이다. 하나는 연기에 대한 열정이고, 하나는 삶에 대한 진지함이다”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고두심은 “엄마로서, 아내로서 삶은 아쉬움이 있지만 지난 46년 동안 제 꿈이었던 배우로 살아서 행복했어요. 앞으로도 열심히 하는 배우로 살아갈 겁니다. 인생이 그러하듯 배우로서 오르막길을 올라왔으니 내려가는 일도 지금처럼 잘했으면 합니다”라며 특유의 환한 웃음을 짓는다.
- 2017-05-18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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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동적인 책 <무지개 가게>
- 침대 옆의 작은 책장을 정리하기로 했다. 잠이 오지 않을 때 손쉽게 꺼내 읽을 수 있도록 작은 책장을 두었는데 꺼내 읽은 후 아무렇게나 놓아 많지 않은 책들이 서로 뒤섞이고 무질서해서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필자가 좋아한 작가 최인호 님의 마지막 작품집 ‘인연’부터 매우 흥미롭게 읽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도 있고 전철 안에서 우연히 만난 할머니가 주셨던 할머니자서전도 보인다. 차곡차곡 정리하던 중 ‘무지개 가게’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이건 좀 의미가 있는 책으로 어떤 단체에 작은 후원인이 되었더니 보내온 예쁜 책이다. 무지개 가게라는 이름의 책은 제목만큼이나 환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인사말을 김성수 주교님이 쓰셨다. 주교님의 성함만 보고도 매우 반가웠었던 느낌이 떠오른다. 몇 년 전에 강화도에 있는 지적 장애인 재활 시설인 ‘우리 마을’에 다녀왔는데 지적 장애인이 모여 사회성도 배우고 일도 배워 자립할 수 있도록 만든 터전으로 성공회 신부이신 김성수 주교님이 설립하신 곳이었다. 주교님은 당시 80세가 넘으셨는데도 나이를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동안이셨고 건강해 보였다. 좋은 일을 하시는 분들은 다 그렇게 온화하고 부드러운 모습인 것만 같다. 점심식사 후 주교님과 단둘이 사진 찍는 영광도 있었고 그곳이 매우 인상 깊게 남았다. 주교님은 무지개 가게 책 서두 인사말에서 희망을 담보로 기회를 빌려주는 은행이 있다며 이 특별한 은행이 한국에서 마이크로 크레디트사업을 하는 사회연대은행이라고 하셨다. 평범한 은행에서는 날씨가 좋을 때 우산을 빌려주고 궂을 때 걷어 가지만 이 은행은 비가 오면 우산을 내어 주고 함께 쓰기를 청하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하셨다. 무지개 가게 이야기는 절망의 끝자락에서 싹을 틔워 희망의 결실을 얻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려는 사람, 먼저 간 남편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아내, 몸이 불편한 아내에게 희망이 되어 주고 싶은 남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우리 전통의 활을 이어가는 궁장의 꿈 이야기, 절망의 나락에 빠졌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며 자신의 손맛으로 가게를 일으킨 어머니들의 용기와 굳센 삶의 믿음이 사회연대은행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지는 과정이 진솔하게 담겨 있어 읽는 내내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을 받았다. 다들 어떻게 그런 고난과 역경을 이겨냈는지 감탄스럽기까지 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건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모두들 고군분투하여 결국은 다들 성공하였다는 해피엔딩이다. 필자도 젊어 한때 무언가 일을 해보고 싶어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 그러나 이분들 같은 용기와 신념이 부족했는지 일이 잘못되어 자본금을 날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과 해보지도 않고 실패할 것이 두려워 그만 포기해 버렸었다. 이제 생각하면 용감하고 성실하게 한 번 도전해 보지 않았던 나약함이 안타깝고 후회가 된다. ‘언제나 우리는 삶의 한복판에 있다.’라는 주제로 글을 쓴 분도 더는 추락할 곳이 없을 정도로 밑바닥에 떨어졌지만, 아이들을 생각해 험한 노상 장사와 허드렛일을 마다치 않고 노력한 결과 지금은 어엿한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다고 한다. 무지개 가게 책에 이야기를 담은 분 20명이 다들 거친 고난의 과정이었다. 그 외에도 무지개 가게를 성공시키고 있는 사람이 아주 많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은행과 세상에서 가장 용기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기적이 무지개 가게라 할 수 있다. 굴지의 많은 기업이 지원하고 있고 그보다 더 많은 풀뿌리 회원들의 지지도 있다니 든든하다는 생각이 들며 아름다운 후원이 계속되어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혼자가 아니라 서로 돕는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느낄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2017-05-18 14: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