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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공간으로 변신시켜 도시재생, 박현정 북촌탁구 관장
- 박현정 북촌탁구 관장 ‘뛰기 젊은 나이, 50+’ 캠페인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서울시50플러스재단’은 중장년 세대의 창업을 통한 도약을 지원하기 위해, ‘뛰기 젊은 나이, 50+’ 캠페인을 펼칩니다. 한국토지주택공사와 서울시50플러스재단이 함께 한 점프업5060 프로젝트를 통해 창업에 성공해 새 인생을 펼치고 있는 중장년들을 지면을 통해 소개합니다. 북촌에는 숨 가쁘게 돌아가던 일상을 내려놓고 한숨 돌리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그런 점에 매료돼 차린 탁구장에 ‘도시재생’이라는 어렴풋한 꿈이 더해졌을 때, 그는 ‘점프업5060’ 프로젝트에 지원했다. ‘문화예술을 탐구하는 스포츠 공간’ ,북촌탁구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아담한 탁구장을 마을 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켜보자는 마음은 차근차근 현실이 됐다. 북촌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북촌탁구를 찾는다. 박현정 관장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길거리 간식을 두고 가기도 한다. 영락없는 마을 사랑방의 모습이다. “북촌에는 지역 특성상 재능 있는 분들이 많아요. 그분들과 협력해서 전시나 공연을 기획하고, 지도를 만들고, 영상을 제작했죠. 기획할수록 하고 싶은 일들이 점점 많아지더라고요. 3년 전에는 아예 이사를 와서 북촌 홍반장을 자처하며 많은 일을 거들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이 ‘자꾸 일을 벌이면 힘들지 않냐’고 물어보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어 즐겁기만 합니다.” 북촌 홍반장이 꾸린 사랑방 북촌탁구는 여느 탁구장과 달리 탁구대 두 대가 전부인 곳이지만, 쓰임새는 훨씬 다양하다. 글쓰기 교육이나 기타 레슨을 위해서라면 흔쾌히 탁구대를 접어 넣고, 탁구장 벽면에 전시를 열기도 한다. 지난해 말에는 한국예술인복지재단과 예술로 협업사업을 통해 동네 어르신 9분의 사진을 모아 ‘당신의 빛나는 라떼’전을 열었다. 사업에 참여한 예술가들과 함께 먼지 쌓인 앨범에 들어 있던 종이 사진을 디지털 사진으로 변환해 어르신께 드리는 작업을 거쳤다. 그 후 사진들을 탁구장에 내어 전시를 열었는데 반응이 좋았다고. 전시 덕분에 북촌탁구가 북촌 외부에도 알려지면서 탁구 관련 tvN 예능 프로그램 ‘올 탁구나!’ 1회 촬영지로 선정되기도 됐다. 북촌 사람들 사이에 호평이 자자한 주민 참여 프로그램 ‘아무연주대잔치’도 그와 북촌탁구의 작품이다. 그간 코로나19 대유행으로 탁구장 내에서 진행했는데, 올해는 종로구 원서공원에서 첫 야외무대를 가졌다. 종로구청과 진행하는 민간협치사업 프로그램으로 선정된 덕분이다. 날씨까지 도와줘 이번 대잔치는 연주단원 모두에게 특별한 추억으로 남았단다. 요즘은 온라인 사랑방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 점프업5060 프로젝트의 기존 수료생을 대상으로 하는 점프업5060 재도약 프로젝트에 선정돼 북촌탁구 온라인 홈페이지를 만들기 위한 과정을 밟는 중이다. 북촌탁구만의 로고송과 뮤직비디오는 이미 제작이 완료돼 세상에 공개됐다. 점프업5060 프로젝트에 참여할 때는 공간 자체를 꾸리는 데 집중했다면, 재도약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지금은 북촌탁구의 활동 영역을 확장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는 설명이다. “마을 이장님이 확성기에 대고 공지사항을 안내하듯, 외부 사람들에게도 북촌 소식을 안내할 수 있는 온라인 확성기를 만들기 위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좋은 행사들이 마을 안에서만 공유되고 끝나는 게 아쉬웠거든요. 또 북촌을 찾는 관광객들도 쉽게 볼 수 있도록 관광할 때 지켜야 할 주의사항을 온라인에 올려두려고 해요. 북촌에도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고,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있어요. 하지만 북촌이 관광지로 워낙 주목받다 보니, 놀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 북촌 주민들의 피로도가 높아지고 있죠.” 주민·관광객 모두 즐길 수 있도록 이는 최근 여행 트렌드인 공정여행의 개념과도 맞닿아 있다. 여행지의 환경에 해를 끼치지 않고 현지 문화를 존중하는 관광객은 지역을 즐김과 동시에 가꾼다. 그렇게 지속 가능한 여행이 만들어진다. 박현정 관장은 관광객이 더 잘 즐기고 가꿀 수 있도록 거들고 있다. 최근에는 마을 주민들만 알기 아까운 명소들을 소개하는 계동 지도를 만들어 크라우드 펀딩을 열었다. 자주 걷는 북촌 산책길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뽐내기 위해 마을 뮤직비디오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가 하는 일은 곧 북촌 주민들을 위한 일이 된다. 북촌 주민들이 만든 수공예품을 상품화해 판매하는 것, 필요로 하는 이가 있다면 기꺼이 공간을 내어주는 것. ‘마을 경제를 활성화’하는 거창한 도움이 아니더라도 주민들을 위한 일이라면 두 팔 걷고 나선다. 비가 올 때 무료로 우산을 빌려주거나, 코로나19에 확진된 이웃을 위해 대신 약을 타오는 소소한 일쯤은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다. 북촌탁구는 꿈이 많다. 우선 올해가 가기 전 동네 잡지를 내려고 준비 중이다. 서울시시청자미디어센터의 ‘방방곡곡 마을미디어 교육지원사업’에 선정돼 무료 글쓰기 교육을 받은 주민들이 기자가 될 예정이다. 취재한 북촌의 시시콜콜한 소식들은 한데 모여 새로운 소식지로 탄생할 것이다. 송년회를 겸하는 ‘뒹굴뒹굴 어린이 영화제’도 개최를 앞두고 있다. 아이들에게 영화 관람의 즐거움을, 엄마에게는 자유 시간을 선사할 예정이란다. 박현정 관장이 정한 목표는 ‘3년 안에 북촌생활문화센터로 인정받기’다. 하고 싶은 것이 많고 벌이는 일도 많은 사람이라, 시기를 정해두지 않으면 지키지 못할 것 같아서 3년이라는 기한을 스스로 세워뒀다. 그러나 하교하는 아이들의 발걸음이 자연스레 북촌탁구로 향하는 것을 보면, 그 목표는 이미 이룬 듯하다.
- 2022-12-07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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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獨 공동 육아ㆍ세대 결합 공간, ‘마더센터’를 가다
- 부부의 경제활동으로 벌어진 육아 공백을 채우기 위한 우선책이 조부모가 된다면, 자칫 그 책임감과 부담이 노후를 무겁게 짓누를 수 있다. ‘내 아이는 내 손으로, 혹은 가까운 가족이 돌보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지역사회가 공동 육아를 실천하고, 주민들의 사회적 고립까지 방지하려 노력하는 독일의 마더센터를 찾아 그 해법을 들어봤다. 현지 취재 독일 뮌헨 한국의 조부모가 아이를 돌보게 된 원인은 하나만 꼽기 힘들다. 일·가정 양립의 불균형, 여성에게 기울어진 육아 책임, 부담스러운 양육비, 그리고 범위 밖의 사람들을 불신하는 분위기가 얽히고설켜 있다. 우리 삶의 여러 문제와 연관돼 있으므로 지엽적인 사고로는 매듭을 쉬이 풀 수 없는 실정이다. 일각에서는 마더센터 건립을 저출산 고령화의 해답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국가가 나서서 유관기관을 만들고 인프라를 구축하면 맞벌이 부부의 육아 고민이 해결될 테고, 조부모에게 돌봄 부담이 넘어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16년 총선을 앞두고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이 ‘한국형 마더센터’를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선거 이후 흐지부지됐다. 마더센터는 지역공동체가 함께 꾸려가는 공동 육아 공간이자 세대 결합 공간이다. 독일에서 1980년대 초반 지역 운동을 펼치는 이들을 중심으로 하나둘 설립되기 시작해 독일 전역에 400여 개가 있다. 대부분의 마더센터는 시와 자선단체의 후원으로 운영비와 인건비를 충당하고 있어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서비스를 제공한다. 센터를 찾는 사람들은 ‘엄마’에 국한되지 않는다. 아이의 보호자는 한부모, 미혼모, 나이 지긋한 노인 등 다양하다. 엄마와 아이가 혼자 온 할머니와 공용 공간에서 말동무가 되고, 할아버지가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등 돌봄을 제공할 수도 있다. 맞벌이 부부라면 아이를 맡기기 위해 들르고, 서로의 육아 비결을 나누기도 한다. 유아와 아동, 노인에게 공간을 마련해주고 지역민끼리 유대가 형성되도록 한 것이다. 이처럼 세대를 뛰어넘어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기에 ‘패밀리센터’라 부르기도 한다. 공동 공간 넘어 세대 결합 주택 꿈꾼다 “마더센터는 독일이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에 대해 고민한 결과입니다. 공동 공간에서 이웃과 함께 교류하고 상생하며, 돌봄 사각지대에 있는 노인과 아이에게 안전한 돌봄을 제공합니다. 특별한 교육을 하지 않지만 주변 이웃들과 어울리며 아이들은 자연스레 사회성이 발달하고, 노인의 사회적 고립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지난 9월 만난 수잔 베이트 독일 바이에른주 어머니및가족센터연합 전무이사와 수잔 바이엘 바이에른주 뮌헨중앙마더센터장은 마더센터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들은 자녀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지원책 마련과 마더센터 구축을 위해 40년 이상 힘썼다. 현재는 바이에른주 내의 모든 마더센터 관리를 맡고 있다. 더불어 기관과 기관뿐 아니라 전 세계 유관기관과의 국제적 교류를 통해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들은 마더센터를 통해 돌봄 공백의 해소와 지역사회 형성이 실현되고 여러 세대가 섞이는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더 큰 미래를 꿈꾸고 있다. 수잔 베이트 전무이사는 그 모델로 ‘세대 결합 주택’을 제시했다. 세대 결합 주택은 패밀리센터를 기본으로 공용 거실과 식당, 게스트룸, 체육시설, 개인 주거 공간이 마련된 복합 공간을 말한다. 독립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시간과 공간의 일부를 공유하는 형태다. 수잔 베이트 전무이사는 “우리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부모와 아이, 혹은 노인의 고립”이라며 “세대 결합 주택의 구축은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단기간에 실현될 거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이뤄야 할 목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수잔 바이엘 센터장은 “독일 또한 앞으로 더 노력해야 할 부분이 확실히 있다”며 “돌봄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만 치부하면 저출산 사회의 고질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결국 조부모에게 아이를 부탁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국가와 국민이 다 함께 선진적인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세대를 위한 지붕, 트루더링 패밀리센터 ‘트루더링 패밀리센터’는 바이에른주 뮌헨에 위치하고 있다. 마더센터와 기능은 같지만 ‘한 지붕 아래 모든 세대의 화합’을 운영 방침으로 하고 있어 패밀리센터라 이름 붙였다. 전반적인 시설 관리 및 운영, 각종 프로그램 진행은 지역사회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봉사로 이뤄지고 있다. 센터 내에는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을 위한 공간, 보호자가 머물 수 있는 공간,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공간, 바깥 정원과 놀이터 등이 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나 키가 작은 아이들을 위한 건물 설계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실제로 센터를 이용하는 많은 사람이 공간을 공유하며 가족과 같은 모습을 보였다. 아이들이 공동 거실을 뛰어다니고, 엄마들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노인들은 체육시설에서 탁구를 하고, 노인을 모시는 가족이 찾아와 상담을 진행하기도 했다. 해당 센터에는 디지털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교육, 아이와 노인이 함께하는 요리 시간, 모든 세대를 위한 회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캐롤라인 비크만 트루더링 패밀리센터장은 “마을을 하나의 집이라고 볼 때 우리 센터는 공동 거실 역할을 하며, 지역사회 공동체 형성과 관련 정책에 관한 방향 제시를 하고 있다”며 “노인과 젊은이가 만나 서로의 아이디어를 배울 때 행복해진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황혼육아가 독일과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캐롤라인 센터장에 따르면, 독일 노년층은 개인의 사회활동과 삶의 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라 손주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자신을 희생하는 태도로 임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예컨대 일주일에 두 번 손주와 함께 식사를 한다거나, 한 달에 한 번 나들이를 가는 식이다. 육아의 농도가 짙지 않아 자연히 조부모를 향한 금전적 보상도 없다. 자녀 부부의 경제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조부모가 아이를 돌보고, 일정 수당을 받는 한국과 상반되는 양상이다. 저출산 고령화 문제의 해법은 ‘서로의 육아 부담을 경감하는 것’이 핵심이다. 캐롤라인 센터장은 “젊은 부부들이 아이 낳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돕고, 동기부여를 위해 국가와 사회가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저출산 고령화는 전 세계 최대의 숙제이기 때문에 다각적으로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 언론진흥재단 지원 특별기획 4부작 | 요람에 흔들리는 노후 본지는 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저출산 고령화 시대 황혼육아 문제 해법 제시를 위한 특별 기획 '요람에 흔들리는 노후'를 4개월에 걸쳐 연재로 발행합니다. 제1부 '서베이로 본 황혼육아 현주소', 제2부 'K-황혼육아 정책 어디까지 왔나?', 제3부 '독일ㆍ영국 황혼육아 선진 사례', 제4부 '금빛 황혼육아로 가는 길' 순서로 선보일 예정입니다. 해당 기사는 오프라인 매거진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온라인 '브라보 마이 라이프' 홈페이지를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2022-11-28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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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레이시아 조호르바루의 명문 팜 리조트 골프장
- 말레이시아의 남쪽에 자리 잡은 팜 리조트 골프 & 컨트리클럽(Palm Resort Golf & Country Club)은 일본인 이나가와 히로마사가 설계한 54홀 규모의 스펙터클한 골프장이다. 알라만다 코스 18홀, 멜라티 코스 18홀, 쳄파카 코스 18홀로 이루어졌으며, 코스의 명칭은 말레이시아 꽃 이름에서 따왔다. 연면적 800에이커이며, 1994년 개장했다. 페어웨이는 세랑군(Serangoon)과 버뮤다가 혼재하며, 그린은 티프드워프(Tifdwarf)를 식재했다. 그린 스피드는 9피트를 상회하는 빠른 모습이다. 팜 리조트 CC는 조호르바루 시내에서 약 40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조호르바루 세나이공항에서 약 5분, 싱가포르 창이공항에서 1시간가량 소요되는 지점에 위치한다. 2011~2012 ‘골프 말레이시아’지 선정 베스트 리조트 5위에 들어갈 만큼 명성이 있다. 무엇보다 현지에서 한국인을 위한 전문 골프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차별화된 느낌이 든다. 다양한 한국 음식을 그대로 맛볼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다. 알라만다 코스(Allamanda, 파72, 6866야드-레귤러 티 6467야드) 물이 많고 전장이 비교적 짧으며 페어웨이가 넓다. 원 아시아 Q스쿨이 개최되었으며, 1998년 조니워커 슈퍼투어가 개최된 코스다. 9번 홀과 18번 홀에는 야간등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2번 홀(파3, 182야드), 6번 홀(파4, 335야드), 14번 홀(파4, 367야드)은 하나의 섬 속에서 세 개의 그린이 동시에 아일랜드 홀을 형성하는 매우 독특한 설계로 그 재미를 한껏 보여주고 있다. 3번 홀(파5, 474야드) 티 박스 오른쪽부터 길게 페어웨이를 따라 검은 돌들과 함께 물길이 이어진다. 그린 앞 60~100야드가 매우 좁아 세컨드 샷에서 넘겨야 할지 끊어가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자신감 있는 세컨드 샷이 관건이다. 7번 홀(파4, 372야드) 어렵다. 페어웨이의 왼쪽 물을 3번 홀과 길게 공유한다. 그린 앞 150야드 지점의 큰 나무를 왼쪽으로 지나야 서드 샷이 편하다. 그린 공략 시 150야드 지점부터 그린 앞쪽까지 5개나 되는 큰 나무들이 관건이다. 너무 무리한 설계인 듯하다. 여기를 빠져나가면 실력이 좋은 건지 운이 좋은 건지 헷갈릴 정도다. 15번 홀(파4, 337야드) 티 박스 왼쪽으로 길게 넓은 워터 해저드 호수가 그린 앞까지 이어져 장관을 이룬다. 12번 홀과 물을 공유한다. 쳄파카 코스(Cempaka, 파72, 7156야드-레귤러 티 6772야드) 쳄파카 코스는 아시아 PGA 대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자연지형을 잘 살려낸 코스다. 코스는 전체적으로 워터 해저드와 거친 러프 등이 많아 정글을 연상케 하는 올리브 팜트리와 코코넛 트리들이 길게 이어진다. 60개 이상의 벙커가 도사리고 있고, 도그레그 홀 등 전략적인 코스 공략이 필요하다. 7번 홀(파4, 429야드) 길고, 220야드 지점에서 오른쪽 도그레그다. 페어웨이 좌우 러프는 언덕들이 이어져 페어웨이를 지키는 샷이 중요하다. 약간 오르막으로 긴 홀로 투온이 쉽지 않다. 9번 홀(파4, 395야드) 1번 홀과 호수를 끼고 마주 보고 있다. 페어웨이가 좁아 부담되는 티 샷, 세컨드 샷 때 그린 120야드부터 왼쪽으로 길게 물이 이어져 있어 훅을 절대적으로 피해야 한다. 짧거나 훅이면 바로 물속행이다. 11번 홀(파5, 545야드) 250~350야드 사이에 깊은 계곡을 형성하며 계속 오르막이다. 세컨드 샷은 페어웨이 오른쪽으로 공략해야 한다. 그린 앞 150야드까지 와야 왼쪽 도그레그에서 핀이 보인다. 30도 이상 가파른 페어웨이다. 그린 좌우로 길게 벙커가 있으며, 그린은 40야드 길이의 계속 오르막이다. 이래저래 쉽지 않다. 14번 홀부터 16번 홀까지 정글 같은 올리브 팜트리가 이어진다. 울창하고 빽빽이 들어선 모습이다. 16번 홀 그린 뒤로 솟아 있는 팜트리들이 병풍처럼 막아서며 운치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14번 홀(파4, 421야드) 좌우로 올리브 팜트리가 가득하다. 특히 페어웨이 왼쪽과 그린까지 울창한 올리브 팜트리 정글을 이룬다. 페어웨이 150야드 지점에서 왼쪽으로 해저드를 유의해야 한다. 멜라티 코스(파72, 7205야드)는 라운드를 하지 않아 코스 설명에서 제외됨을 밝혀둔다. 필자는 라운드하지 않은 코스는 일체 언급하지 않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으니, 독자분들께 이해를 구한다. 부대 시설로 연습 그린, 레스토랑, 대형 야외수영장, 당구장, 탁구장, 드라이빙레인지, 사우나, 330여 개의 객실, 회의실, 양식당, 한국 식당 등 종합 레저 시설을 갖춘 보기 드문 골프장이다. 이곳 팜 리조트에서의 라운드를 적극 추천한다.
- 2022-07-22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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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신패스로 헬스장 제약 없이… 시니어 위한 겨울 운동 장소는?
- 올해 만 65세인 A씨는 실외 운동 마니아다. 친구들과 산에 오르거나 근처 근린공원의 배드민턴장을 찾아 배드민턴을 즐겨 한다. 운동에 대한 열정은 코로나도 막을 수 없었지만, 차츰 나이가 들어가니 때 되면 찾아오는 추위가 두렵다. 길 곳곳이 얼어 빙판길에 넘어지면 다치기 십상인 데다 새벽 운동이라도 나설라치면 앓고 있는 고혈압과 당뇨가 악화될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외출과 운동을 완전히 그만둘 수는 없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실내운동시설이다. 마침 정부가 단계적 일상회복 이행계획을 발표했다. 보건복지부 중앙사고수습본부(중수본)에 따르면 오는 11월 1일부터 모든 다중이용시설의 시간제한이 완화된다. 헬스장 등 실내체육시설을 시간제한 없이 이용할 수 있고, 시설 내 샤워장도 이용 가능하다. 다만 시설 이용자는 접종완료를 증명하거나 미접종자의 경우 코로나19 음성확인서를 지참해야 한다. 물론 실내시설이니 여전히 마스크 착용은 필수다. 점점 추워지는 요즘, 시니어가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실내체육시설에는 어떤 곳이 있을까. 다양한 종목 즐기며 커뮤니티의 기능까지, 종합복지관과 국민체육센터 서울시에 거주하고 있다면 시립종합복지관을 찾아가보자. 노인종합복지관에는 각 자치구 거주민들을 위한 건강관리실과 다양한 운동시설이 구비돼있다. 탁구와 당구, 포켓볼 등 장년층에게 인기 많은 운동들 위주로 마련돼있다. 뿐만 아니라 구민들 대상으로 진행하는 문화·여가 프로그램이나 서로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 시니어 커뮤니티의 기능도 수행한다. 대부분이 구민들에게 개방된 시설이지만, 서울시민이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시설도 있다. 서대문구의 서대문노인종합복지관의 웰빙운동실은 서울에 거주하는 만 60세 이상 어르신이 모두 이용 가능하다. 각 지역의 복지관에 직접 연락하면 더 확실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서울시를 벗어난 지역에는 국민체육센터가 있다. 지자체의 도시관리공사가 운영하는 국민체육센터는 지역 주민의 생활체육과 건강 증진을 목적으로 마련돼, 비교적 저렴한 비용에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체육시설의 설치‧이용에 관한 법률에 의해 매년 시행한 안전점검결과가 공개된다. 양호 등급을 받은 시설은 이용자에게 위해‧위험을 발생시킬 요소가 없는 상태로, 안전시설로 분류된다. 고양국민체육센터는 2년 연속 양호 등급을 받았다. 헬스장, 체력측정실, 배드민턴과 실내구기 종목이 가능한 다목적체육관 외에 실외 테니스장, 무료 주차장을 갖춘 시설이다. 현재는 배드민턴과 수용, 탁구, 헬스 등이 가능하다. 코로나로 인한 거리두기 및 이용 제한이 걸려있는 현재는 고양시민 회원에 한해 대관 및 유료로 일일 입장만 가능하다. 11월부터는 탈의실과 샤워실도 이용할 수 있다. 기존에는 고양시민이 아닌 타 지역에 거주하는 회원들도 이용할 수 있었으나 코로나 이후로 이용이 막혀있었는데, 월말에 발표될 정부 지침에 따라 변경된 이용 규정이 안내될 예정이다. 관계자는 “추후 단계적 일상회복이 이뤄질 경우 타지역 회원도 이용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광명국민체육센터 역시 2년 연속으로 양호 등급을 받았다. 유료 주차장과 샤워실, 탈의실, 장애인 프로그램이 마련된 이곳에서는 배드민턴, 탁구, 수영, 에어로빅 등의 운동이 가능하다. 배드민턴과 탁구는 수시로 일일입장권을 구매해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데, 만 65세 이상 어르신은 이용 요금의 50%를 할인받을 수 있다. 단 광명시민이 아닌 관외 사용자는 이용요금의 30% 할증이 붙는다. 다만 아직까지는 샤워실과 탈의실 이용 및 타지역 회원 사용 여부가 불투명하다. 관계자는 “오는 금요일 정부 지침에 따라 사용 여부가 확정될 것”이라며 “변동되는 사항은 홈페이지 공지사항에 게재하고 있으니 공지 확인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종목·지도 검색하고 싶다면 ‘체육시설알리미’ 현재 방문 가능한 게이트볼, 배드민턴, 테니스 등 특정 종목 시설을 찾고 싶다면 ‘체육시설알리미’ 홈페이지를 활용해보자.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관리하는 체육시설알리미에는 체육관, 종합체육시설업, 간이운동장 등 전국의 체육시설들이 모두 등록되어 있다. 홈페이지 내 ‘시설 검색’ 기능을 이용해 골프, 수영, 테니스, 댄스, 배드민턴 등 특정 종목을 검색창에 입력하면 시설 현황과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집 근처 체육시설을 찾을 때는 체육시설알리미의 ‘지도 검색’ 기능이 유용하다. 이용자의 현재 위치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체육시설 정보를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사용자의 위치 파악 기능이 켜져 있어야 한다. 이외에도 ‘상세 검색’을 통해 지역을 특정하거나 이용자의 성별, 셔틀버스, 체육지도사 등 필요시설 조건을 충족하는 시설들을 확인 가능하다. 최근 1년 내 안전점검 완료시설, 스포츠강좌 이용권 이용가능 시설, 장애인 스포츠 강좌 이용권 이용 가능 시설 등 원하는 조건에 해당하는 시설만 검색할 수 있다.
- 2021-10-26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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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대륙에서 길을 묻다
- 길을 잃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길을 잃었습니다. 사업이 무너지니 가정도 파탄되고 종교생활도 다 무너졌습니다. 그동안 알던 모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불편하고 싫었습니다. 자격지심(自激之心)인지 저의 현재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에 비참함을 느꼈습니다. 방황하며 현실을 도피했습니다. 일부러 서울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타지(他地)에 가서 머물렀습니다. 그러다가 중국까지 도망치듯 오게 되었습니다. 흔히 인생을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합니다. 태어나서 죽기까지 매번 선택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그중에 중요한 3대 선택을 결혼, 직업, 종교라고 하는데, 나이 50세에 이 모든 것들의 기반이 한순간에 붕괴된 것입니다.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는 어떤 선택이 잘못된 것일까?’ 지나온 저의 50년을 곰곰이 반추해보았습니다. 나의 1차 꿈 저는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1·4후퇴 때 월남해온 이산가족입니다. 남한에 친척이 없었고 저의 어머님을 중매로 만났지만 가정에 정(情)을 못 붙이시고 한평생을 유랑하듯 밖으로만 떠도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님이 홀로 저희 3남매를 키웠습니다. 어머님의 고생을 익히 보고 자란 저는, 빨리 커서 돈 벌어 어머님께 집 한 채 사드리는 것이 1차 목표였습니다. 대학 갈 때쯤 우연히 저의 주민등록초본을 떼어보았는데, 거기에는 제 나이보다도 주소지 이전 횟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만큼 더 싼 곳으로 자주 이사를 다녔다는 의미입니다. 대학 시절엔 저를 특별히 아끼시는 교수님께서 제게 미국에서의 7년간 석·박사 유학 코스를 권하며,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 대학의 교수가 되라고 기회를 주셨는데, 저는 거절했습니다. 제게는 현재의 대학생도 과분하며, 저는 제가 교수되는 것보다, 빨리 돈을 벌어 어머님을 편히 모시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교수님께서는 “사람이 돈을 쫓으면 추해진다. 돈이 너를 쫓아오도록 해야지” 하시며 저를 훈계하셨지만, 그때 저는 그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군(軍) 입대할때도 경제생활을 고려해 장교를 선택했고,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1년 반 만에 대형 증권사로 이직(移職)을 합니다. 거기서 3년 만에 드디어 꿈을 이룹니다. 드디어 어머님께 집을 사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때의 제 나이가 서른 살이었습니다. 이후 증권사에서 저는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고 승승장구합니다. 고민이 시작되다 그리고 이어 제가 서른한 살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에 아들 이름을 지으며 저는 처음으로 인생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처럼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타며, 가족끼리만 잘 먹고 잘 사는 게 목표일까? 그 이상의 인생은 없는 걸까? 나중에 크면 아들에게 인생이란 무엇이라고 말해줘야 할까?’ 그런 생각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금강산(金剛山)’. 저의 성이 김(金)이니, 김강산이나 금강산이나 한자(漢字)의 표기는 같았습니다. 제가 그때는 교회도 열심히 다닐 때였기에, ‘역사의 하나님’께서 앞으로 우리 민족의 미래를 열어주실 때, 제 아들 녀석을 ‘금강산 찾아가는’ 통일의 도구로 써주십사 하는 의미였습니다. 저는 비록 제 가족밖에 모르는 인생이지만, 제 아들만큼은 그 이상의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해달라는 기도의 산물이었습니다. 한편 증권사 시절은 가히 저의 전성시대였습니다. 최연소 영업추진부장, 지점장, 연수원장, 홍보실장, 강남본부장(11개 지점 총괄), KBS 라디오 증권방송 등 종횡무진(縱橫無盡)했고, 급여도 억대 연봉이었습니다. 20여 년 전에 연봉 1억 원이면 거의 상위 1% 수준이었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위치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왠지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습니다. 경제적인 풍요가 더 이상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았고, 가시적 1차 목표가 사라진 인생은 조금씩 허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IMF 때 저는 증권사 신촌지점장이었는데, 문득 제가 하는 일에 회의(懷疑)가 생겼습니다. ‘조국 대한민국은 현재 달러가 없어서 국가부도 사태인데,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이 혼란 속에서도 돈 있는 사람들에게 돈을 좀 더 벌게 해주는 역할 정도가 아닌가? 과연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본질적인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증권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게 되었을 때, 저를 아끼셨던 사장님께서 제게 물었습니다. “지금 잘하고 있는데, 왜 갑자기 사표를 내는가?” 그때에 저는 ‘재미가 없어서요’라고 답한 기억이 있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그 말에 사장님께서는 씨익 웃으시며 “사표는 유보할 테니, 유급으로 한두 달 푹 쉬고 충전해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그렇게 처리해주셨지만, 저는 결국 사표를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헤드헌터(Head Hunter)사의 유혹 증권사 퇴직 얼마 전부터 강남의 유명 헤드헌터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대기업이나 국가기관이 소수의 전문가를 특별 채용하고자 할 때는 공개채용을 하지 않고, 헤드헌터사가 보유한 분야별 전문 인력 풀에서 추천을 받곤 합니다. 어찌된 일인지 그쪽 추천 리스트에 저도 포함되어 있었나 봅니다. 기분 나쁘지 않았고 신기했습니다. 첫 번째 제안은 외국계 증권사의 홍보팀장이었는데 제가 거절했습니다. 우선은 IMF 시기에 외국 회사라는 게 싫었고, 저의 공식적인 답변은 그쪽 역할이 지금보다 작고, 연봉도 저의 현재 수준이 더 높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2개월 후 다시 제안이 왔습니다. 이번엔 역할도 크고 연봉도 맞춰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게 우리금융그룹 홍보실장이었습니다. 일단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우리금융은 IMF 때 공적자금을 받은 5개 은행을 통합하여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금융지주회사인데, 빨리 회생하여 주가를 높여야 우리나라가 IMF로부터 벗어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단 면접이라도 보아달라는 헤드헌터사의 거듭된 요청을 받아들여, 면접을 보고 결국 입사를 결정하게 됩니다. 가서 만나보니, 하나은행을 성공적으로 경영하셨던 윤병철 회장님께서 우리금융그룹 초대회장으로 오셨고, 이후에 금융감독원장이 되신 전광우 부회장님이 제 직속 상관이셨습니다. 두 분 모두 능력도 탁월하시고 인품도 훌륭하셨습니다. 특별히 저를 많이 아껴주시고 믿어주셔서 가까이서 많은 일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무여건은 녹녹지 않았습니다. 산하의 은행들은 지주회사를 마치 점령군처럼 인식하여 노조를 중심으로 사사건건 반발했고, 언론도 호의적이지 않아, 매일 밤 언론사를 찾아가 부정적인 기사를 막아내는 것이 저의 주된 업무가 되었습니다. 또다시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고, 저는 결국 1년 만에 최종 사직을 합니다. 저의 사표에 대한 답신으로 윤병철 회장님이 써주신 덕담 가득한 친필 서한(書翰)에, 저는 한 번 더 감동하며 고별인사를 드렸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엿보다 총 18년간의 직장생활을 정말 미련 없이 정리하고 나서는, 직장인 시절에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일들에 관심을 갖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첫째는 각종 동문회 참가였고, 둘째는 강사 활동이었습니다. 동문 모임으로는 서울시립대학교 대학동창회와 ROTC 총동기회가 있었는데, 나름 열심히 하다 보니, ROTC 21기 총동기회장으로 전국을 누볐고, 당시 ROTC 중앙회장이셨던 5기 차인태(전 MBC 아나운서) 회장님과도 좋은 신뢰를 쌓았습니다. 이어 회사 다닐 때부터 간간이 요청이 있었던 몇몇 대기업에서의 강의 요청을 이제는 편하게 다닐 수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삼성그룹, 효성그룹, 푸르덴셜생명 등에 리더십, 프레젠테이션, 커뮤니케이션, 네고시에이션(협상기술) 등을 주제로 4~8시간까지 강의를 진행하곤 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푸르덴셜생명으로부터 한 가지 큰 제안을 받게 됩니다. 난치병 어린이들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한국 메이크어위시(Make A Wish) 재단’의 초대 사무총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제겐 생소한 분야였지만, 자원봉사자 선발 및 교육, 소원행사 감동연출 및 홍보, 그리고 기업으로부터 후원금 조달업무 등을 총괄하는 역할이어서, 저를 적임자로 평가한 것 같았습니다. 저에 대한 기대도 감사하고 좋은 일이어서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한국 메이크어위시 재단의 사단법인 인허가 설립부터 총 2년여를 봉사했는데, 미국재단으로부터 매뉴얼 교육을 받고, 소아암병원으로부터 소원 대상자를 추천을 받아, 최선을 다해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수십 건의 소원성취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때에 저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약값이나 치료비를 지원하지 왜 소원성취인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꿈꿀 수 없는 어린이들에게 단 한 번의 소원은 무얼까? 인간에게 진정한 소원이란?’ 이런 물음을 통해 사회봉사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고, 이런 생각은 후일 중국에 와서도 나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새로운 큰 도전, 그리고 실패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깊이 생각한 것은, 돈 이상으로 의미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한류문화 관광사업’ 이었습니다. 이 사업을 선택한 이유는 첫째, 우리 문화를 사랑하고 상품화하는 것은 제가 잘할 줄 아는 분야였고, 둘째, IMF를 겪고 보니 국가적으로 달러 버는 일이 중요했는데, 이 일이 바로 그쪽 분야의 일이었고, 셋째는 우리나라 환율이 오르니, 이른바 인바운드(inbound, 한국 입국) 관광사업에 경쟁력이 높아졌던 시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 맞춰서 일을 시작하려던 계획이었는데, 여기저기 세상을 엿보다가 좀 늦어져서 2004년에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오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한국적 감동을 추가로 전하며, 1인당 100불씩 더 쓰게 하자는 내부 경영목표를 세우고, 독창적 한류문화 전시 및 상품개발 사업을 기획합니다. 그리고 김포공항 국제선 제2청사 지하 1층에 약 1000㎡ 규모로 ‘한류스타 홍보관’을 제법 호화롭게 개장했습니다. 전시관 조성에만 총 9억 원을 투자했습니다. 당시 일본에 한류 붐이 있었고, 국제선 제2청사는 도쿄 하네다공항을 직행하는 항공편이 매일 16편이 있었습니다. 김포공항의 한국공항공사는 물론, 문화관광부, 한국관광공사 등의 기대와 관심을 한껏 받으며 사업을 자신감 있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초기에 공동으로 지분투자를 약속했던 일본 도쿄의 파트너 관광사업자가 약속을 어기면서 틀어지기 시작했고, 개장 6개월 후부터 갑자기 일본의 한류 붐이 식으면서 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한류 페스티벌 행사에도 참가하고, 말레이시아와 중국 등에도 직접 진출을 시도했습니다. 중국은 그때 처음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수익 다변화를 위해 국내 이벤트 기획사로도 사업영역을 넓혔습니다. 당시 오세훈 시장 시절에 서울시 장애인 예술제도 연출했고, 노인협회 주관의 세계노인문화예술제를 8개국을 초청하여 속초와 설악산에서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포천 양귀비 꽃 축제, 대기업 행사 등을 수주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불황과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개장 4년 만에 전시시설을 김포공항에 기부체납하면서 사업장의 문을 닫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부채청산을 위해 모든 개인 재산 정리를 했고, 가정도 파탄을 맞습니다. 돌이켜보면 뜻만 좋았지 저 자신이 자신감을 넘어 너무 교만했고, 위기대응 준비가 충분하지 못했고, 모두가 저의 부덕한 탓이었습니다. 어머님이 계시기에 졸지에 더 이상 갈 곳도 없고 반기는 곳도 없었습니다. 낮에는 대인기피증이 생겼고, 밤에는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나쁜 생각도 참 많이 했었지만, 그때마다 어머님이 슬퍼하실 얼굴이 떠올라서 참고 참았습니다. 어머님은 당시에 큰아들이 고생한다고 제가 사드린 집을 처분하여 제게 마지막 힘을 보태주셨는데, 저는 그 기대마저도 부응하지 못하고 무너진 것입니다. 저 때문에 졸지에 어머님마저도 다시 사실 곳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그 몇 해 전부터 어머님은 몸이 많이 상하셔서 거의 거동을 못하시는 상태셨습니다. 한약방에서는 맥박도 약하고 보약도 효험이 없다고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업이 망하고 가정파탄마저 겪게 되자, 어머님은 기적처럼 아픈 몸을 털고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이유는, 갈 곳 없는 저의 끼니를 챙기시고 저의 옷을 세탁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녕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말을 저는 그때 다시금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원인도 모른 채 제가 밤새 심한 복통으로 끙끙 나뒹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님은 두 손으로 저의 아픈 배를 계속 문지르시며, 당신은 평소 불교 신자셨는데 제가 믿는 하나님을 외치시며 ‘우리 큰아들을 제발 살려달라’고 밤새 우셨습니다. 너무도 아프고 길었던 그날 밤, 어머님의 그 뜨거운 눈물과 안타까운 외침 소리를 저는 결코 잊지 못합니다. 중국으로 떠나오다 그런 어머님을 뒤로하고 저는 중국행을 선택합니다. 당시 중국과는 비록 지지부진했지만, 고구려의 420여 년간 수도였던 집안시(集安市) 정부 관료들과 제가 고구려축제를 협의하던 중이었던 바, 거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아니 그것을 핑계로 한국을 도망치듯 떠납니다. 어쩌면 아무도 없는 무인도(無人島)를 찾는 마음이란 표현이 더 솔직할 겁니다. 집안시의 고구려 프로젝트는 3개월 뒤 결국 무산됩니다. 제가 한국인이라는 이유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인이 중국에서 고구려를 거론하는 것은 그 자체가 금기시되는 일이었습니다. 집안시 정부 책임자도 처음에는 그 정도로 민감한 문제인 줄을 미처 몰랐던 것 같았습니다. 집안시 프로젝트는 무산되었지만 저는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대책도 목적도 없이 그저 좀 더 중국에 머물기로 하고 지인이 있는 곳을 찾았는데, 그곳이 바로 단동시(丹東市)였습니다. 단동은 압록강을 사이로 북한 땅 신의주와 마주하고 있으며, 북한 대외무역의 약 80%가 단동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단동은 한마디로 우리말 백화점이었습니다. 당시 단동에는 중국 조선족이 1만 5000명, 북한 사람이 1만 명, 북한에서 태어난 중국 화교(華僑)가 1만 명, 요동대학교 한국·조선(북한)어과 학생들이 1000여 명, 그리고 한국인이 총 2000명 정도 살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대북사업 관계자이거나 선교사였습니다. 누구를 만날 일도 없고 아무 일과도 없는 저는, 매일 새벽 혹한의 추위에도 저를 채찍질하듯 하염없이 압록강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새벽 교회당을 찾아 무릎 꿇고 홀로 숨죽여 울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밤, 강 건너 불 꺼진 북한의 신의주 땅을 멍하니 넋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저의 ‘살아남아 버티기’의 중국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이 살고 있었네 그렇게 한두 달을 보내다 보니, 점점 주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도 저와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 해 전 소설가 황석영이 북한을 다녀와서 쓴 책의 제목이었던 ‘사람이 살고 있었네’가 생각났습니다. 한인교회를 통해 한국 사람들을 접하고 단동한인회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시간이 많으니 한인회 봉사를 제의받아, 당시 막 설립한 단동한국문화원의 부원장직(원장은 한인회장이 겸직)과 한인회 사무국의 사무총장으로 무료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단동한인사회는 대부분 1992년 한중수교 직후와 1997년 IMF 전후로 중국에 건너오신 소상공인 분들이 많았던 바, 아마도 저와 같은 대기업 출신의 사회 경험자가 드물어, 오자마자 졸지에 감투를 쓰게 된 것이었습니다. 봉사의 길에 들어서다 뜻밖에 할 일이 생긴 저는, 대기업에서의 기획력과 이벤트 기획사 대표로서의 경험을 되살려 많은 일들을 추진했습니다. 우선 요동대학교 한국·조선어과를 찾아서는 한국어 말하기 대회와 글쓰기 대회, 그리고 합동 문화공연을 매년 추진했습니다. 재외동포재단에는 기획서를 보내 한인회관 건축지원금을 50% 받고 나머지는 현지 모금하여 3층짜리 아담한 단동한인회관을 건립했습니다. 한편, 장기체류 단동 한인들의 대부분이 현지인과 결혼한 다문화가족들이었는데, 이들에 대한 지원체제가 없어, 문화원 내에 다문화가족 복지센터를 만들고, 당시 단동을 방문한 국회 통일외교안보위의 박선영 국회의원님과 심양총영사관의 협조를 얻어 다문화가족 합동결혼식과 단체 한국 신혼여행을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족학교에 가보니, 70% 이상 대부분 학생들은 부모가 한국에 돈 벌러 가서 없는 결손 가정이거나 조부모 위탁상태였고, 소학교를 졸업해도 별도 우리말도 잘 못하고 중국어도 잘 못하는 언어수준에다, 문화예술 방면 재능교육 발견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몸은 건강해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꿈꾸지 못하는 조선족 아이들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문화원에서 조선족 학생들을 대상으로 우리말 교육과정을 시작했고, 해마다 한국어 말하기 대회를 개최하여 수상자들에게 한국문화체험여행을 제공했습니다. 제가 단동에 머문 4년 동안 총 140여 명의 학생들이 한국을 방문했는데, 여행비용은 경기문화재단과 한국 지인들의 개인적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조선족 학생들의 예술적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 나아가 그들 스스로가 무언가를 꿈꾸게 하기 위해, 제가 예술단장이 되어 직접 학교에 가서 학생 67명을 선발하여 ‘압록강 청소년예술단’을 공식 발족하였습니다. 그 뒤 8개월간의 훈련 후에 5성급 호텔에서 1000여 명의 학교관계자과 학부모들을 모시고 ‘내 마음의 북두칠성’이라는 제목의 예술단 창단공연을 성공리에 추진하였습니다. 대부분 첫 무대를 경험하는 것이라 감동은 컸고, 학교를 향한 후원금도 쏟아졌고, 부모님들은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심양으로 진출하다 이런 저의 활동들이 인근 지역에도 소문이 났던 모양입니다. 심양총영사관에서는 당시 조백상 총영사님의 파격적 배려로 저를 총영사관의 경제문화행사 기획자 겸 사회자로 발탁해서 일을 맡겼습니다. 마침 한중수교 20주년도 겹쳐서, 각 도시마다 한중우호의 밤 행사가 있었고, 중국 동북3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27개 대학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말하기 대회 및 K-Pop 경연대회’, 그리고 한국 국경절(개천절) 기념 총영사관 한복패션쇼 등의 행사를 연출했습니다. 그러면서 항일유적연구소장과 동북3성 한국인연합회 사무총장을 맡게 되어 동북3성 최대도시인 심양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심양은 단동의 10배 규모로, 외곽까지 도농(都農)인구 합계가 총 2000만 명인 대도시입니다. 중국 동북3성에 와서 알게 된 사실은, 전 세계 한민족 항일유적지의 3분의 2가 중국에 있고, 중국 항일유적지의 3분의 2가 동북3성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인은 물론 조선족들도 우리의 항일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항일유적지 찾기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항일유적연구소였습니다.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의 항일역사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저는 연구소장으로서 연구원을 모집하고, 안중근 13일간의 이동경로와 거사일정을 뒤따라가 보기도 했고, 윤동주의 생가, 신흥무관학교의 발자취 등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많은 항일열사들의 발자취도 찾아다니며 공부했습니다. 그런 중 우리나라 3대 독립선언 중 하나이자 최초의 독립선언인 ‘무오독립선언’의 내용과 의미를 분석, 발굴하여, 심양총영사관과 국가보훈처의 협조 아래 저희 항일유적연구소가 주관하여, 중국 현지 최초로 ‘무오독립선언 기념식’을 개최하였습니다. 저의 가장 큰 보람 중 하나인 이 행사는, 민주평통 선양협의회의 주관으로 지금도 8년째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중교류문화원을 설립하다 대도시 심양에 와서 저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제가 잡다하게 벌여놓은 문화예술 봉사활동과 조선족학교 지원, 그리고 항일역사연구와 유적지 방문활동 등을 종합하여,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시스템과 공간 확보의 필요성이 커진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한중교류문화원’을 설립 추진합니다. 한중교류문화원은 심양의 코리아타운 지역인 서탑가 인근에 약 2000㎡ 규모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2014년 7월 19일 설립하였습니다. 자체적으로 130여 석 규모의 강당을 갖게 된 문화원은 많은 교육활동과 문화예술 공연행사를 연출합니다. 그중에 최고의 대박상품은 ‘실버대학’입니다. 제1기 실버대학은 2014년 가을에 약 15주의 과정으로 진행되었는데, 50세 중반부터 80세 전후의 조선족 어르신들 93명이 첫 신입생으로 입학했습니다. 노래교실, 역사문화특강, 10년 젊어지기 미용특강, 핸드폰 사용법, 기본생활영어, 도전 골든벨, 그리고 졸업여행에 이어 사각모와 졸업가운 입고 졸업식하기 등의 행사에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실버대학은 제가 문화원장으로 재임한 약 3년 반 동안 총 4회가 이어졌습니다. 한편, 실버대학은 제가 특별한 의미로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한국에 두고 온 저의 어머님을 생각하며 만든 행사입니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때, 어머님의 집에 가면 마음으로는 늘 눈물겹게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우리 세대 장남들이 그러했듯이 다정다감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무뚝뚝한 아들이었습니다. 사실은 어머님과 재미있게 놀아드리고도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죄송스러움과 한(恨)을 실버대학을 통해서 조선족 어머님들께 재롱도 부리며 조금이나마 풀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일까요? 실버대학 어머님들의 공통된 감사인사 표현은 “우리 아들도 못 해준 호강을 실버대학에서 받았네요, 너무 행복합니다!”였습니다. 저도 응답합니다. “아닙니다. 행복하시다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 그밖에도 한중교류문화원에서는 항일사진전, 어린이 K-Pop대회, 한국가수 김광석 가요제, 중국가수 등려군 가요제, 장예모 감독 영화제, 한국영화제, 조선족학교 돕기 프로젝트, 청춘콘서트, 사물놀이 강습, 한국 만화도서관 개관, 한중친선 배구대회와 탁구대회 등의 행사를 연출하였습니다. 동주학당, 동북에 물들다 그렇게 3년 반의 초대원장 자리를 마치고, 조선족에게 한중교류문화원 2대 원장을 물려주었습니다. 경영의사결정 과정에서 오해와 어려움도 있었고, 제가 너무 강하게 한국 문화를 중국 조선족들에게 전파한다는 정치적 오해가 깊어져서, 부득불한 조치였습니다. 대신에 저는 조선족 지식인들과 함께 윤동주의 이름을 딴 ‘동주학당(東柱學堂)’이란 모임을 만들고, ‘한중 문화융합연구소’라는 개인연구소를 차린 후, 다시 독립하여 조선족들을 향한 집중 봉사활동을 재개합니다. 동주학당은 민족시인 윤동주를 한민족 디아스포라(Diaspora)의 대표인물로 생각하여 ‘한민족 디아스포라 사랑방’을 추구하는 가운데, ‘찾아가는 민족문화원’을 표방했습니다. 우선 심양에서 ‘윤동주 100주년 기념 시낭송음악회’를 연출했고, ‘동주학당, 대련에 물들다’, ‘동주학당, 치치하얼에 물들다’, ‘동주학당, 영구에 물들다’ 등 동북3성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찾아가는 민족문화원’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또한 심양 남부 소가툰 지역에 ‘윤동주 문화원’을 건립하여 실버대학도 성황리에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거의 최북단으로, 3만 명의 조선족이 거주하는 흑룡강성 치치하얼에도 ‘치치하얼시 조선족문화원’ 설립을 지원하고, 제가 명예원장을 맡아, ‘치치하얼시 조선족 아리랑 예술제’ 및 대동제를 개최하였습니다. 이어 거기서도 같은 마음으로 실버대학을 진행했는데, 제가 중국에서 총 6번째로 진행하게 된 ‘치치하얼 조선족 실버문화대학’은 무려 1200km 거리(심양-치치하얼)를 3개월간 매주 고속열차로 달려가서 진행한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것의 크기는, 자신의 재물과 시간과 열정을 투자한 것에 비례한다는 말을 저는 온전히 믿습니다. 치치하얼이 제겐 그런 곳입니다. 그곳에서 만난 조선족 동포 분들이 제겐 그랬습니다. 한중 갈등에 아파하다 그렇게 해서 어느 새 10여 년이 흘렀고, 50세에 길을 잃고 도망치듯 중국에 왔는데, 뜻밖에 어쩌다 길이 되어버린 조선족 대상 봉사활동을 하다, 어언 환갑을 지나 올해 63세에 이르렀습니다. 앞에서 제가 제법 많은 일들이 성취되었음을 자랑하듯 나열했는데, 그러나 돌이켜보면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고, 어렵고 힘든 문제들은 지금도 계속 발생되고 있습니다. 특히나 한중관계가 어려워지면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숨이 막힐 만큼 생존에 위협을 느낍니다. 평소에도 역사문제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부딪치며 민감해서 매우 조심해야 했지만, 설상가상 사드 사태 등 정치적으로 꼬이면 한국인은 택시 탑승을 거절당할 만큼 배척됩니다. 지금도 한중관계가 소원해지면 겁부터 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동주학당이 야심차게 윤동주문화원을 설립했으나, 윤동주의 국적문제가 불거지면서 설립 1년 만에 활동을 접어야 했고, 개인적으로는 문화간첩으로 오해받아 특정 지역에 출입이 막힌 적도 있었습니다. 살펴보면, 중국인들은 조건 없는 봉사를 믿지 않습니다. 조선족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분명히 숨겨진 다른 목적이 있다고 의심합니다. 그리고 문화는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침투 등 정치적인 오해로 몰면, 어느 친구도 나서서 저를 변호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게 중국이고 그게 조선족의 입장임을, 너무 아프고 안타깝지만 이제는 이해하고 인정합니다. 한편, 한때는 한국 정부도 저를 오해해서, 제가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역인 압록강 지역을 자주 오고가니까, 인천공항에 입국할 때마다 혹시 친북간첩이 아닐까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어쩌다 한국과 중국이 모두 저를 의심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있었습니다. 흔히 우리나라 외교를 ‘안미경중’(安美經中)이라고 말합니다. 안보는 미국이요, 경제는 중국이라는 뜻입니다. 양쪽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다리기 외교만큼, 재중 한국교민들의 마음도 불안하고 위태롭습니다. 어찌되었거나 서로 신뢰하고 미래지향적으로 협조하는 훈훈한 한중관계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조선족 전성시대’가 온다 제가 중국에서 만나본 조선족들은 현재 중국인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아울러 한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어디 가도 비주류요, 이방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1950년대 초에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으로 편입되어, 그동안 중국인으로 산 세월이 미처 70년이 되지 않습니다. 아직 중국의 주류인 한족들과의 융화가 문화 차이로 쉽지만은 않고, 마찬가지로 모국인 한국에 와서도 여전히 차별받는 비주류요, 이방인입니다. 현재 조선족 부모와 자녀들은 매우 고민합니다. 중국에서는 점차 조선족에 대한 우대조치가 사라지고, 얼마 전 조선족학교를 향해 앞으로 조선말이 아닌 중국어로 교육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그동안 조선어로 시험 보아 다소 유리했는데, 앞으로는 대학시험도 중국어로 쳐야 합니다. 그러자 조선족 유치원과 학교에는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빨리 중국 한족학교로 옮겨가야 그나마 중국 학생들을 따라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조선족 학생들이 한족 학생들과 경쟁에서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대학을 나와도 갈 곳이 거의 없습니다. 얼마 전 조선족 대학생연합회 대표들과 대화했는데, 그들의 대다수가 원하는 꿈이 커피숍이나 식당을 꾸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 외에는 별다른 기회가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 조선족들에게 저는 이제 곧 ‘조선족의 전성시대’가 온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입니다. 이는 굳이 정치적 통일이 아니더라도, 상호간 화해협력을 기반으로 북한이 경제적으로 개방하는 시대를 의미합니다. 이때가 되면 조선족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바, 이를 잘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외칩니다. “조선족은 어디 가나 비주류요 이방인이 아니라, 향후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에 모두가 필요로 하는 핵심인재들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미리 점지(點指)하고 100년 전부터 중국 땅에 선발대로 보낸, 최고의 일꾼들입니다.” 저는 이런 점들을 우리 조선족들에게 분명히 가르쳐주려 합니다. 저의 그런 주장의 근거는 세계적인 투자자 짐 로저스의 분석에 기초합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제 인생 이모작의 꿈도 거기서 같이 출발합니다. 20년 전부터 중국의 획기적 성장을 예견했던 짐 로저스는, 이제 일본의 시대는 끝이 났고, 앞으로는 북한의 개방을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북한의 개방은 분명 대한민국과 한민족의 미래에 가장 큰 기회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합니다. 저도 이 주장에 100% 공감하며 진실로 기대하며 설렙니다. ‘조선족 희망전도사’의 꿈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중국에서도 가끔은 강의를 할 기회가 생깁니다. 대부분은 조선족단체 모임이고, 한국국제학교 학생들에게도 할 기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공통적으로 빠지지 않고 제가 설파(說破)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조선족이여,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의 실무주역이 되자!’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독일 통일 이후의 상황에 주목합니다. 1989년 서독과 동독이 통일할 때 양국의 경제력 차이는 8:1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32년간 동독의 발전을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서독과 동독은 아직 2:1 이상의 격차 상태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과 북한은 3년 전 기준으로 경제력 차이가 무려 44:1입니다. 이 격차를 해소하자면 적어도 향후 50년 이상의 투자와 인적교류가 무조건 필요합니다. 그때에 필요한 실무인력으로 조선족보다 더 경쟁력 있는 집단은 없다고 저는 감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북한이 문을 열면, 서울 청년들이 평양 청년들과 별 갈등 없이 일할 수 있을까요? 저는 매우 어렵다고 봅니다. 당장에 한국인과 조선족도 문화인식 차이가 작지 않은데, 남북한 간에는 불가피하게 갈등해소 시간과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소요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한국의 자본주의도 충분히 알고, 중국의 공산주의 체제에도 잘 적응하고 있는 조선족만의 실무역할 영역이, 다가올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에 차별적 블루오션(Blue Ocean)으로 분명히 생겨날 것이라 저는 판단합니다. 앞으로 적어도 50년 동안은 조선족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활짝 열릴 것입니다. 그러하니 조선족이라면, 기본적으로 우리말은 무조건 똑똑히 배워두고, 능력이 되면 한국의 기술이나 장점을 잘 공부해두라는 조언을 조선족 청년과 부모들에게 진심을 다해 전해줍니다. 그렇게 강의하며 말하고 다니다 보니, 일부 조선족들이 제게 붙여준 별명이 ‘조선족 희망전도사’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별명이 참으로 과분하지만 제 마음에도 흡족하게 스며듭니다. 더 노력해서 진짜 ‘조선족 희망전도사’로 살아보자는 꿈도 생겨났습니다. 대륙에서 길을 묻다 나라 잃은 슬픔 속에서 민족시인 윤동주는 그의 시 ‘길’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게 나아갑니다.’ 아마도 나이 50에 직업과 가정과 신앙의 동반 몰락을 경험하면서 도망치듯 중국으로 넘어온 때의 제 심정과 조금은 닮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운을 차려, 작고 소박하지만 같은 민족으로서의 안타까움과 애정을 담아, 혹시라도 저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곳에, 특별히 조선족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달려갔던 중국에서의 지난 10여 년을 정리해봅니다. 중국의 대문호 노신(魯迅) 선생이 청년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말했던, ‘처음부터 길은 없었다. 사람들이 다니면서 비로소 길이 되었다’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처음엔 미처 길인 줄 몰랐는데 저도 어찌어찌 십여 년을 지나고 보니, 이젠 나름 하나의 길처럼 느껴집니다.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했던 한심한 존재가, 어쩌다 타국 땅에서 문화 봉사를 통한 희망전도사로 모질게 살아남아 있습니다. 30~40대의 젊고 풍요로울 때 그렇게도 갈구했으나 찾지 못했던 인생의 참 의미와 가치를, 어리석게도 60을 훌쩍 넘어 늙고 가난해지면서 비로소 조금씩 깨닫고 배워갑니다. 그동안 중국에 와서 개인적으로 절망하며 힘들었을 때, 제게 특별한 위로가 되어준 시(詩)가 있습니다. 정호승(鄭浩承) 시인의 ‘봄 길’입니다. 봄 길 -정 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김영식이 있다’ 이제 고백합니다. 정호승 시인의 ‘봄 길’은, 제가 대륙에 와서 길을 묻다가 십 수년 만에 찾아내어 저 스스로에게 답한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저는 시의 마지막 구절 뒤에 한 줄을 더 보태어, ‘김영식이 있다’를 다짐처럼 홀로 외치기도 했습니다. 오늘도 길을 잃고 다시 길을 찾는 분들에게 지난날 저의 절망도 작은 위로 중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깜깜한 절망 속에서 위로를 받았듯, 많은 분들이 그랬으면 좋겠고, 앞으로 살면서 서로에게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봄 길’의 내용처럼 희망이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하늘이 허락하셔서, 제게도 ‘인생의 이모작’이 가능하다면, 우선은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에 무한 감사하며, 이제부터는 중국 땅에서 한 핏줄 동포를 향한 희망전도사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나아가 더 축복해주신다면, 30여 년 전 제가 아들 이름을 ‘금강산(金剛山)’이라 지었던 그 기도의 응답까지 받아서, 북녘의 아버지 고향 땅에 달려가 입 맞추고, 거기 그분들을 뜨겁게 보듬다, 그곳에서 그분들과 함께 묻히고 싶습니다. 이런 저의 마지막 소망이 너무 큰 욕심일까요? •수상소감 - 대상 미니자서전 김영식 “중국 조선족 100년의 이야기를 중국판 처럼 작품으로 써 세상에 알리겠다” •대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수상 소감은? 저는 7살 어릴 적 시골에서, 코 흘리게 손수건을 왼쪽 가슴에 달고 소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학교 가는 게 너무너무 좋아서,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1학년을 마치는 날, 담임선생님께서는 제 이름을 호명하시며 뜻밖에 1등 우등상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태어나 받은 ‘첫 상(賞)’이었습니다. 우등상 상품은 공책 한 권과 연필 두 자루였습니다. 그걸 들고 낮은 언덕의 신작로 길을 뛰어 어머니께로 달려갈 때, 저는 얼마나 가슴이 뛰며 기뻤는지 모릅니다. 만나는 모든 분들에게 막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로부터 어언 56년이 지났습니다. 어쩌면 ‘마지막 상(賞)’일지도 모르는 이번 상이 저에게는 그때만큼이나 기쁩니다. 그때만큼이나 설렙니다. 저에게 이렇게 설레고 행복한 순간을 선물로 주신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의 주최한 브라보와 신한은행의 관계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인사 드립니다. 이번에 제가 쓴, 미니 자서전 는, 어쩌면 교만했던 인생의 부끄러운 고백이고, 뻔뻔한 반성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특별히 큰 상을 주신 뜻은, 아마도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저 나름 생각해 봅니다. 하나는,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인생 이모작’에 도전하라는 따뜻한 격려로 느껴집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대만큼 열심히 새로운 길에 도전하며 살겠습니다. 또 하나 이번 상은, 제 글쓰기에 대해 숙제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를 통해, 세상에 조금이나마 ‘선한 영향력을’ 보태라는 명령입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늘 정직하고 공감과 위로를 주며, 보존할 가치가 있는 글을 쓰겠습니다. 다시 한 번, 큰 상을 주신 브라보와 신한은행에 감사드리며, 끝으로, 조국 대한민국의 조속한 코로나 승리를 기도하고 응원하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응모 배경이나 동기는? 저는 현재 중국 심양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생활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지난해 설 명절을 지내고 중국에 온 후, 한국에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난해 말에는 운동 중 아킬레스건이 파열되어, 중국에서 수술을 받고 3개월을 치료한 후 현재는 재활 중입니다. 한국의 가족도 한국의 소식도 모두 그립습니다. 한국뉴스를 검색하다가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을 발견했습니다. 그중에 특별히 ‘50+’라는 표현에 많은 생각이 스쳤습니다. 제가 사업에 실패하고 도망치듯 중국에 온 것이, 바로 50세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타향살이 어언 13년이 흘러, 갑자기 코로나로 멈춘 일상 속에서 지나온 저의 인생을 되돌아 반추해보는, 귀한 시간을 가져 보게 되었습니다. 뜻밖에 좋은 기회를 주셔서 정말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시니어 공모전을 통해 ‘인생 이모작’도 새로이 꿈꾸게 되었습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글을 잘 쓰기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기왕에 제가 쓴 글이 독자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며 더 잘 읽히면 좋겠다는 차원에서의 노력은, 제가 많이 부족해서 앞으로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소 저의 글은 딱딱하고 설명형입니다. 재미없는 제 성격과 꼭 닮았습니다. 게다가 글쓰기로 처음 상을 탄 것이 대학 때 논문공모대회였고, 대기업에서 기획담당자였기에 더더욱 저의 글은, 사사로운 감정이 담기지 않은, 그래서 재미와 감동이 ‘1’도 없는 필법(筆法)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개인적으로 지난 10여 년간, 중국에 와서 여러 종류의 한글 잡지를 만들고 배포했는데, 주된 독자층이었던 중국조선족들은 한국인들에 비해 우리말 어휘력이 30% 수준을 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글은 그저 수준 높고(?) 어려운 글이었습니다. 로 유명한 미국작가 훼밍웨이가 어느 회고문에서 자신의 독자로부터 받은 편지 하나를 소개했습니다. 전쟁 파병(아마도 한국전쟁) 중인 미군병사가 자신의 소설을 읽고 나서, 어려운 단어가 없어 ‘사전(辭典)찾기 ’없이도 100% 공감하며 큰 감동을 받았다는 감사편지였습니다. 저 역시, 쉽고도 감동적인 글, 그리고 오래 간직하고픈 글을 쓰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글을 쓰는데 도움을 준 멘토나 동기부여 이유가 있다면? 직접적인 멘토는 아니지만, 제가 특별히 닮고 싶은 작가가 두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한국의 유명한 시인 류시화이고, 또 한 분은 의 저자이자 인류학자인 미국의 루스 베네딕트 교수입니다. 시인 류시화는 개인적으로 저와 고등학교 동기동창입니다. 본명은 안재찬이며, 대광고등학교 30회로, 고교 2,3학년을 같은 반에서 공부했습니다. 경희대학교 2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당선된 그는, 인도 여행을 다녀와서 쓴 수필집 및 시집 등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인기작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글은 쉬우면서도 깨달음을 줍니다. 저도 글을 쓴다면 그런 면을 배우며 닮고 싶습니다. 다음은 미국의 여성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 교수인데, 제가 단동에서 항일유적연구소장을 할 때, 그분의 저서 을 읽었습니다. 2차 대전 전쟁을 종료하기 직전에 미국이 일본에 대해서 분석한 책으로,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인들에게 일본과 일본인 분석에 관한 제 1의 필독서입니다. 같은 패망국인 독일과는 달리, 일본은 왜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가에 나름의 분석이 명쾌합니다. 일본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상태에서 쓴 글이라는 점도 놀랍고, 냉철한 대안 제시가 전후(戰後) 미국과 일본의 관계설정에 기준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대단히 유효합니다. 일본에 대해 비판만하고 흥분만하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줄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나는 중국인에게 대한민국에 대해 얼마만큼 설명할 수 있는가, 또는 한국에 와서는 중국에 대하여, 그리고 제가 중시하는 중국 조선족에 대해서, 나는 얼마만큼 본질을 명쾌하게 공부했는가에 대해 통렬하게 반성하게 하는 책입니다. 중국판 같은 글에도 도전하고 싶은 이유입니다. •수상을 계기로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얼마 전 미국 아카데미상에서 영화 가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70년 전 조선인의 미국 이민사를 소재로 한 영화인데,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제 주변의 중국조선족들을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100년 전후로 대륙에 이주해 왔고, 영화 미나리 이상의 휴먼 스토리가 얼마든지 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향후 중국 조선족 100년의 이야기를 중국판 처럼 작품으로 써서 세상에 알리는 것도, 이번 상(賞)을 통하여 저에게 주신, 귀한 소명 중 하나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감사와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많은 사람이 있지만, 딱 한사람만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저의 여동생 ‘김경희’를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교만한 실패와 방황, 그리고 대륙에서 길을 묻는 지난 10여 년 동안, 개인적으로는 부끄럽게도 맏아들로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저희 어머님께 제가 한 때는 자랑이던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걱정을 끼치는 아들로 살고 있는데, 그 빈자리를 저의 여동생이 말없이 채워주고 있습니다. 여동생 김경희는 제 인생에서 가장 미안하고 가장 고마운 존재입니다. 이번에 받은 저의 수상이, 제 여동생에게도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2021-08-2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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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보다 젊다”…올림픽을 빛낸 노장들
- 세계 최고의 기량을 뽐내는 선수들의 땀과 열정으로 가득한 도쿄올림픽. 생기 넘치는 10~30대 젊은 선수들 사이에서 더 돋보이는 이들이 있다. 바로 40~60대 시니어 선수들이다. 체력으로는 뒤처질지 몰라도 노장 선수들의 스포츠 정신과 열정, 기술, 헌신은 젊은 선수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쌓은 연륜과 노련함으로 오히려 더 빛을 낸다. 포기를 모르고 최선을 다하는 백전노장 선수들의 투혼은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전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하며, 도쿄올림픽을 빛내고 있는 노장 선수들을 소개한다. 66세 최고령 선수, 메리 해나(66) 이번 올림픽 최고령 선수는 여자 승마의 마장마술에 출전한 호주의 메리 해나(66)다. 이번이 여섯 번째로 올림픽에 출전한 해나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제외하고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부터 2016년 리우올림픽까지 출전했다. 하지만 아직 메달 기록은 없다. 메달을 받지 못해도 꾸준하게 대회에 출전하며 나이와 상관없이 기량을 과시하고 있다. 그녀는 여전히 도전 중이다. 그녀에게 나이는 도전의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해나는 “메달을 목표로 삼기엔 조금 늦은 것 같긴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70대로 들어서는 2024년 파리올림픽에도 출전하려고 욕심을 내고 있다. 62세 최고령 메달리스트, 앤드류 호이(62) ‘호주의 승마 영웅’으로 불리는 앤드류 호이는 60대 나이로 이번 도쿄올림픽에서 하루에 메달을 두 개나 목에 걸었다. 지난 2일 종합마술 개인전에서 동메달을, 종합마술 단체전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호이는 이번 대회 최고령 메달리스트로 기록됐다. 호이는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아직 건강하다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라고 밝혔다. 그는 1984년 LA올림픽부터 두 차례를 제외하고 모든 올림픽에 출전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와 1996년 애틀랜타에 이어 2000년 시드니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면서 호주 역사상 한 종목에서 3연패를 달성한 최초의 남자선수가 됐다. 일곱 번째 금메달 수상, 이자벨 베르트(52) 이자벨 베르트는 52세 나이로 역대 올림픽 승마 종목 최초로 7번째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는 지난 7월 27일 열린 도쿄올림픽 승마 마장마술 단체전에서 자신의 7번째 금메달을 획득하며 저력을 과시했다. 베르트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나서 마장마술 단체전 금메달, 개인전 은메달을 획득한 선수다. 이후 1996년 애틀랜타, 2000년 시드니, 2008년 베이징,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단체전 정상에 오르며 꾸준하게 메달을 쌓아왔다. 그는 자신의 6번째 올림픽인 도쿄 대회에서 변함없는 기량을 발휘하며, 지금까지 올림픽에서 11개의 메달(금 7·은 4)을 손에 넣었다. 국제승마협회에 따르면 베르트는 마장마술 세계 랭킹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41세 어린 신유빈과 막상막하, 니샤롄(58) 지난 7월 25일 탁구 여자 단식 64강전에서 자신보다 41세 어린 신유빈(17)과의 탁구 대결로 국내 팬들에게도 이름을 알린 니샤렌은 중국 국가대표 출신의 룩셈부르크인이다. 니샤롄은 역대 올림픽 여자 탁구 선수 중 가장 나이가 많다. 그럼에도 그는 신유빈과의 경기에서 41세의 나이 차이에도 막상막하의 경기를 보이며, 역전패했다. 풍부한 경험을 앞세워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니샤롄의 플레이에 신유빈만 바쁘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연출됐다. 이런 모습에 국내 팬들은 얄밉다는 평부터 탁구에 통달했다는 평까지 하며, 그의 활약을 높게 평가했다. 9번 연속 올림픽 출전한 최초 여성, 니노 살루크바제(52) 1988년 서울올림픽부터 9번 연속으로 올림픽에 출전한 최초의 여자 선수라는 대기록을 세운 주인공이다. 니노 살루크바제는 1988년 서울올림픽 사격 공기권총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땄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동메달을 추가했다. 2016년 리우올림픽에서는 아들 초트네 마차바리아니와 함께 출전해 올림픽 첫 모자 출전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번 올림픽에서는 10m 공기권총에서 예선 31위를 기록한 뒤 시력이 떨어져 더는 힘들겠다며 은퇴를 선언했다. 통산 금·은·동메달을 한 개씩 남기고 물러나는 그에게 세계 스포츠계의 격려가 쏟아졌다. 40대 체조 여왕, 옥사나 추소비티나(46) 우즈베키스탄의 체조 여왕으로 불리는 옥사나 추소비티나. 그는 20대 중반만 돼도 환갑이라는 여자 체조계에서 40대까지 8회 연속 올림픽에 출전하며 ‘살아있는 전설’로 새 역사를 썼다. 그는 지난 7월 25일 여자 체조 도마 예선 경기에서 결선 진출에 실패했다. 하지만 동료 선수와 코치, 운영진 모두에게 기립박수를 받으며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결선 진출에 실패한 뒤 추소비티나는 “나는 마흔여섯 살이다. 이건 변함이 없다. 하지만 나는 살아있고 행복하다. 아무런 부상 없이 여기 있고, 내 두 다리로 혼자 서있다”며 감격해했다.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보다 젊다. 오늘 도전하고 즐겨야 한다.” 니샤롄은 자신보다 41세 어린 선수와 경기를 끝낸 직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이를 잊은 노장 선수들의 투혼은 나이를 탓하며 도전을 포기하고 즐기지 못하는 수많은 우리들에게 의미있는 메시지를 선사하고 있다.
- 2021-08-06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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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일 개막’ 2020 도쿄 올림픽, 뭐가 달라졌을까?
- 시니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이벤트는 단연 올림픽이다. 올림픽은 1896년부터 열린 전 세계 최대 규모의 종합 스포츠 축제다. 올림픽 여러 종목의 선수 중에는 올림픽 하나만을 위해 4년 동안 준비해 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이 있다. 그만큼 깊은 역사와 이야기를 자랑하는 지구촌 대형 이벤트다. 하지만 최근에는 월드컵과 급격히 커진 e스포츠에 밀려 스포츠 이벤트로서 중요도가 점점 떨어지는 추세다. 여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까지 겹쳐 개최 자체가 불투명했던 시기도 보냈다. 올림픽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 하지만 1988년 서울올림픽을 경험한 시니어들에게 올림픽은 최고의 스포츠 제전이기도 하다. 이에 시니어들은 이번 도쿄 올림픽에 남다른 기대를 갖고 있을 것이다. 브라보는 올림픽을 즐길 시니어들을 위해 이번 올림픽이 기존 올림픽과 어떻게 다른지, 한국 대표팀 관전 포인트에 무엇이 있는지 정리했다. 도쿄 올림픽, 무엇이 다른가? 2020 도쿄 올림픽은 2021년 7월 23일부터 8월 8일까지 진행된다. 지난해 여름에 개최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올해 여름으로 연기됐다. 대회 명칭은 그대로 사용한다. 사상 첫 무관중 올림픽이다. 당초 일본인과 일본 거주자에 한해 관중을 받으려고 했지만 일본 내 코로나19 확산이 심각해지면서 논란이 커졌다. 결국 IOC와 합의해 일본인 관중도 입장하지 않는 걸로 결정했다.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1회 근대 올림픽이 열린 이래 125년 역사상 최초다. 다만 상대적으로 코로나19 확산이 덜한 미야기현과 시즈오카현, 이바라키현 경기장에는 일부 관중 입장을 허용한다. 러시아 대표팀은 올림픽 참가가 금지됐다. 러시아 체육계 선수들이 금지약물을 복용하고 국가적으로 도핑테스트 샘플을 은폐하는 등 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포츠중재재판소가 2020년 12월 러시아의 도핑 샘플 조작을 인정했고, 러시아는 2년 동안 국가 자격으로 국제스포츠대회 참가가 제한됐다. 하지만 러시아 국적 선수가 올림픽에는 참여한다. 파견된 335명 선수들은 ‘러시아’라는 국가명 대신 ‘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라는 이름을 달고 뛴다. 메달을 따도 시상대에는 국기 대신 오륜기가 올라온다. 국가는 러시아 작곡가 차이콥스키의 피아노협주곡 제1번으로 대체한다. 경기 종목에도 변화가 많다. 레슬링과 야구가 다시 정식 종목이 됐다. 여성 선수 참여율을 높이기 위해 양궁과 수영, 탁구 등에서 혼성 종목이 대거 늘어났다. 사격에서는 진종오 선수의 주 종목인 50m 권총을 비롯한 3개 남자 종목이 폐지되고, 3개 혼성 종목이 신설됐다. 농구는 세부종목으로 남자 3대3 농구, 여자 3대3 농구가 추가됐다. 사이클은 남녀 BMX 프리스타일, 트랙 남녀 매디슨 종목이 추가됐다. 펜싱은 세부종목인 플뢰레, 사브르, 에페 중 남녀 단체전이 1개씩 번갈아가며 제외돼 총 10개 종목만 배정되던 관행이 있었다. 이번에는 관행이 깨지면서 12개 종목 모두 올림픽 세부종목으로 확정됐다. 야구 종목 부활, 한국야구도 부활할까 2008년 베이징에서 한국 야구 대표팀은 영광의 시간을 보냈다. 류현진, 김광현, 이대호, 이승엽 등 황금세대가 김경문 감독 지도로 9전 전승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후 야구 종목은 올림픽 정식 종목에서 빠졌다. 2020 도쿄 올림픽에 한해 일본의 국기인 야구가 정식 종목에 포함됐다. 이런 이유로 한국 대표팀은 이번 대회에서 디펜딩 챔피언이다. 야구선수들은 다시 올림픽 무대를 밟을 좋은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국내 야구 상황은 좋지 않다. 10번째 구단까지 출범해 양적 성장은 이뤘지만 코로나 19여파와 e스포츠에 익숙한 젊은 팬의 선호가 떨어지며 야구 인기가 예전 같지 않은 상태다. 설상가상으로 대표팀에 뽑혔던 일부 선수가 방역수칙을 위반해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리그가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다. 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거둬, 돌아선 야구팬들의 마음을 잡아야 하는 상황이다. 2024 파리 올림픽부터는 야구가 올림픽 종목에서 빠진다. 이번에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면 야구선수들이 다시 올림픽 무대를 밟을 수 없을지 모른다. 베이징 황금 세대의 일원이었던 강민호, 오승환 등 베테랑들에 이정후, 강백호, 원태인 같은 새로운 세대가 수혈됐다. 영광의 세대와 영광의 순간을 보고 자란 세대가 다시 한번 김경문 감독과 함께 베이징의 감동을 재현할지가 주목된다. 사격의 전설 진종오, 새로운 도전 대한민국 사격의 전설 진종오는 한국뿐 아니라 올림픽을 통틀어 사격 역사에서 최고 선수다. 올림픽 개인 사격에서 금메달 4개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선수다. 이런 진종오가 이번 올림픽에서 큰 변화를 맞았다. 2020 도쿄 올림픽에서는 지난 2014년 IOC가 발표했던 ‘어젠다 2020’에 따라 남자 종목과 여자 종목의 메달 숫자를 맞췄다. 원래 사격은 남자 종목 9개, 여자 종목 6개였다. 하지만 어젠다 2020이 내건 ‘여성 참가 비율을 50%’ 방침에 따라 진종오의 주 종목인 50m 권총을 폐지됐다. 또 다른 남자 종목인 50m 소총 복사, 더블트랩까지 총 3개 남자 종목이 폐지됐다. 대신 10m 공기권총, 10m 공기소총, 트랩에서 3개의 혼성 종목이 신설됐다. 진종오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부터 13년 동안 50m 권총에서 챔피언 자리를 지켰다. 많은 선수가 그와 실력을 겨루었지만 2012 런던 올림픽에서도, 2016 리우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은 진종오의 몫이었다. 올림픽 3연속 금메달이라는 업적을 세우는 동안 2012 런던 올림픽에서는 주 종목이 아닌 10m 공기 권총 종목에서도 금메달을 추가했다. 4개의 금메달과 2개의 은메달. 진종오는 총 6개의 올림픽 메달을 따 ‘신궁’ 김수녕과 함께 한국 올림픽 역사에서 가장 많은 메달을 보유하고 있는 선수이기도 하다. 발자취 자체가 곧 역사인 진종오가 이번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면 사격 역사에 또 다른 기록이 세워진다. 사격의 전설 진종오의 10m 공기권총 남자 개인전은 7월 24일, 10m 공기권총 혼성 단체전은 27일에 열린다. 한편 올림픽 중계는 KBS, MBC, SBS 채널에서 볼 수 있다. 3사 모두 개폐회식과 일부 종목을 4K UHD로 생중계한다고 밝혔다. 특히 KBS는 특설 홈페이지를 통해 TV로 중계되지 않는 종목도 생중계한다. 네이버와 웨이브, 아프리카TV와 LG 유플러스 모바일 TV를 통해 온라인으로도 올림픽 중계를 볼 수 있다.
- 2021-07-22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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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B급 노장 테니스 선수다
- 지방의 시립 테니스장에서 테니스를 한다. 클럽 동호회 회원들하고만 하는데 우리 클럽에서 나는 최고 연장자이자 골목대장이다. 한동안 코로나19 여파로 운동장이 문을 닫아걸었다. 테니스장이 툭 터진 야외 운동장인데도 지자체가 관리하는 공설운동장이다 보니 상부에서 문을 닫으라 하면 닫고 열라 하면 연다. 옥외 체육시설까지 문을 닫는 건 너무 심하다고 회원들의 불만이 많았는데 다행히 이번에 잠금조치가 해제되어 운동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다. 잠금 조치가 해제되어도 아무나 출입할 수는 없다. 들어오기 전에 발열 체크를 하고 출입자 명부에 전화번호와 체온 기록을 남겨야 한다. 처음 보는 사람이 불쑥 들어오면 다들 경계한다. 코로나19가 모르는 사람을 의심부터 하도록 만들었다. 자신 때문에 운동장이 폐쇄되는 일이 없도록 각자가 매우 조심한다. 젊어서 함께 테니스를 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자 테니스장을 떠났다. 떠난 이유는 다양하다. 좀 고급스런 스포츠인 골프로 이동한 분들도 있고 체력적으로 힘이 들어 탁구나 걷기 등 쉬운 운동으로 바꾼 분도 있고 아예 운동을 못하는 분도 많다. 나는 30대에 테니스를 시작했다. 그런데 60이 넘은 지금까지 동네 테니스장의 자칭 현역 선수로 끈질기게 남아 있다. 어떻게 해서 살아남은 걸까? 돌이켜보니 실력보다는 끈질김이었다. 타고난 성격이 한몫했다. 나는 공부를 못해도 학교에는 꼬박꼬박 잘 다녔다. 우등상 받은 기억은 별로 없어도 개근상은 제법 받았다. 회사를 다닐 때도 그랬다. 상급자들로부터 “능력은 글쎄!”라는 뒷말을 들어도 성실함은 손꼽아줬다. 한 번 시작하면 누가 그만하라고 하기 전에는 계속했다. 한 우물을 파는 사람처럼 직장도 한 곳만 다녔다. 더 좋은 대우를 해주겠다고 유혹하는 회사도 있었지만 배신하는 것 같아 귀 닫고 두 눈도 질끈 감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끈기라기보다는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는 여린 마음 때문인 것 같다. 인사치레로 “다음 주에도 나오세요!” 하는 말을 거절하지 못해 주말마다 테니스장에 나가다 보니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자연스럽게 나이로 뽑는 최고참이 되었다. 많은 동호인들이 내 어깨를 딛고 상급 선수로 성장했지만 나는 늘 B급 선수로 그 자리에서 맴돌았다. 키도 작은 데다 타고난 운동신경이 둔해서다. 그렇다고 전문 코치를 사사한 일도 없었으니 실력이 늘지 않은 건 당연하다. 낙천적인 성격도 한몫했다. 승부욕이 강하지 못해 시합에 져도 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후배들은 나를 ‘영원한 현역’이라고 치켜세우지만 사실 시합에 나가면 이기는 시합보다 지는 시합이 더 많다. 오늘도 4전 1승 3패의 전적이다. 그나마 1승도 완전히 파트너 덕분이다. 전문적인 프로선수가 아니라면 나이 들어 하는 운동은 즐거워야 하고 건강에도 도움이 되어야 한다. 운동은 운동다워야 하는데 몸을 움직일 때는 단시간 뜀박질이 있어 맥박과 호흡을 빠르게 해줘야 한다. 그런 면에서 테니스는 참 좋은 운동이다. 공을 쫓아 전력질주할 때는 순간적으로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맥박도 빨라진다. 혈관 속 피들이 힘차게 돌아 노폐물을 밀어버리는 느낌이다. 테니스는 네트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서 하는 운동이므로 축구처럼 서로 몸이 부딪칠 일이 없어 부상당할 염려가 거의 없다. 비슷한 실력자를 찾고 파트너를 배려하는 매너를 몸에 익히면 나이가 많아도 배척당하지 않는다. 나이 들어도 공부와 운동은 필수다. 맥아더 장군의 말처럼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몸동작이 느려지고 파워는 점점 약해지지만 밤하늘의 꼬리달린 유성처럼 길게 약한 빛을 내며 영원한 현역으로 남아 있고 싶다.
- 2020-10-13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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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스포츠 활성화로 건강한 국민을
- 운동이 건강에 좋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운동을 잘해서 국가대표로 올림픽에도 나가고 입상해 메달까지 따온다면 더 바랄 나위 없다. 하지만 국가대표는 아무나 하지 못한다. 국민의 0.0001% 이하가 누리는 엘리트스포츠맨이다. 엘리트스포츠맨이 되려면 타고난 천부적인 자질과 노력이 필요하다. 어려서부터 우수한 코치 밑에서 체계적인 수업을 받아야 하기에 돈도 많이 든다. 국가도 태릉선수촌을 만들고 지원도 많이 한다. 누구나 국가대표가 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일반인은 생활스포츠로 건강을 위해 즐기면 된다. 재능이 있으면 빨리 성장하겠지만 적성에 맞으면 생활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엘리트스포츠와 생활스포츠는 다르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많이 획득했다고 또는 위대한 선수를 배출한 나라라고 그 나라의 국민 체력이 높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올림픽의 메달 경쟁에서 상위권에 든 미국이나 중국의 국민들, 세계적인 축구 스타 호날두의 고국인 포르투갈 또는 메시의 조국인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체력이 높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기준으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국민들이 스포츠를 통해 질병 없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도 하나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병원 시스템도 중요하지만, 국민을 건강하게 만드는 프로그램이 발달한 나라가 더 살기 좋은 나라가 아닐까? 선진국에서는 학교 체육시간에 학생들에게 여러 가지 운동을 경험하도록 해 자신에게 맞는 종목을 평생 자기만의 스포츠로 만들게 한다고 한다. 즉 생활스포츠맨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학생 시절부터 야구나 배구, 아이스하키를 취미삼아 하던 사람이 성인이 되어도 동호인 클럽에서 운동을 계속한다. 격렬한 운동인 축구도 그렇고, 70세가 훌쩍 넘은 분들이 은발을 휘날리며 탁구와 테니스를 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참 좋다. 어디까지나 생활스포츠이기 때문에 승부에 집착하지 않고 건강을 위해 즐기면서 한다. 나는 30대 때 직장생활을 하면서 테니스에 입문했다. 운동신경이 둔하고 키도 작아 잘하진 못했지만 지금도 동호인 클럽에서 영원한 현역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생활스포츠로 즐기고 있다. 테니스로 건강을 다져 울트라마라톤에도 출전하고 헌혈 100회를 해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도 했다. 내 건강의 8할은 테니스로부터 왔다고 자부한다. 세상의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눈다면 건강해서 운동장으로 달려가는 사람과 아파서 병원에 있는 사람 그리고 병원에 갈 정도로 아픈 것도 아니고 운동장으로 뛰어갈 만큼의 건강한 사람도 아닌 중간 부류의 사람이다. 중간 부류의 사람들은 하루라도 빨리 적성에 맞는 스포츠를 찾아 즐겨야 한다. 나이가 들면 힘이 없어지고 행동도 둔해진다. 이를 더디게 하는 데는 운동만 한 것이 없다는 게 정설이다. 평균수명 100세 시대를 산다고 해도 아파서 골골거리며 오래 사는 것은 누구도 바라지 않는다. 국가도 엘리트스포츠맨을 육성하고 아픈 환자를 돌보는 일도 중요하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을 위한 생활스포츠에도 신경 써야 할 때다. 코로나19와 같은 전염성 강한 바이러스가 창궐해도 생활스포츠가 발전한 나라의 국민들은 쉽게 이겨내리라고 본다.
- 2020-08-26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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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령층 코로나19 감염·사망 확산 '우려가 현실로'
- 최근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 비중이 청장년층에서 고령층으로 확산되고 있어 중증환자 발생 우려가 커지고 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지난 2~9일 발생한 국내 신규 확진자 349명 가운데 지역사회에서 감염된 환자는 313명이다. 이 중 96.8%인 303명이 수도권에서 나왔다. 특히 신규 확진이 고령자자 주로 찾는 시설에서 연쇄전파되고 있는 상황이다. 방대본에 따르면 경기 광명시 노인복지시설에서 입소자 3명을 포함한 6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 이들 입소자 일부는 지난달 31일 용인 큰나무교회 예배에 참석해 감염이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용인 큰나무교회는 서울 양천구 탁구장을 찾은 신도로부터 전파가 시작된 곳이다. 서울시 관악구 건강용품 방문판매업체 리치웨이 관련 확진자도 68명으로 증가했다. 리치웨이 방문자 중 1명이 거주하는 구로구 중국동포교회 쉼터에서도 8명이 추가로 확진됐다. 또 쿠팡 물류센터에서 시작된 n차 전파로 감염된 1명과 경기 광주 행복한요양원 입소자 1명이 사망했다. 두 사람 모두 80대 이상 고령자로 알려졌다. 신규 확진자가 늘고 있는 가운데 고령자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 방대본에 따르면 지난 5월 10~16일 발생한 확진자 중 60세 이상 고령자 비율은 7.6%(15명)였으나, 5월 31일~6월 6일에는 37.1%(103명)로 5배 이상 증가했다. 고령자는 코로나19로 인해 중증환자와 사망자가 발생할 우려가 크다. 국내 전체 확진자의 치명률은 2.31%지만, 80세 이상 확진자의 치명률은 25.92%에 이른다. 70대와 60대의 치명률은 각각 10.45%와 2.61%다. 권준욱 부본부장은 “고령 확진자 증가는 가장 우려했던 상황”이라며 “지금이라도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거리 두기와 마스크 착용 등 기본원칙을 지켜야 한다. 밀폐된 장소에서 많은 사람이 모이는 모임에도 가급적 참석하지 말아주길 당부한다”고 말했다.
- 2020-06-10 0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