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은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다. 아울러 2015년부터 3년간 써온 필자의 한문 산책 역시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그동안 필자의 칼럼을 읽어주신 독자들에게 지면을 빌려 감사를 드리며 한 해를 마무리 짓는 시제를 골라봤다. 한 해를 마무리 짓는 시로서 가장 오래된 작품은 무엇일까? 중국의 가장 오래된 시가(詩歌) 문학을 대표하는 ‘시경(詩經)’에서 세모의 시는 바로 당풍(唐風)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실솔3장(蟋蟀三章)’이다. ‘실솔(蟋蟀)’이란 귀뚜라미를 의미하는데, 3장으로 이루어진 이 시의 제1장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蟋蟀在堂(실솔재당) 귀뚜라미가 마루에 있으니
歲聿其莫(세율기모) 해가 드디어 저물었도다.
今我不樂(금아불락) 이제 우리가 즐거워하지 아니하면
日月其除(일월기제) 해와 달이 (우리를 버리고) 가리라.
無已大康(무이태강) 너무 편안하지 아니한가.
職思其居(직사기거) 자신의 직책을 생각하여
好樂無荒(호락무황) 좋아하고 즐거워함을 지나치지 않음이
良士瞿瞿(양사구구) 어진 선비의 두려워하고 조심함이니라.
귀뚜라미가 마루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당시 주나라 빈(豳) 지방의 노래였던 ‘빈풍(豳風) 칠월(七月)’을 보면, “七月在野(칠월재야:칠월이 되면 귀뚜라미가 들에 있고), 八月在宇(팔월재우: 팔월이 되면 집 안에 들어오고), 九月在戶(구월재호: 구월이 되면 문 안으로 들어오고), 十月蟋蟀(시월실솔: 시월이 되면 귀뚜라미가), 入我牀下(입아상하: 내 침상 아래로 들어오느니라)”란 표현이 있다. 귀뚜라미가 날이 추워지자 사람들이 거주하는 공간인 집으로 찾아 들어오는 모습으로 한 해가 지나감을 표현한 것인데, 빈풍의 노래들은 하나라의 월력인 하력(夏曆)을 사용한 관계로, 한 해의 마지막 달이 12월이 아닌 10월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귀뚜라미가 마루에 있다’는 표현은 하력으로 따지면 9월에서 10월 초, 그리고 주나라 이후 사용된 주력(周曆)에 의하면, 11월에서 12월 초 정도의 시점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는 한 해의 노고를 돌아보며 즐기되 지나치지 않음을 강조한 시다. 이후 많은 곳에서 인용되었는데, 주로 한 해의 마지막을 나타내는 세모 또는 선비가 스스로를 다지는 마음가짐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예컨대, ‘고시19수(古詩十九首)’ 중 ‘동성고차장(東城高且長)’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四時更變化(사시경변화) 사계절은 변화하기 마련이라지만,
歲暮一何速(세모일하속) 연말이 돌아옴은 어찌 그리 빠른 것인가?
晨風懷苦心(신풍회고심) ‘시경’ 신풍편(晨風篇)에는 버림받은 신하의 괴로움을 나타내고 있고(벼슬 못하는 괴로움),
蟋蟀傷局促(실솔상국촉) ‘시경’ 실솔편(蟋蟀篇)에는 구속되어 살아감[局促]을 상심하는 뜻을 나타내고 있네(벼슬살이하는 괴로움).
한편 조선시대 기대승(奇大升)의 ‘고봉집(高峰集)’ 천상추기근(天上秋期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亹亹送流年(미미송류년) 세월이 갈수록 자꾸 흐르는 해를 전송하게 되는구나.
奔走紅塵裡(분주홍진리) 세상 풍진 속에 혼자 분주하니,
空吟蟋蟀篇(공음실솔편) 부질없이 실솔편만 읊조리누나.
3년간 써온 한문 산책을 마감하니 위의 ‘空吟蟋蟀篇’이라는 구절이 마음에 와 닿는다.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이름을 중시하는 경명(敬名) 사상이 있었다. 따라서 이름은 군사부(君師父)가 아니면 함부로 부를 수 없었다. 이에 따르는 호칭상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웃어른들이 자(字)를 지어주었는데 이렇게 지어진 ‘자’도 친구 등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부를 수 없었으므로, 누구나 편하게 부를 수 있는 호칭이 별도로 필요해 만들어진 것이 호(號)다. 호는 자신이 직접 짓는 자호(自號)가 있고, 친구나 스승이 만들어주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당호(堂號)라 하여 선비들이 사는 집의 호칭, 나아가서 그 집에 살고 있는 주인의 호칭으로 사용한 것도 많다. 먼저 자호의 예로, 우리나라가 배출한 대시인인 미당(未堂) 서정주 선생을 들 수 있다. ‘선진편(先進篇)’을 보면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온다.
공자께서 지나가시는데, 제자인 자로(子路)가 거문고[瑟]를 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음악이 군대에서 사용하던 음악으로 북쪽 변방의 살벌한 음색이 있어, 기질이 강맹하였다. 못마땅하게 여긴 공자님께서는 ‘어찌 내 집에서 그런 음악을 연주하는가?’ 하고 나무랐다. 그러자, 그다음부터 다른 제자들이 자로에게 불경스럽게 대하기 시작했고, 이에 공자님께서는 다른 제자들을 타일러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한다.
“자로는 이미 그 경지가 마루에 올라 있다. 다만, 아직 방 안까지 들어오지는 못했을 따름이다(由也 升堂矣. 未入於室也).”
이후, 학문이건 예술이건 어떤 경지를 얘기할 때는, 승당(升堂)과 입실(入室)이란 단어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서정주 선생께서는, 시에 관한 한 자신의 경지는 ‘아직 승당(升堂)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겸손의 의미로 ‘미당(未堂)’이란 단어를 자호로 삼은 것이다.
그다음에는, 당호의 예로 다산(茶山) 정약용의 ‘여유당(與猶堂)’을 들 수 있다. 다산은 자신의 천주교 경력 때문에 많은 박해를 받고 마침내 벼슬을 내어놓고 물러나게 되었다. 잘못하면 또 다른 화를 당할 수도 있는 처지라, 자신의 당호를 노자(老子)의 15장에 나오는 “망설이기를[與兮] 겨울에 살얼음판 건너듯 조심하고, 겁내기를[猶兮]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 신중히 하라(여(與)는 코끼리, 유(猶)는 원숭이를 뜻함)”는 내용의 의미를 따서 ‘여유당(與猶堂)’이라 짓고, 조심 또 조심하자는 경구(警句)로 사용했다.
마지막으로, 스승이 지어준 호의 예로 우리가 잘 아는 추사(秋史)를 들 수 있다. 추사의 스승은 북학파(北學派)로 유명한 정유(貞蕤) 박제가(朴齊家)다. 박제가는 연경에 갔을 때 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의 집에서 강덕량(江德量)이라는 사람을 만난다. 강덕량은 옹방강에게 화도사 사리탑 글씨 탁본의 진본을 준, 유명한 금석학의 대가이자 예서(隸書)에 능한 서예가였다. 그런데 강덕량의 호가 ‘추사(秋史)’였다. 박제가와 강덕량은 서로 마음이 통해 친하게 지냈으며, 박제가는 강덕량이 보여주는 금석 속의 옛 글씨들에 깊이 매료되었다. 연경에서 돌아온 박제가는 16세 소년인 김정희에게 입이 닳도록 강덕량 이야기를 한 뒤, 그를 본받으라는 의미로 ‘추사(秋史)’라는 호를 내린 것으로 보인다. 추사 김정희가 금석학(金石學)과 서예, 특히 그중에서도 예서에 힘쓴 것은 바로 이러한 강추사(江秋史)의 영향인 것으로 생각된다.
를 보면, 수많은 공자의 제자가 나오지만 그중 재여(宰予)만큼 특이한 인물은 없다. 를 읽어보면 공자가 제자에 대해 험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나의 예외가 있는데, 그게 바로 ‘후목분장(朽木糞牆)’의 일화에 나오는 예다. 재여가 낮잠을 자자, “썩은 나무는 조각을 할 수 없고, 썩은 담장에는 칠을 할 수 없다”와 같은 심한 말로 나무라는 장면이 나온다. 왜 성인(聖人)인 공자가 이런 심한 말을 했을까? 자세한 내막은 알 길이 없지만, 를 살펴보면 약간의 유추를 할 수 있다. 에는 재여가 공자와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세 번 등장한다. 첫 번째가 바로 ‘삼년상(三年喪)’과 관련한 논쟁이다.
어느 날 재여는 공자에게 삼년상이 너무 길므로 일년상으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한다. 그러자 공자가 일년상으로 끝내도 마음이 편하겠느냐고 물었고 재여는 편안하다고 답한다. 공자는 마음이 편안하다면 일년상으로 하라고 하면서, “군자는 부모님의 상중(喪中)에는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맛이 없고, 좋은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다. 그래서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고 좋은 음악을 듣지 않는 법”이라고 했다. 재여가 나가자 공자가 말했다. “재여는 참으로 어질지 못한 사람이다. 자식은 태어나서 삼 년이 지나야 부모의 품을 벗어난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삼년상을 치르는 예(禮)를 갖춘 것이다.” 즉 이때 그는 공자에게서 ‘불인(不仁)하다’는 딱지를 받은 것이다.
또 의 ‘옹야(雍也)’ 편을 보면 재여가 다음과 같은 고약한 질문을 하는 대목이 나온다. “어진 사람[仁者]이 있는데 누군가가 알려주며 말하기를 ‘우물에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것을 따라 우물에 빠져야 할까요?” 공자가 말하기를 “어찌 그렇게 하겠는가? 군자에게 가서 보게 할 수는 있지만 그를 속여 빠지게는 할 수 없으며, 속일지언정 우롱하지는 못하니라”라고 했다. 가만히 읽어보면 공자가 화가 난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가? 어진 사람이라면 마땅히 남을 도와야 하는데,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고 남을 도와야 하느냐는 발칙한 질문에 마땅한 대답을 내어놓지 못해 화가 나서 내뱉는 스승의 모습이다.
이외에도 의 ‘팔일(八佾)’ 편에 나오는 일화가 있는데, 대략 이상의 세 가지 일화를 종합해보면, 재여는 아주 똑똑하고 재기발랄한 제자이지만, 몹시 골치 아픈 제자였다. 묻는 질문마다 스승을 골탕 먹이려는 듯한 질문을 던지고 삼년상처럼 사실상 논리적으로도 맞고 현실에 부합하는 질문을 들이대면서 “스승님 말씀이 틀렸잖아요?”라고 따지는 어린 제자가 공자는 몹시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런 제자가 열심히 공부해야 할 낮 시간에 단순히 조는 것도 아니고, 아예 드러누워 잠을 자고 있으니, ‘후목분장’이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쓴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스승과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재여는 공자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난 10명의 제자, 즉 ‘공문십철(孔門十哲)’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려놓는다. 그리고 그는 공자가 천하를 주유(周遊)할 때 공자를 계속 수행했으며, 공자의 명에 따라 제(齊)나라, 초(楚)나라에 사신으로 파견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그의 공을 후대에서 인정해, 당(唐) 현종(玄宗)은 그를 ‘제후(齊侯)’에 봉했고, 송(宋)대에는 ‘임공(臨公: 후대에는 제공(齊公)으로 개칭)’, 명(明)대에는 ‘선현재자(先賢宰子)’로 봉해지는 영광을 누린다.
하태형(河泰亨)>> 전 현대경제연구원장
아호는 양우(養愚). 195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와 KAIST 대학원에서 경영학과 경영과학을 전공했다. 미국으로 유학하여 뉴욕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수원대 금융공학대학원에 교수로 복귀하여 강의하고 있다,
오랜 소망이었던 서예와 한학을 다시 공부하게 됐다. 를 접하게 된 이후 국내외 문헌을 찾아가며 난정서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저서로는 가 있다.
세상에는 허구의 사실이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사례가 왕왕 존재한다. 중국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에 나오는 적벽대전(赤壁大戰)이 아닐까 한다. 호풍환우하는 제갈량의 화공(火攻)에 의해 무참히 무너진다는 조조의 80만 대군, 그 진실은 무엇일까?
정사(正史) 에는 적벽의 전투를 기록한 글이 모두 다섯 군데 등장한다. , , , , 등이다. 이중 네 군데의 글에서 공통으로 기록하고 있는 내용은 당시 조조의 군에 역질(疫疾)이 돌았다는 기술이다. 남방 지역의 습기 차고 찌는 듯한 기후가 건조한 기후에 익숙한 북방의 조조 군영에 전염병을 유발시킨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로 추측할 수 있다.
문제는 화공 부분인데, 화공이 언급되어 있는 글은 모두 세 군데로 , , 이다. 먼저 에는 “손권은 선주(先主: 유비)와 힘을 합쳐 조조와 적벽에서 싸워 크게 이긴 후 그 배를 불태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화공에 의해 승리하였다”는 내용이 아니라, “승리한 후 배를 불태웠다”라고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에는 또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주유(周瑜)와 정보(程普)가 유비와 함께 진격하였는데 적벽에서 조조 군을 만나 그들을 크게 격파하니, 조조가 남은 함선을 불태우고 병사를 이끌고 퇴각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함선에 불을 지른 주체는 조조 군이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당시의 전투에서는 퇴각 시, 군량미나 함선 등 적군이 활용할 소지가 있는 것들은 소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조 군은 퇴각하면서 이와 같은 군칙에 따라 행동한 것으로 보여진다. 마지막 에는 주유의 부하 황개(黃蓋)가 계략을 꾸며 거짓으로 항복한다고 한 후 짚을 가득 실은 배를 보내 불을 질러 승리를 이끌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나관중이 자신의 소설에서 극화(劇化)의 소재를 찾은 유일한 사료(史料)이기도 하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전쟁에서 승리한 오나라의 정사(正史)에도 “조조 군에 역질이 돌았다”, “조조 군이 퇴각하면서 함선을 불태웠다”고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역사적 사실은 남방 풍토병에 시달리던 조조 군이 전투에 패해 퇴각하면서 스스로 함선에 불을 질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결론짓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조조가 적벽전 이후 손권에게 보낸 ‘위조공(爲曹公) 작서(作書) 여손권(與孫權)’이라는 외교문서에도 이러한 내용이 아래와 같이 등장한다.
“전일, 적벽(赤壁)의 전투에서는 역질이 돌아 우리 스스로 배를 불태우고 돌아오니, 스스로가 역질이 도는 땅을 피한 것이지, 주유의 수군이 우리를 좌절시킨 것이 아니며, 또한 강릉(江陵)을 포기한 것은, 물자가 떨어지고 곡식이 바닥나 있는 곳을 더 이상 점거할 이유가 없으므로 스스로 군대를 돌린 것이지 주유가 우리를 패퇴시킨 것이 아니니….”
즉 전일의 적벽전에서 손권이 혹여 승리했다고 착각하지 말며, 위나라가 마음만 먹으면 적벽이 아닌, 다른 어느 곳에서든 도강(渡江)할 수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다.
를 읽어보면 79권에 조조(曹操)의 사후,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죄를 물어 위(魏) 문제(文帝)로 등극한 조비(曹丕)가 자신의 친동생이자 정적인 조식(曹植)에게 일곱 걸음 안에 시를 짓지 못하면 죄를 묻겠다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바로 그 유명한 조식의 ‘칠보시(七步詩)’가 나온다. 그런데 이 칠보시의 원작자에 대해 아직까지도 논쟁이 있다. 조식이 활동하던 건안(建安) 시대에는 칠보시 같은 오언시(五言詩)가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시기였다. 게다가 정사(正史)인 와 조식의 사후 편찬된 어디에도 이 시가 보이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신뢰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는 어느 문헌에 최초로 등장할까? 위진남북조 시대 송나라의 유의경(劉義慶)이 편집한 다. 이 문헌이 편찬된 시기와 조식의 시대는 약 200년 차이가 나는데, 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위 문제 조비가 동아왕(東阿王) 조식에게 일곱 걸음 안에 시를 지으라 하고, 만약 짓지 못하면 대법(大法, 사형을 의미함)을 받을 것이라 하자, 조식이 이에 시를 짓기를 ‘煮豆持作羹,漉菽以為汁。 萁在釜下然 ,豆在釜中泣。 本自同根生,相煎何太急?’라 하니, 황제가 심히 부끄러워하는 안색이었다.
이 문헌에 등장하는 ‘칠보시’의 원전은 특이하게도 6구의 오언시로 이루어져 있다. 즉 시에 관한 한 고금 제일이라 칭할 만한 조식이 불완전한 6구 형태의 오언시를 남겼다는 점이 의문스럽다. 또 가 위진시대 유명했던 인물들의 일화 및 대화만 기록한 글이어서, 이 시가 언제, 어떤 일로인해 지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위의 글을 토대로 시기를 유추해보면, 일단 조식을 동아왕으로 칭하고 있는데, 조식이 동아왕으로 봉해졌을 때는 그의 형 조비는 죽고, 조카인 조예(曹叡)가 명제(明帝)로 보위를 이은 후여서 이 시의 신뢰성은 또다시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후 이 시는 의 주석에 인용된다. 에 가장 권위 있는 주석을 단 이선(李善)은 60권, 임언승(任彥昇)의 에 대한 주석에서 “에서 말하길, 문제(文帝)가 진사왕에게 일곱 걸음 안에 시를 지으라 하니 그 시는 ‘萁在灶下燃,豆在釜中泣。本是同根生,相煎何太急’이다”라고 하면서 본래의 6구를 절구(絶句) 형태인 4구로 줄여 소개한다. 그러다가 조식 사후 1100여 년이 지난 명나라 때 나관중(羅貫中)이 쓴 에서 이 시는 실제와 허구가 뒤섞인 일화들과 함께 다시 화려하게 등장한다.
煮豆持作羹, 漉菽以為汁. 萁在釜下然, 豆在釜中泣. 本自同根生, 相煎何太急.
煮豆燃豆萁, 豆在釜中泣. 本是同根生, 相煎何太急.
조식의 칠보시는 소개되는 문헌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인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재미있게 읽는 는 사실상 라는 소설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중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는 전문가들을 제외하고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예를 들어, 소설 는 황건적 난에 만난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이 도원(桃園)에서 의형제로 결의를 하는 데서 이야기가 출발한다. 그리고 이들 세 명은 그야말로 천신만고를 겪으면서도 이 결의를 지켜낸다. 소설 후반부에서는, 오(吳)-촉(蜀) 동맹을 어기고 오나라가 형주를 지키던 관우를 공격해 죽이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자 장비는 연일 폭음을 하고 부하들을 두들겨 팼다. 급기야 장비까지 부하들에게 살해되고, 이에 대노(大怒)한 유비는 제갈공명의 만류를 뿌리치고 모든 군사력을 동원해 오나라를 공격한다. 하지만 이릉대전(夷陵大戰)에서 대패한 후 백마성(白馬城)에서 생애를 마감하면서 이들 세 사람의 의형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출발점인 ‘도원결의(桃園結義)’는 과연 사실일까? 역사적 사실을 알아보려면 먼저 삼국시대 역사서인 정사(正史) 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정사 에는 도원결의가 나올까? 유감스럽게도 그런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먼저 촉서(蜀書) 관우전(關羽傳)을 보면, “선주(先主, 유비)는 관우, 장비와 잠을 잘 때도 같은 침대에서 자는 등 서로 아끼기를 형제와 같이 하였다. 관우, 장비는 여러 사람이 모여 있을 때는 선주 뒤에 시립해 하루 종일 있었으며, 선주를 따라 천하를 다니며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나온 ‘은약형제(恩若兄弟)’라는 단어에서 나중에 나관중이 ‘도원결의’를 상상해낸 듯한데 실제 관계는 위에서 보듯 형제라기보다는 군신관계로 보는 게 타당할 듯하다. 또한 촉서 관우전의 다른 부분에는 서주를 잃고 관우가 붙잡혔을 때 조조가 그를 극진히 대접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조가 장료(張遼)를 통해 자기를 위해 일하지 않겠냐고 관우의 의중을 떠보자 관우는 탄식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조공(曹公)이 베푼 극진한 은혜를 잘 아오. 하지만 나는 유 장군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서 함께 죽기로 맹서했고, 그러므로 그를 배신할 수 없소.” 즉 관우는 유비와 ‘함께 죽기로 맹서한’ 주군과 신하의 관계라고 말할 뿐, 의형제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한편 위서(魏書) 유엽전(劉曄傳)에도 이를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 있다. 관우가 오(吳)에 의해 피살된 후 위문제 조비(曹丕)가 여러 신하들에게 과연 유비가 병사를 일으켜 오를 칠 것인가, 관우를 위해 복수를 해줄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시중(侍中)인 유엽(劉曄)은 “유비와 관우는 의리상으로는 군신이나, 은혜상으로는 부자와 같습니다. 관우가 살해되었는데, 유비가 만일 그를 위해 복수해주지 않는다면, 관우의 은의에 대해 시종일관하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도 관우와 유비는 의리상으로는 군신, 은혜상으로는 부자관계로 묘사되고 있을 뿐 의형제로는 묘사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촉서(蜀書) 장비전(張飛傳)에도 “어릴 적부터 관우와 함께 선주(유비)를 모셨는데, 관우의 나이가 몇 살 많아서 장비가 형 대접을 하였다”라는 표현만 나올 뿐, 형제관계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다.
하태형(河泰亨) 전 현대경제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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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호는 양우養愚. 195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와 KAIST 대학원에서 경영학과 경영과학을 전공했다. 미국으로 유학하여 뉴욕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수원대 금융공학대학원에 교수로 복귀하여 강의하고 있다. 오랜 소망이었던 서예와 한학을 다시 공부하게 됐다. ‘난정서’를 접하게 된 이후 국내외 문헌을 찾아가며 난정서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저서로는 가 있다.
우리나라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외교 및 정국이 급속도로 정상화되어가고 있다. 한편 내각이 구성되는 과정에서 새 대통령은 상당히 광범위한 인재풀을 활용하는 모습이다. 인재 등용에 관한 한 역사상 가장 과감했던 이가 바로 삼국지의 영웅, 조조(曹操)다. 그는 인재를 구하는 칙령을 세 차례나 발표했는데 특기할 점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능력 제일주의로 사람을 뽑을 뿐 그 사람의 청빈함이나 덕성 등은 보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예컨대 그는 건안(建安) 8년에 발표한 경신령(庚申令)에서 이러한 과감한 인재 등용 시책을 펴는 이유에 대해 ‘治平尙德行 有事賞功能(태평성세에는 덕성을 봐야 하지만, 난세에는 재능이 우선한다)’는 말로 비상시국 때문임을 설명하고 있다. 조조는 또한 건안(建安) 15년(AD 210), 그 유명한 ‘구현령(求賢令)’을 발표한다.
“예로부터 천명을 받아 임금이 되었거나 또는 중흥(中興)한 임금 중에서, 일찍이 현인(賢人), 군자(君子)를 얻어 그들과 더불어 천하를 다스리지 않은 자가 있었던가! 그러나 현인을 구하려 애를 써도, 그들이 은거해 있는 곳을 나오지 않는다면 만날 수 없으니, 뛰어난 사람은 구할 수 없도다. 지금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아니하니, 특히 현인을 급히 구해야 할 시기이라. … 만약 반드시 청렴한 선비라야 등용할 수 있다면, 제 환공은 어떻게 (관중(管仲)을 등용해) 세상을 제패했겠는가? 지금 천하에 (강태공(姜太公)처럼) 갈옷을 입었으나 옥 같은 마음을 품고서 위수(渭水)가에서 낚시질하는 자가 없겠는가? 또 (한(漢) 고조(高祖)의 책사 진평(陳平)처럼) 형수를 도적질하고 금을 받았지만, (자신을 알아보고 천거한) 위무지(魏無知)를 만나지 못한 자가 없겠는가? 그대들도 나를 돕고자 한다면, 비록 흠결이 있는 자라도, 오직 재능만 보고 천거하여, 내가 그들을 얻어 기용할 수 있도록 하라.”
조조 이전에도 인재를 구하는 칙령들은 한(漢) 무제(武帝)의 ‘현량조(賢良詔)’ 등 한(漢)나라 때부터 계속 발표되어왔다. 그러나 오직 능력 하나만을 보겠다는 과감한 인재 등용 정책은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소설 에는 조조가 지었다는 그 유명한 ‘단가행(短歌行)’이란 시(詩)가 실려 있다. 이 시를 정말 조조가 지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여기서도 그 중심 내용은 인재 등용이다. 이러한 과감한 인재 등용 정책으로 조조는 삼국을 통일하는 기초를 닦아놓게 되는 것이다. 무제기(武帝記)에서는 조조의 용인술을 높게 평가하며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평(評)하여 말한다: 한말(漢末) 천하에 대란이 일어 영웅호걸들이 아울러 봉기하여, 원소(袁紹)가 4주(四州)에서 호랑이처럼 군림하니 대적할 자가 없었으나, 태조(太祖, 조조)가 계략과 지모를 내어 천하를 독려하였다. … 태조는 관직을 재능에 따라 수여하되 각각 그 그릇에 맞게 썼으며, 사사로운 감정을 억제하고 냉정한 계산에 임하매 옛 허물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마침내 황제의 정무[皇機]를 총괄하는 자리에 오르고, 대업을 이루어낸 것은 그의 밝은 지략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니, 가히 비상(非常)한 인물로 세대를 뛰어넘는 웅걸, 즉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 이를 만하다.”
>>하태형(河泰亨) 전 현대경제연구원장
서울대 경영대 졸업, 뉴욕주립대 경제학박사. 수원대 금융공학대학원장 역임.
늦은 봄을 노래한 시 중 필자가 좋아하는 시는 두보(杜甫)의 ‘곡강(曲江)’이다. 이 시는 두보가 47세 되던 AD 758년 늦은 봄, 좌습유(左拾遺) 벼슬을 할 때 지은 작품이다. 좌습유라는 벼슬은 간언(諫言)을 담당하던 종8품의 간관(諫官)이다. 당시 그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재상(宰相) 방관(房琯)이란 사람이 죄목을 뒤집어쓰고 파면되는 일이 발생하자 ‘죄가 가벼우니 대신을 파직함은 옳지 못합니다(罪細,不宜免大臣)’라는 상소를 올린다. 그러자 숙종(肅宗)은 매우 노하여 삼사(三司)를 시켜 두보를 문초하게 한다. 이때 재상 장호(張鎬)가 얘기하길, ‘(간관인 두보가 간언한 것을 가지고) 죄를 묻는다면 그것은 간관의 언로를 막는 것입니다(甫若抵罪,絕言者路)’라고 하여 이 일은 일단락된다. 그러나 황제의 눈 밖에 난 두보는 여름이 되자 결국 화주(華州) 사공참군(司功參軍)으로 좌천된다. 이 시는 당시 황제의 눈 밖에 난 두보가 좌천되기 이전,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늦봄에 실어 읊은 걸작이다. 2수 중 첫 번째 시의 전련(前聯)을 먼저 살펴보자.
一片花飛減却春(일편화비감각춘)
한 조각 꽃잎이 날려도 봄빛이 줄어드는데
風飄萬點正愁人(풍표만점정수인)
만 점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니 정녕 사람을 시름 잠기게 하네
且看欲盡花經眼(차간욕진화경안)
장차 다 지려는 꽃잎, 눈앞을 스쳐가는 것을 보노니
莫厭傷多酒入脣(막염상다주입순)
몸이 많이 상했다 하여 술 마시는 것을 마다할 수 있으리오…
‘한 조각 꽃잎이 날려도 봄빛이 줄어든다’는 의미의 ‘일편화비감각춘(一片花飛減却春)’은 참으로 뛰어난 명구로서 역대로 수많은 문인들에 의해 애송되어왔다. 이 구절은, 대조를 이루는 ‘하나의 나뭇잎이 떨어지는 걸 보고도 천하에 가을이 왔음을 안다’라는 의미의 ‘일엽낙지천하추(一葉落知天下秋)’ 구절과 더불어 각각 봄이 짐과 가을이 옴을 읊은 천고의 절창으로 꼽힌다. 황제의 신임을 잃은 신세에, 떨어지는 꽃잎을 보니 어찌 심란하지 않았겠는가? 마지막 구절을 보면 ‘몸이 이미 많이 망가졌다(傷多)’는 표현을 통해 심적 고생이 이미 건강을 해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시를 짓고 난 뒤 두보는 같은 제목의 두 번째 시를 짓는다. 이 시의 전련에는 ‘인생칠십고래희’라는 유명한 시구가 등장한다.
朝回日日典春衣(조회일일전춘의)정에서 돌아오면 날마다 봄옷을 저당 잡혀
每日江頭盡醉歸(매일강두진취귀)매일 강가에서 만취하여 돌아온다
酒債尋常行處有(주채심상행처유)외상 술값이야 으레 가는 곳마다 있기 마련…
人生七十古來稀(인생칠십고래희)사람은 예로부터 70년 살기도 드문 일 아니겠는가
이 시를 보면 그는 더욱 심해진 마음고생을 술로 풀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차피 칠십도 못 사는 인생, 몸을 아낄 필요가 있겠냐고…. 이어지는 후련(後聯)이다.
穿花蛺蝶深深見(천화협접심심견)꽃을 파고드는 호랑나비 깊숙이 보이고
點水蜻蜓款款飛(점수청정관관비)물 위를 스치는 잠자리 사뿐히 날아오르네
傳語風光共流轉(전어풍광공류전)말을 좀 전해다오, (우리 인생과) 함께 흘러가는 경치에게…
暫時相賞莫相違(잠시상상막상위)“잠시나마 함께 즐기면서 서로 거스르지 말자고”
두보는 자신이 존경했던 도연명의 형식을 빌려 아름다운 봄날 경치에 대한 자신의 헌사를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하태형(河泰亨) 전 현대경제연구원장
아호는 양우養愚. 195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와 KAIST 대학원에서 경영학과 경영과학을 전공했다. 미국으로 유학하여 뉴욕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수원대 금융공학대학원에 교수로 복귀하여 강의하고 있다. 오랜 소망이었던 서예와 한학을 다시 공부하게 됐다. ‘난정서’를 접하게 된 이후 국내외 문헌을 찾아가며 난정서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저서로는 가 있다.
사람이 가잘 절절한 아픔을 느낄 때는 바로 사랑하던 사람을 잃은 순간이 아닐까? 옛날 중국에서는 엄격한 유교적 전통이 살아있어 남녀 간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을 천시했다. 그러나 아내가 죽었을 경우만큼은 그 절절한 심정을 마음껏 표현할 수가 있었는데, 이를 도망시(悼亡詩)라 불렀다. 이 도망시의 원조인 시가 바로 서진(西晉)시대 반악(潘岳)의 3수다. 반악은 자가 안인(安仁)으로, 서진시대 육기(陸機)와 더불어 쌍벽을 이룬 최고의 문인이었다.
중국 역사상 가장 빼어난 미남으로 보통 두 사람을 꼽는데, 한 사람은 전국시대 초(楚)나라 삼려대부 굴원(屈原)의 제자인 송옥(宋玉)이며, 다른 한 사람은 후세에 반안(潘安)이란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는 이 풍운아다. 반악은 미남에다가 좋은 가문 출신,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혀 재모쌍전(才貌雙全)의 인재로 불렸는데, 당시 권문세가였던 서진(西晉)의 외척인 양씨(楊氏) 집안과 혼인을 하게 된다. 금슬도 좋았는데 하늘이 시기해서인지 그만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게 되었다. 그 애절한 슬픔을 노래한 시가 바로 3수이며 그의 대표작처럼 불리고 있다. 이후 아내를 잃은 슬픔은 이를 본떠 ‘도망(悼亡)’, 벗을 잃은 슬픔은 ‘도붕(悼朋)’ 등으로 표현했다. 3수 중 첫 번째 시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을 소개해본다.
荏苒冬春謝(임염동춘사)
들깨 무성하다 겨울 봄에 그 자취를 감추고,
寒暑忽流易(한서홀류역)
계절은 홀연히 다시 바뀌니,
之子歸窮泉(지자귀궁천)
그댄 황천(黃泉)으로 돌아가,
重壤永幽隔(중양영유격)
아홉 층 깊은 땅 아래 영원히 격리되는구려.
작가는 원강(元康) 8년 초겨울, 아내 양씨가 병을 얻어 원강 9년 봄에 장사를 지내게 되는 과정을 첫 번째 구에서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두 번째 구는 망자(亡者)를 위해 복상(服喪)한 지 다시 1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간 것을 표현하고 있다. 복상기간도 끝나 탈상(脫喪)을 하게 되니, 소위 사자(死者)가 망자(亡者)로 바뀌는 슬픔을 ‘영원한 격리[永幽隔]’란 단어로 그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워낙 유명한 시여서, 첫 구절에 나오는 ‘임염(荏苒)’이란 단어는 후대에 도연명과 두보 등 역대 유명 시인들이 다투어 인용을 했고, 이후로는 그 의미가 본래의 ‘들깨가 무성하다’는 뜻에서 1~2구의 전체 의미인 ‘세월이 덧없이 흘러간다’는 의미로 사용하게 된다.
如彼翰林鳥(여피한림조) 마치 저 숲을 나는 새처럼,
雙栖一朝隻(쌍서일조척) 쌍으로 살다 하루아침에 홀로 되고,
如彼遊川魚(여피유천어) 저 내에서 헤엄치는 고기처럼,
比目中路析(비목중로석) 나란히 다니다가 도중에서 헤어진 듯하네
중국의 전설에 의하면, 동쪽 바다에 비목어(比目魚)가 살고 남쪽 땅에 비익조(比翼鳥)가 사는데 비목어는 눈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두 마리가 좌우로 달라붙어야 비로소 헤엄을 칠 수 있는 물고기이고, 비익조는 눈과 날개가 각각 한 개밖에 없어 암수가 좌우 일체가 돼야 비로소 날 수 있는 새라 한다. 모두 남녀의 떨어지기 힘든 사이를 의미하는데, 작가는 이 단어를 인용해 떨어질 수 없는 배우자를 잃은 자신의 고통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중국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에는 심원(沈園)이란 명소가 있다. 중국 남송시대 때 부자였던 심씨 소유의 아름답고도 거대한 정원인데, 이 정원 입구에는 계란 모양의 둥근 바위가 둘로 쪼개져 있는 조형물이 서 있다. 가서 살펴보면 ‘단운(斷雲)’이란 행서체 글자가 한 자씩 새겨져 있다.
이게 무슨 뜻일까? 바로 부부간의 정을 뜻하는 ‘운우지락(雲雨之樂)’을 끊어버린다는 뜻으로, 사랑하는 부부였지만 헤어지지 않을 수 없는 슬픈 사연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곳은 바로 중국 남송시대의 유명한 애국시인 육유(陸游, 1125~1210)의 애절한 사랑의 일화가 서려 있다. 육유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같이 성장한 당완(唐婉)이라는 이종사촌 동생이 있었다. 어렸을 때는 소꿉친구로 지내다가 미모와 재색을 겸비한 규수로 성장하자 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육유의 나이 20세 때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육유가 과거시험에 자꾸 낙방하자 며느리 탓이라 여기게 된다. 자식도 못 낳고, 시아버지의 갑작스런 사망. 이런 상황들이 모두 며느리를 잘못 들여 생긴 일이라고 생각한 시어머니는 급기야 둘을 강제로 떼놓는다. 모친의 성화에 시달리다 못한 육유는 이혼을 가장하고 인근에 당완을 숨기고는 몰래 만나는 행각을 이어가지만 곧 들통이 나고, 결국 모친이 정해준 왕씨 성의 여인과 재혼을 한다. 어쩔 수 없게 된 당완도 친정어머니의 권유로 조사정이라는 사람에게 개가(改嫁)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헤어진 두 사람이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는데, 육유가 27세 되던 봄이었다. 육유는 심원에 놀러왔다가, 같은 날 봄나들이를 온 당완을 만나게 된다. 당완의 낯빛이 변하는 것을 본 남편 조사정은 사정을 물었고, 당완이 사실대로 말하자 조사정은 대인의 풍모를 보이며 술과 안주를 준비한 뒤 육유를 초대해 두 사람을 만나게 해준다. 그러나 서로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육유는 짧은 만남을 뒤로 한 채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되는데, 그 비통한 마음을 담아 이 라는 시를 벽에 써두고 떠난다. 이듬해 이 정원에 다시 놀러온 당완은 이 시를 보고 같은 제목의 시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그리고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컸는지 시름시름 앓다가 일 년 뒤 세상을 떠나고 만다. 당완의 죽음을 알게 된 육유는 큰 상처를 지닌 채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 심원을 찾아와 당완을 그리는 시를 지었는데, 그중 유명한 작품이 75세 되던 해 지은 라는 시다.
城上斜陽畵角哀(성상사양화각애) 성곽에 노을이 지니 들리는 뿔피리소리 애절한데,
沈園非復舊池臺(심원비복구지대) 심원은 옛날의 연못과 누대로 돌아갈 수 없구나.
傷心橋下春波綠(상심교하춘파록) 서로 마음 아파했던 그 다리 아래 봄의 물결은 푸른데,
曾是驚鴻照影來(증시경홍조영래) 그때 놀란 기러기 같던 그녀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스치네.
夢斷香消四十年(몽단향소사십년) 꿈도 없어지고 향도 사라진 40년…
沈園柳老不吹綿(심원유로불취면) 심원의 버들도 늙어 버들 솜도 날리지 않는구나.
比身行作稽山土(차신행작계산토) 이 몸도 곧 죽어 회계산(會稽山) 흙이 되겠지만,
猶弔遺蹤一泫然(유조유종일현연) 그녀의 남은 옛 자취 찾으면서 한없이 눈물 흘리노라.
>>하태형(河泰亨) 전 현대경제연구원장
서울대 경영대 졸업, 뉴욕주립대 경제학박사. 수원대 금융공학대학원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