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벤처기업부는 24일 전북 전주 남부시장 내 문화공판장 작당에서 '글로컬 상권 프로젝트' 출범식을 개최했다.
중소벤처기업부(이하 중기부)는 지난 4월 지역 상권을 국내외에서 찾는 글로컬 상권으로 변경하는 프로젝트 추진 계획을 발표했다. 이어 지난달 이를 실행할 글로컬 상권 창출팀 3곳과 로컬브랜드 상권 창출팀 5곳을 선정했다.
이날 출범식에서는 ‘지역의 미래 글로컬, 소상공인의 미래 라이콘’이라는 주제로 글로컬·로컬브랜드 상권팀들의 청사진을 발표했다.
이어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과 글로컬·로컬브랜드 선정지 소재 8개 지자체, BC카드는 글로컬·로컬브랜드 상권 육성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또한 ‘지역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 토크콘서트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토크콘서트에서는 오영주 중기부 장관이 직접 패널로 나서 글로컬 창출 사업을 기획하게 된 배경을 소개했다.
이번 행사는 출범식을 시작으로 오는 27일까지 나흘간 로컬콘텐츠 대학 콘퍼런스, 로컬브랜드 토크, 플리마켓, 문화공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함께 진행될 예정이다.
공공·민간 함께 글로컬 만들어갈 것
중기부는 지난 골목상권 활성화 정책을 돌아보고, 민간의 성공사례를 교훈 삼아 세 가지 정책 원칙으로 글로컬 상권 프로젝트를 추진할 방침이다.
먼저 민간 중심, 로컬크리에이터 중심으로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이를 정부와 지자체가 지원하는 구조로 진행할 예정이다.
다음으로 특색 있는 콘텐츠 즉,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데 집중한다. 사람을 찾아오도록 만드는 창의적 소상공인을 기업가형으로, 나아가 글로컬 브랜드로 키워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만들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글로컬 상권을 지원하는 공공·민관 원팀을 구성해 지원한다. 중기부는 올해 초 250억 원 규모의 라이콘 펀드를 신설하고, 국민은행과 협업해 1000억 원 규모 특별 보증 프로그램을 만든 바 있다. 앞으로 글로컬 상권에 공공뿐 아니라 민간 자금도 유입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오영주 중기부 장관은 “취임 후 골목상권과 전통시장을 방문하며 다양한 소상공인을 만났고, 창의성으로 상권 활력을 불어넣으며 지역에서 끈끈한 커뮤니티를 만들어가는 로컬크리에이터들에게 큰 인상을 받았다”면서 “지방자치단체의 절반에 가까운 105개 시군구가 인구 소멸 위험 지역인 현 상황에서 로컬크리에이터의 역할은 너무나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오 장관은 “소상공인이 단순히 정부의 지원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자립하는 소상공인으로 성장해 나가는데 로컬크리에이터가 핵심적 역할을 해나가고 있어 글로컬 상권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로 결심했다”면서 “창의적 소상공인을 지역의 중심점으로 만들고 이들이 기존 상인, 주민을 연결하는 선이 되어 글로컬 상권이라는 면으로 성장한다면 각자 영역도 확장되지만 지역 경제에 새로운 등대 같은 존재가 될 거라 확신한다”고 덧붙였다.
우범기 전주시장 역시 “그동안 많은 지역 상권을 위한 정책을 해왔지만, 성공하기 쉽지 않았다”면서도 “이제는 성공할 기회가 생기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함께 잘 해나가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로컬 상권의 핵심 브랜드
중기부는 글로컬 상권 창출팀 3곳과 로컬브랜드 상권 창출팀 5곳을 선정했다. 글로컬 상권 창출팀으로는 전주 상권에서 활동하는 ‘크립톤’, 수원 상권에서 활동하는 ‘공존공간’, 통영 상권에서 활동하는 ‘로컬스티치’가 선정됐다.
로컬브랜드 상권 창출팀으로는 제주 ‘카카오패밀리’, 양양 ‘라온 서피리조트’, 충주 ‘보탬플러스’, 강릉 ‘더루트컴퍼니’, 함창 ‘아워시선’이 선정됐다.
글로컬 상권 프로젝트 심사위원을 맡은 오승훈 공익마케팅스쿨 대표는 “글로컬 상권 프로젝트를 정의하자면 지역을 살리려는 청년과 서울로 떠나려는 청년의 진검승부가 아닐까 생각한다”면서 “이번에 선정된 8팀이 ‘그게 되겠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을 텐데, ‘세상의 기준으로 가늠할 수 없는 사람들이 세상에 없던 것들을 만든다는 말’을 기억하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이어 “사소해 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공감하고 잘 들어 토네이도와 같은 혁신을 불러일으키면 좋겠다”면서 “사고 싶은 지역을 넘어 살고 싶은 지역으로의 자부심을 심어주는 기회가 되길 바라고 응원한다”고 덧붙였다.
글로컬 상권 창출팀으로 선정된 ‘전주 글로컬 소셜 클럽’을 운영하는 양경준 크립톤 대표는 “1단계 글로컬 관광 상권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다양성·개방성·연결성에 창조적 자본을 증가시키는 글로벌 관계 인구 상권, 더 나아가 스타트업과 지역을 동시에 엑셀러레이팅하는 글로컬 창조 상권까지 3단계로 발전하고자 하는 성장 전략을 세웠다”면서 “경제 협력 창조와 혁신 커뮤니티로 성장하는 도시로 전주 브랜드를 업그레이드 하는 것이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글로컬 상권 창출팀으로 선정된 ‘수원 행궁동 신도시 프로젝트’를 이끈 박승현 공존공간 대표는 “올해 안에 50개 팀 네트워킹을 통해 1000억 원 규모의 로컬 경제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면서 “창의적 공동체가 성장하는 행궁동을 응원해주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로컬브랜드 상권 창출팀으로 선정된 ‘강릉 미드타운 프로젝트’를 운영한 김지우 더루트컴퍼니 대표는 “하고자 한다”면서 “강릉로컬발전소 거버넌스 중심으로 추후 자율상권기구를 결성해 자생적인 지속 가능 상권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로컬브랜드 상권 창출팀으로 선정된 제주에서 ‘모모마을 세하리’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김정아 카카오패밀리 대표는 “이제는 하나의 창업을 위해 하나의 마을이 함께 움직여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면서 “우리의 임팩트, 열정, 헌신, 비즈니스 아이템은 모두 우리의 마을로부터 나온다는 슬로건으로 리임팩트 창업 캠프를 로컬브랜드 창출 사업에서 진행해보고자 한다”고 발표했다.
“제 월급은 아이들이 성장하는 걸 보는 거예요. 나를 살아가게 하는 이유죠.”
미국 플로리다주에 있는 베어크릭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B 할머니’로 불리는 바바라 버넷(81) 씨가 플로리다 지역방송 폭스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녀는 위탁 조부모 프로그램(Foster Grandparents Program)에 참여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다양한 정책들로 고령자의 사회참여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연방정부가 주도하는 아메리코프 시니어즈(AmeriCorps Seniors)가 대표적이다. 55세 이상만 지원할 수 있으며 위탁 조부모 프로그램, 시니어 동반자 프로그램, 퇴직 봉사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1965년부터 시작된 위탁 조부모 프로그램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영역을 넓히며 더 많은 고령자의 참여를 이끌고 있다. 고령 자원봉사자와 아이들을 1:1로 연결해 주로 교육 시설에서 봉사가 이뤄진다. 고령자는 아이들이 일상에서 ‘운동화 끈 묶기’ 같은 작은 것부터 성취할 수 있도록 돕는다. 정서적으로 기댈 수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주는 것이 목표다.
프로그램 자원봉사자는 일주일에 최소 15시간에서 최대 40시간까지 봉사할 의무가 있다. 현장 투입 전에는 아이들을 교육하는 데 필요한 훈련을 받는다. 이후 현장에 투입되면 사고재해보험에 자동 가입되며, 식사비·교통비 같은 부대 비용과 시간당 3달러의 활동비를 받는다.
55세 이상이면서 연간 수입이 약 2만 5520달러(약 3506만 원) 미만이어야 지원할 수 있다. 프로그램 참여로 받는 소득은 미국의 아르바이트 시간당 시급 13달러에 비하면 아주 낮은 수준이지만, 공식 소득으로 포함하지 않아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고 다른 사회보장 정책에 참여하는 데도 지장이 없다.
고령자들은 아이들과 꾸준히 시간을 보내면서 보람을 느낀다. 훈련 과정을 거치며 새로운 것을 익힌다는 성취감도 얻는다. 외로움과 고립감이 해소될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 이바지한다는 뿌듯함까지 얻어가는 것. 오프라인 활동을 할 수 없었던 코로나19 기간에는 온라인 프로그램이 개발됐다. 정부 지원으로 컴퓨터와 프로그램 활용법을 배워 장거리에서도 아이들을 지도할 수 있게 됐다. 이후 봉사활동 지원자는 더욱 늘었으며, 교육 인프라가 확충되지 않은 지역의 아이들도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연방정부는 2022년 전국 각지에서 오찬 행사를 열고 3년 넘게 일한 자원봉사자에게 특별 표창을 수여했다. 2024년 6월 뉴욕 브룸 카운티는 최근 2년간 활동한 자원봉사자들을 모아 축하하는 자체 행사를 열었다. 브룸 카운티 위탁 조부모 프로그램 책임자인 프랜시 키프(Francie Keefe) 씨는 폭스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은퇴 후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지만, 브룸 카운티 아이들을 돕는 데 헌신하는 자원봉사자들은 아이들에게 조부모와 같다”며 “지역사회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진심으로 믿는다”는 소감을 전했다.
이처럼 미국에서는 고령자를 대상으로 한 다양한 자원봉사 프로그램을 개발해 이들이 사회 일원으로서의 역할을 오래도록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이는 또한 지역사회에 도움을 줌으로써 자연스럽게 고령자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고립감·외로움 같은 정서적 문제도 해결하고 있다.
◇민간에서 운영하는 고령자 자원봉사 프로그램
코제너레이트(CoGenerate)
글로벌 비영리기관으로, 고령자가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세대와 교류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앙코르 팔로십’은 사회적 벤처기업, 협동조합 등에 고령자를 연계해 6~12개월 동안 일하게 하고 생활비를 지원한다. ‘제너레이션 서빙 투게더’는 청년, 중장년, 노년층 자원봉사자가 모여 지구 온난화, 사회적 고립 등 전 세대를 아우르는 공통 이슈에 대한 문제 해결 방법을 함께 개발하는 프로그램이다.
AARP 익스피리언스 코프(Experience Corps)
미국은퇴자협회(AARP)에서 운영하는 지역사회 기반 자원봉사 프로그램이다. 20개 이상 도시에서 3만 명 이상의 아동과 고령 자원봉사자를 연결하고 있다. 고령 자원봉사자는 아동의 읽기 능력을 키워주는 강사 역할을 한다.
은퇴경영자봉사단(Service Corps of Retired Executives)
스코어(SCORE)라 불리는 이 봉사단은 미국 전역에 걸쳐 활동하는 비영리기관이다. 현직에 있거나 은퇴한 사업주 또는 기관의 고위 임원 근무 경력이 있는 자원봉사자가 중소 자영업자나 예비 창업주에게 무료로 경영 관련 도움을 제공한다. 연령 제한을 두지는 않지만 대부분 은퇴한 사업주들이 참여하고 있다.
출처 국제사회보장리뷰 2023년 가을 26호 ‘미국의 고령자 자원봉사 프로그램 현황과 시사점’
자생한방병원이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나라를 위해 헌신한 선열들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고자 현충원에서 묘역정화 봉사활동을 펼쳤다.
18일 자생의료재단에 따르면, 지난 17일 자생의료재단 신민식 사회공헌위원장(잠실자생한방병원장)을 비롯한 임직원 및 봉사단 30여 명은 서울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았다. 봉사단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을 위한 묵념을 시작으로 20번 묘역의 묘석을 닦고 주변 쓰레기, 잡초 등을 수거하며 환경정화 활동을 펼쳤다. 30도에 육박하는 더위임에도 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정성을 다해 구슬땀을 흘리는 모습이었다.
자생의료재단은 현충원 묘역정화 봉사활동을 2017년부터 매년 진행해 오고 있다. 아울러 국가유공자와 6·25전쟁 참전유공자 및 그 가족들을 위한 의료·주거지원, 장학사업 등 다양한 공헌 활동도 활발히 펼치는 중이다. 지난 4월에는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및 독립유공자 후손을 위한 3억 원 상당의 의료지원과 1억 원 상당의 생활물품 지원 협약을 국가보훈부와 체결한 바 있다.
자생의료재단 박병모 이사장은 “이번 봉사활동을 통해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을 기억하고 그 희생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는 뜻깊은 기회가 되었다”며 “자생의료재단과 자생한방병원은 앞으로도 국가를 지킨 영웅들과 가족들이 예우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앞장설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집의 제일 높은 곳 조그만 다락방. 넓고 큰 방도 있지만 난 그곳이 좋아요. 높푸른 하늘 품에 안겨져 있는 뾰족지붕 나의 다락방 나의 보금자리.’ 1970년대 활동했던 혼성 포크 듀오 ‘논두렁밭두렁’의 대표곡 ‘다락방’의 가사다. 이 노래를 알고 있다면 그들이 부부였다는 걸 기억할 테다. 두 사람은 부부의 연으로 가꾼 보금자리에서 더 많은 인연을 보듬어 가족으로 맞았다. 남편 김은광은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아내 윤설희는 여전히 그 보금자리에 남아 사랑의 온기를 더하고 있다.
‘다락방’을 비롯해 ‘외할머니댁’, ‘영상’ 등의 곡으로 사랑받았던 논두렁밭두렁. 종종 방송이나 무대에 나오긴 했지만, 이전처럼 활발한 소식을 듣긴 어려웠던 그들이다. 가수로서의 행보는 그러하나, 사실 부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온 터였다. 쉼 없는 지난날을 한눈에 보여주는 건 아내 윤설희 작은도서관 더브릿지 관장의 SNS 프로필이다. 논두렁밭두렁 멤버로 시작해 다리The Bridge청소년사업가지원센터 센터장, 사단법인 땡큐 이사장, 별빛내리는마을과 봄채 아동 그룹홈 설립자, 사랑하는교회 목사 그리고 작은도서관 더브릿지 관장까지. 적혀 있지는 않지만 음악학원과 24시 어린이집도 운영했다. 그런데 음악학원을 제외하면 가수와 연계된 활동은 찾아보기 어렵다. 가수였던 그들이 이렇듯 의외의(?) 근황을 알리게 된 데에는 아내 윤 관장의 뜻이 컸단다.
“첫딸을 낳고 가수 활동은 그만뒀어요. 어려서부터 꿈이 현모양처나 교사였는데, 그 영향인지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쳐보면 어떨까 싶더군요. 작은 기타 학원을 운영하다가 종합적으로 음악 교육을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연 방송음악학원이 꽤 인기를 끌었는데, 어느 날 보니 엄마들 사이에서 ‘값비싼 학원’으로 알려져 있더라고요.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짜느라 스무 명 넘는 강사를 초빙한 데다 건물 임대료까지 냈으니, 교육 원가 대비 수업료가 높지는 않았거든요. 어쨌거나 내가 원했던 결과는 아니었어요. 차라리 어린이집을 운영하면 국가의 보조를 받아 더 부담 없는 환경에서 아이들을 교육하지 않을까 싶었죠. 그렇게 어린이집을 열게 됐습니다.”
갈 곳 없는 아이들, 보금자리를 내어주다
어린이집을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IMF가 터졌다. 가장들은 회사 밖으로 내몰렸고, 집집마다 재정난에 시달렸다. 어린이집을 운영하던 당시 그런 현실의 아픔을 고스란히 마주했던 윤 관장이다.
“IMF로 해체되는 가정이 늘어가는 걸 실감했어요. 낮뿐 아니라 밤에도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이 생겨났죠. 그러면서 24시 어린이집을 떠올렸는데, 막상 우리나라에 몇 곳 없는 것 같더라고요. 저도 지방 공연을 다니면서 아이들 맡기는 문제로 고민했던 경험이 있던지라 고충을 해결해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24시 어린이집을 개원했습니다. 당시 벼룩시장에 ‘무료탁아상담’이라는 1단짜리 광고도 냈죠. 말 그대로 무료로 탁아 상담을 했는데, 그러면서 정말 많은 가정에 어려움이 있다는 걸 한 번 더 알게 됐습니다.”
그나마 24시 어린이집에라도 오는 아이들은 다행이었다. 그곳마저 다닐 형편이 안 되는 아이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남편의 폭력에 시달려 도망 나온 엄마와 아기, 생활고로 조부모에게 떠맡겨진 손주들, 호적도 없이 버려진 신생아까지. 저마다 딱한 사정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렇게 논두렁밭두렁 부부는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에게 자신의 보금자리를 내어주기로 결정했다.
“2000년 6월이었어요. 미혼모의 아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우리와 비슷한 일을 하는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러면서 그게 바로 ‘그룹홈’이라는 걸 알게 됐죠. 2003년에 ‘별빛내리는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아동 그룹홈을 설립했고, 10년 후인 2013년엔 여자 아동 그룹홈 ‘봄채’를 설립했습니다. 만든 두 개의 그룹홈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어요.”
2000년 초만 해도 그룹홈이란 개념은 생소했다. 국내에 많지 않은 그룹홈을 운영하는 이들은 대체로 종교인이었는데, 법적 근거가 부족해 이렇다 할 지원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다 2010년대에 이르러 아동공동생활가정(그룹홈) 발전 및 지원에 관한 조례 통과, 아동복지법 개정 등을 통해 관련 지원책들이 속속 생겨났다. 아직도 사회적으로 관심과 지원이 더 필요하지만, 과거 불모지 같았던 때를 생각하면 그나마 형편이 나아진 셈이다. 제 가정도 돌보기 어려웠던 시절, 숱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남편 사업이 부도가 나서 정말 먹고살기 힘든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도 크게 어렵다고 느끼진 못했던 것 같아요.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도 누군가를 위해 작은 일이라도 할 수 있어 행복했죠. 나만 헌신한다고 여겼으면 여태껏 오래 해올 수 없었을 거예요. 결국은 나에게도 보탬이 되고 즐거운 일이었던 거죠. 요 며칠도 하루 세 시간 자고 밤을 꼴딱 새고 하면서 일을 했는데, 피곤하긴 했지만 기쁨이 더 컸어요. 막상 제가 아이들에게 도움을 준 건 얼마 되지 않아요. 오히려 제가 아이들을 통해 성장했고, 많은 걸 이뤘죠. 결국 그 원동력은 이타심보다는 자기실현에 가까웠다고 봐요.”
남편의 유작 ‘사랑해봤나’를 완성하며
여러 아이를 돌봐야 하는 고단한 상황에서도 가장 큰 힘이 돼준 건 남편인 가수 故 김은광이었다. 오래오래 그들의 보금자리에 함께 머물렀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그는 2010년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진단을 받고 1년 만에 이별을 겪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슬퍼할 새도 없이 아이들 챙기는 데 여념이 없었던 윤 관장이다. 그러다 한 번씩 불현듯 찾아오는 남편의 빈자리는 너무도 컸다.
“부랴부랴 애들 밥 먹이고 학교 보내고 나면 그제야 제정신이 들더라고요. 그러면 한바탕 울고 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아이들 챙기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어요. 한번은 운전하고 가는데 길을 잘 모르겠는 거예요. 이럴 때 남편이 있었으면 당장 전화해서 물어봤을 텐데, 그럼 그이가 이렇게 저렇게 가라고 설명해줬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펑펑 쏟았어요. 부부는 반쪽이라고 하는데 그 이상이었구나, 적어도 3분의 2쯤은 되겠구나, 다 내가 해온 일이라 생각했는데 우리 남편 몫이 참 컸구나, 부부가 함께한다는 건 되게 좋은 거였구나 깨달은 거죠. 요즘도 그렇게 불쑥불쑥 남편의 빈자리가 느껴질 때가 있어요.”
최근 윤 관장은 남편의 유작을 하나 발견했다. 연필로 적은 악보였다. 논두렁밭두렁의 노래는 남편이 작곡, 아내가 작사하곤 했는데, 남편이 생전 작곡해둔 노트를 찾은 것이다. 함께 노래하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좋은 노래는 듣자마자 좋은 가사가 생각나곤 했다. 남편의 악보를 피아노로 치다 보니 순간 가사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사가 지어졌고, ‘사랑해봤나’라는 제목의 곡이 완성됐다.
“‘사랑해봤나’ 가사는 그런 내용이에요. 청춘이 빛났던 건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랑의 기억이 있기에 어쩌면 우리는 더 사랑을 원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곡을 지었고, 곧 음원으로도 공개할 예정입니다. 다가오는 4월에는 완성된 곡으로 남편을 위한 추모 공연을 열려고 해요. 근데 한번 불러보니까 음역대가 제가 소화하긴 어렵겠더라고요. 그래서 동생(가수 윤설하)에게 부르라고 했더니 사랑 얘기는 자신과 맞지 않는다며 고사하더군요. 그래서 결국 제가 부르게 됐어요. 저도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지만, 남편을 생각하면서 최대한 잘 불러보려 합니다.”
아이들아, 언제든 편히 찾아오렴
남편의 추모 공연은 그룹홈이 있는 건물 지하의 소리 소극장에서 열린다. 같은 건물에 더브릿지 작은도서관이 있는데, 이 공간을 마련하게 된 건 그룹홈 아이들을 위해서였다.
“우리 애들이 보면 친구가 없더라고요. 학교 가면 엄마 아빠에 대해 얘기할 경우가 많은데 그런 걸 못 하니까. 그러다 보니 자꾸 위축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려워하는 게 안타까웠어요. 마침 여기저기서 후원받은 책도 많겠다, 이걸 잘 모아서 지역사회와 공유하면 어떨까 싶더라고요. 작은도서관이라는 공간에서 아이들과 주민분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교류하길 바랐죠.”
소극장과 작은도서관, 교회와 그룹홈까지 모두 한 건물에 있다 보니 간혹 윤 관장을 건물주라 여기는 이들도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지원금과 후원금이 있긴 하지만, 공간을 유지하고 식솔들을 챙기려면 턱없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윤 관장은 또 다른 형태의 그룹홈을 꿈꾸고 있었다. 바로 노인들을 위한 그룹홈이다.
“제가 부모 역할을 하지만 많이 부족했죠. 아이들 하나하나 눈 맞추고 마음을 어루만져줘야 하는데, 지원금이나 행정적인 업무들 처리하느라 서류 만지는 시간이 많았던 것 같아요. 아이들도 누군가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아야 하는데 사람이 부족하다 보니 쉽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든 생각이 외롭게 홀로 계시는 어르신들을 위한 그룹홈을 만들고, 아이들과 교류하도록 하면 어떨까 한 거죠. 아이들 수만큼 어르신들이 있다면 저마다 충분히 사랑을 독차지할 테니까요. 가능하다면 언젠가 마당 있는 넓은 집을 마련해 그런 꿈을 이뤄보고 싶습니다.”
‘남들이 다 하는 일보다는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을 하자’라는 포부로 지난 20여 년을 달려왔다. 더불어 사는 세상이 비로소 아름다운 세상이라 믿으며, 그런 아름다운 세상에서 더불어 살기를 희망하며 남은 인생도 지금처럼 살아가리라 다짐해본다. 올해로 칠순, 윤 관장 개인만을 생각한 노후의 꿈은 없을지 궁금했다.
“글쎄요. 지금처럼 계속 일하는 게 곧 노후의 꿈이자 준비 아닐까요. 요즘도 그룹홈 아이들을 대형 승합차에 태우고 여행도 다니고 하거든요. 그런 걸 보면 친구들이 이제 힘들 텐데 일을 그만하라 하죠. 근데 저는 오히려 일을 취미로 한다는 기분이에요. 지금이야 여러 역할을 하고 있지만, 정말 늙어서 뭘 못 하겠다 싶은 때가 오더라도 작은도서관 관장은 하려 해요.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서도 도서관 귀퉁이 어딘가에 앉아 책 읽고 있으려고요.(웃음) 한편으론 그룹홈을 떠난 아이들이 종종 찾아오길 바라죠. 이번 설날에도 혹시나 해서 세뱃돈 챙겨 기다렸는데 많이 오지는 않더라고요. 물론 찾아오지 못하는 아이들의 형편도 이해합니다. 다만 살면서 힘들고 외로운 순간, 늘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아이들이 기억해주면 좋겠어요.”
연예인 쫓아다니는 자녀의 등짝을 때려 말리던 여성들이 변했다. 트로트 예능 프로그램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시니어 팬덤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곳엔 반짝 유행도, 반짝 스타도 없었다. 거대한 흐름이 된 시니어 팬덤의 형성 과정과 심리학적 이유를 추적했다.
“최종 보스 컴백 확정.”
“우리는 살았습니다. 행운을 빕니다.”
“컴백하는 그룹 너무 안타깝네요.”
“아, 이런….”
한 틱톡(동영상 공유 플랫폼) 게시물 속 글로벌 K팝 아이돌 팬들의 대화다. 누군가의 컴백 소식에 한 팬은 가슴을 쓸어내렸고, 또 다른 팬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세계 속 K팝 팬들을 웃고 울리는 이는 가수 임영웅이다.
임영웅 컴백 소식은 하나의 밈(Meme, 인터넷 유행 콘텐츠)으로 자리 잡았다. 한 오랜 K팝 팬의 말이다. “임영웅이 컴백하면 ‘숨스밍’(숨 쉬듯 스트리밍)해야 한다는 말이 돌아요. 보통 오후 6시에 음원이 나오잖아요? 첫날에는 아이돌이 1위를 하기도 하는데, 유지는 힘들어요. 어머니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거든요. 임영웅 팬덤의 존재요? 글로벌 K팝 팬들 다 알 거예요. ‘우리 아이돌 그때 컴백하지 않게 해달라’고 비는 걸요.(웃음)”
‘영웅시대’(임영웅 팬덤)로 대표되는 시니어 팬덤의 입지는 상상 그 이상이다. 견제 또는 의식의 대상이 된 그들은 빠르게 대중 시장 지형을 바꿔나가고 있다.
은퇴하는 오팔 세대, 트롯맨을 만나다
광신자를 뜻하는 영어 Fanatic(퍼내틱)에서 따온 ‘Fan’과 영토를 뜻하는 접미사 ‘-dom’의 합성어인 팬덤(Fandom)은 한동안 부정적인 이미지로 소비돼왔다. 백과사전에도 ‘어떤 대중적인 특정 인물이나 분야에 지나치게 편향된 사람들을 하나의 큰 틀로 묶어 정의한 개념’이라 실릴 만큼 인식은 형편없었다. 1990년대 이른바 ‘빠순이’로 불리며 노골적으로 비하받았던 이들에게 오랜 시간 쌓인 편견은 성숙한 팬 문화가 자리 잡고 팬덤 소비가 위력을 드러내면서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젊은 세대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팬덤 문화에 시니어가 본격적으로 합류한 건 2020년 전후로 지목된다. 바로 TV조선 예능 프로그램 ‘내일은 미스트롯’과 ‘내일은 미스터트롯’ 시즌1이 방영된 시점이자 ‘오팔(OPAL) 세대’가 트렌드로 부각된 시기다.
오팔이란 활기찬 인생을 살아가는 노년층(Old People with Active Life)의 약자로, 2000년대 초반 일본에서 처음 쓰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태어난 1차 베이비붐 세대를 대표하는 ‘58년 개띠’와 발음이 같아, 베이비붐 세대를 중심으로 하는 5060 액티브 시니어를 지칭한다.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는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오팔 세대의 특징을 이렇게 정리했다. “탄탄한 경제력과 안정적인 삶을 기반으로 은퇴 후에도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여가생활을 즐기며,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세대. 2010년 즈음 노동 시장에서 은퇴하기 시작한 이들은 2020년을 기점으로 생산가능인구(15~64세)에서 고령층(65세 이상)으로 접어들었다. 때마침 막이 오른 트로트 예능 프로그램은 시니어 팬덤이라는 전에 없던 문화를 만들어낸 기폭제가 됐다.
중장년 여성이 팬덤이 된 진짜 이유
시니어 팬덤이 써낸 기록은 역대급이다. 그중에서도 2020년 방송된 ‘내일은 미스터트롯’ 시즌1은 독보적이다. 2011년 종합편성채널 출범 이후 아무도 넘지 못했던 ‘마의 시청률’ 30%를 깨며 최고 시청률 35.7%(닐슨코리아 전국 유료 가구 기준)를 기록했다. 분당 최고 시청률은 38.5%에 달했다. 최종 결선 7인 중 최종 우승자를 가리는 문자 투표에는 773만 1781표가 쏟아졌다.
광풍은 식지 않고 있다. 지난 10월, 임영웅은 새 디지털 싱글 ‘Do or Die’ 발매와 동시에 국내 차트를 석권했고, 김호중은 영화 ‘바람 따라 만나리: 김호중의 계절’로 예매율 1위에 올랐다. 장민호는 ‘호시절(好時節): 민호랜드[MIN-HO LAND]’ 서울 공연 티켓을 예매 오픈과 동시에 매진시켰다.
심리학자 김은주 박사는 이를 “일대 특이 현상”이라고 정의했다. “한마디로 일본의 ‘욘사마 신드롬’(배우 배용준이 이끈 2000년대 초중반 한류 붐)과 같아요. 우리나라에서 평행이론처럼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김 박사는 그 기저에 중장년 여성들의 복합적인 심리가 깔려 있다고 말한다. “오팔 세대 여성들은 희생의 아이콘과 같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5000달러가 되기까지 그들 역시 엄청난 공을 세웠어요. 남성은 경제활동을 하고, 여성은 육아를 담당했지요. 아무리 뛰어난 여성이라도 대개는 가정에서 살림을 담당해야 했던 게 지금의 60대 여성입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아이도 키우고, 부모 봉양도 마치고 나니 ‘빈집 증후군’ 같은 게 생긴 겁니다. 뒤돌아보니 사회적 권리도, 힘도, 소속감도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거예요. 인생을 즐기지도 못했는데 말이죠.”
치열하게 살아온 뒤 남은 주름진 얼굴과 아무도 몰라주는 헌신. 그 우울과 불안 그리고 헛헛함을 마주했을 때 등장한 것이 장르적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음악을 하는 스타라고 김은주 박사는 분석한다. 중요한 건 ‘트로트’가 아니라 ‘스타’라는 것이다. 시니어 팬덤이란 사회적 통념에 맞춰 사느라 돌보지 못했던 욕구를 스타를 통해 발견하고 의식적으로 찾아가는 과정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김 박사는 시니어 팬덤이 자체 미디어 교육을 통해 조직적으로 스타를 지원하고, 아예 팬덤 이름으로 기부와 봉사를 하는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 가능하다고 했다. “시니어 팬덤은 단순히 좋아하는 게 아니라 길러냅니다. 1등을 만들고, 선한 영향력을 미치려고 하지요. 그렇게 생애 첫 소속감과 성취감을 느낍니다. 그동안 희생만 했다는 것에 대한 보상 심리가 작용하는 거예요. 심리학적으로는 매슬로의 인간 욕구 5단계 이론 중 3단계(애정과 소속의 욕구), 4단계(존중 욕구)가 함께 충족되는 행위에 해당합니다.”
김은주 박사는 시니어 팬덤 활동이 결국 매슬로의 인간 욕구 5단계 이론 중 5단계(자아실현)로 이끈다고 설명했다. 임영웅 팬을 자처하는 그는 부친을 잃은 슬픔을 신간 ‘영웅앓이’를 집필하며 이겨냈다고 했다. 김 박사의 말이다. “사실은 다 스스로를 위해 하는 행동이에요. 행복해지기 위해서요.”
국민 모두 행복하기를 꿈꾸며 사회·복지·의료 분야에서 평생을 달려왔다. 2021년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 자리에서 퇴임한 뒤에도 그 꿈은 여전하다. 여유 부릴 새 없이 이듬해 전문가들과 함께 재단법인 ‘돌봄과 미래’를 설립했다. 우리 사회가 양극화, 저출산, 고령화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앞장서기 위해.
김용익 이사장은 대학 시절부터 지역사회 의료에 관해 무수한 경험을 했다. 의료봉사회에 들어가 본과 1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매주 주말마다 판자촌 진료를 하고, 방학 때는 무의촌 진료를 다녔다. 다양한 지역을 누비며 환자들을 보살폈다. 당시에는 아파도 가까운 시설이 없어 치료받지 못해 증세가 심해지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복지 사각지대를 마주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의료 취약계층을 줄이려면 제대로 된 체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에는 의사 등 의료 종사자들이 환자를 찾아다니며 병원 밖에서 진료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선친께서도 시골에서 왕진을 다니던 의사였어요. 그 영향으로 자연스레 의학을 전공하게 됐죠.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터라 아버지는 주로 자전거로 마을 곳곳을 다니셨습니다. 종종 옛 친구들을 만나면 ‘너희 아버지가 집에 오셔서 나를 살렸다’는 말을 듣기도 해요. 현재는 방문 진료가 몇 가지 예외 상황을 제외하고는 사라진 상태예요. 2008년 장기요양보험의 등장으로 새로운 방문 형태가 생겼지만, 왕진이 다시 활성화돼 이동 기능이 약화된 노인이나 장애인을 돕는 의료와 요양 서비스를 연계해야 한다고 봅니다.”
가정 환경과 관련 봉사활동은 행보의 기폭제가 됐다. 서울대 의과대학에서 보건의료 정책을 전공하는 교수로 30여 년간 재직했다. 1980~90년대에는 보건복지 운동에 참여했다. 의료보험의 통합일원화, 의약분업 등을 추진하며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대통령 직속 고령화및미래사회위원장과 대통령실의 사회정책수석비서관으로 일했다. 보건의료를 넘어 다양한 분야의 사회·경제 정책을 들여다보게 됐다. 이후 제19대 국회의원으로 보건복지위원회에서 의정 활동을 했고,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장을 지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4년간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을 맡았다. 복지 체계를 정립하려는 과정에서 수많은 고민과 면밀한 토론, 모색을 거쳤다.
“학자로서 이론과 현장성을 두루 갖출 수 있는 큰 행운을 얻었습니다. 공직에 있을 때도 여러 노력을 했고, 퇴임하고는 방법을 바꿔서 돌봄과 관련한 사회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우리 사회에는 오래된 세 가지 난제가 있습니다. 양극화, 저출산, 고령화죠. 역대 정부가 저마다 해결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였지만, 천문학적인 자본을 쏟아붓고도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어요. 각각의 요소들은 넓은 교집합을 갖고 여러 고리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개별적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합니다. 종합적으로 들여다보면서 같이 풀어나가야 해요. 돌봄과 미래를 창립한 이유도 거기에 있어요.”
돌봄의 더 나은 미래
돌봄과 미래는 이론적 연구를 기반으로 대안을 개발해 지역사회 돌봄이 확대·강화되고, 안정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이바지하고자 만든 사회운동 단체다. 김 이사장은 돌봄 문제가 워낙 큰 의제인 까닭에 여론 조성과 정책 제안,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는 2025년, 65세 이상 연령층이 총인구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초고령사회에 들어선다. 노인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지만, 여전히 그들을 돌볼 책임은 그 가족 혹은 당사자에게 있다. 그는 개인이 돌봄 노동과 비용의 짐을 떠안지 않도록 방문 서비스, 주·야간보호 서비스, 주택 지원을 대대적으로 확충해 ‘전국민돌봄’을 실현해야 한다고 말한다.
“돌봄 재난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됐습니다. 노인 인구와 생산가능 인구가 동시에 늘어나는 게 아니라 반비례하고 있어요. 물리적으로 돌봐주거나 돈을 낼 사람이 없는데, 돌봐야 할 노인 인구가 늘어나는 게 문제입니다. 하지만 돌봄 체계의 실상은 15년 전과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어요. 보호자의 책임과 부담, 도움이 필요한 이의 죄책감을 함께 줄이는 것이 핵심입니다. 거동이 불편한 경우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 등 전문 인력이 집으로 찾아가 진료하고, 그 외 공백은 주·야간보호센터를 설립해 채워야 합니다.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돌봄을 받는 것처럼요. 더불어 건강한 생활을 돕는 주택 지원 및 개조 사업을 진행하면서 주거 환경까지 개선하는 겁니다. 그렇게 시설 입소 인원이 줄어들면, 신체 상태가 악화돼 정말 시설에 들어가야 할 사람들이 질 높은 치료를 받을 수 있어요. 오랜 시간을 들여 인프라를 지속적으로 확충하면 선순환 구조가 자리 잡을 거예요.”
유종의 미 거두고 인생 3막 향해
학자, 시민운동가, 정치인, 정책가로 일하는 동안 많이 체험하고 가슴 아파했다. 모든 일이 순탄하게 쉬이 흘러가진 않았어도 굴복하거나 좌절하지는 않았다. 물론 대한민국 사회정책의 완벽한 대안이라고 자신할 순 없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 찾고 합리적으로 해결할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한 만큼 가족에게는 미안한 마음입니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느라 자녀들 얼굴을 마주하기가 쉽지 않았죠. 누군가에게 주례를 부탁받으면 모두 거절했습니다. 스스로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기에, ‘결혼해서 잘살라’고 할 자격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10년이 흘러 80세가 되면 ‘진짜 은퇴’하려 해요. 돌봄과 미래 활동을 마무리하고 나면 가족과 함께 일상을 만끽하고 싶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동네 도서관에서 그동안 못 읽었던 책을 실컷 읽고, 산책도 즐기면서요. 그 전까지는 제 노력이 사회정책의 새로운 담론을 세우는 데 작은 초석이 되길 바랍니다.”
종로노인종합복지관(관장 정관스님)이 주관하는 제4회 서울시니어연극제 ‘청춘의 바다’가 대학로 종로마루홀에서 마채숙 종로부구청장,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복지재단 사무처장 덕운스님을 비롯한 홍보대사 배우 오만석과 정혜선, 황하영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등이 참석한 가운데 6일 성대한 개막식을 올렸다.
이날 개막한 제4회 서울시니어연극제는 오는 10일까지 5일에 걸쳐 대학로 종로마루홀에서 10개의 다양한 작품을 시민들에게 선보인다. 4회째를 맞은 서울시니어연극제는 올해 ‘청춘의 바다’를 주제로 진행된다. 시니어 연극인들이 발현하는 역동과 배우로서 걸어갈 새로운 길의 큰 가능성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특히 개막식 기념공연은 연극적인 요소를 가미한 미디어 퍼포먼스로 개성있고 화려한 무대를 장식하여 관람객의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기념공연을 시작으로 △주요 내빈 소개 및 축사 △연극제 추진위원 인사 △홍보대사 오만석 배우 인사 △심사 기준 설명 △제막식 순으로 진행됐다.
경쟁부문 경연 무대에서는 종로노인종합복지관 ‘지하철 두더지’를 시작으로 △구로노인종합복지관 ‘이건 어디서도 듣지 못할 이야기 보따리’ △소하노인종합복지관 ‘노인, 새가 되어 날다’ △마포문화재단 ‘둘둘둘’ △부산강서노인복지관 ‘옹고집전’ △부산수영구노인복지관 ‘홍도야 우지마라’ △사근동노인 복지관 ‘사근동에서, 웃음 꽃 피는 우리들의 이야기!’ △서울노인복지센터 ‘훨훨 간다’ △울산북구노인복지관 ‘청아!’ 등 다채로운 작품이 펼쳐진다. 뿐만 아니라 극단 해오름 전문 연극단 초청 공연을 통해 볼거리를 더 할 예정이다.
시상은 대상·최우수상·우수상으로 3개 단체, 최우수연기·연출상·연기상 개인 3명, 입상 6개 단체이며 10일 폐막식에서 시상한다. 연극제 심사기준은 윤시향 심사위원장이 개막식을 통해 소개하였으며 표현력, 연출기술, 작품 완성도 등 5개의 분야로 심사한다.
종로노인종합복지관장 정관스님은 “2023년 제4회 서울시니어연극제로 성장해 오는 과정 속에서 시니어 연극인들의 연극에 대한 열정과 헌신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며 “4년 만에 열려 더욱 화려해진 제4회 서울시니어연극제를 통해 아마추어 연극인에 대한 관심과 응원이 더욱 커지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행사는 오는 10일 오후 2시 폐막식에서 폐막선언과 시상식 등으로 5일간의 여정을 마무리한다.
1923년 9월, 일본 관동 지역에 진도 7.9급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혼란 틈에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등의 낭설이 조직적으로 퍼졌고, 각지에 결성된 자경단과 경찰관에 의해 조선인과 조선인으로 의심받던 중국인, 일본인이 학살당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학살 사건의 진상은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으며, 희생자들의 사연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적다. 황모과 작가는 불문에 흐려진 이야기들을 직접 모아 장편소설 ‘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로 되살려냈다. 스러져간 많은 생명이 제 목소리를 되찾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는 2019년 ‘모멘트 아케이드’라는 작품으로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부문 대상을 받은 황모과 작가의 세 번째 장편소설이다. 소설은 2023년 시간 이동 기술을 이용하는 국제기구 ‘인터내셔널 싱크로놀로지’가 조선인 유족회 대리인 한국 청년 민호와 일본인 유족회 대리인 일본 청년 다카야를 1923년 관동대지진 시기로 보내면서부터 시작된다. 정반대의 정치적 입장을 가진 조직에서 인원을 선발해 왜곡된 자료 수집을 방지하고, 역사적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함이다.
이미 일어난 일은 바꿀 수 없다는 안내를 받았지만, 민호는 죄 없는 사람들의 죽음을 어떻게든 막아보고자 과거의 상황에 개입하고, 번번이 죽음을 맞이한다. 반면 다카야는 ‘관동대지진 이후 조선인 학살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창립된 재단에서 장학금을 지원받고 있다. 학살 피해와 관련한 조선인 유족회 측 증언이 오류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현장 조사에 참여한 그는 오로지 방관자의 자세로 일관한다. 둘은 민호가 죽음을 반복할 때마다 처음 시점으로 돌아가 함께 이 여정을 반복하고, 그 과정에서 다카야의 마음에 변화가 생긴다.
“관동 지역은 극악의 상태였어요. 일본 언론이 보도하는 학살 희생자는 6661명이지만, 행방불명자와 미기록자도 많기 때문에 정확히 몇 명인지 알 수 없어요. 지진 당일인 9월 1일의 증언을 찾아보면, 유언비어가 퍼지기 전부터 조선인을 지목한 집단학살이 곳곳에서 일어났다는 걸 발견할 수 있어요. 조선인은 예비 범죄자이고 불량배라고, 언제든 폭동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 재난까지 닥치니, 자연스레 비극을 탓하고 원망할 누군가가 필요했던 걸지도 몰라요. 당시 정황을 납득하려 애쓰니 현재와 겹치는 장면도 있더라고요.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불신과 혐오가 자리 잡고 있으니까요. 이런 문제들이 완화되지 않는다면 다 같이 멍든 채로 살아갈 수도 있어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사건 중 하나입니다.”
말 없는 자들과의 동행
황 작가는 20대 후반부터 대부분의 시간을 일본에서 지냈다. 통제만 거추장스럽게 따라붙는 타국에서 외국인으로 살며 지역의 일원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자발적·비자발적 고립 생활 뒤에 늦었지만 이 사회에서 한 사람의 시민으로 살아야겠다고, 어디든 가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첫걸음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추도식’으로 내디뎠다. 일본에서 유가족 및 시민사회 활동가 10여 명을 인터뷰했고, 과거 학살 현장 및 추모비 등을 취재했다. 답사에 참여했던 곳 중에는 그가 살던 지역과 아주 가까운 장소도 있었다.
“우연히 야기가야 마리 씨를 만나 관동대학살을 제대로 마주하게 됐어요. 알고 보니 그의 어머니는 어린 시절 목격한 치바현 조선인 학살 현장을 증언한 분이었죠. 9년 정도 현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어요. 마리 씨는 이 일을 기억하고 추념하는 일에 헌신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도록 해줬고, 제가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의 안내자였습니다. 추도식에 참여했을 때 재일 조선인 정종석 씨도 만났는데, 한국 정부나 한국인에 대한 서운함을 표현하셨어요. 관동대학살을 일본 사회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학살 당시 할아버지를 숨겨준 일본인에 대해 감사를 표하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죠. 이후 감사비가 있는 호센지 절을 방문했는데, 학살자의 후대가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출구 역할을 한 건 아닐지 의문이 들기도 했어요.”
이주 노동자로서의 확신
추도회와 위령제를 찾아다니고, 일본어로 된 증언을 샅샅이 읽었지만 조선인의 목소리는 없었다. ‘아이고, 어머니, 아버지, 아파’ 등등 단편적인 단어나 감탄사가 가타카나로 표기됐을 뿐이다. 기록이 없다고 죽어간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증거가 지워진 사실의 공백을 메우는 것이 소설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더불어 학살자와 후대, 일본인 희생자들이 상흔을 넘어설 기회가 될 것이라고도 여겼다.
“‘나는 아예 모르는 일이다’라며 뻔뻔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있긴 해요. 하지만 자기 선조가 학살에 가담했던 일을 알고 우울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도 있죠. 조선인을 학살한 사람 중에 징역을 살고 나온 사례가 하나도 없어요. 일본인을 죽인 경우에는 처벌받았지만요. 침묵 속에 파묻히면서 그들이 제대로 참회할 기회를 빼앗은 겁니다. 벌을 받았다면 후손들의 마음마저 망가질 일은 없었을지도 몰라요. 과거를 하나씩 바로잡는 작업을 소설 형식으로 시도하고 있음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작품도, 작가도 여전히 부족함이 많지만, 당시의 진실을 찾아보려는 누군가와 현장을 잇는 일에 작은 다리가 되었으면 해요. 18년간 일본에 거주해온 이유가 늘 의문이었는데, 이제야 앞으로 살아야 할 이유까지 보이는 듯합니다.”
이지훈 하면 30대 이상은 ‘왜 하늘은’이라는 노래를 떠올린다. 30대 이하는 그를 뮤지컬 배우라고 생각한다. 가수로 데뷔한 이지훈은 2006년부터 뮤지컬 배우로 활동 중이다.
벌써 17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그는 “아직도 인정받지 못한 것 같다”라고 겸손하게 말한다. 그러나 언젠가 진심이 통하는 때가 온다고 믿는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왜 하늘은’으로 데뷔한 이지훈. 어느덧 40대가 된 그는 자신의 삶을 관망하는 여유를 가졌다. “데뷔 때가 제일 전성기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요한 건 현재의 모습이다. 과거의 타성에 젖어 있는 스타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과거의 인기는 소중하고 감사한 추억이지만, 거기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왜 하늘은’은 제게 굉장한 축복입니다. 그 곡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겠죠. 아직도 대중들이 ‘왜 하늘은’을 기억해주시는 것이 신기해요. 최근에 한 행사를 다녀왔는데, 마지막으로 ‘왜 하늘을’을 불렀어요. 그런데 관객분들이 노래 가사를 다 따라 부르는 거예요. 벌써 27년 된 노래인데 말이죠. 좋은 에너지를 많이 받았습니다.”
혹독한 뮤지컬 배우 성장기
처음부터 뮤지컬 배우에 큰 뜻을 품었던 것은 아니다. 뮤지컬 배우로 진출한 특별한 계기도 없었다. 그저 제안이 들어와서 ‘얼떨결에’ 출연하게 됐다. 이지훈의 첫 뮤지컬 작품은 ‘알타 보이즈’다. 호기롭게 도전했는데, 참담한 성적표를 받았다.
“가수고 연기 활동도 했으니까 뮤지컬도 잘 소화할 수 있겠지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그런데 혹독하게 당했죠. 그 작품이 보이그룹 이야기를 다뤄서 춤을 많이 춰야 했어요. 저는 발라드 가수였기 때문에 춤추는 게 정말 어려웠어요. 준비하면서도 힘들었는데 무대에 올라가니까 혹평 세례가 쏟아지더라고요. 그때 상처를 받고 뮤지컬은 나와 맞지 않다고 생각해 마음을 접었습니다.”
이지훈은 자신의 인생에 뮤지컬은 다시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2년 후인 2008년 뮤지컬 ‘햄릿’ 제안이 들어왔고, 절치부심의 마음으로 무대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첫 작품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뮤지컬의 매력을 깨달았다. 뮤지컬 배우 이지훈이 눈뜬 순간이다.
“독창 무대의 마지막 부분에서 관객의 반응과 환호가 터졌어요. 그게 뮤지컬의 희열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아, 이거구나! 관객 중에는 제 팬이 아닌 분들이 더 많잖아요. 그런 분들한테도 박수를 받을 수 있다니 감동적이었죠. 그 뒤로 꾸준하게 작품이 많이 들어왔어요.”
이지훈은 이후 ‘엘리자벳’, ‘위키드’, ‘엑스칼리버’ 등의 작품을 통해 호평을 받으며 뮤지컬 업계에서 자리를 잡아갔다. 특히 ‘엘리자벳’은 그에 대한 대중과 평단의 인식이 180도 바뀐 작품이다. 극 중 자유분방하고 열정적인 루케니 역을 맡은 이지훈은 맛깔나는 연기로 캐릭터를 소화했다. 2013년 ‘한국뮤지컬대상’에서 남우조연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지훈은 ‘뮤지컬 배우’ 그 자체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뮤지컬 배우 앞에 붙는 ‘가수 출신’이라는 꼬리표에는 장점과 단점이 존재했다. 가창력을 입증받았던 그는 무대에서도 성량이 풍부하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가수 출신이라는 이유로 기대보다는 우려를 받는다. ‘원래 이렇게 연기 잘했나’, ‘뮤지컬 언제부터 했지?’, ‘뮤지컬 배우로 재발견’ 등의 악의 없는 표현도 때로는 상처가 될 수 있다.
“사실 제가 처음 활동할 때만 해도 텃세가 있었어요. 지금은 아이돌 출신 배우들이 많지만, 그때는 작품이 많지도 않았고 대중화된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세계가 치열했거든요. 같이 연기하면서 진심을 느낀 후에야 동료들이 저를 인정해주셨죠. 또 워낙 뮤지컬 업계는 마니아층이 탄탄하니까 제 캐스팅 소식이 들리면 우려부터 표하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지금도 색안경 끼고 보시는 분들이 있죠. 그래서 아직 뮤지컬 배우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중년은 아니지만
이지훈은 현재 뮤지컬 ‘벤허’로 무대에 오르고 있다. 1세기 초 로마를 배경으로 하며, 유다 벤허라는 남성의 삶을 통해 고난과 역경, 사랑과 헌신 등의 휴먼 스토리를 담아낸 작품이다. 극 중 그가 맡은 역할은 ‘메셀라’다. 로마의 장교로 오랜 친구인 벤허를 배신하는 인물이다.
“메셀라가 악역이긴 하지만 관객들이 보시기에 연민의 감정이 느껴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가 욕망덩어리가 된 서사를 잘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메셀라가 유복한 벤허 집안으로 입양되고 사랑받으면서 자랐지만, 마음속에 자격지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이 쌓여서 로마 장교로 승격된 후 더 출세하기 위해 벤허를 배신하는 선택을 할 수 있었겠죠.”
이지훈은 메셀라 연기를 하면서 스스로 나이 들었다고 느낀다. ‘나 메셀라’라는 넘버(곡)가 있는데, 100m 거리를 전력 질주하는 느낌으로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진짜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느낌을 오랜만에 느껴본다”고 토로하지만, 좋은 자극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 이지훈은 혹독한 연습으로 단점을 보완하면서 좋은 무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40대 중반인 이지훈은 “원래는 40대부터 중년이라고 하지만, 100세 시대인 현재는 50대는 되어야 중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중년이 아니다. 5년 남았다”라고 말하면서 웃음 지었다. 그는 메셀라 역을 소화하기 위해 7kg을 감량하는 열정을 발휘했다. 이 과정에서 강한 성취감을 느꼈다면서 동년배에게 동기 부여 메시지를 전했다.
“저도 이 나이에 다이어트를 하면서 솔직히 버거웠어요. 그런데 결국 몸을 만드는 데 성공했고, 스스로에게 자긍심을 느꼈죠. 해낼 수 있다는 나의 의지와 노력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무슨 일이든 늦은 것은 없는 것 같아요.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늦은 나이라고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됐든 꼭 도전해보십시오.”
18명 대가족 라이프
무명 시절이 없어서일까. 이지훈은 귀공자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그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정형편이 불우했다. 영화 ‘기생충’ 현실판 수준이다. 그래서인지 가족에 대한 마음이 상당히 애틋한 이지훈. 삶의 원동력이 종교와 가족이라고 할 정도다.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건설회사에 다니셨어요. 가족들한테 헌신하는 삶을 사셨고, 그때 돈을 좀 모았죠. 그런데 사업을 하면서 돈을 다 날리고 우리 집은 점점 밑바닥으로 내려갔어요. 정말 힘들었을 때는 반지하 단칸방에 살았죠. 지금도 기억나는 게 장마철이 되면 물이 엄청 새서 장판을 걷어 올리고 그랬어요. 곰팡이 냄새도 심했죠. 어린 마음에 창피해서 친구들을 한 번도 집에 부른 적이 없었어요.”
이지훈이 데뷔하면서 가세가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가 전세 자금을 마련한 덕에 단칸방에서 아파트로 단번에 옮겨갔다. 현재는 온 가족이 모여 산다. 5층짜리 빌라에 무려 18명의 대가족이 함께 살고 있다. 1층에는 부모님이 살고, 2층에는 형, 3층에는 누나, 4~5층에는 이지훈 가족이 각각 거주한다. 반지하 단칸방에서 ‘성공해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다’고 마음먹은 소년의 꿈이 실현됐다.
“같이 사는 것은 장점이 많다고 생각해요. 서로 도와주는 부분도, 의지되는 부분도 많아요. 큰 조카들이 어린 조카들을 정말 많이 봐줬어요. 그 애들이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저희 집도 강아지가 있는데, 저랑 아내가 외출하려고 하면 가족들에게 맡겨요. 또 방송에 나왔듯이 엘리베이터로 음식을 배달해서 서로 나눠 먹기도 하고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큰 마당 하나를 두고 집을 네 채 지어서 살고 싶어요. 외국의 타운하우스처럼 말이죠.”
이지훈의 대가족 삶을 보는 대중의 시선은 양가적이다. 효심 깊은 아들이라는 사실이 느껴지지만, 그가 늦은 나이에 그것도 외국인과 결혼한 이유는 시집살이 때문이 아니냐는 반응이 많았다. 이지훈은 2021년 14살 연하의 일본인 미우라 아야네(이하 아야네)와 결혼했다. 대중의 우려 섞인 반응에 그는 “시집살이는 없다”고 강조했다.
“며칠 전 제가 행사에 다녀왔는데, 아내가 집에 없는 거예요. 알고 보니 2층 형네 집에서 밥 먹고, 막내 조카한테 수학을 가르쳐주고 있더라고요. 사실 대중의 걱정은 알지만 저희 집은 서로 터치하지 않아요. 아내도 정말 편하게 지내고 있어요. 모든 가족이 식사를 같이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가족은 저희 집이 꼭대기 층에 있다 보니 올라오지도 않아요.(웃음)”
이지훈은 1970년대생, 아야네는 1990년대생이다. 성향도 극과 극으로 정반대인 두 사람이지만 세대 차이 없이 잘 살고 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취미 생활도 같다. 요즘 골프에 푹 빠진 부부는 언젠가 세계 100대 골프장 투어를 가고 싶단다. 이지훈은 “아내는 정말 착한 사람이다. 결혼 후에 성격도 유해지고,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극찬했다.
앞으로의 목표는 첫 번째 좋은 아빠 되기, 두 번째 세계적으로 이름 한번 떨쳐보기라는 이지훈. “꿈은 원대하게 가질수록 좋지 않나”라며 웃음을 덧붙였다.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그이기에 행복한 미래도 꿈꿀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성우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 의무원장(신경과 교수)이 지난 21일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제16회 ‘치매극복의 날’ 기념행사에서 정부포상으로 국민포장을 받았다. 국민포장(國民褒章)은 정치·경제·사회·교육·학술 분야 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사람이나 기관에 수여하는 상훈을 말한다.
정성우 의무원장은 “현장에서 다양한 치매환자를 치료하면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인천광역치매센터의 운영 가치를 지역사회 치매 예방과 인식 개선, 인간중심 돌봄 역량 강화에 두고 역량을 집중해 왔다”며 “앞으로도 임상과 지역사회가 함께하는 통합적 관점에서 치매안심사회 구축에 맡은 바 소임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치매극복의 날은 매년 9월 21일로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알츠하이머협회(ADI)가 가족과 사회의 치매환자 돌봄을 새롭게 인식하기 위해 지정한 기념일이다.
치매와 두통 등 뇌 질환 분야 권위자인 정성우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의무원장은 2019년 12월부터 인천광역시광역치매센터장을 맡아 2020년과 2021년 전국 광역치매센터 사업평가 1위, 우수사례 경진대회 2년 연속 최우수상 수상 등을 이끈 공로가 인정됐다. 또 전국에서 65세 미만 치매환자의 상병 비율이 가장 높은 인천 지역의 특성을 감안해 노인성 치매에 비해 사회적 인식과 지원이 부족한 65세 미만 치매환자와 가족을 위한 맞춤형 서비스(뇌건강학교)를 개발하고, 인간중심 치매돌봄 기법인 ‘휴머니튜드’ 도입에 앞장서는 등 치매극복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해왔다.
아울러 정성우 의무원장은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신경과 교수로 25년 넘게 재직하면서 2018년 국내 최초 뇌병원 개원부터 현재까지 뇌병원 원장을 역임하는 등 치매를 포함한 뇌 질환 치료에매진하며 임상과 연구 영역을 아우르는 전문가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