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게재하기로 한다.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가 조선 도공 후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990년이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 외상으로서, 전쟁 회피와 종전 교섭에 깊이 관여했던 사람이 조선인 후예였다니 믿기지 않았다. 이름은 박무덕(朴茂德). 조선인 피를 받은 그가 어떻게 그런 높은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걸까?
의문을 풀기 위해 애썼지만 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는 철저한 일본인으로 살았던 우수한 관료였다. 그러나 그가 외무성 관료로 활동한 시기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극심했던 시절이어서 그것만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사찰로 악명 높았던 일제 경찰이 까다로운 외교관 임용 신원조사를 왜 그토록 허술하게 했을까. 이것이 제일 큰 의문이었다. 그의 출신지와 가계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조선 도공의 후예임을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일본 제국의 마지막 각료로 패전을 맞을 때까지 그에게는 ‘조선인 후예’라는 천형 같은 낙인이 찍혀 있었다.
“조선인 피를 가진 사람이 대신이 되어 폐하를 모시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가 두 번째로 외상이 되었을 때 이 같은 괴문서가 정부와 시가지에 뿌려진 일이 있었다. 극우세력이 저지른 일이었다. 군 내부에 동조 세력이 나타나 술렁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옥에 갇히게 되자 사람들은 더 흥분했다. 그의 고향 가고시마(鹿兒島) 현 미야마(美山) 옛집에 돌팔매까지 했다.
도쿄재판에서 금고 20년 형이 떨어졌을 때 ‘전범이므로 나쁜 사람’이라는 낙인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본을 민족 절멸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준 사람’으로 떠받들고 있다. 그의 옛집에 세운 공덕비 비문에는 “종전(終戰) 공작의 주역을 맡아 대업을 완성하고 일본국과 국민을 구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비문은 당시 일본 관방장관 사코미즈 히사쓰네(迫水久常)가 썼다. 그 뒤 그의 집이 있던 자리에는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이 들어섰고, 그를 연구하는 모임까지 생겨났다. 이러한 현실은 시대 조류의 급격한 역류를 의미하고 있다.
도고 시게노리에 관한 이야기는 도예가 ‘14대 심수관’으로부터 들었다. 1990년 7월 미야마에 있는 그의 가마를 찾아갔을 때였다. 나에시로가와(苗代川)라는 옛 이름으로 유명한 ‘사쓰마 야키(薩摩燒)’ 발상지 취재차 찾아간 특파원에게 그는 고향 자랑을 하면서 ‘도고 센빠이(선배)’에 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외무성 관료가 되어 금의환향한 그가 모교에 찾아왔을 때 “심수관이 누구냐?”고 물었다고 한다. 심수관이 손을 들고 나가자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도공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마을 입구에 “거짓말하지 말라, 지지 말라, 약한 자를 괴롭히지 말라, 도고 선배를 본받자”는 내용이 쓰인 팻말이 세워져 있었던 때라 그는 어깨가 으쓱해졌다고 한다. 평생을 시게노리 현창(顯彰) 사업에 바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은 그가 발의해 사업 추진까지 도맡았다. 시게노리의 아버지 박수승(朴壽勝)의 도자기 작품을 수집해 미술관에 기증한 사람도 그였다. 시게노리의 아버지가 뛰어난 도공이자 유능한 사업가였다는 사실도 세상에 알렸다.
시게노리는 1882년 나에시로가와 심수관의 이웃집에서 박수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박수승은 세상을 읽는 눈이 뛰어난 사업가였다. 메이지 정부의 폐번치현(廢藩置縣) 조치로 사족(士族) 신분을 박탈당하고 관요(官窯)가 폐지되어 나에시로가와 도공 마을에 찬바람이 불어닥쳤을 때 각자도생의 길을 헤쳐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역경이 그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도쿄 요코하마를 무대로 외국인들에게 도자기를 팔고 수출하는 사업에 눈을 뜬 것이다.
그 재력을 바탕으로 가고시마 시내로 이주, 명문 도고(東鄕) 가문의 족보를 사들여 도고 성(姓)을 취득한 그는 당당한 일본인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박수승은 ‘도고 주카쓰(東鄕壽勝)가 되었고, 네 살배기 무덕은 ‘시게노리(茂德)’가 되었다. 시게노리는 어려서부터 총명한 아이였다. 사족 가문 성을 가진 데다 뛰어난 두뇌와 아버지의 재력 덕에 사족 출신 자제들이 다니는 명문교 가고시마 제일중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족 출신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 폐번치현 이후 나에시로가와는 ‘옹기마을’로 불리며 급속히 ‘천민부락’으로 전락했다. 그가 옹기마을 출신이라는 것을 급우들이 다 아는데 어떻게 사족 대접을 받았겠는가.
대접은커녕 ‘가짜 사족’ 놀림까지 받았다. 도고시게노리기념사업회가 펴낸 그의 일대기에 따르면, 그는 입학 후 점점 말없는 소년이 되어갔다. 사정을 알아주는 친구 하나를 제외하고 어울리는 친구가 없었다. 그는 무섭게 공부에만 매달렸다. 영어사전의 단어를 다 외우고 그 페이지를 찢어 씹어 삼켰다는 일화는 가고시마의 전설이 되었다.
손자 도고 시게히코(東鄕茂彦)가 쓴 ‘할아버지 도고 시게노리의 생애’에 나오는 일화는 그의 치밀하고 느긋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소학교 시절 하굣길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친구들은 다 처마 밑으로 뛰어들어 비를 피하는데 시게노리만 혼자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어른들이 그 모습을 보고 “시게노리, 뭐하는 거야? 빨리 뛰어와!” 하고 소리쳤지만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쪽에도 비가 오는걸요.” 그렇게 말하고는 집까지 비를 맞으며 걸어갔다.
1901년 제일중학을 졸업한 뒤 그는 가고시마 7고에 입학한다. 문부성 직할 구제 고등학교였다. 학교 이름에 번호가 붙었다 해서 ‘넘버 스쿨’로 불리던 일본의 명문고교였다(1고는 도쿄, 2고는 센다이, 3고는 교토, 4고는 가나자와, 5고는 구마모토, 6고는 오카야마, 8고는 나고야에 있었다). 그해 개교한 7고에는 각 넘버 스쿨 입시에 낙방한 학생들이 몰려들어 경쟁이 치열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수재들이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사투리가 심해 학교 측은 고심 끝에 가고시마 방언과 표준어로 된 두 가지 안내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시게노리는 7고를 졸업하고 도쿄대학교 문학부 독문학과에 진학한다. 아버지는 법대를 나와 내무성 관리가 되기를 원했지만 문학과 철학에 심취했던 시게노리는 아버지 염원을 배반했다. 그러나 끝까지 아버지의 소원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졸업 후 외교관 시험에 도전, 3수 끝에 합격의 영광을 얻는다. 그의 나이 30세 때였다. 외교관의 길을 선택한 것은 아버지를 의식한 탓도 있지만, 고향 선배 외교관의 영향이 컸다. 독일 문학에 몰입했던 대학교 시절의 이상이었던 ‘동서양 문화의 조화’를 실현할 기회로 여겼기 때문이다.
첫 부임지는 만주였다. ‘펑톈(奉天) 일본국 영사관 영사관보’가 공식 직함이었다. 펑톈은 지금의 선양(瀋陽)이다. 비행기가 없던 시절, 그는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해 열차로 만주에 부임했다. 뒷날 발견된 당시의 메모에는 열차로 한반도를 종주하면서 느낀 감회는 한 구절도 없었다. ‘경복궁’과 ‘한강’. 아무 감상 없이 언급한 고유명사만이 조선과 관련한 메모의 전부였다.
아마도 그의 의식을 지배하던 ‘조선 트라우마’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고 부임을 준비하던 무렵, 그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수모를 겪는다. 결혼을 약속한 도쿄의 명문가 규수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일방적인 파혼 통보를 해온 것이다. 이유는 끝내 밝히지 않았지만 출신성분 조사에서 조선 도공의 후예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라는 게 일본 외교가의 정설이다.
그 뒤로 그는 결혼을 포기하고 살다가 37세 노총각 시절 아이가 다섯이나 딸린 독일인 이혼녀 에디 드 라론드와 결혼, 뒤늦게 가정을 이룬다. 그가 트라우마를 가졌다 해서 조선인의 피를 부끄럽게 여긴 흔적은 없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해 금의환향했을 때 옥산궁(玉山宮)을 참배한 일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옥산궁이란 나에시로가와에 있는 단군 사당이다. 비록 일본 관복 차림이었지만, 마을 수호신을 찾아 고마움을 표하며 합장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단군의 후예라는 뿌리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외교관 시절의 일화도 있다. 외무성 본부 국장 시절, 퇴근길에 조선인 과장 장철수를 허름한 술집으로 데리고 가 “사실은 내게도 조선인 피가 흐른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열심히 일하게, 인내라는 말을 소중히 하고!” 하면서 동족에 대한 격려도 잊지 않았다. 독일대사, 소련대사 등 외무성 요직을 거치며 ‘외교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들어온 그는 마침내 외무대신 자리에 오른다. 미국과의 사이에 전운이 감돌던 1941년 대미 교섭 임무를 짊어졌던 첫 외상, 종전 교섭의 사명을 띤 두 번째 외상 직무의 하이라이트는 1945년 8·15 광복 직전의 무조건 항복 결정이었다. 연합국 수뇌들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을 발표했지만, 전쟁광 집단인 일본 군부는 결사항전 태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덩달아 언론도 연일 군부의 ‘1억 옥쇄론’을 부채질하는 사설을 내보내던 때였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까지 참전한 상황에서도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수상을 필두로 한 군부는 미치광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원자폭탄 피해의 심각성을 파악한 시게노리는 천황을 찾아가 전쟁 종결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각료들에게도 같은 주장을 거듭했지만 군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런 교착상태에서 또 하나의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그날부터 일본 제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무조건 항복이냐, 결사항전이냐를 앞에 둔 운명의 갈림길에서 시게노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쿠데타설과 암살 위험을 무릅쓰고 그는 종전 결정의 불가피성을 설득해나갔다. 군부의 위세에 눌려 입을 닫고 있던 각료들은 13일 각료회의에서 “각자의 의견을 말해보라”는 수상의 요구에 12명은 ‘포츠담선언 수락’ 또는 ‘수상 결정에 위임’, 3명은 반대 의견을 냈다.
14일 어전회의에서 천황은 외무대신의 전쟁 종결 의견에 각료 다수가 찬성한 사실을 강조하면서 “나는 연합국의 포츠담회담을 수락하기로 결정했다”고 선언했다. 만주 침략으로 시작된 길고 긴 15년 전쟁의 종결 선언이었다.
전후 시게노리는 연합국 도쿄재판에서 금고 20년 형을 선고받고 도쿄 스가모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50년 7월 23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68세. 도쿄재판 도중 그에게 조선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이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아사히신문은 “도고는 꼭 외국인이 일본어를 말하는 것 같은 억양으로 진술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고 보도했다. 그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에둘러 강조한 것이다. 한 신문은 ‘과거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던 지역 출신’이라는 표현을 썼다. 조선인 출신이라는 낙인이 천형처럼 그의 이마에 찍혀 있었던 셈이다.
1990년 미야마에 처음 갔을 때 시게노리 생가는 폐가처럼 버려져 있었다. ‘A급 전범’이라는 멍에 탓이었다. 마당에는 잡초가 키 높이로 자라 있었고, 대문에는 각목을 X자로 못 박아놔 사람의 출입을 막았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가 일전되는 데는 오랜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다. 경제번영의 격양가 속에 자연스레 ‘민족 절멸의 위기에서 일본을 구출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이루어졌다. 2010년 남규슈 여행길에 들렀을 때 가 보니 생가 터에 아담한 기념관이 들어서 있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사코미즈 히사쓰네의 비문이 선명하게 보이는 송덕비, 그 오른편으로는 시게노리의 동상이 서 있다. 기념관 안에는 도쿄대학교 시절 시게노리의 모습과 외상으로 지냈을 때의 초상화, 복역 중일 때 가족과 면회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말과 일본말로 나에시로가와 마을과 조선 도공을 설명하는 안내서도 걸려 있다. “나에시로가와에서는 메이지 시대가 끝날 무렵까지 조선의 풍속과 언어가 남겨져 있었다. 조선 도공의 수호신이 된 옥산궁 신사에서는 머나먼 고향을 그리워하는 제사가 행해졌다.” 안내문의 한 줄 내용에 이 마을의 400년 역사가 함축되어 있었다.
도공 박문(朴門)의 업적을 소개하는 안내문에는 “박정관이 제작한 백 사쓰마 도자기가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되어 사쓰마 도자기 이름을 유럽까지 알렸다”고 씌어 있다. 안내문에 나오는 박정관(朴正官)은 근세 사쓰마 야키를 일으켜 세운 사람으로 추앙되는 인물. 정유재란 당시 사쓰마에 끌려온 도공들의 리더 박평의(朴平意)의 후손이다. 시게노리의 손자는 할아버지 일대기에 “할아버지 가문이 박평의 후손이라는 근거는 없지만, 그때 끌려온 도공 가운데 박 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았고, 같은 도공이었다는 점에서 할아버지와 피가 통하는 관계로 본다”고 썼다.
시게노리와 에디 사이에는 이세(いせ)라는 이름의 딸이 유일한 혈육이다. 시게노리는 외동딸을 자신의 비서관 출신 외교관과 결혼시킨 뒤 사위를 양자로 삼았다. 그는 훗날 주미대사를 역임한 도고 후미히코(東鄕文彦)다. 사위 겸 양아들 후미히코와 딸 이세 사이에는 아들 쌍둥이가 있다. 1945년생인 손자 시게히코는 와세다대학교 정경학부를 나와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아사히신문 기자를 거쳐 워싱턴포스트로 옮겨 오랜 기간 도쿄 특파원으로 지냈다.
동생 가즈히코(東鄕和彦)는 도쿄대학교를 나와 3대 외교관이 되었다. 북미국장 주미대사 등 외무성 요직을 두루 거쳤고 퇴직 후에는 미국, 대만 등지의 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활동했다. 2007년에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을 강의한 적도 있다. 그는 역대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외교관으로 유명하다. 현역 시절 김대중 납치사건, 문세광 사건 등 한일 현안 문제에 관여한 경력이 있으며, 2006년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중단을 요구하는 회견으로 일본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50여 년간 장미를 그려온 화가의 심상은 무엇일까? 그것도 화병에 꽂은 정물이 대부분일 때는 의아할 수밖에 없다. 장미의 화가라면 김인승(金仁承, 1910~2001)이나 황염수(黃廉秀, 1917~2008) 화백이 떠오르지만, 성백주(成百冑, 1927~) 화백만큼 긴 세월 ‘장미’라는 주제에 천착해오지는 않았다.
성백주 화백은 화필이 무르익은 중년을 지나는 1960년대 말부터 장미만 그려왔다. 물론 바닷가 풍경이나 누드화도 간간이 눈에 띄지만, 아주 드문 편이다. 성 화백은 경북 상주에서 출생해 초·중등학교 교사, 지방 방송국 편성부 등에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부산 권역을 벗어나지 않고 동아대학교, 부산여자대학교에도 출강했다. 1955년 부산에서 ‘민주신보 창간 10주년 기념 초대전’이 열린 것을 보면, 1948년 초등학교 교사로 첫 부임한 이래 그림에 정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2년, 1975년 서울 명동화랑과 공간화랑의 전시가 중앙 화단에 진출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1992년의 여의도 정송갤러리 초대전이 전국적으로 자신의 그림 세계를 각인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 무렵부터는 장미 그림만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두어 점의 풍경이나 누드화가 겻들여지기도 했으나 장미만큼 압도하지는 못했다. 그의 장미는 꽃병에 꽂힌, 그래서 식탁이나 서재 책상 위에 무심코 놓인 정물화다. 청화백자 항아리나 유리단지에 성기게 꽂힌 몇 송이 혹은 꽉 찬 아름진 장미 다발이 언제나 맑은 향을 뿜는다.
“그는 꽃의 실제적 형상을 묘사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감성의 파상적 율동에 의해 창출되어 나온 선과 터치에 의한 궤적이다. 꽃을 응시하고 연후에 그것을 화면 형상으로 바꿀 때 표현은 부드럽고 경쾌하며 리드미컬하다. 담채와 농채가 적절히 배분된 화면은 활기차 보이며 따스한 온기가 감돈다”라고 평자는 말한다.
주로 정물을 그리는 화가들을 만나보면 “꽃, 그것도 장미 그리기가 제일 어렵다”고 말한다. 장미는 그 종류만 수백 종에 색깔도 가지각색일 뿐만 아니라, 꽃잎이 수십 장 포개져 있어 입체감의 표현과 꽃잎마다 빛의 반사가 다채로워 평면화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성 화백의 장미는 극사실의 요염한 자태가 아니다.
“나는 그동안 장미를 많이 그렸지만, 한 번도 장미라는 물질적 속성을 생각해본 일이 없다. 화폭에 어떻게 조형성을 심어가느냐의 문제였다. 항상 그랬듯이 남에게 보이기보다 내 작업을 연출된 공간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성찰해보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어느 전시회를 앞두고 그가 한 말이다.
이 그림[사진1]은 1992년, 서울 여의도 정송갤러리에 전시 출품되었던 작품이다. 청화백자 항아리에 꽃송이와 줄기가 얼비추어 푸르른 그림자를 만들고 속도감 있게 처리된 배경과 꽃잎 끝에 건듯 묻어나는 옅은 색깔, 꽃송이와 봉오리에 깊은 마티에르가 하모니를 이룬 회심작이라 생각한다. 식탁에 걸어놓고 맑은 향을 맡는다.
한때 나팔꽃을 좋아해서 공원이나 길거리에서 나팔꽃 덩굴을 만나면, 씨가 여물 때를 기다려 몇 알씩 따두었다가 이른 봄, 마당 창가나 담장 아래 씨앗을 틔워 줄기가 늘어뜨린 끈을 감고 공중에 꽃 피우는 신선함을 즐겼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고 마는…” 가요의 가사처럼 짧은 꽃피움이 애잔했다. 나팔꽃 기르기를 좋아하던 서예가와 경기도 여주의 도예촌을 동행하며, ‘백제도예연구소’의 정지현(1958~) 도예가를 찾았다. 몇 차례의 방문이라 익숙하게 후원을 빙 돌며 작약이며 들꽃 틈에 깨뜨려버린 도자기를 휘감은 나팔꽃 덩굴의 진분홍 꽃을 감상했다.
“어느 날 새벽 도자기 작품 구상이 안 떠올라 이곳을 거닐다가 무심코 도자 파편 위 저 나팔꽃이 이슬을 머금고 활짝 핀 모습을 보고 큰 영감을 받았어요. 그래서 나팔꽃 이미지를 도자로 빚어보았지요.”
작업실 안에는 철화와 진사채로 완성된 나팔꽃 이미지의 아름드리 대형 도자기와 초벌구이한 도자기가 나란히 있었다. 정지현 도예가는 뒤늦게 도예에 입문해 예술자기와 생활자기 사이에서 많은 고뇌를 했다. 현실적 생활고도 체감했다. 이제는 일본이나 유럽으로 생활자기를 수출하며 경제적 안정을 얻었지만, 문득 일상의 쓰임을 벗어난 도자에 예술혼을 굽고 있다 고백했다.
이 대형 푼주[사진2]는 몇 달 후 그날 동행했던 서예가가 우리 집까지 날라준 크나큰 선물이다. 혼자 들기도 버거워 아내와 거실 탁자 위에 놓고 마음 깊게 감상했다. 겉은 정지현이 개발한 특유의 연록빛 유약이 자연스레 흘러넘쳐서 나팔꽃 줄기와 잎의 싱싱함을 나타내었다. 입술부터 안쪽으로는 붉은 진사의 유약을 두텁게 발라 고상함을 더해주고 있다. 도자기 속에다 속삭이면 그 잔잔한 울림이 좋았다. 이 푼주의 쓰임을 놓고 가족회의도 열어보았다. 겉과 속을 두루두루 볼 수 있는 낮은 탁자 위가 제자리다 싶으면, 찻잔을 나르거나 과일을 나르다 부딪힐까봐 조바심되었다. 마침내 거실 큰 유리문 앞 튼튼하고 낮은 탁자를 따로 마련해 옆에 백자 달항아리를 나란히 두어, 사계절 남향 타고 스미는 햇빛이 부서지는 반사광까지 즐기고 있다.
“가마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길이 사위고 첫닭이 우는 새벽, 부끄럽고 두려움에 떨면서 죄를 짓고 용서를 비는 심정으로 도자기를 꺼내죠. 무슨 항아리가, 어떤 작품이 나올지 몰라요. 반은 내가 만들고 반은 불이 만들거든요. 꿈꾸던 작품을 얻었을 때의 감동과 희열, 그건 맛본 사람들만 알아요. 도예가들의 삶의 원천이죠.”
어느 일간지 인터뷰에서 정 도예가가 한 말이다.
꽃은 인류가 문명세계를 열기 이전부터 생명의 원천이었다. 사람이 태어났을 때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꽃은 기쁨의 표상이고 추모의 상징이다. 구순 넘긴 노 화백의 여린 붓끝에서 피어나는 장미에서 인생의 환희를 느끼고 연륜 깊은 향을 맡는다. 하늘을 향해 입 벌린 푼주에서도 ‘아침의 영광(Morning glory)’을 듣는다.
>>이재준(李載俊)
아호 송유재(松由齋). 1950년 경기 화성에서 태어났고 미술품 수집가로 활동 중이다. 중학교 3학년 때 ‘달과 6펜스’, ‘사랑과 인식의 출발’을 읽고, 붉은 노을에 젖은 바닷가에서 스케치와 깊은 사색으로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90년부터 개인 미술관을 세울 꿈으로 미술품을 수집해왔다.
K는 기계 기술자이면서 시인이다. 기술자가 시를 쓴다는 것도 드문 일인데 그동안 시집도 두 권이나 펴냈다. 그는 젊어서부터 열사의 나라 사우디를 비롯한 중동 지역 건설 현장을 두루 경험한 산업 전사였다. 능통한 영어 실력으로 큰소리를 치고 대우도 받으며 해외생활을 마쳤다. 그의 시집을 선물받아 읽어봤다. 이국의 색다른 풍경과 고국의 아내와 자식에 대한 그리움이 철철 넘치는 시가 많았다.
K와 주말에 가벼운 등산을 하고 소주잔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술이 몇 순배 돌자 그는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꺼냈다. 아내와 황혼이혼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K의 부부금슬은 그가 쓴 시집에도 잘 나타나 있고, 평소 부부사이를 봤을 때도 전혀 이상함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K의 집은 서울 송파다. 청주 현장에서 근무할 때 그는 금요일 오후에 서울로 올라가 일요일 오후에 내려오는 주말부부 생활을 했다. 그의 아내는 끼니마다 먹을 국거리와 반찬을 손에 들려 보냈다. 주중 하루는 아내가 직접 청주로 내려와 청소도 해주고 올라갔다. K도 주위의 아름다운 꽃이나 나무들을 사진으로 찍고 거기에 감성을 살린 글을 몇 줄 적어 매일 아내에게 보내주곤 했다. 잉꼬부부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혼을 결심한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주말이면 함께 골프를 치던 K의 아내의 어께가 고장이 났다.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상태가 점점 더 심해져갔다. 수술을 하지 않고 어떻게든 고쳐보려고 했다. 그러는 동안 결국 병을 더 키웠다. 큰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니 상태가 심각해 수술밖에 방법이 없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K는 사표를 던지고 아내 뒷바라지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1년이 흘렀고 오늘 필자와 만났다.
아내가 한쪽 팔을 거의 못 쓰니 머리도 감겨줘야 하고 음식도 K가 다 해야 했다. K로서는 최선을 다해 살림도 하고 아내를 위해 시간을 보내는데도 아내의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내의 잔소리는 늘어갔고 K가 견디다 못해 어느 날 한마디 했다고 한다.
“당신은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을 보고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안 하고 타박만 하느냐?”
그러자 아내도 지지 않고 볼멘소리를 하더란다.
“나는 당신이 외국에 나가 있을 때 아이들 키우며 이보다 더한 고생을 수없이 했어요.”
결국 K는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나도 처자식 먹여 살리겠다고 그 뜨거운 모래바람, 햇볕 속에서 고생을 엄청 했다. 사람이 하루를 살아도 마음 편히 살아야 하는데 당신이 이렇게 나에 대해 불만이 많다면 우리 헤어집시다. 당신 팔은 내가 어떻게 하든 고쳐주리다. 그리고 내 재산 절반을 딱 잘라서 주겠소. 그 돈이면 충분히 잘 살 수 있을 것이오.”
그러자 아내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아내 모습을 보면 아내도 내심 황혼이혼을 꿈꾸고 있었던 모양이라며 이제 갈라서야겠다고 말한다.
그때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등산 간 사람이 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자 걱정이 되어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K는 서둘러서 일어났다. 그렇다! 남자도 힘들 때는 위로를 받고 싶고 “고마워요, 감사해요”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보통의 사람이다.
연말이 다가오고 있다. 당연히 술자리도 자주 갖게 마련이다. 우리 사회는 술 잘 마시는 것도 하나의 능력으로 본다. 그래서 ‘술상무’라는 말까지 생겨났는지 모른다. 술을 잘 못하는 사람에게는 술자리가 큰 부담이다. 못 마시더라도 눈치껏 마셔야지 너무 빼는 모습을 보이면 사회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술은 약일까, 독일까. 한의학에서는 의미 없는 질문이다. 자연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존재 이유가 있다. 약과 독도 별개의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약이 되고 어떤 경우에는 독이 된다. 사물의 성질을 정확히 파악해서 적재적소, 적합한 사람에게 쓰고자 하는 것이 한의학이다.
의학(醫學)에서 ‘의(醫)’라는 한자에 술을 의미하는 ‘유(酉)’가 보인다. 이는 술이 병을 치료하는 주요 수단이라는 뜻이다. 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약재는 술이다. 약방의 감초로 알려진 감초가 3467번 나오는데 술은 4384번이나 나온다. 을 술에 관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술은 절대 나쁜 음식이 아니다. 많이 마시면 문제가 될 뿐이다.
술만큼 강한 약은 별로 없다. 빠르게 반응이 나타나는 음식도 많지 않다. 술을 먹으면 바로 심장이 뛰고, 열이 올라 얼굴이 붉어지면서 감정도 변한다. 어떤 사람은 구토를 하고, 졸려서 잠을 자기도 하고, 용감해지기도 하고, 말이 많아지기도 한다. 분노와 슬픔, 기쁨 등 온갖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술은 뜨겁고 향이 강하다. 약 기운을 전신에 운행시키고, 온갖 사기와 나쁜 기운을 없애주며, 혈맥을 통하게 하고, 소화기관을 두텁게 하고, 피부를 윤기 있게 하고, 우울함을 없애주고, 화나게 하고, 마음껏 이야기하게 만든다.
을 보면 인체의 기본인 정기신혈(精氣神血)을 보하는 보약들은 대부분 술과 함께 복용하거나 술로 빚어서 복용한다. 대표적인 보약인 경옥고도 술과 함께 복용한다. 피부에서 머리카락, 오장육부, 뼈, 뇌수, 자궁 등 인체의 가장 깊은 곳까지 약 기운을 이끌고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한 약재는 보통 술에 담가 먹는다.
술은 발효식품이라서 소화도 돕는다. 많이 먹으면 배가 부를 음식도 술과 함께 먹으면 1차, 2차, 3차, 4차까지도 먹게 된다. 나이 드신 분들이 식사 중 반주를 하는 이유는 소화가 잘되기 때문이다.
술만큼 혈액순환에 좋은 약이 있을까? 알코올을 조심하라는 권고는 주량 때문이다. 잠자기 전 정종을 소주 컵 한 잔 분량을 데워서 마시면 손끝과 발끝이 시리고 저린 데 도움이 된다. 혈액순환의 주체인 심장질환 약재에도 대부분 술이 들어간다. 여성은 한 달에 한 번씩 생리를 하는데 혈액순환 장애가 잘 일어난다. 자궁질환 약재 역시 술이 많이 쓰인다. 어혈을 푸는 데도 최고다. 교통사고, 추락, 타박상, 허리를 다쳤을 때도 도움이 된다.
물론 많이 마시면 독이 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술 때문에 고생 한 번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주량을 능력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 억지로라도 마셔야 하는 분위기다. 그렇게 1년, 2년, 10년을 살다 보면 알코올성 간염이나 성인병 등 다양한 병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에는 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어깨와 전신이 무거우며 몸이 붓기도 한다. 속도 편치 않아 소화가 안 되고 소변도 시원치 않게 나온다. 설사와 구토를 하기도 한다. 한의학에서는 이를 주습(酒濕)이라 표현한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인 것처럼 몸에 술의 습기가 잔뜩 쌓여 있는 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상태가 오래가면 당뇨, 황달, 시력 장애, 기침, 천식으로 고생할 수도 있다.
술을 C2H5OH로 획일화할 수는 없다. 맥주, 막걸리, 소주, 양주, 과일주 등은 각각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어제 담은 술과 오늘 담은 술도 사실 다른 술이다. 과일주, 약초주에는 과일과 약초의 약성이 담긴다.
산행할 때 막걸리를 마시면 밥을 먹지 않아도 될 만큼 든든하다.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 중에 밥을 안 먹고 막걸리만 먹는 사람이 있다. 밥심만큼 힘이 나기 때문이다. 막걸리 한 사발은 밥 한 그릇이다. 곡주에는 곡기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밤에 막걸리 두 잔을 마시면 밥 두 공기를 야식한 셈이 된다. 그래서 다음 날 몸이 붓거나 전신이 무거워지는 것이다. 탁주는 숙취가 오래간다. 특히 면 종류를 같이 먹으면 해독이 더 어렵다.
양주, 안동소주 등 증류주는 입에 들어가자마자 기화되어 머리에서 손발 끝까지 퍼져나간다. 막힌 기를 뚫어주고 몸을 금방 덥혀준다. 곡주와 달리 머리가 아픈 것도 덜하며 소변도 잘 나온다. 물론 적당히 먹었을 때의 이야기다. 과음하면 어떤 술이든 문제를 일으킨다.
맥주는 발아시킨 맥아(麥芽)와 홉(hop)의 성질 때문에 차갑다. 맥주를 많이 마시면 아랫배가 차가워지면서 배가 나온다. 그래서 몸이 차가운 사람보다는 뜨거운 사람에게 좋은 술이다.
술을 마실 때 주의해야 할 점들이 있다. 첫째, 단것을 먹지 말아야 한다. 둘째, 면 종류, 감과 함께 먹으면 술독이 잘 풀리지 않는다. 셋째, 배불리 먹은 후에는 음주를 주의하고, 취한 후에는 억지로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한다. 넷째, 얼굴이 흰 사람은 술을 많이 마시지 말아야 한다. 피부가 흰 사람은 폐가 술독을 잘 제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섯째, 취한 후에는 성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여섯째, 술은 적당한 양을 천천히 마시는 게 좋다. 일곱째, 취했을 때 갈증 때문에 물 또는 차를 찾게 되는데 많이 마시면 허리, 콩팥, 다리가 약해지고 무거워진다.
최철한(崔哲漢) 본디올대치한의원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박사. 생태약초학교 ‘풀과나무’ 교장. 본디올한의원네트워크 약무이사. 저서: ,
‘별은 빛나건만‘의 애절한 멜로디가 머릿속에 맴돈다.
고통 속에서도 연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듣는 이에게도 절절하게 다가오게 하는 노래이다.
오페라 ‘토스카’의 ‘별은 빛나건만’은 이렇게 필자 마음에 남아 있다.
처음에 오페라를 영화로 본다고 해서 별 흥미를 느끼진 못했다.
무대에서 생생한 배우들의 몸짓과 노래를 듣는 게 오페라의 묘미일 텐데 영화의 화면으로 오페라를 본다니 그리 감동이 다가오진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메가박스 몇몇 극장에서 영화로 보는 오페라를 상영하고 있다.
이 방식은 실제 오페라 무대를 실황 중계하듯 영화로 보여 준다.
날짜마다 레퍼토리가 달랐는데 필자가 선택한 오페라는 ‘토스카’이다.
이번 상영작은 베를린 필하모닉 연주의 오페라로 바덴바덴 축제극장에서 열린 작품이다.
오페라를 영화로 본 느낌은 실제 무대를 본 것만큼이나 생생하고 감동적이었다.
인터미션을 포함해서 3시간가량을 열연하는 오페라 가수들이 너무나 멋지고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보통 성악 하는 오페라 가수는 몸집이 컸다. 그래야 소리가 잘 나오기 때문이라는데 이번 공연의 여주인공 ‘토스카’는 아름다운 얼굴과 늘씬한 몸매로 열연을 펼쳤다.
푸치니는 이탈리아 오페라 전통과 격식을 갖고 우아하고 풍부한 선율을 표현했는데 많은 작품 중에서 3대 오페라로 ‘라 보엠’과 ‘나비부인’ ‘토스카’를 꼽는다.
‘토스카’는 전 3막의 아름다운 비극 멜로드라마로 애틋한 감상을 필자 마음에 안겨주었다.
무대는 1800년 6월의 성 안드레아 델라발레 성당이다. 이곳에서 화가 마리오 카바라도시는 여인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는 아띠반티의 기도실에서 오랜 시간 기도를 드리는 부인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그림에 반영한다.
그러면서 그림의 여인이 어쩐지 가수인 자신의 연인 토스카의 모습과 비슷함을 보고는 ‘오묘한 조화’라는 유명한 아리아를 부른다.
오랜 시간 기도를 드리던 여인은 정치범인 안젤로티의 여동생이었다. 안젤로티는 로마공화국 수장으로 정치범이 되었지만, 탈옥 중이다.
아띠반티 부인은 자신의 옷으로 오빠를 변장시켜 탈출하게 하려고 기도실에 옷을 숨겨놓았다.
이곳에 안젤로티가 숨어들어 카바라도시와 만난다. 둘은 절친한 친구이다.
그때 카바라도시의 연인 토스카가 찾아오니 안젤로티를 숨기고 질투심이 많은 토스카는 누구와 얘기 중이었냐며 의심한다.
카바라도시는 토스카만을 사랑한다고 그날 저녁 별장으로 여행 가자고 안심시키며 그녀를 돌려보내고 안젤로티를 자신의 집 마른 우물에 숨어있게 한다.
그때 경찰서장인 스카르피아 남작이 들이닥쳐 안젤로티의 행방을 말하라며 카바라도시를 연행한다.
원래 나쁜 놈인 경찰서장은 토스카를 마음에 두고 있어 이번 기회에 카바라도시를 없앨 궁리를 한다.
토스카를 불러 그녀의 연인인 카바라도시를 고문하는 소리를 듣게 하며 자신의 말을 들으라 한다.
계속되는 고문 소리에 토스카는 안젤로티가 카바라도시의 집 우물 속에 숨어있다는 말을 하고 만다.
안젤로티는 카바라도시가 자신을 배반한 줄 알고 자결한다.
자신의 말을 들어주면 연인 카바라도시를 가짜 총으로 쏘고 풀어주겠다는 말에 토스카는 응하는 척하다가 칼로 찔러 경찰서장을 살해한다.
한편 감옥에서 사형 1시간을 앞둔 카바라도시는 애절한 마음으로 토스카를 향해 ‘별은 빛나건만’을 노래한다.
이 장면에서 필자는 어찌나 가슴이 아픈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처형장에 간 토스카는 연인에게 경찰서장이 죽기 전에 약속했다며 가짜 총으로 쏠 테니 총소리가 나면 쓰러지는 연기를 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야비한 경찰은 약속을 어기고 진짜 총으로 카바라도시를 쏘았다.
이에 절망한 토스카 역시 권총으로 자살한다.
토스카가 언덕에서 뛰어내려 죽는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었는데 이번 작품에선 설정이 바뀌었다.
붉은 옷을 입고 열연한 토스카역의 가수는 긴 시간 여러 곡의 노래를 쉼 없이 하면서도 너무나 정열적이어서 찬사가 절로 나왔다.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연주와 주인공들의 최선을 다하는 노래가 매우 인상적이고 멋진 공연이었다.
비극으로 끝나서 안타깝지만, 감동적인 아름다운 무대였다.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임진·정유 국란의 왜군 출진기지는 규슈(九州) 서북 해안 나고야(名護屋) 성이다. 일본 중부의 중심도시 나고야(名古屋)와 구별하려고 히젠(肥前)이란 옛 지명을 붙여 ‘히젠 나고야’라 불리는 곳이다. 사가(佐賀) 현 가라쓰(唐津) 시에서 버스를 타고 해안선을 따라 40여 분 달리면 닿는 요부코(呼子) 포구 언덕 위에 있다.
굴곡이 심한 해안선 깊숙한 만(灣)에 얼마든지 배를 숨길 수 있고, 조선과의 거리가 제일 가까운 지리(地利)를 고루 갖추어 옛날부터 왜구의 소굴로 유명했던 곳이다.
26년 만에 다시 찾아본 나고야 성은 그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흘러간 옛 노래 ‘황성옛터’를 연상시키는 무너진 성벽이 옛날 그대로였다. 일본이 군신으로 떠받드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의 글씨로 ‘名護屋城址’라고 쓴 비석도 같은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헛꿈을 조롱한 쇼와(昭和) 시대 하이쿠 시인 아오키 겟토(靑木月斗)의 시비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
수십 년이 걸린 성터 발굴·복원사업이 끝났다지만 겉보기에 변한 것은 없었다. 주말 낮인데도 탐방객 발길이 뜸해 적막하기만 했다. 성터 입구에 자리 잡은 박물관과 그 앞에 조성된 상가만이 옛날에 없었던 건물이다.
도고 헤이하치로 글씨로 된 성적(城跡·성터) 비는 1930년, 겟토의 시비는 1940년에 세워졌다. 그러나 두 돌의 언어는 사뭇 다르다. 도고의 비에는 옛 성터라는 글자뿐이지만, 그것이 세워진 시대와 세운 자의 뜻에 히데요시의 대륙 정복 야망을 그리는 마음이 오롯이 드러나 보인다.
1930년이라면 일본의 만주 침략 야욕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대다. 내무성이 그 돌을 세우면서 러일전쟁 영웅에게 글씨를 부탁한 가슴 밑바닥에는 일본인들이 ‘역사상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존숭하는 뜻이 꿈틀거렸으리라.
1940년에 세워진 겟토 시비는 히데요시의 망상을 비웃는 것 같다. “다이코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지만 바다에는 안개만 자욱해.” ‘다이코(太閤)’란 천황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는 관백(關白) 자리를 아랫사람에게 물려주고 상왕처럼 물러앉은 이를 말한다. 히데요시는 조카(秀次·히데쓰구)에게 양위한 뒤에도 만사를 제멋대로 한 사람이다.
그런 권력자가 아무리 대륙 진출 야망으로 용을 써도 그 꿈은 안갯속에 가물가물하다는 뜻으로 읽히지 않는가. 실제로 성터에서 바라본 현해탄 바다에는 쓰시마의(對馬島) 모습조차 어렴풋했다.
26년 만의 탐방객을 놀라게 한 것은 성터에 우거진 고목나무 가지에 달려 있는 올레길 리본이었다. 처음 눈에 띈 것은 천수각 가는 길가 나뭇가지에 달린 것이었다. 반가워 카메라를 들이대니 일본인 탐방객이 “그게 무엇이기에 사진을 찍느냐”고 물었다. 한국 제주도 올레길 표시라는 말에 그들은 “천수대 터에도 많다”고 알려줬다. ‘제주 올레가 일본과 몽골에 수출되었다더니 여기까지 왔구나’ 싶어 너무 반가웠다.
그의 말이 맞았다. 금빛 찬란한 천수각이 있었다는 천수대 터에는 쇠막대기로 만들어 세운 올레 표지물도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가라쓰에서 규슈 서북단 히라도(平戶) 섬에 이르는 해안선 구간에 올레길이 조성되어 한국인 여행객에게 인기가 있다 한다. 나고야 성을 찾아가는 도로표지판마다 한글이 병기된 것도 그래서구나 싶었다. 7년 동안 나라를 풍전등화처럼 위태롭게 했던 왜란 출진기지가 평화의 길이 된 것을 400여 년 세월의 작용이라고만 보아 넘기기에는 좀 미진한 뒷맛이 남았다.
임진왜란 400주년 기획 시리즈 취재 차 나고야 성에 갔던 1991년에는 유적지 발굴사업이 한창이었다. 옛 성터를 정비해 관광자원으로 삼기 시작한 때여서 일본인 관광객 발길이 잦았다. 그 르포기사가 신문에 보도된 것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차츰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어 규슈 관광의 인기 코스가 되었으니, 세월의 두께를 새삼 음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모습 그대로 두는 것이 역사의 참뜻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무너진 성을 보존하기로 했습니다.” 그때 특파원을 안내해준 진제이(鎭西) 초(町·일본의 행정구역 단위) 직원은 복원사업이 현상을 그대로 두고 발굴만 하는 것이라 했다. 히데요시 이후 염전·반전사상의 결과로 폐허가 된 성을 그대로 두는 것도 역사의 뜻이라는 것이었다.
정작 옛 자취를 찾게 된 것은 나고야 성 주변에 촘촘히 자리 잡았던 130여 개 번국(藩國)의 진터다. 독재자 히데요시는 휘하 영주[大名]들에게 전쟁기간 중 출진 병사들을 거느리고 성 아래 대기하도록 요구했다. 출진 후의 병력보충 병참 등 임무를 강제했기 때문에 전국의 영주들은 수많은 예비 병력을 거느리고 눌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진터들은 전후 폐허가 되었다가 사유지로 바뀌어 흔적마저 감추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복원사업의 큰 틀은 그 땅을 사들여 옛 모습의 윤곽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박물관을 지어 전쟁의 배경과 경과, 그리고 양국 평화의 지향점을 모색하고 홍보하자는 것이었다.
나고야 성은 축성과 폐성이 모두 전광석화 같았다. 인구 20~30만 명의 거대한 병영도시 나고야 성은 번개같이 건설되어, 또 그렇게 해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최고 권력자가 사라지고 세상이 바뀌면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건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그처럼 철저하게 무참하게 파괴된 일은 흔하지 않으리라.
일본 통일의 꿈을 이룬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나라를 손아귀에 넣어 동아시아 패권을 잡겠다는 망상으로 1590년부터 대륙 침략을 꿈꾸기 시작한다. 중국은 물론 인도까지 영토를 넓혀 부하들에게 봉토를 나눠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 계획에 비판적이던 동생 히데나가(秀長)가 죽고, 천금보다 귀히 여기던 외아들 쓰루마쓰(鶴松)마저 잃어 심신이 극도로 피폐했던 1591년 8월, 그는 규슈 지방 영주들에게 ‘대륙 경영 사업’ 개시를 선언하고 적지에 출진기지를 건설하라고 명령한다.
당시 일본에 와 있던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의 에는 그때 일을 이렇게 묘사했다. “관백(히데요시)이 조선으로 가장 쉽게 건너갈 수 있는 항구가 어디인지를 묻자 가신들은 나고야로 불리는 아름다운 항구가 있는데, 수천 척의 선박이 안전하게 출입할 수 있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전국의 영주들을 나고야에 집결시키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각자의 부담으로 궁전과 해자와 저택으로 꾸려진 화려하고 넓은 성채들을 조속히 축조하되, 교토에 지은 것보다 뒤떨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문장에서 주목할 것은 교토에 뒤지지 않는 화려한 궁전과 성채를 영주들 각자의 부담으로 건설하라는 ‘후신(普請) 명령’이다. 후신이란 불교에서 민간에 널리 시주를 청해 불당이나 탑을 짓거나 수선하는 사업이란 뜻이지만, 절대 권력자가 영주들에게 갖가지 토목·건축사업을 시킨 일을 뜻했다. 나랏돈은 10원도 쓰지 않고 국책사업의 돈과 인력을 영주들에게 부담시켰으니, 아무리 봉건시대이라지만 어떻게 그런 횡포와 전제가 있었는지 흥미롭다.
프로이스는 영주들이 꼼짝 못하고 명령을 수행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다른 영주들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경쟁심이었다. 작업 중 사소한 부주의를 저지르면 감독들에게 공개적으로 질책을 당하게 되고, 그것이 관백에게 무능력자로 낙인찍혀 추방당하거나 재산을 몰수당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축성 책임자는 히데요시의 오른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공사 책임자는 뒷날 이 지역 영주가 된 데라자와 히로타카(寺澤廣高)였다. 원래 있었던 가키조에(垣添) 성을 헐어 규모를 크게 확장하고, 사방 3km 이내에 130여 번국 영주들의 진영(陣營)을 건설하는 일본 역사상 초유의 대토목 공사였다. 성 공사는 착공 6개월 만에 완공되었고, 영주들의 진영이 완성되는 데는 8개월이 걸렸다니 얼마나 공사를 서둘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본성 공사는 규슈 지역 20여 명의 영주들이 비용과 공력을 분담했고, 나머지 공사는 각 영주들 책임 아래 시행되었다. 해발 89m 나지막한 구릉 꼭대기에 혼마루(本丸)를 짓고,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5층 규모의 천수각을 세웠다. 그 아래로 니노마루, 산노마루 등 부속시설과 병사를 배치하고, 주변에 견고한 석축을 쌓아올려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었다. 외성은 주변에 해자를 둘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전형적인 왜성이었다. 성의 총면적 50만 평은 일본 최대의 오사카 성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성의 크기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 시대 인구 30만을 가진 도시는 오사카 말고는 없었다. 성내에는 히데요시의 측실(廁室)을 위한 사찰과 다실, 전통 가무극 ‘노(能)’ 공연장까지 있었다. 그 시대에 그려진 병풍도에는 성내의 건물 약 70여 동, 그 아래 조카마치(城下町)의 일반 백성 주택과 점포 260여 동, 진영 시설 70여 동 등 400여 동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나고야는 외국인 왕래가 잦은 국제도시이기도 했다. 병풍도에는 명나라 사절단 40여 명과 포르투갈인 등 260여 명의 통행인이 그려져 있는데, 이 가운데는 조선에서 잡혀온 포로들을 사들여 해외로 팔아넘기는 노예 상인들도 있다.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정희득(鄭希得)은 실기(實記) 에 “나고야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의 반 이상이 조선인”이라고 썼다. 그들 대다수가 붙잡혀간 사람들이었다.
통행인 가운데는 남자들 소매를 잡아끄는 유녀(遊女)의 모습도 보인다. 해안 거리에는 유곽과 술집이 줄지어 있고, 각 번의 진에서는 수많은 사졸이 할 일 없이 소일하고 있었다. 노예장사로 재미를 본 외국인들도 돈을 풀어 즐거움을 샀을 것이다.
발굴 작업 중 천수각 주변에서는 금박기와편이 많이 출토되었다. 벽면뿐 아니라 기와에도 금박을 입혀 금빛으로 번쩍이는 건물이었던 것이다. 이런 성의 건설과 전쟁 수행에 시달린 일본 민중의 고난이 기록으로 남았다. 병력 1만5000명을 할당받은 사쓰마(薩摩) 번(藩·제후가 통치하는 영지)의 경우 7000명이 넘는 아시가루(足輕·보병)와 6000명이 넘는 인부를 징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모두 농·어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이었다. 갖가지 무기와 장비, 병량과 말먹이, 군수품 및 병선 조달과 운용도 백성들 몫이었다.
백성들 고난은 그것으로도 모자랐다. 히데요시는 곧 조선으로 건너가겠다면서 중간에 머물 이키(壹岐) 섬과 쓰시마(對馬島)에도 성을 쌓고 궁을 지으라는 명령을 내려 부하들과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키 섬에는 아직도 그때의 성터가 뚜렷이 남아 있다. 백성들의 피땀을 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을 ‘아방궁’을 지은 것이다.
침략군 출진은 1592년 3월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번 대부터 하시바 히데카쓰(羽柴秀勝)의 9번 대까지 총출진 병력 15만8800명, 출진을 도운 예비부대와 병참요원 등을 합친 총인원은 30만5300명으로 기록돼 있다(역사군상 시리즈 ). 비탈진 구릉 도시에 인파가 북적거렸을 날에 비해 오늘의 정적(靜寂)과 정일(靜逸)은 너무 대조적이다.
히데요시는 침략군이 떠난 3월 26일 교토를 떠나 4월 25일 나고야에 착진(着陣), 1년을 머물며 전쟁을 지휘했다. 그 기간 협상 사절로 온 명나라 유격 심유경(沈維敬)을 접견하기도 하고, 여러 장수들이 조선에서 보내오는 보고서와 진귀한 전리품을 받아들고 천하를 얻은 듯 기고만장했다. 심유경의 거소는 명군 유격이 머물던 곳이라 ‘유게키마루(遊撃丸)’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런 영화의 무대였던 나고야 성은 전후 곧바로 참담하게 해체되었다. 히데요시가 죽고 가스미가세키 패권 전쟁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전투에 공을 세운 데라자와 히로타카에게 히젠 나고야 땅을 영지로 주었다. 성을 축조할 때 공사 총감독으로 기여하고 조선에 출병한 공로까지 인정한 것이다.
데라자와는 1602년 나고야 성을 허물고 가라쓰 해변에 자신의 성을 축조했다. 조선 침략의 상징물인 그 성을 허문 것은 일개 영주의 결정이 아니었다. 조선과의 무역 재개와 친선관계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이에야스는 성을 허물어 전쟁에 반대했던 자신의 뜻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었다. 전쟁 기간에 아버지와 남편을 잃었거나 오래 빼앗겼던 민중은 전쟁에 치를 떨었다. 7년 동안 헐벗고 굶주린 것이 모두 전쟁 탓이라 여겼던 민중의 염전사상(厭戰思想)은 하늘을 찔렀다. 반전사상과 염전사상은 지금 허물어진 성터 위에 아기 불상의 모습으로 남았다.
데라자와는 그렇게 허문 성석과 건물의 자재를 고스란히 자신의 성 쌓기에 사용했다. 마쓰우라(松浦) 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나지막한 구릉 위에 한껏 멋을 부려 쌓아올린 가라쓰 성은 멀리서 보면 학이 나래를 펴고 춤을 추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무학성(舞鶴城)이라 불린다.
그렇게 헐린 나고야 성은 얼마 후 일반 민중의 공격으로 또 한 번 상처를 입는다. 163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기독교 탄압과 가혹한 조세가 원인이었던 시마바라(島原) 민란 때였다.
성터 입구 ‘나고야 성 박물관’ 현관 앞에는 제주도 돌하르방 부자가 서서 탐방객을 맞아준다. 일본인들은 이 낯선 ‘수문장’ 앞에서 반드시 발길을 멈추고, 더러는 기념사진을 찍기도 한다. 이 박물관의 성격이 ‘일본열도와 조선반도의 교류사’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전시물이 한국 고미술의 상징인 반가사유상 복제품이다. 7세기 중국과 조선반도 문명의 영향을 받아 일본에 처음 율령 국가가 세워졌다는 설명문이 그 아래 붙어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이 거북선 모형이다. 실물보다 많이 축소된 것이지만 여수나 통영에서 본 것과 다르지 않다. 문을 들어서 처음 맞닥뜨리는 공간에 자리한 거북선 옆에는 당시의 일본 전함 아타케부네(安宅船) 모형과 두 나라 병기, 무복, 전황도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전쟁을 조명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지난 달 건국대 새천년관에서 재미있고 유쾌한 토크 콘서트가 열렸다. 주제는 성 평등이었다. 깊이 들어가면 그리 유쾌할 수만은 없는 남녀의 차별 문제도 제기되었다. 그래도 시종일관 분위기가 밝았던 건 사회를 본 최광기 여사 덕인 것 같다. 본인의 이름으로도 큰 웃음을 주었고 태어났을 당시 자매들의 출생신고가 아무렇게나 되었는데 딱 하나 아들을 낳자 그날로 출생신고를 하셨던 아버지를 예로 들며 태어나자마자 차별을 받았다고 고백해 청중을 웃겼다.
딸만 셋이었는데도 지극한 사랑을 주셨던 아버지 덕에 필자는 남녀차별을 전혀 모르고 자랐다. 주변 이야기를 들어보면 과거에는 아들과 딸의 차별이 아주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밝게 꾸며진 콘서트홀은 왠지 즐거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했다. 미국인이지만 이미 대한 미국인이라 불리는 '타일러'가 패널로 나와 특히 기대가 되었다. '타일러'는 요즘 모 방송의 '비정상회담' 원년 멤버로 나오고 '문제적 남자'라는 프로그램에서 대단한 뇌섹남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친정엄마와 필자는 타일러의 열성팬이다.
최광기 씨의 사회로 여성가족부 정현백 장관과 방송인 타일러, 개그맨 황영진, 좋은 연애연구소 김지윤 소장이 무대에 자리를 잡았다. 먼저 어린 시절의 고정관념이 남녀의 성차별에 큰 영향을 준다는 얘기로 시작했다. 남녀의 역할은 따로 있다는 식으로, 남자아이에게 “남자가 울면 어떡하니?”라고 하고 여자아이에게는 “여자가 칠칠치 못하게”라는 표현을 무의식으로 써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무심결에 한 말이 고스란히 아이에게 각인되어 결국 성차별이라는 고정관념이 생겼다는 설명이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약간의 걱정이 생겼다. 며칠 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세 살짜리 손자가 여섯 살짜리 손녀에게 용감한 포즈를 취하며 "누나는 내가 보호해줄 거야!"라고 했다. 아기가 한 그 말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마구 칭찬해주며 "그래, 누나는 여자니까 남자가 보호해줘야 해" 했는데 성 평등에 어긋나는 표현이었을까 우려가 됐다. 오랫동안 이어져온 고정관념이 사라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 평등으로 완성되는 나라다운 나라'의 주제로 진행된 토크쇼는 대한민국 남녀가 바라는 성 평등은 어떤 모습일지, 왜 지금 성 평등을 주장하는지에 대해 담론했다.
20~30세대 2000명에게 다시 태어나 성별을 바꾸고 싶은지 묻는 설문조사에서 남자는 37%, 여자는 무려 49.5%가 그렇다고 했다. 여자가 느끼는 성차별이 더 크다는 의미다. 정현백 장관은 50년 이상 지속되어온 호주제에서의 폐해와 똑똑한 여 제자가 취업할 때 받았던 불이익을 예로 들어 말해줬다. 그러나 새 정부도 여성 장관 기용 30% 공약을 지키는 등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변화의 바람을 잘 받아들이고 있다.
어떤 일을 할 때 남녀의 역할을 정하지 않고 잘할 수 있는 사람이 하면 된다는 해결책도 나왔다. 형광등은 꼭 남자가 갈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키가 좀 더 큰 사람이 하면 된다는 의견에 모두 찬성했다. 김지윤 소장은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역할을 정해야지 성에 따라서 할 일이 정해져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도 먼저 귀가한 사람이 식사 준비를 하면 되고 덜 피곤한 사람이 청소를 해야 한다는 의견에 많은 사람이 공감했다.
세계적으로도 성 평등 운동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UN이 추진하는 연대운동인 ‘He for She’는 성 평등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글로벌 캠페인이다. '화이트 리본'은 사라 제시카 파커와 카메론 디아즈 등 유명 할리우드 배우들이 참여해 화제가 되었다. 우리나라에도 45명의 남성이 성 평등을 실천하는 '성 평등 보이즈'라는 모임이 있다.
두 시간의 토크쇼가 마무리되면서 패널들에게 던져진 마지막 질문은 '내가 꿈꾸는 성 평등 대한민국은?'이었다. 정현백 장관은 '소통하고 이해하는 성숙한 민주 사회'라고 했고 김지윤 소장은 '누구나 원한다면 안전하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나라'라 했다. 필자가 좋아하는 대한미국인 타일러는 '아직 멀었다'라고 따끔하게 현실을 꼬집었다.
날씨가 매우 차가워졌다. 이제 정말 깊은 겨울의 길목에 들어선 듯하다.
쨍한 공기를 코끝으로 느끼며 대학로로 뮤지컬을 보러 나갔다.
제목만 보아서는 어떤 이야기일지 가늠이 안 되었지만, 박칼린 씨가 연출했다고 한다.
실력 있는 공연 연출가의 작품이니 탄탄하고 멋진 무대일 것으로 기대가 되었다.
주말의 대학로는 젊은이로 넘쳐났다.
생기발랄한 그들에 묻혀 필자도 젊은이가 된 듯 에너지가 솟았다.
공연시각보다 좀 일찍 나와서 이 골목 저 골목 산책을 하니 예전 뜨거웠던 대학로의 추억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하다.
공연장에 걸린 포스터를 보니 뮤지컬의 내용이 좀 짐작된다.
에어포트 베이비라면 공항의 아기이니 입양아 문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좀 무거운 주제일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이 작품은 2013년 제1회 ‘뮤지컬 하우스 블랙 앤 블루‘ 지원작으로 선정이 되었고 201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 뮤지컬 우수공연 제작지원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야기는 실존 인물을 토대로 제작된 진정성 있는 뮤지컬로 위트 있는 가사와 세련되고 서정적인 음악으로 관객에게 사랑받은 작품이라고 한다.
이제까지 보았던 대작 뮤지컬에는 유명연예인이나 뮤지컬 배우가 등장했는데 이 작품의 배우는 모두 필자에겐 생소해서 어떤 연기를 펼칠지 신선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무대가 열리고 공항의 안내음성이 흘러나오며 산뜻한 젊은이들의 경쾌한 노래와 춤이 시작되었다.
주인공 ‘조쉬’는 어렸을 때 백인들만 사는 애틀랜타 유대인 가정에 입양된 청년이다.
친구들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라는 놀림을 받았지만 따뜻한 양부모로부터 사랑을 받고 잘 컸다.
자라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던 ‘조쉬’는 뿌리를 찾아 20년 만에 한국으로 오게 된다.
그는 서울의 한 어학원에서 영어 강사를 하며 뿌리 찾기 여정을 시작하게 되는데 한국은 그에게 너무나도 낯설고 입양아라고 말하면 불쌍하다는 반응을 보이니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 음식이 그리워 이태원을 찾아가는데 우연히 들린 집이 게이 바 ‘딜리 댈리’이다.
그 집에는 ‘딜리아’라는 노인 게이와 두 명의 젊은 게이가 바를 운영하고 있다.
‘조쉬’의 이야기를 듣고 누구보다도 그의 감정을 이해하는 ‘딜리 댈리’ 식구들로부터 위로를 받고 그들의 도움으로 뿌리 찾기가 시작된다.
이 뮤지컬은 입양아 문제뿐 아니라 성 소수자인 게이에 관한 문제도 같이 다루었다.
게이라는 이유로 핍박받기도 하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사회현상으로 떠오른 젠트리피케이션 문제이다.
가족에게도 버림받고 이 특수한 곳을 떠나면 테러당한다는 공포를 안고 사는 이들의 처지가 안타까웠다.
그들의 도움으로 TV 출연을 한 후 외삼촌의 연락을 받고 그리운 엄마를 찾아가지만, 엄마는 그와 만남을 거부한다.
이에 두 번 버림받은 주인공이 애틋해 가슴이 아팠는데 엄마는 왜 그를 안 보려는 걸까?
몇 번을 찾아간 끝에 엄마를 만나 알게 된 사실은 참으로 슬펐다.
너무나도 어려웠던 당시의 형편에 '조쉬‘에겐 쌍둥이 형이 있어서 엄마는 어쩔 수 없이 동생을 입양 보내고 형과 함께 살았다.
양부모를 잘 만난 ‘조쉬’는 유복하게 잘 자랐지만, 엄마와 같이 살던 형은 어려운 형편에 일을 하다 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고생하다 죽은 큰아들 생각과 같이 키우지 못한 작은 아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엄마는 찾아온 아들 만나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아들을 생각하며 어쩔 수 없었던 그때를 후회하지 않는다는 주제곡을 열창할 때 관객석에선 흐느끼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렸고 필자도 손수건을 꺼내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게이 할아버지와 게이 청년을 연기한 배우들이 너무 멋진 열연을 해서 보는 내내 즐거웠다.
입양아지만 밝고 당당하게 잘 큰 주인공도 멋진 연기를 펼쳤고 관객에게 눈물을 흘리게 한 엄마역의 배우도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자칫 어두울 수 있는 내용인데도 밝고 경쾌한 노래와 춤이 즐거운 재미있고 탄탄한 뮤지컬이었다.
필자는 3년 전에 은퇴를 했다. 은퇴를 몇 년 앞두고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심하게 된 것은 은퇴 준비 없이 살아가는 노인들의 비극적인 삶이 매스컴을 통해 보게 되면서부터다.
필자도 쉼 없이 달려온 직장생활 43년 만에 완전한 자유인이 되었다. 각박한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던 깨알 같은 시간들을 뒤로 한 채 텅 빈 세상 속으로 내동댕이쳐진 듯한 허전함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 남편으로, 두 아이의 아버지로 허둥대며 살아왔던 시간들을 돌아보니 정녕 자신은 잊어버리고 살아온 지난날이었다.
어린 시절, 고향집 사랑방은 필자의 큰아버님께서 운영하시던 서당(書堂)이었다. 밤이 되면 사랑방에서 천자문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퍼졌다. 틈틈이 서당으로 불러 천자문을 읽고 쓰기를 가르쳐주셨던 큰아버님의 배려로 제법 붓 잡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서예 대가 김상용 선생님께 사사
정년퇴직 후에는 그동안 잊고 살아온 서예를 다시 해보겠다는 희망의 불씨를 가슴속에 품고 있었다. 아마도 어린 시절의 천자문 읽는 소리와 아련한 묵향이 내면에 잠재되어 있었던 것 같다. 퇴직이 몇 년 안 남은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서예 대가 김상용 선생님을 만나 정식으로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비록 늦은 나이에 입문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연마하던 필자에게 선생님은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지도해주셨고 글쓰기 이전에 마음가짐의 정갈함을 늘 강조했다.
어느 날 오후, 종로3가에 있는 서실(書室)을 찾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서예 개인지도를 받는 곳이었다. 필자는 각별히 신경을 써주시는 스승님을 위해 가끔씩 간식을 준비해 찾아가곤 했다. 그날도 간식거리를 준비해 서실을 찾았는데 마침 후배 문하생이 지도를 받고 있었다. 느닷없이 필자가 등장하자 그날의 마지막 수업을 끝내신 선생님께서는 막걸리 한잔 하자며 극구 붙드셨다.
평소에도 선생님과 가끔씩 들르는 종로3가 단골 녹두빈대떡 집에서 스승과 제자가 막걸리 사발을 앞에 놓고 세상 사는 얘기에 푹 빠졌다. 선생님은 값비싼 양주에 진수성찬을 차려준다 해도 이렇게 조촐한 이야깃거리를 안주 삼아 기울이는 막걸리 한 잔이 훨씬 더 행복하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선생님과 호젓한 빈대떡집에 마주 앉아 ‘막걸리 한잔의 행복!’으로 담소삼매경에 빠지다 보니 어린 시절 시린 손 호호 불며 주전자 들고 막걸리 받으러 가던 추억이 떠올랐다. 고사리손에 주전자 들고 고개를 넘던 기억은 아버지와 관련한 소중한 추억 중 하나다.
필자는 서예에 입문하면서 선생님의 지도하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면서 붓글씨를 배워나갔다. 다음 시간까지 해갈 과제물을 숙제로 받아오는 날이면 자정이 넘는 시간까지 몇 번이고 쓰기를 반복했다. 다음 날, 그중 제일 잘 썼다고 생각되는 한 점을 골라 의기양양하게 서실로 달려가면 선생님은 가차없이 따끔한 지적을 하셨다.
어쩌랴! 다음번 과제물을 받아와 선생님께서 지적했던 부분을 염두에 두고 또다시 붓과 씨름했다. 묵향에 취해 어질어질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정진했다.
선배 문우들과 함께한 전시회
2010년 초, 우연한 기회에 중국 산둥 성의 동남부에 위치한 린이(臨沂) 시를 여행하게 되었다. 당연히 린이 시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왕희지의 고택을 방문했다. 서성(書聖)으로 존경받는 동진의 서예가 왕희지는 지금의 산둥 성 린이 현에서 태어났으며 동한 시대에 시작된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의 실용서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완성시킨 인물이다. 서예 공부를 하던 중 돌아보게 된 왕희지의 발자취는 필자를 더욱 분발하도록 했다.
가을 냄새가 물씬 풍기던 2013년 11월의 어느 날, 인사동 모 전시회관에서 그동안 틈틈이 갈고닦았던 서예작품 전시회를 가졌다. 턱없이 부족한 필력이었지만 까마득히 높은 선배 문우들 틈에서 몇 점을 출품하게 되었다. 비록 열심히 했다고는 하지만 경력이 일천한 관계로 선배 문우님들 눈에는 그저 보잘것없는 작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좀 더 정진하는 계기로 삼고자 겁 없이 전시회에 명함을 내밀었다. 하기야 처음부터 잘 쓴 사람은 없겠지만 공부를 할수록 어렵다는 생각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떠올리며 스스로 부족함을 깨닫고자 해서였다.
쉼 없는 도전정신은 내면의 자아를 새롭게 발견하게 해준다. ‘정년퇴직’은 은퇴자의 무덤이 아니다. 비로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즐기도록 해주는 반전의 기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시니어들이여, 용기를 내어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해보자!”
자녀가 특별히 아픈 데도 없는데 유독 또래보다 성장률이 떨어질 때 흔히 성장 부진을 걱정하게 된다. 하지만 특정 질병을 나타내는 확실한 증상이나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의 통증이 동반되지 않는데 또래보다 성장이 늦고 잦은 피로감을 보이는 등 유독 허약한 체질로 보인다면, 원인 모를 성장 부진이 아닌 소아 갑상선 기능 장애로 인한 성장 이상을 의심해 볼 수 있다.
소아 갑상선 장애는 갑상선이나 갑상선 호르몬 분비를 조절하는 뇌하수체가 제 기능을 못해 갑상선 호르몬이 너무 적게 분비되거나 과잉 분비되는 질환으로 소아에서 발생하는 내분비질환 중 가장 흔한 질환 중 하나다.
성장기 아이들의 갑상선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에는 호르몬 균형이 깨지며 정상적으로 발육하지 못하는 성장 부진을 보이거나, 또래보다 과도하게 성장이 빠르게 진행되어 8~9세에 고환, 유방 등이 커지는 등 2차 성징이 시작되는 성조숙증으로 발전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최근 몇 년 사이 진료 현장에도 평소 허약하던 아이가 혈액검사 등을 통해 갑상선 기능 장애 질환을 받았다며 찾아오는 소아 환자들이 늘었다. 실제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갑상선 장애 환자 100명 중 3명, 즉 2.9%가 20세 미만 청소년인 것으로 조사됐으며, 주로 성인의 질병으로 인식되던 갑상선 기능 장애가 아이들에게도 늘어나고 있다.
하우연한의원 윤정선 원장은 “소아 갑상선 기능 장애는 발견이 늦고 치료도 더딘 편이라 더욱 보호자의 주의 깊은 관심이 필요하다. 아이들의 경우 자신이 느끼는 불편감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워하고, 갑상선 기능 장애 관련은 매우 다양해 오랜 시간에 걸쳐 매우 서서히 진행하기 때문에 아이 스스로 자각 증상을 뚜렷하게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아이들의 갑상선 기능에 문제가 생긴 것인지 제때 알기 위해선 검사에 앞서 평소 발육 상태나 증상을 눈여겨 보는 것이 좋다.
갑상선 항진증의 경우 갑상선 호르몬이 과다하게 분비되어 체력 소모가 심해지고 쉽게 피로를 느낀다. 여름철에는 더위를 쉽게 타고 땀이 많이 나며, 평소 가벼운 운동에 숨이 찬다. 또 신경이 예민해 사소한 일에 쉽게 흥분하며 화를 잘 낸다. 학습 능력 또한 집중이 어려워 불안을 자주 호소한다. 흔히 여아에게 자주 일어나며 주로 11~15세에 발병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갑상선 저하증의 경우 열과 에너지 생성에 필수적인 갑상선 호르몬이 부족한 경우로 온몸의 기능이 저하 된다. 이로 인해 유독 추위를 잘 타며 땀이 잘 나지 않고 쉽게 피부가 건조하고 창백해진다. 역시 쉽게 피로해지며 손발이 쉽게 붓고 입맛이 없어지며 잘 먹지 않는데도 몸이 자주 붓는다. 학습에 의욕을 잃고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지며 기억력이 감퇴 되기도 한다. 또 갑상선 항진증은 잦은 설사를 보이지만, 갑상선 저하증은 잦은 변비를 보이는 등 배변 활동에 문제가 생긴다.
흔히 소아 질환의 경우 아직 완전히 자라지 않은 아이들의 몸을 생각해 무조건 적인 약물보다 식품으로 먼저 치유하려는 경향이 있다. 갑상선의 경우 요오드가 장기간 결핍되거나 과다하게 투여되면 기능 이상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요오드가 함유된 음식을 과잉 섭취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별 효과가 없다.
요오드가 함유된 식품으로는 김, 미역, 다시마 등의 해조류가 대표적으로, 평범한 해조류 집 반찬에서도 충분히 섭취할 수 있다. 오히려 요오드 성분이 다량 함유된 영양제 등은 자칫 과복용 위험이 있어 전문가와 상의하는 것이 좋다.
검사를 통해 갑상선장애가 진단된 경우 성인은 조절하는 약물을 처방받고, 정기적으로 갑상선 기능을 검사하며 평생 관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자제력이 약하고 한창 성장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전반적인 체질에 맞춘 생활습관 교정, 식단 점검 등이 체계적으로 함께 교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심한 경우가 아니라면 무조건 약물치료에 의존하기보다 갑상선 기능회복과 바른 성장을 위한 한방치료도 방법이다. 하우연한의원 윤정선 원장은 “호르몬 기능 이상으로 인한 식욕부진은 스트레스로 인해 머리가 화로 올라가는 것이 원인이 되기 때문에 열을 내려주는 한약을 통해 아이의 에너지를 순환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갑상선 증상 외에 성조숙증, 빠른 초경, 성장 부진을 치료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아이의 체질에 맞춘 처방으로 전반적인 신진대사와 면역 기능의 균형을 유지해서 소아 갑상선기능장애가 원인이 되는 성조숙증과 빠른 초경, 성장 부진은 한방으로 제때 접근해서 치료해야 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