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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이상 자식이 보험이 아닌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 인생후배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노후준비는 빠를수록 좋다. 필자는 늙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필자가 젊은 시절 연세 드신 분들의 모임에 가보면 부담스럽고 어렵게 느껴져서 왠만 하면 가기가 싫었다. 무언가 칙칙한 느낌이랄까?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저도 그런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가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아니 젊은이들이 볼때는 필자도 불편한 존재가 이미 되어있다는 것이다. 요즘 의학적으로 수명연장에 대한 연구가 많아져 얼마전 백세인생라는 노래가 유행하면서 이미 100세 시대는 당연하게 인지되고 있다. 살고 있는 동안 더 의학연구가 이어져서 120세까지 살아갈 준비를 해야 된다고 말이 돈다. 우리의 세대까지는 시간과 물질과 정성으로 부모를 봉양한 세대이지만, 막상 우리의 노후는 이제 우리세대 스스로 자신의 노후를 책임져야 하는 현실에 서 있다. 자녀가 곧 보험이라는 말도 옛말이 되었다. 큰아이가 막내학비를 해주면서 키우다 시피 하는 시대가 이미 아닌 것이다. 과거 봉지 쌀을 사먹고 연탄으로 난방과 식사준비를 하고 전화있는 집이 부의상징이 되던 그 오래전 시대에 비하면 지금 우리나라는 방방마다 tv가 있고 가족수만큼 휴대전화도 있는 아주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환갑잔치 요즘 안한다. 이미 80세어르신들도 많기에 환갑나이는 청년이라고 하면서 아예 자녀들도 특별히 생각하지 않고 여느생일 때처럼 지낸다. 65세가 되면 전철무료로 탈수 있고 기초노령연금이 나오긴 하지만 그것으로 다 노후생활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노후에 왜이리 경조사문자와 카톡은 날아오는지 먹고 사는 것보다 사람노릇하고 살기가 더 비용이 많이 든다고 한다. 그래서 필자도 큰아들때는 알렸던 하객을 지난주 결혼시킬때는 100명이나 줄여서 초대했다. 시니어들의 부담을 드리기 위해 부르지 않은 것이다. 어떤시니어분이 빈봉투만 내고 식권타고 어울리고 간뒤에 보니 죄송합니다. 라는 멘트만 봉투속에 펼지로 있었다는 이야기가 시니어들사이에 돌정도이니 그 심각성을 알만하다. 많은 시니어분들이 그중에 남성어르신분들이 일하고 싶은 이유중에는 아내분인 할머니에게 뭔가 일하고 있는 모습과 매끼니 집에서 먹는 것이 미안해서이고 손자손녀에게 용돈도 주는 기쁨을 느끼고 싶어서라고 한다. 노후준비 하루라도 빨리하라고 인생후배님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어서 글을 쓴다.
- 2016-09-19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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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의 쟁취는 자기하기 나름이다
- 학교 동창회에 나가보면 학교 다닐 떼는 공부도 별로고 집안 형편도 그저 그렇던 동창이 몇 십 년이 흘러 지금 보니 비까번쩍 잘 나가는 사람이 있다. 10년이면 산천도 변한다했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몇 십 년이 흘렀으니 산천이 바뀌어도 몇 번이나 바뀔 시간이다. 하물며 살아있는 사람이 변하지 않을 수는 없다. 정말 좋은 쪽으로 많이 변했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함께 직장생활을 했는데도 결과가 다른 사람이 있다. 같이 입사해서 급여도 비슷하게 받았고 퇴직한지도 몇 년의 차이에 불과한데 발 빠르게 제2의 인생에 성공해서 바쁘게 활동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는 일 없이 여기저기 기웃기웃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직장에서 같은 삶을 산 것처럼 보여도 물밑에서는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A씨는 나와 비슷한 연배지만 늘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생각이 아주 긍정적이다. 예를 들어 집이 서울인 사람이 제주도로 발령이 났다면 일부는 좌천되었다고 울분을 토하는 사람도 있지만 일부는 경치 좋은 곳에서 구경이나 실컷 하겠다고 주말이면 한라산이나 오름도 오르고 이곳저곳관광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다. 또 더러는 객지생활에 한 가지라도 이루겠다고 육지보다 비용이 저렴한 골프에 매진하는 사람도 있고 공부에 올인 하는 사람도 봤다. 어떠한 경우에도 전화위복의 정신으로 자기에게 유리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결국 성공을 쟁취한다. A씨도 제주도로 발령을 받았다. 제주도에 왔으니 제주도에만 가능한 일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제주도 사투리를 열심히 듣고 토박이한테 배우며 제주 말을 기록해 나갔다. 제주도 토박이 할머니 말은 육지 사람들은 알아듣기 어렵다. 토박이 할머니의 전화가 오면 얼른 제주 토박이 직원에게 전화를 바꾸어 주는데 A씨는 땀을 뻘뻘 흘리며 상대의 말을 받아 적으며 어렵게 통화를 이어갔다 제주 사투리 모음집을 발간하기 위한 그의 노력이다. 육지 사람이 이해 못하는 제주도 말이 많다. 한라산을 오르는 시작점인 성판악 가게의 간판이 “옴팡 속았수다.”라고 표기되어있다. 처음엔 물건을 잘 못 사서 ‘완전히 바가지 썼다.’라고 이해했다. 그런데 아니다. ‘대단히 수고 하셨습니다.’ 라는 뜻이란다. 나도 40대의 술집 여주인이 제주도 토속 노래를 부르는데 한마다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억양으로 말이 참 아름답구나 하는 느낌은 받았다. 글자와 말은 다르다. 사투리의 억양을 그대로 글로 옮겨도 육지사람이 발음하면 어색하다. 발음의 강약이나 장단에 따라 뜻이 다른 말이 있다. ‘밤’이라하면 글자는 같아도 깜깜한 밤도 있고 먹는 밤도 있다. 발음을 제대로 표기하며 적는 것이 어렵다. A는 노력은 하였지만 처음 의도한 제주도 사투리 해설집 발간은 실패했다. 그의 실패의 변으로는 육지로 발령을 받아 다시 나오게 된 것이 주된 이유라고 한다. A씨는 화재사고 현장에서 화재원인 조사업무를 담당했다. 이것이 발전되어 조선시대에는 사망사고가 발생되면 어떻게 수사를 하고 분류를 하는지에 대해서도 조사를 하기시작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단편글로 여러 편을 쓰기도 했다. A씨는 지금 화재원인 조사 분야에서 대우 받아가며 계속 일을 하고 있다. 같은 길을 걸어가는 것 같아도 자세히 보면 누구나 좀 다르다. 결국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한 방향으로 나가는 사람이 결국 성공한다.
- 2016-09-19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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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이요? 딸하고 살려고 해요
- 살고 있는 아파트에 유치원이나 유아원 버스가 오면 직장에 출근한 엄마. 아빠를 대신하여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서 원생들을 데리러 온 선생님에게 인계하고 빠이빠이 손을 흔드는 모습을 자주 본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행복한 함박웃음을 짓고 아이들은 재잘거리며 버스에 오른다. 조심스럽게 아이와의 관계를 물어보면 대부분 외손자. 외손녀라고 답을 한다. 자식들이 인근에 살면서 출근 전에 아이들을 할머니 댁에 맡기고 가기도 하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자식들 집에 아침마다 오기도 한다. 어떤 집은 아예 딸이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집에서 숙식을 함께하며 산다. 어떤 할머니는 딸 식구들을 데리고 있는 것이 창피한지 속마음과 다르게 ‘딸년은 도둑년이야 사위 놈은 더 나쁜 놈이고’ 하고 웃지만 퍼줘도 기분 좋은 딸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보리쌀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만큼 처가에 얹혀사는 것이 남자들의 수치로 여겼다. 하지만 요즘은 아니다. 은퇴한 노인부모들이 의료, 간병이슈의 돌파구를 딸에게서 찾으려는 심리가 강하다고 한다. (은퇴위기의 중년 보고서, 전용수 지음에서 인용) 우리보다 고령화 사회에 먼저 진입한 일본의 예도 딸이 우선이다. 일본의 ‘다이이치생명경제연구소’에 따르면 대도시 고령부부의 근거리에 살고 있는 자녀의 남녀 비율을 조사했는데 1시간이내 거리는 딸(75%)이 아들(55%)보다 많다 (2012년도 통계임) 30분이내도 각각 51%, 42%로 딸의 승리다. 딸이 가까이 살면서 부모와 일상을 공유하며 긴밀한 가족관계를 유지한다는 증거다. 또 다른 재미있는 통계도 있다. ‘곤란해 질 때 누구에게 의지하느냐’에 딸(86%)이 아들(76%)보다 높게 나왔다. 기억력, 판단력이 흐려진 것을 눈치 채는 것도 딸(86%)이 아들(76%)보다 먼저다. 돈독한 모녀관계에서 일상교류가 훨씬 잦다는 의미다. 2~3일 한번이상 대화한다는 응답자는 ‘딸+엄마(60)%)가 아들+엄마(26%)보다 압도적으로 높다. 딸+아빠(42%)도 아들+아빠(23%)보다 높다. 점점 모계사회로 흘러가는 것을 감지한다. 우리의 부모들은 딸은 출가외인 이라 하여 시집보내면 끝이었다. 재산을 물려주지 않는 것이 보편화 시대로 살았다. 지금도 결혼할 때 집을 구하는 쪽은 남자 쪽이니 비용부담이 아들이 크다. 아들은 가문의 혈통을 잇고 재사를 지내주고 집안의 기둥 같은 존재라고 인식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딸에게 쏠리고 있는 세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아들하고 살면 며느리가 좋아하나요. 딸하고 살려고 해요. 각종 통계가 이 말을 뒷받침 한다.
- 2016-09-19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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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생 끝 영화
-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부임지로 떠나는 화려한 사또 행차를 밭 매는 남루한 아낙이 부러운 듯 한마디 합니다. ‘저 사또의 아내는 얼마나 행복할까?’ 사또가 그 소리를 들었는지 가마에서 내려 아낙에게 다가 옵니다. ‘이 여인아 조금만 더 참지!’ 사또가 한숨 쉬며 한 말입니다. 그 아낙은 장원급제하기전의 사또의 본처였는데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개가 한 여인입니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며 어떤 일이 있더라도 참을 인(忍)자 세 번을 마음속으로 쓰면 살인(殺人)할 일이 없다고 참으라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오늘 전철에서 60대 후반의 할머니 두 분이 내 옆에 앉았습니다. 두 분의 대화를 자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바람을 피워서 집에 들어오지 않는지가 1년이 되었고 며느리는 10살 된 아들과 살고 있는데 언젠가는 남편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살고 있는 걸 보면 기특하기도 하고 마음이 짠하다고 합니다. 우리의 어머니세대는 남편이 첩을 얻거나 아내를 유기하여도 꾹 참고 남편이 돌아오기만 기다렸습니다. 착한 며느리는 직장 다니면서 할머니가 아프다면 병원에 모시고 가고 용돈 쓰라고 지난달에도 백 만 원이나 보내왔다고 합니다. 며느리가 안쓰러워 아들과 동거하고 있는 여자네 집에 가서 여자를 때려죽인다고 벼르고 갔는데 이 여자가 말하길 ‘나는 오직 이 남자만 있으면 됩니다. 혼인신고도 바라지 않고 돈도 바라지 않습니다.’라고 무릎 꿇고 애원하는 바람에 ‘왜 진작 만나지 늦게 만나서 이 고생을 하느냐!’ 는 말만하고 그냥 돌아왔다고 합니다. 결혼하고 가정을 돌보지 않는 아들을 때려죽인다고 가야지 아들은 감싸며 금지옥엽 남의 딸을 때려죽인다는 마음이 옳지 못한 것 같아 쓴 웃음이 나왔습니다. 사랑에는 국경도 없고 왕관도 버린다고 합니다. 숭고한 사랑은 어떤 역경도 헤쳐 나갈 원동력이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불륜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남자들은 시간이 지나면 자식이 있는 본처에게 대부분 돌아옵니다. 주위에도 보면 남편이 중풍이 들어 첩에게 버림받고 본처에게 돌아오거나 늙어서 찾아오는 경우를 봅니다. 이렇게 돌아온 남편을 보고 고생 끝에 영화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아름다워야 할 젊은 날은 세월과 함께 사라져버리고 머리에는 하얀 서리가 내렸는데 무슨 염치로 병든 육신을 끌고 본처라고 아내의 집을 찾아오는지 참 뻔뻔합니다. 이제 돌아와서 뭘 어쩌자는 겁니까! 둘 부부사이에 사랑과 이별은 그렇다 치고 거기서 태어난 아이는 어찌 합니까 어머니가 시시때때로 아버지의 원망을 알게 모르게 내 뱉었을 텐데 아이가 정상적인 성격으로 자랐을 것이라 믿으면 너무 순진한 생각입니다.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에서도 별거나 이혼을 쉽게 그리고 있습니다. 거기서 파생되는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는 드라마는 부족합니다. 더욱 불행하게 하여 시청률을 높이고 있습니다. 전철에서 듣게 된 할머니의 아들이 더 늦기 전에 본처에게 돌아오고 재산도 필요 없고 오직 그 잘난 사랑밖에 난 몰라 하는 여자도 정신 차리고 새 출발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 2016-09-12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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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전람회
- 파란 하늘빛으로 상큼한 9월이 시작된 첫 주말에 모처럼 아들, 며느리 손녀 손자와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샤갈, 달리, 뷔페 전시회에 다녀왔다. 초대권이 있어 나서긴 했지만 어린 손녀, 손자와 그림을 감상한다는 게 좀 무리일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기는 했다. 꼭 보고 싶은 그림전시회인데 아기들이 소란을 피우거나 지루해하면 빨리 퇴장해야 할 테니 아쉬울 것 같았다. 그렇지만 예술의 전당 광장에서는 시간에 맞추어 분수 쇼도 펼쳐지고 있으니 꼭 그림 감상만 생각하지 않고 즐거운 나들이에 나섰다. 주말이어선지 관람객이 상당히 많았으며 미술 공부하는 학생들인 듯 단체로 온 사람도 꽤 보였다. 마르크 샤갈, 살바도르 달리, 베르나르 뷔페. 이들은 세계 현대 미술을 이끈 거장들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유화, 판화, 드로잉, 조각 작품으로 총 128점이 전시되었는데 수채물감과 비슷한 ‘과슈’ 작품도 볼 수 있었다. 세 사람의 스타일은 각기 다르지만, 평생 독창적인 자신만의 세계를 유지하며 작품 활동을 쉬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 중 샤갈과 달리는 익히 들었던 이름이고 작품도 많이 보았지만, 솔직히 뷔페는 생소해서 작품을 보기 전에 미리 검색해 보았더니 프랑스에서 태어났고 생전에 상업적 성공으로 부유하게 살았지만, 말년에 파킨슨병을 앓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이라 한다. 그런데 전시회 퇴장하는 문 앞에 감동한 세 거장에게 스티커 붙이는 판이 있는데 뷔페의 판에 가장 많은 사람이 스티커를 붙여서 그의 인기를 알 수 있었다. 전에 마크 로스코 전시회 때는 도슨트가 있어 설명을 들으며 작품을 감상했었지만 이번 전시회에 도슨트는 따로 없어 설명문을 열심히 봐야만 했다. “삶이 언젠가 끝나는 것이라면, 삶은 사랑과 희망의 색으로 칠해야 한다”고 말한 샤갈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 등 폭풍 같은 세계사를 온몸으로 맞으며 희망과 좌절을 동시에 겪었고 고난 속에 살면서도 자신의 예술세계만은 좌절의 수렁에 빠트리지 않고 꽃과 동물, 자유로운 연인들의 모습 등으로 오늘의 고통 속에서도 아름다운 미래를 그려냈다. “나에게 그림은 창문이다. 나는 그것을 통해 다른 세계로 날아간다.” 샤갈의 작품 속에서 만날 수 있는 풍경이 떠오르는 말이다.미친 사람 같다는 평을 들은 광기 어린 천재 화가 달리는 ‘나는 미치지 않았다’며 세간의 편견을 일축했다. 그가 매우 독특한 인물로 비친 것은 강렬한 콧수염과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표정, 그리고 기발한 아이디어와 예술적 성취에서 비롯되었는데 달리가 말했다. “나는 매일 내가 살바도르 달리라는 최고의 희열과 함께 눈을 뜬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묻는다. 오늘, 나 살바도르 달리는 어떤 놀라운 일을 할 거냐고.” 매우 자신감 넘치는 매력적인 작가로 느껴진다.베르나르 뷔페는 1950년대 당시 ‘모던아트의 모차르트’라는 평을 받으며 피카소의 대항마로 여겨졌다는데 그의 작품은 쓸쓸하고 메말랐으며 삭막하기 짝이 없다. ‘가감 없는 직시와 표현, 쓸데없는 화장으로 희망을 고문하지 말자’가 작품 속에 표현되어 있고 또한. 뷔페는 자신의 화풍에 대해 ‘즐거우려면 서커스에 가라. 미술이 세상을 즐겁게 할 필요는 없다.’ 고 한마디로 정리해 주었다고 한다.다섯 살 어린 손녀의 손을 잡고 감상을 시작했다. 달리의 유명한 늘어진 시계 작품을 본 우리 손녀가 “할머니, 저 시계가 잠자나 봐요, 아니면 녹아내리고 있나?”라고 한다. 매우 정확하고 귀여운 표현에 놀라며 우리 어린 손녀가 벌써 미술 보는 눈이 있는 건가? 팔불출이 발동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직은 작품을 만지려 하기도 해서 통제하느라 힘들었지만 이런 전시회나 공연에 자주 데리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손자가 지루한지 보채기 시작해 좀 일찍 퇴장했다. 아이스크림도 사 먹고 멋진 음악에 맞춰 피어오르는 분수의 화려한 모습에 아이들과 함께 매우 즐거웠다. 먼 훗날 손녀가 할머니와의 미술전시회 나들이를 즐거웠다고 기억해 준다면 행복할 것 같다.
- 2016-09-12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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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변화가 된 이 한권의 책] 월터 레어드(Walter Laird)의 테크닉 오브 라틴댄싱(Technique of Latin Dancing)
- 2003년이니 스포츠 댄스를 배운지 10년쯤 되었을 무렵이다. 당시만 해도 댄스에 대한 이미지도 아직 개선되지 않았었고, 스포츠댄스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스포츠 댄스를 가르친다 하여 등록했으나 배우다 보니 스포츠 댄스가 아닌 포크댄스였다. 지터벅 같은 사교댄스를 가르치기도 했다. 3년쯤 지나자 그 강사 밑에서는 더 배울 것도 없고 지루해 하던 차에 집이 이사 가면서 집근처 다른 문화센터로 옮겼다. 이 강사는 스포츠 댄스를 제대로 배운 사람으로 덕분에 많이 배웠다. 그러나 강사의 동작을 따라 하는 교습 방식이라 늘 이론에 목이 말랐다. 그런데 “춤은 몸으로 하는 것이지 이론은 필요 없다”며 이론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다시 다른 사정이 있어 다른 곳으로 옮겨 라틴댄스를 배우게 되었다. 내가 전체 회장이 되면서 강사와 가까워졌다. 어느 날 강사의 차 안에서 표지도 없이 너덜너덜한 상태로 굴러다니는 책 한권을 발견하고 호기심 있게 봤다. 스포츠 댄스의 모든 종목과 모든 동작이 남녀 스텝 따로 자세히 나와 있는 책이었다. 다만, 영어로 되어 있고 각 스텝이 차트 방식으로 정리 되어 있었다. 중국 무술 영화에서 비장의 기술을 적어 놓은 책 같은 영감을 받았다. 비기가 적혀 있는 책을 습득하기만 하면 산 속에 들어가 혼자 연마하여 중원의 일인자가 된다는 중국 영화가 많았다. 그 책에 대해 강사에게 물었으나 영어가 약한 강사는 더 얘기해줄 것이 없다고만 했다. 다만 그간 원어인 영어로 하자니 혀도 안돌아가고 수강생들도 못 알아들으니 춤 동작은 번호로 통 했었다. “자이브 1번부터 10번까지 해 보세요” 식이다. 이 책을 보니 동작의 이름이 명확하게 나와 있었다. 영어에는 자신이 있던 터라 책을 빌려 탐독했다. 그러나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는 공개하지 않는 조건이었다. 일종의 비밀서책인 셈이다. 이 책 덕분에 인터넷에 내 이름으로 댄스에 대한 칼럼을 올리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댄스를 말로 풀어주는 칼럼이 없었던 것이다. 어느 날 이 강사가 압구정동에 있는 한 강사를 소개시켜줬다. 이 책을 공부해서 댄스의 본고장 영국에 가서 세계적인 강사에게 레슨을 받고 국제 댄스 지도자 자격증을 따 온다는 프로그램이었다. 표지도 떨어져 나가 그간 제목도 모르던 이 책이 월터 레어드가 쓴 ‘테크닉 오브 라틴댄싱’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룸바, 차차차, 자이브, 삼바, 파소도블레의 남자 동작, 여자 동작의 모든 스텝, 타이밍, 박자, 다리 위치, 발바닥 사용법, 액션 명칭, 회전량, 선행 동작, 후행 동작 등이 나와 있다. 이 책을 통째로 달달 외우고 각 스텝을 몸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처음에는 희망자가 10명이 넘었으나 갈수록 사람이 줄어 6개월이 지난 후에는 여자 프로 선수 한명과 나만 남았다. 영어로 배우는 수업도 어려웠고 매일 개인 레슨 방식으로 이론을 배운다는 것이 쉽지 않은 노릇이었다. 결국 두 명이 대망의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런던의 100년 넘은 유서 깊은 ‘쌤리 댄스스쿨’이란 곳이었다. 세계 챔피언 급의 유명 선수들이 와서 연습하고 배우고 하는 곳이다. 내 담당 강사는 쥰 먹머르도(June MucMurdo)라는 70대 할머니였다. 월터 레어드가 1961년에 라틴댄스를 세계에서 최초로 체계화 하여 이 책을 만들 때 옆에서 타이핑하던 비서였다고 했다. 댄스도 같이 배워 그 당시 이미 댄스계의 유명인사이며 세계적인 댄스 강사였다. 그런 사람을 스승으로 두고 배운다는 것은 내 댄스 인생에서 큰 영광이었다. 실제로 자격증 시험 과정에서 커플댄스 시연이 있는데 그 선생이 내 파트너가 되어 같이 5종목을 다 보여 줬다. 그리고 조목조목 각 세부 동작에 대한 이해를 묻는 실기와 이론 시럼을 무사히 마치고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같이 갔던 여자 프로 선수는 영어가 약했기에 책 하나를 통째로 외우는데 애를 먹었다. 새벽6시부터 밤 12시까지 학원에 나가 스텝을 익히고 책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으나 시험 보름을 앞두고 정신 장애를 일으켰다. 너무나 육중한 스트레스를 이겨 내지 못한 것이다. 영어로 된 책을 머리로 이해해야 하는데 그냥 외워서 하려니 몸 따로 이론 따로 였다. 유사한 동작들이 서로 엉켜 머리가 백지가 되었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도 시험을 보고 왔다. 영국에서 돌아오자마자 필자는 댄스 이론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월터 레어드의 ‘테크닉 오브 라틴댄싱’ 책을 완벽하게 공부하고 온 최초의 동호인이라 자신감이 넘쳤다. 전국 유명 인터넷 댄스 카페에 필자 이름으로 된 방에 댄스 칼럼을 올렸다. 업계 유일의 전문잡지 ‘댄스스포츠코리아’에 편집 기자로도 활동했다. 필자 이름으로 된 댄스 책을 그 후에 5권 냈다. 모두 월터 레어드의 책이 바탕이 된 것이다. 이 책은 필자의 인생 이모작에서 확실히 내 인생을 바꿔준 책이 되었다.
- 2016-09-05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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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절날 고향 찾는 것 그 끝은 언제인가
- 머지않아 추석이 다가옵니다. 설날이나 추석은 우리민족의 최고의 명절입니다. 고향의 부모님을 찾아뵙고 차례를 지내고 동기간에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행복입니다. 명절날은 객지에 나가있는 친구들도 몰려드니 온 동네가 들썩들썩 합니다. 가고 싶은 고향에 가기위한 열차표 예매를 새벽부터 나가서 기다려서 구입한 추억도 갖고 있습니다. 자가용 시대가 도래 하면서 자가용을 타고 가는 사람이 부쩍 늘자 고속도로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고속도로가 대형 주차장을 방불케하여 자동차가 가다 서다를 계속합니다. 대여섯 시간은 기본이고 무려 10시간이나 걸려서 도착하기도 했습니다. 고생담이 명절 뒷날의 추억담이 됩니다. 그러나 이미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자녀들도 결혼하면 고향 찾기가 어려워집니다. 나와 고향이 같은 후배가 올 추석부터는 고향에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부모님 돌아가시고 큰형님 내외분이 고향을 지키고 있는데 이 분들이 연로하시어 찾아오는 동생들을 맞이하기가 힘이 든다는 이유입니다. 게다가 큰형님 직계 가족으로 고향을 찾아오는 아들 딸 손자손녀들만 해도 10여명이나 되는데 동생들 가족까지 다 맞이하기가 벅차다고 큰 형님이 오지 말라고 했다며 이제는 못가겠다고 합니다. 나의 경우도 명절날 내 아들내외와 손자들이 오고 딸 내외와 외손자들도 우리 집으로 옵니다. 이런 식구들을 다 데리고 멀지는 않지만 같은 서울에 사는 형님네 집에 가기는 너무 많아 지금까지는 두세 명 추려서 데리고 갔습니다. 며느리는 곧 친정집에도 가야하는데 내가 큰집에 가서 오지 않으니 친정집에 빨리 가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가 계속됩니다. 우리 집은 명절분위기도 덜 나고 손자손녀들도 할머니 할아버지의 부재를 어리둥절해 합니다. 내가 형님네 집에 차례 지내러 가지 않으면 부모님께 불효를 하는 것 같아 집에 있어도 좌불안석이 될 것 같습니다. 또 내가 가서 형님을 대신해서 어른으로서 조카들에게 훈계해야할 일도 있습니다. 내가 가야 동생 빽(?) 믿고 형님내외분이 어깨를 으쓱할 일도 있습니다. 자식들 하고는 세대차이가 나서 말 못할 이야기를 동시대를 사는 형제끼리는 나누기도 합니다. 가족의 범위를 좁혀서 생각하려는 젊은 세대와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형제와 사촌까지 유지하려는 나이든 세대와의 생각차이가 있습니다. 이번 추석에는 좀 진지하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명절날 한 가족을 이루고 있는 가장이 어떤 방법으로 조상님 차례 모시러 큰집을 찾아야 하는지 고민 좀 해보려 합니다.
- 2016-09-05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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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의 배냇저고리
- 오늘은 모처럼 장롱 속을 뒤집어 정리하기로 했다. 잘 입지 않는 옷이 가득한 옷장은 한숨부터 나온다. 연례행사로 안 입는 옷을 추려내어 재활용 옷 수거함에 넣고는 있지만 그래도 아직 입지 않지만 아까워서 버리지 못한 옷이 한 가득하다. 한복 넣어 둔 서랍을 열어보니 곱게 싼 보자기에 보관한 우리 아들 아기 때 입혔던 옷이 나왔다. 면으로 된 흰색 쌍방울표 러닝과 팬티가 어찌나 조그맣고 인형 옷처럼 예쁜지 미소부터 지어진다. 그러고 보니 필자는 아들 아기 때 입혔던 배냇저고리랑 앙증맞게 작은 첫 신발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워낙 물건 버리기를 잘 못 하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내 옷은 수십 번 처리하며 살았어도 아기 옷 몇 가지는 꼭 갖고 있고 싶었다. 하얀색 융으로 만든 배냇저고리 2장은 우리 아들이 태어났을 때 솜씨 좋으신 시어머님이 직접 재봉질하셔서 만들고 하나씩 맡아 앞섶에 수를 놓았다. 어머님은 파란 색실로 감치셨고 나는 분홍 색실로 사슬뜨기를 해서 모양을 내었다. 사서 입혔던 많은 아기 옷은 아기가 자라면서 없어졌지만, 어머님과 내가 수를 놓아 만든 아기 옷은 버릴 수가 없었다. 가끔 장롱 속 서랍 한쪽에 넣어둔 아기 때 입혔던 옷들을 꺼내보면서 정말 우리 아들이 요렇게 작은 옷을 입을 때도 있었다는 게 신기해서 웃음이 난다. 어쩌면 필자는 손자가 생기면 “네 아빠가 입었던 옷이란다.” 하고 입혀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필자도 이제 할머니가 되어 예쁜 손녀 손자를 갖게 되었다. 앙증맞은 팬티는 남자용이라 할 수 없지만, 필자랑 어머님이 마주 앉아 고운 색실로 수를 놓았던 배냇저고리는 손녀에게 입히고 싶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어른의 도움 없이 모든 일을 참 잘 처리한다. 연애결혼을 한 우리 아들도 결혼할 때 모든 걸 웨딩회사에 맡겼다며 필자에게 어떤 도움도 청하지 않았다. 예전 필자가 결혼할 당시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엄마가 준비해 주셨다. 예물도 그렇고 별로 필요하지 않은 그릇도 그때 유행하던 일본제 노리다케와 아리타로 한 세트씩 사주셔서 지금까지 한 번도 안 쓴 그릇도 있을 정도로 알아서 준비해 주셨는데, 우리 아이들은 오히려 몇 시까지 청담동 어떤 한복집에 가서 옷을 맞추라던가 가봉을 하라고 하는 등 엄마가 신경 쓰는 일 없게 진행했다. 있는 집으로 시집을 갔던 필자는 시댁으로부터 롤렉스시계와 패물로 7세트를 준비했다거나 밍크 목도리 등 당시로써는 많은 예물을 받았기 때문에 필자도 아들 결혼 준비를 그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걱정했는데 예물도 둘이 알아서 골랐다 하고 함에 들어가는 여러 가지 물품도 알아서 준비했다고 해서 참 세상 좋아졌구나! 손뼉을 쳤었다. 그렇게 저희 둘이 알아서 하니 어떤 일도 참견을 할 수가 없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필자는 필자가 수놓은 배냇저고리를 꼭 입히고 싶었다. 며느리에게 넌지시 “이것 봐라, 예쁘지? 네 남편이 아기 때 입었던 거란다.” 하며 보여 주었더니 예쁘다며 하하 웃을 뿐 아기에게 입히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새 옷이 아니라서 그런가? 그래도 옷감도 부드럽고 의미도 있을 것 같은데 입히라고 말하진 못했으며 아기용품은 이미 다 준비해 놓은 것 같았다. 모든 일을 알아서 하는 게 좋았지만 이럴 때 필자 의견을 주장 할 수 없는 게 좀 아쉽긴 하다. 필자는 꺼냈던 아기 옷들을 다시 싸서 장롱 서랍에 간직해 두었다. 가끔씩 꺼내 보면서 우리 아들이 손녀 손자보다 더 작을 때도 있었구나, 그때를 언제까지나 추억해 볼 것이다.
- 2016-09-01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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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동경은] 전업주부 곤도 유키코의 화려한 제2 인생
- 영화감독 꿈꾸던 소녀 음악PD가 되다 인터뷰 이태문 일본 통신원 gounsege@gmail.com 작은 체구에 단단한 관록을 풍기면서 함박웃음으로 맞이해 준 ㈜콘코르디아(CONCORDIA)의 대표 겸 음악 프로듀서 곤도 유키코(近藤由紀子, 67)는 이시카와현(石川縣) 나나오시(七尾市) 출신. 육군비행학교를 나와 육군항공대 조종사로 태평양 전쟁 때 동남아시아와 인도양에서 전투를 치르고, 오키나와에서 특공대로 소집돼 죽음의 출격을 앞둔 상황에서 1945년 8월 15일 패전을 맞이한 부친, 그리고 평범한 주부였던 모친 사이에서 유키코는 1949년 1월에 태어났다. 바로 이른바 일본의 전후 베이비붐 세대를 뜻하는 단카이(團塊) 세대인 셈이다. “철들 무렵 늘 영화관에 있었다. 당시 나나오시에는 오락물 혹은 엔터테인먼트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엄마 세대는 전쟁의 아픈 기억과 상처받은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영화였는데, 엄마를 따라 서양 영화를 비롯해 일본 영화 등 모든 장르의 작품을 봤다. 그러다가 혼자서 ‘할머니를 찾으러 왔다’며 영화관에 들어가 작품에 푹 빠져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울러 영화와 관련된 음악도 열심히 들으면서 막연하게나마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키웠다.” 청운의 뜻을 품고 와세다 대학으로 영화감독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더 큰 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되고자 유키코는 도쿄(東京)의 와세다(早稻田) 대학 제1 문학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막 올라온 소녀의 눈에는 모든 게 신기하고 낯설기만 했다. 이웃사촌처럼 터놓고 지냈던 나나오시의 생활과는 완전히 다른 별세계(別世界)에 크고 작은 문화충격도 받았지만 영화 때문에 싹튼 꿈을 위해 뭐든지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노력했다. “아는 친지도 없고 인맥도 없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기로 처음부터 하나씩 쌓아 나가야 했다. 신기하게도 주위 분들이 많이 도와 주셨다. 시골에서 올라온 순진한 소녀가 열심히 뭔가를 잡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예쁘게 봐 준 것 같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TV방송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는데, 학생 신분으로 일본 엔카(演歌)계의 최고봉인 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거물급 여배우 나카무라 타마오(中村玉緖) 등의 도우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직접 옆에서 지켜보면서 영화계에 대한 동경심도 더욱 강해졌지만 한편으로는 남성 중심의 폐쇄적인 영화계 풍토에서는 여성의 입지가 정말 좁다는 현실도 깨닫게 됐다고 한다. 대학 나와 첫 직장은 ‘이와나미 홀’ 유키코는 대학 졸업 후 프랑스에서 영화를 배운 다카노 에츠코(高野悅子, 1929년생. 영화운동가, 영화 프로듀서, 방송작가 및 연출가 등)가 운영하는 ‘이와나미(岩波) 홀’에 입사한다. 당시 이와나미 홀은 232석의 작은 극장이었지만,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을 비롯해 유명 사진가 등 당대를 대표하는 문화 예술인들이 드나드는 사랑방 역할도 했다. “다카노는 ‘마음’과 ‘신념’으로 일했다. 진짜는 언젠가 반드시 세상의 빛을 받으며, 평가받을 것이라는 진지한 자세를 그때 배웠고, 이것이 나의 출발점이 됐다.” 이와나미 홀에서 2년간 근무 후 그녀는 일을 포기한다. 결혼으로 두 아이가 생겼으며, 무엇을 하든 하나에만 집중해 모든 힘을 기울이는 그녀는 망설임 없이 육아를 선택해 엄마의 길을 걷는다. 음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두 아이의 엄마로서 아낌없는 사랑으로 육아를 마친 유키코는 49세 때 아티스트 프로듀서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물론 전업주부로서 살림을 꾸리는 틈틈이 시나리오 작가를 공부하고, 드라마 기획서도 쓰는 등 조금씩 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녀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가코 다카시(加古隆, 1947년생)가 음악을 담당했던 NHK 특별 다큐멘터리 에 감동하여 2000년 스페셜 콘서트를 기획해 도쿄, 오사카(大阪), 가나자와(金澤), 후쿠시마(福島) 등을 돌며 전석 매진의 흥행을 거두었다. 2003년에는 히비야(日比谷) 공원 야외음악당에서 개최한 에도(江戸) 400주년 기념 오프닝 이벤트 등도 꾸미는 등 늦깎이 프로듀서의 열정과 실력이 조금씩 평가받기 시작했다. “20세기 전쟁 때문에 돌아가신 분들의 레퀴엠으로 콘서트를 열어 21세까지 이어지지 못한 그들의 넋을 제대로 위로하는 진혼곡(鎭魂曲)을 들려주고서 21세기 평화와 생명의 시대로 힘차게 나아가자는 뜻을 담으려고 했다. 기획서를 쓰고 2년 동안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뜻을 함께하는 분들을 모았고 스폰서를 찾으려고 동분서주했다. 그 고생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눈물과 박수로 다시 한번 음악의 힘을 느꼈으며, 큰 보람과 함께 정말 값진 보물을 얻은 기분이었다.” 한국과 인연도 깊어 2015년 1월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아 양국의 젊은 성악가 2명이 함께 기념 공연을 펼친 바 있다. ‘한국판 폴 포츠’로 불리는 팝페라 가수 휘진(권휘진)과 일본인 테너 가수 고하시 고헤이(古橋鄕平)가 도쿄 지요다구(千代田区)의 기요이(紀尾井) 홀에서 ‘같이 울리는 순간’이라는 주제로 듀엣으로 화합과 희망의 선율을 선보이는 감동적인 무대를 꾸몄다. 물론 곤도 유키코가 기획한 공연이었다. 그녀는 가수 휘진에 앞서 2004년 9월부터 R&B 남성듀오 ‘소리(SoRi)’, 그리고 2007년 솔로로 전향한 가수 케니(홍기현) 등을 일본에 데뷔시키는 등 꾸준히 실력 있는 한국 아티스트를 찾아내 적극 소개해 왔다. 휘진이 동일본 대지진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음악의 힘으로 미래를 믿는 마음을 심어주기 위해 피해 지역을 수차례 찾아가 자선 콘서트를 펼쳤듯이 케니도 2007년 9월 미얀마 민주화 시위를 취재하다 총에 맞아 사망한 사진기자 나가이 겐지(長井健司)에게 바치는 곡 ‘눈물-세계 어디선가 이 순간’을 발표해 수익금의 일부를 캄보디아 빈민을 돕고 있는 민간단체 등에 기부했다. 부제 ‘흐르는 눈물을 미래의 아이들 빛으로 바꾸기 위해’가 붙은 이 노래는 곤도 유키코가 직접 노랫말을 썼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요즘 세계의 움직임이 정치적으로 위험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위기감이 든다. 일본은 수많은 젊은이의 희생 위에 패전을 맞이했고, 그 뒤를 이어 태어난 우리 단카이 세대는 평화 속에 살아올 수 있었던 걸 감사하면서 계속 평화를 지켜가야 하는 사명이 있다. 두 번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려 미래로 이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이 바로 내가 할 일이고, 한일관계도 마찬가지로 문화 교류를 통해 서로 뜻을 나누고 마음을 함께하는 자리가 계속 이어져야 한다.” 원점에서 소통을 다시 생각 2003년 54세의 나이로 자신의 뜻을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해 음악·예술 기획사 콘코르디아(CONCORDIA)를 설립한 곤도 유키코는 평화와 소통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음악·예술 문화는 평화의 사절이며, 사람들 마음을 비추는 밝은 빛이라고 믿는다. 앞으로도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을 응시하면서 마음에 와 닿는 감동을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다. 음악과 예술을 통해 국경, 민족, 언어의 벽을 뛰어넘어 상호 소통과 연대감으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길 바랄 뿐이다.” 2015년 5월 회사 창업 12주년을 맞이해 프로듀서 이름으로 결혼 전 이름인 후지하시 유키코(藤橋由紀子)를 내걸고 원점에서 다시 활동을 재개할 것을 선언한 그녀는 “신으로부터 목숨을 받아 태어난 이상 죽을 때까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건 인간의 도리이다. 또한 일하면서 만나는 수많은 인연을 통해 교류를 넓혀가면서 그 만남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국경을 넘어 서로 돕고 힘을 합치는 것, 바로 이것이 소통이고 문화의 시작이다”며 시종 웃음을 잃지 않았다.
- 2016-09-0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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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의 맛] ‘황금콩밭’에서 수확한 두부 한 모
- 두부는 꾸밈없는 모양새에 맛도 심심하여 어느 요리에나 잘 어울리고 부담 없이 즐기기 좋다. 흔히 만나는 식재료이지만, 제대로 된 두부 맛집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투박한 두부처럼 편안하고 진실한 맛을 자부하는 두부 전문점 ‘황금콩밭’을 찾아갔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방마다 고가구들 정겹게 느껴져 서울 마포구 아현동 골목에 있는 ‘황금콩밭’은 오직 가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숨은 매력이 가득한 공간이다. 큰길가에 있는 가게가 아니기 때문에 발견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겉으로만 보고는 평범한 식당이라 생각하고 지나치기 일쑤다. 일단 문을 열고 들어서면 양쪽 벽면에 있는 고가구에 눈길이 갈 것이다. 그러나 진짜 매력은 바깥채로 넘어가는 계단에 올라서고부터다. 바깥으로 나서면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돼지머리 조각이 있는 돌 절벽과 그 아래에 있는 가마솥 두 개다. 옛날식 가옥 구조를 그대로 살려 절벽을 ‘ㄷ자’로 감싸고 있는 방들도 정겹게 느껴진다. 방마다 고가구와 그림, 책 등이 세월의 옷을 입고 분위기를 더하고 있다. 돌 절벽 아래에는 자그마한 굴이 있는데, 직접 담근 탁주를 숙성하는 공간으로 쓰인다. 과거 농진청 관련 일을 하며 전국의 ‘정직한 농사꾼’들을 두루 알게 된 주인장이 주메뉴로 두부를 내세운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고기를 자주 먹지 않는 대신 두부를 즐겼던 식습관도 영향이 있었고, 어릴 적 할머니께서 두부를 만드시던 추억도 있지만, 가장 특별했던 것은 윤태현이라는 그의 이름 ‘태(太)’자가 ‘클 태’가 아닌 ‘콩 태’라는 의미로 쓰인 점이다. 콩처럼 단단한 사람이 되라는 아버지의 뜻이 담긴 이름이다. 그렇게 두부에 뜻을 품고 전국의 두부 맛집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의 두부요리점까지 순례하고 돌아온 그는 100회를 거듭한 연구 끝에 현재의 두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콩·소금·물 단 세 가지만으로 탄생하는 두부는 시간, 온도, 비율 등 만드는 이의 비법과 정성이 그 맛을 결정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2013년 8월 문을 연 이래로 하루도 쉬지 않고 새벽에 일어나 두부를 만드는 그는 여전히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두부 맛에 완벽을 기하고 있다고 했다. 두부에 사용하는 콩과 소금뿐만 아니라 요리에 쓰이는 각종 채소와 고기, 고춧가루 등도 모두 출처가 분명한 국내산 재료만을 엄선해 맛을 내며 단골에게 신뢰를 쌓아가고 있다. 새벽 6시께 만들기 시작하는 두부는 오전 11시부터 손님상에 놓인다. 매일 제조하는 두부이지만 가장 맛이 좋을 때 먹으려면 가능한 한 이른 시간에 찾아갈 것을 추천한다. 국내산 재료들로 양념해 담는 김치와 각종 밑반찬도 날마다 준비한다. 고소하고 담백한 두부 본연의 맛을 느끼려면 생두부(1만원)나 두부전(1만2000원), 젓갈을 넣어 맑게 끓인 두부젓국(1만8000원)을 맛보는 게 좋다. 제주산 무항생제 돼지로 만든 보쌈(3만4000원)도 이곳만의 별미인데, 소금에만 살짝 찍어 먹어도 누린내 없이 담백하게 즐길 수 있다. 소백산 청정지역에서 자란 한우를 작게 썰어 조리한 한우바싹불고기(2만5000원)와 매콤한 두부조림(2만원)을 함께 먹으면 다양한 맛과 식감이 어우러져 두 메뉴를 동시에 주문해 먹는 단골이 많다. 다양한 두부요리가 있지만, 무엇보다 아무런 조리과정을 거치지 않은 생두부를 먼저 맛볼 것을 권한다. 처음 한 입은 간장이나 김치 등을 얹지 말고 순수한 두부 본연의 맛을 즐기는 게 좋다. 그것만으로도 입안에서 부드럽게 씹히는 식감과 함께 콩이 지니고 있던 단단한 영양이 진하게 느낄 수 있다. 보통 두부요리 전문점에 가면 콩비지를 서비스로 나눠주곤 하는데, 이곳에서는 그런 광경을 볼 수 없다. 오로지 두부를 만드는 데 최대한의 영양분을 빼내고,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은 콩비지는 아쉬움 없이 버리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대개 콩비지를 활용해 음식을 만드는 곳은 화학조미료를 넣어 맛을 내게 되는데,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함이라고 한다. 주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굴레방로 3 *지하철 5호선 애오개역에서 도보 5분, 2호선 아현역에서 도보 10분 거리. 인근 유료 주차장 이용. 운영시간 11:30~22:00 문의 02-313-2952
- 2016-08-30 1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