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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도식 화투치기
- 화투라 하면 그리 좋은 이미지가 떠오르진 않는다.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음습한 곳에서 후줄근한 사내들이 모여앉아 화투패를 잡고 서로의 눈치를 보거나 슬쩍 사기 치다가 들켜 싸움이 일어나는 등 부정적인 모습이 대부분이다. 도박의 성격을 띤 화투는 그렇겠지만, 경로당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여앉아 재미로 화투를 치는 모습은 소소한 즐거움일 것 같고 명절이나 가족이 모였을 때 놀이로 하는 화투는 또 다른 느낌으로 화기애애하고 풍성한 즐거움이 연상되기도 한다. 들은 풍월로 화투의 종류에 여러 가지가 있다는데 필자가 알고 있는 건 민화투라는 것이다. 아버지 계실 때부터 엄마와 우리 딸, 사위가 모이면 화투를 쳤다. 아버지는 같이 어울리지는 않으시고 항상 시끌벅적 노는 우리 옆에서 온화하게 웃고 계셨다. 그렇다고 우리 가족이 도박처럼 화투를 한 것은 아니다. 점당 100원으로 많이 잃거나 따도 5.000원을 넘지 않았다. 화투가 치매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들은 후부터 우리 가족은 엄마와 화투를 치기 시작했으며 우리가 했던 건 민화투이다. 화투방법으로 민화투와 고스톱 두 가지를 알고 있는데 머리를 무척 잘 굴려야 하는 고스톱은 우리 초짜 화투 꾼에겐 너무 어려운 종류였다. 껍질이라 불리는 피가 많아야 좋은 거고 뒤집어서 같은 패가 나오면 못 가져오는 등 너무나 복잡해서 우리는 민화투만 쳤다. 피가 많아야 좋은 고스톱과 달리 끗수가 높은 광이나 알맹이를 먹어야 좋고 홍단, 청단, 초단은 30포인트를 주어야 하며 비약 풍약 초약은 20씩 주어야 한다. 똥 네 장을 다 가져오면 40씩을 받을 수 있어 가장 인기가 있다. 광을 4장 따면 40을 받고 광 5장 모두를 획득하면 50을 받는다. 운이 좋으면 광 다섯 장이 모두 필자 수중에 들어와 엄청 크게 이기는 날도 있었고 엄마나 동생, 제부가 광을 획득해 포인트를 주고 나면 필자는 빈털터리가 되는 운 나쁜 날도 있었다. 기본 점수가 두 명이 칠 땐 120이 본이고 세 명이 치면 80이 본이 된다. 자기의 본 보다 넘은 끗수를 세어 점당 100원을 받을 수 있다. 비교적 간단한 룰이므로 즐겁게 칠 수 있는 화투방법이다. 그래도 화투를 하는 동안 각자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상대의 의중이 무엇인지 간파하는 등 고도의 머리 굴리기를 해야 하니 아마 치매에 좋은 놀이라는 게 맞는 말일 듯하다. 참 이상한 점은 친선으로 시작했지만, 화투를 치다가 너무 안 맞고 점수를 잃게 되면 화가 끓어오른다는 것이다. 화투를 쳐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다는 말도 있다. 필자도 그리 좋은 성격은 아닌지 필자가 먹을 패를 상대편에서 채 가거나 계속 몇 판을 내리 지다 보면 화가 났다. 그걸 감추지 못하고 신경질도 부렸으니 참 수양이 부족하다는 걸 끝나고야 느끼게 되어 머쓱하고 부끄러웠다. 그까짓 거 많이 잃어봐야 5.000원 미만인데 왜 그리 화가 나는지 돈 문제가 아니라 경쟁에서 졌다는 게 싫었던 것 같다. 또 어떤 날은 이상하게 패가 잘 붙어 좀 크게 이길 때도 있었다. 그러면 엄마는 정말 기분 나빠하셨다. 그 후로 필자는 엄마의 기분전환을 위해 화투를 치는 것이니 엄마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일부러 좋은 패가 있어도 적당히 다른 것을 내서 점수를 줄였다. 그래서 엄마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 그게 마음이 편하고 즐거웠다. 한때 졌다고 화를 냈던 일이 무척 창피하고 무안하다. 아버지가 하늘나라에 가신 이후로 우리 가족은 화투에 손대지 않고 있었는데 엄마가 우리 집 옆으로 이사 오신 얼마 전부터 다시 화투를 하게 되었다. 화투 하는 동안 정신을 쏟으니 잡생각이 없어져 좋다는 엄마를 위해 하루 한 번씩 찾아가 화투패를 돌리고 있다. 필자가 잘 되는 날은 대부분 눈치채지 못하게 져주는 방법을 쓰고 있고 그런 걸 알지 못하는 엄마는 오늘은 화투가 잘된다며 기분 좋아해서 소기의 목적 달성이다. 필자만 보면 화투 치자며 붙잡으니 그것도 효도의 한 방법이라는 생각에 열심히 상대해 드린다. 이렇게 쉬운 효도방법도 있으니 참 다행이라는 생각에 오늘도 담요를 깔고 화투판을 벌인다.
- 2017-02-16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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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생의 위문편지
- 군대 복무시절 초등학생이 보낸 위문엽서 한 장이 마음에 들어 호주머니에 고이 간직하였다. 필자가 군대에서 복무한 시절은 월남 전쟁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전사자와 부상자가 다수 발생한 가슴 아픈 때였다. 월남전 소식이 주요 뉴스가 매일 등장하고 온 국민이 군가를 부르면서 국군장병을 위로하였다. 6월에는 전 국민이 위문품을 모았고, 학생들은 위문편지를 단체로 군인에게 보내곤 하였다. 현충일이 한참 지난 후에 위문엽서가 한 다발 부대에 배달되었다. 고등학생 엽서는 상급부대로, 중학생 것은 중급 부대로 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던 시절이었다. 초등학생들의 사진엽서가 배당되었다. 내용은 단체 받아쓰기 수준으로 읽을 만한 것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행정업무를 담당한 필자는 무더기 속에서 눈에 띄는 엽서 한 장을 고르고, 나머지는 부대원에게 나누어 주었다. 아무도 초등학생의 엽서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당시 유행하였던 펜팔도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이 연필로 또박또박 쓴 엽서였다. 칠판에 적어준대로 쓰지 않고 성의껏 재미있는 이야기를 썼었다. 절반으로 접어서 하복 상의 호주머니에 넣은 채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몇 달이 지나서 하복을 정돈할 가을이 왔다. 관물정돈하려고 상의를 정리하는데 호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종이뭉치가 손에 잡혔다. 펼쳐보니 연필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있는, 여름에 받았던 위문엽서였다. 막내 동생 같은 초등학교 4학년생에게 답장을 썼다. 기대를 하지도 않았지만 답장도 오지 않았다. 완전히 잊고 해가 바뀌었다. 새해가 되자 발신자 주소도 이름도 없는 그림엽서가 한 장 날아왔다. 여자의 글씨체이고 내용은 자작시나 수필처럼 느껴졌으나 도통 누구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답장할 방법도 없어 갑갑하게 느끼고 초등 4년생에게 편지하였으나 대답이 없었다. 한참 후에 이름이 있는 엽서가 오고, 또 시간이 지나서 주소가 있는 답장이 왔다. 비로소 초등학생의 언니라는 사실을 알고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하였다. 꼬맹이는 학교로 보냈던 답장을 뜯어보지도 않고 한 구석에 방치하였다. 큼직한 글씨가 마음에 들어 동생 대신 답장을 썼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편지쓰기에 온 정신이 빠져들었다. 예쁜 글씨에 맞추려고 글자를 그렸다. 글 수준에 뒤지지 않으려고 썼다 지우기를 되풀이 하였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늘어갔다. 그가 ‘국군의 방송’에 필자를 위하여 신청한 희망곡이 방송을 탔다. TV커녕 변변한 라디오도 없어 방송청취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고참병의 트란지스타 라디오로 휴식시간에 국군의 방송을 듣는 것이 제일 큰 즐거움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그때는 방송의 내용보다 정말 나오느냐가 중요한 관심사였다. 저녁 6시 귀한 휴식시간도 잊은 채 부대원이 주위에 빙 둘러 앉았다. “백외섭 상병에게 보내는 희망곡입니다.” 아나운서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부대 내무반이 발칵 뒤집혔다.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다. 분위기에 어울리는 갓 데뷔한 정미조의 감미로운 노래였다고 기억한다. 자기 일처럼 좋아하면서 함성을 질렀다. “멋있다”면서 손뼉을 쳐주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느새 달랑 한 장 엽서가 두툼한 봉투편지로 바뀌었다. 사진을 교환하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를 주고받았다. 전지에 글을 가득 써서 소포처럼 보내기도 하였다. 가슴 설레는 즐거움이 있었다. 군대 생활하는데 활력소가 되었다. 주고받았던 많은 편지는 ‘가보’로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제대 후 첫 만남을 가졌다. 꿈같은 세월이 많이 흘렀다. 아들ㆍ딸 가족과 쌍둥이 손녀ㆍ손자와 외손자를 거느린 할아버지ㆍ할머니가 되어 곱게 산다. 앞만 보고 달리는 기관차처럼 부지런히 살았던 사회에서 은퇴하고 재능기부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아내는 시인으로 활동한다. 세 손주들의 얼굴만 쳐다봐도 입이 귀에 붙는다.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즐겁게 산다. 앞으로 긴 여정을 더 보람차게 살 것이다.
- 2017-02-03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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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부천 글쓰기 모임
- 어느 날 나이가 들고 보니 살아온 삶에 대해 쓰고 싶어졌다. 책상 앞에 앉았다. 펜을 들었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종이에 적어볼까? 하지만 손에 들려진 펜은 곡선을 그리다 갈 길 몰라 방황한다. ‘그것참, 글 쓰는 거 생각보다 쉽지 않네!’ 하던 사람들이 모여 글쓰기에 도전했다. 생활의 활력이 생기더니 내가 변하고 함께하는 동료들이 성장하는 감동 스토리도 하루하루 글로 쌓여갔다. 이웃들의 정이 잔잔하게 이어지는 ‘부천 글쓰기 모임’에 다녀왔다.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원미동으로 향했다. 마치 유니버설스튜디오나 방송사 드라마 세트장 방문만큼이나 기대됐다. 양귀자의 소설 의 배경이 된 이곳에서 글 쓰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부천시 원미 2동 주민자치센터에서는 매주 목요일 오전 11시 반. ‘글쓰기 모임’ 강좌가 열린다. 강좌가 이어져온 지도 어언 6년. 수필집도 5권이나 출간했다. 등단한 회원, 부천 지역신문 시민기자가 된 회원, 이 강좌에서 공부한 것이 바탕이 돼 뒤늦게 대학 공부를 하는 회원도 생겨났다. 글쓰기를 통해 다양한 길을 찾고 발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보다 빛나는 모임으로 성장했다. 부천시 글쓰기 모임은 부천시 평생학습센터 특화 프로그램으로 선정돼 지원을 받는 강좌 중 하나다. 원미동 글쓰기 모임 외 시(市)의 지원을 받는 대부분의 강좌는 몸을 움직이고, 발산하는 활동 프로그램. 글쓰기 모임을 6년간 이끌고 있는 박창수(52) 작가는 이 모임이 꽤나 희귀하다고 설명한다. 글쓰기가 어렵다는 생각 때문에 일반인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데 6년 동안 모임이 이어져오는 것은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라고 덧붙였다. 올해는 19명의 회원이 글쓰기 모임의 문을 활짝 열었다. 노년의 글쓰기는 힐링이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등단보다는 자신이 뭘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의 답으로 글쓰기를 선택했다. 고민 끝에 문학에 도전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한 문장 한 문장 써내는 데 의미를 둔다. 박창수 작가는 글쓰기 모임의 기본 바탕은 ‘힐링’이라며 방점을 찍는다. “글쓰기는 힐링 단계라고 생각해요. 자기 자신이 경험했던 것을 글로 쓰는 연습을 하면서 풀어나가요. 그다음이 문학으로 넘어가는 과정이죠. 우리 수강생들 중에는 사실 상처받으신 분들도 많아요. 다 큰 자녀가 죽었다든가, 시어머니와의 갈등 등 정말 다양해요. 그런데 이곳에서 치유하고 가슴을 여는 것이죠.” 글쓰기를 하고 50세가 넘어서야 대학 공부에 도전한 회원도 여섯 명이나 된다. 박창수 작가는 글쓰기 모임 회원 개개인의 수필집 발간을 염두에 두고 있다. 등단보다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박창수 작가는 “열심히 글을 쓰고 또 부쩍 글쓰기 능력이 늘고 있기에 가능하다고 본다”며 “제대로 된 방법으로 회원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을 낼 수 있도록 도와드릴 것”이라고 말했다. ☞mini interview 류인록(부천글쓰기모임회장·71) 글쓰기로 새로운 삶을 선물받다 이제 글 쓴 지 5년 됐습니다. 살면서 타자기 한번 못 만져봤습니다. 62세가 돼서야 노인복지관에서 컴퓨터를 처음 접했습니다. 독수리 타법 면한 지는 오래됐어요. 그리고 포토샵(사진편집 프로그램)과 파워포인트도 배웠어요.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어오면 포토샵 스위시로 사진들을 꾸밉니다. 사별하고 저 혼자 산 지 꽤 됐지만 이렇게 살다 보니까 세상 지루한 줄 몰라요. 지금은 우리 원미마을신문 기자로 활동해요. 글쓰기 교실도 다니고, 주병률 시인에게 시를 배우러 다닙니다. 취미생활이 또 하나 있어요. 여행을 다니는 겁니다. 작년에 홍도에 다녀왔고, 제주도, 안동 이육사 문학관, 영월에도 다녀왔어요.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글감이 나오더라고요. 기행문 쓰는 게 좋아요. 제 입장에서 쓰기가 좀 쉽더라고요. 그것도 갔다 와서 일주일 안에 써야지 지나가면 금세 잊어버려요.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제가 원래 운동신경이 안 좋아서 다른 건 별 흥미가 없었어요. 글쓰기를 선택했고 버틸 만했어요. 첫 글을 쓰고는 정말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6년 전 먼저 간 마누라에 대한 글이었거든요. 그 글이 실린 책은 우리 마누라 납골당에 넣어두었어요.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몇 편이라도 더 써서 수필집도 내고 싶고, 시집도 내고 싶어요. 시도 쓰는데 현재 68편을 썼어요. 시집도 하나 내고 싶습니다. 이양순(요양보호사·61) 올 가을에 제 이름으로 된 수필집이 나옵니다 글은 나랑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워낙 기록하는 것 자체를 싫어했거든요. 그런데 2005년도에 요양보호사가 된 뒤 만나게 된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보면서 글을 쓰게 됐습니다. 너무 가슴이 아픈 거예요. 한 요양병원에 입원한 분이셨는데, 치매임에도 불구하고 아픈 기억은 고스란히 안고 계셨어요. 제가 그 일에 대해 당시 글을 써놓았어요.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수요집회를 TV로 접하다 제가 쓴 글이 생각나서 라디오 방송에 냈어요. 그런데 그게 방송으로 나오더라고요. 2013년도였어요. 방송에 채택된 뒤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글 쓰는 거 행복합니다. 제 재능에도 놀라고 기억력은 한계가 있는데 글로 기록해놓으면 안 잃어버리니까 좋고요. 요즘 요양원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글감이 좀 많거든요. 아직 미흡해서 걱정입니다. 가을쯤 제 이름으로 된 수필집이 나온다고 하는데 고민됩니다. 물론 글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영광이지요. 부끄럽기도 하지만 기대도 됩니다.
- 2017-02-03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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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잡히고 해외여행을 떠나라니요
- 가슴 떨릴 때 세계여행을 떠나야지 늙어서 다리 떨릴 때 여행 가면 사서 개고생이라고 어느 장년모임에서 젊은 강사가 말한다. 돈이 있어야 세계여행을 다녀올 텐데 무슨 돈으로 여행을 가라는 말이냐는 청중들의 질문에 강사는 답변을 준비한 듯 꼭 집어서 집을 잡히고 그 돈으로 여행을 가라고 한다. 주택 역모기지론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강사는 신바람이 나서 자식이 부모를 모시는 시대는 지나갔다, 집을 자식에게 물려줄 생각 하지 말고 신나게 폼 나게 다 쓰고 한 푼도 자식에게 줄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한다. 한발 더 나아가 셀프부양 시대라며 자신의 몸은 스스로 돌봐야지 자식이 나를 부양해줄 것이라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한다. 유튜브에서 인기가 있는 어느 스님은 고부간의 갈등이나 부모 자식 간의 트러블을 예방하기 위해서 자식이 20세가 지나면 부모 자식 간 정을 끊고 서로 간섭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동물들의 세계를 봐도 다 큰 자식을 끼고 사는 동물은 없다고 한다. 자식들이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님을 자주 찾아보지 못하고 전화도 제대로 하지 않는 세태에 이런 달콤한 강의는 자식들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부모 세대에는 찾아오지 않는 자식을 탓하기에 앞서 변화된 시대를 탓하고 자식들을 억지 이해하게 만든다. 심지어는 우리 세대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지막 세대이며 자식에게는 버림받는 첫 세대라고 자학적으로 말한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탓에 모 대학에서 대학생들을 상대로 부모를 누가 모셔야 하느냐는 설문조사를 했는데 무려 70%가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젊어서 국가에 열심히 세금을 납부했으니 늙어서는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자식을 열심히 키워준 것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사자가 다 큰 자식 사자를 돌보는 일은 없다, 젊은 자식 개가 늙은 어미 개에게 먹이를 갖다 주는 일도 없다는 등 짐승의 행태를 사람에게 비유해 부모 자식 간에도 남남처럼 서로 간섭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홍보하고 사회 분위기를 조장하는 모든 행위에 서글픔을 느낀다. 사람은 동물이지만 짐승은 아니다. 남녀가 성년이 되어 결혼하고 자식들이 태어나고 재롱떨며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이 살아가는 즐거움이다. 짐승이 자식에게 먹이를 주는 본능과는 또 다른 이성이 사람에게는 있어 만물의 영장이라 한다. 옛날부터 세상에서 보기 좋은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마른 논에 물들어가는 것과 자식 입에 밥 넘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자식을 위해 하는 모든 행위는 부모의 즐거움이다. 여기에 대한 보답으로 늙은 부모를 모시는 것은 수천 년 동안 해온 인류역사다. 이것이 사람과 짐승과 다른 점이다. 자식이 스무 살이 넘었다고 쫓아낸 후 나 몰라라 하고 해외여행 다니면 부모 마음이 편할까. 부모는 개천에서 뒹구는데 자식인 나만 잘살면 행복할까. 부모 자식 간은 한 몸과 같다. 오른팔이 아픈데 왼팔이 희희낙락할 수 없다. 부모와 자식 사이를 동물에 빗대어 억지로 떼어놓고 행복 운운하는 것에는 수긍할 수 없다. 행복의 최소 단위는 가족이고 가족이 행복해야 내가 행복하다. 가족을 모아주는 정책을 개발하고 할머니 할아버지를 포함한 가족의 개념을 해체하지 않고 함께 살게 하는 묘수를 찾아야 한다. 핵가족화가 고착화되다 보니 가족의 개념도 희미해져간다. 초등학생이 함께 사는 강아지는 가족이라 하고 따로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가족이 아니라고 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내가 번 돈 내가 다 쓰고 죽는다고 신나게 쓰다가 돈이 떨어지는 날 죽지 않으면 어찌하는가. 인명은 재천이라고 했다. 점쟁이도 아닌데 죽는 날을 어찌 안단 말인가. 나는 해외여행보다 일하며 돈 버는 것이 좋다. 누군가 그렇게 일만 하다가 죽을 것이냐고 물어보면 일하다 죽는 것이 해외여행하다 죽는 것보다 낫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여행은 절대 안 하고 자린고비처럼 돈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해외여행을 갈 기회가 있으면 즐거운 마음으로 가겠지만 집을 저당 잡혀서까지 해외여행 갈 마음은 없다. 내 입에 고기반찬 들어가는 즐거움보다 손자 입에 사탕 하나 물려주는 것이 할아버지의 기쁨이다. 이제는 농경사회도 아니고 직장 때문에 핵가족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노골적으로 유명 강사들이 핵가족을 찬양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대가족 단위로 함께 사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득임은 자명하다. 지금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무식하지도 않고 위생관념도 투철하기 때문에 손주들의 양육 면에서도 함께 사는 것이 도움이 된다. 맞벌이 부부가 대세인 요즘, 아이들을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아 아이 돌보는 양육자가 바뀌고 있다. 미안한 부모는 돈으로 아이들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 어느 초등학생이 생일파티라며 4만원짜리 뷔페에 친구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부모가 아이들을 직접 관리하지 못하니까 혹 나쁜 길로 빠질까봐 이런저런 생각을 못하게 여러 학원을 투어하도록 교육 프로그램도 짠다. 아이는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인격형성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정부는 대가족제도의 장점을 홍보해야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영어선생, 수학선생을 하면 일거양득이다. 대가족으로 함께 사는 지혜를 정책으로 반영 보급하도록 정부는 앞장서야 할 것이다.
- 2017-02-01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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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용기
- 필자에게는 연년생으로 성별이 같은 아들 둘이 있다. 두 아이는 여친도 한 해 시차를 두고 생기더니 결혼도 한 해 시차로 한다. 배우자와의 나이도 한 해씩 연하이다. 그러다보니 가정의 모든 일들이 장남, 차남이란 연령별, 서열이 아예 없다. 아들들이 결혼하고부터 며느리들 주도로 필자 생일을 치룬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며느리들 간에는 생각이 같을 확률은 드물다. 해마다 생일이 오면 큰 며느리는 분위기 있고 고급스러운 식당에서 조금 화려한 디너를 갖자는 생각이다. 전망이 그럴싸한 레스토랑을 미리 예약한다. 특별한 꽃꽂이도 하고 생일케이크도 특별하다고 이름 난 집에서 먹기 아까울 정도의 고운 장식을 한 것으로 선택한다. 그러다보니 짧은 시간 즐기는 것에 대비하여 경비가 크다. 생일을 맞이한 필자에게 돌아올 선물에 투자 할 돈은 적다. 작은 며느리가 한 해 늦게 결혼했다고 처음에는 그냥 따라주더니 어느 해부터 이 생일축하 파티를 바꾸자는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간단하게 일반식당에서 밥은 먹고 남는 경비를 합하여 어머니께 현금을 드리면 어머니가 유용하게 쓰실 수 있지 않느냐란 의견이다. 동서에게 말하면 기분 상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동서에게 말하기 전에 필자더러 선택하라고 귀띔한다. 둘째 며느리 얘기를 듣는 순간 알뜰함이 기특하고 실용적으로 쓸 수 있겠다고 느꼈다. 한편 은근한 섭섭함이랄까 아쉬움도 있다. 필자는 물론이고 우리 세대 서민이라면 알뜰함이 경제적이다 못해 나를 위해서는 삶의 기본적인 것 외에 심지어는 문화비마저도 지출하지 못하는 인색함이 많지 않은가. 나를 위하여 호화롭거나 사치스런 소비에는 익숙치 않다. 내일을 대비하여 닥칠지도 모르는 어려움이 불안으로 엄습해오기 때문이다. 이 작은 불안을 물리칠 수 있었던 힘은 자녀들이 베푸는 효심이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명분이다. 그 마저도 엄마답지 못한 치기였나 싶고 호사에 대한 동경이 드러났나 싶어 부끄럽기도 하다. 일단 큰며느리에게 작은 아이의 아이디어를 말했다. 큰며느리는 단연코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늘 있는 일도 아니고 검소하게 평생을 살았는데 더 이상 경제적이고 실용적일 이유가 무엇이냐는 대답이다. 그보다 나를 정신 들게 한 것은 손자들에게 고급식당에서의 테이블매너를 가르쳐 줄 기회도 되고 아이들이 할머니와 함께 즐기는 시간의 고급스러움이 좋은 추억도 된다는 것이다. 그 경비로 가족들과 즐기는 것 외에 더 행복한 시간을 만들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어온다. 큰며느리 의견을 받아들였다. 씁쓸함은 필자 자신이다. 엄마의 품위를 지키고 싶어하는 명분 찾기에 급급한 모습이 한심하다. 손자교육 운운 하는 말은 하면서 필자도 이제는 좀 고급스런 소비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었다. 필자는 늘 버리고 싶은 내가 있다. 좋아하기 때문에, 하고 싶기 때문에 하면서도 나중에 보면 자신에게 당당함이 없었다는 것이다. 친구들 앞에서는 늘 하는 말이면서도 자식들에게는 그 모습을 보여줄 용기가 없었다.
- 2017-01-31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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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의 맛] 조미료 無 김치찜, 김치 본연의 맛을 품다
- 지난해 담가두었던 김장 김치가 맞춤하게 익어가는 때다. 잘 익은 김치는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식재료가 된다. 새콤한 맛이 살짝 도는 포기김치에 두툼한 생고기를 넣고 푹 쪄낸 김치찜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는 요리다. 인공조미료를 넣지 않고 믿을 수 있는 재료와 김치만으로 맛을 내는 김치찜 맛집 ‘더 김칫독’을 찾아갔다. 모던한 분위기에서 즐기는 김치찜의 깊은 맛 김치찜은 김치찌개, 된장찌개처럼 부담 없이 즐겨 먹는 음식이기 때문에 꼭 전문점이 아니더라도 차림표에 올리는 가게가 많다. 간혹 전문으로 하는 맛집을 찾아가 보면 대개 오래된 식당이라 정겨움은 더할 수 있지만, 깔끔하다는 인상을 느끼기는 어렵다. 경기도 일산 킨텍스(KINTEX) 인근에 자리 잡은 ‘더 김칫독’은 소박하면서도 모던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곳이다. 더 김칫독의 뚜껑을 연 지는 이제 3년 차이지만, 그 맛만큼은 시골 할머니의 손맛처럼 깊고 진하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더 김칫독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장독대가 옹기종기 모여 맞이한다. 곳곳에 뒤주나 도자기 소품 등이 현대식 인테리어와 어우러져 편안한 분위기를 낸다. 더 김칫독의 김치찜은 100일간 숙성한 김치를 사용하고 국물이 넉넉하다는 점이 특징이다. 묵은지를 사용해 자박하게 조리하는 김치찜과 비교했을 때, 한눈에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묵은지를 쓰게 되면 신맛과 짠맛이 강하기 때문에 물에 여러 번 헹구거나 설탕을 많이 첨가해 자극적인 맛을 줄이게 된다. 충청도식으로 절인 이곳 김치는 평창 고랭지 배추에 양념을 적게 넣어 짠맛이 덜하고, 100일 동안만 숙성하기 때문에 신맛도 강하지 않다. 아삭한 식감이 남아 있는 김치에 8년 숙성한 오미자 효소와 설탕을 넣지 않고 자연 발효시킨 감식초, 우리 콩으로 빚어 만든 된장·간장, 국내산 멸치·꽃새우·다시마 등으로 간을 맞춘다. 설탕을 비롯한 인공조미료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자부심으로 차별화를 뒀다. 여기에 제주산 돼지고기(삼겹·전지·등갈비)가 들어간다. 처음부터 김치와 고기를 넣고 한꺼번에 끓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재료를 따로 삶고 손님상에 내기 전 육수와 함께 부어서 내놓는다. 육수를 넉넉하게 넣고 서서히 끓여가며 먹는데, 초반에는 깔끔하고 시원한 국물 맛이 나고 육수가 졸아들수록 깊고 진한 맛을 느낄 수 있다. 가게에서 직접 들기름에 구운 김 반찬이나 계란말이, 두부부침 등을 곁들여도 좋고 떡, 라면, 만두 등 사리를 넣어도 된다. 단골 사이에서 김치찜(1인분 1만원) 못지않은 인기를 자랑하는 메뉴가 있다. 바로 갓김치찜(1인분 1만2000원)이다. 포기김치와 마찬가지로 100일 동안 숙성한 전남 여수 갓김치가 들어가 독특한 풍미를 자아낸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삶은 우거지를 넣는다는 것인데, 보들보들하게 익은 우거지에서 구수한 맛이 우러나 국물 맛이 더욱 깊다. 김치찜을 주문하면 밑반찬과 함께 쌈 채소가 나온다. 두툼하게 잘라 넣은 우수한 품질의 제주산 돼지고기를 김치와 곁들여 먹기도 하지만 쌈을 싸서 먹으면 색다르게 즐길 수 있다. 맛 좋은 한식에는 밥맛 또한 중요하다. 국내산 햅쌀과 흑미를 사용해 조금씩 여러 번 나누어 밥을 지어 최대한 갓 지은 밥맛을 선사하고자 노력한다는 주인장이다. 김치찜을 끓이는 냄비도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전골냄비가 아니라 한국 전통의 방짜유기를 사용한다. 녹이 슬지 않게 닦고 관리하는 것이 번거롭지만, 그만큼 음식 맛을 좋게 하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다고. 김치찜의 쿰쿰한 냄새가 옷에 배지 않도록 옷장을 따로 마련한 주인장의 세심한 배려도 돋보인다. 주소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호수로 838번길 8-4 문의 02-334-6856 (매일 10:30~23:00) 점심시간에 가면 돼지고기김치찌개를 비롯해 참치김치찌개, 꽁치김치찌개 등의 찌개류를 맛볼 수 있고, 저녁에는 숙성한 제주산 오겹살, 목살, 앞다릿살 구이류를 즐길 수 있다.
- 2017-01-25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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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영화를 보면서 느낀 문화적 차이
- 하루 한 편 정도의 외국 영화를 보면서 서양 문화와 우리 문화의 차이를 많이 느낀다. 어느 것이 옳거나 좋다기보다 그냥 다르다는 차이일 뿐이다. 가장 차이가 나는 것이 서양에서는 서로 만나면 이름부터 묻는다. 기차나 버스 비행기 등으로 먼 길 여행 떠나는데 옆 사람과의 통성명은 그렇다 쳐도 잠깐 스치거나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일 때도 그렇다. 우리는 호칭이 많다. ‘선생님’부터 ‘학생’, ‘아가씨’, ‘아저씨’, ‘아줌마’. ‘어르신’, ‘할머니’ 등 굳이 이름을 알 필요 없이 호칭을 쓰면 된다. 음식점에 가면 가끔 ‘이모’라거나 ‘사장님’이라고도 한다. ‘어이!’하고 부르거나 ‘여기요’, ‘저기요’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가까운 사람들끼리는 ‘자기’도 있다. 지방마다 어감이 좀 다르지만, ‘당신’도 있다. 드물기는 하지만 상대방을 ‘귀하’가 어쩌고 하는 사람도 있다. 직장에서는 직급이 있어 ‘과장님’, ‘부장님’ 하고 쓰면 된다. 아랫사람이라도 ‘주임’, ‘대리’를 성 다음에 붙여 쓰면 된다. 우리는 호칭에 민감한 편이다. 그래서 호칭을 잘 못 했다가는 싸움이 붙기 쉽다. 예를 들면 ‘당신’이 그렇다. 가까운 사람에게는 정감 있는 호칭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어디다 대고 당신이야?“하며 싸움으로 발전하기 쉽다. 미국에서는 그냥 'You'인데 '너', '자네' 도 조심스럽게 써야 한다. 그래서 우리 호칭이 배우기 어렵다는 것이다. 커뮤니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닉네임이라는 것이 있어 편하다. 닉네임 뒤에 ‘님’자만 붙이면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실명보다 기억하기 좋아 편한 점이 더 많다. 그래서 닉네임은 신경 써서 잘 지어야 한다. 내가 처음 인터넷에서 ‘캉가루’로 닉네임을 올렸다가 오프라인에서 만났을 때 ‘캉가루님’이라고 부르는 바람에 당황스러웠었다. 그래서 닉네임을 ‘캉캉으로 바꿨다. 처음에는 계속 ’캉가루‘가 입에 배어 바뀐 닉네임으로 정착하는데 오래 걸렸다. 서양 사람들은 우리처럼 호칭을 쓰기보다는 이름을 부른다. 대통령도 ‘미스터’라고 한다. 사장도 이름을 그대로 부른다. 우리보다 아래 위 차이를 두지 않는다. 가끔 호칭으로 속어를 쓰기도 하는데 대부분 질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쓴다. 군대에서나 호칭으로 계급을 쓴다. 다음으로 자주 보는 것이 이성 간의 키스이다. 입술만 마주치는 가벼운 키스는 인사의 한 방식이니 그렇다 치자. 우리나라도 요즘은 젊은 사람들이 공공장소에서도 그렇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은 그보다 좀 가깝다 싶으면 딥 키스를 한다. 입을 크게 벌리고 적극적으로 혀를 섞는다. 남들이 있든 말든 장소도 안 가린다. 우리 문화는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딥 키스를 하기에는 안 맞는 것 같다. 김치가 기본적으로 놓이고 다른 음식들도 마늘이 들어가는 음식이 많다. 대부분 냄새가 많이 나는 것들이고 식후 바로 양치질을 하기도 어렵다. 그에 비하여 서양 음식은 입안에 음식 냄새가 지독하지 않은 것들이라 그럴 수 있는지 모른다. 영화는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기회이다. 같은 사람인데도 문화가 다르다. 그나마 말을 알아들으면 내용을 알 수 있으니 다행한 일이다. 영화를 보면 굳이 외국에 가보지 않아도 그들은 어떻게 사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 2017-01-23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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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 수학 숙제를 풀면서
- 필자는 아들집에 가면 석 달 가량 머문다. 거리가 멀고 경비도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한 번 방문의 길이는 대체로 그렇게 공식화 되어버렸다 며느리는 퇴근하여 집에 오면 저녁준비와 아이들 숙제봐줘야하는 두 가지 일을 급하게 해야 한다. 어린아이는 일찍 재워야 다음 날 일어나기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손자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을 때다 1학년 수학이야 봐줄만할테지 아무리 커리큘럼이 달라졌다고 하여도, 이런 마음으로 필자는 손자의 숙제를 봐주고 며느리가 저녁 준비를 하였다, 두 자리 수를 합하는 덧셈의 간단한 문제다 가령 12에다 34를 더하는데 여러 방법이 있다 먼저 10과 30을 더하고 2와4를 더하는 필자가 알고 있는 방법, 20과 40을 더하여 8과 6을 빼는 방법, 12에다 30을 더하고 4를 더하는 방법이 있다. 간단하고 낮은 숫자의 합산에 이리 복잡해야 할 목적은 어디 있을까를 생각해봤다 계산기와 컴퓨터 기능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기초부터 기계 산출의 원리가 적용되는 거구나 싶기도 했다. 초등 1학년은 워낙 기초단계라 필자가 금방 계산법은 터득하였는데 당황하게 된 것은 문제가 숫자합산의 절대수가 답이 아니라 답을 찾는 길이 물음이란 것이다 예를 들어 46이란 수가 답이 되지를 않고 46을 산출하는 방법이 요구하는 항목에 따른 문제다. 물음에서 요구하는 방법과 수가 맞는 것이 정답이다. 차라리 합산의 수는 틀리더라도 문제가 요구하는 방법이 맞으면 정답이다. 숙제를 검사하는데 필자는 마지막 답의 숫자가 맞으니 맞는 걸로 알고 잘했다고 칭찬하면서 숙제를 끝냈다. 다음 날 선생은 손자의 숙제에서 틀린 답을 체크하여 보내주었다 필자는 선생이 실수한 거라고 며느리한테 숙제 노트를 보여주었더니 “틀렸잖아요!” 한다. 문제는 산출하는 방법이었다. 학문의 가장 기초인 수학, 수학 중에서도 가장 기초적인 숫자의 가감승제가 시간이 다르다고 그 방법이 다르다니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을 했다 필자는 학창시절 수학에는 두각을 나타내었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초등학교 1학년생의 숙제 봐주는 학습지도도 할 수 없다니 뒷방 할머니 된 기분이라 입맛이 썼다. 문제를 자세히 읽어보고 이해가 되었지만 초장에 이미 바뀌어 버린 교과과정에 겁을 먹어 그 후로는 손자의 숙제는 며느리가 맡았다. 수학도 시류를 따른다는 표현으로 친구들에게 내 경험을 말하며 과학의 빠른 발전을 농으로 삼기도 한다. 필자가 수학을 처음 만났을 때는 수는 기본 가감은 한 자리수에서 철저한 암기였다. 엄마 아빠라고 실존하고 있는 인물을 직접 경험하게 하면서 말을 가르치듯 숟가락을 보여주면서 숟가락이란 말을 가르치듯 셋에다가 둘을 더하면 다섯이 되는 수량을 보여주면서 주입된 산출이 아닌 단순한 인식이었다. 그 인식을 바탕으로 수학이 커져가면서 공식이란 것이 나타났다. 물음마다 맞는 공식을 사용하여 대입한 수는 정확한 답이 나왔다. 합하여지고 빼고 나누어짐으로 발생하는 수가 표현 할 수 있는 많은 수학적 원리의 기초는 없었다. 수학이 바탕이 되는 어마어마한 원리, 지표, 인식과 이해의 세계를 생각하면 수학교육의 변화가 당연하다.
- 2017-01-23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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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할머니의 따뜻했던 마음
- 아침에 눈을 뜨면 먼저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확인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하룻밤 새 참 많은 소식이 날아와 있다. 스마트폰을 쓰기 시작하면서 친구들과의 이메일 주고받기는 줄었지만, 간간이 전해오는 외국에 사는 친구의 메일 안부는 고맙고 반갑다. 필자에게 필요 없는 광고메일을 삭제하면서 그중 반가운 소식을 만난다. ‘따뜻한 하루’ 라는 곳에서 보내주는 글은 그야말로 따뜻한 내용이다. 어떨 땐 눈물이 나도록 감동적이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안타까운 사연도 있다. 읽다 보면 내 마음도 순수해지는 것 같고 세상은 아름다운 일이 많다는 걸 새삼 느끼게 해주기도 하는 고마운 소식 글이다. 오늘 받은 내용을 보고 필자는 딱 우리 친할머니를 떠올렸다. 살림을 꼼꼼하고 알뜰하게 잘하는 엄마가 있었다. 그 엄마가 요즘 들어 시장에 다녀올 때면 누렇게 시든 파를 사 왔다. 매번 시든 파를 사 오는 엄마에게 딸이 왜 그러는지 물었더니 시장 길의 노점상 할머니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취업 때문에 서울로 가고 혼자 농사를 지었는데 요즘 몸이 아파 밭을 돌보지 못했더니 파가 다 시들었더라고 한다. 그래도 그 파를 팔아보려고 나오신 할머니를 엄마는 모른 체할 수 없어 매일 시든 파를 사 오셨다는 이야기로 따뜻한 마음씨의 엄마가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글을 읽으니 옛날 대전 가양동에서 포도밭을 하셨던 친할머니가 생각난다. 가양동은 당시 대전의 변두리였지만 이제는 고속도로가 지나는 곳으로 대전의 요지가 되었다. 자그마한 체구에 조신한 모습이 전형적인 한국 어머니상이셨던 우리 친할머니. 친가는 대전 변두리의 시골집으로 왼편에 나무문이 달린 부엌이 있고 부엌 안엔 방 쪽으로 부뚜막과 커다란 가마솥 밑으로 아궁이가 있어 항상 시뻘건 불길이 타고 있었다. 아궁이 앞에는 풍구라고 하는 동그란 바람 일으키는 도구도 있어 재미로 아궁이를 향해 손잡이를 돌려 바람을 불어넣는 것도 놀이의 하나였다. 부엌 옆에는 디딤돌을 딛고 올라가는 넓지 않은 툇마루가 있고 왼쪽엔 안방, 그 옆엔 건넌방으로 일자 식 농가모습이다. 그 앞으로 수천 평 되는 포도밭이 있어 나이 차가 많지 않은 막내 고모와 친구처럼 포도밭 그늘에서 숨바꼭질도 하고 소꿉놀이도 했던 예쁜 추억이 있다. 포도밭 속은 싱그러운 포도나무 잎사귀로 그늘이 져서 언제나 어두컴컴했다. 막내고모와 같이 탐스러운 포도송이에서 한 알씩 포도 따먹는 재미도 쏠쏠해서 웃음꽃이 그치지 않았다. 그때 할머니가 장에서 사 오시는 사과나 채소는 항상 찌그러지고 못생겨서 이상하게 생각되어 여쭤봤더니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과일이나 채소 파는 사람들이 좋은 모양의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팔 수 있도록 할머니는 일부러 못생기고 안 좋은 과일을 골라 오신다는 것이다. 그땐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고 못난 과일이 먹기 싫어 그런 걸 골라 오신 할머니가 바보 같아 보였다. 가난한 채소장수를 배려하는 마음이었던 걸 후에야 알고 할머니의 깊은 마음에 가슴이 따뜻했다. 필자는 요즘도 시장이나 마트에서 과일을 고를 땐 어디 흠집이라도 없는지, 좀 더 크고 보기 좋은 걸 고르려고 눈에 불을 켠다. 그러다가 가끔은 못난 과일을 사 오셨던 친할머니를 생각하고 미소를 떠올린다. 오늘 읽은 시든 파를 사 온 엄마의 이야기가 그 옛날 아련한 추억과 함께 할머니를 기억하게 해 주어 참으로 고맙다.
- 2017-01-20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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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익숙한 것들과의 작별
- 새해가 되니 한 살을 강제로 먹었다. 별로 먹고 싶지 않았는데 억지로 삼킨듯해 못내 찜찜하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약 먹기 싫어하는 나를 안고 가루약을 숟갈에 손가락으로 개어 입을 벌리고 강제로 입 안에 넣어 주시던 기억이 떠올라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 작년 연말에 보았던 영화 에 나오는 30년 전 과거로 돌아가는 알약이 불현듯 생각났다. 나이를 먹을수록 익숙한 것들이 좋아진다. 자주 가는 음식점에 또 가게 되고, 푸근한 옛 친구가 그립고, 옷도 늘 입던 옷이 좋다. 아니 좋다기보다는 ‘편하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저 편한 옛 습관에 기대는 게 머리를 쉬게 하는 길이니까. 그래서 늙으면 최백호가 부르는 ‘낭만에 대하여’ 같은 노래나 들으며 도라지 위스키 한 잔 앞에 놓고 청승을 떨게 되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 ‘익숙함’이 문제다. ‘익숙하다’는 것은 ‘익었다’는 뜻이고 익으면 ‘굳게’ 되는 것이고 굳으면 곧 ‘죽음’이 아닌가. 마치 강에서 강물과 함께 떠내려가는 물고기는 오직 죽은 물고기이듯이 ‘익숙함’에의 안주는 죽음에 다가가는 길이다. 그런데 우리 몸은 왠지 새로운 것에 잘 적응을 못 한다. 스마트폰 쓰는 법을 배우고도 곧 잊어버리는 것은 ‘익숙하지’ 못해서일까? 지난달 모 신문에 실린 서울대학교 연구부총장인 신희영 박사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신 박사는 의사로서 서울대병원 어린이병원학교장과 통일의학센터 소장을 겸하고 있다. 그는 오랫동안 북한의 어린이 의료 지원 활동을 해오고 있었는데 최근 남북 관계가 꽁꽁 얼어붙어 버리는 바람에 의료협력 사업이 몇 년째 중단되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충격의 이유는 질병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그의 시각 때문이었다. 남과 북은 문화나 언어만 이질화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질병도 그렇게 되었단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미 바이러스 시대로 진입했는데 북은 아직 세균 시대라는 것이다. 이 말은 갑자기 통일이 되었을 때 북쪽 사람들이 바이러스로 엄청나게 죽을 수 있다는 뜻이다. 마치 잉카문명이 천연두로 어이없게 멸망했듯이. 놀라운 것은 그뿐만 아니다. 북한 어린이들은 100% 기생충에 감염되어 있는데 그 덕(?)인지 아토피 같은 자가면역 질환이 없단다. 우리 몸의 면역 기능은 늘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 대비하고 있는데 적이 없어 심심해지면 자신의 몸을 적으로 오인해 공격한다는 것이다. 아이가 균에 노출될까 봐 애지중지 청결하게 관리하는 젊은 엄마들이 새겨들어야 할 정보다. 익숙한 것만 쫓다가는 우리 생각도 자가면역 질환에 걸릴 가능성이 있다. 신 박사처럼 색다른 관점과 시각이 우리 머리에 창의적인 자극을 주고, 기생충 같은 이야기 속에서도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새해는 세월의 탁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죽은 물고기가 아니라 신선한 물줄기를 쫓아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싱싱한 한 마리 잉어가 되고 싶다. 모든 익숙함이여 안녕.
- 2017-01-16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