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에 쉼터 마련한 ‘어부의 꽃’, 닻꽃!

기사입력 2018-10-24 11:15 기사수정 2018-10-24 11:15

[김인철의 야생화] 용담과의 한해 또는 두해살이풀. 학명은 Halenia corniculata (L.) Cornaz.

▲닻꽃(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닻꽃(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가을의 끝 11월입니다. 이제 올해 달력도 마지막 한 장이 남았을 뿐입니다. 20대는 시속 20km로, 50대는 그 두 배가 넘는 50km로 세월이 간다더니, 나이 탓일까? 숨 가쁘게 달려온 2018년 한 해도 어느덧 역사의 저편으로 급속히 기울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화사하게 물들었던 단풍이 흩어지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이즈음이면, 격동의 한 시기가 끝나고 그다음이 시작될 즈음이면 유난히 생각나는 야생화가 있습니다. 7월부터 피기 시작해 가을의 초입이라는 9월까지 고산 풀밭을 지키는 닻꽃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파란 하늘에 뜬 낮달을 향해 항해하는 듯 닻 모양의 꽃을 하늘 높이 매단 닻꽃. 닻을 올렸으니 분명 말달리듯 진군(進軍)하는 분망함이 느껴져야 하는데, 그 반대인 차분함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왜일까. 아마도 하늘에 뜬 그 닻이 먼 길 나서려 막 올려진 게 아니라, 긴 여정 뒤에 찾은 쉼터에 내려질 닻으로 여긴 탓이겠지요.

꽃 모양이 배를 멈춰 세울 때 사용하는 닻을 닮았다 해서 닻꽃이란 이름을 얻었다는데, 실제로 꽃을 보면 누구나 고개를 끄떡일 만큼 실감이 납니다. 식물체의 높이는 10~60cm. 연한 황록색으로 피는 꽃은 화관이 4갈래로 갈라져 아래쪽으로 길이 5~7mm의 원통형 뿔처럼 사방으로 뻗는데, 그게 배를 정박(碇泊)시킬 때 쓰는 갈고리 모양의 닻을 쏙 닮은 것이지요. 학명 중 종소명 ‘코르니쿨라타(corniculata)’도 바로 ‘작은 뿔 모양의’라는 뜻으로 외형을 잘 표현했습니다. 이런 생김새를 반영한 듯 ‘어부의 꽃’이란 꽃말을 갖고 있습니다. 봄철 피는 삼지구엽초도 꽃 모양이 매우 비슷해 닻풀이란 별칭으로 불립니다.

▲닻꽃(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닻꽃(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닻꽃은 그러나 2012년 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으로 지정돼 쭉 보호·관리 대상에 포함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보고 싶다고 해서 누구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야생화는 아닙니다. 7~9월 햇볕이 잘 드는 몇몇 높은 산의 풀밭이나 숲 가장자리에서 꽃을 피우는데, 이는 닻꽃이 북쪽에 고향을 둔 전형적인 북방계 식물임을 말해줍니다. 실제 2015년 7월 중순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에서 발원하는 안가라 강변에서, 그리고 올해 8월 백두산 인근 습지에서 누구의 각별한 관심도 받지 못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저 홀로 피어 있는 닻꽃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동토(凍土)의 시베리아와 백두산이 한반도 북방계 식물의 본향이라는 말을 실감한 셈이지요. 한두해살이인 만큼, 한두 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면 뿌리까지 말라 사라집니다.

어쨌든 독특한 생김새 덕분에 무한한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누구든 처음 보는 순간 ‘아하!’ 하며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묘한 꽃 닻꽃. 높은 산 탁 트인 풀밭에 뿌리를 내린 닻꽃이 ‘천지간 바람 잘 날 없는 땅에서’ 수십 년간 치열하게 살아온 ‘브라보 마이 라이프 세대’에게 깊어가는 가을에 일갈합니다. ‘바쁘게 경쟁하며 앞만 보고 달리던 삶에서 벗어나, 진정 자신을 위한 쉼터를 찾아 정주(定住)하라’고….


Where is it?

▲화악산에 비교적 많은 개체가 자생해 수도권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다.(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화악산에 비교적 많은 개체가 자생해 수도권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다.(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남한의 대표적인 고산인 설악산과 지리산에서도 자란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경기도와 강원도 경계에 있는 화악산(사진)에 비교적 많은 개체가 자생해 수도권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다. 이외 강원도 대암산과 한라산에도 자생하는데, 최근 한라산에서는 그 수가 크게 줄어 아예 사라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서울신문 기자로 29년 일했다. '김인철의 야생화산책(ickim.blog.seoul.co.kr)'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야생화 화첩기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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