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단상

기사입력 2018-12-24 09:59 기사수정 2018-12-24 09:59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볼 수 있는 크리스마스 장식.(박혜경 동년기자)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볼 수 있는 크리스마스 장식.(박혜경 동년기자)

며칠 전부터 아파트 입구 나무에 색색의 꼬마전구가 반짝거리는 장식이 생겼다. 연말이면 부녀회에서 설치하는데, 작은 아파트라 조촐하지만 오가며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크리스마스도 생각나고 이제 올해도 다 지나가고 새해가 다가온다는 걸 실감하게 해 준다.

지금은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또 다음날이 계속된다는 삭막한 생각을 하지만 어릴 땐 왜 그리 크리스마스 시즌이 좋았는지 모르겠다. 공연히 가슴 떨리고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아 기다리며 설렜던 기억이다.

딸만 셋인 우리 집에 크리스마스 전날이면 창문의 빨랫줄에 양말이 세 개 걸렸다. 정이 넘치던 아버지는 작은 양말에 들어가지 않는 선물을 머리맡에 놓아 주시며 “착한 아이인 너희에게 산타할아버지가 다녀갔다”고 웃으셨는데, 나이가 들고나서부턴 산타는 아버지란 사실을 알아채고 흐뭇해했었다. 그래도 두 살씩 터울 지는 동생들에겐 비밀처럼 진짜 산타할아버지가 왔었다고 숨겼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잘 나가지 않던 교회도 열심히 출석했다. 작은 봉투에 담긴 사탕과 과자를 받는 재미도 있었지만, 언니 오빠들 틈에 끼어 늦은 밤까지 집집을 오가며 대문 앞에서 캐럴을 부르기도 했다. 개인주의인 요즘에는 한밤중에 누가 와 대문에서 노래를 부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땐 꽤 여러 집을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른 재미있던 기억이 난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옛 생각을 떠오르게 하는 풍경을 만날 때가 있다. 어릴 적 동네마다 한 번쯤은 보았을 법한 뽑기 장수를 마주쳤을 때다. 작은 국자에 설탕을 녹여 나무젓가락 끝에 소다를 콕 찍어 저어주면 설탕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철판에 뒤집어엎고 누르개로 눌러주면 반반하고 동그란 설탕 과자가 만들어졌다. 거기에 별 모양이나 아령 같은 모양의 틀을 찍어주는데, 그 모양을 부서지지 않게 잘라내면 투명한 설탕 과자를 경품으로 받을 수 있었다. 겨울날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 추운 줄도 모르고 옷핀 끝에 침을 묻혀가며 열심히 모양을 잘라내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대부분 가운데가 부러지거나 망가져서 경품을 타는 건 매우 어려웠다. 이렇게 우연히 만나는 옛 추억의 풍경은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어 좋다.

▲겨울옷을 입은 나무.(박혜경 동년기자)
▲겨울옷을 입은 나무.(박혜경 동년기자)

엊그제 을지로 입구에서 새끼줄로 단단히 겨울옷을 입은 나무를 보았을 때 코끝이 찡해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던 정릉의 마당 넓은 집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경사진 언덕 위에 있던 우리 집은 커다란 잔디밭이 반듯하고 둘레에 라일락 꽃나무와 보랏빛 방울꽃이 주렁주렁 열리는 등나무가 있었다. 철이 되면 아름답게 피어 눈을 즐겁게 해주던 장미꽃 나무도 여러 그루 있었다. 겨울이 되면 아버지는 새끼줄로 장미랑 꽃나무에 겨울 채비 옷을 입혀주었다. 솜씨 좋은 아버지가 열심히 새끼줄을 꼬아 나무에 겨울옷을 입혀주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마음도 따뜻해지는 듯했었다. 꼼꼼하게 감싸서 한겨울 추위도 견딜 수 있었던 꽃나무도 늠름하고 멋지게 보였다. 을지로 입구의 새끼줄 옷을 입은 나무가 그 옛날 마당 넓은 집의 겨울옷 입은 꽃나무와 아버지를 추억하게 해주었다.

한겨울에 느낀 아련한 단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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