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홍콩에서 10여 년간 거주하며 우리나라와 일본을 사업차 자주 방문한다는 ‘동양 전문가’인 캐나다인과 우연히 한·중·일 문화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동양 전문가는 삼국의 문화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듯 의아해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필자가 현대식 대형 건물이 아닌, 동양식 전통 건물에 한·중·일 삼국의 각기 다른 문화 코드가 녹아 있다
1960년대의 일이니 꽤 오래된 기억이다. 여유로운 어느 주말 오후, 뮌헨 거리를 한가로이 지나가는데, 한 미술관 출입구 주변에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필자는 무심코 미술관 벽면을 크게 장식하고 있는 플래카드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1898~1967)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어떤 의사들은 좋은 의료기관의 조건으로 ‘의사가 두 명 이상 근무하는 병원’을 꼽는다. 의료기술은 수시로 변화하고 발전하기 때문에, 서로 상의하고 토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가족이 같은 병원에서 근무한다면 어떨까? 환자를 치료하는 일을 가업으로 선택한 곳이 있다면. 그런 가족을 찾아 만난 이가 치과의사인 유영규(劉永奎·77),
1908년부터 이화여대 개교기념 축제인 ‘이화잔치’의 주요 행사였던 ‘메이퀸 선발대회’는 1960~1970년대 활기를 띠며 연세대, 한양대 등의 대학가와 일부 여자고등학교까지 퍼졌다. 5월 하면 향긋하게 피어오르는 캠퍼스의 추억, 메이퀸 선발대회를 돌아봤다.
자료 제공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역사관·이대학보사, 연세대학교 박물관, 숙명여자대학교
요즘말로
믿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글쓴이는 초등학교 시절, 두 가지 결심을 했다. 하나는 스포츠 기자가 되는 것, 다른 하나는 특정 대학교에 가는 것이었다. 10살을 갓 넘긴 어린아이가 이런 결심을 하게 된 데에는 물론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1960년대 중반, 시골 중에 서도 시골인 강원도 신철원군 갈말면 지포리에 있는 신철원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는 라디오 중계로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 나만의 집을 짓고 살아간다는 것은 중년들에겐 늘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로망이다. 굳이 ‘님과 함께’ 가사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때문에 내 집 짓기에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시선을 사로잡지만, 구체적인 방법론을 얻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만약 직접 집 짓기에 성공한 사람이 세운 학교가 있다면 어떨까? 처음부터 차근차근
1960년대 서울운동장(뒷날 동대문운동장) 야구장에 드나들던 중·장년 야구 팬들은 3루수와 유격수 등 내야수들의 송구를 코끼리가 비스킷을 넙죽넙죽 받아 먹듯 하던 한일은행(우리은행 전신) 1루수를 생생히 기억할 것이다. 그때도 몸무게가 ‘0.1t’을 넘었던, 덩치 큰 이 선수가 뒷날 한국 프로 야구에서 당분간 깨지기 힘든 ‘한국시리즈 V10’을 거두는 지
한국능률협회가 진행하고 있는 인문학 강연 ‘수지향(수요일에 만나는 지혜의 향연)’ 의 리딩멘토로 활동 중인 연세대학교 철학과 김형철(金亨哲·60) 교수를 현장에서 만났다.
그가 이 인문학 프로그램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주최측의 2기 리딩멘토 활동에 대한 요청이 있었기 때문인데, 1기의 리딩멘토가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이었던 만큼 부담도 적지 않았다고 했
근래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라는 새로운 시사용어가 회자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조장하는 표현으로 웃어넘기기보다 거북하게 다가오는 것은 ‘네오 계급론’의 냉소적 내음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같은 동양 문화권인 한중일 삼국의 식탁 중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왜 숟가락을 볼 수 없으며, 왜 우리는 숟가락 없는 식탁을 상
조선 시대에는 “초상화의 시대”(이태호 교수)라고 일컬을 정도로 많은 초상화가 제작됐다. 이는 또한 상대적으로 다른 문화유산에 비해 미술사적으로 훌륭한 초상화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조선 시대의 여러 초상화를 살펴보던 중 우리의 정서와 거리감이 있는 작품이 눈길을 끈다. 바로 조태억(趙泰億, 1675~1728)의 것이다.
좀 더 깊이 알아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