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낙의 그림이야기] ‘빨간 립스틱’을 한 조선통신사

기사입력 2015-12-09 08:57 기사수정 2015-12-09 08:57

조선 시대에는 “초상화의 시대”(이태호 교수)라고 일컬을 정도로 많은 초상화가 제작됐다. 이는 또한 상대적으로 다른 문화유산에 비해 미술사적으로 훌륭한 초상화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조선 시대의 여러 초상화를 살펴보던 중 우리의 정서와 거리감이 있는 작품이 눈길을 끈다. 바로 조태억(趙泰億, 1675~1728)의 것이다.

좀 더 깊이 알아보니 다른 초상화와 달리 이 작품을 그린 화가는 일본인이었다. 조선 후기에 병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지낸 문신 조태억은 1711년(숙종 37년) 정사(正使)로 역사상 최대 규모인 500명으로 이뤄진 조선통신사를 이끌고 일본에 건너갔다. 이때 막부의 어용화가 가노 쓰네노부(狩野常信)가 조태억의 초상화를 그린 것이다. 우리네 초상화에서 복장을 검소하고 절제된 선으로 묘사한 것과 달리 이 작품은 그 윤곽을 부드럽게 처리했다는 점 외에도 모든 초상화의 핵심인 얼굴 묘사에서도 조선의 것과는 완연히 달랐다. 바로 립스틱으로 ‘빨갛게’ 칠한 듯한 입술이 그것이다.(사진 1,2)

일본 화가가 그린 조태억의 초상화와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의 자화상을 비교하면 두 초상화의 다른 점을 선명하게 알 수 있다.(사진 3) 그런데 초상 미술사 시각에서 보면 이러한 차이는 너무도 당연한 귀결(歸結)이다. 일본에는 초상화 제작 지침이라는 게 있다. “인목구비(引目鉤鼻) 기법, 즉 아랫볼이 불룩한 둥근 얼굴에 두꺼운 눈썹, 가늘게 일선으로 그어진 눈, く자형의 코 그리고 조그마한 주점(朱點)을 찍은 입으로 이루어진 안모 묘사법이 구사되어 있다.”[조선미(趙善美)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의 <일본의 천황상> 중에서]

요컨대 상기 지침에 따라 일본 화가가 정사 조태억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얼굴을 하얗게 처리하고 입술을 ‘조그맣고 빨갛게’ 묘사한 것은 당시 일본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의 얼굴처럼 천태만상인 것은 없다는 게 동서고금, 만고의 진리이다. 그럼에도 ‘눈은 이렇게, 코는 요렇게, 볼은 저렇게 그려라’는 초상화 지침이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 초상화에서 흔들림 없이 지켜온 “있는 대로, 보이는 대로 그려라” 하는 ‘지침 없는 지침’과는 사뭇 다르다. 같은 동양 문화권 안에서 이웃하고 있는 일본과 우리가 참으로 다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나아가 미술문화사적 시각에서 볼 때, 일본 사회는 예로부터 역사를 얼마든지 왜곡할 수 있는 문화적 바탕을 갖고 있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씁쓸하기까지 하다.

>>>글 이성낙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피부과 교수, 아주대학교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現),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現), 간송미술재단 이사(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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