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산이란 조각배를 함께 타고 온 당신에게

기사입력 2020-06-29 08:00 기사수정 2020-06-29 08:00

[부치지 못한 편지] 김이정 소설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김이정 소설가가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윤민철 작가)
(윤민철 작가)

별거 아닌 거 같았는데 눈물이 나네. 당신의 전화가 온 것은 마침 의정부지방법원에서 온 채무면책 결정서를 받은 직후였어. 그래,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겠어. 당신은 잠시 아무 말 없다가 긴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했지. 내 덕에 안 해도 좋을 경험 많이 했네. 전화를 끊기 전 당신은 미안하단 말을 그렇게 했어. 그러자

5년 전 전철을 타고 찾아간 의정부지방법원의 법정 안이 떠올랐어. 줄지어 선 사람들이 한 명씩 호명될 때마다 판사 앞에 잠시 서서 확인을 하고 다음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던 신용회생 판결의 날. 자서전 대필 고객을 만나야 해서 입고 간 내 실크 블라우스가 참 무색했지. 언제 5년이나 기다리나 암담했는데 이토록 잠깐일 줄 몰랐어. 하긴 그 지난한 파산의 시작으로부터 올해가 12년째가 됐다는 건 더 놀라운 일이야.

체질에 맞지 않는 사업으로 마지막 숨을 헐떡이다 마침내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진 당신이 파산을 인정한 것은 2008년 가을이었지. 제일 먼저 내 차를 팔았어. 2년 동안 전국의 길들을 달렸던, 생전 처음 내 이름으로 산 그 승용차를 팔기 전날, 나는 파주의 한 절에 가서 눈물의 작별식을 하고 돌아왔어. 사물도 때론 생명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지. 그 후 매일 우편함을 가득 채우던 신용보증기금과 은행 그리고 카드회사의 연체고지서들, 카드 대환론까지 생전 처음 알게 된 일들은 끝도 없었어.

어느 날엔 새벽 2시에 빚쟁이가 벨을 누르기도 했지. 마침 미국발 금융위기 여파로 믿고 있던 집값마저 급락해 경매 직전에야 최저가로 집을 팔고 월세 아파트로 짐을 옮기던 날은 차라리 담담했어. 내 것이 아니었던 거지 뭐, 단념이 쉬웠지. 그러나 거기까지였어. 내게 파산이란 갖고 있던 것을 버리는 것. 그런데 파산을 겪으면서 그것이 얼마나 낭만적인 생각인가를 곧 알게 되었지. 내가 죽기보다 싫어하던, 빚을 질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찾아왔어. 죽을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었어. 나는 고마운 벗들과 형제들이 기꺼이 빌려주는 돈을 받을 수밖에 없었어. 아니 거기까지도 나의 자존감은 겨우 유지할 수 있었지.

그러나 벼랑 끝으로 몰린 당신이 곧 드러날 일들을 감추며 무책임한 거짓말을 할 때 나는 더 이상 자존감 따위를 유지할 수 없었어. 언젠가 친구들을 만나러 가던 종로의 골목길에서 당신에게 전화를 걸어 울며 소리를 질렀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아니 어떻게 인간이 이래? 그날 나는 그 낯선 골목을 오가며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신랄한 저주의 말들을 내뱉었지. 거기까지가 내 한계였던 거야. 인간이 얼마나 더 참혹해질 수 있는 존재인지 그때까지도 난 몰랐던 거야. 아니 어쩌면 당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보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몰라. 당신이 공황장애란 병으로 도피하듯이 나 역시 끊임없이 인간에 대한 신뢰라는, 관념과 추상으로 도망치고 있었던 거야.

딸 고생시키는 사위에 대한 미움을 감추지 못하는 장모와 함께 사는 집이 불편하기 짝이 없던 당신은 고시원의 관짝만 한 방으로 숨어들었고, 그 좁은 방에서 관 뚜껑이 닫히는 것만 같은 공황장애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지. 공황장애로 죽지는 않는대. 그것만 명심해. 공황장애에 시달리다 못한 당신이 전화를 걸어오면 난 인터넷에서 검색한 정보를 근거로 냉정하게 말하곤 했지. 당신의 고통을 헤아리기엔 내 앞에 쌓인 빚과 생활비를 버는 일, 그리고 나이 들어가는 내 몸을 감당하기에도 벅찼으니.

아니 사실은 진작 멈추라던 내 경고를 듣지 않은 당신이 초래한 일이니 당신이 아프고 힘든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어. 당신 몫을 책임져야 한다고 요구한 거지. 혹시 당신이 자살이라도 하면 어쩌나, 친구에게 호소하던 내 마음속엔 사실 이토록 냉정한 계산이 숨어 있었다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어. 적어도 나는 책임론에선 벗어날 수 있는, 상대적 우위에 있었던 거야.

누이가 하는 펜션에 딸린 레스토랑에서 돈가스를 굽겠다며 당신이 남쪽의 바닷가로 떠난 것도 벌써 4년째에 접어들었어. 왜 진작 몸을 써서 살 생각을 안 했는지 몰라. 공기 좋은 그곳에서 당신은 공황장애도 많이 좋아졌다며 나를 안심시키곤 하지. 물론 나이 들어 시작한 노동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지금 당신은 파산 이후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당당해 보여.

그사이 출간된 내 소설에 생각지도 않았던 행운이 찾아오고, 푼돈이라도 벌기 위해 애쓴 덕에 얼마 전엔 남아 있던 빚을 모두 갚았고, 신용회생이란 이름으로 5년간 매달 일정액을 입금하던 프로그램도 모두 끝났어. 그 마지막 허가장을 받은 오늘, 12년에 걸친 파산이 마침내 마무리된 거야. 나도 모르지 않아.

이 정도는 정말 운이 좋은 경우라는 걸. 그사이 우리는 60대에 접어들었고 몸도 몇 군데 고장이 났지만 다행히 생명이 위험한 건 아닌 채 이렇게 사회적 금치산에서도 풀려났으니. 아니 무엇보다 인간이란 더없이 비천하고도 연약하지만 한편으론 놀랍도록 고귀하고 강한 존재라는 걸 온몸으로 깨닫게 되었으니 이만하면 파산의 대가론 제법 값진 걸 얻은 게 아닐까.


김이정 소설가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해 소설집 ‘도둑게’, ‘그 남자의 방’과 장편소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물속의 사막’, ‘유령의 시간’을 출간했다. ‘유령의 시간’으로 제24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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