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낙의 그림이야기]마네의 그림에서 역동하는 시대정신을 읽다

기사입력 2015-10-06 08:48 기사수정 2015-10-06 08:48

글 이성낙 현대미술관회 회장

1950년대 부산 피난 시절, 넉넉하지 않던 방 한쪽 벽면에 서양화 한 점이 걸려 있었다. 지평선 너머 해 저무는 석양에 부부 한 쌍이 하루의 고된 농사를 끝내며 감사 기도를 드리는 장면을 묘사한 평화롭기 그지없는 그림이었다. 그림 속 멀리 있는 성당에서 종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몇 년 후 그 그림이 바로 밀레의 ‘만종’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필자는 비로소 서양화에 눈을 떴다.

자연주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1875)의 대표작 ‘만종(晩鐘, L’Angelus)’(1857~1859)은 우리 모두에게 사랑받는 그림이다. 몇 년 전에는 국내 TV에 밀레의 다른 작품 ‘이삭을 줍는 여인들(Les glaneuses)’(1857)이 공익 광고에 등장하기도 했다. 세 명의 여인이 들녘에서 부지런히 이삭을 줍는 정겨운 모습이 화면을 채웠다. 그런데 조금만 시각을 달리해 이 그림을 보노라면 이삭 줍는 여인들의 애달픈 삶을 느낄 수 있다. 추수를 끝낸 후 땅에 떨어진 이삭까지 주워야 하는 농민들의 고달픈 삶이 그러하다. 또 여인들 뒤쪽에 있는 ‘산더미처럼’ 쌓인 곡식단이 무척이나 대조적이다. 그 옆에서는 사내 몇 명이 한가롭게 잡담하는 모습도 어렴풋이 보인다. 자연주의 화가 밀레의 조용하지만 분명한 현실 비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런 맥락에서 후배 화가이자 인상주의 화풍을 몸으로 이끈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1883)의 작품에서는 작가의 목소리가 훨씬 크게 들려온다. 마네의 작품 ‘풀밭 위의 점심 식사(Le Dejeuner sur I’herbe)’(1863) (사진 1)와 같은 해에 발표한 작품 ‘올랭피아(Olympia)’(1863)는 당시 파리 화단을 뒤흔들어 놓았다.

서양 미술사에서 누드화라는 장르는 결코 새로운 게 아니다. 그럼에도 마네의 두 작품에 파리 사회가 발끈한 것은 야외 소풍을 나온 여인이 벌거벗은 채 스스럼없이 남성들과 함께 있는 모습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뒤이은 작품 ‘올랭피아’에서는 신화나 전설 속 여인이 아니라 매춘부 올랭피아의 벌거벗은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이 파리지앵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러나 미술사적 측면에서 ‘시민 의식의 깨우침’이라는 코드로 살펴보면, 역시 프랑스 혁명(1789)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근 50년 후, 구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는 들녘 길목에서 만난 점잖은 신사가 모자를 벗고 화구(畵具)를 등에 멘 화가 자신에게 인사하는 장면을 그렸다.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Bonjour, Monsieur Courbet)’(1854)라는 제목의 이 작품에서 화가는 자신의 턱수염을 한껏 치켜 올라가게 그리면서 목에 무던히도 힘을 주고 있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반면 인사말을 건네는 신사의 수염은 ‘다소곳하게’ 앞가슴에 붙어 있다(사진 2). 급변하기 시작한 19세기 중엽의 프랑스 사회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그 뒤에 등장한 화가 에두아르 마네는 당시 파리 사회에서 터부시하던 음지의 한 부분을 과감하게 양지로 끌어올리는 역동성을 화폭에 불어넣었고, 우리는 그의 작품 세계에서 한 시대의 혼을 불사른 화가 정신을 되새긴다.

>>>글 이성낙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피부과 교수, 아주대학교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現),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現), 간송미술재단 이사(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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