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오경 중 하나인 <예기(禮記)>의 학기(學記)편은 배우고 익히는 일에 대한 최고의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옥은 쪼고 닦지 않으면 그릇이 되지 않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도리를 모르게 된다”는 말이 여기에 나옵니다. 절차탁마(切磋琢磨)라는 성어와도 관련된 가르침입니다.
학기의 여섯 번째 문단이 제 글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학기에 나오는 대학이 오늘날의 대학교와 같은 의미는 아닙니다. 큰 배움, 제대로 된 공부라는 뜻일 것입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대학의 교육은 철에 따라 바른 학업이 있다. 즉 봄 가을에 예악(禮樂)을 가르치고 여름 겨울에 시서(詩書)를 가르친다. 물러가서 쉴 때에도 반드시 배움을 함께 해야 한다. 한가하게 쉴 때 악기를 연주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소리가 아름답게 될 수 없고, 여러 방면으로 넓게 배우지 않으면 시를 잘 지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갖가지 예복을 입는 법을 익히지 않으면 예절을 잘 행할 수 없는 것이니 그 예능이 흥겹지 않으면 배움이 결코 즐겁게 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말이 이어집니다. “이러한 까닭에 군자는 배운 것을 마음에 간직하고[藏焉] 익히고 실천하며[修焉] 물러가 쉬면서 학예를 익히고[息焉] 놀면서 견문을 넓힌다.[游焉]” 이른바 장수식유(藏修息遊)입니다. 부분적으로 다르게 해석한 글도 있지만, 장수식유는 공부의 네 가지 양태나 방식을 말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날의 학제를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정해진 학기나 제도교육 내에서의 공부란 장과 수에 직결된 일인 것 같습니다. 주어진 교재로 공부하고 선생님이 내준 과제를 해결하는 공부이지요. 학생들은 이를 통해 공부하는 방법을 배우고, 다음 진도와 윗 단계에 적응해 갑니다. 그러나 제도교육에서 졸업했거나 삶을 바꾸어 새로운 공부를 하는 사람들, 시니어들의 공부는 그 뒤의 두 가지, 식과 유에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학생 시절의 공부란 학위 취득이나 입학 취직 등 ‘지식의 증명’을 위한 성적 향상이 그 목표입니다. 누구나 알다시피 교육(敎育)은 가르치는 것과 심신을 기르는 것을 뭉뚱그린 말인데, 우리는 지금 가르치고 배우는 것만 중시하고 심신을 기르는 일은 뒷전으로 젖혀둔 채 돌아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과 저것을 동떨어진 별개의 것으로 보거나 하나에 충실하면 다른 하나는 버릴 수밖에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성적 지상, 서열 중심의 사회를 살아가는 것은 불행하고 힘든 일입니다.
제도교육의 틀과 둘레 안에서 ‘성적공부’를 하는 학생들과 시니어들의 공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더욱이 자기실현 욕구가 크고, 지나온 삶과 배움에 대한 반성과 개선 의지가 강한 데다 새로운 기능과 교양 습득을 희망하는 신중년세대에게는 공부의 의미가 새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역사상 어떤 세대보다 더 이 세대는 그 나이에 아직도 젊고, 그 나이에 여전히 공부를 하고 싶어 합니다. “배우고 때로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논어의 첫 말씀이 시니어들의 즐거움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요즘 시니어들의 공부란 예전의 자신이나 예전 세대의 시니어들과 달리 놀면서 쉬면서 하는 공부, 즉 유(遊)와 식(息)의 공부요 잘 놀고 잘 쉬기 위해서 하는 공부, ‘눈뜬 공부’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차이와 구별을 잘 알아야 공부에 성공할 수 있고 새로운 공부를 통해 삶의 보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시니어의 공부는 기본적으로 지식을 늘리는 것이 아닙니다. 꼭 그래야 좋은 것도 아니며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지식은 하루하루 쌓아가는 것으로 얻어지지만 지혜는 하루하루 덜어내는 것에서 얻어진다고 합니다. 시니어들에게는 즐기면서 쉬면서 하는 공부, 덜어내는 걸 배우는 공부가 필요합니다.
어떤 공부든 쉬지 않고 꾸준하게 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대해(大海)를 향하는 물처럼 날마다 꾸준해야 합니다. 한(漢)나라 양웅(揚雄)이 쓴 <법언(法言)>의 학행(學行) 대목에는 “모든 냇물은 바다를 배워 바다에 이르고, 구릉은 산을 배우지만 산에 이르지 못한다.”[百川學海而至於海 丘陵學山不至於山]는 말이 있습니다. 구릉은 왜 산이 되지 못할까? 움직이고 이동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니어들도 그렇게 쉬지 않고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그런데 시니어 공부의 가장 큰 특징은 남과 공유하는 공부, 배워서 남에게도 주는 공부라는 점입니다. 후배나 제자를 가르치든 동료들과의 사교와 교류에서든 시니어의 공부는 남과 함께 더불어 즐기고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김옥길 전 이화여대 총장이 ‘내 삶의 가락’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축제처럼 젊음이 만개한 이화의 교정에서 내가 배운 가장 커다란 진리의 하나는 배우는 것은 자유에 속하지만 가르치는 것은 무거운 의무에 속한다는 진리다.” 그분은 교육자였으니 이렇게 직설적으로 엄중하게 말했겠지만 교육자가 아닌 누구라도 선배세대는 후배를 이끌고 가르치는 데 소홀하면 안 됩니다.
남을 가르치고 뭔가 일러주는 것은 실상 자기를 가르치는 일입니다. 후기 스토아학파의 철학자 세네카는 “사람은 가르치면서 배운다”고 했습니다. 동양에서 말하는 교학상장(敎學相長)입니다. 남을 가르치는 일은 자기 학업의 반을 차지한다는 ‘효학반(斅學半)’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예기에는 “배운 연후에야 부족함을 알고 가르친 연후에야 어려움을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학문의 어려움을 알면 힘써 공부하게 되고 가르치다 보면 학문의 어려움을 알게 돼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후배세대에 대한 시니어들의 교육은 주입이나 설교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경험을 제시하고 보여주는 정도에 그치는 게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특히 평소 교육직에 종사해온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1919년에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의 역사학자 헨리 브룩스 애덤스(1838~1918)는 “퇴직한 교육자처럼 지루한 사람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자신이 지루한 게 아니라 남들에게 지루한 사람이 된다는 경고인데,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영국 속담에는 “배우기 위해서 살고 살기 위해서 배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받아서 시니어들은 “잘 배우기 위해서 살고, 잘 살기 위해서 배운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삶의 경험과 지식의 절대량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의미와 질적 수준, 품질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는 스승에게서 배우는 곳이다. 스승이 있은 뒤라야 학교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은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한 말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스승은 우리 삶의 도처에 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은 학교에 가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학교가 멀지 않고 학창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학교에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