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철에 생각나는 유명한 문장은 아무래도 고금 제일의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가 아닐까 한다.
중국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인 동진(東晉)시대 영화(永和) 9년(AD 353년) 음력 3월 3일, 당시 최고의 실세 가문인 낭야(琅?) 왕씨(王氏) 가문을 이끌던 우장군(右將軍) 왕희지는, 왕씨 가문과 쌍벽을 이루던 진군(陳郡) 사씨(謝氏)의 우두머리 격인 사안(謝安)및 기타 사족(士族) 등 명사 41인을 회계현(會稽縣: 지금의 절강성 소흥) 난정(蘭亭)에 불러 대규모 연회를 연다.
당시 모임의 형식은 중국의 오래된 전통인 3월 3일에 물가에서 몸을 씻으며 한 해의 재앙을 털어버리는 계사(?事) 형식을 빌린 것이었으나 사실상은 위락적 요소가 강했고 귀족문벌들 간의 결속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면 올해 4월 21일 경에 해당한다.
모임에서는 참가자들이 시를 한 수 이상씩 짓게 되어 있었다. 흐르는 시냇가에 차례대로 줄지어 앉아 술잔을 띄워 보내고 그 잔이 자기 앞에 왔을 때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罰酒) 3말을 마시는 연회를 열었다. 이것이 대대손손 이어지는 소위 ‘유상곡수(流觴曲水)’ 연회의 시초이다. 이 ‘유상곡수’가 신라로 전해져 경주의 포석정(鮑石亭)으로 남아 있다. 일본에 전해진 것이 가고시마(鹿兒島)현 센간엔(仙巖園) 내의 곡수(曲水)이다.
당시 참석한 사람 중 유명 인사였던 왕희지 사안 손작(孫綽)등 26명은 시를 지었고, 나머지 15명은 시를 짓지 못해 벌주를 마셨다. 이날 지은 시들을 모아 철(綴)을 하고, 그 서문(序文)을 왕희지가 썼는데 이것이 바로 중국 사람들이 오늘날 가격을 따질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로 일컫는 천하제일행서(天下第一行書) <난정서>이다. 당(唐)대 하연지(何延之)가 기술한 <난정기(蘭亭記)>를 보면 당시 왕희지는 거나하게 술이 취한 상태에서 잠견지(蠶繭紙)에 서수필(鼠須筆:쥐 수염으로 만든 붓)로 28행 324자를 써, <난정서>를 완성하였다. 술이 깬 후 수십 번을 다시 써도 이에 미치지 못하여 스스로도 “신(神)의 도움이 있었다”고 하였다 한다.
이후, 이 작품은 당(唐)대에 절대 권력자였던 당 태종(太宗)의 손에 들어갔다. 그는 왕희지의 글씨 중에서도 특히나 이 <난정서>를 좋아하여 애지중지하다가 운명(殞命)할 때 <난정서>를 자신과 함께 순장(殉葬)할 것을 명했다.
<난정서>는 소릉(昭陵)에 묻혀버렸고, 이때부터 <난정서>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고 기술하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난정서>는 진본이 아니라, 진본을 보고 유명 서예가들이 자기 나름대로 임서(臨書)한 여러 판본들, 그리고 진본 위에 기름종이를 바른 후 매우 가는 붓으로 세밀하게 그리듯 본을 뜬 모본(摹本)들이다.
수없이 많은 판본 중 가장 원본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받는 것이 북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풍승소(馮承素)의 모본으로, 당 중종(中宗)의 ‘신룡(神龍)’이라는 낙관이 찍혀 있어 신룡본(神龍本)으로도 불린다. 어찌되었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서예작품이 기실 원본이 없다는 사실이 또한 흥미롭다. 유명한 서예작품으로도 알려진 이 글은 문장 자체로도 매우 빼어난 명문이다. 매년 늦봄이면 생각나는 이 글의 일독(一讀)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