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의 영향을 받아 온 중국에서는 사대부가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금기시하였다는 것을 지난호에서 도연명의 ‘한정부’를 예로 설명 드렸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에도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사랑하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경우, 그 슬픔을 표현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아내 를 잃은 애절함을 노래하는 시를 ‘도망시(悼亡詩)’라 부른다. 중국 최 초의 ‘도망시’는 중국 역사상 가장 빼어난 미남으로 꼽히는 서진(西晉)시대 대문장가인 반악(潘岳)이다.
그는 미남에다가 좋은 가문 출신에, 당대 최고의 문장까지 갖춰서, 재모쌍전(才貌雙全)으로 불리었는데, 권문세가였던 서진(西晉)의 외척 양씨(楊氏)집안과 혼인을 하였다. 금실도 좋았지만 하늘이 시 기해서인지 그만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게 되니, 그 애절 한 슬픔을 노래한 시가 바로 ‘도망시’ 3수로서, 그의 대표작으로 꼽 힌다.
그 이후로는 아내를 잃은 슬픔은 이를 본떠서 ‘도망’, 벗을 잃은 슬픔 은 ‘도붕(悼朋)’등으로 불리게 되는데, 지면관계상 반악의 도망시를 소개하는 대신, 도망시라면 빼 놓을 수 없는 다른 글을 하나 대신 소 개하기로 하자. 바로 우리나라가 배출한 최고의 명필인 추사(秋史) 의 도망시이다. ‘배소만처상(配所輓妻喪)’, 즉 '귀양 중에 아내의 상 을 당하여'란 제목이 붙어 있는 이 시에는 다음과 같은 기막힌 얘기 가 숨겨져 있다.
추사는 제주도에 귀양간 지 3년째 되는 해(57세) 섣달 14일, 30여 년 을 동고동락해 오던 부인 이씨(李氏)가, 그 전달인 동짓달 13일에 별 세했다는 부음을 접한다. 금실이 좋았던 추사는 귀양 중에도 자주 부인에게 편지를 썼는데, 알고 보니 자신이 마지막으로 쓴 편지는 부인이 죽은 지 7일 이후에 보냈고, 그 전 편지는 부인이 죽던 날 보 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몇 천리 밖에서, 사랑하던 부인이 중병으로 신고(辛苦) 끝에 숨을 거둔 것도 모르고 편지를 썼다는 것을 생각하 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을 것이다. 추사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절절한 심정을 표현한 시를 지었다.
那將月老訟冥司(나장월노송명사) 어찌하면 저승의 월하(月下)노인에 게 빌어서
來世夫妻易地爲(내세부처역지위) 다음 세상에는 서로가 바꿔 태어나
我死君生千里外(아사군생천리외) 천리 밖에 나 죽고 그대 살아서
使君知我此心悲(사군지아차심비) 이 마음, 이 슬픔을 (그대가) 알게 하 리오.
한편, 벗을 잃은 슬픔을 노래한 ‘도붕시(悼朋詩)’로는 조선 중기의 문인 이었던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선생이 친구인 석주(石洲) 권필(權?)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시가 가장 애절하다.
不恨吾生晩(불한오생만) 내가 오래 살았음이 한스러운 것이 아니라
只恨吾有眼(지한오유안) 다만 내게 눈이 있다는 게 한스러울 뿐이네
無復見斯人(무부견사인) 다시는 (이 눈으로) 이 친구 보지 못하리니
危途涕空?(위도체공산) 험한 인생길, 부질없는 눈물만 흐를 뿐이네.
不恨吾生晩(불한오생만) 내가 오래 살았음이 한스러운 것이 아니라
只恨吾有耳(지한오유이) 다만 내게 귀가 있다는 게 한스러울 뿐이네
萬山風雨時(만산풍우시) 온 산에 비바람 몰아칠 때
聞着詩翁死(문착시옹사) 그 친구 죽었다는 소리 내 귀에 들리니까.